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미니안의 구원론, 박용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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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의 구원론, 박용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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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교회사 교수가 알미니안의 예정론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들어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점이 무엇인지요?
공회 우리의 구원론에서 보는 이 문제를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용규 교수 - 알미니안
교인 2025.03.10 18:05  
영상 분석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알미니안주의 구원관

1. 알미니우스의 생애와 신학적 배경
 * 알미니우스는 1560년부터 1609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우트리트에서 수학하고 말버릇에서 공부했습니다 [00:52].
 * 그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비판한 쿠룬헤로티에 글을 논박하려다 오히려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01:49].
 *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7장과 9장에 대한 칼빈주의 해석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02:02].

2. 알미니안주의의 핵심 교리
 * 예지 예정: 하나님은 누가 믿고 구원받을지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예정론을 주장했습니다 [02:27].
 * 소감의 선언: 1608년, 알미니우스는 소감의 선언에서 네 가지 작정을 밝혔습니다 [02:38].
 *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임명 [02:53]
 * 회개하고 믿는 자를 용납하고 불신자를 거절 [02:53]
 * 믿는 자를 위한 수단 제공 [03:09]
 * 특정 개인의 구원을 예견 [03:23]
 * 항론: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46명의 목회자들이 '항론(레몬스트란스)'이라는 5가지 신앙고백서를 통해 알미니안주의 예정론과 구원론을 정리했습니다 [03:42].

3. 인간의 전적 타락과 자유 의지
 *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믿습니다 [03:57].
 *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을 생각하거나 행할 수 없으며, 성령을 통해 중생해야 합니다 [04:11].
 * 중생한 사람도 하나님의 협력적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05:49].

4. 알미니안주의 5개 신조 (항의 5개 조항)
 * 제1조: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 안에서 끝까지 견딜 자들을 예정하셨습니다 [06:27].
 * 제2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믿는 자만이 사죄를 받습니다 [07:31].
 * 제3조: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중생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04:50].
 * 제4조: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있습니다 [08:39].
 * 제5조: 구원받은 자도 믿음에서 이탈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09:43]. 단, 이 부분은 성경적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11:12].

5. 결론
 *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11:21].
 * 알미니안주의 5개 항은 알미니안주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초석입니다 [11:42].
담당 2025.03.11 10:20  
앞에서 자료를 잘 요약했으니 우선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정론, 예지예정론)
* 역사적으로
최근에 바로 옆의 '발언/연구'에서 예정론 문제로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리와 교회사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구원론의 상식입니다. 4백년 5백년 된 주제여서 사실상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곳의 대화가 좀 복잡하게 전개가 되었고 전문가나 관심을 가진 분은 치밀하게 살펴 봐야 할 주제입니다. 이 곳의 일반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 가는 것도 아주 필요합니다. 아무리 옳다 해도 또 요긴하다 해도 그 분량이 너무 많으면 우리에게 주신 현실의 아주 짧은 기회를 소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선이 타 교단과 달리 담대하게 펼치는 안내 중 하나입니다.

* 이 곳에서는
교계의 '예정론'의 단어를 공회는 조금 다르게 사용합니다. 역사적 '예정론'은 나올 만한 이야기가 다 나왔고 좀 어렵고 복잡하지만 사실상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재 우리 시대로 말하면 불신자라 해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역사에 가장 유명한 학자와 맞설 만큼 정보가 넘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필요 없이 넘쳐 버려 원래 이 교리를 밝혀야 했던 초기의 목적은 세월 속에 주장이 많아 지면서 함몰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정론의 원래 교리는 그 배경 그 목적 그 진행 방향을 잊어 버리고 잊혀 졌든지 아니면 유기가 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그런 위험을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정론을 두고는 이 노선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칼빈의 입장을 확고히 붙들고 우리는 종결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론에 대해 누가 뭐라 하든지 이후의 연구는 교계에 맡겨 놓고 우리는 예정론의 다음을 살펴 봤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확실하다는 단정을 했으니 그렇다면 이후 발전되거나 또는 보충할 부분이 있는지를 두고 1960년대를 노력했고 또 한 번 단정을 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자존, 하나님 홀로 계실 때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 목적에 포함을 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택자로 정하셨고 우리를 길러 가기 위해 불택자를 만드셨으며, 우리를 길러 가는 구체적 순서를 미리 짜 놓으셨으니 이 부분을 예정이라고 구분 지었습니다. 이 곳, 공회 노선에서의 '예정'은 택자와 불택자를 구원하는 문제 다음의 일정만 말합니다. 택자와 불택자란 미리 정해 졌느냐 아니면 범죄 후에 정해 졌느냐 또는 어느 인간이 범죄 후에 불택자가 될 것을 미리 알고 예지 예정을 했느냐는 등의 복잡한 모든 논쟁은 '칼빈의 선택, 불택' 안에 모아 넣고 봉함을 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만 택자로 마음 먹고, 우리 택자를 길러 가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것들을 옆에 두고 뒤섞어 놓아야 우리가 더 낫게 좋게 잘 자라 가기 때문에 불택자는 하나님의 이 목적에 필요해서 만들어 진 대항군, 폐기용, 지옥용으로 처음부터 작정이 되었으니 이제는 택자가 살아 가는 일정만 연구하는 것이 공회의 '예정'입니다.

