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다윗(삼상17:58절)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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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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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7 11:09
사무엘17;1서보며 다윗이 이새의 아들인것을 알았을 것인데 몰나서 아브넬에게 왜 물엇읍니가
21절아기스와(미치광이로다)27절(시글락을 그 에게 주었으므로)아기스와 동일 왕입니가 다른왕입니가?
관주를 보면, 간단한 해설이 나와 있더군요.
성경을 보면,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순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사무엘 16장에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여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의 일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다는 구절은 17장 뒤인 18장 10절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다윗이 연주를 합니다. 따라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는 사건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에 사울이 다윗을 시샘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사무엘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만날 때에는 다윗을 "용사"로 표현하지 않는 데 반하여, 오히려 사무엘 16장 18절에서는 다윗을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6장에서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는 때가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때보다 오히려 후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 17장 말미에서 사울이 다윗이 이새의 아들인 것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한편, 가드왕 아기스는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다른 인물로 볼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럼 의문이 있을 겁니다. 다윗이 처음 가드왕 아기스를 만났을 때 미친 체를 하죠.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을 쫓아냅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윗이 다시 아기스를 찾아올 때는 다윗을 환대할 뿐만 아니라 시글락까지 주죠.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어요. 아기스는 처음에는 다윗이 정말로 미친 줄 알고 쫓아내기는 했지만 그 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매우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정말로 다윗이 미쳤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서 아기스는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아, 다윗이 과거에 "미친 체"를 한 것이지 정말로 미친 것은 아니었구나. 또한 다윗이 사울과 확실히 대적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울을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다윗을 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순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사무엘 16장에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여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의 일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다는 구절은 17장 뒤인 18장 10절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다윗이 연주를 합니다. 따라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는 사건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에 사울이 다윗을 시샘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사무엘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만날 때에는 다윗을 "용사"로 표현하지 않는 데 반하여, 오히려 사무엘 16장 18절에서는 다윗을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6장에서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는 때가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때보다 오히려 후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 17장 말미에서 사울이 다윗이 이새의 아들인 것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한편, 가드왕 아기스는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다른 인물로 볼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럼 의문이 있을 겁니다. 다윗이 처음 가드왕 아기스를 만났을 때 미친 체를 하죠.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을 쫓아냅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윗이 다시 아기스를 찾아올 때는 다윗을 환대할 뿐만 아니라 시글락까지 주죠.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어요. 아기스는 처음에는 다윗이 정말로 미친 줄 알고 쫓아내기는 했지만 그 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매우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정말로 다윗이 미쳤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서 아기스는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아, 다윗이 과거에 "미친 체"를 한 것이지 정말로 미친 것은 아니었구나. 또한 다윗이 사울과 확실히 대적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울을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다윗을 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제16장에서 사울이 악신에 들린 사건이 제17장의 사건보다 앞선 것이라는 견해에 따르면,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다윗의 사회적 지위을 기억하지 못하였거나 다윗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군요. 처음에 사울은 다윗을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로 알아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적장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관심 없이 지나쳤던 다윗의 부모 등 그 사회적 관계에 대해 재차 확실하게 알아본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질문의 원래 제목은
'사울 왕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요(사무엘상17:58)'입니다. 제목이 길어서 관리자가 질문 취지가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임의로 변경했고 이곳에 기록을 남깁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은식'님의 안내에 감사)
담당'의 글이 늦어졌으나 독자 중 '은식'께서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연구소의 답변 담당자들이 안내를 하지만 누구든 질문에 대하여 문답 게시판의 '공지'를 참고하고 적어 주신다면 항상 감사합니다. 혹 이곳을 잘 모르신다 해도 이곳은 말씀을 중심하는 곳이고 신학을 조심한다는 점은 누구라도 아실 것이고 그런 면을 참고해서 답변으로 안내를 하시는 분이 계시면 저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식' 성함의 답변은 성경을 읽는 누구라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또 한 사람이 항상 다 아는 것은 아니므로 다른 분의 다른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면 서로 연구하고 각자 결론을 낼 때 도움이 됩니다.
1. 삼상 17장의 사울과 다윗
사울이 다윗을 언제 알았느냐는 문제는 누구든지 의아할 수도 있고 또 성경은 연대순으로만 적지 않으니 앞에서 설명한 '은식'님의 안내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곳은 일단 성경의 기록은 기록의 순서를 먼저 살피고, 기록의 순서가 아닌 경우를 동시에 살피면서도 또 기록의 순서로만 살필 수 없을 때는 당연히 '은식'님의 안내처럼 여러 가능성을 살핍니다.
