김홍전 목사님,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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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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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0 09:07
별로 유명하지 않다는데 정말 깊은 분들의 자료를 보면 곳곳에 이분 이름이 나옵니다. 인터넷에 소개되는 일반 내용은 읽어봤지만 공회는 어떻게 보십니까?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자료를 찾다가 위키백과에서 박영선 목사님이 김홍전에 대해 소개한 글입니다.
김홍전
그(박영선)는 김홍전 박사를 기독교 역사에서 10대 학자로 인정한다.
바울 이후로 어거스틴, 칼빈 이렇게 꼽아 나가다보면 김홍전 박사라고 한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우습지만,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을 다 제치고 이 분이 낄 정도로 신학세계가 방대하고 웅장한 분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대열에 끼는 분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석학이십니다. 성경에 대한 안목이 보통 넓고 호방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도 안 유명합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글을 쓰실 때 의고체(擬古體)를 사용하셔서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분은 서울역 앞 후암동에 성약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옛날 총신에서 신약학을 가르치시던 최낙재 교수님이 이분에게서 사사하셨습니다. 저는 김홍전 박사의 책들, 특히 구약에 관한 책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뛰어난 언어학 이해, 해박한 역사 지식 , 일관된 신학적 해석 , 이런면에서 이분을 따라올 학자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교를 배우고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이분의 책을 권합니다. 이분의 설교는 흔히 말하는 설교가 아니고, 한 학기 강의를 요약한 것 같은 학문적 응축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라기보다는 구약신학, 아니 성경신학, 이렇게 말해야 할 분위기입니다. 이분은 설교를 통해서 신구약 성경신학을 아주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설교의 한 부분만으로도 한 학기 분량의 강의가 될 것입니다.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신구약 신학을 압축 요약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의를 풀어냅니다. 우리는 이분의 설교 자체를 평할 실력이 되질 않고, 또 평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그냥 받아들여서 배워야 합니다.[12]
김홍전
그(박영선)는 김홍전 박사를 기독교 역사에서 10대 학자로 인정한다.
바울 이후로 어거스틴, 칼빈 이렇게 꼽아 나가다보면 김홍전 박사라고 한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우습지만,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을 다 제치고 이 분이 낄 정도로 신학세계가 방대하고 웅장한 분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대열에 끼는 분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석학이십니다. 성경에 대한 안목이 보통 넓고 호방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도 안 유명합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글을 쓰실 때 의고체(擬古體)를 사용하셔서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분은 서울역 앞 후암동에 성약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옛날 총신에서 신약학을 가르치시던 최낙재 교수님이 이분에게서 사사하셨습니다. 저는 김홍전 박사의 책들, 특히 구약에 관한 책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뛰어난 언어학 이해, 해박한 역사 지식 , 일관된 신학적 해석 , 이런면에서 이분을 따라올 학자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교를 배우고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이분의 책을 권합니다. 이분의 설교는 흔히 말하는 설교가 아니고, 한 학기 강의를 요약한 것 같은 학문적 응축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라기보다는 구약신학, 아니 성경신학, 이렇게 말해야 할 분위기입니다. 이분은 설교를 통해서 신구약 성경신학을 아주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설교의 한 부분만으로도 한 학기 분량의 강의가 될 것입니다.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신구약 신학을 압축 요약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의를 풀어냅니다. 우리는 이분의 설교 자체를 평할 실력이 되질 않고, 또 평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그냥 받아들여서 배워야 합니다.[12]
※ 제가 답변을 할 위치는 아닌데, 신학교때 두분을 좋아했고 나름 두분에 대하여 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답글을 답니다.
집에 김홍전목사님 책 대부분을 가지고 있고 신학교때 김홍전목사님 노선의 교회탐방도 한 번 갔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전목사님 계열의 교회에서 자란 분과 친분도 좀 있습니다.
박영선목사님을 신학교때 참 좋아했습니다.
박영선목사님의 핵심되는 책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고 그분의 구원관 파악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두분 다 장점이 있는데...여기 노선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두분과 두분의 제자들이 3공회 여기 연구소와 연결이 되었더라면 더욱 일취월장 하였을 것인데...그러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두 분다 정통개혁주의에 충실한 분들이며 개혁주의노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 노력한 부분이 보이는데, 정통개혁주의에서 다섯 걸음 먼저 더 나아간 여기노선과 연결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집에 김홍전목사님 책 대부분을 가지고 있고 신학교때 김홍전목사님 노선의 교회탐방도 한 번 갔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전목사님 계열의 교회에서 자란 분과 친분도 좀 있습니다.
박영선목사님을 신학교때 참 좋아했습니다.
박영선목사님의 핵심되는 책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고 그분의 구원관 파악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두분 다 장점이 있는데...여기 노선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두분과 두분의 제자들이 3공회 여기 연구소와 연결이 되었더라면 더욱 일취월장 하였을 것인데...그러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두 분다 정통개혁주의에 충실한 분들이며 개혁주의노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 노력한 부분이 보이는데, 정통개혁주의에서 다섯 걸음 먼저 더 나아간 여기노선과 연결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에 대한 한마디...요즈음 합신이 이상해져 가는데, 이 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두 날개에 대하여 총회 결정을 하는 자리에서 '개혁주의가 기독교보다 더 크면 안 됩니다. 기독교 안에 개혁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벗어났다고 (누군가를) 틀렸다고 몰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총회와 교단을 만드시렵니까. 넓게 열어서 믿음으로 가십시오. 거기엔 명예와 기쁨이 있습니다. 좁고 분명한 길은 공포와 외면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총회의 결의를 무산 시키신 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구설도 있습니다.