이 것을 '백영희 신앙 노선'이라고 합니다. 교파적으로는 '총공회'라고 합니다. 이 것을 교계의 상식적 교리 체계와 비교하면 '백영희 조직신학의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초반에 교계에 처음 전개하기 시작할 때 박윤선 목사님부터 펄펄 뛰며 칼빈이 말한 내용에 없다며 극렬하게 저항했고 박윤선의 입장이 나오자 그 분의 제자이기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고신과 합동과 합신 등의 국내 최고 보수 정통 개혁주의 칼빈주의 학자들이 일제히 이단이라고 목이 찢어 지도록 외쳤습니다. 김의환, 총신대 총장이 '이단의 정체'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여호와의증인과 통일교에 나란히 적었습니다. 그 책? 출간 되자 바로 자진해서 폐기했습니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 속에 지금은 교계의 유명한 신학자 목회자 지도자들이 거의 다 알게 모르게 이 노선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는, '예정론'이라는  단어는 같으나 그 범위와 성격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과의 논쟁에 사용되는 단어와 다르기 때문에 공회 교인은 교계의 예정론 논쟁에 공회에서 배운 예정론을 쉽게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일본의 총리제와 우리 나라의 총리제는 단어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겹치는 것은 일부고, 본질은 아예 다릅니다. 한국 총리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 장관들을 조정합니다. 일본 총리는 한국의 '대통령 + 총리'입니다.



(예정론 문제)
천국 갈 사람을 미리 정해 놓았느냐, 이 것이 칼빈이 들고 나온 예정론입니다. 강조하게 된 배경은 당연히 천주교 때문입니다. 별별 이론은 한도 없이 많고 복잡하지만 천주교는 교황의 지시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뉩니다. 이 표현을 가지고 천주교와 시비를 시작하면 천주교 1천 년 역사의 세월 만큼 시간이 들어 갑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과는 딛3:10에서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는 말씀에 따라 가장 중요한 점만 잠깐 확인하고 설명한 뒤에 돌아 서는 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자신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기 주관이 반복되면서 자기 합리화에 나서고 잘못 된 자기 교리를 자기 속에 단단히 못을 박아 버려서 빠져 나오기 어렵게 됩니다. 이단의 교리는 성령이 그들 속에서 빛을 주시고 직접 붙들어 내야 나옵니다.

