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가 아니라면 기독교일 필요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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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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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9.28 00:00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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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칼빈주의란
시대마다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교황이라는 하나님들을 사람의 자리로 내려 앉히고,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자리에 모셔 놓았던 분이 칼빈이고 그분의 신앙노선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결국 인간들에게는 호응을 받게 되는데 칼빈은 인간의 생각이 움직이던 교회를 성경만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고 그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예정', '오직 성경',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 없는 전적 은혜의 구원' 등의 교리를 바로 잡아 중세기 1천년 천주교를 따라 헛수고하던 교회를 바로 잡았던 분이 칼빈이며 그 신앙노선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계열의 진보주의 신학은 늘 칼빈주의의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다고 보면 됩니다. 초기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결국 칼빈의 절대 하나님, 절대 성경, 절대 은혜 주의를 반대하고 반대로 인간 중심 인간 위주로 모든 신앙의 길을 잡았기 때문에 오늘 그들의 걸음은 '교회는 북한에 쌀 보내주는 곳'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깨어 있을 때는 칼빈주의가 힘을 가졌고, 교회가 잠들면 바로 알미니안주의가 흥왕하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칼빈은 하나님 위주에 철저하고(*원래 '칼빈은 너무도 하나님 위주로만 집착하고'라고 적었는데 05.11.18. 독자 지적에 따라 '철저하고'라고 수정) 알미니안 계열은 인간 위주로 나갔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교회는 타락하게 되며, 오늘 교회에 칼빈주의가 없어지는 만큼, 그리고 그 자리를 알미니안주의가 차지하는 그 과정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2.칼빈주의에 대한 평가
2천년 교회 역사를 두고 12사도 외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셨던 종을 따지라면 서기 400년대의 어거스틴과 서기 1500년대의 칼빈을 말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교리를 요약 정리했던 분이라고 한다면, 칼빈은 1천년 천주교로 타락한 교회를 바로 잡고, 향후 5백여년 교회가 바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세웠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신앙노선은 교회의 타락과 교회의 바른 길을 따질 때마다 늘 그 표준이 되어 왔습니다. 칼빈이 하나님이며 칼빈주의가 성경이라서가 아닙니다. 칼빈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셨고, 칼빈주의가 성경을 성경으로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3.따라서 칼빈주의의 쇠락은 신앙의 쇠락이며, 칼빈주의의 흥왕은 신앙의 흥왕입니다.
천주교가 타락했을 때에도 물론 극소수의 의인들이 있었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서도 칼빈을 교황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큰 범위에서 정상적인 방향으로 나간다는 전제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흥망과 신앙의 흥망은 정확히 일치되어 온 것이 지난 500여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칼빈주의 신앙이 불타는 교단은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교단이었고, 칼빈이 존경받는 교회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 만큼 대접을 받고 있었고, 칼빈주의가 반복되는 생활은 그 사람을 보는 불신자들의 눈에 진정한 종교인이었고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칼빈주의라는 지식을 팔아먹는 신학자는 신학교 비리에 연루가 되었고 칼빈주의 껍데기만 붙든 교단과 교회들은 교회 간판 아래 정치운동을 하던지 아니면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이름만 소개받은 교인들이 칼빈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들의 입에서 교역자나 다른 형제의 신앙을 정죄하는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로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참 모습, 그 신앙의 참 모습을 오늘 목회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또 교인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속에서 지워왔습니다. 인간이라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은 이해도 되고 또 행하기도 쉽고, 칼빈주의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만을 찾으려니까 어렵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지만 주일을 바로 지키려니까 인간적 고통은 적지 않습니다. 인간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만 보고 믿자고 하니까 그 길이 목회자에게도 어렵고 교인에게는 더 어렵습니다. 자연히 세월에 따라 쉬운 길로 교회는 내려왔고, 목회자나 교인이 서로 욕할 것도 없이 다 함께 인간의 쉬운 길로 내려왔습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그 내려오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안내판이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내판 글씨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한 마디가 더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겠는가!' 이 사상을 인문주의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르네쌍스'라고 하던가요? 그것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뒤집어쓰고 온 탈이 바로 '인본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입니다.