(공회의 기억)
1979년까지 공회는 교계에 알려 지지 않았고 소수의 아는 이들은 이단이나 사이비나 괴상하다고만 알았습니다. 1979년 이후 공회는 너무 유명해 져서 여러 우스운 일들이 생겼지만 교계란 원래 그런 곳이니 이해하고 그냥 넘어 갑니다. 하여튼 1979년 이후 공회 이름은 한국 교회에 당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었고 초교파적으로 견학 1순위가 되어 국내의 정상급 교회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교계에서 저희 눈에 띄는 3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 공개적 호평
총신대에서 성경과 설교학으로 가장 권위 있던 박희천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백영희 이름을 소개하고 극찬을 했습니다. 이 곳에 관련 자료가 있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총신대 신학생들에게 백영희를 하도 강조하여 저희가 출간하는 백영희 설교록보다 총신대 앞에 복사집에서 복제품이 더 많이 나간다고 들은 정도였습니다. 합동 교단의 선후배를 막론하고 직접 그런 이야기를 전해 온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이단이니 뭐니 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백영희는 칼빈과 같은 급'이라는 취지로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1950년대부터 우리를 소개했으나 그 분이 총신대 강의를 맡고 나서부터 밖으로 알려졌고 침례교의 피영민 목사님은 박 목사님보다 연배가 적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역시 백영희 이름을 선명하게 소개하고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시는 경우는 많이 듣지만 교계가 모두 알 만한 분들로서는 이 정도입니다.
- 변형적 인용
마치 공회의 상표처럼 되어 있는 것이 기본구원 건설구원 교리인데 단어는 다르게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공회 내용일 수밖에 없어서 늘 들려 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서부교회 방문이 줄을 이었고 직접 설교를 들었던 분들은 서울에 박영선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치며 도서 출간도 많고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1960-1964년 사이에 이 문제로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박윤선을 추종하는 쪽에서 나오는 이런 이야기라면 달리 확인할 것도 없어 마음으로 짐작만 해오고 있습니다. 그 분이 먼저 확인을 하지 않는데 여기서 여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1970년대 중반을 전후 하여 그 설교 내용에 백영희 설교가 확실히 반영된 것이 보였지만 이 곳처럼 아는 사람들은 알고 일반인들은 모르고 그냥 넘어 갔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세상 다른 경로를 통해 서부교회 강단의 설교가 녹음으로 전달이 되는데 처음에는 발송과 수신의 과정에 대공 혐의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장기간 조사를 하다가 교계의 설교 전달일 뿐이라고 판명이 되어 서부교회에 통고를 해왔고 그래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람을 파송하여 직접 녹음을 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런 경우는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 공회 교리의 정리와 전달
백영희의 성경과 교리 체계는 본 연구소가 직접 맡아 진행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생전에는 새로 쏟아지는 설교를 타이핑하고 자료화를 하는 데 급급하여 그 정리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산의 침례교 목회자 모임에서 새신자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 배부를 했는데 정확하게 공회의 성경과 교리 체계였고 표현도 일치했습니다. 비록 양해나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그 것이야 복음의 세계에서는 세상처럼 저작권을 적용하지 않는 법이고 또 그렇게 했다면 인사할 일이었습니다. 다만 공회 내부에서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없다며 목사님의 그 아쉬운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고 그 표정과 당시 말씀을 직접 들은 이 곳으로서는 평생에 유언으로 삼고 오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침례교 외에 서울의 남산 부근, 김치선 목사님의 대신측, 또는 그런 여러 곳에서는 부산보다 더욱 세밀히 체계화가 되어 전해 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사실상 확인하기도 어렵고 또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할 일을 하면 되고 그 분들은 그 분들이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체 출판사를 가지고 교재로 출간하는 신학교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활발하게 또 잘 전한다는 신학교는 이 곳에서 출장 길에 직접 들러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료라고 있을까 했으나 막상 책임자를 만나 보니 저희가 출간하는 설교록을 가지고 인용하고 정리하고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여쭙게 되면 입장이 곤란해 질 분위기여서 얼른 나왔습니다.
1979년까지 공회는 교계에 알려 지지 않았고 소수의 아는 이들은 이단이나 사이비나 괴상하다고만 알았습니다. 1979년 이후 공회는 너무 유명해 져서 여러 우스운 일들이 생겼지만 교계란 원래 그런 곳이니 이해하고 그냥 넘어 갑니다. 하여튼 1979년 이후 공회 이름은 한국 교회에 당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었고 초교파적으로 견학 1순위가 되어 국내의 정상급 교회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교계에서 저희 눈에 띄는 3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 공개적 호평
총신대에서 성경과 설교학으로 가장 권위 있던 박희천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백영희 이름을 소개하고 극찬을 했습니다. 이 곳에 관련 자료가 있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총신대 신학생들에게 백영희를 하도 강조하여 저희가 출간하는 백영희 설교록보다 총신대 앞에 복사집에서 복제품이 더 많이 나간다고 들은 정도였습니다. 합동 교단의 선후배를 막론하고 직접 그런 이야기를 전해 온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이단이니 뭐니 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백영희는 칼빈과 같은 급'이라는 취지로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1950년대부터 우리를 소개했으나 그 분이 총신대 강의를 맡고 나서부터 밖으로 알려졌고 침례교의 피영민 목사님은 박 목사님보다 연배가 적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역시 백영희 이름을 선명하게 소개하고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시는 경우는 많이 듣지만 교계가 모두 알 만한 분들로서는 이 정도입니다.
