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V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성공회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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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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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7 05:55
1643년의 영국은 성공회 체계였고 왕정이 뒷받침하며 성공회 본부 성당에서 만든 고백입니다.
1611년의 KJV도 그렇습니다.
이 성경과 고백이 오늘까지 우리 정통파 개혁주의의 근간인데 알고 보면 성공회 것입니다.
옳으면 우리가 가리지 않으나 그렇다고 그 방법 형식을 다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양성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상식만 맡은 강사입니다. 공회의 노선에 따라 공회 외적이며 성경 외적인 질문이니, 교양 차원에서 간단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1. 킹 제임스 성경이 보편화 된 이유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아직까지 "표준번역성경"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입니다. 각 나라마다, 신학자마다 다양한 번역이 있었고, 번역의 특징에 따라 각 교파별로 다른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종교개혁과 동시에 왕권이 결합된 곳이었습니다. 영국 국왕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영국의 교회를 통합, 통치하고 싶었지만, 교리가 너무 다르니 강제 주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먼저 교파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번역의 보편 성경"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킹 제임스 성경"입니다.
이 성경 번역에는 성공회와 청교도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교리적 충돌없이 두 교파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중도적인 번역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다른 번역들은 각기 자기 교리에 치우친쪽으로 된 것에 비하면 혁신적인 결과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은 당시 성공회와 청교도 모두에서 쓰이는 성경이 되었고, 이후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둘 때,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인쇄술은 있었지만 인쇄 비용이 만만치 않던 시절, 킹 제임스 성경은 국왕이 직접 제작을 지원했기 때문에 보급이 원활했고, 귀족과 평민들 모두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은 킹 제임스 버전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당시로서는 1) 가장 보편적으로 구할 수 있는 성경이었다는 점. 2) 성공회, 청교도 등 모든 개혁교회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번역이었다는 점. 등으로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성경 번역이 되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장로교 교리의 보편 문서가 된 이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던 역사적 배경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애매한 개혁파였던 성공회에 반대하여, 온전한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 청교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의 정도가 극심해지고, 영국이 거의 분열되다시피 하자, 당시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명하여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것이 신앙고백이 된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목적은 처음부터 "영국 교회의 통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성공회도 청교도도 동의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만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찰스 1세는 영국 교회 전체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150여명의 인원, 5년 이상의 회의, 천번 이상의 의논 등이 이어지자,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을 가져왔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웨신고백은 당시 청교도 신앙을 대변하는 내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처음 회의를 주도했던 영국은 웨신고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 참고)
1643년 : 웨스트민스터 총회 시작
1646년 : 영국의회가 총회의 결과 거부
1647년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총회 결과 수용
1648년 : 영국의회가 일부항목을 제외한 채 통과
1661년 : 찰스 2세가 의회 통과를 무효화
1. 킹 제임스 성경이 보편화 된 이유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아직까지 "표준번역성경"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입니다. 각 나라마다, 신학자마다 다양한 번역이 있었고, 번역의 특징에 따라 각 교파별로 다른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종교개혁과 동시에 왕권이 결합된 곳이었습니다. 영국 국왕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영국의 교회를 통합, 통치하고 싶었지만, 교리가 너무 다르니 강제 주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먼저 교파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번역의 보편 성경"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킹 제임스 성경"입니다.
