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의 '신격화'와 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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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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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30 12:53
역사적으로 그리스 중심의 동방교회는 신령한 면이 깊고,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는 체계화가 장점입니다. 초대교회가 지나면서 동방과 서방이 지역의 차이뿐 아니라 신앙의 근본 방향과 강조가 다르다 보니까 세월 속에 지금은 마치 서로 다른 종교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런 현상을 굳이 신학교에서 유명한 학자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게 되면 일반 교인은 남의 나라처럼 모르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한 교회 내에도 기도에만 몰입하여 깊은 명상을 가진 교인도 있고 잘 요약해서 가르치는 교사적 교인도 있으며 이 두 사람이 평생 자기 장점에만 매달리면 훗날에 한 사람은 미신적 신앙 같고 한 사람은 대학의 강사같은 지식주의로 굳어 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동방과 서방 교회의 차이입니다.
전체적으로 동방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통해 벧후1:4의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교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알아 들을 정도의 교리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표현조차 밋밋하다 하여 사람이 바로 하나님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에 반하여 서방교회는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고 교육이 되는 체계화가 잘 이루어 졌습니다. 그 결과 강의는 있는데 신령한 면은 자치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지탄을 받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이용도 김현봉 목사님처럼 당대에 이단으로 비판까지 받았지만 일반 신학자가 꿈도 꾸지 못할 신령한 세계를 살고 가르친 분들도 있고 해외에서는 워치만 니와 같은 분들이 그런 세계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서방교회의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당대 교회의 주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없는 듯하나 복음의 생명은 생명성 때문에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른 듯 한 것은 있어도 아주 없어 지거나 사라 지지는 않습니다.
공회의 경우는 동방교회의 신화 신격화 이상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방교회의 체계화 바로 갖춰 졌고 그 체계화의 완성 단계라 할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설명을 더하다 보면 오해가 될 수 있어 이 정도에서 일단 멈추고 다음 주간의 집회 때문에 후일의 대화로 미루겠습니다. 동방교회의 신화 신격화 하나님의 성품의 참여라는 교리는 한 문장 정도만 알지 그 내막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앙의 세계에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구원론의 목적 세계는 동방교회가 추구한 것을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신학1 님이 쓰신 내용 <<
:
: 신학의 '예전' 분야를 연구하다 보면 예배의 목적 또는 효력에 대한 학설이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살피다 보면 구원론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동방정교는 신격화 교리가 있습니다. 쉽게 풀어쓰면 성도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서방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거쳐 영화까지만 말합니다. 이 영화가 신격화를 포함하고 있는지 또는 이 신격화가 영화의 다른 표현인지 혼란스럽습니다.
:
: 공회 교리가 개혁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여 영화 세계도 기존 신학이 설명한 것과 비교도 못할 만큼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동방정교의 신격화 교리와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교리의 비교입니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니면 한 길에서 발전의 차이입니까?
:
:
: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를 임대웅 박사의 입장으로 소개하면 간단히 다음과 같습니다.
:
: .....
:
: 신격화(deification)는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theosis).”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된다”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교리인 게 사실인데요, 사실 이 교리를 발전시켰던 동방교부들과 현대의 동방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삼위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신격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된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becoming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
: 언뜻 생각하기에 신격화 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칭의 및 성화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1971년 핀란드 루터란과 러시아 정교회 간에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열립니다. 여기서 핀란드 루터란들은 루터의 “칭의”에는 기존에 많이 강조되었던 법정적 개념 외에 거룩한 삶으로의 참여라는 능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곧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
: 이후 핀란드 루터란에서는 헬싱키 대학의 매너마(Mannermaa)교수를 필두로 루터 다시 읽기 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서방신학자들의 칭의 (혹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신격화와 비교 연구하는 작업들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칼빈의 칭의론과 신격화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다양한 학술지에 6편이 실렸고, 존 웨슬리의 성화론과 신격화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에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마이클 호튼은 ‘영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며 짧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
: 이렇듯 서방에서의 신격화 연구는 주로 칭의,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서정의 한 단계와 비교되어 연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타락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구원과만 관련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교리로, 그들에게 신격화란 창조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격화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구원과 관련해서라면 구원의 서정 전체와 비교 연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논문에서 했던 작업도 신격화 교리를 실천신학, 특별히 예배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는데, 저는 신격화가 본래 내포하고 있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언약갱신의 자리로서의 예배가 곧 신격화가 실현되는 자리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굳이 신학교에서 유명한 학자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게 되면 일반 교인은 남의 나라처럼 모르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한 교회 내에도 기도에만 몰입하여 깊은 명상을 가진 교인도 있고 잘 요약해서 가르치는 교사적 교인도 있으며 이 두 사람이 평생 자기 장점에만 매달리면 훗날에 한 사람은 미신적 신앙 같고 한 사람은 대학의 강사같은 지식주의로 굳어 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동방과 서방 교회의 차이입니다.