성령의 역사는 토론과 설득의 결과를 이용하는 경우는 적고, 대부분은 한두 마디 핵심으로 던져 놓은 우리의 수고를 이단의 마음에 묻어 두었다가 성령이 그 사람의 양심에다 자꾸 감화와 감동으로 흔들며 이단을 뽑아 내 버립니다. 그래서 공회에는 교계의 유명한 이단에 빠져 헤어 나기 어려운 이들이 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두 마디 핵심만 딱 던져 놓고 나머지는 서로 생각 좀 해보자고 합니다. 공회 사람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이단에 있던 이들이 공회로 온 분들은 쉽게 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박용규 목사님)
고신대의 교회사에서는 이상규 목사님의 성함이 최근 가장 유명하다면 총신대 교회사 교수 중에서는 박용규 목사님 성함이 비슷한 연배에서 자주 거론이 됩니다. 이런 분들은 반대측이 표적으로 노리고 있어 유튜브에 간단히 요약을 할 정도면 토씨 하나까지 아마 정선했다고 봅니다. 칼빈주의 개혁주의의 전통적 입장을 잘 요약했다고 생각할 인물입니다. 이 분들이 알미니우스나 웨슬리의 원전 원래 발언을 조금이라도 왜곡했다면 감리교 쪽에서 그 흠을 잡고 일제히 들고 일어 날 인물이어서, 이 분들의 소개는 장로교 교인으로서는 역사적 사실적 자료로 인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칼빈과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생전 발언 전부를 그들이 사용한 원서로 밝히려 든다면 장담하지만 한 사람의 평생이 아마 쉽게 없어 질 듯합니다. 그럴 만한 가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곳에 가끔 성경 원문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타 사이트는 그런 논란을 기본으로 삼고 시작하나, 이 곳은 성경의 원어 원문 논란은 기본적으로 잘 하지 않습니다. 아예 무시하는 정도입니다. 연구 부장의 경우 헬라어 히브리어의 원어 분야로 미국 내 인정을 받고 있는 신학교 출신이고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NIV 성경의 번역을 주도했으며 또한 칼빈주의에 대해서는 '칼빈의 프랑스어 사용' 하나만 평생 연구하는 프랑스의 교수를 직접 초빙해서 강의하는 정도로 칼빈주의에 주력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신학교 도서관에 칼빈 관련 도서 숫자만 해도 헤아릴 수 없다고 회고하는 정도입니다. 너무 옳고 너무 필요한 분야인데 너무 분량이 많아서 신앙인의 매일 신앙에 주력할 시간을 전부 앗아 가는 면을 직접 보고 왔으며 그 연구 부장이 주도하는 곳이 이 곳입니다. 그냥 아주 무식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눈치는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니 감안하면 좋겠습니다.

칼빈, 알미니누스, 웨슬리에 대한 '구원론' '예정론' '예지예정론'은 유튜브에서 10분짜리 몇 개만 들어 보면 충분할 듯합니다. 6.25 전쟁을 북한이 먼저 일으켰냐 남한이 그랬냐, 북한이 먼저 내려 왔지만 먼저 내려 오도록 유도한 미국의 에치슨을 어떻게 전쟁 발발의 원인에서 제외할 수 있느냐.. 이제 이 정도가 되면 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각자 가기 취향에 따라, 평소 성향에 따라, 또는 자기 의도나 무슨 이해관계에 따라 출처와 증거는 끝없이 들이댈 수도 있고 심지어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이 것이 역사의 함정이고 묘미입니다.



(공회의 입장)
하나님이 홀로 계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를 영원 자존이라 합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닮은 존재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과정에 필요하여 지옥 갈 사람을 만들었고 세상을 만들고 역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 우리가 죄를 한번 거쳐야 더 좋기 때문에 우리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을 때 죄를 짓게 했습니다.
때가 되어 죄를 짓게 했고 해결을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때가 되면 성령이 우리의 영을 살리니 중생입니다.
한번 중생이 되면 중생된 영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성령과 함께 자기의 마음과 몸을 죽는 날까지 말씀으로 가르치고 고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말씀으로 살 때도 있고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요약을 하고 다시 천주교 시절, 칼빈의 개혁, 알미니우스의 반발, 이어 지는 웨슬리의 부분 조정과 칼빈의 제자들의 혼란과 분열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칼빈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1천여 년 전에 있었던 어거스틴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어거스틴 > 중세의 칼빈 > 오늘의 칼빈주의, 같을 리는 없습니다. 당연히 선배의 글과 기록을 보면서 보충도 하고 또 당대와 이후 논쟁을 고려해서 보강도 합니다. 그러다가 살짝 다른 점도 나옵니다. 그 것이 발전일 수도 있고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어거스틴과 맞섰던 펠라기우스 이 사람이 화끈하고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다 쏟아 내 버렸습니다. 그런데 중세 1천 년이 지나 가면서 펠라기우스의 인간적인 토로는 명확하게 이단으로 정죄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성경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 나았을 뻔했습니다. 어쨌든 세월 속에 펠라기우스처럼 불신자라면 누구든 그럴 수 있는 주장이 교회 안에서 받아 지기 어려우니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절반쯤 더하고 뺀 ''절반 펠라기우스' 주장이 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종교 개혁시기에 칼빈이 천주교 1천년의 구원론을 낱낱이 다시 짚어 가면서 교황은 천국 구원에 상관이 없다고 대못을 박아 버리자,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탄탄하게 잘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천주교를 확실하게 잘 잡아 버리고 나자 이제는 천주교라는 걱정거리가 없어 진 상태에서 다시 펠라기우스의 후예들이 나옵니다. 족보상 후예가 아니라 교회 안에와 우리의 마음 안에는 누구든지 항상 반론을 제가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인간적인 고려, 인간적인 배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 소리 저 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나라가 아무리 훌륭하게 좋게 잘 해 보려고 해도 독재를 하게 되면 이 소리 저 소리는 나오는 법입니다. 가정에 어린 아이들도 자라 가면서 부모가 독재라면 별별 소리를 하는 것은 집집마다 말을 맞춰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정론을 두고 이 말 저 말이 나오고 예지예정론이라는 기막힌 묘수도 나옵니다. 무식할 때는 천지 창조가 창세기 1장에 명확하게 6일이라고 믿었는데 19세기의 다윈이 진화론을 끄집어 들면서 횡설수설하니까 일제히 6일 창조를 신화로 만들었고 지금 세계 기독교의 대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틈 바구니에서도 신앙의 양심 때문에 또는 틈새 시장을 노린 광화문에 전 무슨 목사님처럼 세게 치고 나오면 일부라도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다 보니까 창조의 1일이 1억년이었다 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해 버리고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과학적 설명으로 해명해 주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학과 세상의 별별 논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시황이 제국을 만들 때까지는 학자들을 사용했고 황제가 된 다음에 다시 보니 이 학자들과 책들 때문에 나라가 망할 상황이고 학자는 입으로 천하를 쥐고 흔들 위험 요소로 봤습니다. 그리고 다 태우고 파 묻어 버렸습니다. 문화 세상에 이런 말을 했다가는 천하의 지성인들이 의료 대란처럼 들고 일어 날 것이어서 유명한 학자들은 이런 말을 못하지만 공회는 워낙 미미하니 건들여 봐야 좋은 것이 없다 하여 이 곳을 외면합니다만, 이 곳은 대한민국에 신학교는 감리교 1개, 장로교 1개, 침례교 1개 정도만 있어도 많지 않을까?