이 성경 번역에는 성공회와 청교도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교리적 충돌없이 두 교파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중도적인 번역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다른 번역들은 각기 자기 교리에 치우친쪽으로 된 것에 비하면 혁신적인 결과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은 당시 성공회와 청교도 모두에서 쓰이는 성경이 되었고, 이후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둘 때,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인쇄술은 있었지만 인쇄 비용이 만만치 않던 시절, 킹 제임스 성경은 국왕이 직접 제작을 지원했기 때문에 보급이 원활했고, 귀족과 평민들 모두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은 킹 제임스 버전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당시로서는 1) 가장 보편적으로 구할 수 있는 성경이었다는 점. 2) 성공회, 청교도 등 모든 개혁교회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번역이었다는 점. 등으로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성경 번역이 되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장로교 교리의 보편 문서가 된 이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던 역사적 배경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애매한 개혁파였던 성공회에 반대하여, 온전한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 청교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의 정도가 극심해지고, 영국이 거의 분열되다시피 하자, 당시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명하여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것이 신앙고백이 된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목적은 처음부터 "영국 교회의 통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성공회도 청교도도 동의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만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찰스 1세는 영국 교회 전체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150여명의 인원, 5년 이상의 회의, 천번 이상의 의논 등이 이어지자,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을 가져왔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웨신고백은 당시 청교도 신앙을 대변하는 내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처음 회의를 주도했던 영국은 웨신고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 참고)
1643년 : 웨스트민스터 총회 시작
1646년 : 영국의회가 총회의 결과 거부
1647년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총회 결과 수용
1648년 : 영국의회가 일부항목을 제외한 채 통과
1661년 : 찰스 2세가 의회 통과를 무효화
(윗글에 감사)
웨민 고백과 KJV에 대하여 역사적 정통 교회의 입장은, 윗 글 정도면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윗 글은 본 연구소가 운영하는 연구 공회의 양성원에서 신학의 교양을 맡은 분이며 학설에 치우치지 않고 일반적으로 알려 진 전통의 정통 입장을 잘 파악하는 분입니다.
(공회의 입장)
신약의 첫 신앙 고백이며 공회가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교리는 주후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 교리 형성도 오랜 세월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의 황제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제국의 통치를 위해 사상적 분열을 막으려고 당시 '로마 제국 = 세계'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천하의 교회 대표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시키고 결론을 냈습니다. 외형으로 볼 때는 영국의 왕들이 제국 통치를 위해 교회에게 하나의 성경, 하나의 교리를 갖게 했으나 내용으로 볼 때 성경의 번역과 교리의 정리가 오늘 공회 우리가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번역이 되었고 또 교리 요약이 되었기 때문에 이 2 가지를 원했던 영국 왕실과 성공회의 주도나 참여나 영향력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오늘 우리의 계통이 이어 지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이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가 미제국주의에 도움이 된다 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때 국무부가 상대국 정부와 협의를 하고 선교사나 지원 물품이 미군 군함을 이용하게 했다고 해도, 그 것을 힘으로 삼은 교회는 어디를 가도 미제국주의의 해외 파견대가 되었을 것이고 실제 한국 교회에 그 흔적이나 오늘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많이 목도하나, 미국인 선교사 중에는 그 지원과 상관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한 것도 오늘 한국에서 그대로 이어 지고 있고 공회는 그런 면이 특별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갈 때 로마 제국의 사법 체계와 도로망에 얹혀 갔고 이로 인해 로마 정규군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끝까지 호위를 했거나 편의를 제공했다 하여 우리는 이 것을 속화나 WCC적인 타협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영국과 영국 정부에 소속한 성공회의 박해를 받을 때 청교도의 대응 중에는 일반 수준에서 보면 거의 다 위대했으나 신앙의 기준을 조금 높혀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고, 만일 공회 수준까지 기준을 올려 버리면 비판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복음의 출발, 교회가 시작하는 초기는 어지러운 것이 당연하며 그 이후 성장 과정에 어릴 때 부족하고 잘못 된 것을 잘 정리한다면 그 이후의 후배와 결과가 그 이전의 과정을 감사할 수 있고, 결과가 잘못 되면 어릴 때 섞여 있던 옳은 것까지 모두 매장해 버리고 정죄 받게 된다는 점을 따로 구별해 봐야 할 일입니다.