전체적으로 동방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통해 벧후1:4의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교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알아 들을 정도의 교리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표현조차 밋밋하다 하여 사람이 바로 하나님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에 반하여 서방교회는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고 교육이 되는 체계화가 잘 이루어 졌습니다. 그 결과 강의는 있는데 신령한 면은 자치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지탄을 받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이용도 김현봉 목사님처럼 당대에 이단으로 비판까지 받았지만 일반 신학자가 꿈도 꾸지 못할 신령한 세계를 살고 가르친 분들도 있고 해외에서는 워치만 니와 같은 분들이 그런 세계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서방교회의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당대 교회의 주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없는 듯하나 복음의 생명은 생명성 때문에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른 듯 한 것은 있어도 아주 없어 지거나 사라 지지는 않습니다.
공회의 경우는 동방교회의 신화 신격화 이상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방교회의 체계화 바로 갖춰 졌고 그 체계화의 완성 단계라 할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설명을 더하다 보면 오해가 될 수 있어 이 정도에서 일단 멈추고 다음 주간의 집회 때문에 후일의 대화로 미루겠습니다. 동방교회의 신화 신격화 하나님의 성품의 참여라는 교리는 한 문장 정도만 알지 그 내막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앙의 세계에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구원론의 목적 세계는 동방교회가 추구한 것을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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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의 '예전' 분야를 연구하다 보면 예배의 목적 또는 효력에 대한 학설이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살피다 보면 구원론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동방정교는 신격화 교리가 있습니다. 쉽게 풀어쓰면 성도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서방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거쳐 영화까지만 말합니다. 이 영화가 신격화를 포함하고 있는지 또는 이 신격화가 영화의 다른 표현인지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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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회 교리가 개혁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여 영화 세계도 기존 신학이 설명한 것과 비교도 못할 만큼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동방정교의 신격화 교리와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교리의 비교입니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니면 한 길에서 발전의 차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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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를 임대웅 박사의 입장으로 소개하면 간단히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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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화(deification)는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theosis).”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된다”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교리인 게 사실인데요, 사실 이 교리를 발전시켰던 동방교부들과 현대의 동방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삼위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신격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된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becoming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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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생각하기에 신격화 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칭의 및 성화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1971년 핀란드 루터란과 러시아 정교회 간에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열립니다. 여기서 핀란드 루터란들은 루터의 “칭의”에는 기존에 많이 강조되었던 법정적 개념 외에 거룩한 삶으로의 참여라는 능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곧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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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핀란드 루터란에서는 헬싱키 대학의 매너마(Mannermaa)교수를 필두로 루터 다시 읽기 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서방신학자들의 칭의 (혹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신격화와 비교 연구하는 작업들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칼빈의 칭의론과 신격화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다양한 학술지에 6편이 실렸고, 존 웨슬리의 성화론과 신격화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에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마이클 호튼은 ‘영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며 짧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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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서방에서의 신격화 연구는 주로 칭의,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서정의 한 단계와 비교되어 연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타락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구원과만 관련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교리로, 그들에게 신격화란 창조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격화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구원과 관련해서라면 구원의 서정 전체와 비교 연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논문에서 했던 작업도 신격화 교리를 실천신학, 특별히 예배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는데, 저는 신격화가 본래 내포하고 있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언약갱신의 자리로서의 예배가 곧 신격화가 실현되는 자리임을 주장했습니다.
