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 알미니우스에 대한 대화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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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1 08:09
지금 초기화면의 '발언/연구' 게시판에서 한달 정도 진행되는 대화 내용 때문에 문의합니다.
15372번, 제한속죄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 (14) 은식 2025.02.19
15371번, 성도의 견인에 관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 (11) 은식 2025.02.19
15298번, 개혁주의와 웨슬리노선 사죄론 정리 (74) 신학 2025.01.28
솔직히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세상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두분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보니 두분은 이해가 되기 때문에 대화가 되는데 그말이 그말 같습니다. 또 이런 대화가 신앙에 실제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충 볼 때 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라 보이는데 전문분야란 원래 비전공자가 읽어봐도 모르는 것이 흔하지만 성경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만은 일반 교인이 이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물리 화학 생물이야 일반인이 모른다 해도 로켓을 우주로 보내고 돌아오는 것을 보면 효력도 있고 이론이 정말이라고 믿어집니다. 화학과 생물은 약을 만들어서 고치니 약의 성분을 설명해도 일반인이 모르지만 효력이 있으니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해도 전도가 되고 교회가 은혜롭게 운영이 되고 일반 교인들이 알미니우스나 웨슬리 때문에 성경에 몰랐던 무엇을 알게 되고 그래서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면이 실제 도움이 되는지? 칼빈까지는 천주교의 폐해와 비교를 해서 이해가 되지만 알미니우스나 웨슬리는 칼빈과 다른 것을 주장해서 우리의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어떤 면일까요?
발언/연구 게시판은 누구든지 말씀하시라는 곳이어서 약간 불편스럽고 불만스럽지만 표시하기는 죄송한 자리고, 문답방은 연구소가 안내를 하시는 자리니 솔직하게 질문합니다. 주변에 신학을 아는 지인에게 이 글을 보여주니까 신학교에 가면 배우는 것인데 시험치고 나면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합니다. 그래도 가끔 그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자리에서 함께 들어도 기억을 잘하고 또 전공까지는 하더라 합니다.
15372번, 제한속죄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 (14) 은식 2025.02.19
15371번, 성도의 견인에 관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 (11) 은식 2025.02.19
15298번, 개혁주의와 웨슬리노선 사죄론 정리 (74) 신학 2025.01.28
솔직히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세상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두분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보니 두분은 이해가 되기 때문에 대화가 되는데 그말이 그말 같습니다. 또 이런 대화가 신앙에 실제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충 볼 때 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라 보이는데 전문분야란 원래 비전공자가 읽어봐도 모르는 것이 흔하지만 성경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만은 일반 교인이 이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물리 화학 생물이야 일반인이 모른다 해도 로켓을 우주로 보내고 돌아오는 것을 보면 효력도 있고 이론이 정말이라고 믿어집니다. 화학과 생물은 약을 만들어서 고치니 약의 성분을 설명해도 일반인이 모르지만 효력이 있으니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해도 전도가 되고 교회가 은혜롭게 운영이 되고 일반 교인들이 알미니우스나 웨슬리 때문에 성경에 몰랐던 무엇을 알게 되고 그래서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면이 실제 도움이 되는지? 칼빈까지는 천주교의 폐해와 비교를 해서 이해가 되지만 알미니우스나 웨슬리는 칼빈과 다른 것을 주장해서 우리의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어떤 면일까요?
발언/연구 게시판은 누구든지 말씀하시라는 곳이어서 약간 불편스럽고 불만스럽지만 표시하기는 죄송한 자리고, 문답방은 연구소가 안내를 하시는 자리니 솔직하게 질문합니다. 주변에 신학을 아는 지인에게 이 글을 보여주니까 신학교에 가면 배우는 것인데 시험치고 나면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합니다. 그래도 가끔 그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자리에서 함께 들어도 기억을 잘하고 또 전공까지는 하더라 합니다.
* 신앙의 상식과 신학의 전문 분야
의학 법학 공학에 이르는 모든 면으로 '전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없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사연이 많다 보니 기억하고 파악해야 할 분량이 많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들여다 봐야 하는 부분이 너무 미세하여 일반 사람으로서는 눈으로 봐도 알기 어려운 고난도 분야가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신학'이라 하며 '전문' 분야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쉽게 그냥 알 수 있을 때 '성경 공부'라고 합니다. 신앙의 상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알미니안, 웨슬리 라는 표현
이 단어가 나오면 '장로교' 교인에게는 신학의 전문 분야입니다. 감리교 침례교 교인에게 '칼빈주의' '개혁주의' 라는 말도 신학의 전문 분야입니다. 알기도 어렵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듯이 보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평생 그 분야만 연구하는 교수나 박사 정도면 알 듯하나 사실 의문입니다. 학설이 전부 제각각입니다. 과거 사실은 일치하되 오늘의 적용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파악조차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칼빈주의에 목숨을 건다 하는 유명인들을 접해 본 적은 많은데 칼빈을 제대로 아는 경우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끼리 서로 다르게 알고 있고 그래서 교파가 나뉘고 신학의 논쟁이 끝이 없습니다. 이 곳은 그런 현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칼빈주의 최고봉이 박윤선이고 이 분과 그 이하의 제자들이 총신대 총장 등등인데 저희의 삼분설과 중생된 영과 심신의 성화에 관련 된 논쟁에서 아주 간단하게 발표한 우리의 단어나 문장조차 반대로 읽고 정죄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또 교계에 흔하고 흔한 논쟁을 보면 거의 대부분 상대방의 글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조차 하지 않아서 생기고 있습니다.
