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확신이 교차하며 자라 갑니다. - 주일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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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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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5 10:29
단답식으로 안내하기는 어려운 고민입니다.
현재 고민하고 계시는 부분은 질문하신 분으로 하여금 일반 교인으로 살게하지 않고 그 이상의 위치와 사명을 주기기 위해 난이도가 좀 높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보입니다.
연구부 내에서도 이 번 답변을 맡은 분의 다른 일정 때문에 안내가 약간 늦어질 듯하여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답변을 달게 되면 제목을 수정하겠습니다.
1. 불신이 먼저, 신앙은 뒤라는 순서
그렇습니다. 태어 난 아이는 무식하나 뒤에 유식해 지고 처음에는 걷지 못하다가 뒤에 걷게 됩니다. 자연의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 주심은 자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길러 가시는 신앙의 특수인도를 위해 알기 쉽게 보여 주는 견학 대상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태어 나면서 믿음이 없는 상태가 훗날 믿음을 가집니다. 불신의 때를 먼저 가진 다음에 신앙의 때를 주십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먹여 놓으면 배 부른 소리를 하고 그런 행동을 하여 평생 투덜되는 사람이 되는데, 어린 시절 미리 한 번 굶어 놓으면 평생 3끼 식사를 하며 남 모르는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세상의 잠깐 어두움을 통해 신앙의 철을 넣어 주시고, 세상 전체를 잠깐의 훈련기를 삼게 한 후 우리에게 영생 영원을 주십니다. 순서를 두고 먼저 불신을 주셨고, 그리고 나서 신앙을 주셨습니다. 지혜와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살 빛의 나라를 위해 어두움을 배색으로 주셨습니다.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2. 자기 중심이라는 악
원수 중에 원수는 일본과 미국과 북한과 중국이 아니고, 여당 야당에게는 상대당이 아니고, 이혼하는 부부도 그 상대방이 원수가 아니고, 원수 중에 참 원수는 내 속에 들어 앉아 있는 '자기'입니다. 이 것이 우리 전부를 본능적으로 자기 좋게 살자고 하는데 타락한 우리는 자기에게 좋은 것은 일단 좋아 합니다. 뭔 짓을 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모르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오늘 숙제 없다, 이 번 시험은 쉽게 낸다 이런 말에 환호하는 철 없는 상황입니다.
이 자기가, 자기를 일단 달래고 설득을 시켜서 자기 좋을 대로 합니다. 훗날 자기에게 속은 것이 드러 나면 그 때 가서는 슬며시 다른 말을 합니다. '합리화' '국면 전환' '습성화'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합니다. 북한이 공산주의가 지상낙원을 만드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기치를 걸었고 1900년대 초반에 수도 없는 살상을 했습니다. 지금 좌익은 '공산주의의 방법론에는 일부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그들의 이상조차 매몰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이 참 묘합니다. 듣는 순간, 공산주의에게 온 가족을 잃고 처참해 진 사람의 공격의 예봉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립니다. 자기에게 속은 것을 알면 또 다음을 위해 자기는 자기를 이런 말 저런 말로 슬슬 무마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그릇이란 그 출발을 두고 또는 그 전환기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낙인을 찍고 혹독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혹독하게 다루는 것은 자칫 고행주의가 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최소한 '낙인'을 찍어 두는 것은 아주 필요합니다. 이런 자기 분석과 자기 판단이 확실하면 교만이라는 것은 아예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3. 정말 속지 않는 사람
확률로 보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너무 어려워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쉬우므로 조금만 신경을 쓰면 얼마든지 바로 알고 바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100만 대군과 핵무기처럼 당장에 보이는 위협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며 심지어 생각할 것도 없다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속수무책 다 당하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의 평생 일지가 있습니다. 그 분의 신앙 초기는 자기의 악함과 속임에 대한 투쟁이 정말 정밀하게 많은 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자의 엄살이 아니고 성자의 고등 교만도 아니며 실제 자기가 자기 속을 들여다 보며 적은 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괴수 죄인이라 한 것은 과장법이 아니라 정확히 본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과 자기 속임에서 간단히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자기와의 전쟁은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오늘까지 세계제국을 유지하는 미국처럼, 2차대전의 일본을 승리한 미국이 오늘도 일본에게 자유하듯이 그런 단번에 요절을 내는 전쟁이 아니라 정원에 풀을 뽑듯이 오늘 완전히 뽑아도 내일 또 움이 돋습니다. 풀 뽑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매일 꾸준히 뽑으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습게 알고 놔 두면 며칠이 지나고 이제는 쥐어 뜯어야 할 일이 생기는데 그렇게 쥐어 뜯으면 뿌리가 잘 박혀서 또 돋아 납니다. 뿌리까지 캐려 들면 주변에 잔디와 다른 화초가 상합니다.
매일 늘 조심하는 것, 이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자라 갈 수 있습니다.
잘 난 사람이, 한방에 해결하려 한다면 이 전쟁은 볼 것도 없이 실패합니다.
세상과 자기에게 속지 않은 참 신앙인은 거의 없습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너무 쉬워서.
그래서 신앙의 세계는 핑계하지 못합니다. 못나도 꾸준히 계속하는 면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4. 향후 각오
백 목사님처럼 시대의 종이 되겠다는 꿈은, 꿀 것도 없고 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그런 목표를 꿈으로 두고 이루려 하면 이루어 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자기를 들여다 본 것처럼 우리도 자기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면 이 것은 조금 생각하며 지난 날을 살피면 금방 알 수 있고 또 무슨 일이 있을 때 자기 심리 상태를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계속 들여다 보고 있으면 급속하게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쓰실지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고, 어디에 쓰든지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두는 것은 지극히 작은 매일의 조심으로 충분합니다.
