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분 권사님을 좀더 자세히 비교 설명드립니다. (3차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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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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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8.30 00:00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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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굳이 교역자 이름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분들은 큰 목회자들이었습니다.
1)백목사님의 교인관리의 평생 원칙
①서부교회 부흥의 성격
백목사님은 주일학교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주일학교 재적 학생 2만 5천이라는 역사 최고기록보다 더 놀라운 것은 보수교회 장년반과 꼭같은 모습의 엄격한 예배로만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시청각교육 등의 보조교재나 전도나 출석을 유도하는 어떤 선물,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칙을 성경에서 발견했고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②성경에서 찾아본 교인관리 5가지 원칙
장년반의 구역장이든 주일학교의 반사든 자기가 전도한 식구는 자기가 신앙의 부모로 길러야 한다는 '개척창설'의 제1원칙, 인간의 관리능력을 전제로 한 정원제를 주시는 대로 받는 '무정원실력'의 제2원칙, 책임자는 기관의 인사이동 개념을 배제하는 '고정담임'의 제3원칙,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평생임기'의 제4원칙, 예배모임인 교회는 나이나 학식 등으로 차이를 두면 안된다는 '통합모임'의 제5원칙 등입니다.
③주일학교보다 장년반이 더 큰 부흥이 있었고 네 권사님은 가장 성공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스승은 많아도 아비는 많지 않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믿는 사람이 가장 믿는 사람답게 나타날 때는 자기가 전도한 교인들을 상대할 때입니다. 그들에게만큼은 진정 희생도 사랑도 애타는 간구도 노력도 다 기우려집니다. 목회자라도 자기가 직접 전도한 교인에게는 목회자가 아니라 부모의 심정으로 희생하게 되고 그 도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라도 자기가 직접 전도하지 않은 교인, 또 그런 교회에게는 '근무 중인 목회직'으로만 상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도 못할 것입니다.
2)이 5가지 원칙대로 활동했던 많은 분들 중에 가장 성공했던 분이 네 권사님들입니다.
①한번 전도한 식구는 자기 친자식으로 길러갔습니다.
권사님들에게도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전도한 식구는 믿음의 식구였고 이 믿음의 식구들은 권사님들에게 말로만이 아니고 진정한 참 자녀들이었습니다. 권사님들의 가족들 중에 믿음의 자녀로 바뀐 분들은 육의 어머니를 신앙의 어머니로 바꾸어 가질 수 있었고, 육의 자녀들 중에 믿음이 없어 이해를 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육의 어머니를 잃어야 했습니다. 자녀 양육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육의 자녀와 신앙의 자녀를 꼭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권사님들로서는 너무도 많은 신앙의 식구들이 너무도 가까이 널려 있었고 육의 자녀에게는 마음이 있다해도 손이 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길러간 식구들이 주일 출석 교인으로 2-3백여명, 많게는 3-4백여명, 재적교인으로 7-8백명에서 3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많아지는 과정에서 남반 교인들은 목회자로 출발한 사람이 1-20여명씩 되었으며 여반 교인들은 권사님들을 뒤 따라 또 수십 또는 수백의 교인을 거느리는 구역장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②임명을 받아 관리자로 부임한 경우가 아니라, 전부를 친 자식으로 낳았고 길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다 길렀으며, 식구들이 많아지면서는 수십명의 중간 구역장님들을 모아 그들을 통하여 길렀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어머니만한 새댁들이 있겠습니까? 말로는 중간 구역장이라고 하나 교인 가정마다 발생되는 모든 신앙 내외적 문제들은 권사님들에게 보고가 되고 처리가 되며 해결이 되어졌습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은밀한 고민을 가장 먼저 찾아가서 의논드리고 또 해결까지 받아 올 수 있는 곳이 그들이며, 사업 실패로 오갈 데 없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 힘을 얻고 출발하는 곳이 바로 그들입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자신들의 성공 뒤에는 권사님의 기도와 지도가 있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여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경제를 항상 요구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던 곳이 바로 이들입니다. 폐쇄된 사이비나 이단같은 집단이 아니라 가장 보수적이며 정통에 굳게 선 교회에서 이런 분위기가 있다면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분위기가 장한 어머니 슬하의 어린 자녀들 관계였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흔히 발생되는 파벌싸움, 내분이 없었습니다.
③교회의 모든 서열은 충성으로 맺어진 결과, 열매 순위였습니다.
이말출, 김현찬, 김효순, 나인숙 권사님. 이 분들의 이름은 이렇게 기록되어 나갑니다. 그분들의 교인 식구 숫자대로입니다. 교회는 목사님의 설교소리만 들립니다. 모르면 질문하면 됩니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문제에 해결책을 일러 주지 못한 경우가 백목사님 40년 서부교회 목회에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한 가지는 모든 교인 모든 구역장에게 꼭같이 전달됩니다. 나머지는 본인들이 받은 은혜로 주신 형편을 따라 충성한 충성뿐입니다. 이 권사님들을 '권사직'으로 임명한 것은 40년 사역이 다 끝나가던 때, 70세를 다 넘겼을 때였습니다. 다른 교회로 말하면 은퇴할 나이를 넘겨 그 동안 충성에 '권사'직 하나로 모든 것을 덮었던 것입니다.
2.네 권사님들의 사역을 구역 소속 인물로 보면 이러합니다.
1)이말출 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1911. 5. 16. 출생하여 42세 되던 1952년에 백목사님을 서부교회 조사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1989년 권사님 81세에 백목사님이 먼저 가시고, 1996. 10. 16. 수년간의 불편 중에서도 구역식구들의 지성적 섬김을 받으면서 이 땅위의 생을 마쳤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기 이전에 서부교회 집사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고신본부라는 부산에서 첫째로 꼽는 여성도였고 경제가 넉넉했으며 교역자에 대한 충성과 접대가 극진하였으므로 고신 교역자들에게 수넴여인과도 같았습니다. 백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던 1952년 부산의 제일 명문이었던 부산여고에서 교사로 계셨고, 사범학교 교수로도 재직했던 분입니다.