* 질문하신 글들은,
한 눈에 읽어 봐도 남의 글을 함부로 비틀거나 자기가 한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밀어 붙이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냥 두 분이 서로 아는 것을 가지고 비교를 해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A께서는 이렇게 알고 계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B께서는 저렇다 하시니 B는 저렇게 믿으시는구나,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읽었으면 합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은 이해하시면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면 굳이 아시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유는? 성경도 그냥 읽으면서 읽히면 읽고 읽히지 않으면 이렇게 적어 주셨구나 라고 해 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냥 넘어 가면 됩니다. '백영희 신앙노선 = 총공회'라는 곳이 특별한 이유는 그 시작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경을 읽다가 읽혀 지지 않으면 읽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여기까지는 참 좋은 자세요 복입니다. 그런데 꼭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고 지나치게 나가다 보면 벧후3:16에 억지로 풀다가 자기도 모르게 딛고 나가는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있습니다. 교계의 거의 모든 논쟁이 이런 면을 놓치는 듯합니다. 윗글의 두 분은 그렇지 않다고 보여 다행스럽고 또 이 곳에 진지하게 적을 때는 이런 면을 잘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곳을 운영하는 연구진, 사실상 알고 싶어 노력하는 저희 중에 두 분의 글을 다 파악하는 분은 아마 한 분일 듯합니다. 나머지는 무슨 말씀인지 현재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금 늦지만 자꾸 읽다 보면, 또는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 나아 질 것이고, 이후에 잘 알게 되면 그 때는 직접 글을 적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곳의 답변자는 이 곳에 질문하는 분들에게 아는 것만 안내하고 잘 모르는 것은 잘 설명할 곳으로 안내를 하거나 아니면 저희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는 일반 교인의 일반 생활에서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전력하고 있습니다. 항생제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고 꼭 사용을 하려면 중간에 끊지 말고 계속 먹어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 정도만 설명합니다. 항생제 제조법이나 작용 기전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칠판에 적으며 가르쳐도 저희는 이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것은 생활 속에 불가피하게 알아야 하는 것, 그 것에 관련 된 것, 그리고 알아 지는 것을 중심으로 꾸준히 실행을 하다 보면 더 알아 지고 그래서 알아 지는 것만 더 알아 가면 나갈 뿐입니다.
의학 법학 공학에 이르는 모든 면으로 '전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없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사연이 많다 보니 기억하고 파악해야 할 분량이 많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들여다 봐야 하는 부분이 너무 미세하여 일반 사람으로서는 눈으로 봐도 알기 어려운 고난도 분야가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신학'이라 하며 '전문' 분야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쉽게 그냥 알 수 있을 때 '성경 공부'라고 합니다. 신앙의 상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알미니안, 웨슬리 라는 표현
이 단어가 나오면 '장로교' 교인에게는 신학의 전문 분야입니다. 감리교 침례교 교인에게 '칼빈주의' '개혁주의' 라는 말도 신학의 전문 분야입니다. 알기도 어렵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듯이 보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평생 그 분야만 연구하는 교수나 박사 정도면 알 듯하나 사실 의문입니다. 학설이 전부 제각각입니다. 과거 사실은 일치하되 오늘의 적용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파악조차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칼빈주의에 목숨을 건다 하는 유명인들을 접해 본 적은 많은데 칼빈을 제대로 아는 경우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끼리 서로 다르게 알고 있고 그래서 교파가 나뉘고 신학의 논쟁이 끝이 없습니다. 이 곳은 그런 현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칼빈주의 최고봉이 박윤선이고 이 분과 그 이하의 제자들이 총신대 총장 등등인데 저희의 삼분설과 중생된 영과 심신의 성화에 관련 된 논쟁에서 아주 간단하게 발표한 우리의 단어나 문장조차 반대로 읽고 정죄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또 교계에 흔하고 흔한 논쟁을 보면 거의 대부분 상대방의 글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조차 하지 않아서 생기고 있습니다.