- 변형적 인용
마치 공회의 상표처럼 되어 있는 것이 기본구원 건설구원 교리인데 단어는 다르게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공회 내용일 수밖에 없어서 늘 들려 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서부교회 방문이 줄을 이었고 직접 설교를 들었던 분들은 서울에 박영선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치며 도서 출간도 많고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1960-1964년 사이에 이 문제로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박윤선을 추종하는 쪽에서 나오는 이런 이야기라면 달리 확인할 것도 없어 마음으로 짐작만 해오고 있습니다. 그 분이 먼저 확인을 하지 않는데 여기서 여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1970년대 중반을 전후 하여 그 설교 내용에 백영희 설교가 확실히 반영된 것이 보였지만 이 곳처럼 아는 사람들은 알고 일반인들은 모르고 그냥 넘어 갔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세상 다른 경로를 통해 서부교회 강단의 설교가 녹음으로 전달이 되는데 처음에는 발송과 수신의 과정에 대공 혐의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장기간 조사를 하다가 교계의 설교 전달일 뿐이라고 판명이 되어 서부교회에 통고를 해왔고 그래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람을 파송하여 직접 녹음을 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런 경우는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 공회 교리의 정리와 전달
백영희의 성경과 교리 체계는 본 연구소가 직접 맡아 진행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생전에는 새로 쏟아지는 설교를 타이핑하고 자료화를 하는 데 급급하여 그 정리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산의 침례교 목회자 모임에서 새신자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 배부를 했는데 정확하게 공회의 성경과 교리 체계였고 표현도 일치했습니다. 비록 양해나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그 것이야 복음의 세계에서는 세상처럼 저작권을 적용하지 않는 법이고 또 그렇게 했다면 인사할 일이었습니다. 다만 공회 내부에서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없다며 목사님의 그 아쉬운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고 그 표정과 당시 말씀을 직접 들은 이 곳으로서는 평생에 유언으로 삼고 오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침례교 외에 서울의 남산 부근, 김치선 목사님의 대신측, 또는 그런 여러 곳에서는 부산보다 더욱 세밀히 체계화가 되어 전해 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사실상 확인하기도 어렵고 또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할 일을 하면 되고 그 분들은 그 분들이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체 출판사를 가지고 교재로 출간하는 신학교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활발하게 또 잘 전한다는 신학교는 이 곳에서 출장 길에 직접 들러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료라고 있을까 했으나 막상 책임자를 만나 보니 저희가 출간하는 설교록을 가지고 인용하고 정리하고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여쭙게 되면 입장이 곤란해 질 분위기여서 얼른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홍전 목사님에 대하여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당시에 자유주의 첨단을 걷는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담당2025-05-21 08:08
New (김홍전 계열)
공회가 직접 접하지는 않았지만 교계적으로 우리가 인정할 만한 분들이 접하고 전해 온 소식으로 보면 한국 교회의 또 한 곳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기준을 좁히면 저희 내부에도 제대로 된 교회가 없다고 자탄을 해야 하고, 저희의 기준을 좀 넓혀 버리면 천주교가 조선 정부와 수만 명이 죽으며 먼저 싸워 준 덕분에 기독교는 선교의 기회를 잘 골라서 별 일 없이 이 나라에 들어 왔으니 수고했다고 덕담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룟 유다에게 주님을 판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며 인사를 할 수 없으니 덕담조차도 사실 조심은 해야 하나, 이단이 아니라면 일단 양면을 두고 평소 살피고 있습니다.
- 김홍전 계열의 내용
김홍전의 다른 이름은 성약교회는 1964년으로 알려져 있고 저희는 그 시기의 직접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에 알려 진 도서는 발표용일 수 있지만 저희가 가진 자료는 이인재 목사님이 그 시기에 직접 필기하며 오간 내용이어서 교계가 아는 자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당시 이인재는 박윤선과 외롭게 하나 되어 있을 때여서 박윤선의 검토나 의견이나 신학적 지도가 겹쳐 졌다고 봅니다.
유니언을 거친 것은 참으로 오해를 받고 지탄을 받고 심지어 정죄를 받을 경력이기는 하나 김홍전의 그 훗날의 기록이나 활동이나 오늘에 이어 가는 그 계통을 보면 원수 속에 뭔가를 조사하러 갔지 그냥 배워 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인물 중에 박형룡을 지목합니다. 지금이야 WCC가 대세니 모두가 자연스럽게 대하지만 박형룡은 미국의 침례교 신학교 출신입니다. 침례교와 장로교는 역사적으로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과 미국의 학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제 기억으로는 그 과정을 비판한 경우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보면 공회처럼 아예 이상하게 또는 이단처럼 비판 받는 극단주의 외에 이런 경력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윗글의 목사님 지적처럼 성약 측에서는 이런 면도 명확히 밝혀 주면 한국 교회에 남 다른 의미를 가진 교회가 교계에 오해를 좀 풀어 줄 수도 있어 보이지만 원래 자기 해명은 하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그렇다면 이해를 합니다. 공회도 오랜 세월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스승이 미국에 그 유서 깊은 유니언을 나온 것이 자랑스러워 비판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성약측 스스로 자신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셈이 될 터인데 저로서는 이왕이면 전자라고 믿고 옹호하고 싶습니다.
- 공회와의 관계
서로 직접 마주한 기억은 없지만 우선 이인재 목사님이 그 곳에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이 곳을 소개하지 않았을 수 없고, 또 김홍전의 가족이 된 분이 공회 제일 핵심 가정 출신이어서 역시 모를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은 역사적 개혁주의의 고수나 전수에 전력하신 분이고, 공회는 교회가 주님의 인도를 늘 따라 가다 보면 과거를 부인하거나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라 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마치 예전과 달리 보일 수도 있으나 최대한 과거를 보수하되 불가피할 때는 개선도 할 수 있고 또 어린 신앙이 자라다 보면 이전에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입장입니다.