교회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로 만들어야 될 우리들이, 우리가 속한 교회와 교단, 우리의 동역자 우리의 형제 교인들이 칼빈주의 이름만 가르쳤고 또 배웠고, 신학교에서는 칼빈주의의 '생명' 대신 칼빈주의의 '축척된 논리'만을 전수했습니다. 그랬으니 이론만 남고, 그다음에는 이론조차 없어지는 과정을 필연코 밟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정한 칼빈주의라면 자기 교단 자기 교회일지라도 '성경으로' 더 가깝게 더 좋게 고칠 것이 없는지, 더 밝은 교리와 교훈이 없는지를 쉬지 않고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어야 했던 보수교단, 한국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고 '보수'라는 전통과 정통의 이름 안에서 교권싸움과 명예취득으로만 나아왔으니,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어디까지든지 쉬지 않고 가야 하는 '칼빈주의 속성'을 잃었고, 외부에서 죽이기 전 내부에서 먼저 죽을 준비를 다 해버렸던 것이 오늘 '칼빈주의의 실종'입니다.
4.오늘, 칼빈이 실업자가 되고 칼빈주의가 신학교에서 해직을 당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1)목사와 신부가 교류를 하고, 기독교와 천주교가 성경을 공동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고쳐봐야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암환자는 고쳐 사용할 가망이 있고 송장은 묻어버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재가 된 목재는 버려야 하고, 쪼개진 목재는 못을 박아서라도 사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는 불교나 회교처럼 버려야 하지 고쳐 쓸 대상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불교로 화학적 변화를 해버린 단체여서 천주교를 고쳐 사용하지 않고 천주교를 폐기하고, 그 대신 1천년 묻혀진 기독교의 원뿌리를 찾아 다시 움을 틔워 오늘 우리에게 이 신앙을 이어주었습니다.
그 루터와 그 칼빈이 잘했으며 옳게 판단했다는 전제로 시작한 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런 칼빈의 재출발을 이어 오늘에 이르게 된 교회가 천주교는 폐기할 대상이 아니고, 고쳐 사용할 대상도 아니고, 함께 손잡고 나갈 두 팔 중에 한 팔로 본다면,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통일운동 연합운동을 하려면 '칼빈은 종교개혁을 잘못했다'고 정죄를 한 다음 할 일들입니다.
2)원래 타락의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직접 가는 코스와 돌아 가는 코스입니다.
상대방이 아주 강하면 돌아갑니다. 약하면 바로 치고 옵니다. 공산주의의 적화순서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회와 천주교의 접촉이 가장 거부되고 지연된 곳이 한국입니다. 한국교회의 복이며 자랑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눈을 뜨고 진리 구별에 밝은 면을 가졌기 때문에 돌아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신은 총신과 합동운동을 시키고, 총신은 통합과 합동을 추진하고, 통합은 기장과 화해를 시도하고, 기장은 천주교와 연합하고, 천주교는 불교와 석탄일 성탄절 오고가고, 불교는 세상 속에 이미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뒤집어보면 낚시 바늘에 꿰인 지렁이를 작은 고기가 먹고 그 고기를 큰 고기가 먹고 그 고기를 상어가 먹습니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통합에는 양자의 색깔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신, 총신, 통합, 기장 순서로 가지고 나가면 한국교회는 다 꿸 수가 있습니다. 고신은 이미 1960년에 한번 통합을 했다가 밥그릇 문제로 나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합하지 못하는 것은 밥그릇이지 교리는 아닙니다. '통일'과 '통합'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 어느 누구도 한국교회의 진로를 막고 있지 않습니다. 통일을 해야 했다면 과거에 나눈 이들을 전부 정죄를 하면 됩니다. 칼빈이 통일된 단일 기독교를 천주교와 기독교로 쪼갠 반동입니다. 고신의 출옥성도들은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흉들입니다. 장로교 일치와 통일이 옳다면 그런 이치가 필연입니다.