* 질문하신 글들은,
한 눈에 읽어 봐도 남의 글을 함부로 비틀거나 자기가 한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밀어 붙이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냥 두 분이 서로 아는 것을 가지고 비교를 해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A께서는 이렇게 알고 계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B께서는 저렇다 하시니 B는 저렇게 믿으시는구나,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읽었으면 합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은 이해하시면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면 굳이 아시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유는? 성경도 그냥 읽으면서 읽히면 읽고 읽히지 않으면 이렇게 적어 주셨구나 라고 해 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냥 넘어 가면 됩니다. '백영희 신앙노선 = 총공회'라는 곳이 특별한 이유는 그 시작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경을 읽다가 읽혀 지지 않으면 읽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여기까지는 참 좋은 자세요 복입니다. 그런데 꼭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고 지나치게 나가다 보면 벧후3:16에 억지로 풀다가 자기도 모르게 딛고 나가는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있습니다. 교계의 거의 모든 논쟁이 이런 면을 놓치는 듯합니다. 윗글의 두 분은 그렇지 않다고 보여 다행스럽고 또 이 곳에 진지하게 적을 때는 이런 면을 잘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곳을 운영하는 연구진, 사실상 알고 싶어 노력하는 저희 중에 두 분의 글을 다 파악하는 분은 아마 한 분일 듯합니다. 나머지는 무슨 말씀인지 현재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금 늦지만 자꾸 읽다 보면, 또는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 나아 질 것이고, 이후에 잘 알게 되면 그 때는 직접 글을 적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곳의 답변자는 이 곳에 질문하는 분들에게 아는 것만 안내하고 잘 모르는 것은 잘 설명할 곳으로 안내를 하거나 아니면 저희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는 일반 교인의 일반 생활에서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전력하고 있습니다. 항생제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고 꼭 사용을 하려면 중간에 끊지 말고 계속 먹어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 정도만 설명합니다. 항생제 제조법이나 작용 기전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칠판에 적으며 가르쳐도 저희는 이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것은 생활 속에 불가피하게 알아야 하는 것, 그 것에 관련 된 것, 그리고 알아 지는 것을 중심으로 꾸준히 실행을 하다 보면 더 알아 지고 그래서 알아 지는 것만 더 알아 가면 나갈 뿐입니다.
(좀 무지하지만)
공회는 성경 외에는 읽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넓히면 성경을 직접 설명한 설교록까지는 참고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록이 A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B 목사는 저렇게 말한다며 늘어 놓기 시작하면 양쪽의 공통점 정도는 참고하고 서로 다른 부분은 훗날에 해결할 과제로 밀쳐 버립니다. 그 것이 이 노선을 일제와 해방 후와 전쟁과 그 이후 오늘까지 항상 한 길을 걸어 오게 했습니다. 적절한 무식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다행스러웠습니다. 무식이란 무시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벌콥의 기본서)
이런 공회지만 그래도 '뻘콥의 교리사' 한 권 정도는 읽어 보도록 권합니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듯합니다. 간략하게 시대 별로 교리 별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 책은 비교적 쉽게 그리고 일반 상식 차원에서도 한 번 읽어 보면 괜찮을 정도입니다. 정통 칼빈주의 개혁주의 입장에서 적었습니다. 거의 다 공통적으로 이해할 만한 입장에서 적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점은 역사에 한번씩 나온 여러 주장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적었습니다. 이 책은 신학서치고는 아주 입문으로 치는데 신학서라는 점 때문에 이 정도의 입문서가 일반 교인, 우리의 일상 신앙인들에게는 너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가피하게 읽은 책의 분량도 엄청난데 성경 외에 2백 쪽 이내의 개론서라면 그냥 한번 훑어 볼 만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모두 동의하지도 않고, 이 책의 여러 면이 불편하고 불만스럽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잘 적기도 어렵고 잘 적은 책도 기억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 전체를 통해 그래도 오늘 우리 정도로 고등 교육이 일반화 된 세상을 살아 가는 교인으로서는 이 정도의 책은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에 없는 내용은 몰라도 괜찮다고 담대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내용 정도조차 모른다면 어느 순간에 너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교 여호와증인 안식교 별별 종류의 이단들이 처음에는 자기들만 역사적으로 처음 깨달았다고 했는데 역사에 다 나왔었습니다. 그 정도의 상식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정통서에서도)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교회 2천년 역사에서 모두가 무조건 정통 교리로 알아 온 내용, 토씨 하나만 잘못 되면 바로 역사의 이단이 되는 사례를 곳곳에 소개했습니다. 이런 내용만은 우리가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논쟁들이 아무리 읽어 봐도 그 소리가 그 소리고, 그리고 서로 토씨 하나가 다르다 해서 무슨 그리 큰 문제가 생기나 싶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쓸데 없는 논쟁으로만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오늘도 신앙의 수없는 사안마다 그 시작은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토씨 하나, 별 것도 아닌데, 말로 말하다 보니 그 말이 그 말 같고, 서로 다르다 해도 별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세월이 가다 보면 그 토씨 하나 때문에 슬슬 격차가 발생하고 그 격차는 오늘날 서로 종교가 다르다 할 만큼 되어 버렸습니다. 쉽게, 천주교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칼빈과 알미니우스의 두 이론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선의 오늘의 칼빈주의와 다른 점이 참으로 많지만 굳이 칼빈주의 자체만은 붙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칼빈주의로서는 알미니안이란 천주교 절반쯤 되는 이단이니 상종할 바도 아니나 그들이 노력하고 담아 놓은 표현 중에 참으로 귀한 것이 있고 그 귀한 부분이 칼빈주의에 비어 있는 곳, 또는 칼빈주의가 언젠가 한 번 나아 가야 할 단계가 있다면 그 때는 너무 소중할 수가 있어서 이 곳은 알미니안이 아닌데도 칼빈주의자들은 이 곳을 그렇게 단정해 왔습니다.