발람에게 장점도 있었고 끝까지 목숨 걸고 축복한 행위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꾀로 발람은 성경이 '이 미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그의 초기 건전했던 선지 행위까지 모두 악한 결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개 전 박해의 제일 악한 대적이었으나 그 이력 때문에 그는 신약 최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영국 왕과 성공회는 청교도를 회유하여 그들의 죄에 희석제로 사용하려 했으나 당대 청교도의 귀한 종들이 KJV를 도출해서 오늘까지 영어 교회권에 보배가 되게 하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세계 교회와 이 무지한 공회 교회에게까지 믿받침을 제공한 것은 너무 감사할 뿐이고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당시의 청교도들이 KJV와 웨민 고백에 참여한 것을 두고는 오늘 우리 기준에서 보면, 오늘 한국 교계가 찬송가를 통일하자고 나올 때 우리가 그 속에 들어 가서 몇몇 곡을 살려 놓고 또한 그래도 현존 찬송가 중에는 제일 좋은 찬송가가 되게 했다고 한다면? 후대에게 이어 지는 의미는 있지만 우리로서는 공회찬송가를 통해 오늘처럼 혼란이니 분열이니 별별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처럼 그들도 청교도만의 번역과 교리 요약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습니다.
왕과 제국은 교회 통일을 원하는 법이나, 교회 중에서도 정말 교회다운 교회는 그런 사고방식에 아예 함께 할 뜻이 없고 천하 교회가 전부 혼란에 빠진다 해도 옳은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웨민 고백과 KJV에 대하여 역사적 정통 교회의 입장은, 윗 글 정도면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윗 글은 본 연구소가 운영하는 연구 공회의 양성원에서 신학의 교양을 맡은 분이며 학설에 치우치지 않고 일반적으로 알려 진 전통의 정통 입장을 잘 파악하는 분입니다.
(공회의 입장)
신약의 첫 신앙 고백이며 공회가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교리는 주후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 교리 형성도 오랜 세월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의 황제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제국의 통치를 위해 사상적 분열을 막으려고 당시 '로마 제국 = 세계'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천하의 교회 대표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시키고 결론을 냈습니다. 외형으로 볼 때는 영국의 왕들이 제국 통치를 위해 교회에게 하나의 성경, 하나의 교리를 갖게 했으나 내용으로 볼 때 성경의 번역과 교리의 정리가 오늘 공회 우리가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번역이 되었고 또 교리 요약이 되었기 때문에 이 2 가지를 원했던 영국 왕실과 성공회의 주도나 참여나 영향력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오늘 우리의 계통이 이어 지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이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가 미제국주의에 도움이 된다 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때 국무부가 상대국 정부와 협의를 하고 선교사나 지원 물품이 미군 군함을 이용하게 했다고 해도, 그 것을 힘으로 삼은 교회는 어디를 가도 미제국주의의 해외 파견대가 되었을 것이고 실제 한국 교회에 그 흔적이나 오늘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많이 목도하나, 미국인 선교사 중에는 그 지원과 상관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한 것도 오늘 한국에서 그대로 이어 지고 있고 공회는 그런 면이 특별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갈 때 로마 제국의 사법 체계와 도로망에 얹혀 갔고 이로 인해 로마 정규군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끝까지 호위를 했거나 편의를 제공했다 하여 우리는 이 것을 속화나 WCC적인 타협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영국과 영국 정부에 소속한 성공회의 박해를 받을 때 청교도의 대응 중에는 일반 수준에서 보면 거의 다 위대했으나 신앙의 기준을 조금 높혀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고, 만일 공회 수준까지 기준을 올려 버리면 비판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복음의 출발, 교회가 시작하는 초기는 어지러운 것이 당연하며 그 이후 성장 과정에 어릴 때 부족하고 잘못 된 것을 잘 정리한다면 그 이후의 후배와 결과가 그 이전의 과정을 감사할 수 있고, 결과가 잘못 되면 어릴 때 섞여 있던 옳은 것까지 모두 매장해 버리고 정죄 받게 된다는 점을 따로 구별해 봐야 할 일입니다.