5. 질문을 두고 구체적으로 안내한다면
-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불택자의 의심은 태생적으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의심은 2가지입니다. 스스로 절망과 포기를 위해 제기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이런 의심은 주님이 없어서가 아니며 주님의 능력과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주님의 도움과 소망을 스스로 포기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자유성으로 길러 가는 원칙에 막혀 돕지를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지경에서도 지난 날의 모든 실패와 절망 상태까지 보약으로 삼고 사닥다리 계단으로 삼아 위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만 주셨지 절망은 처음부터 주신 일이 없는데, 한 성도가 주저 앉을 때 주님은 그 주저 앉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발전의 거름으로 사용하시려고 기대를 가지고 보시는데 귀신은 주저 앉은 이를 심방하여 아주 드러눕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왕 안 될 것... 지금까지 해 봤지만... 너는 원래 그런 인간이니...
이런 생각이 한 편으로는 자기를 겸손하다고 착각도 하게 만들며, 또 한 편으로는 별로 길이 보이지 않으니 현 상태로 대충 살게 해 버리는 자포자기를 만들어 버립니다. 주저 앉았을 때 가장 무서운 적은 주저 앉은 자기가 아니고 또 주저 앉을 요소로 가득 찬 그 자기도 아니라 해 봤자 또 마찬 가지일 텐데라는 그 생각을 넣어 주는 그 귀신입니다. 이 귀신과 싸움은 지식과 논리로 끝납니다. 알기만 바로 알면 어렵지 않게 물리치고 끝낼 수 있습니다. 인식의 문제기 때문입니다.
- 건설구원의 가치
영원 전과 영원 후라는 큰 눈으로 보면 이미 정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루어 가시는 과정은 우리 마음에 좌절하게 하는 의심을 상대하는 내 자세를 보면 주님의 영원 전에 예정해 놓은 나의 영원 후 천국의 건설의 상황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경험이 아주 많은 60세의 초등학교 교사 정도가 되면 20대 교사 시절의 아이가 우리 사회의 중심인 50대로 활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교사가 20대 처음 가르칠 때 10세 안팎의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그 때는 그 아이를 그 아이들로만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친 아이들이 해마다 계속하여 중고교 대학을 거치고 사회생활을 하며 줄줄이 그 사례가 들립니다. 그러면서 그 교사의 눈에는 이제 초등학생을 보면서 이 친구의 훗날이 점점 잘 보이게 됩니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인과는 아주 차이가 납니다. 특히 그 반 그 학생이나 그 부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목이 생깁니다.
오늘의 좌절이나 오늘의 큰 시험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순간 그 사람의 근본 자세와 대응을 보면서 영원 후 어떤 모습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알 만하도록 만들어 두셨다고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실수한 후 아이가 죽을 병이 걸렸고 다윗은 1주간을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는 죽었고 신하들 생각에 이 소식을 들으면 다윗이 그대로 죽을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가능성도 주지 않겠다 하심이니 그 순간 그 결정을 확인하고 바로 아무 일 없었듯이 새로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수 많은 활동들과 경력들이 아니라 주저 앉게 되었을 때 겸손히 한 걸음씩 조심하여 새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주저 앉게 되면 보통 그렇게 한 걸음씩 출발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사울은 동시대 인물입니다. 실수하자 그 자리에서 사무엘을 붙들고 일단 자기 이름을 올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 안면, 이 체면, 이 명예... 이미 사울은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끌어 왔습니다.
- 25세 전후라는 시점
백 목사님이 말씀하신 25세는 요즘 말로 말하면 적어도 30대일 듯합니다.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겉보기는 5년 이상 조숙해 보이나 정신 연령과 책임성으로 말하면 10년은 최소한 늦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주입식이 적용 되는 면만 본다면 요즘은 10대 후반으로 끝날 듯합니다. 워낙 세상 지식이 범람하여 학생들과 청년들의 머리가 조기에 가득 차 버리기 때문입니다. 백 목사님 10대는 육체 노동으로 한 가족을 책임 질 사람이었고, 정신 연령으로는 10대 중반에 결혼을 해서 성실하게 자기 살림을 가꾸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는 누가 와서 말 몇 마디만 하면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백지 상태였습니다. 방송이 없고 책이 없고 교육이 없으며 한 마을에서 어른들만 볼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초등학생까지가 주입식에 해당 될 정도고, 일단 중학교 3년이 과도기로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의 향락에는 제일 유리한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인간다움과 천국을 생각한다면 생지옥에 제일 가까운 상황입니다.
* (1) 주일의 당위성과 실제 결과
이런 것은 제대로 체험을 해 봐야 압니다. 군인의 혹독한 훈련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를 두고는 데모 진압이나 모의 전투로는 검증이 어렵습니다. 6.25를 당해 보고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두고 지리산 빨치산 생활을 해 봐야 알게 됩니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칠판을 두드리는 문제는, 필생을 좌우하는 시험이 고난도로 나왔을 때야 그 중요성이 드러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주일 문제란 사회 생활 거의 전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검증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불신자들이 주5일을 즐기는 상황입니다. 인권이 국가 안위보다 가치 있다 하는 세상입니다. 태극기를 불 태우는 사람이 애국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주일은 이미 주일의 가치 검증이 거의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촛불의 존재와 밝기와 그 가치라는 것은 여름 뙤양볕 아래서는 검증이 곤란합니다. 동지섣달 그믐밤에 얼어 죽을 지경일 때 촛불의 의미와 가치는 생생하게 100% 검증이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달리 문명국과 지성인 중심으로 내려 왔습니다. 아주 최근 50여년 사이에 주일 개념이 없어졌을 뿐입니다. 오랜 세월, 세계 가장 지성인들이 문화국을 형성하며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 그 주일의 경험이 따라 가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없어 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붙들고 오늘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 난 21세기 세계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사례는 21세기를 완전히 석권한 유대인의 사례로 보면 그 어떤 과학적 통계적 근거로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성경 약속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령한 이스라엘이어서 주일 성수가 유대인의 세계 석권적 결과로 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세상 것은 어린 신앙을 위해 필요할 때 적절히 이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원하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상대가 좋아서 내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장사의 거래는 내가 줄 때는 기대하는 것이 있고 또 내가 줬다면 뭔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 것은 비지니스입니다. 사랑이란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낳은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낳았으니 좋고 좋은 마음 하나만으로 조건 없이 쏟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주님 조건 없이 날 위해 죽으시고 주일에 부활하여 주님의 마련한 모든 것을 주일을 통해 다 가져 가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주님의 날로 삼아 놓고 그 날은 주님께 받음으로만 주님을 사랑하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일단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어린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은 젖 줄 때 잘 빨아 먹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엄마 건강을 생각해서 젖을 빨지 않으면 엄마는 사색이 됩니다.