(상기 시기의 공회와 주변 인물들)
1959년까지 박윤선 이인재는 백영희와 고신 안에서 함께 했고,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고신이 3명을 제거했고 합동의 총신은 휴전선 너머 평양처럼 여길 때였습니다. 박윤선 이인재는 해방 후부터 그 때까지도 그리고 이후 종신토록 늘 제일 가까왔습니다. 그런 사정이 또 따로 있습니다. 백영희와는 1964년 이후부터 서로 갈 길을 갔다고 할 수 있으나 1960-1964년까지의 기간에 김현봉 백영희 때문에 이병규 이인재 박윤선은 교계에서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공의회 > 공회'라는 의미로 볼 때였습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한국 교회를 장로교의 역사로만 본다는 점, 이 곳을 방문하는 침례교 감리교 등 타 교파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한국 교회에 신신학으로 뭉쳐 진 기장측 한신대 계열은 불교나 통일교 정도로 보고, 통합 교단을 WCC라 하여 사이비나 천주교 취급을 했으니 당시로 보면 사실상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합동측 총신 계열과는 교회는 교회지만 함께 갈 수 있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도저히 함께 가지 못한다거나 그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오고 갈 때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인재 박윤선 백영희 김현봉 이병규 등은 고신은 옳게 시작했으나 곁길로 가버렸고 합동은 역시나 정치꾼들이어서 함께 할 수가 없고, 통합은 교회도 아니라 이런 시각을 가졌는데 모두가 한 가지씩 의미 있는 생명력이 있다 보니 이들이 모두가 또 하나의 건전하고 좋은 단체를 만들 것인가? 당시로는 노회 개념으로 오간 대화가 남아 있습니다. 백 목사님은 고신까지는 가다 보니 그렇게 소속을 뒀지만 다시는 내 발로 소속을 가지다가 그들 싸움에 당사자가 되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사안으로 함께 하고 그렇게 함께 할 만한 사안이 없다면 평소에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교회를 돌아 보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김현봉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원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병규 이인재 박윤선은 한 교회 또는 나 하나로만 나가는 것은 장로교의 사상으로 보나 또 경험으로 봐도 너무 어렵다 너무 심하다 또는 곤란하다 또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등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인재 박윤선은 홀로 갈 수가 없고 또 동지들과 애매하게 단체가 아닌 단체처럼 가기는 곤란해서 합동으로 가게 됩니다. 이병규는 따르는 이들을 모아 장로교 중에 한 교단이 되는 계신측을 시작합니다. 백영희는 혼자 걸어 가다가 백영희에게 배우고 새로 출발하는 이들이 모여 지면 그들과는 한 밥상의 아이들이 자라 가는 과정이니 단체라 할 것도 없이 한 식구임을 피할 수 없으나 이병규처럼 이인재처럼 박윤선 김현봉처럼 각기 자기 신앙과 걸음을 백영희와 별개로 이미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한 단체를 만들게 되면 결국은 사안별로 늘 조정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고신이나 또 하나의 합동 교단을 만들게 되니 이를 피하기 위해 '공회'를 교단 명칭에 올려 놓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목사 안수처럼, 또는 한 교회나 혼자 할 수가 없는 불가피한 복음 운동이 아니면 한 목사는 한 교회에 충성하면 옆을 볼 시간이 없고, 그런 한 사람이 자라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사명을 줄 때 그 때는 교파가 되든 무엇이 되든 순종하는 것이니, 사람이 정치적으로 모여 의논을 해서 무엇을 하려 들면 아무리 선한 동기로 시작해도 그 출발에는 너무 문제가 많아 지고, 한 사람이 주님 모시고 알아서 가다가 피할 수 없이 함께 하게 된 모임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맡겨 놓은 사명이니 그렇게 가다가 타 교단처럼 분쟁이 생긴다 해도 이는 불가피한 또 다른 과제니 해결하며 나간다는 것이 공회의 출발이며 오늘까지 지켜 오는 상황입니다. 공회들 중에서도 이런 원리를 알면 이 곳처럼 운영하게 되어 있으나 세월 속에 자기도 모르게 좀 든든해 보이는 체계? 단체? 조직? 시스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 곳은 훗날 그렇게 될지라도 사람이 앞에 나서서 먼저 구상하지는 않겠다는 중심으로 이렇게 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가 1960년에서 1964년 사이를 적는 방식과 내용 때문에 항상 빼버리는 부분을 적어 봤습니다. 고신과 합동 교단이 박윤선을 오늘도 그렇게 떠받들고 있지만 박윤선의 1960-1964년은 현재 나이 90대들은 알면서 뺐을 것이고, 현재 나이 80대 이후 학자들은 몰라서 뺐을 듯합니다.
New (김홍전 계열)
공회가 직접 접하지는 않았지만 교계적으로 우리가 인정할 만한 분들이 접하고 전해 온 소식으로 보면 한국 교회의 또 한 곳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기준을 좁히면 저희 내부에도 제대로 된 교회가 없다고 자탄을 해야 하고, 저희의 기준을 좀 넓혀 버리면 천주교가 조선 정부와 수만 명이 죽으며 먼저 싸워 준 덕분에 기독교는 선교의 기회를 잘 골라서 별 일 없이 이 나라에 들어 왔으니 수고했다고 덕담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룟 유다에게 주님을 판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며 인사를 할 수 없으니 덕담조차도 사실 조심은 해야 하나, 이단이 아니라면 일단 양면을 두고 평소 살피고 있습니다.
- 김홍전 계열의 내용
김홍전의 다른 이름은 성약교회는 1964년으로 알려져 있고 저희는 그 시기의 직접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에 알려 진 도서는 발표용일 수 있지만 저희가 가진 자료는 이인재 목사님이 그 시기에 직접 필기하며 오간 내용이어서 교계가 아는 자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당시 이인재는 박윤선과 외롭게 하나 되어 있을 때여서 박윤선의 검토나 의견이나 신학적 지도가 겹쳐 졌다고 봅니다.