도서관에 책들이 흔하고 유튜브에 인터넷까지 난무하는데 세상 공부를 하듯이 책가방을 들고 칠판을 쳐다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신앙이 자랄까? 아예 아니라고 봅니다. 이 노선은 돈 벌이 현장에 가서 자기 아는 대로 성경 한 구절, 설교 한 말씀을 붙들고 죽도록 실행을 해 보면 다음 날에는 조금 나아 지고 그러다가 정말 신앙이 들고 그러다가 한 교회에서 모두가 인정할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이 바로 그 교회의 목사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즈음이 되면 신학서 한두 권 잠깐 참고하면 충분하지 않을가? 그리고 모든 시간은 성경만 읽고 그리고 교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기도하고 자기를 돌아 보고 교인 가정을 살피는 것으로 전부를 삼습니다.
담당 2025.03.12 12:48  
https://www.youtube.com/watch?v=Rqy9gpfBN-s

(자료들)
실수할까 싶어 여러 자료를 봤으나 별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혹 질문에 소개한 자료와 이 자료 등과 다른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의 비교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론을 두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역사적 차이는 타이핑의 실수나 설명을 하다 강조가 지나 치는 등의 문제이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경우는 없다고 보입니다. 혹 기본 사실 자체가 잘못 되었을 때는 한두 사람의 착오 정도여서 흘러 가는 강물을 거스릴 정도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모두 상식적으로 알아 두실 것은 '펠라기우스 > 알미니우스 > 웨슬리'라는 라인입니다. 물론 다른 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이 3 가지 이름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같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3 인의 이름은 늘 구슬꿰미처럼 연이어 알아 두셔야 하는 이유는, 이 3 인이 어떻게 다른지는 너무 미세하여 전문가 아니면 알기 어려우나 통째로 한 흐름입니다.