- (2) 주일의 성경 근거
히4:7에 구약 안식일로 실패한 교회에게 '어느 날'을 약속했고
골2:16에 구약 안식일로 다시는 폄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일에 부활하셨고 이후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에 중요한 모든 것을 다 하셨고 사도행전 이후에는 제자들이 안식 후 첫 날에 모였으며 계1:10에 주일에 성령에 붙들려 계시록을 기록하고 이 내용이 오늘까지 신약에 펼쳐 집니다. 훗날 다시 보니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새 운동에 속한 중요한 일은 주일에 하셨습니다.
이 해석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억지로 끼워 맞추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도 그렇고 성경 66권의 형성 과정도 그렇고 실은 하나님과 천국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도마는 보고 믿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되다 하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확인하고 믿은 것은 의심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을 때 믿은 것을 말합니다. 혈액 조사와 DNA 검사를 해 봐야 부모는 아이를 제 자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이 땅 위에 100.0000000% 라는 것은 없습니다. 0.0000000000001이라도 오차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98%또는 99.5% 이상은 진실로 본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진실 입증'에 실패하여 버릴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같은 논리로 말하면 자기 자녀와 부모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제 자식 제 부모를 검증 절차를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한 눈에 보면 바로 압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서 먹어 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반복해야 합니다.
학습력과 남 다른 능력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대신 그 사람들은 도마처럼 또는 찍어 먹은 다음에 알 수 있다는 인식에 붙들려 마지막 결승점에 보면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불교든 기독교든 멋 모르고 열심히 믿다가 바른 것을 잡았다면 횡재하고 잘못 잡았다면 원래 인간은 그런 것이니 본전이라 생각하고 가는 사람이 훨씬 지혜롭고 유익합니다.
주일을 두고 가장 큰 근거는, 주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중요한 날이지만 로마 박해 시대는 바로 사자 입에 들어 가야 했고 화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주님을 본 제자들이 주님 이후 그들은 목숨을 초월하여 그들의 길을 걸었고 그들의 바로 제자들이 로마 150여년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는 20세기 초까지 그렇게 내려 왔습니다. 이 수천 년의 과정에 주일이라는 것을 조금만 비켜 갈 수 있다면 신앙 생활이 외부에 탄로 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생사의 갈림 길에 기쁨으로 자기를 던져 본 사람들로 이어 져 내려 온 역사에는 마치 한 아이가 태어 날 때 그 부모 그 집의 가족들 친척들 주변 이웃들과 옛날로 말하면 한 마을 전체는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입증이 필요 없이 가족이 내려 왔습니다. 또 남들이 보면 그냥 압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극단적인 도시화 개인화 복잡화 기술화 이권화 범죄화 된 사회에서는 공신력 있는 조사결과서가 아니라면 실제 그렇다 해도 인정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6. 주입식의 행복
기독교는 당대 최고 지성인들과 최고 문화국의 유일로 내려 온 종교입니다. 세계의 500년 800년 된 최고의 대학들은 모두 교회가 세웠습니다.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도 다 마찬 가지입니다. 그 곳은 설립 때부터 체질적으로 과학적으로 살피며 따지며 자유롭게 토론하며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맹신적 반복을 가르치지 않고 의심이라는 가상 적을 마음껏 풀어 놓고 자유롭게 공정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은 세월에 상관 없이 모든 것이 공개 되고 비판 된 가운데 자라 왔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남한은 대통령조차 거짓말로 욕을 할 수 있고, 북한은 있는 내용조차 입에 담았다가는 처참해 집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 것은 하나도 믿을 수 없고 남한의 저력은 북한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남한은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바뀌어도 오늘까지 발전을 해 왔고 일본은 1년에 한 번씩 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체제의 우수성입니다. 소련 중국은 한 번만 잘못 바뀌면 내려 앉아 버립니다. 북한은 바뀌는 순간 끝장입니다.
기독교의 저력은 어느 한 사람의 자기 지성과 의심과 탐구로 자기 혼자 그 어떤 반론과 구상과 반발을 할지라도 전체 기독교는 이렇게 내려 왔고 그 반발하고 다른 논리를 세운 이들은 헛된 노력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의심과 반론을 자문자답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께서 훗날 그런 다른 사람을 지도하거나 또는 불신 세계를 상대하거나 심지어 교회 내에서 교회를 통째로 주저 앉힐 무서운 거짓 선지자가 일어 날 때 그들을 상대하도록 사명을 주신 이들에게는 그 자신이 먼저 그런 길을 걷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차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 전체를 광야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주님은 모세 그 자신을 그 광야에 먼저 40년동안 거치도록 일정을 주셨습니다. 바울도 평생 외부에서 이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믿기 전에 외부를 먼저 알도록 했습니다.
