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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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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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18:41
83.11.24 목새 말씀 중
처음 듣는 ‘통의 기도’라는 말씀이 있어 ‘통의’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통의 (通義) 【명사】
:세간에 널리 통하는 도리와 정의
통의 (通誼) 【명사】
:세상 일반이 이행해야 할 도의
백목사님의 ‘통의 기도’의 뜻은 어느 것인지요?
처음 듣는 ‘통의 기도’라는 말씀이 있어 ‘통의’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통의 (通義) 【명사】
:세간에 널리 통하는 도리와 정의
통의 (通誼) 【명사】
:세상 일반이 이행해야 할 도의
백목사님의 ‘통의 기도’의 뜻은 어느 것인지요?
‘통의’와 ‘통회’
녹음은 ‘통의’로 들리기도 하고 ‘통회’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통' 다음 발음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보면
백 목사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직접 만들어 쓰시는 단어가 설교와 직접 연결될 때는 단어(한자)의 의미를 설명하시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이 설교의 경우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가셨는데,
첫째,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갔을 수도 있고,
둘째, 듣는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라서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통회’라는 단어는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전자라면 ‘통의’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후자라면 ‘통회’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교정자의 경험으로는 후자(통회)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통의’라는 말은 백 목사님 설교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설교와 직접 연관된 표현임에도 전혀 설명 없이 잠깐 하고 지나갔다는 것은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인 ‘통회’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백 목사님이 필요하여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 쓰실 때는 1회에 그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사용하신 것이 보통입니다. ‘통의’라는 표현의 기록은 이 설교 한 번이 전부입니다.
‘통’ 다음 말이 또렷하지 않아서 타이핑 하는 사람이 ‘회’를 ‘의’로 들었을 수 있고, 타이핑 원고에 그렇게 되어 있으면 교정자는 여러 번 들어보고 확실히 모르면 별 뜻 없이, 확인하지 않고 타이핑 된 원고 그대로 그냥 지나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논인장단’이라는 단어를 ‘노닌장난’으로 들어서 타이핑도 그리했고 교정자도 그렇게 넘어간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 설교록에는 ‘노닌장난’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초타 친 분도, 교정자도 그 정도 실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해당 단어는 ‘통의’보다 ‘통회’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녹음은 ‘통의’로 들리기도 하고 ‘통회’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통' 다음 발음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보면
백 목사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직접 만들어 쓰시는 단어가 설교와 직접 연결될 때는 단어(한자)의 의미를 설명하시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이 설교의 경우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가셨는데,
첫째,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갔을 수도 있고,
둘째, 듣는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라서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통회’라는 단어는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전자라면 ‘통의’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후자라면 ‘통회’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교정자의 경험으로는 후자(통회)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통의’라는 말은 백 목사님 설교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설교와 직접 연관된 표현임에도 전혀 설명 없이 잠깐 하고 지나갔다는 것은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인 ‘통회’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백 목사님이 필요하여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 쓰실 때는 1회에 그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사용하신 것이 보통입니다. ‘통의’라는 표현의 기록은 이 설교 한 번이 전부입니다.