1950년 6.25로 인하여 전국이 부산으로 피난 집결하였고, 임시정부가 있었던 건물과 대통령 거처가 바로 서부교회 건너편이었습니다. 이 시절 경제와 직책 등 여러 면에서 그는 많은 분들을 섬기며 많은 분들에게 지극히 곤란했던 시절을 도울 수 있었던 형편이었습니다.
육의 자녀로는 연세대 영문학과를 나와 총공회 목회자로 심방길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충성했던 이동화목사님이었고 그의 평생 목회는 어머니의 지도가 항상 있었습니다.
②돌아선 신앙
목회자를 가장 극진하게 모셨던 면은 비교될 분이 없었고 이로 인하여 고신내 가장 유명한 여성도 중에 한 분이었나, 백조사님의 부임 후에는 교만과 인간적 대접만을 깔고 있다는 책망을 받았으며 그후 신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라는 것과 인간적 도덕과 신앙은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자기 자신의 살아온 과거를 완전히 바꿔버린 분이었습니다. 현재 이말출권사님의 노트는 1953년부터 시작됩니다.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부임은 1952년 7월입니다. 1년이 지나도록 백목사님의 설교는 이 권사님의 귀를 그냥 넘어가고 있었으며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한번 깨닫고 한번 돌아선 다음은 죽는날까지 한 길이었습니다.
③교훈
그분의 설교는 요점을 간단히 그러나 아주 조용하게 증거하여 아이들 귀에 들리는 자장가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자장가 속에 성령의 큰 음성은 듣는 교인의 마음을 천둥과 번개로 내리치는 듯 하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가 대단히 여러 모습으로 증거되는 가운데 이말출권사님은 인간의 말 소리는 가장 작게, 성령의 외침은 가장 크게 전해지던 모습을 특별히 많이 배웠고 또 그 능력을 가장 많이 재현했던 분입니다. 조용한 사자후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분이 필기한 백목사님 설교필기집에도 이런 면은 여실히 나타나고 있으며, 그 구역 출신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데이터작업이 되고 있으며, 필기설교집의 형태로 출간하고 있습니다. (연락: 서규용/서부교회중간반 반사/051)243-9311)
④신앙의 식구들
이말출권사님으로 총공회 신앙을 배워나온 이들은, 일단 그 숫자에서 서부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1등 구역이었습니다. 이도영목사님, 이치영목사님 등과 비록 오랜 기간 부산에 있지는 않았어도 경북부지사를 지냈던 황길태장로님, 중앙대 법대학장이었던 서헌재집사님, 양진근집사님 등이며 특히 이 구역은 서부교회 내 가장 여반으로 충성하던 분들이 많습니다. 일일이 손을 꼽을 수 없는 정도입니다.
2)김현찬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1914. 7. 26. 출생하셨고 백목사님이 가시던 때 76세, 이후 수년간을 병석에서 더욱 고생을 하셨으나 구역식구들이 친부모 이상으로 극진하게 모셨던 일은 권사님의 평생 교인사랑과 믿음 안에 참 자녀로 기르는 모습을 눈으로까지 보게 합니다. 1999. 6. 27. 가셨습니다.
②새로 출발한 신앙
고신이 장로교단 전체를 상대로 해방후 교권투쟁을 벌일 때 그 총무노릇을 했던 교회가 부산남교회입니다. 월남한 교인으로서 남교회에서 큰 인물이었으나 이웃 대신동 서부교회로 부임한 백영희조사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또 말씀을 접한 뒤, 남교회를 사랑하고 또 남교회의 복음운동 중심역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서부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자신이 믿어온 과거가 남들에게는 일꾼으로 보이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 믿지 않으면 평생이 외식을 벗지 못하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와 충천한 은혜는 당시 고신 안을 진동시키고 있었으며 장로교 총회에서 소수파로 몰리던 고신에게 가장 많은 교회를 고신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고신교단에 속한 각 교회를 살리려는 목적에 충실했던 백목사님은 타교회 교인에게 자신들의 교회를 충성하고 지킬 설교로 가는 곳마다 해당 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었으나, 피난왔던 교인들은 당시 다니던 교회를 모교회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이런 몇 분들이 백목사님의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어 고신 안에서 백목사님의 입장이 크게 어려웠던 중이었으나 김현찬권사님은 이 사정 저 사정에 눈치 보다가 내 신앙이 허송되겠다고 교회를 옮겨버렸고 그 후 생명 다할 때까지 그 길을 걸었습니다.
*교인 사랑은 가장 힘든 교인자리에 앉은 다음 시작하는 것
백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전적으로 하고싶은 사람들에게는 남자에게는 막노동과 난장 장사를, 여자에게는 참기름 계란 등을 이고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팔게 하는 과정을 꼭 거치게 합니다. 단순히 통과모습으로 지나가지 않고 철저하게 그리고 장기간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임지고 지도할 사람은 자기가 지도할 사람들의 가장 어려운 일 가장 고난스런 세상을 자기 몸으로 겪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는 손가락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교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목회, 그런 교인지도는 이 복음의 원수라는 입장입니다. 주님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천한 자리를 원함으로 통과하셨으니 고생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역자인 백목사님 스스로가 인간 한계의 고난과 고통을 다 겪어본 분입니다. 그런 입장을 알면서 교인에게 권하는 말씀에는 자기보다 더 자기 현실을 잘 알고 지도하기 때문에 저절로 배워지고 머리가 숙여지게 됩니다.