>> 학생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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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때를 먼저 주시고 뒤에 믿게하셨고, 천국은 눈 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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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중심의 악에 속아 평생을 살고 뒤에 후회하더라도 또 이것에 속아 훗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깨달은 지가 언제라고, 그 깨달음이 거짓이라고 악은 다시 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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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 자기에 속지 않는 진짜 신앙인, 천만 중 하나일까요 억의 하나일까요, 천국과 건설구원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이뤄본 사람은 그 성취를 알기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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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목사님도 이십여년간 불신의 때를 살며 온갖 세상 경험, 향락, 타 종교에 대한 탐구 등을 다 해보시고, 다 헛되고 기독교 하나만이 진짜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깨달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 하나만 평생 붙들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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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참 기독교의 길이 진짜라는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평생 자기에 속아 헛인생 살 것이 원통해서라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믿어보고 싶습니다.
: 그러나 천국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불신의 자기로 태어나 끊임없이 의심은 계속되기에 백목사님처럼 다 버리고 갈 엄두,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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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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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건설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노력일지, 결국은 하나님이 점찍으신 은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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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백목사님께서 25세 이전 즈음에는 비판이 덜할 시기이니 올바른 교리를 주입식으로 넣어주면 그러한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씀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고, 이후 40대까지는 머릿속의 말씀을 갖고 실천해보며 지식과 실상의 일치를 시키는 단계이며, 50대 이상부터가 되어야 비로소 판단에 정평정가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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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아직 20대 중반이 되지 않은 학생이나, 매사 탐구 내지 의심이 많은 성격입니다. 주입식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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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면, '주일을 지키라' 하는 목사님 부모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 정도,
: (1). '주일을 지켜보고 사는 한 주간과 그렇지 않은 한 주간은 좀 다르더라'는 실감은 해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 (2). 주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성경에 어디에 있나?
: (3). 주일성수에 대한 성구해석을 읽어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 맞나? 예를 들면 이 홈페이지에서는 히브리 4장 3절로 11절, 요한계시 1장 10절, 골로새 2장 16절로 17절, 고린도전서 16장 2절, 로마서 14장 5절로 6절, 사도행전 2장 1절로 7절, 마가복음 16장 9절 등등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배경으로 제시하고 계신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지(그냥 제가 읽어보면 어렴풋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또한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성경에 '일월화수목금토중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 지키라'는 직접 명시를 하지 않으시고 해석을 통해 지키시도록 하셨을까?
: (4). 주일을 지키라 하는 성경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등
: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
: 자꾸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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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고의 과정을 예시로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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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따라서 그냥 20대의'주입식'으로 옳은 말씀 옳은 교리를 제 속에 집어넣기도 바쁠 때일텐데 '근거'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50대의 정평정가를 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올바른 말씀 배움의 자세인지가 궁금합니다. 이 역시도 현실에서의 우선 순종으로써 영감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깨달으면 되는 것일까요?
현재 고민하고 계시는 부분은 질문하신 분으로 하여금 일반 교인으로 살게하지 않고 그 이상의 위치와 사명을 주기기 위해 난이도가 좀 높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보입니다.
연구부 내에서도 이 번 답변을 맡은 분의 다른 일정 때문에 안내가 약간 늦어질 듯하여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답변을 달게 되면 제목을 수정하겠습니다.
1. 불신이 먼저, 신앙은 뒤라는 순서
그렇습니다. 태어 난 아이는 무식하나 뒤에 유식해 지고 처음에는 걷지 못하다가 뒤에 걷게 됩니다. 자연의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 주심은 자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길러 가시는 신앙의 특수인도를 위해 알기 쉽게 보여 주는 견학 대상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태어 나면서 믿음이 없는 상태가 훗날 믿음을 가집니다. 불신의 때를 먼저 가진 다음에 신앙의 때를 주십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먹여 놓으면 배 부른 소리를 하고 그런 행동을 하여 평생 투덜되는 사람이 되는데, 어린 시절 미리 한 번 굶어 놓으면 평생 3끼 식사를 하며 남 모르는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세상의 잠깐 어두움을 통해 신앙의 철을 넣어 주시고, 세상 전체를 잠깐의 훈련기를 삼게 한 후 우리에게 영생 영원을 주십니다. 순서를 두고 먼저 불신을 주셨고, 그리고 나서 신앙을 주셨습니다. 지혜와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살 빛의 나라를 위해 어두움을 배색으로 주셨습니다.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2. 자기 중심이라는 악
원수 중에 원수는 일본과 미국과 북한과 중국이 아니고, 여당 야당에게는 상대당이 아니고, 이혼하는 부부도 그 상대방이 원수가 아니고, 원수 중에 참 원수는 내 속에 들어 앉아 있는 '자기'입니다. 이 것이 우리 전부를 본능적으로 자기 좋게 살자고 하는데 타락한 우리는 자기에게 좋은 것은 일단 좋아 합니다. 뭔 짓을 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모르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오늘 숙제 없다, 이 번 시험은 쉽게 낸다 이런 말에 환호하는 철 없는 상황입니다.