훗날 왕상19:1 이하에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할 때 엘리야가 도망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5절과 7절에서 천사를 보내어 먹이시고 길을 계속 가게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먹이시며 재촉해서 이 곳까지 인도하셨는데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신앙의 투쟁을 하다 투쟁의 성격과 역사와 기준과 소망을 다 소실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심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학생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전쟁을 하는데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맞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또 물어보십니다.
최근 광화문 앞에 교회 이름으로 목사님들이 세상 정치 싸움에 앞장서고 보수 정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계십니다. 그중에 한 분이 해결이 너무 늦어지니 연단 뒤에 잠깐 내려와서 하나님께 몰래 여쭤본다면, '주여, 왜 아직도 도와주지 않고 있나이까? 천하의 사단이 한국 교회를 모두 삼키려 하나이다' 이렇게 풀이 죽어서 기도를 한다면, 그리고 그 목사님이 정말 양심을 기울여 들어 보려고 한다면,
이곳이 아는 성경의 말씀은, '네가 목사인데 왜 광화문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11절처럼 크고 강한 정치 바람으로 적기독을 부수려 하며 탄핵의 추진과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보려고 지진 운동을 하고 있느냐, 100만명이 모여 뜨겁게 울부짖는다면 그 불덩이로 아합과 이세벨을 이길 수 있느냐, 구약도 12절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해결을 했는데 하물며 신약의 신령한 이스라엘이 교회와 목사들의 내면 깊이 하나님이 왜 세상을 이렇게 운영하시는지 먼저 조용히 여쭙는 것이 마6:6에서 가르친 골방 기도이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가 역사하지 않겠느냐, 불신자는 광화문에 나와서 크고 강한 바람과 불을 붙여 세 대결을 하지만 교회와 목사는 신앙의 양심 깊은 곳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고요히 듣고 순종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왜 광화문에 있느냐' 이렇게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시간순으로도 적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은식'님께서 먼저 안내하셨습니다. 답변자가 하나 더하고 싶은 것은 시간 순서와는 전혀 달리 물어 보는 '질문'은 문장의 문법 형태 중 단순 질문도 있지만, 질문을 통해 '탄식'도 있고 '책망'도 있고 '답변'을 제시할 때도 있습니다.
2. 삼상 21장과 27장의 아기스
'은식'님께서 안내하신 대로 동일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성경의 인명은 수도 없이 동명이인이 나오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으면 양면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삼상21장과 27장의 경우는 여러 면에서 동일 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입장이 달라진 것은 21장과 27장 사이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란 아주 달라질 수가 있다고 보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을 한자리에 앉아 성경을 열심히 읽다 보니 삼상 21장과 27장의 사이는 11페이지에 지나지 않으나 성경은 한 절 안에서 천하만사가 바뀌도록 생략하는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두고 아들처럼 대하다 원수로 대하며 돌변한 것도, 또 사울이 선군이었는데 폭군으로 바뀐 것도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성자 의인이었다가 참으로 고약한 죄인으로 바뀔 때 그렇게 쉽게 바뀌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여쭐 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 말씀했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하루만인지 1년만인지 평생인지 그 기간을 정하지 않았으나 백 목사님은 하루 490번도 인간의 마음은 더 바뀌더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그렇게 해석합니다. 눈이 밝을수록 과거에 보지 못한 죄를 더 정밀하게 찾아냅니다. 자기 죄에 대해 마음이 넉넉하면 눈이 자꾸 흐려집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 앞에 떳떳히 고개를 쳐들고 눅17장의 세리처럼 자기 자랑까지도 해버립니다.
'사울 왕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요(사무엘상17:58)'입니다. 제목이 길어서 관리자가 질문 취지가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임의로 변경했고 이곳에 기록을 남깁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은식'님의 안내에 감사)
담당'의 글이 늦어졌으나 독자 중 '은식'께서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연구소의 답변 담당자들이 안내를 하지만 누구든 질문에 대하여 문답 게시판의 '공지'를 참고하고 적어 주신다면 항상 감사합니다. 혹 이곳을 잘 모르신다 해도 이곳은 말씀을 중심하는 곳이고 신학을 조심한다는 점은 누구라도 아실 것이고 그런 면을 참고해서 답변으로 안내를 하시는 분이 계시면 저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식' 성함의 답변은 성경을 읽는 누구라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또 한 사람이 항상 다 아는 것은 아니므로 다른 분의 다른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면 서로 연구하고 각자 결론을 낼 때 도움이 됩니다.