발람에게 장점도 있었고 끝까지 목숨 걸고 축복한 행위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꾀로 발람은 성경이 '이 미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그의 초기 건전했던 선지 행위까지 모두 악한 결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개 전 박해의 제일 악한 대적이었으나 그 이력 때문에 그는 신약 최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영국 왕과 성공회는 청교도를 회유하여 그들의 죄에 희석제로 사용하려 했으나 당대 청교도의 귀한 종들이 KJV를 도출해서 오늘까지 영어 교회권에 보배가 되게 하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세계 교회와 이 무지한 공회 교회에게까지 믿받침을 제공한 것은 너무 감사할 뿐이고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당시의 청교도들이 KJV와 웨민 고백에 참여한 것을 두고는 오늘 우리 기준에서 보면, 오늘 한국 교계가 찬송가를 통일하자고 나올 때 우리가 그 속에 들어 가서 몇몇 곡을 살려 놓고 또한 그래도 현존 찬송가 중에는 제일 좋은 찬송가가 되게 했다고 한다면? 후대에게 이어 지는 의미는 있지만 우리로서는 공회찬송가를 통해 오늘처럼 혼란이니 분열이니 별별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처럼 그들도 청교도만의 번역과 교리 요약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습니다.
왕과 제국은 교회 통일을 원하는 법이나, 교회 중에서도 정말 교회다운 교회는 그런 사고방식에 아예 함께 할 뜻이 없고 천하 교회가 전부 혼란에 빠진다 해도 옳은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의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특징)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추가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중심으로 말하다 보니 교황을 중심으로 잘못된 교리가 있었다는 것만 말을 하는데, 실제 교황은 교회뿐만아니라 세상 정치에도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 권한이 얼마나 강했던지, 한 나라의 왕을 굴복시키기까지 했습니다(1077년 카노사의 굴욕).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이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시대, 가톨릭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반대했었다면, 동시에 교황의 정치적 독재에 대해서 많은 세상 위정자들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순수하게 신앙만으로 투쟁하려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앙 명분을 사용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신앙과 정치가 엮인 상태였습니다.
영국의 국왕이 성공회를 출발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교황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영국 국왕이 스스로 교황이 되겠다고 한 것이 성공회입니다. 그 방법이 지금 우리로서는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어느 도시, 어느 나라든지 왕을 중심으로, 의회를 중심으로 성공회와 비슷한 모양을 가졌습니다. 다만 성공회는 영국이라는 규모가 있는 나라에, 통치자가 교황 제도를 부인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스스로 교황이 되겠다고 한 것이어서 그 성격이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도 정치적 선구자가 앞서 종교개혁을 하는 것은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형태나 모양에 있어서는 시대적으로 흔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 사람들을 묶어서 개혁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교리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교황제도에 반대했다는 것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묶어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이지, 각자 믿음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은 자신과 같은 성향의,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단과 교파를 모으는데 힘썼습니다. 그 방법은 왕, 의회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왕이 “우리는 루터파 개혁주의를 하겠다.”고 하면 그 나라는 루터파 개혁주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의회가 “우리 도시는 칼빈파 개혁주의를 택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동시에 “교황의 정치적 통치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과 정치개혁은 함께 엮여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청교도들이 영국 국왕을 청교도로 편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은 시대적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청교도 나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가 성공회와 함께 성경 번역에 참여하거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작성한 일 등은, 단순히 성공회와의 협력이라기보다는, 영국을 청교도화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청교도의 목적을 바로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공회와 청교도가 모여 성경만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청교도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면, 청교도는 성경적이고 성공회는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생각과 달리 성공회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교도들은 청교도 신앙에 호의적인 국왕이 즉위하자 이제 영국을 청교도화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후에 성공회 국왕이 즉위해서 청교도를 학살했고, 견디지 못한 청교도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청교도의 미국 망명은 단순히 죽음을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세상 정치와 교회의 신앙을 구분한 행위였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청교도를 제외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세상 정치와 연합하여 있다가, 전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세상 정치를 끊어내고 신앙만으로 미국을 건너갔던 청교도만 신앙의 계통을 지켰고, 그 복음이 한국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추가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중심으로 말하다 보니 교황을 중심으로 잘못된 교리가 있었다는 것만 말을 하는데, 실제 교황은 교회뿐만아니라 세상 정치에도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 권한이 얼마나 강했던지, 한 나라의 왕을 굴복시키기까지 했습니다(1077년 카노사의 굴욕).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이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시대, 가톨릭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반대했었다면, 동시에 교황의 정치적 독재에 대해서 많은 세상 위정자들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순수하게 신앙만으로 투쟁하려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앙 명분을 사용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신앙과 정치가 엮인 상태였습니다.