이 자기가, 자기를 일단 달래고 설득을 시켜서 자기 좋을 대로 합니다. 훗날 자기에게 속은 것이 드러 나면 그 때 가서는 슬며시 다른 말을 합니다. '합리화' '국면 전환' '습성화'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합니다. 북한이 공산주의가 지상낙원을 만드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기치를 걸었고 1900년대 초반에 수도 없는 살상을 했습니다. 지금 좌익은 '공산주의의 방법론에는 일부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그들의 이상조차 매몰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이 참 묘합니다. 듣는 순간, 공산주의에게 온 가족을 잃고 처참해 진 사람의 공격의 예봉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립니다. 자기에게 속은 것을 알면 또 다음을 위해 자기는 자기를 이런 말 저런 말로 슬슬 무마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그릇이란 그 출발을 두고 또는 그 전환기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낙인을 찍고 혹독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혹독하게 다루는 것은 자칫 고행주의가 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최소한 '낙인'을 찍어 두는 것은 아주 필요합니다. 이런 자기 분석과 자기 판단이 확실하면 교만이라는 것은 아예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3. 정말 속지 않는 사람
확률로 보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너무 어려워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쉬우므로 조금만 신경을 쓰면 얼마든지 바로 알고 바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100만 대군과 핵무기처럼 당장에 보이는 위협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며 심지어 생각할 것도 없다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속수무책 다 당하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의 평생 일지가 있습니다. 그 분의 신앙 초기는 자기의 악함과 속임에 대한 투쟁이 정말 정밀하게 많은 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자의 엄살이 아니고 성자의 고등 교만도 아니며 실제 자기가 자기 속을 들여다 보며 적은 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괴수 죄인이라 한 것은 과장법이 아니라 정확히 본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과 자기 속임에서 간단히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자기와의 전쟁은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오늘까지 세계제국을 유지하는 미국처럼, 2차대전의 일본을 승리한 미국이 오늘도 일본에게 자유하듯이 그런 단번에 요절을 내는 전쟁이 아니라 정원에 풀을 뽑듯이 오늘 완전히 뽑아도 내일 또 움이 돋습니다. 풀 뽑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매일 꾸준히 뽑으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습게 알고 놔 두면 며칠이 지나고 이제는 쥐어 뜯어야 할 일이 생기는데 그렇게 쥐어 뜯으면 뿌리가 잘 박혀서 또 돋아 납니다. 뿌리까지 캐려 들면 주변에 잔디와 다른 화초가 상합니다.
매일 늘 조심하는 것, 이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자라 갈 수 있습니다.
잘 난 사람이, 한방에 해결하려 한다면 이 전쟁은 볼 것도 없이 실패합니다.
세상과 자기에게 속지 않은 참 신앙인은 거의 없습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너무 쉬워서.
그래서 신앙의 세계는 핑계하지 못합니다. 못나도 꾸준히 계속하는 면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4. 향후 각오
백 목사님처럼 시대의 종이 되겠다는 꿈은, 꿀 것도 없고 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그런 목표를 꿈으로 두고 이루려 하면 이루어 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자기를 들여다 본 것처럼 우리도 자기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면 이 것은 조금 생각하며 지난 날을 살피면 금방 알 수 있고 또 무슨 일이 있을 때 자기 심리 상태를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계속 들여다 보고 있으면 급속하게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쓰실지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고, 어디에 쓰든지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두는 것은 지극히 작은 매일의 조심으로 충분합니다.
5. 질문을 두고 구체적으로 안내한다면
-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불택자의 의심은 태생적으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의심은 2가지입니다. 스스로 절망과 포기를 위해 제기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이런 의심은 주님이 없어서가 아니며 주님의 능력과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주님의 도움과 소망을 스스로 포기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자유성으로 길러 가는 원칙에 막혀 돕지를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지경에서도 지난 날의 모든 실패와 절망 상태까지 보약으로 삼고 사닥다리 계단으로 삼아 위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만 주셨지 절망은 처음부터 주신 일이 없는데, 한 성도가 주저 앉을 때 주님은 그 주저 앉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발전의 거름으로 사용하시려고 기대를 가지고 보시는데 귀신은 주저 앉은 이를 심방하여 아주 드러눕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왕 안 될 것... 지금까지 해 봤지만... 너는 원래 그런 인간이니...
이런 생각이 한 편으로는 자기를 겸손하다고 착각도 하게 만들며, 또 한 편으로는 별로 길이 보이지 않으니 현 상태로 대충 살게 해 버리는 자포자기를 만들어 버립니다. 주저 앉았을 때 가장 무서운 적은 주저 앉은 자기가 아니고 또 주저 앉을 요소로 가득 찬 그 자기도 아니라 해 봤자 또 마찬 가지일 텐데라는 그 생각을 넣어 주는 그 귀신입니다. 이 귀신과 싸움은 지식과 논리로 끝납니다. 알기만 바로 알면 어렵지 않게 물리치고 끝낼 수 있습니다. 인식의 문제기 때문입니다.
- 건설구원의 가치
영원 전과 영원 후라는 큰 눈으로 보면 이미 정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루어 가시는 과정은 우리 마음에 좌절하게 하는 의심을 상대하는 내 자세를 보면 주님의 영원 전에 예정해 놓은 나의 영원 후 천국의 건설의 상황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경험이 아주 많은 60세의 초등학교 교사 정도가 되면 20대 교사 시절의 아이가 우리 사회의 중심인 50대로 활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교사가 20대 처음 가르칠 때 10세 안팎의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그 때는 그 아이를 그 아이들로만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친 아이들이 해마다 계속하여 중고교 대학을 거치고 사회생활을 하며 줄줄이 그 사례가 들립니다. 그러면서 그 교사의 눈에는 이제 초등학생을 보면서 이 친구의 훗날이 점점 잘 보이게 됩니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인과는 아주 차이가 납니다. 특히 그 반 그 학생이나 그 부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목이 생깁니다.
