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적 입증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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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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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07:17
1. 시대의 증언
지금 시골은 나이 많은 사람 몇 명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고 곳곳이 빈 집입니다. 어느 구석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 어려울 듯하고 또 교회들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회의 출발기였으며 신사참배와 6.25 전쟁기는 1939년부터 1950년으로 당시 시골은 지금 도심의 저소득 밀집지역처럼 사람이 많았고, 특히 당시 시골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씨족 마을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족보와 어린 시절과 그 조상들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던 시절입니다.
지금 휴대폰이나 개인 PC나 금융 정보를 뒤지면 그 사람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 나는 것처럼, 당시 시골은 문서나 사진이나 이런 기술적 흔적이 필요 없고 오히려 더 명확하게 모든 것이 알려 지고 배겨 져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느 한 사람의 일이면 남 속을 모른다 할 상황이 있겠지만, 당시 백 목사님이 목회하던 개명교회와 위천교회는 교인들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고 그 교인들은 그 지방의 각 집안과 가족이 모두 얽혀 있는 상태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집안과 가족으로부터 그들의 신앙 때문에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 받고 비판을 받던 시절입니다.
한 마을의 중앙에 있던 교회가 단 한 명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사실이 감추어 질 수 없고 묻혀 질 수가 없습니다. 일제의 철저함과 잔임함은 일반 역사를 통해 살펴 보면 어렵지 않고, 또 수 많은 일제 시기에 고생한 분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당시 상황을 그리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또한 면 소재지 한 중심에서 6.25 점령 치하 내내 한 교인도 피난 가지 않고 전부 예배당에 모여 예배 때마다 종을 치며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가 없고 과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6.25 점령지의 상황은 우리 현대사에서 수없이 조명 되고 있습니다. 특히 점령 치하의 교인들의 피해는 더욱 잘 알려 져 있습니다.
2. 오늘의 증언
그렇다 해도 한 집단 전체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말을 맞추는 것은 종교 단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또 우리 사회의 공무원처럼 특정 단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명교회의 경우 모교회가 농산교회로 각 교인들은 친인척으로 얽혀 있는데 모교회 농산교회가 훗날 고제교회가 되며 이 교회는 개명교회를 제명하는 고신 교단의 이 지역의 중심 교회입니다. 그들 전부가 일제 때 함께 살아서 개명 소식을 잘 알고 있는데 고신은 순교와 함께 일제 수난기를 그들의 정체성으로 자랑하는 바, 고신에서는 아예 찾아 볼 수 없는 한 교회의 전체 승리라는 이런 전대미문의 기록을 두고 고신은 있던 기록도 부인하는 정도이고 조작을 해서 비판하고 정죄를 했는데 여기 대해 한 번도 비판이나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한 것을 볼 때, 그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위천교회의 경우는 그 교회 출신 대부분이 훗날 백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거 될 때 백 목사님을 제거한 고신에 남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한 합동이나 심지어 통합 교단에 소속을 두고 평생을 살게 됩니다. 백 목사님의 이름이 잘 될까 싶어 마음에 걱정을 하며 투쟁하던 교단에 속하여 그들 중에 지도자로 사는 분들이 6.25 점령기의 그런 문제를 두고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3. 한 가지 더하여
백 목사님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마지막 10년의 세월을 한국 교회가 가장 주목하며 부러워 하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모든 교계의 언론이 늘 주목했고 보도를 했고 전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찾아와서 배우고 갔으며, 백 목사님이 인도하던 거창 집회는 전국 최대의 사경회였고 수백 명의 외부 교단 목회자들은 물론 일제와 점령 치하의 시기에 교인들이 함께 앉아 있던 자리입니다. 대충 과장하고 미화하고 넘어 갈 수 없는, 당시의 세세한 일들을 늘 소개했었습니다.
백 목사님에 대한 비판과 이의제기는 늘 교리나 교회 운영이나 사생활에 대한 것이었고, 그 것은 늘 조작이거나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와 점령 치하에 대한 문제만은 아예 언급조차하지 않았습니다. 없던 사실을 만들어 매장을 하며 수십 년을 노력한 교단들이 만일 백 목사님 입에서 없던 사실을 대규모로 조작을 했다면 그 하나의 죄로 쉽게 정죄를 했을 것입니다.
>> 목회자 님이 쓰신 내용 <<
: 소식게시판의 2768번에 어제 날자로 일제 때와 6.25점령치하에서 백영희 목사님은 신앙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6년간의 신사참배 기간에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등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붙들려 갔는데 한 교회 교인들 전부가 6년 내내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당시 일본 경찰의 역사적 만행을 보면 믿기 어렵습니다. 또 공산당의 점령기간에 전 교인들이 정말 한 명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다면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계의 의심이나 반론이 없었는지요?
: 연구소가 이런 문제를 두고 오랜세월 동안 계속해서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은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는 반증같아 보입니다.
지금 시골은 나이 많은 사람 몇 명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고 곳곳이 빈 집입니다. 어느 구석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 어려울 듯하고 또 교회들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회의 출발기였으며 신사참배와 6.25 전쟁기는 1939년부터 1950년으로 당시 시골은 지금 도심의 저소득 밀집지역처럼 사람이 많았고, 특히 당시 시골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씨족 마을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족보와 어린 시절과 그 조상들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던 시절입니다.