평생에 해보지도 않았고 해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권사님이 수년 이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발바닥으로 교인 중에 가장 고통스런 자리를 힘껏 다 겪은 다음 그들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교인들에게는 반발심이나 이질감 없이 순종하게 되었고, 이 과정을 가장 잘 통과를 했었는지, 이 구역은 식구들의 경제로 본다면 가장 크게 성공하는 구역이 되었습니다.
③교훈
김현찬권사님의 교훈은 강단에서 설교로 임할 때보다 교인 한 가정 한 가정을 찾아 외칠 때 더 힘있게 역사했던 분입니다. 다른 구역에 비하여 교인의 세상 직장이나 경제 형편 등이 크게 다른 경우가 많았고 또 구역별로는 가장 서부교회답지 않은 체질의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교훈은 각 교인과 가정에 권위있게 박혔고 또 그 능력은 여러 종류의 교인으로 한 지도를 받도록 만들었고 결국 가장 장로님들을 많이 배출한 구역이 되었습니다.
④신앙의 식구들
목사님께서 그 죽음을 두고 그렇게 자주 언급했던 박신한조사님, 김주석목사님, 이춘영장로님, 홍종복장로님 등과 이성금집사님, 김옥자집사님, 김수경집사님 등입니다. 지금 주로 남정교회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분 권사님 중에서 제일 넓은 구역이라는 인상이 있었으나 어린 신앙들을 길러가기 위해 어머니가 대신 짊어질 오해였다는 것은 백목사님 순교 후에 나타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잘 해명이 되어졌습니다. 마지막 80세를 넘기면서 더욱 좁아졌던 분이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3)김효순
①원래의 신앙
월남한 신앙인으로 서부교회 백목사님을 따르게 된 분입니다. 원래 담대하여 매사에 호탕하고 추진력이 있었던 분이었으나 백목사님을 만난 뒤로는 말씀 하나 하나의 깊이를 알아 말씀과 기도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김현찬권사님과 외모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았고 또한 그 겪어나온 세월에서도 가장 절친하였던 관계로 앞에서 설명드린 김현찬권사님의 소개가 이 권사님 구역에도 대부분 해당이 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설명할 내용은 적지만 네 권사님 중에 가장 힘있는 권사님이라는 표현으로 이 권사님의 비중을 평가합니다.
②새로 출발한 신앙
백목사님을 모시고 다시 시작한 신앙생활은 새벽기도 마치면 기도하고 하루 종일 머리에 이고 골목 골목 다니며 장사를 하고 저녁이면 예배당에 모여 새벽설교 때 필기한 기록을 놓고 서로가 맞춰보며 그다음 구덕산 뒤로 올라가서 밤새 철야를 하고 다시 새벽기도를 보러 내려오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골목 장사, 발로 일일이 밟고 다니는 장사는 생각도 못해보고 나온 신앙생활, 이렇게까지 어려운 교인의 밑바닥을 수년에 걸쳐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목회자의 교인사랑법을 이렇게 익혀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가장 건강하였고, 이 건강이라는 자연은혜가 충성하는 일에 더욱 많이 쓰여지게 된다면 건강도 복일 것입니다. 90을 바라볼 지금 나이에도 젊을 때의 충성이 계속되고 있으니 50년이라는 반평생을 남자로 말하면 목회일선에서 그대로 계속한다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③교훈
서부교회 구역 중에서 가장 권사님의 지도가 잘 전달되고 잘 움직여 주는 구역이라면 이 김효순권사님 구역입니다. 네 권사님 중에서 그 지도의 힘이 가장 강하게 확인되고 구역식구의 움직임도 백목사님 사후 10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가장 강합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는 네 권사님 중의 하나였고, 백목사님 순교후에는 10년이 지나는 현재까지 서부교회의 모든 방향을 최종 결정하는 분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모든 결정은 평소 교훈과 교인 지도를 해온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볼 때 네 권사님 중에 가장 힘있는 권사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객관적일 것입니다.
④신앙의 식구
교역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역입니다. 말씀연구에 깊었던 신용인목사님, 성구암송이 뛰어났던 김응도목사님, 기도의 사람 김삼암목사님, 비록 탈퇴는 했지만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송용조목사님, 세상실력으로는 제일이라할 수 있는 장렬목사님, 현재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서영호목사님, 그 동생 서윤호목사님, 김윤수목사님, 이병철목사님, 이병호목사님,, 김영환목사님 등 참으로 오늘까지 성실하게 구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들은 거의가 권사님을 친모로 지도받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서부교회 전체를 권사님의 결정으로 방향을 잡고 나가는데 그렇게 큰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4)나인숙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권사님들이 백목사님을 만나기 전 살아온 인생은 여간 언급을 잘 하지 않아 왔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자책이 있으며, 또한 이전에 여러 활동들을 한 것이 백목사님을 만난 뒤로는 다 창피한 인본신앙이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인숙권사님에 대하여는 약간의 설명이 더해지는 것은 아들에게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내심을 말하는 가끔을 들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에서 일제 때 10여대의 택시를 가지고 운수사업을 하였던 조선인으로 몇 손가락 꼽을 거부의 무남독녀 딸입니다. 학교 공부를 출중하게 잘했고 일제 때 서울에서 유명했던 승동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로도 유명하였던 분입니다. 자기 모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늙어가는 딸을 보살펴야 할 정도로 세상 형편이 좋았던 분입니다.