마치 '어거스틴 > 칼빈 > 개혁주의'라는 이름이 오로지 하나님만 붙들고 '인간'은 가능한 최대치로 빼 버렸는데, 이 것을 대항하여 '펠라기우스 > 알미니우스 > 웨슬리'는 하나님을 붙들면서도 인간을 어딘가 조금 섞었고 강조를 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화끈하게 인간을 강조했으니 참 양심가였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심하다 보니 알미니우스는 그래도 하나님을 강조했습니다. 펠라기우스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래도 사람의 구원에 인간의 노력을 조금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웨슬리는 알미니우스보다 하나님을 훨씬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칼빈과 그 계보만큼 하나님을 강조했다면 애당초 웨슬리라는 이름이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자를 모조리 죽이고 차별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들자면서 맑스 레닌이 힘껏 다 했습니다.
자기들이 봐도 심했고 결과도 좋지 않으니 그 다음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로 약간 자본주의를 반영했습니다.
사회주의도 역시 마찬 가지가 되니 이제는 사회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또 변형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 누가 어느 책에 원문을 어떻게 기록했느냐 라는 문제로 따질 사람은 어학과 시간과 학습력이 탁월해야 하고, 우리처럼 일반 수준의 사람은 매일의 생활에서 자기가 아는 말씀 하나의 실행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다른 여지가 없는데 이런 우리로서는 '펠라기우스 - 알미니우스 - 웨슬리 - 감리교'라는 이름들께는 죄송하나 굴비 엮듯 한 줄에 엮어서 크든 작든, 심했든 약했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와 예정의 순서를 어디에 어떻게 표현을 했든, 절대 주권, 절대 신본이 아니면 한꺼번에 꼭 같이 취급하는 것이 실무적으로 훨씬 수월합니다.


철책에 인민군이든, 휴전선을 넘어 들어 온 무장 공비든, 서울을 활보하는 양복 입은 간첩이든, 남한에서 태어 나 자라다가 포섭이 되었든, 남한에서 스스로 생각을 해서 옳다고 판단하게 된 사람이든... 남북 둘 중에 하나로만 딱 구별해 버리면? 세상은 극단주의라고 매도를 할 터인데 세상은 그렇게 하든 말든 버려 두고, 신앙의 세계에서는 절대가 아니면 믿지를 말고 마음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 이 곳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절대 주권,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선택은 아예 어느 단계에서 어떤 표현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개입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엡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가 바로 우리였습니다. 불신자가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문제, 영이 중생 되는 그 사안... 이런 것은 무조건 절대에 절대를 단단히 못을 박아 놓고

그리고 믿는 사람이 믿어 가는 과정은 칼빈과  알미니우스,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분명히 서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는 것이 공회의 구원론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감리교 쪽에서는 장로교에 제일 골수인 고신 안에서도 제일 골수 백파가 감리교를 이해한다고 환호를 했고, 장로교에서는 이단으로 못 박느라고 급급했으나 양 쪽이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침신대 피영민 목사님이 유튜브와 여러 강의를 통해 백영희 실명으로 이 곳의 입장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어서 이 곳은 그 분의 등 뒤에 숨어서 요즘은 좀 쉬고 있는 편입니다. 교계적 싸움은 피영민 목사님 정도의 신학자가 마이크를 잡고 떠들어 버리니 그 분께 대드는 분들은 없는 듯합니다. 이 곳은 외부의 공연한 오해와 시비를 피하는 바람에 이 곳이 걸어 갈 길만 재촉하고 있습니다.
은식 2025.03.13 14:22  
제가 아르미니우스에 대해 몇 마디를 적었고, 제가 적은 내용이 전통적으로 알려진 알미니안주의와 차이가 났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저는 아르미니우스나 알미니안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정론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을 근거로 하여 "예지, 예정"을 믿고 있었을 뿐입니다. 말씀상 "미리 아신 자를 미리 정하셨다"고 하셨으니 그저 그런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미리 아셨고 또 미리 정하셨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알미니안과 대척점인 사항을 지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 따라 과연 아르미니우스는 어떤 주장을 했는지가 궁금했고, 영문으로 된 아르미니우스의 저작을 읽고 그에 따라 제가 이해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흔히 아는 "알미니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아르미니우스가 주장했다기보다는 그 사후에 그 제자와 웨슬리 등이 주장한 신학체계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대체적으로 봐서 자신의 신학체계를 명시적으로 천명하지 않았고, 흔히 자신이 주장했다고 비판받았던 내용에 대해 그러한 비판이 잘못되었음을 변명하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다만 "예정론"과 관련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에 관한 작정을 하셨다.
2. 그러한 구원방법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택자"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미리 아심에 따라 "예정"하셨다.

