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적·무의식적 심신의 행위의 구원론적 귀결
| 분류 |
|---|
배우는 이
4
4
02.05 09:49
말씀에 순종하는 심신의 활동은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활동은 지옥으로 귀결된다는 교리를 배웠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생리적·무의식적 현상의 구원론적 귀결에 대해 질의합니다.
첫째, 무의식적인 하품이나 가려움으로 인한 몸을 긁는 신체 반응과 같은 생리적 반사 작용도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는지 궁금합니다.
둘째, 식사 후의 나른함이나 긴장이 이완된 무념(無念)의 상태와 같은 심리적·신체적 현상 또한 구원론적인 분별의 대상이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즉 식사를 한 후에 포만감으로 마음이 나른한 상태가 되고 긴장이 풀리면 이때의 마음의 움직임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지 궁금합니다.
본 질문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말씀 순종'과 '죄'라는 명확한 범주로 재단하기 어려운 많은 일상적·생리적 활동들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모호한 심신의 움직임조차 예외 없이 천국 혹은 지옥이라는 양자택일의 명확한 목적지로 귀속되는지 그 교리적 경계를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원래 질문의 제목은
'심신의 움직임'과 생리적·무의식적 심신의 행위의 구원론적 귀결에 대한 질의'입니다. 길어서 요약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질문하신 무의식 행위의 첫째는 몸, 둘째는 마음의 작용인데, 두 가지 다 천국과 지옥으로 정해집니다. 사후 세계에 천국과 지옥 아닌 제3의 내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죄와 의, 천국과 지옥 아닌 제3의 무엇은 있을 수가 없고, 사람의 일평생의 심신 움직임 작용 행위는 없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의식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무의식과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본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의식이든 본능이든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움직인 모든 행위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귀결됩니다.
2. 조금 구체적으로
사람의 심신은 연습하는 대로 기능 화되어진다는 것은 웬만하면 아는 상식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느냐가 심신에 익어지면서 그대로 심신의 기능이 됩니다. 스케이트 선수들은 얼음판에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자유자재로 활동합니다. 세계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연습이 된 선수들은 그 면에 있어서는 이미 의식을 초월한,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의식하면서 연습했고,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의식과 상관 없이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된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그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사야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이 들면 무의식 상태가 되고, 따라서 꿈은 무의식 상태의 작용인데, 그 꿈의 내용이 낮에 의식 속에 강하게 잠재되어 있던 것이 무의식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신 자체의 활동이나 심신 주변 환경의 작용이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을 꿈이 낮에 그런 활동과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의식인데 그 무의식의 원인이 자아가 의식하고 자각하고 인지하고 있을 때 했던 행동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무의식의 꿈은 의식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건설구원(행위구원, 기능구원)에 관한 말씀이고, 건설구원은 심신의 활동 작용 행위에 대한 심판이며, 그 심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은 곧 자유 의지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자유 의지는 자아이며 의식이며 자각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의 원인이 의식이라고 본다면 즉 무의식은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본다면 그 무의식적인 움직임은 당연히 의식인 자유 의지에 대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능은 ‘자기중심’에서 출발합니다. 공회 교리에서 자기중심은 ‘악’으로 정의합니다. 악은 하나님 중심인 선과 반대입니다. 그 악에서 모든 죄가 시작됩니다. 악은 죄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악이 들어 있고, 악에서 나오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울음소리를 냅니다. 그 우는 소리는 본능입니다. 그 본능은 악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우는데 그 울음이 악이라는 말이 됩니다. 죄의 모태인 악이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요소는 지옥입니다.
교리적으로, 아담의 원죄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악하게 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영과 심신을 만드시는데, 잉태되는 그 즉시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어 영은 죽고 심신은 마귀에게 붙들려 악이 됩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렇다 해도 같은 원리, 같은 순서로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어 영은 죽었고 심신은 악에게 붙들렸는데, 모태에서 중생되어 6개월 만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잉태된 지 6개월 된 아기가 의식이 있을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은 어릴 때의 본능을 그대로 가지고 지내다가, 자라가는 과정에 지성과 이성과 감성과 양심이 함께 자라면서 객관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선천과 후천의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지식을 습득하면서 본능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게 됩니다. 그 자아는 자기 인격이며 주관이 되고 그 주관은 곧 자기의 자유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지성과 이성, 양심 등으로 형성된 자아는 대개 사회 규범적이고 잘해야 도덕적입니다. 그 사회 규범적, 도덕적인 자아로 대부분은 본능을 다스려 절제하고 인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자아가 곧 무의식에 반대되는 자기의 의식이라 할 수 있고, 그 의식으로 평소 자기가 가진 가치관 인생관에 따라 행동하며 모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의식적인 평소 생활이 심신에 익어지고,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심신 작용이 한 번씩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의식적인 모든 행동은 평소 의식적인 행동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된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중생된 영의 작용이 있게 되고, 사람마다 시점은 다르지만, 영의 작용으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신앙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지성과 이성, 양심은 신앙적이 되고, 그 자아 역시 신앙적인 인격으로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일찍 중생되고 어릴 때부터 믿은 사람은 그 자아인 주관 역시 그만큼 신앙적인 모습을 갖게 되고, 늦으면 그만큼 늦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개별 차이는 너무 크고 많지만, 기본적인 형성 과정과 모습은 이러합니다.