6.25전란에서 무사히 부산으로 피난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하는 신앙이었고, 교회를 두고 신앙박해를 피한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실패라는 교훈을 듣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부산으로 피난 온 나인숙권사님은 손양원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 전기작가인 안용준목사님, 안목사님과 함께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고신의료원과 고신의 학생운동인 SFC 창립자인 거창고등학교 교장 전영창선생님과 함게 전국 순교자 유가족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후원회의 살림을 책임진 분입니다. 따라서 교계적 지명도가 상당하였는데 나권사님이 부산에서 교계적 인물로 한참 일하던 때에 박복달, 박인순, 조수옥 등 여러 동료들로부터 당시 백영희조사님 소식을 듣고 여러차례 부흥회 참석을 하였으나 그리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어 처음에는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사선을 통과한 초인들이었으나 그들의 유가족을 돕는 나 권사님은 인간적으로 또는 동정심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니 정작 자신이 전념하는 후원회의 본질인 '순교신앙'은 겉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씀을 알게되고 지금껏 믿었던 모든 것이 신앙의 진정한 본질과는 다른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②깨끗한 소망, 진리 깨달음에 특별했던 새 신앙
김현찬 김효순 권사님들은 힘에 넘친 모습이 특징이었다면, 나권사님은 완전 대조적인 외모를 가진 분입니다. 깨끗한 천국 소망이 특별했으며 진리에 대한 사모가 특심하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가 교리와 주경 위주로 진행되는데 이를 내용적으로 파악하여 살피는 면에서는 단연히 최고였습니다. 백목사님이 고려신학교를 다니시면서 전국 부흥회를 인도하느라고 강의 출석을 거의 못하였으나 고려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나권사님이 그 필기 정리를 도맡게 되었고 또 강의내용에 대한 백목사님의 여러 가지 평들을 적어 백목사님의 교훈 연구를 가장 가까이에서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회계능력, 깨끗한 중심, 칼날같은 충성 등을 고려하여 마지막 백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서부교회의 십일조회계를 맡았습니다. 70이 넘어서도 회계를 책임진 그에게 젊은층에서 대형교회의 가장 큰 재정을 실수없이 하겠느냐고 백목사님에게 회계담당을 교체 건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고를 졸업한 은행직원이 회계를 맡으면 끝 숫자를 딱딱 맞추어 보고 하겠지만, 그 가운데 어느 돈이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모르게 되고, 신앙의 중심을 가진 사람이 회계를 보면 나이가 많아 숫자가 틀려지는 경우가 있어도 교회에 바쳐진 연보가 장부 착오로만 남지 실제 사용에서는 틀림이 없게 된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의 평생 서부교회 제일 핵심 살림을 도맡게 된 것은 초기 권사님들에게 사회생활을 고급으로 한 사람들이니 가장 힘든 교인의 형편을 몸으로 완전히 익히라고 보따리 장사, 계란이나 참기름을 함박이로 이고 나르는 장사를 시켰는데, 유독 나권사님은 그 체격이 혼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약했기 때문에 장사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나권사님에게 백목사님은 어느 부자집 식모살이를 부탁했으니 가보라고 했습니다. 식모를 하겠다고 찾아온 나권사님에게 그 집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돌아가라 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백목사님은 웃으면서 '중심이 바르고 결심을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니 교회 안에 사무를 보라'고 하셨으며 그 이후 백목사님의 여러 종류 원본 노트 정리와 회계를 맡아오게 된 것입니다.
③교훈
나권사님은 백목사님이 마지막 설교하던 1989년, 자신도 이미 완연한 할머니였지만 매 설교가 끝나는 즉시 그날 설교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단 몇 마디로 다시 요약 정리하여 주곤 했습니다. 보통 백목사님의 설교는 목회자들도 녹음 타자된 원고를 수 차례 정독하지 않고는 그 깊은 내면에 묻어둔 깊은 말씀들을 파악하기 어려운 법이고, 예배 즉시 바로 요약해 내는 정도의 실력은 나권사님이 가장 앞섰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맡은 식구들을 대할 때 주로 간단한 말씀 요약들을 통해 진리로 교인을 가르친 구역장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고 평하겠습니다.
④신앙의 식구
권사님들이 신앙의 어머니 위치를 바로 잡았고 그 세월이 오래였으므로 육의 자녀가 부모를 닮듯 신앙의 식구들도 그런 경향이 많았습니다. 나권사님의 진리 중심, 깨끗한 중심은 키워가던 식구들에게도 이어져 홍순철목사님이 나권사님으로 전도되고 목회자로 출발하여 3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걸어간 걸음은 백목사님의 소원을 순종으로 다 옮겨놓았던 정도였습니다. 여반으로서는 조순자집사님이 그 대를 잇는다 할 수 있으며 비록 소규모 수출회사이지만 한 회사의 수십년을 완전히 교회를 위해 다 바쳐 살았다는 평가는 어느 시각에서 보나 반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흐름은 1982년 백목사님이 생전에 출발시켰던 목회연구소의 자료관리, 설교록 교정, 교리 교훈 연구 등 가장 핵심분야 직원들이 거의 나권사님 구역교인들이었으며 이런 교훈 연구 면에서만큼은 네 권사님 구역 중에서도 제일입니다. 목사님 사후 1997년 '목회연구소'의 진로 방향을 두고, 교단의 교권 확보를 유리하게 잡고 나가는데 연구소도 활용해야 한다는 최종 책임자의 주장과 목사님 생전 방향대로 연구작업 전념으로 나가야 한다는 실무책임자들의 이견이 연구소 안에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두 번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실무책임자들이 최종 책임자에 의하여 퇴직을 당하였으며, 퇴직된 직원들 전원이 이곳 홈페이지 운영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구역 성격으로는 나권사님의 신앙방향 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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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굳이 교역자 이름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분들은 큰 목회자들이었습니다.