이런 예정론에 따르면,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전적부패, 제한속죄, 성도의 견인"을 아르미니우스가 부정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무조건적 은혜"와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해서는 미묘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미니안"은 칼빈의 5대강령을 모두 부정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알미니안과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차이가 있습니다. 알미니안은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에 그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므로 꼭 아르미니우스의 주장과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아르미니우스와 칼빈주의가 가장 차이가 나는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무조건적 선택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먼저이므로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자"까지도 예정하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칼빈주의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을 것"을 조건으로 하여 "택자"를 예정했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자"로 예정하시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르미니우스도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의 "조건적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선택되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칼빈주의는 "예지"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대체로 칼빈주의자는 성경에서 "미리 아셨다"고 되어 있는 모든 구절은 "예정론"의 측면에서 무의미하다고 봐서 그 해석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지와 예정의 시간적인 순서도 반대로 보는 듯합니다. 아니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인과관계 측면에서 반대로 봅니다. 예정되었기 때문에 믿은 것이지, 믿을 것이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예지 예정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예지 예정론"에서는 믿음이 예정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믿음에 대한 "예지"가 예정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거든요.

또한 칼빈주의자의 견해로서 만약 "예지"가 의미가 있다면 "예정"은 무의미하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에 손상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만약 최종적으로 믿을 것으로 예지된 자가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인과관계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저 방관하시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상관 없이 "예정"하신 바에 따라 구원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가 과연 "인간의 믿음"과 상관 없이 "예정"하신 바에 따라 구원하신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상관 없이 "예정"에 따라 구원하신다고 하면, 칼빈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가 큰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만, 단지 "인간의 행위"와 상관 없이 구원하신다고 한다면, 양자는 차이가 없습니다.

- 불가항력적 은혜
아르미니우스도 택자의 일부는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겠지만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승복하여 믿게 된다고 봅니다.
반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둘로 구분합니다.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택자든 비택자든 모두에게 주어지는 부르심인 반면, 내적인 부르심은 오직 택자에게만 주어지는데 택자는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에 거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르미니우스가 하나님의 은혜를 "외적인 부르심"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면 칼빈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는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결국 택자는 외적인 부르심에 저항했을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에는 결국 저항하지 못하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르미니우스 또한 하나님의 구원받기에 "충분한 은혜"에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주장하므로, 만약 "충분한 은혜"와 "내적인 부르심"이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관련하여 가장 큰 차이가 있는 점은 "믿음"에 대한 개념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칼빈주의자는 믿음도 "은혜"이므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불신자를 믿게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르미니우스는 믿음도 "은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의 지, 정, 의에 따른 판단을 완전히 억압하여 강제로 믿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요?
칼빈주의자가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하는 가장 밑바탕에는 "믿음"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인간의 믿음 또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실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인간은 로봇과 같으며 하나님이 주입하는 "믿음"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할 뿐이라고 보는 것은 아닌지요?

이러한 견해는 "구원의 여정"과 관련해서 중생이 회심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은 전적부패한 존재이므로, 중생하지 않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이미 중생한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을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불가항력적 은혜가 거론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불가항력적  은혜를 "중생"에 적용하더라도, 중생이라는 인간의 의식작용을 벗어난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으로 정의하는 한, 인간은 중생을 거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칼빈주의 구원론에 따른 구원의 여정과 불가항력적 은혜의 개념은 서로 상충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어떤 개념적인 조정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학 2025.03.13 19:32  
담당님이 쓰신 글에 은식선생님이 답글을 다신 글이라서 제가 연이어 답글을 안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신학자인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아르미니우스의 제자들)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 은식선생님이 이야기 하신 부분은 제 생각으로는, 아르미니우스를 이해하는 한 흐름에 속하는것 같습니다. 저도 은식님의 의견의 방향으로 공부를 좀 하였습니다. 저와 세부적으로 모두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크게보면  제가 공부한 방향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제가 배운 방향은 "아르미니우스는 웨슬리처럼 원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가 원죄를 부정했다는 도르트 신학자들은 건전한 신학자(아르미니우스)에게 부당하게 누명을 씌워 정통기독교에서 제거한 나쁜 사람들이다. 아르미니우스가 원죄를 정말 부정하였다면 아르미니우스 당사자가 한 말(wording)을 제시하라" 입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도 원죄로 인한 전적부패-전적무능을 믿었고 웨슬리처럼 선행은총도 믿었다는 방향입니다.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 대하여 이러한 이해가 영미권에서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도 이 흐름이 근래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상황입니대.