3)흑백논리를 말하면 미개한 사람으로,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흑백만 가졌지 중간을 가졌거나 양쪽을 오가는 구원으로 받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악령을 흑백으로만 가졌습니다. 우리는 죄와 의 둘만이 있습니다. 이것이 칼빈주의라고 믿습니다.
교단을 교리 연구와 신앙 노선 연구의 결과로 합하지 아니하고 '통일'이라는 이름만으로 합한다면 교단 통일보다는 종교 통일을 해야 하고 종교 통일보다는 단일 사회 안에 종교계라는 별도의 세계를 만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극단적이라고 욕하는 이들이 있어도 종교가 진정 종교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라면 당연한 주장입니다. 칼빈주의의 신앙관이 그러합니다.
5.주제와는 다르지만, 이곳 홈페이지는 500년의 연륜을 가진 칼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칼빈이 5백년을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신앙이 그 육체의 연륜만큼 자라갔다면, 오늘의 칼빈은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500년전 씨를 심었고 움을 틔운 칼빈주의가 500여년 세월 속에 바로 자라 버티고 있다면 그 웅장함과 그 강장함은 능히 천하의 이종교, 별별 사상, 과학만능, 철없는 철학, 이권주의 타락한 교회, 신학 만능의 지식우상, 사회주의 신학, 명예주의 목사 등 모든 세상을 까마득히 내려 깔아 보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을 것입니다.
500년 전 천주교를 고쳐 쓸 것이 아니고 폐기하여야 한다는 그 시대 하나님의 뜻을 받던 칼빈주의가 아직도 그 서슬퍼런 칼날을 유지하고 있다면 오늘의 기독교 통합운동을 어떻게 상대하였겠습니까? 바로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의 칼빈을 백영희라고 하겠습니다. 그분은 어느 신학자의 말과 같이 '원어를 모르는' 오늘의 칼빈입니다. 원어는 모르지만 500년간 칼빈이 계속하여 자라왔다면 바로 '백영희'일 것입니다. 500년 전 칼빈은 천주교 1천년의 어용학자들에게서 교회를 찾기 위해 '특이한 경우'로 원어를 가져야 했습니다. 오늘 500년이 자란 칼빈주의라면 능히 원어를 초월할 수 있고 또 실제 원어를 초월했던 세계에서 칼빈주의의 다음 단계를 이 시대에 소개했다는 점을 이곳에서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칼빈이 아니라 백영희의 이름을 들고 나와도 그 사상과 그 중심이 하나님과 성경 유일주의라면 칼빈주의 신앙노선일 것이니 오늘 신학교와 세계 보수교회에 없어진 '칼빈주의'를 아쉽게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숨은 7천명의 이 시대 칼빈' 중에 한 사람이 되라는 사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습니다.
6.여기 우리가 지켜 나갈 '칼빈주의 신앙노선'을 다시 한번 새겨보겠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교단은 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유일주의, 성경 유일주의가 칼빈주의라면 그리고 그 신앙노선을 견지하는 곳이 있다면 있는 대로 전부가 칼빈주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이 없다면 장로교 간판을 아무리 붙이고 있어도 칼빈주의는 아닙니다. 칼빈주의가 아니라는 말은 천주교 교황주의라는 말이 바로 붙어야 합니다. 칼빈주의란 중간에 설 자리를 마련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가 아니면 천주교 교황주의입니다. '교황주의'라는 말이 그렇게 싫고 또 칼빈주의라는 말도 싫다면 그는 '알미니안의 인본주의'입니다.