1)백목사님의 교인관리의 평생 원칙
①서부교회 부흥의 성격
백목사님은 주일학교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주일학교 재적 학생 2만 5천이라는 역사 최고기록보다 더 놀라운 것은 보수교회 장년반과 꼭같은 모습의 엄격한 예배로만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시청각교육 등의 보조교재나 전도나 출석을 유도하는 어떤 선물,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칙을 성경에서 발견했고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②성경에서 찾아본 교인관리 5가지 원칙
장년반의 구역장이든 주일학교의 반사든 자기가 전도한 식구는 자기가 신앙의 부모로 길러야 한다는 '개척창설'의 제1원칙, 인간의 관리능력을 전제로 한 정원제를 주시는 대로 받는 '무정원실력'의 제2원칙, 책임자는 기관의 인사이동 개념을 배제하는 '고정담임'의 제3원칙,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평생임기'의 제4원칙, 예배모임인 교회는 나이나 학식 등으로 차이를 두면 안된다는 '통합모임'의 제5원칙 등입니다.
③주일학교보다 장년반이 더 큰 부흥이 있었고 네 권사님은 가장 성공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스승은 많아도 아비는 많지 않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믿는 사람이 가장 믿는 사람답게 나타날 때는 자기가 전도한 교인들을 상대할 때입니다. 그들에게만큼은 진정 희생도 사랑도 애타는 간구도 노력도 다 기우려집니다. 목회자라도 자기가 직접 전도한 교인에게는 목회자가 아니라 부모의 심정으로 희생하게 되고 그 도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라도 자기가 직접 전도하지 않은 교인, 또 그런 교회에게는 '근무 중인 목회직'으로만 상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도 못할 것입니다.
2)이 5가지 원칙대로 활동했던 많은 분들 중에 가장 성공했던 분이 네 권사님들입니다.
①한번 전도한 식구는 자기 친자식으로 길러갔습니다.
권사님들에게도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전도한 식구는 믿음의 식구였고 이 믿음의 식구들은 권사님들에게 말로만이 아니고 진정한 참 자녀들이었습니다. 권사님들의 가족들 중에 믿음의 자녀로 바뀐 분들은 육의 어머니를 신앙의 어머니로 바꾸어 가질 수 있었고, 육의 자녀들 중에 믿음이 없어 이해를 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육의 어머니를 잃어야 했습니다. 자녀 양육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육의 자녀와 신앙의 자녀를 꼭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권사님들로서는 너무도 많은 신앙의 식구들이 너무도 가까이 널려 있었고 육의 자녀에게는 마음이 있다해도 손이 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길러간 식구들이 주일 출석 교인으로 2-3백여명, 많게는 3-4백여명, 재적교인으로 7-8백명에서 3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많아지는 과정에서 남반 교인들은 목회자로 출발한 사람이 1-20여명씩 되었으며 여반 교인들은 권사님들을 뒤 따라 또 수십 또는 수백의 교인을 거느리는 구역장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②임명을 받아 관리자로 부임한 경우가 아니라, 전부를 친 자식으로 낳았고 길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다 길렀으며, 식구들이 많아지면서는 수십명의 중간 구역장님들을 모아 그들을 통하여 길렀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어머니만한 새댁들이 있겠습니까? 말로는 중간 구역장이라고 하나 교인 가정마다 발생되는 모든 신앙 내외적 문제들은 권사님들에게 보고가 되고 처리가 되며 해결이 되어졌습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은밀한 고민을 가장 먼저 찾아가서 의논드리고 또 해결까지 받아 올 수 있는 곳이 그들이며, 사업 실패로 오갈 데 없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 힘을 얻고 출발하는 곳이 바로 그들입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자신들의 성공 뒤에는 권사님의 기도와 지도가 있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여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경제를 항상 요구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던 곳이 바로 이들입니다. 폐쇄된 사이비나 이단같은 집단이 아니라 가장 보수적이며 정통에 굳게 선 교회에서 이런 분위기가 있다면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분위기가 장한 어머니 슬하의 어린 자녀들 관계였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흔히 발생되는 파벌싸움, 내분이 없었습니다.
③교회의 모든 서열은 충성으로 맺어진 결과, 열매 순위였습니다.
이말출, 김현찬, 김효순, 나인숙 권사님. 이 분들의 이름은 이렇게 기록되어 나갑니다. 그분들의 교인 식구 숫자대로입니다. 교회는 목사님의 설교소리만 들립니다. 모르면 질문하면 됩니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문제에 해결책을 일러 주지 못한 경우가 백목사님 40년 서부교회 목회에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한 가지는 모든 교인 모든 구역장에게 꼭같이 전달됩니다. 나머지는 본인들이 받은 은혜로 주신 형편을 따라 충성한 충성뿐입니다. 이 권사님들을 '권사직'으로 임명한 것은 40년 사역이 다 끝나가던 때, 70세를 다 넘겼을 때였습니다. 다른 교회로 말하면 은퇴할 나이를 넘겨 그 동안 충성에 '권사'직 하나로 모든 것을 덮었던 것입니다.
2.네 권사님들의 사역을 구역 소속 인물로 보면 이러합니다.
1)이말출 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1911. 5. 16. 출생하여 42세 되던 1952년에 백목사님을 서부교회 조사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1989년 권사님 81세에 백목사님이 먼저 가시고, 1996. 10. 16. 수년간의 불편 중에서도 구역식구들의 지성적 섬김을 받으면서 이 땅위의 생을 마쳤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기 이전에 서부교회 집사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고신본부라는 부산에서 첫째로 꼽는 여성도였고 경제가 넉넉했으며 교역자에 대한 충성과 접대가 극진하였으므로 고신 교역자들에게 수넴여인과도 같았습니다. 백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던 1952년 부산의 제일 명문이었던 부산여고에서 교사로 계셨고, 사범학교 교수로도 재직했던 분입니다.