일단 이 정도 글을 가지고 앞에 소개를 추가합니다.
공회는 성경 외에는 읽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넓히면 성경을 직접 설명한 설교록까지는 참고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록이 A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B 목사는 저렇게 말한다며 늘어 놓기 시작하면 양쪽의 공통점 정도는 참고하고 서로 다른 부분은 훗날에 해결할 과제로 밀쳐 버립니다. 그 것이 이 노선을 일제와 해방 후와 전쟁과 그 이후 오늘까지 항상 한 길을 걸어 오게 했습니다. 적절한 무식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다행스러웠습니다. 무식이란 무시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벌콥의 기본서)
이런 공회지만 그래도 '뻘콥의 교리사' 한 권 정도는 읽어 보도록 권합니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듯합니다. 간략하게 시대 별로 교리 별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 책은 비교적 쉽게 그리고 일반 상식 차원에서도 한 번 읽어 보면 괜찮을 정도입니다. 정통 칼빈주의 개혁주의 입장에서 적었습니다. 거의 다 공통적으로 이해할 만한 입장에서 적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점은 역사에 한번씩 나온 여러 주장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적었습니다. 이 책은 신학서치고는 아주 입문으로 치는데 신학서라는 점 때문에 이 정도의 입문서가 일반 교인, 우리의 일상 신앙인들에게는 너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가피하게 읽은 책의 분량도 엄청난데 성경 외에 2백 쪽 이내의 개론서라면 그냥 한번 훑어 볼 만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모두 동의하지도 않고, 이 책의 여러 면이 불편하고 불만스럽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잘 적기도 어렵고 잘 적은 책도 기억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 전체를 통해 그래도 오늘 우리 정도로 고등 교육이 일반화 된 세상을 살아 가는 교인으로서는 이 정도의 책은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에 없는 내용은 몰라도 괜찮다고 담대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내용 정도조차 모른다면 어느 순간에 너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교 여호와증인 안식교 별별 종류의 이단들이 처음에는 자기들만 역사적으로 처음 깨달았다고 했는데 역사에 다 나왔었습니다. 그 정도의 상식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정통서에서도)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교회 2천년 역사에서 모두가 무조건 정통 교리로 알아 온 내용, 토씨 하나만 잘못 되면 바로 역사의 이단이 되는 사례를 곳곳에 소개했습니다. 이런 내용만은 우리가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논쟁들이 아무리 읽어 봐도 그 소리가 그 소리고, 그리고 서로 토씨 하나가 다르다 해서 무슨 그리 큰 문제가 생기나 싶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쓸데 없는 논쟁으로만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오늘도 신앙의 수없는 사안마다 그 시작은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토씨 하나, 별 것도 아닌데, 말로 말하다 보니 그 말이 그 말 같고, 서로 다르다 해도 별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세월이 가다 보면 그 토씨 하나 때문에 슬슬 격차가 발생하고 그 격차는 오늘날 서로 종교가 다르다 할 만큼 되어 버렸습니다. 쉽게, 천주교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칼빈과 알미니우스의 두 이론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선의 오늘의 칼빈주의와 다른 점이 참으로 많지만 굳이 칼빈주의 자체만은 붙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칼빈주의로서는 알미니안이란 천주교 절반쯤 되는 이단이니 상종할 바도 아니나 그들이 노력하고 담아 놓은 표현 중에 참으로 귀한 것이 있고 그 귀한 부분이 칼빈주의에 비어 있는 곳, 또는 칼빈주의가 언젠가 한 번 나아 가야 할 단계가 있다면 그 때는 너무 소중할 수가 있어서 이 곳은 알미니안이 아닌데도 칼빈주의자들은 이 곳을 그렇게 단정해 왔습니다.
일단 이 정도 글을 가지고 앞에 소개를 추가합니다.