실직자가 되어버린 오늘 한국과 세계 교회 속의 칼빈, 박물관에 전시되는 수준에까지 내려간 칼빈주의, 그 신앙노선은 출발이 잘못되었던가, 그래서 오늘 그 폐기하는 교회의 운동이 진정한 종교개혁인가? 칼빈의 종교개혁은 세상 불신자들까지도 잘된 것이라고 하며 오늘 교회는 그 감사한 충성으로 시작된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교단 통합운동, 종교 통합운동은 분명 중세기 1천년의 천주교를 오늘에 살려놓는 잘못된 것인가?
이런 질문으로 우리는 오늘 자기 소속의 교회와 교단이 어디로 가는지를 살피며 동시에 자신을 살펴야겠습니다. 바로 오는 적은 준비라도 하지만 돌아서 오는 적에게는 먹히면서도 먹힌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성경으로,
보다 밝은, 보다 옳은, 보다 나은 길을 찾았던 이,
그 이름을 칼빈이라 하겠습니다.
막아서는 상대가 작던 크던,
방해하는 상대가 적던 많던,
말씀으로 나아가고 말씀으로 정지했지, 단체에 밀리고 안면에 흔들리지 않았던 걸음,
그 걸음을 칼빈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칼빈과 칼빈주의로 만들지 않는 탄식은 절망의 죄가 되고, 비판의 죄가 됩니다. 자신을 칼빈과 칼빈주의로 만드는 탄식이 되었다면 우리는 감히 이 시대 칼빈으로 칼빈주의를 지킨 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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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칼빈주의란
시대마다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교황이라는 하나님들을 사람의 자리로 내려 앉히고,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자리에 모셔 놓았던 분이 칼빈이고 그분의 신앙노선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결국 인간들에게는 호응을 받게 되는데 칼빈은 인간의 생각이 움직이던 교회를 성경만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고 그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예정', '오직 성경',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 없는 전적 은혜의 구원' 등의 교리를 바로 잡아 중세기 1천년 천주교를 따라 헛수고하던 교회를 바로 잡았던 분이 칼빈이며 그 신앙노선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계열의 진보주의 신학은 늘 칼빈주의의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다고 보면 됩니다. 초기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결국 칼빈의 절대 하나님, 절대 성경, 절대 은혜 주의를 반대하고 반대로 인간 중심 인간 위주로 모든 신앙의 길을 잡았기 때문에 오늘 그들의 걸음은 '교회는 북한에 쌀 보내주는 곳'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깨어 있을 때는 칼빈주의가 힘을 가졌고, 교회가 잠들면 바로 알미니안주의가 흥왕하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칼빈은 하나님 위주에 철저하고(*원래 '칼빈은 너무도 하나님 위주로만 집착하고'라고 적었는데 05.11.18. 독자 지적에 따라 '철저하고'라고 수정) 알미니안 계열은 인간 위주로 나갔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교회는 타락하게 되며, 오늘 교회에 칼빈주의가 없어지는 만큼, 그리고 그 자리를 알미니안주의가 차지하는 그 과정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2.칼빈주의에 대한 평가
2천년 교회 역사를 두고 12사도 외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셨던 종을 따지라면 서기 400년대의 어거스틴과 서기 1500년대의 칼빈을 말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교리를 요약 정리했던 분이라고 한다면, 칼빈은 1천년 천주교로 타락한 교회를 바로 잡고, 향후 5백여년 교회가 바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세웠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신앙노선은 교회의 타락과 교회의 바른 길을 따질 때마다 늘 그 표준이 되어 왔습니다. 칼빈이 하나님이며 칼빈주의가 성경이라서가 아닙니다. 칼빈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셨고, 칼빈주의가 성경을 성경으로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3.따라서 칼빈주의의 쇠락은 신앙의 쇠락이며, 칼빈주의의 흥왕은 신앙의 흥왕입니다.