1950년 6.25로 인하여 전국이 부산으로 피난 집결하였고, 임시정부가 있었던 건물과 대통령 거처가 바로 서부교회 건너편이었습니다. 이 시절 경제와 직책 등 여러 면에서 그는 많은 분들을 섬기며 많은 분들에게 지극히 곤란했던 시절을 도울 수 있었던 형편이었습니다.
육의 자녀로는 연세대 영문학과를 나와 총공회 목회자로 심방길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충성했던 이동화목사님이었고 그의 평생 목회는 어머니의 지도가 항상 있었습니다.
②돌아선 신앙
목회자를 가장 극진하게 모셨던 면은 비교될 분이 없었고 이로 인하여 고신내 가장 유명한 여성도 중에 한 분이었나, 백조사님의 부임 후에는 교만과 인간적 대접만을 깔고 있다는 책망을 받았으며 그후 신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라는 것과 인간적 도덕과 신앙은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자기 자신의 살아온 과거를 완전히 바꿔버린 분이었습니다. 현재 이말출권사님의 노트는 1953년부터 시작됩니다.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부임은 1952년 7월입니다. 1년이 지나도록 백목사님의 설교는 이 권사님의 귀를 그냥 넘어가고 있었으며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한번 깨닫고 한번 돌아선 다음은 죽는날까지 한 길이었습니다.
③교훈
그분의 설교는 요점을 간단히 그러나 아주 조용하게 증거하여 아이들 귀에 들리는 자장가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자장가 속에 성령의 큰 음성은 듣는 교인의 마음을 천둥과 번개로 내리치는 듯 하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가 대단히 여러 모습으로 증거되는 가운데 이말출권사님은 인간의 말 소리는 가장 작게, 성령의 외침은 가장 크게 전해지던 모습을 특별히 많이 배웠고 또 그 능력을 가장 많이 재현했던 분입니다. 조용한 사자후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분이 필기한 백목사님 설교필기집에도 이런 면은 여실히 나타나고 있으며, 그 구역 출신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데이터작업이 되고 있으며, 필기설교집의 형태로 출간하고 있습니다. (연락: 서규용/서부교회중간반 반사/051)243-9311)
④신앙의 식구들
이말출권사님으로 총공회 신앙을 배워나온 이들은, 일단 그 숫자에서 서부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1등 구역이었습니다. 이도영목사님, 이치영목사님 등과 비록 오랜 기간 부산에 있지는 않았어도 경북부지사를 지냈던 황길태장로님, 중앙대 법대학장이었던 서헌재집사님, 양진근집사님 등이며 특히 이 구역은 서부교회 내 가장 여반으로 충성하던 분들이 많습니다. 일일이 손을 꼽을 수 없는 정도입니다.
2)김현찬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1914. 7. 26. 출생하셨고 백목사님이 가시던 때 76세, 이후 수년간을 병석에서 더욱 고생을 하셨으나 구역식구들이 친부모 이상으로 극진하게 모셨던 일은 권사님의 평생 교인사랑과 믿음 안에 참 자녀로 기르는 모습을 눈으로까지 보게 합니다. 1999. 6. 27. 가셨습니다.
②새로 출발한 신앙
고신이 장로교단 전체를 상대로 해방후 교권투쟁을 벌일 때 그 총무노릇을 했던 교회가 부산남교회입니다. 월남한 교인으로서 남교회에서 큰 인물이었으나 이웃 대신동 서부교회로 부임한 백영희조사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또 말씀을 접한 뒤, 남교회를 사랑하고 또 남교회의 복음운동 중심역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서부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자신이 믿어온 과거가 남들에게는 일꾼으로 보이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 믿지 않으면 평생이 외식을 벗지 못하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와 충천한 은혜는 당시 고신 안을 진동시키고 있었으며 장로교 총회에서 소수파로 몰리던 고신에게 가장 많은 교회를 고신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고신교단에 속한 각 교회를 살리려는 목적에 충실했던 백목사님은 타교회 교인에게 자신들의 교회를 충성하고 지킬 설교로 가는 곳마다 해당 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었으나, 피난왔던 교인들은 당시 다니던 교회를 모교회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이런 몇 분들이 백목사님의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어 고신 안에서 백목사님의 입장이 크게 어려웠던 중이었으나 김현찬권사님은 이 사정 저 사정에 눈치 보다가 내 신앙이 허송되겠다고 교회를 옮겨버렸고 그 후 생명 다할 때까지 그 길을 걸었습니다.
*교인 사랑은 가장 힘든 교인자리에 앉은 다음 시작하는 것
백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전적으로 하고싶은 사람들에게는 남자에게는 막노동과 난장 장사를, 여자에게는 참기름 계란 등을 이고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팔게 하는 과정을 꼭 거치게 합니다. 단순히 통과모습으로 지나가지 않고 철저하게 그리고 장기간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임지고 지도할 사람은 자기가 지도할 사람들의 가장 어려운 일 가장 고난스런 세상을 자기 몸으로 겪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는 손가락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교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목회, 그런 교인지도는 이 복음의 원수라는 입장입니다. 주님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천한 자리를 원함으로 통과하셨으니 고생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역자인 백목사님 스스로가 인간 한계의 고난과 고통을 다 겪어본 분입니다. 그런 입장을 알면서 교인에게 권하는 말씀에는 자기보다 더 자기 현실을 잘 알고 지도하기 때문에 저절로 배워지고 머리가 숙여지게 됩니다.
평생에 해보지도 않았고 해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권사님이 수년 이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발바닥으로 교인 중에 가장 고통스런 자리를 힘껏 다 겪은 다음 그들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교인들에게는 반발심이나 이질감 없이 순종하게 되었고, 이 과정을 가장 잘 통과를 했었는지, 이 구역은 식구들의 경제로 본다면 가장 크게 성공하는 구역이 되었습니다.