영국의 국왕이 성공회를 출발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교황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영국 국왕이 스스로 교황이 되겠다고 한 것이 성공회입니다. 그 방법이 지금 우리로서는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어느 도시, 어느 나라든지 왕을 중심으로, 의회를 중심으로 성공회와 비슷한 모양을 가졌습니다. 다만 성공회는 영국이라는 규모가 있는 나라에, 통치자가 교황 제도를 부인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스스로 교황이 되겠다고 한 것이어서 그 성격이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도 정치적 선구자가 앞서 종교개혁을 하는 것은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형태나 모양에 있어서는 시대적으로 흔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 사람들을 묶어서 개혁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교리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교황제도에 반대했다는 것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묶어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이지, 각자 믿음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은 자신과 같은 성향의,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단과 교파를 모으는데 힘썼습니다. 그 방법은 왕, 의회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왕이 “우리는 루터파 개혁주의를 하겠다.”고 하면 그 나라는 루터파 개혁주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의회가 “우리 도시는 칼빈파 개혁주의를 택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동시에 “교황의 정치적 통치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과 정치개혁은 함께 엮여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청교도들이 영국 국왕을 청교도로 편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은 시대적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청교도 나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가 성공회와 함께 성경 번역에 참여하거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작성한 일 등은, 단순히 성공회와의 협력이라기보다는, 영국을 청교도화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청교도의 목적을 바로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공회와 청교도가 모여 성경만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청교도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면, 청교도는 성경적이고 성공회는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생각과 달리 성공회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교도들은 청교도 신앙에 호의적인 국왕이 즉위하자 이제 영국을 청교도화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후에 성공회 국왕이 즉위해서 청교도를 학살했고, 견디지 못한 청교도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청교도의 미국 망명은 단순히 죽음을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세상 정치와 교회의 신앙을 구분한 행위였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청교도를 제외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세상 정치와 연합하여 있다가, 전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세상 정치를 끊어내고 신앙만으로 미국을 건너갔던 청교도만 신앙의 계통을 지켰고, 그 복음이 한국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담당10의 설명 정도는 공회 교인도 상식으로 알아 두면 좋겠습니다. 책으로 알려면 어려운데 간단히 요약했으니 좋습니다. 추가한 설명 중에 공회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교회 주변에 늘 맴도는 세상)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은 해방 후 한국교회에게 아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였습니다. 목사는 아니지만 한국 교회 지도자 전체를 통해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기독교를 전해 준 미국 교회, 그들이 세운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전공은 국제 정치였지만 내용은 한국 교회가 흠모하는 미국, 미국 교회, 그들이 목사를 만들고 기독교 교육의 이상향 중 최고의 과정을 거쳤으니 구한말 조선의 교회 배척, 일제 때 총독부의 회유와 박해에 교회는 일방적으로 매를 맞았는데 이제는 '조선 > 일제 > 미군정 > 이승만의 골수 기독교'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승만과 그 집권 기회를 통해 이제는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중심에 서서 복음 운동을 마음껏 하고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최후는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을 위해 교계가 일치 단결하여 이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다가 4.19의 천주교 정권에 이어 5.16 이후 30년 불교 정권을 맞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해서 무엇을 해보려는 것은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무조건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자라 가는 과정으로 보시고 그 죄의 행위까지도 복 되게 사용하지만 구별은 해야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을 갔으나 그로 인해 이스라엘 12지파를 주셨다 하여 아버지를 속인 것을 자랑하고 반복할 일은 아닙니다.