동방정교의 '신격화'와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을 비교
신학의 '예전' 분야를 연구하다 보면 예배의 목적 또는 효력에 대한 학설이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살피다 보면 구원론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동방정교는 신격화 교리가 있습니다. 쉽게 풀어쓰면 성도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서방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거쳐 영화까지만 말합니다. 이 영화가 신격화를 포함하고 있는지 또는 이 신격화가 영화의 다른 표현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공회 교리가 개혁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여 영화 세계도 기존 신학이 설명한 것과 비교도 못할 만큼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동방정교의 신격화 교리와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교리의 비교입니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니면 한 길에서 발전의 차이입니까?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를 임대웅 박사의 입장으로 소개하면 간단히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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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deification)는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theosis).”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된다”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교리인 게 사실인데요, 사실 이 교리를 발전시켰던 동방교부들과 현대의 동방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삼위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신격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된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becoming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신격화 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칭의 및 성화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1971년 핀란드 루터란과 러시아 정교회 간에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열립니다. 여기서 핀란드 루터란들은 루터의 “칭의”에는 기존에 많이 강조되었던 법정적 개념 외에 거룩한 삶으로의 참여라는 능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곧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후 핀란드 루터란에서는 헬싱키 대학의 매너마(Mannermaa)교수를 필두로 루터 다시 읽기 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서방신학자들의 칭의 (혹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신격화와 비교 연구하는 작업들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칼빈의 칭의론과 신격화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다양한 학술지에 6편이 실렸고, 존 웨슬리의 성화론과 신격화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에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마이클 호튼은 ‘영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며 짧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서방에서의 신격화 연구는 주로 칭의,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서정의 한 단계와 비교되어 연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타락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구원과만 관련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교리로, 그들에게 신격화란 창조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격화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구원과 관련해서라면 구원의 서정 전체와 비교 연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논문에서 했던 작업도 신격화 교리를 실천신학, 특별히 예배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는데, 저는 신격화가 본래 내포하고 있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언약갱신의 자리로서의 예배가 곧 신격화가 실현되는 자리임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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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예전' 분야를 연구하다 보면 예배의 목적 또는 효력에 대한 학설이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살피다 보면 구원론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동방정교는 신격화 교리가 있습니다. 쉽게 풀어쓰면 성도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서방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거쳐 영화까지만 말합니다. 이 영화가 신격화를 포함하고 있는지 또는 이 신격화가 영화의 다른 표현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공회 교리가 개혁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여 영화 세계도 기존 신학이 설명한 것과 비교도 못할 만큼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동방정교의 신격화 교리와 공회의 목적적 구원론 교리의 비교입니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니면 한 길에서 발전의 차이입니까?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를 임대웅 박사의 입장으로 소개하면 간단히 다음과 같습니다.
.....
신격화(deification)는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theosis).”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된다”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교리인 게 사실인데요, 사실 이 교리를 발전시켰던 동방교부들과 현대의 동방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삼위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신격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된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becoming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신격화 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칭의 및 성화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1971년 핀란드 루터란과 러시아 정교회 간에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열립니다. 여기서 핀란드 루터란들은 루터의 “칭의”에는 기존에 많이 강조되었던 법정적 개념 외에 거룩한 삶으로의 참여라는 능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곧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후 핀란드 루터란에서는 헬싱키 대학의 매너마(Mannermaa)교수를 필두로 루터 다시 읽기 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서방신학자들의 칭의 (혹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신격화와 비교 연구하는 작업들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칼빈의 칭의론과 신격화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다양한 학술지에 6편이 실렸고, 존 웨슬리의 성화론과 신격화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에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마이클 호튼은 ‘영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며 짧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서방에서의 신격화 연구는 주로 칭의,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서정의 한 단계와 비교되어 연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타락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구원과만 관련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교리로, 그들에게 신격화란 창조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격화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구원과 관련해서라면 구원의 서정 전체와 비교 연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논문에서 했던 작업도 신격화 교리를 실천신학, 특별히 예배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는데, 저는 신격화가 본래 내포하고 있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언약갱신의 자리로서의 예배가 곧 신격화가 실현되는 자리임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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