앞에서 글을 적었던 "은식"입니다. 제가 이곳에 자주 찾아와 글을 올리지 않으나 최근에는 몇몇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위 글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체계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고 그저 이미 올려진 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적었던 순서와 상관 없이 나중에 보니 글의 순서가 뒤죽박죽 뒤바뀌기도 했더군요. 그러니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생각을 정리하라는 요청이 있어 그에 댓글을 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예정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가 다른 것은 결정적으로 예정론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예정했다고 주장하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최후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지를 아셨고, 그러한 "미리 아심"에 근거하여 그를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칼빈주의는 "예정"이 있고 아르미니우스는 "예지"와 "예정"을 함께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적용 면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에서는 "회심을 준비시키는 설교"나 "복음 전도"와 같은 것은 무의미하거나 교리에 어긋난다고 보는 반면, 아르미니우스는 그러한 설교나 전도는 매우 필요하고 권장되고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뭔가 거창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칼빈의 "예정설"에 대항하여 오래 전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믿어왔던 것을 교리화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도 "미리 아신 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 믿어온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것이구나! 어떤 누구도 내가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지 않거든요.
칼빈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예정했다고 주장하고,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최후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지를 아셨고, 그러한 "미리 아심"에 근거하여 그를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칼빈주의는 "예정"이 있고 아르미니우스는 "예지"와 "예정"을 함께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적용 면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에서는 "회심을 준비시키는 설교"나 "복음 전도"와 같은 것은 무의미하거나 교리에 어긋난다고 보는 반면, 아르미니우스는 그러한 설교나 전도는 매우 필요하고 권장되고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뭔가 거창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칼빈의 "예정설"에 대항하여 오래 전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믿어왔던 것을 교리화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도 "미리 아신 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 믿어온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것이구나! 어떤 누구도 내가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지 않거든요.
대화의 방향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추가합니다.
(장로교는)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전12:3,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런 말씀들 때문에 장로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천주교 1천 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역사와 함께 인간이 움직여야 하는데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교황이 제시하는 지침이 구원에 꼭 필요하다면서 여러 가지를 내놓았습니다. 평정심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인간의 노력이 더해 져야 한다고 꼬리표가 달렸고, 세월 속에 인간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계속 조건을 제시하다 보니 결국 구원을 얻는 문제에 하나님은 종이 호랑이가 되었고 사람의 마음에서 사라 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일부 조금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시작한 그 인간의 노력이 점점 커지면서 천주교 시기가 절정에 이를 때는 교황이 확실하게 하나님을 대신 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는)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렇게 뚜렷한 말씀이 있으니 이런 말씀들을 근거하여 '은식'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신 그런 교리가 전개 되었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을 치열하게 공방을 했습니다.
(공회, 이 곳은)
어느 쪽으로 믿는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계로 진학하든 상고로 진학하든 공고로 진학하든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인문고로 대학을 가는 것만 학생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입장입니다. 감리교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도 전에 지옥을 가도록 정해 놓아 버린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일단 가능성이란 그 어느 단계 그 어느 면에서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입장으로 예지 예정론을 제시했는데 일반적으로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인간답고,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명확하게 그렇게 적어 주신 곳이 있으니 성경을 근거하여 칼빈의 예정론에 이의를 했다고 이해를 합니다.
출발은 누구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서로 자기의 주장을 옳다고 최대한 강하게 단정을 하면서 그리고 인간이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또 반대편도 억지만 부리려고 시작한 사람들은 아닐 터이니 왜 그렇게 주장했을지 냉정하게 생각하다 보면 저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것으로 우기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저는 한국이 우리 것이라고 펄쩍 뛰는 것도 이해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최종적으로 힘센 쪽이 가져 가는 것이고 또 논리도 힘에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역사 끝까지 힘으로 이긴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니 자기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붙여 보면서도 동시에 상대방 입장을 정말 솔직하게 이해를 해 보려고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고 봅니다.
역사 이후 기독교의 모든 모순은 그 당시는 살인을 하면서까지 치열했고, 조금 뒤 또는 세월이 충분히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다 드러 났습니다. 이 문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공회는 알미니우스는 무조건 철이 없고 틀렸다며 난도질을 하던 1950년대 10년을 고신 교단의 고려신학교 시절에 박윤선 이상근 등등의 신학자들과 함께 하며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잘 배웠었습니다. 이들은 일제 말기부터 한국 장로교의 조직신학 대표인 박형룡을 통해 철저히 교육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후 오늘까지 한국 교회의 보수 정통을 자타 함께 인정하는 이들의 원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회는 그 와중에 그 분들에게서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고 또 선배들의 주장을 단순히 뒷받침 하기 위해 성경을 활용하는 데 그친다는 참 묘한 빈 곳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공회가 세월 속에 독자 노선으로 형성 되고 목회자를 양성해야 할 때 '성경 1백 독'을 최소한 읽도록 제시했습니다. 그냥 읽는 1백 독이 아니라 과제를 하나 가지고 적어 가면서 1 독씩 하되 그 과제가 60여 독이 넘습니다. 일반적으로 읽는 기준으로 보면 수백 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회 교인들은 비록 대다수야 아니지만 일반 교인이 한 해에 10독을 이상 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 봅니다. 공회의 출발이 덕유산에 지게 지던 수준이고, 부산에서 세계 10대 교회에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기록할 때도 9급 공무원이 거의 없고 국제시장 보따리 장사에 노동의 현장 노무자가 교인의 대부분이었으니 성경 외에는 사실 읽으라 해도 읽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곳의 입장을 이해하시는 데 참고가 되어 몇 말씀 적었습니다.