불신자들은 그 지성과 이성, 양심이 사회 규범이나 도덕 수준으로 생활하지만, 중생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된 자아의 주관이므로 정상적으로 바로 믿었다면 그 자아는 불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 그 주관, 그 자각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모든 생활은 하게 되고, 그렇게 말씀으로 산 평소 생활이 많은 만큼 심신이 말씀의 사람으로 성화되게 되고, 그 성화된 만큼 무의식 상태에서도 그 생활은 연장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중생은 되고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 심신의 언행심사 생활이 말씀과 상관없고 신앙과 상관없는 생활이 많으면 그대로 심신에 익어지게 되고, 그 생활 또한 자기의 자아, 의식, 자각, 자유 의지에 의한 생활이므로 그렇게 살다가 무의식 상태가 되면 그 무의식은 의식의 연장선이므로 그 무의식의 모든 생활은 천국과는 상관없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 의식적인, 자각적이고 자유 의지적인 생활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무의식의 상태는 이어지는 것이고,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했고, 유재헌 목사님 같은 분은 ‘순간순간 주님으로 함께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님과 동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어떤 분은 눈동자 굴리는 순간 하나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생각하며 조심했다고 하는 것이 이런 면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과 악, 죄와 의, 천국과 지옥은 분명합니다.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없고, 죄도 의도 아닌 것은 없으며, 천국도 지옥도 아닌 것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모호하거나 애매하거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고, 심신의 활동 작용의 모든 것 또한 그러합니다. 의식이나 무의식이나 본능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심신의 움직임'과 생리적·무의식적 심신의 행위의 구원론적 귀결에 대한 질의'입니다. 길어서 요약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질문하신 무의식 행위의 첫째는 몸, 둘째는 마음의 작용인데, 두 가지 다 천국과 지옥으로 정해집니다. 사후 세계에 천국과 지옥 아닌 제3의 내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죄와 의, 천국과 지옥 아닌 제3의 무엇은 있을 수가 없고, 사람의 일평생의 심신 움직임 작용 행위는 없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의식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무의식과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본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의식이든 본능이든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움직인 모든 행위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귀결됩니다.
2. 조금 구체적으로
사람의 심신은 연습하는 대로 기능 화되어진다는 것은 웬만하면 아는 상식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느냐가 심신에 익어지면서 그대로 심신의 기능이 됩니다. 스케이트 선수들은 얼음판에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자유자재로 활동합니다. 세계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연습이 된 선수들은 그 면에 있어서는 이미 의식을 초월한,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의식하면서 연습했고,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의식과 상관 없이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된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그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사야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이 들면 무의식 상태가 되고, 따라서 꿈은 무의식 상태의 작용인데, 그 꿈의 내용이 낮에 의식 속에 강하게 잠재되어 있던 것이 무의식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신 자체의 활동이나 심신 주변 환경의 작용이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을 꿈이 낮에 그런 활동과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의식인데 그 무의식의 원인이 자아가 의식하고 자각하고 인지하고 있을 때 했던 행동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무의식의 꿈은 의식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건설구원(행위구원, 기능구원)에 관한 말씀이고, 건설구원은 심신의 활동 작용 행위에 대한 심판이며, 그 심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은 곧 자유 의지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자유 의지는 자아이며 의식이며 자각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의 원인이 의식이라고 본다면 즉 무의식은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본다면 그 무의식적인 움직임은 당연히 의식인 자유 의지에 대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능은 ‘자기중심’에서 출발합니다. 공회 교리에서 자기중심은 ‘악’으로 정의합니다. 악은 하나님 중심인 선과 반대입니다. 그 악에서 모든 죄가 시작됩니다. 악은 죄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악이 들어 있고, 악에서 나오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울음소리를 냅니다. 그 우는 소리는 본능입니다. 그 본능은 악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우는데 그 울음이 악이라는 말이 됩니다. 죄의 모태인 악이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요소는 지옥입니다.