‘통’ 다음 말이 또렷하지 않아서 타이핑 하는 사람이 ‘회’를 ‘의’로 들었을 수 있고, 타이핑 원고에 그렇게 되어 있으면 교정자는 여러 번 들어보고 확실히 모르면 별 뜻 없이, 확인하지 않고 타이핑 된 원고 그대로 그냥 지나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논인장단’이라는 단어를 ‘노닌장난’으로 들어서 타이핑도 그리했고 교정자도 그렇게 넘어간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 설교록에는 ‘노닌장난’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초타 친 분도, 교정자도 그 정도 실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해당 단어는 ‘통의’보다 ‘통회’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 묵상한다 그 말은 성경 말씀과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행동과 대조를 해 보고 또 자기와 성경 말씀과 대조를 해 보고 이라는 것이 이것이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하다가 보니까 성경에 대한 해석이 나오고 깨달음이 나옵니다. 깨달음이 나오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아, 성경 말씀 생각하다 보니까 아이구 주님이여 이거 잘못됐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죄를 구하는 기도도 나오게 되고, 또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 성경 말씀에 맞도록 할 수 없는데 그 일은 성경 말씀에 딱 들어 맞는 행동을 했다 생각하니까 또 기쁨이 나온다 그말이요.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고, 또 사해 달라는 용서를 구하는 일이 나오고, 또 그라면 이런 일은 보자 성경에 맞나 안 맞나 그 일을 생각하면서 퍼뜩 그게 판정이 안 납니다. 안 나면, 주여 이 일은 성경에 위반이 됩니까 성경에 위 반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하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의논합니다. 모든 전부를 다 들여 가지고, 이 일은 성경 말씀에 위반입니까 합치된 것입니까 내가 깨닫지 못하겠으니까 이걸 알려 주옵소서, 그것이 하나님에게 그해 가지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것,
또, 그라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 아, 이거는 해야 되는데 내가 지혜가 모자라고 의지가, 의지가 약하고 내가 또 신조가 약하고 나는 환경과 주위에 물이 잘 들고 다른 사람의 침노를 잘 받고 친구들의 그 모든 우정을 내가 딱딱 끊지를 못해, 나는 끊는 힘이 약하다, 나는 꼭 매달리는 그 힘이 약하다, 나는 참는 힘이 약하다 뭐 약한 점이 모두 우리 사람에게 많이 있으니까 그런 점 때문에 주님에게 간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통의 기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전투의 행함이 있어야 되고, 또 성경을 읽는 일을 우리가 그치지 안해야 되겠고, 또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안해야 되고 요 셋이 합해 가지고 나갈 때에 우리는 힘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 애통하며 후회하는 면이 강조되면 '통회'일 것이고 죄를 뉘우치고 애통하며 후회하지만 고쳐지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하고 혼자 통회하다가 주님께 의논하는 면이 강조되면 '통의'일 것 같습니다. '통회'가 애통하고 후회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 한다면 '통의'는 통회하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져 가서 의논하는 것이니 통의는 통회를 포함한 더 넓은 의미의 단어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백목사님이 어떤 표현을 사용하셨는지 음성으로 확인하기에 애매한 면이 있고 평소 통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백목사님은 통회를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네이버 검색이나 일반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 '통의'는 둘이 함께 의논한다는 뜻이 있는데 통회한다와 의논한다는 뜻이 합쳐진 통의로 생각해도 통회와 정반대적인 의미는 아니겠습니다.
아, 성경 말씀 생각하다 보니까 아이구 주님이여 이거 잘못됐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죄를 구하는 기도도 나오게 되고, 또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 성경 말씀에 맞도록 할 수 없는데 그 일은 성경 말씀에 딱 들어 맞는 행동을 했다 생각하니까 또 기쁨이 나온다 그말이요.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고, 또 사해 달라는 용서를 구하는 일이 나오고, 또 그라면 이런 일은 보자 성경에 맞나 안 맞나 그 일을 생각하면서 퍼뜩 그게 판정이 안 납니다. 안 나면, 주여 이 일은 성경에 위반이 됩니까 성경에 위 반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하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의논합니다. 모든 전부를 다 들여 가지고, 이 일은 성경 말씀에 위반입니까 합치된 것입니까 내가 깨닫지 못하겠으니까 이걸 알려 주옵소서, 그것이 하나님에게 그해 가지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것,
또, 그라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 아, 이거는 해야 되는데 내가 지혜가 모자라고 의지가, 의지가 약하고 내가 또 신조가 약하고 나는 환경과 주위에 물이 잘 들고 다른 사람의 침노를 잘 받고 친구들의 그 모든 우정을 내가 딱딱 끊지를 못해, 나는 끊는 힘이 약하다, 나는 꼭 매달리는 그 힘이 약하다, 나는 참는 힘이 약하다 뭐 약한 점이 모두 우리 사람에게 많이 있으니까 그런 점 때문에 주님에게 간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통의 기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전투의 행함이 있어야 되고, 또 성경을 읽는 일을 우리가 그치지 안해야 되겠고, 또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안해야 되고 요 셋이 합해 가지고 나갈 때에 우리는 힘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 애통하며 후회하는 면이 강조되면 '통회'일 것이고 죄를 뉘우치고 애통하며 후회하지만 고쳐지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하고 혼자 통회하다가 주님께 의논하는 면이 강조되면 '통의'일 것 같습니다. '통회'가 애통하고 후회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 한다면 '통의'는 통회하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져 가서 의논하는 것이니 통의는 통회를 포함한 더 넓은 의미의 단어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백목사님이 어떤 표현을 사용하셨는지 음성으로 확인하기에 애매한 면이 있고 평소 통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백목사님은 통회를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네이버 검색이나 일반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 '통의'는 둘이 함께 의논한다는 뜻이 있는데 통회한다와 의논한다는 뜻이 합쳐진 통의로 생각해도 통회와 정반대적인 의미는 아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