③교훈
김현찬권사님의 교훈은 강단에서 설교로 임할 때보다 교인 한 가정 한 가정을 찾아 외칠 때 더 힘있게 역사했던 분입니다. 다른 구역에 비하여 교인의 세상 직장이나 경제 형편 등이 크게 다른 경우가 많았고 또 구역별로는 가장 서부교회답지 않은 체질의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교훈은 각 교인과 가정에 권위있게 박혔고 또 그 능력은 여러 종류의 교인으로 한 지도를 받도록 만들었고 결국 가장 장로님들을 많이 배출한 구역이 되었습니다.
④신앙의 식구들
목사님께서 그 죽음을 두고 그렇게 자주 언급했던 박신한조사님, 김주석목사님, 이춘영장로님, 홍종복장로님 등과 이성금집사님, 김옥자집사님, 김수경집사님 등입니다. 지금 주로 남정교회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분 권사님 중에서 제일 넓은 구역이라는 인상이 있었으나 어린 신앙들을 길러가기 위해 어머니가 대신 짊어질 오해였다는 것은 백목사님 순교 후에 나타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잘 해명이 되어졌습니다. 마지막 80세를 넘기면서 더욱 좁아졌던 분이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3)김효순
①원래의 신앙
월남한 신앙인으로 서부교회 백목사님을 따르게 된 분입니다. 원래 담대하여 매사에 호탕하고 추진력이 있었던 분이었으나 백목사님을 만난 뒤로는 말씀 하나 하나의 깊이를 알아 말씀과 기도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김현찬권사님과 외모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았고 또한 그 겪어나온 세월에서도 가장 절친하였던 관계로 앞에서 설명드린 김현찬권사님의 소개가 이 권사님 구역에도 대부분 해당이 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설명할 내용은 적지만 네 권사님 중에 가장 힘있는 권사님이라는 표현으로 이 권사님의 비중을 평가합니다.
②새로 출발한 신앙
백목사님을 모시고 다시 시작한 신앙생활은 새벽기도 마치면 기도하고 하루 종일 머리에 이고 골목 골목 다니며 장사를 하고 저녁이면 예배당에 모여 새벽설교 때 필기한 기록을 놓고 서로가 맞춰보며 그다음 구덕산 뒤로 올라가서 밤새 철야를 하고 다시 새벽기도를 보러 내려오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골목 장사, 발로 일일이 밟고 다니는 장사는 생각도 못해보고 나온 신앙생활, 이렇게까지 어려운 교인의 밑바닥을 수년에 걸쳐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목회자의 교인사랑법을 이렇게 익혀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가장 건강하였고, 이 건강이라는 자연은혜가 충성하는 일에 더욱 많이 쓰여지게 된다면 건강도 복일 것입니다. 90을 바라볼 지금 나이에도 젊을 때의 충성이 계속되고 있으니 50년이라는 반평생을 남자로 말하면 목회일선에서 그대로 계속한다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③교훈
서부교회 구역 중에서 가장 권사님의 지도가 잘 전달되고 잘 움직여 주는 구역이라면 이 김효순권사님 구역입니다. 네 권사님 중에서 그 지도의 힘이 가장 강하게 확인되고 구역식구의 움직임도 백목사님 사후 10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가장 강합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는 네 권사님 중의 하나였고, 백목사님 순교후에는 10년이 지나는 현재까지 서부교회의 모든 방향을 최종 결정하는 분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모든 결정은 평소 교훈과 교인 지도를 해온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볼 때 네 권사님 중에 가장 힘있는 권사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객관적일 것입니다.
④신앙의 식구
교역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역입니다. 말씀연구에 깊었던 신용인목사님, 성구암송이 뛰어났던 김응도목사님, 기도의 사람 김삼암목사님, 비록 탈퇴는 했지만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송용조목사님, 세상실력으로는 제일이라할 수 있는 장렬목사님, 현재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서영호목사님, 그 동생 서윤호목사님, 김윤수목사님, 이병철목사님, 이병호목사님,, 김영환목사님 등 참으로 오늘까지 성실하게 구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들은 거의가 권사님을 친모로 지도받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서부교회 전체를 권사님의 결정으로 방향을 잡고 나가는데 그렇게 큰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4)나인숙권사님
①원래의 신앙
권사님들이 백목사님을 만나기 전 살아온 인생은 여간 언급을 잘 하지 않아 왔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자책이 있으며, 또한 이전에 여러 활동들을 한 것이 백목사님을 만난 뒤로는 다 창피한 인본신앙이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인숙권사님에 대하여는 약간의 설명이 더해지는 것은 아들에게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내심을 말하는 가끔을 들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에서 일제 때 10여대의 택시를 가지고 운수사업을 하였던 조선인으로 몇 손가락 꼽을 거부의 무남독녀 딸입니다. 학교 공부를 출중하게 잘했고 일제 때 서울에서 유명했던 승동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로도 유명하였던 분입니다. 자기 모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늙어가는 딸을 보살펴야 할 정도로 세상 형편이 좋았던 분입니다.