이에 반해 감리교단에서 웨슬리를 평생 연구한 분들중에 아르미니우스가 원죄를 부정하였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감신대 총장을 지낸 김진두 박사님 이십니다. 김진두박사님은 "웨슬리는 원죄를 인정하였지만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원죄를 부정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가장 객관적으로 설명한 분은 제1급의 역사신학자인 Richard Muller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박사학위를 위한 연구한 책에 멀러교수는 "아르미니우스의 특징적 신학개념에 중간지식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개념은 종교개혁가들도 반대했고 당시 로마카톨릭에서도 반대했던 개념인데 특이하게도 예수회 신학자 "몰리나"라는 사람이 먼저 주장했던 사상입니다.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중간지식이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고, 아르미니우스는 몰리나를 만나기 위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신학공부를 마칠 무렵에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아르미니우스의 이해에 대한 두 흐름에 대하여 어떤 방향이 옳다고 아직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 대하여 서로 입장이 많이 다른 두 방향이 있음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은식선생님이 이 두 흐름중에 어느 방향이 정말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 대한 이해가 바른지 알고 싶으시다면(저도 전에 궁금해서 제대로 한 번 살펴보려고도 했습니다) 제가 시간을 내어 살펴볼 용의가 있지만, 은식선생님이 올리신 글에서처럼 아르미니우스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으시기에 저는 이정도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2.담당님이 은식선생님의 글에 답변을 다실 수도 있으셔서 조심스럽게 교리적 설명을 적습니다.

저는 성경에 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 한 분 만으로 인한 죄인의 독력주의적 중생)와 가항력적은혜(인간이 믿고 안믿고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 두 교리적 Point가  모두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설로는 둘 다를 수용하게 되면 모순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은식선생님 삼분론을 믿으시잖아요. "영"에게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적용하고, 마음(혼)에는 가항력적 은혜를 적용하면 두 Point를 함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분설로는 칼빈주의는 불가항력적은혜로 웨슬리주의(복음적 아르미니우스 노선)는 가항력적 은혜로 한 Point만 서로 맞다고 계속 주장하게 됩니다.
신학 2025.03.13 20:20  
덧붙여, 성경에는 절대예정(무조건적 선택)과 예지예정 두 point가 모두 나옵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독교는 구원을 기본구원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절대예정이 옳다하고 감리교는 예지예정이 옳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구별하지 못하면 이 싸움은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구원을 기본규원과 건설구원으로 구별하면, 절대예정(무조건적 선택)은 기본구원에 예지예정은 건설구원에 적용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의 두 Point 모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면 장로교는 절대예정으로 감리교는 예지예정으로 서로 한 Point 만 맞다고 맞설수 밖에 없습니다.

※ 개혁주의에서 절대예정은 다른 표현으로 이중예정으로 표현됩니다. 택자와 불택자가 창세전에 정해졌다는 개념인데, 무조건적 선택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은식 2025.03.14 10:05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하는 견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듣습니다. 아마도 그 성경적 근거는 고린도 전서 3장의 말씀인 것으로 보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탕은 그리스도이므로 터가 닦인 이상 구원을 받되, 그 위에 무엇을 쌓는지에 따라 공로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는 구절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의문인 것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무엇을 쌓는 것을 과연 "구원"으로 볼 수 있는지입니다.

아무튼 구원을 둘로 구분하셨으니, 이에 대한 제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건설구원을 성도가 몸으로 행한 바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심판이 기본적으로 백보좌 심판와 그리스도의 심판로 구분된다는 견해를 따르겠습니다)  앞에서 상급으로 받는 것으로 본다면, 이러한 상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삶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대부분의 조직신학에서는 이러한 구원을 "성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상급을 받는 것은 "종말론"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성화와 종말론적인 심판을 결합하여 이를 건설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할 입장이 못 됩니다. 다만, 이러한 개념을 예정론이나 선택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것은 매우 낫설 뿐만 아니라 예정론의 본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정론은 기본적으로 어떤 자가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으며 어떤 자는 선택을 받지 못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예지예정과 절대예정이 극심한 대립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에 대해 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겠습니다.

먼저 예지예정론은 "예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지예정이든 절대예정이든 모두 "예정"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두 견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지"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성경에서 "예지"가 없이 "예정"만 나오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구절이 "예지"를 부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명시적으로 예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정"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성경에서 "예정"만이 나오는 구절은 아무래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예정의 "세부적인 순서"를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에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기본 태도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예지"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예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잘 알지 못한다고 무조건 부정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한 한도에서만 알 수 있고, 분명 예지가 예정에 앞서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그저 그 한도에서 믿을 뿐입니다.