지금 휴대폰이나 개인 PC나 금융 정보를 뒤지면 그 사람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 나는 것처럼, 당시 시골은 문서나 사진이나 이런 기술적 흔적이 필요 없고 오히려 더 명확하게 모든 것이 알려 지고 배겨 져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느 한 사람의 일이면 남 속을 모른다 할 상황이 있겠지만, 당시 백 목사님이 목회하던 개명교회와 위천교회는 교인들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고 그 교인들은 그 지방의 각 집안과 가족이 모두 얽혀 있는 상태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집안과 가족으로부터 그들의 신앙 때문에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 받고 비판을 받던 시절입니다.
한 마을의 중앙에 있던 교회가 단 한 명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사실이 감추어 질 수 없고 묻혀 질 수가 없습니다. 일제의 철저함과 잔임함은 일반 역사를 통해 살펴 보면 어렵지 않고, 또 수 많은 일제 시기에 고생한 분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당시 상황을 그리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또한 면 소재지 한 중심에서 6.25 점령 치하 내내 한 교인도 피난 가지 않고 전부 예배당에 모여 예배 때마다 종을 치며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가 없고 과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6.25 점령지의 상황은 우리 현대사에서 수없이 조명 되고 있습니다. 특히 점령 치하의 교인들의 피해는 더욱 잘 알려 져 있습니다.
2. 오늘의 증언
그렇다 해도 한 집단 전체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말을 맞추는 것은 종교 단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또 우리 사회의 공무원처럼 특정 단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명교회의 경우 모교회가 농산교회로 각 교인들은 친인척으로 얽혀 있는데 모교회 농산교회가 훗날 고제교회가 되며 이 교회는 개명교회를 제명하는 고신 교단의 이 지역의 중심 교회입니다. 그들 전부가 일제 때 함께 살아서 개명 소식을 잘 알고 있는데 고신은 순교와 함께 일제 수난기를 그들의 정체성으로 자랑하는 바, 고신에서는 아예 찾아 볼 수 없는 한 교회의 전체 승리라는 이런 전대미문의 기록을 두고 고신은 있던 기록도 부인하는 정도이고 조작을 해서 비판하고 정죄를 했는데 여기 대해 한 번도 비판이나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한 것을 볼 때, 그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위천교회의 경우는 그 교회 출신 대부분이 훗날 백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거 될 때 백 목사님을 제거한 고신에 남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한 합동이나 심지어 통합 교단에 소속을 두고 평생을 살게 됩니다. 백 목사님의 이름이 잘 될까 싶어 마음에 걱정을 하며 투쟁하던 교단에 속하여 그들 중에 지도자로 사는 분들이 6.25 점령기의 그런 문제를 두고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3. 한 가지 더하여
백 목사님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마지막 10년의 세월을 한국 교회가 가장 주목하며 부러워 하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모든 교계의 언론이 늘 주목했고 보도를 했고 전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찾아와서 배우고 갔으며, 백 목사님이 인도하던 거창 집회는 전국 최대의 사경회였고 수백 명의 외부 교단 목회자들은 물론 일제와 점령 치하의 시기에 교인들이 함께 앉아 있던 자리입니다. 대충 과장하고 미화하고 넘어 갈 수 없는, 당시의 세세한 일들을 늘 소개했었습니다.
백 목사님에 대한 비판과 이의제기는 늘 교리나 교회 운영이나 사생활에 대한 것이었고, 그 것은 늘 조작이거나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와 점령 치하에 대한 문제만은 아예 언급조차하지 않았습니다. 없던 사실을 만들어 매장을 하며 수십 년을 노력한 교단들이 만일 백 목사님 입에서 없던 사실을 대규모로 조작을 했다면 그 하나의 죄로 쉽게 정죄를 했을 것입니다.
>> 목회자 님이 쓰신 내용 <<
: 소식게시판의 2768번에 어제 날자로 일제 때와 6.25점령치하에서 백영희 목사님은 신앙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6년간의 신사참배 기간에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등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붙들려 갔는데 한 교회 교인들 전부가 6년 내내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당시 일본 경찰의 역사적 만행을 보면 믿기 어렵습니다. 또 공산당의 점령기간에 전 교인들이 정말 한 명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다면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계의 의심이나 반론이 없었는지요?
: 연구소가 이런 문제를 두고 오랜세월 동안 계속해서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은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는 반증같아 보입니다.
백목사님의 일제와 점령치하의 기록
소식게시판의 2768번에 어제 날자로 일제 때와 6.25점령치하에서 백영희 목사님은 신앙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6년간의 신사참배 기간에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등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붙들려 갔는데 한 교회 교인들 전부가 6년 내내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당시 일본 경찰의 역사적 만행을 보면 믿기 어렵습니다. 또 공산당의 점령기간에 전 교인들이 정말 한 명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다면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계의 의심이나 반론이 없었는지요?
연구소가 이런 문제를 두고 오랜세월 동안 계속해서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은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는 반증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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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게시판의 2768번에 어제 날자로 일제 때와 6.25점령치하에서 백영희 목사님은 신앙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6년간의 신사참배 기간에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등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붙들려 갔는데 한 교회 교인들 전부가 6년 내내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당시 일본 경찰의 역사적 만행을 보면 믿기 어렵습니다. 또 공산당의 점령기간에 전 교인들이 정말 한 명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다면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계의 의심이나 반론이 없었는지요?
연구소가 이런 문제를 두고 오랜세월 동안 계속해서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은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는 반증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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