6.25전란에서 무사히 부산으로 피난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하는 신앙이었고, 교회를 두고 신앙박해를 피한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실패라는 교훈을 듣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부산으로 피난 온 나인숙권사님은 손양원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 전기작가인 안용준목사님, 안목사님과 함께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고신의료원과 고신의 학생운동인 SFC 창립자인 거창고등학교 교장 전영창선생님과 함게 전국 순교자 유가족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후원회의 살림을 책임진 분입니다. 따라서 교계적 지명도가 상당하였는데 나권사님이 부산에서 교계적 인물로 한참 일하던 때에 박복달, 박인순, 조수옥 등 여러 동료들로부터 당시 백영희조사님 소식을 듣고 여러차례 부흥회 참석을 하였으나 그리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어 처음에는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사선을 통과한 초인들이었으나 그들의 유가족을 돕는 나 권사님은 인간적으로 또는 동정심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니 정작 자신이 전념하는 후원회의 본질인 '순교신앙'은 겉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씀을 알게되고 지금껏 믿었던 모든 것이 신앙의 진정한 본질과는 다른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②깨끗한 소망, 진리 깨달음에 특별했던 새 신앙
김현찬 김효순 권사님들은 힘에 넘친 모습이 특징이었다면, 나권사님은 완전 대조적인 외모를 가진 분입니다. 깨끗한 천국 소망이 특별했으며 진리에 대한 사모가 특심하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가 교리와 주경 위주로 진행되는데 이를 내용적으로 파악하여 살피는 면에서는 단연히 최고였습니다. 백목사님이 고려신학교를 다니시면서 전국 부흥회를 인도하느라고 강의 출석을 거의 못하였으나 고려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나권사님이 그 필기 정리를 도맡게 되었고 또 강의내용에 대한 백목사님의 여러 가지 평들을 적어 백목사님의 교훈 연구를 가장 가까이에서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회계능력, 깨끗한 중심, 칼날같은 충성 등을 고려하여 마지막 백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서부교회의 십일조회계를 맡았습니다. 70이 넘어서도 회계를 책임진 그에게 젊은층에서 대형교회의 가장 큰 재정을 실수없이 하겠느냐고 백목사님에게 회계담당을 교체 건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고를 졸업한 은행직원이 회계를 맡으면 끝 숫자를 딱딱 맞추어 보고 하겠지만, 그 가운데 어느 돈이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모르게 되고, 신앙의 중심을 가진 사람이 회계를 보면 나이가 많아 숫자가 틀려지는 경우가 있어도 교회에 바쳐진 연보가 장부 착오로만 남지 실제 사용에서는 틀림이 없게 된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의 평생 서부교회 제일 핵심 살림을 도맡게 된 것은 초기 권사님들에게 사회생활을 고급으로 한 사람들이니 가장 힘든 교인의 형편을 몸으로 완전히 익히라고 보따리 장사, 계란이나 참기름을 함박이로 이고 나르는 장사를 시켰는데, 유독 나권사님은 그 체격이 혼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약했기 때문에 장사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나권사님에게 백목사님은 어느 부자집 식모살이를 부탁했으니 가보라고 했습니다. 식모를 하겠다고 찾아온 나권사님에게 그 집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돌아가라 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백목사님은 웃으면서 '중심이 바르고 결심을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니 교회 안에 사무를 보라'고 하셨으며 그 이후 백목사님의 여러 종류 원본 노트 정리와 회계를 맡아오게 된 것입니다.
③교훈
나권사님은 백목사님이 마지막 설교하던 1989년, 자신도 이미 완연한 할머니였지만 매 설교가 끝나는 즉시 그날 설교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단 몇 마디로 다시 요약 정리하여 주곤 했습니다. 보통 백목사님의 설교는 목회자들도 녹음 타자된 원고를 수 차례 정독하지 않고는 그 깊은 내면에 묻어둔 깊은 말씀들을 파악하기 어려운 법이고, 예배 즉시 바로 요약해 내는 정도의 실력은 나권사님이 가장 앞섰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맡은 식구들을 대할 때 주로 간단한 말씀 요약들을 통해 진리로 교인을 가르친 구역장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고 평하겠습니다.
④신앙의 식구
권사님들이 신앙의 어머니 위치를 바로 잡았고 그 세월이 오래였으므로 육의 자녀가 부모를 닮듯 신앙의 식구들도 그런 경향이 많았습니다. 나권사님의 진리 중심, 깨끗한 중심은 키워가던 식구들에게도 이어져 홍순철목사님이 나권사님으로 전도되고 목회자로 출발하여 3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걸어간 걸음은 백목사님의 소원을 순종으로 다 옮겨놓았던 정도였습니다. 여반으로서는 조순자집사님이 그 대를 잇는다 할 수 있으며 비록 소규모 수출회사이지만 한 회사의 수십년을 완전히 교회를 위해 다 바쳐 살았다는 평가는 어느 시각에서 보나 반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흐름은 1982년 백목사님이 생전에 출발시켰던 목회연구소의 자료관리, 설교록 교정, 교리 교훈 연구 등 가장 핵심분야 직원들이 거의 나권사님 구역교인들이었으며 이런 교훈 연구 면에서만큼은 네 권사님 구역 중에서도 제일입니다. 목사님 사후 1997년 '목회연구소'의 진로 방향을 두고, 교단의 교권 확보를 유리하게 잡고 나가는데 연구소도 활용해야 한다는 최종 책임자의 주장과 목사님 생전 방향대로 연구작업 전념으로 나가야 한다는 실무책임자들의 이견이 연구소 안에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두 번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실무책임자들이 최종 책임자에 의하여 퇴직을 당하였으며, 퇴직된 직원들 전원이 이곳 홈페이지 운영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구역 성격으로는 나권사님의 신앙방향 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공회] 서부교회 네분 권사님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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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현재 경기도 포천에서 군복무중인 조영수라고 합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서부교회에서 자랐고 지금도 총공회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잘 둘러보았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의 서부교회에서의 목회를 이야기할때 네분 권사님을 빼놓을수 없다고 어릴적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저는 저희 권사님에 대해서만 조금 알뿐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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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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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현재 경기도 포천에서 군복무중인 조영수라고 합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서부교회에서 자랐고 지금도 총공회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잘 둘러보았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의 서부교회에서의 목회를 이야기할때 네분 권사님을 빼놓을수 없다고 어릴적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저는 저희 권사님에 대해서만 조금 알뿐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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