(장로교는)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전12:3,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런 말씀들 때문에 장로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천주교 1천 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역사와 함께 인간이 움직여야 하는데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교황이 제시하는 지침이 구원에 꼭 필요하다면서 여러 가지를 내놓았습니다. 평정심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인간의 노력이 더해 져야 한다고 꼬리표가 달렸고, 세월 속에 인간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계속 조건을 제시하다 보니 결국 구원을 얻는 문제에 하나님은 종이 호랑이가 되었고 사람의 마음에서 사라 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일부 조금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시작한 그 인간의 노력이 점점 커지면서 천주교 시기가 절정에 이를 때는 교황이 확실하게 하나님을 대신 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는)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렇게 뚜렷한 말씀이 있으니 이런 말씀들을 근거하여 '은식'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신 그런 교리가 전개 되었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을 치열하게 공방을 했습니다.
(공회, 이 곳은)
어느 쪽으로 믿는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계로 진학하든 상고로 진학하든 공고로 진학하든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인문고로 대학을 가는 것만 학생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입장입니다. 감리교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도 전에 지옥을 가도록 정해 놓아 버린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일단 가능성이란 그 어느 단계 그 어느 면에서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입장으로 예지 예정론을 제시했는데 일반적으로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인간답고,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명확하게 그렇게 적어 주신 곳이 있으니 성경을 근거하여 칼빈의 예정론에 이의를 했다고 이해를 합니다.
출발은 누구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서로 자기의 주장을 옳다고 최대한 강하게 단정을 하면서 그리고 인간이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또 반대편도 억지만 부리려고 시작한 사람들은 아닐 터이니 왜 그렇게 주장했을지 냉정하게 생각하다 보면 저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것으로 우기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저는 한국이 우리 것이라고 펄쩍 뛰는 것도 이해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최종적으로 힘센 쪽이 가져 가는 것이고 또 논리도 힘에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역사 끝까지 힘으로 이긴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니 자기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붙여 보면서도 동시에 상대방 입장을 정말 솔직하게 이해를 해 보려고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고 봅니다.
역사 이후 기독교의 모든 모순은 그 당시는 살인을 하면서까지 치열했고, 조금 뒤 또는 세월이 충분히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다 드러 났습니다. 이 문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공회는 알미니우스는 무조건 철이 없고 틀렸다며 난도질을 하던 1950년대 10년을 고신 교단의 고려신학교 시절에 박윤선 이상근 등등의 신학자들과 함께 하며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잘 배웠었습니다. 이들은 일제 말기부터 한국 장로교의 조직신학 대표인 박형룡을 통해 철저히 교육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후 오늘까지 한국 교회의 보수 정통을 자타 함께 인정하는 이들의 원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회는 그 와중에 그 분들에게서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고 또 선배들의 주장을 단순히 뒷받침 하기 위해 성경을 활용하는 데 그친다는 참 묘한 빈 곳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공회가 세월 속에 독자 노선으로 형성 되고 목회자를 양성해야 할 때 '성경 1백 독'을 최소한 읽도록 제시했습니다. 그냥 읽는 1백 독이 아니라 과제를 하나 가지고 적어 가면서 1 독씩 하되 그 과제가 60여 독이 넘습니다. 일반적으로 읽는 기준으로 보면 수백 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회 교인들은 비록 대다수야 아니지만 일반 교인이 한 해에 10독을 이상 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 봅니다. 공회의 출발이 덕유산에 지게 지던 수준이고, 부산에서 세계 10대 교회에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기록할 때도 9급 공무원이 거의 없고 국제시장 보따리 장사에 노동의 현장 노무자가 교인의 대부분이었으니 성경 외에는 사실 읽으라 해도 읽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곳의 입장을 이해하시는 데 참고가 되어 몇 말씀 적었습니다.
성경을 100독을 하신다는 말씀에 감명을 받습니다. 저도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싶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평소 성경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일반 교인까지도 한 해에 10독을 하신다는 말에 놀랍습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저는 직장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경우에도 어학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글 성경뿐만 아니라 영어 성경과 헬라어 신약 등을 병행하다 보니 많이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우선은 영어 성경 중 킹제임스 성경을 많이 읽어보고 싶습니다. 한글성경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신학이 먼저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 먼저인 신앙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몇몇 글에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적었는데, 사실 저는 아르미니우스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자가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이 있다 보니 그 내용을 조금 적었을 뿐입니다.