유니언을 거친 것은 참으로 오해를 받고 지탄을 받고 심지어 정죄를 받을 경력이기는 하나 김홍전의 그 훗날의 기록이나 활동이나 오늘에 이어 가는 그 계통을 보면 원수 속에 뭔가를 조사하러 갔지 그냥 배워 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인물 중에 박형룡을 지목합니다. 지금이야 WCC가 대세니 모두가 자연스럽게 대하지만 박형룡은 미국의 침례교 신학교 출신입니다. 침례교와 장로교는 역사적으로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과 미국의 학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제 기억으로는 그 과정을 비판한 경우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보면 공회처럼 아예 이상하게 또는 이단처럼 비판 받는 극단주의 외에 이런 경력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윗글의 목사님 지적처럼 성약 측에서는 이런 면도 명확히 밝혀 주면 한국 교회에 남 다른 의미를 가진 교회가 교계에 오해를 좀 풀어 줄 수도 있어 보이지만 원래 자기 해명은 하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그렇다면 이해를 합니다. 공회도 오랜 세월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스승이 미국에 그 유서 깊은 유니언을 나온 것이 자랑스러워 비판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성약측 스스로 자신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셈이 될 터인데 저로서는 이왕이면 전자라고 믿고 옹호하고 싶습니다.
- 공회와의 관계
서로 직접 마주한 기억은 없지만 우선 이인재 목사님이 그 곳에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이 곳을 소개하지 않았을 수 없고, 또 김홍전의 가족이 된 분이 공회 제일 핵심 가정 출신이어서 역시 모를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은 역사적 개혁주의의 고수나 전수에 전력하신 분이고, 공회는 교회가 주님의 인도를 늘 따라 가다 보면 과거를 부인하거나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라 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마치 예전과 달리 보일 수도 있으나 최대한 과거를 보수하되 불가피할 때는 개선도 할 수 있고 또 어린 신앙이 자라다 보면 이전에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입장입니다.
(상기 시기의 공회와 주변 인물들)
1959년까지 박윤선 이인재는 백영희와 고신 안에서 함께 했고,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고신이 3명을 제거했고 합동의 총신은 휴전선 너머 평양처럼 여길 때였습니다. 박윤선 이인재는 해방 후부터 그 때까지도 그리고 이후 종신토록 늘 제일 가까왔습니다. 그런 사정이 또 따로 있습니다. 백영희와는 1964년 이후부터 서로 갈 길을 갔다고 할 수 있으나 1960-1964년까지의 기간에 김현봉 백영희 때문에 이병규 이인재 박윤선은 교계에서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공의회 > 공회'라는 의미로 볼 때였습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한국 교회를 장로교의 역사로만 본다는 점, 이 곳을 방문하는 침례교 감리교 등 타 교파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한국 교회에 신신학으로 뭉쳐 진 기장측 한신대 계열은 불교나 통일교 정도로 보고, 통합 교단을 WCC라 하여 사이비나 천주교 취급을 했으니 당시로 보면 사실상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합동측 총신 계열과는 교회는 교회지만 함께 갈 수 있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도저히 함께 가지 못한다거나 그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오고 갈 때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인재 박윤선 백영희 김현봉 이병규 등은 고신은 옳게 시작했으나 곁길로 가버렸고 합동은 역시나 정치꾼들이어서 함께 할 수가 없고, 통합은 교회도 아니라 이런 시각을 가졌는데 모두가 한 가지씩 의미 있는 생명력이 있다 보니 이들이 모두가 또 하나의 건전하고 좋은 단체를 만들 것인가? 당시로는 노회 개념으로 오간 대화가 남아 있습니다. 백 목사님은 고신까지는 가다 보니 그렇게 소속을 뒀지만 다시는 내 발로 소속을 가지다가 그들 싸움에 당사자가 되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사안으로 함께 하고 그렇게 함께 할 만한 사안이 없다면 평소에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교회를 돌아 보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김현봉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원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병규 이인재 박윤선은 한 교회 또는 나 하나로만 나가는 것은 장로교의 사상으로 보나 또 경험으로 봐도 너무 어렵다 너무 심하다 또는 곤란하다 또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등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인재 박윤선은 홀로 갈 수가 없고 또 동지들과 애매하게 단체가 아닌 단체처럼 가기는 곤란해서 합동으로 가게 됩니다. 이병규는 따르는 이들을 모아 장로교 중에 한 교단이 되는 계신측을 시작합니다. 백영희는 혼자 걸어 가다가 백영희에게 배우고 새로 출발하는 이들이 모여 지면 그들과는 한 밥상의 아이들이 자라 가는 과정이니 단체라 할 것도 없이 한 식구임을 피할 수 없으나 이병규처럼 이인재처럼 박윤선 김현봉처럼 각기 자기 신앙과 걸음을 백영희와 별개로 이미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한 단체를 만들게 되면 결국은 사안별로 늘 조정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고신이나 또 하나의 합동 교단을 만들게 되니 이를 피하기 위해 '공회'를 교단 명칭에 올려 놓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목사 안수처럼, 또는 한 교회나 혼자 할 수가 없는 불가피한 복음 운동이 아니면 한 목사는 한 교회에 충성하면 옆을 볼 시간이 없고, 그런 한 사람이 자라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사명을 줄 때 그 때는 교파가 되든 무엇이 되든 순종하는 것이니, 사람이 정치적으로 모여 의논을 해서 무엇을 하려 들면 아무리 선한 동기로 시작해도 그 출발에는 너무 문제가 많아 지고, 한 사람이 주님 모시고 알아서 가다가 피할 수 없이 함께 하게 된 모임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맡겨 놓은 사명이니 그렇게 가다가 타 교단처럼 분쟁이 생긴다 해도 이는 불가피한 또 다른 과제니 해결하며 나간다는 것이 공회의 출발이며 오늘까지 지켜 오는 상황입니다. 공회들 중에서도 이런 원리를 알면 이 곳처럼 운영하게 되어 있으나 세월 속에 자기도 모르게 좀 든든해 보이는 체계? 단체? 조직? 시스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 곳은 훗날 그렇게 될지라도 사람이 앞에 나서서 먼저 구상하지는 않겠다는 중심으로 이렇게 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가 1960년에서 1964년 사이를 적는 방식과 내용 때문에 항상 빼버리는 부분을 적어 봤습니다. 고신과 합동 교단이 박윤선을 오늘도 그렇게 떠받들고 있지만 박윤선의 1960-1964년은 현재 나이 90대들은 알면서 뺐을 것이고, 현재 나이 80대 이후 학자들은 몰라서 뺐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홍전 목사님에 대하여서는 잘 모릅니다. 