1. 삼상 17장의 사울과 다윗
사울이 다윗을 언제 알았느냐는 문제는 누구든지 의아할 수도 있고 또 성경은 연대순으로만 적지 않으니 앞에서 설명한 '은식'님의 안내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곳은 일단 성경의 기록은 기록의 순서를 먼저 살피고, 기록의 순서가 아닌 경우를 동시에 살피면서도 또 기록의 순서로만 살필 수 없을 때는 당연히 '은식'님의 안내처럼 여러 가능성을 살핍니다.
훗날 왕상19:1 이하에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할 때 엘리야가 도망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5절과 7절에서 천사를 보내어 먹이시고 길을 계속 가게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먹이시며 재촉해서 이 곳까지 인도하셨는데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신앙의 투쟁을 하다 투쟁의 성격과 역사와 기준과 소망을 다 소실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심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학생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전쟁을 하는데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맞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또 물어보십니다.
최근 광화문 앞에 교회 이름으로 목사님들이 세상 정치 싸움에 앞장서고 보수 정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계십니다. 그중에 한 분이 해결이 너무 늦어지니 연단 뒤에 잠깐 내려와서 하나님께 몰래 여쭤본다면, '주여, 왜 아직도 도와주지 않고 있나이까? 천하의 사단이 한국 교회를 모두 삼키려 하나이다' 이렇게 풀이 죽어서 기도를 한다면, 그리고 그 목사님이 정말 양심을 기울여 들어 보려고 한다면,
이곳이 아는 성경의 말씀은, '네가 목사인데 왜 광화문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11절처럼 크고 강한 정치 바람으로 적기독을 부수려 하며 탄핵의 추진과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보려고 지진 운동을 하고 있느냐, 100만명이 모여 뜨겁게 울부짖는다면 그 불덩이로 아합과 이세벨을 이길 수 있느냐, 구약도 12절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해결을 했는데 하물며 신약의 신령한 이스라엘이 교회와 목사들의 내면 깊이 하나님이 왜 세상을 이렇게 운영하시는지 먼저 조용히 여쭙는 것이 마6:6에서 가르친 골방 기도이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가 역사하지 않겠느냐, 불신자는 광화문에 나와서 크고 강한 바람과 불을 붙여 세 대결을 하지만 교회와 목사는 신앙의 양심 깊은 곳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고요히 듣고 순종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왜 광화문에 있느냐' 이렇게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시간순으로도 적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은식'님께서 먼저 안내하셨습니다. 답변자가 하나 더하고 싶은 것은 시간 순서와는 전혀 달리 물어 보는 '질문'은 문장의 문법 형태 중 단순 질문도 있지만, 질문을 통해 '탄식'도 있고 '책망'도 있고 '답변'을 제시할 때도 있습니다.
2. 삼상 21장과 27장의 아기스
'은식'님께서 안내하신 대로 동일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성경의 인명은 수도 없이 동명이인이 나오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으면 양면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삼상21장과 27장의 경우는 여러 면에서 동일 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입장이 달라진 것은 21장과 27장 사이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란 아주 달라질 수가 있다고 보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을 한자리에 앉아 성경을 열심히 읽다 보니 삼상 21장과 27장의 사이는 11페이지에 지나지 않으나 성경은 한 절 안에서 천하만사가 바뀌도록 생략하는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두고 아들처럼 대하다 원수로 대하며 돌변한 것도, 또 사울이 선군이었는데 폭군으로 바뀐 것도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성자 의인이었다가 참으로 고약한 죄인으로 바뀔 때 그렇게 쉽게 바뀌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여쭐 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 말씀했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하루만인지 1년만인지 평생인지 그 기간을 정하지 않았으나 백 목사님은 하루 490번도 인간의 마음은 더 바뀌더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그렇게 해석합니다. 눈이 밝을수록 과거에 보지 못한 죄를 더 정밀하게 찾아냅니다. 자기 죄에 대해 마음이 넉넉하면 눈이 자꾸 흐려집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 앞에 떳떳히 고개를 쳐들고 눅17장의 세리처럼 자기 자랑까지도 해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