교회가 순수하게 신앙을 지켜 살려다 보면 세상에게 반드시 박해를 당하는데 그런 경험 때문에 교회는 세상 정권을 우호 세력으로 만들거나 아예 집권을 해버리면 세상을 단번에 복음화할 수 있다는 유혹까지 받게 됩니다. 현재 온 나라의 보수 교계가 힘껏 뭉쳐 보수 후보를 지지하며 좌파 후보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결과만 좋으면 좋으나, 교회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바르게 살고 죽었다면 복이고 곁길을 가서 살았다면 참화를 당한 것입니다. KJV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얻어 냈다 해도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간 것은 육체의 세상 정욕 20년이었고 그 야곱은 죽어 마땅합니다.
오늘 공동체 생활이라 하여 세상 속에서 진실 되이 믿어 보려는 이들이 강원도 산 속의 외진 곳에 거주 공간을 마련한다든지, 중세의 수도원 수녀원을 만드는 문제, 아주 가깝게 교회가 기독교계 학교를 만드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청교도의 미국 행)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 가던 17세기 당시 신대륙은 극히 험악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 생활만은 바르게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 정신은 귀하고 그래서 오늘의 미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절정에서 엄한 잣대로 본다면 현실 도피가 됩니다. 그들이 간 미국에서 1세대가 아직도 죽지 않은 상태에서 2세대가 벌써 영국에서 건너 온 별별 나쁜 행습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교회는 그런 싸움입니다. 밖에서는 교회를 탄압하나, 교회 내부에서는 세상이 좀 괜찮아 지면 벌써 알아서 죄를 짓고, 바로 이런 안팎의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의 지도부나 건전한 이들은 교회와 세상에 벽을 치려 하는데 에스겔 성전처럼 담으로는 확실하게 막아도 출입문은 있어야 하고 그 문의 조사가 엄해야 하지 담만 있다면 염세주의 세상 기피주의가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도모하려던 것은 좌로 치우쳤고, 교회가 세상을 피해 어디로 가버린 것은 우로 치우쳐 버린 것입니다. 그 과정에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들 속에 신앙의 계통을 이어 가는 소수는 좌우로 흔드는 속에 있었으나 그들의 중심과 지향이 귀했기 때문에 그들이 속한 교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며 몰살을 하는 중에도 극소수의 자라 가며 이어 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붙들어 오늘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미국으로 간 청교도의 대부분은 실패했으나 그들 속에 함유 되어 있던 신앙의 바른 계통이 대를 잇고 이어 오며 미국의 생명줄이 되었고 그 것이 그대로 한국 선교에 담겨 져 연결이 되어 왔으며 그 연결선에 공회가 맞닿아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도 다시 확대경으로 분석해 보면 바르게 전했고 바르게 자라 오던 것이 총독부와 결탁하며 일제 선교부 대부분은 친일 행적이 굉장히 짙었습니다. 일본을 끼지 않으면 선교사들은 너무 불편했고 총독부와 조금만 대화를 하면 선교의 길이 마구 열렸기 때문입니다. 선교부들 중에 청교도 본류에 가장 강했다는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부가 오늘까지 자랑하며 당시에도 제일 핵심이 애양원입니다. 이 애양원도 일본의 배려와 후원과 지원을 받은 대표적인 단체입니다. 신사참배 박해 전에도. 이들이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게 점령 때는 인민군들에게도 배급을 받아 가며 살아 갔습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법인 등록을 하는데 그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교육부 등록 정식 신학대학들은 모두가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이 된다 할 정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교회가 설립한 모든 대학들 신학교들이 정부 보조금을 타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선정이 되면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이런 자체를 교회가 세상이 된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윗 글 중에