예정론에 대해서는 더 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며 억지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제시하는 부분까지만 알고, 그 너머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돌려야겠지요. 고린도전서 13장처럼 우리가 지금은 아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지만, 그 때가 된다면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경우에도 어학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글 성경뿐만 아니라 영어 성경과 헬라어 신약 등을 병행하다 보니 많이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우선은 영어 성경 중 킹제임스 성경을 많이 읽어보고 싶습니다. 한글성경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신학이 먼저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 먼저인 신앙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몇몇 글에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적었는데, 사실 저는 아르미니우스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자가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이 있다 보니 그 내용을 조금 적었을 뿐입니다.
예정론에 대해서는 더 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며 억지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제시하는 부분까지만 알고, 그 너머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돌려야겠지요. 고린도전서 13장처럼 우리가 지금은 아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지만, 그 때가 된다면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판사 변호사 검사는 법전을 일단 읽고 파악하고 알아야, 그 다음에 활용이 있습니다. 교인이든 목회자든 신학자든 기본이 성경이니 일단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평생을 살면서 별별 전문가와 다른 신학의 인물을 만나 봐도 마지막에는 성경이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다만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증인이 나왔고 통일교가 나왔다는 점 때문에 읽으면서 '읽는 자세'만은 돌아 보시면 참 좋겠습니다.
순복음교인은 성경을 읽으면 '복' '기적'만 읽은 듯이 술술 꿰고 있습니다. 성결교인은 '깨끗' '성결'만 읽습니다. 구한말 선교 초기의 1세대 교인들 중에 반듯한 분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에만 꽂힌 듯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적어 주신 것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 먼저 형성된 자기의 취향 성향 잠재의식이 성경 중에 와닿는 말씀을 위주로 성경 전체를 틀어 버린 것입니다.
이 곳의 장점이나 특징은 무식하다 보니, 그리고 불신 시절에 하나뿐인 참 도를 찾은 노력 때문에, 성경 하나만 집중했고 세상을 살면서 별별 것이 결국은 별 것도 없음을 빨리 알아 차렸기 때문에 기존 지식이나 선입견을 상대적으로 헤어 날 때 유리했습니다. 무식이 장점이고 유리했다면, 바울은 유식했고 지성인이었으므로 그 출발점에서 자기가 믿기 전에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림으로 유식한 자기를 무식하게 만들어 버리니 알고 있던 유식까지 잘 사용했습니다.
서로가 그렇게 우리의 울타리를 쳐 놓고 하나씩 살피다 보면 가까와 지고 공통점이 많아 지고,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차이가 있는 점은 주신 사명 때문에 달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더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파를 떠나 한글만 알고 성경만 가졌던 선교 초기 교인들은 성경만을 읽었습니다. 그런 1세대들이 속히 없어진 교단이 있고 시대를 따라 잡지 못하다 보니 이 곳처럼 이전에 있었던 좋은 점이 아직 조금 더 남아 있는 곳도 있는 정도입니다. '은식'님처럼 기본 자세가 되어 있는 분들은 제 경험에 3개월을 믿고도 다른 사람 평생 믿은 것을 간단히 넘어 서고, 3년을 믿고 나니까 시대를 초월해 버렸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 교단과 교회의 체계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는 알게 모르게 규제가 있어서 빠르게 발전하는 분들을 일부 제어하게 됩니다. 공회가 공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런 신앙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막고 나설 수 없도록 출발부터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이 작은 자세 하나 때문에 공회는 총량적 규모는 작지만 내용적으로는 괜찮은 신앙들이 곳곳에 계십니다.
'은식'님께서는 신학으로 가든, 교회 내 어떤 방향으로 가든 이미 목회자나 신학자를 넘어 섰든 아니면 이미 그런 분으로 느껴 집니다.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칼빈주의라는 장로교회의 역사적 범위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체제에게 자기 신앙이 붙들려 옳고 바른 문제든 자기로서는 꼭 가야 할 길이 막히는 것은 천주교로 돌아 가는 문제가 됩니다. 균형 잡기가 어렵고 개인 별로 사안 별로 어디까지가 선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공회라는 이 노선은 이런 정신으로 살다 보니 덕유산 골짝에 최악의 환경에서, 한 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후 없어 졌다고 모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과 교계의 각 분야의 최고봉들은 여전히 이 곳의 의미를 괜찮게 평가해 준다는 점을 통해 저희 몇몇이 어느 사이비처럼 어느 골짝에 갇혀 자기들만의 낙원을 만들지 않고 저희는 저희 부족을 집중적으로 주목하며 고치려고 노력하되 한편으로는 한 몸으로 주신 교계와의 접점과 과제를 늘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무제한 무조건 글쓰기와 안팎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1998년부터 이 곳을 운영해 오면서 어떤 분은 당나라에 전해진 경교라는 삼위일체 초기의 이단 교파를 적극 옹호하며 역사적 평가를 새로 해 보자는 분도 곘고, 여호와의증인이 들어 오셔서 발언권을 마음껏 줄 수 있느냐 해서 무한반복으로 게시판을 흐리거나 허위 정보로 훼방하는 일만 아니라면 그리고 논리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러시라고 했습니다. 소신 있게 글을 적다가 몇 번 적은 후 스스로 나가셨습니다. 고신 합동 감리교 지방교회 등의 다양한 분야 여러 의미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은식'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참 의미 있게 모든 분들을 향해 그 진리 추구의 자세와 과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곳을 운영하는 저희 전체 인원도 참 진지하게 그리고 하나의 과제로 대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조금 지나친 글까지 적어 봤습니다.