오늘의 좌절이나 오늘의 큰 시험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순간 그 사람의 근본 자세와 대응을 보면서 영원 후 어떤 모습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알 만하도록 만들어 두셨다고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실수한 후 아이가 죽을 병이 걸렸고 다윗은 1주간을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는 죽었고 신하들 생각에 이 소식을 들으면 다윗이 그대로 죽을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가능성도 주지 않겠다 하심이니 그 순간 그 결정을 확인하고 바로 아무 일 없었듯이 새로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수 많은 활동들과 경력들이 아니라 주저 앉게 되었을 때 겸손히 한 걸음씩 조심하여 새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주저 앉게 되면 보통 그렇게 한 걸음씩 출발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사울은 동시대 인물입니다. 실수하자 그 자리에서 사무엘을 붙들고 일단 자기 이름을 올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 안면, 이 체면, 이 명예... 이미 사울은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끌어 왔습니다.
- 25세 전후라는 시점
백 목사님이 말씀하신 25세는 요즘 말로 말하면 적어도 30대일 듯합니다.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겉보기는 5년 이상 조숙해 보이나 정신 연령과 책임성으로 말하면 10년은 최소한 늦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주입식이 적용 되는 면만 본다면 요즘은 10대 후반으로 끝날 듯합니다. 워낙 세상 지식이 범람하여 학생들과 청년들의 머리가 조기에 가득 차 버리기 때문입니다. 백 목사님 10대는 육체 노동으로 한 가족을 책임 질 사람이었고, 정신 연령으로는 10대 중반에 결혼을 해서 성실하게 자기 살림을 가꾸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는 누가 와서 말 몇 마디만 하면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백지 상태였습니다. 방송이 없고 책이 없고 교육이 없으며 한 마을에서 어른들만 볼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초등학생까지가 주입식에 해당 될 정도고, 일단 중학교 3년이 과도기로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의 향락에는 제일 유리한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인간다움과 천국을 생각한다면 생지옥에 제일 가까운 상황입니다.
* (1) 주일의 당위성과 실제 결과
이런 것은 제대로 체험을 해 봐야 압니다. 군인의 혹독한 훈련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를 두고는 데모 진압이나 모의 전투로는 검증이 어렵습니다. 6.25를 당해 보고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두고 지리산 빨치산 생활을 해 봐야 알게 됩니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칠판을 두드리는 문제는, 필생을 좌우하는 시험이 고난도로 나왔을 때야 그 중요성이 드러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주일 문제란 사회 생활 거의 전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검증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불신자들이 주5일을 즐기는 상황입니다. 인권이 국가 안위보다 가치 있다 하는 세상입니다. 태극기를 불 태우는 사람이 애국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주일은 이미 주일의 가치 검증이 거의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촛불의 존재와 밝기와 그 가치라는 것은 여름 뙤양볕 아래서는 검증이 곤란합니다. 동지섣달 그믐밤에 얼어 죽을 지경일 때 촛불의 의미와 가치는 생생하게 100% 검증이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달리 문명국과 지성인 중심으로 내려 왔습니다. 아주 최근 50여년 사이에 주일 개념이 없어졌을 뿐입니다. 오랜 세월, 세계 가장 지성인들이 문화국을 형성하며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 그 주일의 경험이 따라 가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없어 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붙들고 오늘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 난 21세기 세계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사례는 21세기를 완전히 석권한 유대인의 사례로 보면 그 어떤 과학적 통계적 근거로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성경 약속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령한 이스라엘이어서 주일 성수가 유대인의 세계 석권적 결과로 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세상 것은 어린 신앙을 위해 필요할 때 적절히 이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원하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상대가 좋아서 내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장사의 거래는 내가 줄 때는 기대하는 것이 있고 또 내가 줬다면 뭔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 것은 비지니스입니다. 사랑이란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낳은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낳았으니 좋고 좋은 마음 하나만으로 조건 없이 쏟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주님 조건 없이 날 위해 죽으시고 주일에 부활하여 주님의 마련한 모든 것을 주일을 통해 다 가져 가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주님의 날로 삼아 놓고 그 날은 주님께 받음으로만 주님을 사랑하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일단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어린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은 젖 줄 때 잘 빨아 먹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엄마 건강을 생각해서 젖을 빨지 않으면 엄마는 사색이 됩니다.
- (2) 주일의 성경 근거
히4:7에 구약 안식일로 실패한 교회에게 '어느 날'을 약속했고
골2:16에 구약 안식일로 다시는 폄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일에 부활하셨고 이후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에 중요한 모든 것을 다 하셨고 사도행전 이후에는 제자들이 안식 후 첫 날에 모였으며 계1:10에 주일에 성령에 붙들려 계시록을 기록하고 이 내용이 오늘까지 신약에 펼쳐 집니다. 훗날 다시 보니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새 운동에 속한 중요한 일은 주일에 하셨습니다.
이 해석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억지로 끼워 맞추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도 그렇고 성경 66권의 형성 과정도 그렇고 실은 하나님과 천국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도마는 보고 믿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되다 하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확인하고 믿은 것은 의심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을 때 믿은 것을 말합니다. 혈액 조사와 DNA 검사를 해 봐야 부모는 아이를 제 자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이 땅 위에 100.0000000% 라는 것은 없습니다. 0.0000000000001이라도 오차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98%또는 99.5% 이상은 진실로 본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진실 입증'에 실패하여 버릴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같은 논리로 말하면 자기 자녀와 부모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제 자식 제 부모를 검증 절차를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한 눈에 보면 바로 압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서 먹어 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반복해야 합니다.
학습력과 남 다른 능력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대신 그 사람들은 도마처럼 또는 찍어 먹은 다음에 알 수 있다는 인식에 붙들려 마지막 결승점에 보면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불교든 기독교든 멋 모르고 열심히 믿다가 바른 것을 잡았다면 횡재하고 잘못 잡았다면 원래 인간은 그런 것이니 본전이라 생각하고 가는 사람이 훨씬 지혜롭고 유익합니다.