천주교가 타락했을 때에도 물론 극소수의 의인들이 있었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서도 칼빈을 교황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큰 범위에서 정상적인 방향으로 나간다는 전제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흥망과 신앙의 흥망은 정확히 일치되어 온 것이 지난 500여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칼빈주의 신앙이 불타는 교단은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교단이었고, 칼빈이 존경받는 교회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 만큼 대접을 받고 있었고, 칼빈주의가 반복되는 생활은 그 사람을 보는 불신자들의 눈에 진정한 종교인이었고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칼빈주의라는 지식을 팔아먹는 신학자는 신학교 비리에 연루가 되었고 칼빈주의 껍데기만 붙든 교단과 교회들은 교회 간판 아래 정치운동을 하던지 아니면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이름만 소개받은 교인들이 칼빈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들의 입에서 교역자나 다른 형제의 신앙을 정죄하는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로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참 모습, 그 신앙의 참 모습을 오늘 목회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또 교인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속에서 지워왔습니다. 인간이라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은 이해도 되고 또 행하기도 쉽고, 칼빈주의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만을 찾으려니까 어렵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지만 주일을 바로 지키려니까 인간적 고통은 적지 않습니다. 인간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만 보고 믿자고 하니까 그 길이 목회자에게도 어렵고 교인에게는 더 어렵습니다. 자연히 세월에 따라 쉬운 길로 교회는 내려왔고, 목회자나 교인이 서로 욕할 것도 없이 다 함께 인간의 쉬운 길로 내려왔습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그 내려오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안내판이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내판 글씨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한 마디가 더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겠는가!' 이 사상을 인문주의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르네쌍스'라고 하던가요? 그것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뒤집어쓰고 온 탈이 바로 '인본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입니다.
교회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로 만들어야 될 우리들이, 우리가 속한 교회와 교단, 우리의 동역자 우리의 형제 교인들이 칼빈주의 이름만 가르쳤고 또 배웠고, 신학교에서는 칼빈주의의 '생명' 대신 칼빈주의의 '축척된 논리'만을 전수했습니다. 그랬으니 이론만 남고, 그다음에는 이론조차 없어지는 과정을 필연코 밟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정한 칼빈주의라면 자기 교단 자기 교회일지라도 '성경으로' 더 가깝게 더 좋게 고칠 것이 없는지, 더 밝은 교리와 교훈이 없는지를 쉬지 않고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어야 했던 보수교단, 한국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고 '보수'라는 전통과 정통의 이름 안에서 교권싸움과 명예취득으로만 나아왔으니,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어디까지든지 쉬지 않고 가야 하는 '칼빈주의 속성'을 잃었고, 외부에서 죽이기 전 내부에서 먼저 죽을 준비를 다 해버렸던 것이 오늘 '칼빈주의의 실종'입니다.
4.오늘, 칼빈이 실업자가 되고 칼빈주의가 신학교에서 해직을 당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1)목사와 신부가 교류를 하고, 기독교와 천주교가 성경을 공동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고쳐봐야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암환자는 고쳐 사용할 가망이 있고 송장은 묻어버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재가 된 목재는 버려야 하고, 쪼개진 목재는 못을 박아서라도 사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는 불교나 회교처럼 버려야 하지 고쳐 쓸 대상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불교로 화학적 변화를 해버린 단체여서 천주교를 고쳐 사용하지 않고 천주교를 폐기하고, 그 대신 1천년 묻혀진 기독교의 원뿌리를 찾아 다시 움을 틔워 오늘 우리에게 이 신앙을 이어주었습니다.
그 루터와 그 칼빈이 잘했으며 옳게 판단했다는 전제로 시작한 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런 칼빈의 재출발을 이어 오늘에 이르게 된 교회가 천주교는 폐기할 대상이 아니고, 고쳐 사용할 대상도 아니고, 함께 손잡고 나갈 두 팔 중에 한 팔로 본다면,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통일운동 연합운동을 하려면 '칼빈은 종교개혁을 잘못했다'고 정죄를 한 다음 할 일들입니다.
2)원래 타락의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직접 가는 코스와 돌아 가는 코스입니다.
