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판, 감수용'에 대한 언어학적인 검토 (관리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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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판, 감수용'에 대한 언어학적인 검토 (관리자 인용)

분류
(김정수) 0
제목분류 : [~성경~성경관~성경번역~]

내용분류 : [-성경-성경관-성경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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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관련된 '참고문'입니다. 읽기에 편리하도록 칸 띄우기를 했습니다. 관리자)


<성경 전서 개역 개정판, 감수용>에 대한 언어학적인 검토 한양 대학교 교수 김 정수


대한 성서 공회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사랑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성경 전서 개역 한글판>(이하, "개역판")은 1911년에 완역되고 1938년에 대폭 개정되었다가 1961년에 최종적으로 개정된 것인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역 성경 자체의 번역의 어려움과 언어의 변천에 따른 우리 말 표현과 어휘의 변화 때문에 개역 성경을 다시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교회의 요청에 따라 1983년부터 10 년 동안 "개역 개정 위원회"를 통해 개역 개정판의 원고를 준비하고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여러 교단에서 대표로 파송한 성경학자, 신학자, 목회자, 국어학자 등으로 구성된 "성경 전서 개역 한글판 개정 감수 위원회"를 거쳐 개정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그 결과가 이제 1997년 11월 20일 발행의 <성경 전서 개역 개정판, 감수용>(이하, "개정판")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서 공회에서는 이보다 앞서 1968년 1월 신구교 대표로 구성된 공동 위원회를 통해서 공동 번역을 시작하고 1977년 부활절에 <공동 번역 성서>(이하, "공동 번역")를 발행했다. 이 책은 세계 성서 공회 연합회와 바티칸이 합의한 번역 지침과 공동 위원회 자체의 번역 원칙에 따라 이루어 진 것으로 신구교에서 함께 쓰이게 하려고 만들어 진 현대말 성경이다. 그러나 성서 공회는 6 년 뒤인 1983년부터 오직 신교만을 위한 또 다른 현대말 성경을 준비해서 1992년 성탄절에 <성경 전서 표준 새 번역>(이하, "새 번역")을 발행했다. 이번의 <성경 전서 개역 개정판, 감수용>은 공동 번역으로도, 새 번역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교회의 다른 요구를 위해서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 요구는 개정판의 보수적인 문체로 짐작컨대 공동 번역도 새 번역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인 신교인들과 교회의 요구일 것이며, 그 목표는 개역판을 개정판으로 완전히 바꾸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은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서, 한 번은 신교의 젊은이들을 위해서 봉사한 성서 공회가 이제 또 한 번은 신교의 늙은이들 또는 젊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자는 데에 이 새로운 번역의 뜻을 둔 것으로 인정된다.


대강 훑어 보면 개정판은 개역판의 옛말 문체를 보전하면서 일부 어휘와 표현의 현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개역판에 길든 사람들이 개정판의 달라짐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제한해서 어렵지 않게 옮겨 갈 수 있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렇게 되기만 한다면 개정판은 성공작이 될 것이다.


1911년의 개역판이 1938년의 대폭 개정을 거쳐 1961년의 최종 개정에 이른 것이라 했거니와, 거기서 다시 이번 1983년부터 1997년에 이르는 동안 개정판에서 표현이 바뀌는 모습도 역시 대폭적임을 보면, 성서 공회는 성경 번역에 대해서 여간 대담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성경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여간 관대하지 않거나 무관심하거나 했기에 이런 폭넓은 개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번역이 아니고 개정이어서 유감스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대략적인 문체의 동질성을 겨우 유지하는 한계 안에서 개정 작업이 상당히 자유롭게 이루어 져 있으니 말이다.