주일을 두고 가장 큰 근거는, 주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중요한 날이지만 로마 박해 시대는 바로 사자 입에 들어 가야 했고 화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주님을 본 제자들이 주님 이후 그들은 목숨을 초월하여 그들의 길을 걸었고 그들의 바로 제자들이 로마 150여년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는 20세기 초까지 그렇게 내려 왔습니다. 이 수천 년의 과정에 주일이라는 것을 조금만 비켜 갈 수 있다면 신앙 생활이 외부에 탄로 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생사의 갈림 길에 기쁨으로 자기를 던져 본 사람들로 이어 져 내려 온 역사에는 마치 한 아이가 태어 날 때 그 부모 그 집의 가족들 친척들 주변 이웃들과 옛날로 말하면 한 마을 전체는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입증이 필요 없이 가족이 내려 왔습니다. 또 남들이 보면 그냥 압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극단적인 도시화 개인화 복잡화 기술화 이권화 범죄화 된 사회에서는 공신력 있는 조사결과서가 아니라면 실제 그렇다 해도 인정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6. 주입식의 행복
기독교는 당대 최고 지성인들과 최고 문화국의 유일로 내려 온 종교입니다. 세계의 500년 800년 된 최고의 대학들은 모두 교회가 세웠습니다.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도 다 마찬 가지입니다. 그 곳은 설립 때부터 체질적으로 과학적으로 살피며 따지며 자유롭게 토론하며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맹신적 반복을 가르치지 않고 의심이라는 가상 적을 마음껏 풀어 놓고 자유롭게 공정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은 세월에 상관 없이 모든 것이 공개 되고 비판 된 가운데 자라 왔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남한은 대통령조차 거짓말로 욕을 할 수 있고, 북한은 있는 내용조차 입에 담았다가는 처참해 집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 것은 하나도 믿을 수 없고 남한의 저력은 북한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남한은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바뀌어도 오늘까지 발전을 해 왔고 일본은 1년에 한 번씩 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체제의 우수성입니다. 소련 중국은 한 번만 잘못 바뀌면 내려 앉아 버립니다. 북한은 바뀌는 순간 끝장입니다.
기독교의 저력은 어느 한 사람의 자기 지성과 의심과 탐구로 자기 혼자 그 어떤 반론과 구상과 반발을 할지라도 전체 기독교는 이렇게 내려 왔고 그 반발하고 다른 논리를 세운 이들은 헛된 노력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의심과 반론을 자문자답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께서 훗날 그런 다른 사람을 지도하거나 또는 불신 세계를 상대하거나 심지어 교회 내에서 교회를 통째로 주저 앉힐 무서운 거짓 선지자가 일어 날 때 그들을 상대하도록 사명을 주신 이들에게는 그 자신이 먼저 그런 길을 걷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차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 전체를 광야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주님은 모세 그 자신을 그 광야에 먼저 40년동안 거치도록 일정을 주셨습니다. 바울도 평생 외부에서 이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믿기 전에 외부를 먼저 알도록 했습니다.
>> 학생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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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때를 먼저 주시고 뒤에 믿게하셨고, 천국은 눈 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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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중심의 악에 속아 평생을 살고 뒤에 후회하더라도 또 이것에 속아 훗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깨달은 지가 언제라고, 그 깨달음이 거짓이라고 악은 다시 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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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 자기에 속지 않는 진짜 신앙인, 천만 중 하나일까요 억의 하나일까요, 천국과 건설구원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이뤄본 사람은 그 성취를 알기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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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목사님도 이십여년간 불신의 때를 살며 온갖 세상 경험, 향락, 타 종교에 대한 탐구 등을 다 해보시고, 다 헛되고 기독교 하나만이 진짜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깨달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 하나만 평생 붙들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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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참 기독교의 길이 진짜라는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평생 자기에 속아 헛인생 살 것이 원통해서라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믿어보고 싶습니다.
: 그러나 천국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불신의 자기로 태어나 끊임없이 의심은 계속되기에 백목사님처럼 다 버리고 갈 엄두,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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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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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건설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노력일지, 결국은 하나님이 점찍으신 은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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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백목사님께서 25세 이전 즈음에는 비판이 덜할 시기이니 올바른 교리를 주입식으로 넣어주면 그러한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씀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고, 이후 40대까지는 머릿속의 말씀을 갖고 실천해보며 지식과 실상의 일치를 시키는 단계이며, 50대 이상부터가 되어야 비로소 판단에 정평정가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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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아직 20대 중반이 되지 않은 학생이나, 매사 탐구 내지 의심이 많은 성격입니다. 주입식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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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면, '주일을 지키라' 하는 목사님 부모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 정도,
: (1). '주일을 지켜보고 사는 한 주간과 그렇지 않은 한 주간은 좀 다르더라'는 실감은 해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 (2). 주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성경에 어디에 있나?
: (3). 주일성수에 대한 성구해석을 읽어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 맞나? 예를 들면 이 홈페이지에서는 히브리 4장 3절로 11절, 요한계시 1장 10절, 골로새 2장 16절로 17절, 고린도전서 16장 2절, 로마서 14장 5절로 6절, 사도행전 2장 1절로 7절, 마가복음 16장 9절 등등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배경으로 제시하고 계신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지(그냥 제가 읽어보면 어렴풋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또한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성경에 '일월화수목금토중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 지키라'는 직접 명시를 하지 않으시고 해석을 통해 지키시도록 하셨을까?
: (4). 주일을 지키라 하는 성경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등
: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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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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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고의 과정을 예시로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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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따라서 그냥 20대의'주입식'으로 옳은 말씀 옳은 교리를 제 속에 집어넣기도 바쁠 때일텐데 '근거'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50대의 정평정가를 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올바른 말씀 배움의 자세인지가 궁금합니다. 이 역시도 현실에서의 우선 순종으로써 영감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깨달으면 되는 것일까요?