그 분의 삶의 기록을 보고 말 할 뿐이지요. 생각나는 것은 자유주의 이단 신학자 밑에서 배운 칼 바르트 또한 자유주의 이단 신학자이며,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며 사랑을 전하였다는 슈바이쳐 또한 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어 그 말씀을 실천하여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가 아니면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배운 것을 말하는 것은 일반적이기에 그 분의 학력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Hestorie(역사)와 Geschichte(신화)에 대한 신학적인 담론을 아실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 Hestorie와 Geschichte가 섞여 있는데, Geschichte라 할지라도 내가 진실로 믿으면 나에게는 Hestorie가 된다고 말하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곧 발트주의자인 목사가 강단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고 한 것은 자신은 예수님의 부활이 Geschichte이지만 믿음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으로는 믿지 않지만 믿음으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성도들은 목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믿는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저는 김홍전 목사님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이 혹 칼 바르트와 같지는 않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위대하신 박사 학위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한경직이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라는 곳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신사 참배와 신도 침례 이 분은 무엇이 그리 중하였는지 다른 한국 목사들은 인천 앞바다와 부산 앞바다에서 신도 침례를 받았는데, 이 분께서는 일본에 가셔서 신도 침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추진 기관인 ‘세계종교의회’의 창립 멤버였던 영국의 템플경이 만든 상인 템플상을 받으시고 감격해 하셨습니다. 신도 침례를 받은 것은 배도이며, 이단입니다. 참회하지 않고 예배당이라는 건물을 차지하고 왔는데, 그것이 교회입니까? 김홍전 목사님도 혹 이러한 면이 있지 않나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신도 침례한 분들의 후손인 것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으로는 믿지 않지만' 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으로는 믿지 않지만'으로
잘 안내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저희는 우연히 접하게 된 교계는 이웃으로 알고 지내지만 내부만 알고 살다 보니 외부를 거의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교계의 전반이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목사님처럼 교계 안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고 구별하는 분들이 계시니 반갑고 또 감사하고 또 저희가 모르는 분야를 소개해 주실 때는 학생 입장으로 잘 배우고 있습니다.
박윤선 이인재도 한 때 저희를 이단 절반 정도로 취급을 하셨기 때문에 연락이 끊어 졌는데 1980년대 중반에 두 분이 직접 찾아 오셔서 지난 날들의 입장을 변경했기 때문에 반갑게 재회했습니다. 이인재 박윤선에 대해 비판을 하려 시작하면 한도 없이 많으나 인생 전체를 통해 귀한 분들이니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늘 좋은 분들로 소개해 왔습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쳐다 보기도 어렵도록 위대한 분들입니다.
김홍전은 그냥 교계에 한번씩 나타나는 개혁주의 원론주의자라고만 알아 왔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인재 목사님 등으로 지켜 볼 기회가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가 몰랐던 부분까지 말씀해 주셨으니 다음에는 김홍전을 접하게 될 때 저희가 알던 것과 이 번에 알게 된 것을 겹쳐서 보겠습니다.
저희는 우연히 접하게 된 교계는 이웃으로 알고 지내지만 내부만 알고 살다 보니 외부를 거의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교계의 전반이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목사님처럼 교계 안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고 구별하는 분들이 계시니 반갑고 또 감사하고 또 저희가 모르는 분야를 소개해 주실 때는 학생 입장으로 잘 배우고 있습니다.
박윤선 이인재도 한 때 저희를 이단 절반 정도로 취급을 하셨기 때문에 연락이 끊어 졌는데 1980년대 중반에 두 분이 직접 찾아 오셔서 지난 날들의 입장을 변경했기 때문에 반갑게 재회했습니다. 이인재 박윤선에 대해 비판을 하려 시작하면 한도 없이 많으나 인생 전체를 통해 귀한 분들이니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늘 좋은 분들로 소개해 왔습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쳐다 보기도 어렵도록 위대한 분들입니다.
김홍전은 그냥 교계에 한번씩 나타나는 개혁주의 원론주의자라고만 알아 왔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인재 목사님 등으로 지켜 볼 기회가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가 몰랐던 부분까지 말씀해 주셨으니 다음에는 김홍전을 접하게 될 때 저희가 알던 것과 이 번에 알게 된 것을 겹쳐서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거에 이인재목사님이 서부교회 강단에 서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각기 기준에 따른 판단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당시 그 목사님을 설교자로 세울 적엔 그 어떤 상응된 이유나 근거가 분명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하게 됩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손꼽는 주역입니다. 해방 후 고신의 출발 주역이었습니다. 활동 지역이 겹치며 같은 출옥 성도인 박인순 전도사님을 통해 백영희를 소개 받았고 두 분은 교통이 참 어렵던 해방 직후에 부산에서 경남 거창군의 개명 마을까지 자주 오가며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공회 1세대 교인들께는 공회 1세대 지도자 정도로 친근합니다.
고신의 최고 지도부에서는 주남선 목사님이 백영희 스승으로 앞에서 이끌고 모든 오해나 공격을 다 막아 주셨고 옆에서는 아득한 선배였던 이 목사님이 백영희의 충실한 동역자나 심지어 추종자처럼 따르며 고신에서 백영희 입지를 높였습니다. 참 감사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은 1951년에 일찍 가셨고 이 목사님은 천성적으로 호인이고 사람이 좋아서 진리 문제로 꼭 부딪히지 않으면 사랑으로 품고 가는 분인데 백영희는 일반적으로 별로 따질 일 같지 않아도 평소 면도칼처럼 만사를 구별하며 살았습니다.
