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하나만 예를 들면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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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하나만 예를 들면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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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회의 선악과 문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의 영은 즉시 하나님 앞에 주격 책임을 지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 짐으로 죽었고, 그 심신은 둥치가 끊어 진 나무의 가지나 잎사귀는 이미 죽은 것이지만 그 색깔은 당분간 남아 있다가 아주 썩어 버리는 것처럼 그 심신은 늙어 지다가 자기 수명에 따라 아주 흙이 되어 버립니다.

* 유심히 파악했다면
사람의 원죄, 선악과 문제를 두고 보통 설교의 진행에서는 상기 내용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죄의 근본을 정밀하게 설명할 때는 왜 선악과를 먹고 심신이 죽도록 되었는지 그 원인까지 짚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함께 먹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하와가 먼저 먹고 그리고 나서 아담이 먹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 당사자이기 때문에 아담이 먹는 것이 실제 큰 문제입니다. 아담이 먹게 된 것은 하와 때문인데, 하와가 먹게 된 것은 아담 없이 하와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늘 함께 해야 하는 한 몸인데 두 사람이 떨어 져 있게 된 것은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했으나 세월 속에 부부의 사명이 흐려 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흐려 져 갔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가면 갈수록 뜨거워 져야 하고 감사가 더욱 넘쳐야 하고 그로 인해 아담은 자기에게 주신 귀한 사람을 더 붙들고 지켜야 했고 하와는 그 아담을 하나님 대신 사모하고 뱀이 질문을 던졌을 때 아담에게 물어 봤어야 했습니다.

즉, 심신이 죄를 짓는 데 이른 행위의 그 이면에는 이미 그 마음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뜨거움이 서서히 줄어 들며 식어 지며 흐려 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영의 책임입니다. 영, 그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악령이 직접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영 스스로는 죄를 짓지 않지만 영은 자기가 책임 진 자기 마음과 몸을 단속해야 하고 인도를 해야 하고 흐려 지지 않도록 이끌어야 할 주체요 본부요 책임자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아담과 하와의 심신이 선악과를 먹는 겉모습만 적었지만 그 겉모습만 읽어도 우리는 그 심신의 주격인 영의 통치와 장악과 인도와 감화의 약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백 목사님은 '영의 연약' '영의 유약'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윤 목사님의 표현은 이 부분을 영의 죄라고 합니다.

넓게 보면 영의 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영의 죄라는 그 죄를 더 정밀하게 말한다면 약하여 심신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심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의 죄가 된 것입니다. 약하고 모자라고 흐려 진 것을 '죄'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 것은 죄의 정의와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께 모자란 것은 전부 죄라고 말한다면 죄가 됩니다. 이 것을 죄라고 표현하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향해 자라갈 것인데 그 자라가는 천국의 우리까지 죄라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어리다 하지 죄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의 기준을 더 확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의 범위와 기준을 가지고 이해를 할 수는 있습니다.


둘째,
죄의 기준을 조금 낮추어 '하나님의 인도'를 기준으로 그 인도를 정확히 따르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쳐진 것을 죄라고 한다면 영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 서 걸어 가는데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한 경우입니다. 요셉의 30세를 요셉의 출옥으로 일자를 잡아 놓았는데 요셉은 2년이 채 되지 못한 어느 날, 출옥하는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 출옥의 날자를 잡고 움직였습니다. 오늘 우리 수준에서 보면 이 행위가 조금 성급했다 또는 인내가 더 필요했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요셉의 높은 신앙 기준에서 보면 요셉의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실수였습니다. 실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과 속도를 맞추지 못했으니 죄였습니다. 죄의 범위와 기준을 이렇게 잡을 수도 있습니다.


세째,
죄의 기준을 아주 낮추면 '하나님의 명령'이 됩니다. 이래라 저래라고 지시를 했는데 그 지시를 어긴 것만 죄라고 한다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여지 없이 죄가 되고 영은 그 죄에 상관이 없습니다.