교리적으로, 아담의 원죄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악하게 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영과 심신을 만드시는데, 잉태되는 그 즉시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어 영은 죽고 심신은 마귀에게 붙들려 악이 됩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렇다 해도 같은 원리, 같은 순서로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어 영은 죽었고 심신은 악에게 붙들렸는데, 모태에서 중생되어 6개월 만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잉태된 지 6개월 된 아기가 의식이 있을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은 어릴 때의 본능을 그대로 가지고 지내다가, 자라가는 과정에 지성과 이성과 감성과 양심이 함께 자라면서 객관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선천과 후천의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지식을 습득하면서 본능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게 됩니다. 그 자아는 자기 인격이며 주관이 되고 그 주관은 곧 자기의 자유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지성과 이성, 양심 등으로 형성된 자아는 대개 사회 규범적이고 잘해야 도덕적입니다. 그 사회 규범적, 도덕적인 자아로 대부분은 본능을 다스려 절제하고 인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자아가 곧 무의식에 반대되는 자기의 의식이라 할 수 있고, 그 의식으로 평소 자기가 가진 가치관 인생관에 따라 행동하며 모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의식적인 평소 생활이 심신에 익어지고,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심신 작용이 한 번씩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의식적인 모든 행동은 평소 의식적인 행동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된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중생된 영의 작용이 있게 되고, 사람마다 시점은 다르지만, 영의 작용으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신앙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지성과 이성, 양심은 신앙적이 되고, 그 자아 역시 신앙적인 인격으로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일찍 중생되고 어릴 때부터 믿은 사람은 그 자아인 주관 역시 그만큼 신앙적인 모습을 갖게 되고, 늦으면 그만큼 늦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개별 차이는 너무 크고 많지만, 기본적인 형성 과정과 모습은 이러합니다.
불신자들은 그 지성과 이성, 양심이 사회 규범이나 도덕 수준으로 생활하지만, 중생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된 자아의 주관이므로 정상적으로 바로 믿었다면 그 자아는 불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 그 주관, 그 자각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모든 생활은 하게 되고, 그렇게 말씀으로 산 평소 생활이 많은 만큼 심신이 말씀의 사람으로 성화되게 되고, 그 성화된 만큼 무의식 상태에서도 그 생활은 연장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중생은 되고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 심신의 언행심사 생활이 말씀과 상관없고 신앙과 상관없는 생활이 많으면 그대로 심신에 익어지게 되고, 그 생활 또한 자기의 자아, 의식, 자각, 자유 의지에 의한 생활이므로 그렇게 살다가 무의식 상태가 되면 그 무의식은 의식의 연장선이므로 그 무의식의 모든 생활은 천국과는 상관없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 의식적인, 자각적이고 자유 의지적인 생활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무의식의 상태는 이어지는 것이고,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했고, 유재헌 목사님 같은 분은 ‘순간순간 주님으로 함께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님과 동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어떤 분은 눈동자 굴리는 순간 하나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생각하며 조심했다고 하는 것이 이런 면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과 악, 죄와 의, 천국과 지옥은 분명합니다.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없고, 죄도 의도 아닌 것은 없으며, 천국도 지옥도 아닌 것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모호하거나 애매하거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고, 심신의 활동 작용의 모든 것 또한 그러합니다. 의식이나 무의식이나 본능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가려워 몸을 긁는 것도 천국가는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인가요?
가려운 곳을 긁거나 하품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다가 피곤해서 자신도 모르게 조는 것, 잠자는 것까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기도를 하다가 가려운 곳을 무심코 긁으면 그 행위는 천국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중에 피곤해서 하품을 하거나 졸면 그 행위 역시 천국이겠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하다가, 휴대폰으로 세상 드라마를 보다가 가려운 곳을 긁거나 피곤해서 하품을 하거나 졸면 그 행위는 지옥이겠습니다.
욥기 7장 19절에 욥은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은 침 삼키는 것보다 더 의식적일 수 있습니다. 하품이나 졸음은 무의식 중에 그리될 수 있지만, 그 무의식이 있기 전에 무엇을 하다가 그렇게 되느냐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잠을 자면 잠자는 것도 천국입니다. 세상 생활에 빠져서, 죄짓는 생활 하다가 피곤해서 자면 잠자는 것도 지옥입니다.
욥기 7장 19절에 욥은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은 침 삼키는 것보다 더 의식적일 수 있습니다. 하품이나 졸음은 무의식 중에 그리될 수 있지만, 그 무의식이 있기 전에 무엇을 하다가 그렇게 되느냐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잠을 자면 잠자는 것도 천국입니다. 세상 생활에 빠져서, 죄짓는 생활 하다가 피곤해서 자면 잠자는 것도 지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