고신은 1959년 경 신학적으로는 박윤선을, 고신 현장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백영희를, 그리고 출옥 성도의 명성에서는 이인재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3 명은 고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각자의 길을 갑니다. 고신에서 제거 되었다는 면에서는 세 분이 하나처럼 보이나 내면을 보면 정통 개혁주의에 충실한 학자와 성경 하나만으로 목회 현장에 목숨을 걸고 만사 치고 나가던 목사님, 그리고 양쪽을 아우르던 이인재 목사님은 이미 그리 오래 갈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1959년 고신에서 배제가 되자 목사님은 평소 성경을 읽으며 너무나 확실했던 깨달음을 고신 안에서 여러 시비에 또 시비가 더해질까 해서 발표를 미룬 것이 여럿인데 차례로 이제 마음껏 발표를 하게 되었고 그 것이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로 인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는 것 등을 중심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박 목사님을 만나면 '틀렸다 하기는 그런데, 그렇다고 개혁주의 전통에는 없는 이야기'라며 이상하게 생각했고, 목사님을 만나면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공회 목회자로 함께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양쪽을 오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공회는 1960년에 '제1회 산집회'라는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집회를 시작했고 목사님은 공회 범위의 목회자들에게 두루 설교할 기회를 제공하며 주의 뜻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총공회 산집회의 초기 강사 중 한 분이었고 공회의 주력 교회인 대구 동성로교회 담임이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총공회 발족의 초기 기둥이었고 집회의 설교 강사였으며 또한 서부교회 강단에도 자주 서셨고 몇 되지 않으나 전국의 공회 교인들에게는 충실하고 핵심적인 공회 목회자였던 이인재 목사님은 한종희라는 분의 왜곡과 비판 때문에 목사님과 결국 나뉘게 됩니다. 1975년에 이단의 정체라는 책을 출판한 분으로 즉각 회수하고 사과는 했지만 소리 없이 손 닿는 곳곳을 다니며 '백영희는 얼마나 잘 믿는지, 죄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라는 취지를 전했습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이미 목사님과 직접 오래 동안 동지로 함께 했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에 흔들리면 자기 책임인데 문제는 박윤선이 세계 신학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고 박윤선이 전통의 교리에서 들어 본 적이 없어 허용할 수 없다는 말에 흔들립니다.
이후 두 분은 앞서고 뒷서며 미국으로 건너 갔고 오랜 기간 미국에서 생활하시다가 70대가 되어서야 백영희의 소식을 다시 언론을 통해 접합니다. 언론에서 서부교회를 극찬하고 나서는데 일반인들은 언론의 과장 소개에 현혹이 되지만 박윤선 이인재는 목사님을 잘 알기 때문에 기사 속에 들어 있는 백영희의 보배로움을 제대로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찾아 오셨고 목사님은 그런 경우 과거를 묻지 않고 교계 기준으로 너무 소중한 분이기 때문에 강단에 모셨습니다. 이인재뿐은 아닙니다. 그런데 1960년대 초까지 함께 할 때의 남겨진 설교 기록을 보면 백영희 이인재 박윤선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주경적 설교에 충실한 분들이었는데 30여 년만에 다시 강단에 세우고 들어 본 말씀은 윗글에서 느낌을 말씀한 것처럼 모든 공회 교인들이 너무 의아했습니다. 백영희 = 이인재 대충 이렇게 생각했는데 설교, 말씀, 교훈의 차원은 너무 컸습니다.
2009년 연구소의 직원은 필라델피아의 이인재 목사님 댁을 방문했고 당시도 문상문 사모님은 건강했으며 기억력이 특별하여 1950년대 일을 어제 일처럼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설명한 내용을 더욱 실감있게 확인을 해 주셨으나 1980년대 중반 이인재 목사님이 서부교회 강단에서 집회를 인도하셨다는 사실만은 극구 부인을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론을 두고 서로 나뉘었고 그 문제는 이단 시비까지 나간 일인데 이인재 목사님이 그런 문제 있는 강단에 섰을 리가 없다 했습니다. 연구부는 이 한 마디로 이인재 목사님이 공회에서 멀어 졌던 가장 큰 이유는 사모님의 입장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대단했다. 누구든 한번 들으면 빠져 든다'는 등의 여러 말씀도 다른 길을 걸으신 분께 전해 들으니 더 실감이 있었습니다. 연구소 직원이 방문을 직접 한다고 하자 한종희 목사님은 박윤선 이인재 두 분의 사모님들과 삼각 통화를 통해 연구소 부장이 오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니 이런 저런 대비를 말씀하셨고 방문하는 곳마다 대놓고 느끼게 하셨으나, 이 곳은 한종희 목사님께 직접 하고 싶은 말씀을 일방적으로 다 하시라 하고 녹취를 그대로 정리하여 그 분의 자서전으로 출간해 드렸고, 정리와 수정과 최종 출간까지 매단계별로 일일이 전부 직접 검토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분이 별도로 부친을 소개하는 책을 적을 때 연구소의 한종희 자서전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연락까지 해 주셨습니다.
밝은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공회는 잘못이 있으면 늘 스스로 수정했고, 남이 지적하면 배우는 자세로 고쳤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에 옳으면 그대로 전하면서 왔습니다.
여러 과거사가 추억 되어 공회사, 한국교회의 해방 후 진리사의 일부를 위해 한번씩 적고 있습니다. 이 글들이 모여지면 교계의 주류 교회사가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가 될 터인데 우리는 이런 역사가 더 중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직접 관계가 되어 이 정도는 늘 관심 있게 살피고 있고 이 외의 일반 교회사는 교계에 차고 넘치는 교회사학자들께 신세지고 있습니다.
고신의 최고 지도부에서는 주남선 목사님이 백영희 스승으로 앞에서 이끌고 모든 오해나 공격을 다 막아 주셨고 옆에서는 아득한 선배였던 이 목사님이 백영희의 충실한 동역자나 심지어 추종자처럼 따르며 고신에서 백영희 입지를 높였습니다. 참 감사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은 1951년에 일찍 가셨고 이 목사님은 천성적으로 호인이고 사람이 좋아서 진리 문제로 꼭 부딪히지 않으면 사랑으로 품고 가는 분인데 백영희는 일반적으로 별로 따질 일 같지 않아도 평소 면도칼처럼 만사를 구별하며 살았습니다.