상대방이 아주 강하면 돌아갑니다. 약하면 바로 치고 옵니다. 공산주의의 적화순서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회와 천주교의 접촉이 가장 거부되고 지연된 곳이 한국입니다. 한국교회의 복이며 자랑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눈을 뜨고 진리 구별에 밝은 면을 가졌기 때문에 돌아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신은 총신과 합동운동을 시키고, 총신은 통합과 합동을 추진하고, 통합은 기장과 화해를 시도하고, 기장은 천주교와 연합하고, 천주교는 불교와 석탄일 성탄절 오고가고, 불교는 세상 속에 이미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뒤집어보면 낚시 바늘에 꿰인 지렁이를 작은 고기가 먹고 그 고기를 큰 고기가 먹고 그 고기를 상어가 먹습니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통합에는 양자의 색깔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신, 총신, 통합, 기장 순서로 가지고 나가면 한국교회는 다 꿸 수가 있습니다. 고신은 이미 1960년에 한번 통합을 했다가 밥그릇 문제로 나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합하지 못하는 것은 밥그릇이지 교리는 아닙니다. '통일'과 '통합'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 어느 누구도 한국교회의 진로를 막고 있지 않습니다. 통일을 해야 했다면 과거에 나눈 이들을 전부 정죄를 하면 됩니다. 칼빈이 통일된 단일 기독교를 천주교와 기독교로 쪼갠 반동입니다. 고신의 출옥성도들은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흉들입니다. 장로교 일치와 통일이 옳다면 그런 이치가 필연입니다.
3)흑백논리를 말하면 미개한 사람으로,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흑백만 가졌지 중간을 가졌거나 양쪽을 오가는 구원으로 받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악령을 흑백으로만 가졌습니다. 우리는 죄와 의 둘만이 있습니다. 이것이 칼빈주의라고 믿습니다.
교단을 교리 연구와 신앙 노선 연구의 결과로 합하지 아니하고 '통일'이라는 이름만으로 합한다면 교단 통일보다는 종교 통일을 해야 하고 종교 통일보다는 단일 사회 안에 종교계라는 별도의 세계를 만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극단적이라고 욕하는 이들이 있어도 종교가 진정 종교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라면 당연한 주장입니다. 칼빈주의의 신앙관이 그러합니다.
5.주제와는 다르지만, 이곳 홈페이지는 500년의 연륜을 가진 칼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칼빈이 5백년을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신앙이 그 육체의 연륜만큼 자라갔다면, 오늘의 칼빈은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500년전 씨를 심었고 움을 틔운 칼빈주의가 500여년 세월 속에 바로 자라 버티고 있다면 그 웅장함과 그 강장함은 능히 천하의 이종교, 별별 사상, 과학만능, 철없는 철학, 이권주의 타락한 교회, 신학 만능의 지식우상, 사회주의 신학, 명예주의 목사 등 모든 세상을 까마득히 내려 깔아 보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을 것입니다.
500년 전 천주교를 고쳐 쓸 것이 아니고 폐기하여야 한다는 그 시대 하나님의 뜻을 받던 칼빈주의가 아직도 그 서슬퍼런 칼날을 유지하고 있다면 오늘의 기독교 통합운동을 어떻게 상대하였겠습니까? 바로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의 칼빈을 백영희라고 하겠습니다. 그분은 어느 신학자의 말과 같이 '원어를 모르는' 오늘의 칼빈입니다. 원어는 모르지만 500년간 칼빈이 계속하여 자라왔다면 바로 '백영희'일 것입니다. 500년 전 칼빈은 천주교 1천년의 어용학자들에게서 교회를 찾기 위해 '특이한 경우'로 원어를 가져야 했습니다. 오늘 500년이 자란 칼빈주의라면 능히 원어를 초월할 수 있고 또 실제 원어를 초월했던 세계에서 칼빈주의의 다음 단계를 이 시대에 소개했다는 점을 이곳에서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칼빈이 아니라 백영희의 이름을 들고 나와도 그 사상과 그 중심이 하나님과 성경 유일주의라면 칼빈주의 신앙노선일 것이니 오늘 신학교와 세계 보수교회에 없어진 '칼빈주의'를 아쉽게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숨은 7천명의 이 시대 칼빈' 중에 한 사람이 되라는 사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습니다.