'..이때, 청교도의 미국 망명은 단순히 죽음을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세상 정치와 교회의 신앙을 구분한 행위였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청교도를 제외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세상 정치와 연합하여 있다가, 전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세상 정치를 끊어내고 신앙만으로 미국을 건너갔던 청교도만 신앙의 계통을 지켰고, 그 복음이 한국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라는 대목은 전체 흐름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항상 두 길이 있었고 그 중에 한 길에 다시 반복하였고 그 중에 좁은 한 길을 택한 소수가 명맥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윗 글 정도는 꼭 마음에 담아 둘 글입니다. 이런 글이 나오려면 학습력이 탁월한 우수 신학생이 박사 학위를 받고 관련 논문을 평생 발표해 가면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공회의 입장이 그 안에 들어 가는 경우는 아마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한국 교회에 정식 신학대학을 만들 수 있는데도 만들지 않은 곳은 석원태의 서울 고려신학교 정도에 그치고 이병규의 계신대까지 휩쓸려 버렸습니다. 서울의 고려신학교에는 설립자 석원태 목사님이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다닐 때 목사님을 접하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석원태는 골수 박윤선 제자로만 알고 있는데 박윤선은 신학교를 법인으로 만들고 교수로 총장으로 활동하는 쪽이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늘 맴도는 세상)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은 해방 후 한국교회에게 아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였습니다. 목사는 아니지만 한국 교회 지도자 전체를 통해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기독교를 전해 준 미국 교회, 그들이 세운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전공은 국제 정치였지만 내용은 한국 교회가 흠모하는 미국, 미국 교회, 그들이 목사를 만들고 기독교 교육의 이상향 중 최고의 과정을 거쳤으니 구한말 조선의 교회 배척, 일제 때 총독부의 회유와 박해에 교회는 일방적으로 매를 맞았는데 이제는 '조선 > 일제 > 미군정 > 이승만의 골수 기독교'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승만과 그 집권 기회를 통해 이제는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중심에 서서 복음 운동을 마음껏 하고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최후는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을 위해 교계가 일치 단결하여 이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다가 4.19의 천주교 정권에 이어 5.16 이후 30년 불교 정권을 맞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해서 무엇을 해보려는 것은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무조건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자라 가는 과정으로 보시고 그 죄의 행위까지도 복 되게 사용하지만 구별은 해야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을 갔으나 그로 인해 이스라엘 12지파를 주셨다 하여 아버지를 속인 것을 자랑하고 반복할 일은 아닙니다.
교회가 순수하게 신앙을 지켜 살려다 보면 세상에게 반드시 박해를 당하는데 그런 경험 때문에 교회는 세상 정권을 우호 세력으로 만들거나 아예 집권을 해버리면 세상을 단번에 복음화할 수 있다는 유혹까지 받게 됩니다. 현재 온 나라의 보수 교계가 힘껏 뭉쳐 보수 후보를 지지하며 좌파 후보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결과만 좋으면 좋으나, 교회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바르게 살고 죽었다면 복이고 곁길을 가서 살았다면 참화를 당한 것입니다. KJV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얻어 냈다 해도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간 것은 육체의 세상 정욕 20년이었고 그 야곱은 죽어 마땅합니다.