고신은 1959년 경 신학적으로는 박윤선을, 고신 현장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백영희를, 그리고 출옥 성도의 명성에서는 이인재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3 명은 고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각자의 길을 갑니다. 고신에서 제거 되었다는 면에서는 세 분이 하나처럼 보이나 내면을 보면 정통 개혁주의에 충실한 학자와 성경 하나만으로 목회 현장에 목숨을 걸고 만사 치고 나가던 목사님, 그리고 양쪽을 아우르던 이인재 목사님은 이미 그리 오래 갈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1959년 고신에서 배제가 되자 목사님은 평소 성경을 읽으며 너무나 확실했던 깨달음을 고신 안에서 여러 시비에 또 시비가 더해질까 해서 발표를 미룬 것이 여럿인데 차례로 이제 마음껏 발표를 하게 되었고 그 것이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로 인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는 것 등을 중심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박 목사님을 만나면 '틀렸다 하기는 그런데, 그렇다고 개혁주의 전통에는 없는 이야기'라며 이상하게 생각했고, 목사님을 만나면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공회 목회자로 함께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양쪽을 오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공회는 1960년에 '제1회 산집회'라는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집회를 시작했고 목사님은 공회 범위의 목회자들에게 두루 설교할 기회를 제공하며 주의 뜻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총공회 산집회의 초기 강사 중 한 분이었고 공회의 주력 교회인 대구 동성로교회 담임이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총공회 발족의 초기 기둥이었고 집회의 설교 강사였으며 또한 서부교회 강단에도 자주 서셨고 몇 되지 않으나 전국의 공회 교인들에게는 충실하고 핵심적인 공회 목회자였던 이인재 목사님은 한종희라는 분의 왜곡과 비판 때문에 목사님과 결국 나뉘게 됩니다. 1975년에 이단의 정체라는 책을 출판한 분으로 즉각 회수하고 사과는 했지만 소리 없이 손 닿는 곳곳을 다니며 '백영희는 얼마나 잘 믿는지, 죄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라는 취지를 전했습니다. 이인재 목사님은 이미 목사님과 직접 오래 동안 동지로 함께 했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에 흔들리면 자기 책임인데 문제는 박윤선이 세계 신학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고 박윤선이 전통의 교리에서 들어 본 적이 없어 허용할 수 없다는 말에 흔들립니다.
이후 두 분은 앞서고 뒷서며 미국으로 건너 갔고 오랜 기간 미국에서 생활하시다가 70대가 되어서야 백영희의 소식을 다시 언론을 통해 접합니다. 언론에서 서부교회를 극찬하고 나서는데 일반인들은 언론의 과장 소개에 현혹이 되지만 박윤선 이인재는 목사님을 잘 알기 때문에 기사 속에 들어 있는 백영희의 보배로움을 제대로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찾아 오셨고 목사님은 그런 경우 과거를 묻지 않고 교계 기준으로 너무 소중한 분이기 때문에 강단에 모셨습니다. 이인재뿐은 아닙니다. 그런데 1960년대 초까지 함께 할 때의 남겨진 설교 기록을 보면 백영희 이인재 박윤선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주경적 설교에 충실한 분들이었는데 30여 년만에 다시 강단에 세우고 들어 본 말씀은 윗글에서 느낌을 말씀한 것처럼 모든 공회 교인들이 너무 의아했습니다. 백영희 = 이인재 대충 이렇게 생각했는데 설교, 말씀, 교훈의 차원은 너무 컸습니다.
2009년 연구소의 직원은 필라델피아의 이인재 목사님 댁을 방문했고 당시도 문상문 사모님은 건강했으며 기억력이 특별하여 1950년대 일을 어제 일처럼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설명한 내용을 더욱 실감있게 확인을 해 주셨으나 1980년대 중반 이인재 목사님이 서부교회 강단에서 집회를 인도하셨다는 사실만은 극구 부인을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론을 두고 서로 나뉘었고 그 문제는 이단 시비까지 나간 일인데 이인재 목사님이 그런 문제 있는 강단에 섰을 리가 없다 했습니다. 연구부는 이 한 마디로 이인재 목사님이 공회에서 멀어 졌던 가장 큰 이유는 사모님의 입장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대단했다. 누구든 한번 들으면 빠져 든다'는 등의 여러 말씀도 다른 길을 걸으신 분께 전해 들으니 더 실감이 있었습니다. 연구소 직원이 방문을 직접 한다고 하자 한종희 목사님은 박윤선 이인재 두 분의 사모님들과 삼각 통화를 통해 연구소 부장이 오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니 이런 저런 대비를 말씀하셨고 방문하는 곳마다 대놓고 느끼게 하셨으나, 이 곳은 한종희 목사님께 직접 하고 싶은 말씀을 일방적으로 다 하시라 하고 녹취를 그대로 정리하여 그 분의 자서전으로 출간해 드렸고, 정리와 수정과 최종 출간까지 매단계별로 일일이 전부 직접 검토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분이 별도로 부친을 소개하는 책을 적을 때 연구소의 한종희 자서전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연락까지 해 주셨습니다.
밝은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공회는 잘못이 있으면 늘 스스로 수정했고, 남이 지적하면 배우는 자세로 고쳤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에 옳으면 그대로 전하면서 왔습니다.
여러 과거사가 추억 되어 공회사, 한국교회의 해방 후 진리사의 일부를 위해 한번씩 적고 있습니다. 이 글들이 모여지면 교계의 주류 교회사가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가 될 터인데 우리는 이런 역사가 더 중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직접 관계가 되어 이 정도는 늘 관심 있게 살피고 있고 이 외의 일반 교회사는 교계에 차고 넘치는 교회사학자들께 신세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