"조건적 선택"이라는 개념에는 반대합니다. "예지"가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족시켜야 할 어떤 조건을 제시했고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자만을 선택하셨다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범할 범죄, 하나님과 원수됨 등에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오히려 인간의 부족함에 대한 예지가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예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예지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성향과 행위와 마음속의 생각을 모두 아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과 관련해서는 특히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과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특히 칼빈주의자가 아닌 노선에서는 "중생"된 상태에서 회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듯하므로, 인간이 믿음을 갖게 되는 시점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입니다. 또한 성경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때는 바로 죄의 자각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믿음이 덧붙여진다고 해서 monergism이 synergism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지예정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조건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인정할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순된 행위를 하시지 않으시는 분이므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까지 선택하시지는 않으신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신학 2025.03.14 10:47  
1.모든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내용.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게 된 후에 성도가 말씀데로 산 모든 언행심사는  영생이 되고(천국에 모두 가져감) 말씀데로 살지 못한 모든 언행심사는 영멸이 되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져감)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거듭난 초등학생이 어머니에게 교회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라고 5천원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이 주일아침에 주일학교에 가서 예배드리고 헌금5천원을 한다면 그때의 언행심사는 영생(천국에 모두 가져감)을 하지만, 예배 안가고 5천원으로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게 되면 그때의 언행심사는 영멸을(천국에 못 가져감)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든 삶(언행심사)은 이렇게 구별이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천국에 가는 자격을 얻은 후에  모든 현실에서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천국에 들어가느냐? 못들어가느냐? 결정이 되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고, 처음 예수님 믿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자체를 얻은 것을 기본구원이라 하고, 기본구원 받은 후에 우리의 언행심사가 천국에 들어가고 못들어가는 것을 건설구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2.  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구별을 하더라도, "무조건적선택 - 제한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는 수용이  안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성경말씀을 근거로 또 이치적으로 설명을 하여도 안믿거나 못믿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칼빈5대교리와 아르미니우스5대교리 이 두 흐름이 성경에 계속 나온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 두 노선을 바탕으로 교파가 크게 2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입니다. 나아가 감리교와 같은 교리적체계로 성결교 순복음 등 여러교단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두 노선은 2000년 기독교에서 수많은 성도님들이 한 방향씩 믿어 왔습니다.

저에게 선생님과 비슷한 방향으로 아르미니우스에 대하여 알려준 교수님이 2000년 기독교 신학의 양대흐름은 "어거스틴 - 루터 - 칼빈 - 개혁주의" 노선과 "여러교부들 - 아르미니우스 - 웨슬리"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좀 아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2000년 기독교 역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2025년의 저희들은 두 양대노선이(칼빈주의 - 아르미니우스주의) 성경에 모두 나온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희가 2000년 기독교 역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유는 2025년에 저희가 살고 있어서 지나온 2000년 기독교역사를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지예정을 건설구원에 적용하는 내용

예지예정이란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천국을 주시기로 예정했다는 내용입니다. 좀 더 확장하면 내 마음과 몸이 믿음으로 언행심사를 가지면 천국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정하셨고, 내 심신이 믿음으로 언행심사를 안가지면 천국을 안주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건설구원면에서는 예지예정이 맞습니다.
담당 2025.03.14 14:18  
이 글의 첫 질문에 대해서는 이 곳의 답변자로서 충분하게 답변은 드렸고, 이후 이어 지는 '은식' '신학'의 대화는 이 곳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 곳에서 시작하여 이어 지는 두 분의 '발언/연구'로 보고 이 곳의 답변자로서는 일단 글을 멈추겠습니다. 이 곳의 안내가 필요하면 '문답' 게시판에 글쓰기를 하시거나 '댓글'에 그렇게 적으면 되지만 이 곳은 이미 두 분의 대화, 발언, 연구로 진행이 되고 있으니 이 곳의 안내가 필요하면 질문으로 글쓰기를 부탁합니다.

말씀 중에 '구원'에 대한 성경의 다른 말씀을 안내할 필요가 있어 기록합니다.

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이해하면 나을 듯하고 천주교 교황이 쥐고 있던 구원론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기 위해 루터와 칼빈이 노력한 단계가 있었고 그 분들의 노력에 이어 '성화'를 당시는 성화로만 적고 '구원'에 포함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의 노력에 감사하고 그 노력에서 이어 걸어 가다 보면 이 곳의 소개는 아마 너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성구와 설명은 이 곳에 넘친다는 점 또 이 곳은 그런 면 때문에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점 때문에 구체적 질문이 아니면 중복을 줄이기 위해 글을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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