두드러진 차이를 보자. 창세기 1장에서, 어휘 부류로 "가라사대"는 어김 없이 "이르시되"로, "칭하다"는 "부르다"로, "육축"은 "가축"으로, "공중"은 "하늘"로, "식물"은 "먹을 것"으로, "비취다"는 "비추다"로 바뀌었다. "빛과 어둠"을 "그 빛과 그 어둠"으로, "궁창"을 "그 궁창"으로, "뭍"을 "그 뭍"으로, "모인 물"을 "그 모인 물"로 바꾸어 지시 대명사 "그"를 많이 첨가한 점도 눈에 크게 띈다. 조사 부류로서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생물로 번성하게 하라"는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로 바뀌었다. 어미 부류로서 "창조하시니라"는 "창조하셨느니라"로, "하시매"는 "하시니"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바뀌었다. 뒤에 말할 어미의 예외를 빼고는 대체로 현대인의 언어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을 거의 다 바꾸기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 2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로 바뀌어 부분적인 대조가 어려울 만큼 문장 전체가 크게 바뀌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이 개정판 전체에서 문장을 마치는 어미 "-니라"나 "-더라"를 "-었다"로 모조리 바꾸기만 하면 개정판 자체가 꽤 자연스러운 현대말 성경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개정판의 문체를 옛말투로 보이게 하는 것은 대체로 이 종결 어미 "-니라"와 "-더라"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미 부류 가운데 "-이러라"를 "-이더라"로, "-뇨"를 "-냐"로, "-이니라"를 "-이라"로, "-신대"를 "-시니"로, "-이어든"을 "-일진대"로, "-이로라"를 "-이라"로 바꾼 것은 일관성도 지키지 않았거니와 현대화라는 명분에도 맞지 않고 국어학의 전문 지식이 충분히 적용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내가...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 17)를 "내가...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로 바꾸었는데, 여기 "함이로라"의 "-로-"는 "보내노니, 이르노니, 왔노라" 등의 "-노-"에 포함된 "-오-"와 더불어 그 주체가 일인칭임을 나타내는 문법 기능을 가진 형태소이기 때문에 "함이로라"를 "함이라"로 하려면, "보내노니, 이르노니, 왔노라" 등에서도 같은 형태소를 모조리 빼어 "보내나니, 이르나니, 왔다" 등으로 바꾸었어야 옳다.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2: 15)를 "이루려 하심이라"로 바꾸어 "-니-"를 빼려면 "따르니라, 유익하니라, 나느니라" 등의 "-니-"도 다 빼고 어형 전체를 "따르다, 유익하다, 난다" 등으로 크게 바꾸었어야 맞는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마 2: 4)를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로 바꾸었는데, 의문 종결 어미 "-뇨"는 그 문장 안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의 의문사가 있을 때 곧 설명 의문문에서 쓰이고 의문사가 없는 의문문 곧 판정 의문문에서는 "-냐"가 구별되어 쓰인 것인 만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 1: 17)를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더라"로 바꾸었으면, "이루려 함이러라"(마 2: 23)도 "이루려 함이더라"로 바꾸었어야 일관성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개정판의 개정 위원회와 감수 위원회의 위원들이 반세기 이상의 거리를 둔 개역판의 한국말과 현대 한국말의 구조적인 차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일했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형태소들에 대해서 이토록 무감각하지만, 개역판의 번역자들과 당대 한국 사람들은 이들을 잘 알고 세심히 구별하면서 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교회에서 흔히들 혼동하고 쓰는 "복"과 "축복"(복을 비는 일)이라는 중요한 낱말 한 쌍이 개역판 어디에도 혼동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울러 참조하기 바란다.


1911년에 완역된 개역판이 27 년이 지난 1938년에 대폭 개정되었다는 것도 본격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거니와, 이 개역판이 86 년이나 또는 59 년이나 지난 1997년에 이처럼 언어학적인 오류를 크게 지닌 채로 대폭 개정된다는 것은 어느 모로나 적절하지 못한 일이다. 반세기나 넘은 시기의 문헌을 개정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개정 주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무리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개역 개정 위원회와 감수 위원회 등에 참여한 20세기 말기의 성경학자, 신학자, 목회자들이 20세기 초기의 한국말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위에 지적한 바 문법 형태소 전반에 대한 잘못과 소홀함으로 보아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오늘날의 누가 맡아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옛글을 읽을 줄 아는 것과 옛글을 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개정판의 감수 위원회에 국어학자가 참여했다고는 하나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느끼기 어렵다. 종결 어미나 겨우 유지하는 개정판이 개역판을 대신하기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속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저런 차이를 알거나 설명을 듣고 이해하거나 한 분들은 개정판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


언어는 낱말이나 형태소 등의 요소를 대강 대강 섞고 뭉쳐도 무관한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요소가 치밀한 관련을 맺고 이루는 정교한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시대를 따라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개역판 성경의 모든 언어적인 사항들은, 문체든, 개별 어휘든, 문법적인 조사며 어미들이든, 개역 당시인 20세기 초기 한국말의 유기적인 구조로 인정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보존해야 서로 가장 잘 어울리며 저마다 지닌 본래의 의미와 기능이 살게 된다. 어려운 어휘나 표현 등에 대해서는 찬송가에서처럼 각주 등의 방식으로 풀이해 주는 것으로 족히 여겨야 한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경우와 독자를 위해서는 <새 번역>도 있고 <공동 번역>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절제 없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빼고 바꾸고 한 개정판의 사이비한 옛말투는 아무런 가치도 매력도 없다.


20세기 초기 한국말과 20세기 말기 한국말은 도저히 한데 섞일 수 없도록 이질적인 구조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만큼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한국말도 가장 귀하고 순결한 것이어야 할텐데, 개정판의 균질하지 못한 한국말은 품격이 낮은 피진(pidgin) 언어와 같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소와 나귀를 함께 부리지 말고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신 22: 9- 11) 하신 말씀을 이 경우에 적용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차라리 성경학계의 최신 연구 결과에 비추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이 혹 있다면 바로잡고, 누가 보아도 분명한 문법적인 잘못이나 편집의 잘못 또는 인쇄 단계의 잘못 등을 고치는 정도에서 그치는 수정판이 절실하다. 필자가 198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개역판에서 찾아 내고 성서 공회에 보고한 잘못만도 500 군데가 넘는데 최근판에서마저 아직 충분히 고쳐 지지 않았다. 책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수정판을 내든지, 그럴 형편이 못 되면 고침표라도 따로 만들어 책에 끼워 내는 것이 세상 사람의 출판 관행이며 윤리이건만, 성서 공회는 무슨 면책 사유라도 있는가? 이런 흠만 찾아 고친 수정판만으로도 훌륭한 봉사가 될 것이다.


1998. 1. 5.


대한 성서 공회 귀중
[성경관] '표준새번역'이라는 현대어 성경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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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메일로 들어온 질문입니다. 많은 면으로 신중하게 또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해야 될 중요한 질문이어서 관리자로서 질문자를 대신하여

문의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을 중심으로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을 고려하여

성경번역에 대한 총공회의 기본적, 원리적 신앙입장을 전반적으로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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