6.여기 우리가 지켜 나갈 '칼빈주의 신앙노선'을 다시 한번 새겨보겠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교단은 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유일주의, 성경 유일주의가 칼빈주의라면 그리고 그 신앙노선을 견지하는 곳이 있다면 있는 대로 전부가 칼빈주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이 없다면 장로교 간판을 아무리 붙이고 있어도 칼빈주의는 아닙니다. 칼빈주의가 아니라는 말은 천주교 교황주의라는 말이 바로 붙어야 합니다. 칼빈주의란 중간에 설 자리를 마련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가 아니면 천주교 교황주의입니다. '교황주의'라는 말이 그렇게 싫고 또 칼빈주의라는 말도 싫다면 그는 '알미니안의 인본주의'입니다.
실직자가 되어버린 오늘 한국과 세계 교회 속의 칼빈, 박물관에 전시되는 수준에까지 내려간 칼빈주의, 그 신앙노선은 출발이 잘못되었던가, 그래서 오늘 그 폐기하는 교회의 운동이 진정한 종교개혁인가? 칼빈의 종교개혁은 세상 불신자들까지도 잘된 것이라고 하며 오늘 교회는 그 감사한 충성으로 시작된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교단 통합운동, 종교 통합운동은 분명 중세기 1천년의 천주교를 오늘에 살려놓는 잘못된 것인가?
이런 질문으로 우리는 오늘 자기 소속의 교회와 교단이 어디로 가는지를 살피며 동시에 자신을 살펴야겠습니다. 바로 오는 적은 준비라도 하지만 돌아서 오는 적에게는 먹히면서도 먹힌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성경으로,
보다 밝은, 보다 옳은, 보다 나은 길을 찾았던 이,
그 이름을 칼빈이라 하겠습니다.
막아서는 상대가 작던 크던,
방해하는 상대가 적던 많던,
말씀으로 나아가고 말씀으로 정지했지, 단체에 밀리고 안면에 흔들리지 않았던 걸음,
그 걸음을 칼빈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칼빈과 칼빈주의로 만들지 않는 탄식은 절망의 죄가 되고, 비판의 죄가 됩니다. 자신을 칼빈과 칼빈주의로 만드는 탄식이 되었다면 우리는 감히 이 시대 칼빈으로 칼빈주의를 지킨 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노선/교계] 오늘날 칼빈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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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과 관련된 과목은 폐강은 물론하고 아예 커리큘럼에도 오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부 보수신학 진영의 신학교에서만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마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신학교에서도 커버넌트와 칼빈신학교등 일부 학교에서만 그것도 칼빈의 이름만 거론될 뿐 더이상의 칼빈주의 신학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알미니안 계열의 진보주의적인 신학은 - 물론 이 흐름은 오래전에 그 골격을 갖춰 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거보다 더욱 발전되는 추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지금까지 장로교 보수신학의 근본주축이 되어왔던 이 칼빈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어떻게 견지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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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교계-]/[-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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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과 관련된 과목은 폐강은 물론하고 아예 커리큘럼에도 오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부 보수신학 진영의 신학교에서만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마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신학교에서도 커버넌트와 칼빈신학교등 일부 학교에서만 그것도 칼빈의 이름만 거론될 뿐 더이상의 칼빈주의 신학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알미니안 계열의 진보주의적인 신학은 - 물론 이 흐름은 오래전에 그 골격을 갖춰 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거보다 더욱 발전되는 추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지금까지 장로교 보수신학의 근본주축이 되어왔던 이 칼빈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어떻게 견지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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