오늘 공동체 생활이라 하여 세상 속에서 진실 되이 믿어 보려는 이들이 강원도 산 속의 외진 곳에 거주 공간을 마련한다든지, 중세의 수도원 수녀원을 만드는 문제, 아주 가깝게 교회가 기독교계 학교를 만드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청교도의 미국 행)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 가던 17세기 당시 신대륙은 극히 험악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 생활만은 바르게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 정신은 귀하고 그래서 오늘의 미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절정에서 엄한 잣대로 본다면 현실 도피가 됩니다. 그들이 간 미국에서 1세대가 아직도 죽지 않은 상태에서 2세대가 벌써 영국에서 건너 온 별별 나쁜 행습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교회는 그런 싸움입니다. 밖에서는 교회를 탄압하나, 교회 내부에서는 세상이 좀 괜찮아 지면 벌써 알아서 죄를 짓고, 바로 이런 안팎의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의 지도부나 건전한 이들은 교회와 세상에 벽을 치려 하는데 에스겔 성전처럼 담으로는 확실하게 막아도 출입문은 있어야 하고 그 문의 조사가 엄해야 하지 담만 있다면 염세주의 세상 기피주의가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도모하려던 것은 좌로 치우쳤고, 교회가 세상을 피해 어디로 가버린 것은 우로 치우쳐 버린 것입니다. 그 과정에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들 속에 신앙의 계통을 이어 가는 소수는 좌우로 흔드는 속에 있었으나 그들의 중심과 지향이 귀했기 때문에 그들이 속한 교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며 몰살을 하는 중에도 극소수의 자라 가며 이어 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붙들어 오늘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미국으로 간 청교도의 대부분은 실패했으나 그들 속에 함유 되어 있던 신앙의 바른 계통이 대를 잇고 이어 오며 미국의 생명줄이 되었고 그 것이 그대로 한국 선교에 담겨 져 연결이 되어 왔으며 그 연결선에 공회가 맞닿아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도 다시 확대경으로 분석해 보면 바르게 전했고 바르게 자라 오던 것이 총독부와 결탁하며 일제 선교부 대부분은 친일 행적이 굉장히 짙었습니다. 일본을 끼지 않으면 선교사들은 너무 불편했고 총독부와 조금만 대화를 하면 선교의 길이 마구 열렸기 때문입니다. 선교부들 중에 청교도 본류에 가장 강했다는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부가 오늘까지 자랑하며 당시에도 제일 핵심이 애양원입니다. 이 애양원도 일본의 배려와 후원과 지원을 받은 대표적인 단체입니다. 신사참배 박해 전에도. 이들이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게 점령 때는 인민군들에게도 배급을 받아 가며 살아 갔습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법인 등록을 하는데 그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교육부 등록 정식 신학대학들은 모두가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이 된다 할 정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교회가 설립한 모든 대학들 신학교들이 정부 보조금을 타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선정이 되면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이런 자체를 교회가 세상이 된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윗 글 중에
'..이때, 청교도의 미국 망명은 단순히 죽음을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세상 정치와 교회의 신앙을 구분한 행위였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청교도를 제외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세상 정치와 연합하여 있다가, 전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세상 정치를 끊어내고 신앙만으로 미국을 건너갔던 청교도만 신앙의 계통을 지켰고, 그 복음이 한국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라는 대목은 전체 흐름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항상 두 길이 있었고 그 중에 한 길에 다시 반복하였고 그 중에 좁은 한 길을 택한 소수가 명맥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윗 글 정도는 꼭 마음에 담아 둘 글입니다. 이런 글이 나오려면 학습력이 탁월한 우수 신학생이 박사 학위를 받고 관련 논문을 평생 발표해 가면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공회의 입장이 그 안에 들어 가는 경우는 아마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한국 교회에 정식 신학대학을 만들 수 있는데도 만들지 않은 곳은 석원태의 서울 고려신학교 정도에 그치고 이병규의 계신대까지 휩쓸려 버렸습니다. 서울의 고려신학교에는 설립자 석원태 목사님이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다닐 때 목사님을 접하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석원태는 골수 박윤선 제자로만 알고 있는데 박윤선은 신학교를 법인으로 만들고 교수로 총장으로 활동하는 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