의심은 고등자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때를 먼저 주시고 뒤에 믿게하셨고, 천국은 눈 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악에 속아 평생을 살고 뒤에 후회하더라도 또 이것에 속아 훗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깨달은 지가 언제라고, 그 깨달음이 거짓이라고 악은 다시 속입니다.
세상과 자기에 속지 않는 진짜 신앙인, 천만 중 하나일까요 억의 하나일까요, 천국과 건설구원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이뤄본 사람은 그 성취를 알기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백목사님도 이십여년간 불신의 때를 살며 온갖 세상 경험, 향락, 타 종교에 대한 탐구 등을 다 해보시고, 다 헛되고 기독교 하나만이 진짜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깨달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 하나만 평생 붙들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참 기독교의 길이 진짜라는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평생 자기에 속아 헛인생 살 것이 원통해서라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불신의 자기로 태어나 끊임없이 의심은 계속되기에 백목사님처럼 다 버리고 갈 엄두,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1.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2.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건설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노력일지, 결국은 하나님이 점찍으신 은혜일지
또한 백목사님께서 25세 이전 즈음에는 비판이 덜할 시기이니 올바른 교리를 주입식으로 넣어주면 그러한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씀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고, 이후 40대까지는 머릿속의 말씀을 갖고 실천해보며 지식과 실상의 일치를 시키는 단계이며, 50대 이상부터가 되어야 비로소 판단에 정평정가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20대 중반이 되지 않은 학생이나, 매사 탐구 내지 의심이 많은 성격입니다. 주입식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지키라' 하는 목사님 부모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 정도,
(1). '주일을 지켜보고 사는 한 주간과 그렇지 않은 한 주간은 좀 다르더라'는 실감은 해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2). 주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성경에 어디에 있나?
(3). 주일성수에 대한 성구해석을 읽어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 맞나? 예를 들면 이 홈페이지에서는 히브리 4장 3절로 11절, 요한계시 1장 10절, 골로새 2장 16절로 17절, 고린도전서 16장 2절, 로마서 14장 5절로 6절, 사도행전 2장 1절로 7절, 마가복음 16장 9절 등등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배경으로 제시하고 계신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지(그냥 제가 읽어보면 어렴풋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또한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성경에 '일월화수목금토중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 지키라'는 직접 명시를 하지 않으시고 해석을 통해 지키시도록 하셨을까?
(4). 주일을 지키라 하는 성경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등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자꾸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고의 과정을 예시로 제시한 것입니다)
3. 따라서 그냥 20대의'주입식'으로 옳은 말씀 옳은 교리를 제 속에 집어넣기도 바쁠 때일텐데 '근거'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50대의 정평정가를 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올바른 말씀 배움의 자세인지가 궁금합니다. 이 역시도 현실에서의 우선 순종으로써 영감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깨달으면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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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때를 먼저 주시고 뒤에 믿게하셨고, 천국은 눈 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악에 속아 평생을 살고 뒤에 후회하더라도 또 이것에 속아 훗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깨달은 지가 언제라고, 그 깨달음이 거짓이라고 악은 다시 속입니다.
세상과 자기에 속지 않는 진짜 신앙인, 천만 중 하나일까요 억의 하나일까요, 천국과 건설구원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이뤄본 사람은 그 성취를 알기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백목사님도 이십여년간 불신의 때를 살며 온갖 세상 경험, 향락, 타 종교에 대한 탐구 등을 다 해보시고, 다 헛되고 기독교 하나만이 진짜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깨달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 하나만 평생 붙들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참 기독교의 길이 진짜라는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평생 자기에 속아 헛인생 살 것이 원통해서라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불신의 자기로 태어나 끊임없이 의심은 계속되기에 백목사님처럼 다 버리고 갈 엄두,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1. 이러한 의심이 '믿음'을 해하는 고등 자기인지 궁금합니다.
2.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건설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노력일지, 결국은 하나님이 점찍으신 은혜일지
또한 백목사님께서 25세 이전 즈음에는 비판이 덜할 시기이니 올바른 교리를 주입식으로 넣어주면 그러한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씀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고, 이후 40대까지는 머릿속의 말씀을 갖고 실천해보며 지식과 실상의 일치를 시키는 단계이며, 50대 이상부터가 되어야 비로소 판단에 정평정가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20대 중반이 되지 않은 학생이나, 매사 탐구 내지 의심이 많은 성격입니다. 주입식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지키라' 하는 목사님 부모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 정도,
(1). '주일을 지켜보고 사는 한 주간과 그렇지 않은 한 주간은 좀 다르더라'는 실감은 해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2). 주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성경에 어디에 있나?
(3). 주일성수에 대한 성구해석을 읽어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 맞나? 예를 들면 이 홈페이지에서는 히브리 4장 3절로 11절, 요한계시 1장 10절, 골로새 2장 16절로 17절, 고린도전서 16장 2절, 로마서 14장 5절로 6절, 사도행전 2장 1절로 7절, 마가복음 16장 9절 등등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배경으로 제시하고 계신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지(그냥 제가 읽어보면 어렴풋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또한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성경에 '일월화수목금토중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 지키라'는 직접 명시를 하지 않으시고 해석을 통해 지키시도록 하셨을까?
(4). 주일을 지키라 하는 성경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등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자꾸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고의 과정을 예시로 제시한 것입니다)
3. 따라서 그냥 20대의'주입식'으로 옳은 말씀 옳은 교리를 제 속에 집어넣기도 바쁠 때일텐데 '근거'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50대의 정평정가를 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올바른 말씀 배움의 자세인지가 궁금합니다. 이 역시도 현실에서의 우선 순종으로써 영감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깨달으면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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