선악과 문제를 두고 아담의 영은 심신이 뱀에게 충격을 받아 선악과를 먹는 죄에 나설 때 미리 심신을 잘 가르치지 못했고 미리 심신이 영에게 밀착 되어 철저히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더 이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을 약하게 만드셨고 강한 악령에게 심신을 뺏기고 주저 앉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런 1단계를 거친 다음, 예수님의 대속으로 중생을 시킬 때는 이제는 신인양성일위의 주님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가 중생 된 영의 안에 들어 와서 영을 붙들면서 동시에 영의 향후 자라 가는 데 다시 연약함으로 잘못 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사전에 해결했기 때문에 이제는 오로지 자라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런 전체 내용을 두루 살피면서 윤 목사님의 글을 읽는다면 공회의 평소 표현과 기준으로 볼 때 다소 생소하거나 달라 보이거나 심지어 틀렸다고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중심은 이 노선의 기본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달라 보이는 정도라고 보이지 달라서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 목사님 한 분의 50년대와 6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를 비교해 보면 다릅니다. 그렇지만 더 엄밀히 비교를 해 보면 달라 져서 다른 것이 아니라 점점 뚜렷해 져 가는 과정이고 더욱 정교해 지는 과정이었으니 실은 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공회 내에서도 일찍부터 배운 사람들은 그 교리가 백 목사님을 따라 자라 가는 과정이 있었고 그 자라 가는 과정 때문에 80년대의 교훈은 70년대의 교훈과 마치 대립 되는 모습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회 내에서도 80년대만 배운 사람은 거의 한 교훈만 있고 달라 지는 모습조차 없습니다. 어느 것이 더 유리한다? 일찍부터 배워 나감으로 인해 달라 지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백 목사님 사후 오늘을 살아 가는 과정에 과거를 참고해 보면 오늘이 그리 낯설지 않고 이 말씀으로 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80년대만 딱 아는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또 제일 좋은 것만 알기 때문에 훨씬 우수한 분들처럼 보이는데 백 목사님의 사후인 90년대 이후 공회와 세상 환경이 급변하게 되자 어느 하루 아침에 아주 이상한 사람이 되고 이 노선을 버리는 상황이 무수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고 아주 명확하게 잘 안다고 자신을 했지만 실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윤 목사님은 공회의 기본을 알고 또 전체적으로 공회의 범위를 아는 분으로서 그 범위 내에서 자신만이 겪은 세계를 이 말씀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독자적으로 체계화를 하신 분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자기 진리'라고 합니다. 평생을 한 자리에서 꼭 같은 것을 배워도 남이 가르치는 남의 진리로만 끝까지 가진 사람은 돌아 서면 자기 속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가르치는 분과 표현이나 구체화 과정에 차이가 있어서 달라 보인다 해도 자기 진리를 삼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은 자기 진리화가 된 것은 환경과 시대 때문에 그 진리를 뺏기거나 넘겨 줄 일이 없습니다. 사실 모든 공회인들은 평소 배운 좋은 말씀을 근본으로 삼고 또 그 것을 일단 자기의 노선과 큰 범위로 울타리를 친 다음에, 그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 진 자기 상황을 말씀으로 잘 대처해 보고 써 먹어 봐야 하고 다시 생각하고 체계화를 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각자에게 주어 진 과제가 달라서 다른 표현들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그런 경우는 서로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주신 위치와 사명 때문에 다르다고 보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는 잠깐 또는 부분적으로 근본에서 벗어 나거나 길 자체를 이탈하는데 그런 경우조차 원래 배운 것이 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좌우 상하로 곡선을 좀 그어 가면서 항로를 잡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선 답변 - 17.7.2)
주제연구 4071번을 통해 솔직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잘 설명을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해가 다 되었다는 것은 그 글의 내면을 전부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내면을 표현하고 정리하는 방법까지 모두 찬성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그 설명하는 배경과 내면을 알게 된 상황에서 다시 읽어 보면 모든 것이 공회 신앙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내에서 누구든지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며 또 다른 사람은 외부의 오해 소지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제안도 하고 반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근본적인 문제가 주제이기 때문에 대화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좋은 분이 이 노선의 깊은 고민을 두고 오랜 세월을 살펴 왔다는 것은, 그 세월만큼은 아니라 해도 많은 면으로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 대화하는 상대방의 기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주일이고 내일 양성원 일정이 있어 이 글에 대한 안내는 시간을 좀 미루겠습니다. 안내가 추가 되면 제목에 따로 표시를 하겠습니다.


>> 공회인 님이 쓰신 내용 <<
:
: 주제연구에서 새빛교회의 설명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공회의 교훈과 같지만 설명하는 관점이 다르다는데 저로서는 관점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감리교인이나 침례교인과 교회 정치를 이야기하다 보면 이야기는 거의 다 같습니다. 마지막 해법에서 약간 다를 뿐입니다. 그렇지만 설명하는 시작은 약간 다른 듯했으나 세월속에 각교파는 다른 종교가 된것처럼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공회가 우려하는 부분이 아닌가요?
이해가 어렵습니다.
주제연구에서 새빛교회의 설명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공회의 교훈과 같지만 설명하는 관점이 다르다는데 저로서는 관점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감리교인이나 침례교인과 교회 정치를 이야기하다 보면 이야기는 거의 다 같습니다. 마지막 해법에서 약간 다를 뿐입니다. 그렇지만 설명하는 시작은 약간 다른 듯했으나 세월속에 각교파는 다른 종교가 된것처럼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공회가 우려하는 부분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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