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선과 손양원의 자세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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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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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8 11:42
주남선은 전쟁 중에 심방을 다녔습니다. 백영희와 공회 교인들도 변판원 순교집을 통해 그렇게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은 점령 기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굉장한 신앙이지만 전쟁 중에 심방을 다닌 분들과 비교하면 좀 부족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백영희 설교록에 따르면 손양원의 신앙은 사선과 고문과 고형을 초월했다 합니다.
주남선과 손양원을 비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남선과 손양원을 비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New 6.25 점령 기간에 주남선 목사님이 거창 시내를 다 돌아 다닌 것은 거창읍교회에 담임 목사님이시니 거창읍교회 교인들의 집집이 1차 목회지였기 때문에 심방한 것입니다. 주 목사님은 거창읍교회의 담임이면서 거창 지역의 전체 교회에 시찰회장으로 모두 관할을 해 왔기 때문에 점령 기간에 그런 교회들까지도 다녔습니다. 평소 심방하며 살피던 곳을 살핀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애양원교회가 1차 목회지였는데 애양원이란 당시 폐쇄 수용 시설이어서 그 울타리 내부가 손 목사님이 맡았던 현실이었습니다.
주 목사님이 점령의 환란 때에는 새로운 전도나 전국의 사경회를 가지 않고 평소 1차 책임지가 되는 교회와 교인을 살핀 것처럼, 손 목사님도 점령기에는 평화시와 달리 울타리 밖의 마을이나 교회나 전국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환란이 없는 평소에는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먼 곳에 초청을 받아 믿는 도리를 가르치지만 막상 환란이 닥치면 이미 배운 말씀으로 각자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환란 때 신앙의 기본 자세입니다. 두 분은 평소 활동 범위가 달라서 점령 기간의 활동이 다른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애양원은 원래 폐쇄 시설이었고 그 내부는 평소 든든하게 잘 길렀고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굳이 집집을 다닐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이나 손 목사님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종들이어서 심령이 밝고 주의 인도를 잘 아는 분들입니다. 주 목사님은 점령 하에 이상하게도 심방을 많이 하고 싶어서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이끄시니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집회 가는 길에 지곡교회에 가서는 공산당은 666의 황충이 떼라고 설교까지 했는데 바로 주재소로 잡아 갔습니다. 함께 잡혀 간 2명인 장로님과 전도사님인데 죽을까 싶어 떨면서 기도했고 주 목사님은 평안히 코를 곯고 주무셔 버렸습니다. 그런데 평소 주 목사님을 잘 아는 청년이 책임자였고 주 목사님은 나쁜 목사가 아니라 풀어 주라 해서 나오셨습니다. 거창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순교로 데려 가실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가 점령군 속을 돌아 다니게 했고, 손 목사님은 성령이 순교로 가야 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고요히 마지막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일제 말에 죽기를 기다리고 준비한 분들인데 한 분에게는 이런 코스로 인도하고 한 분은 저런 코스로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주 목사님은 1950.9.28 이후에 고려신학교에서 그 분의 사후를 다져 놓고 가셨기 때문에 1950년대의 고려파가 그래도 건전하게 운영이 될 수 있었고, 손 목사님은 고려파와 상관 없이 데려 가시려고 그렇게 준비 시켰는데, 오늘 와서 돌아 보면 조용히 순교로 가신 손 목사님이 점령군 속을 다닌 주 목사님보다 못한 듯하나, 두 분이 가신 뒤 고신을 통한 역사와 손양원 이름을 통한 역사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께서 오른 팔로 하시는 일과 왼 팔로 하시는 일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 목사님이 가신 뒤에 남은 하나는, 고신 교단은 '고려신학교 > 고신대학교 > 고신대학병원'을 남겼다고 자랑하고
아는 사람들은 주 목사님이 가시면서 남긴 것은 백 목사님과 공회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신 교단은 주 목사님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손 목사님은 애양원교회가 1차 목회지였는데 애양원이란 당시 폐쇄 수용 시설이어서 그 울타리 내부가 손 목사님이 맡았던 현실이었습니다.
주 목사님이 점령의 환란 때에는 새로운 전도나 전국의 사경회를 가지 않고 평소 1차 책임지가 되는 교회와 교인을 살핀 것처럼, 손 목사님도 점령기에는 평화시와 달리 울타리 밖의 마을이나 교회나 전국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환란이 없는 평소에는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먼 곳에 초청을 받아 믿는 도리를 가르치지만 막상 환란이 닥치면 이미 배운 말씀으로 각자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환란 때 신앙의 기본 자세입니다. 두 분은 평소 활동 범위가 달라서 점령 기간의 활동이 다른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애양원은 원래 폐쇄 시설이었고 그 내부는 평소 든든하게 잘 길렀고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굳이 집집을 다닐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이나 손 목사님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종들이어서 심령이 밝고 주의 인도를 잘 아는 분들입니다. 주 목사님은 점령 하에 이상하게도 심방을 많이 하고 싶어서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이끄시니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집회 가는 길에 지곡교회에 가서는 공산당은 666의 황충이 떼라고 설교까지 했는데 바로 주재소로 잡아 갔습니다. 함께 잡혀 간 2명인 장로님과 전도사님인데 죽을까 싶어 떨면서 기도했고 주 목사님은 평안히 코를 곯고 주무셔 버렸습니다. 그런데 평소 주 목사님을 잘 아는 청년이 책임자였고 주 목사님은 나쁜 목사가 아니라 풀어 주라 해서 나오셨습니다. 거창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순교로 데려 가실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가 점령군 속을 돌아 다니게 했고, 손 목사님은 성령이 순교로 가야 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고요히 마지막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일제 말에 죽기를 기다리고 준비한 분들인데 한 분에게는 이런 코스로 인도하고 한 분은 저런 코스로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주 목사님은 1950.9.28 이후에 고려신학교에서 그 분의 사후를 다져 놓고 가셨기 때문에 1950년대의 고려파가 그래도 건전하게 운영이 될 수 있었고, 손 목사님은 고려파와 상관 없이 데려 가시려고 그렇게 준비 시켰는데, 오늘 와서 돌아 보면 조용히 순교로 가신 손 목사님이 점령군 속을 다닌 주 목사님보다 못한 듯하나, 두 분이 가신 뒤 고신을 통한 역사와 손양원 이름을 통한 역사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께서 오른 팔로 하시는 일과 왼 팔로 하시는 일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 목사님이 가신 뒤에 남은 하나는, 고신 교단은 '고려신학교 > 고신대학교 > 고신대학병원'을 남겼다고 자랑하고
아는 사람들은 주 목사님이 가시면서 남긴 것은 백 목사님과 공회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신 교단은 주 목사님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