순복음교인은 성경을 읽으면 '복' '기적'만 읽은 듯이 술술 꿰고 있습니다. 성결교인은 '깨끗' '성결'만 읽습니다. 구한말 선교 초기의 1세대 교인들 중에 반듯한 분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에만 꽂힌 듯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적어 주신 것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 먼저 형성된 자기의 취향 성향 잠재의식이 성경 중에 와닿는 말씀을 위주로 성경 전체를 틀어 버린 것입니다.
이 곳의 장점이나 특징은 무식하다 보니, 그리고 불신 시절에 하나뿐인 참 도를 찾은 노력 때문에, 성경 하나만 집중했고 세상을 살면서 별별 것이 결국은 별 것도 없음을 빨리 알아 차렸기 때문에 기존 지식이나 선입견을 상대적으로 헤어 날 때 유리했습니다. 무식이 장점이고 유리했다면, 바울은 유식했고 지성인이었으므로 그 출발점에서 자기가 믿기 전에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림으로 유식한 자기를 무식하게 만들어 버리니 알고 있던 유식까지 잘 사용했습니다.
서로가 그렇게 우리의 울타리를 쳐 놓고 하나씩 살피다 보면 가까와 지고 공통점이 많아 지고,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차이가 있는 점은 주신 사명 때문에 달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더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파를 떠나 한글만 알고 성경만 가졌던 선교 초기 교인들은 성경만을 읽었습니다. 그런 1세대들이 속히 없어진 교단이 있고 시대를 따라 잡지 못하다 보니 이 곳처럼 이전에 있었던 좋은 점이 아직 조금 더 남아 있는 곳도 있는 정도입니다. '은식'님처럼 기본 자세가 되어 있는 분들은 제 경험에 3개월을 믿고도 다른 사람 평생 믿은 것을 간단히 넘어 서고, 3년을 믿고 나니까 시대를 초월해 버렸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 교단과 교회의 체계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는 알게 모르게 규제가 있어서 빠르게 발전하는 분들을 일부 제어하게 됩니다. 공회가 공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런 신앙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막고 나설 수 없도록 출발부터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이 작은 자세 하나 때문에 공회는 총량적 규모는 작지만 내용적으로는 괜찮은 신앙들이 곳곳에 계십니다.
'은식'님께서는 신학으로 가든, 교회 내 어떤 방향으로 가든 이미 목회자나 신학자를 넘어 섰든 아니면 이미 그런 분으로 느껴 집니다.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칼빈주의라는 장로교회의 역사적 범위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체제에게 자기 신앙이 붙들려 옳고 바른 문제든 자기로서는 꼭 가야 할 길이 막히는 것은 천주교로 돌아 가는 문제가 됩니다. 균형 잡기가 어렵고 개인 별로 사안 별로 어디까지가 선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공회라는 이 노선은 이런 정신으로 살다 보니 덕유산 골짝에 최악의 환경에서, 한 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후 없어 졌다고 모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과 교계의 각 분야의 최고봉들은 여전히 이 곳의 의미를 괜찮게 평가해 준다는 점을 통해 저희 몇몇이 어느 사이비처럼 어느 골짝에 갇혀 자기들만의 낙원을 만들지 않고 저희는 저희 부족을 집중적으로 주목하며 고치려고 노력하되 한편으로는 한 몸으로 주신 교계와의 접점과 과제를 늘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무제한 무조건 글쓰기와 안팎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1998년부터 이 곳을 운영해 오면서 어떤 분은 당나라에 전해진 경교라는 삼위일체 초기의 이단 교파를 적극 옹호하며 역사적 평가를 새로 해 보자는 분도 곘고, 여호와의증인이 들어 오셔서 발언권을 마음껏 줄 수 있느냐 해서 무한반복으로 게시판을 흐리거나 허위 정보로 훼방하는 일만 아니라면 그리고 논리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러시라고 했습니다. 소신 있게 글을 적다가 몇 번 적은 후 스스로 나가셨습니다. 고신 합동 감리교 지방교회 등의 다양한 분야 여러 의미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은식'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참 의미 있게 모든 분들을 향해 그 진리 추구의 자세와 과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곳을 운영하는 저희 전체 인원도 참 진지하게 그리고 하나의 과제로 대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조금 지나친 글까지 적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