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시대적 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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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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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12:05
1. 개혁교회
칼빈으로 시작 되는 탈 천주교의 16세기를 개혁교회라 합니다.
탈 천주교는 16세기 교회에 주신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개혁교회만 탈 천주교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개혁교회가 여러 단점과 빈 곳이 있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심이었고 제일 낫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노선은 개혁주의를 잇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개혁주의를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외에는, 또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닌 다른 곳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 위에서는 장단점을 함께 받아서 간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는 과정에 더 낫다고 판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전제 하에서 우리는 아무리 돌아 봐도 16세기의 탈 천주교 과정에 개혁교회가 제일 낫다는 것이 이 노선의 입장입니다.
2. 개혁교회의 시대적 사명
전쟁이 나면 전투적 영웅이 배출됩니다. 사람들은 국난의 위기를 건진 이들이 전후의 평화시는 나라를 너무 쉽게 잘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가끔 있으나 대개는 그 반대입니다. 탈 천주교에 공을 세웠으나, 교회의 훗날에 서툰 분들이 많았습니다. 칼빈은 드물게도 신학과 목회를 함께 잘했고, 탈 천주교와 이후 교회를 함께 잘 지도했습니다. 그렇다고 칼빈이 영원 불변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를 감당하고도 남았으나 17세기 이후 제자들은 그 스승이 너무 훌륭했던 만큼 그 반대로 그를 넘어 서지 않았고 그를 넘어 서지 못했습니다. 이 여파는 오늘 21세기 교회에까지 개혁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오로지 탈 천주교가 교회의 전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1919년의 실패한 삼일운동을 2017년 오늘까지 공휴일로 쉬면서 국경일로 삼는 우리의 미천한 수준을 돌아 봅니다. 왜적을 1명이라도 척살한 4.29과 10.26 등이 즐비한데. 일본에게 태극기를 들고 외친 것이 한민족 제일의 경사일까? 세계 10대 수출국이 된 날. 세계 선진국에 가입한 날. 압록강에 물을 담은 날. 하다 못해 골프 1등 한 날처럼 숱한 좋은 날들도 많은데.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는 것은 항상 환영하지만 그 날에 붙들리면 그 날에 다시 종밖에 되지 않으며 우리의 그 과거는 그 과거가 전부가 아니니 수치스러운 날을 기억하려면 중국에게 당한 수 없는 외침의 날들도 뼈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세계의 보수 정통을 견지하는 것은 늘 감사한데 왜 그 교회는 탈 천주교가 그들의 목표이며 전부일까? 언제 일인데. 16세기면 출애굽처럼 천주교 탈출기로는 충분하고, 17세기부터는 가나안에 정착하여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순종과 개척에 전념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 자라 갈 것이 끝도 없습니다. 21세기, 오늘에도 개혁교회가 탈천주교에 주력한다면 좁게 보면 의롭고 넓게 보면 불행입니다.
3. 개혁교회의 오늘
16세기 사명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오늘입니다. 그러니 16세기 천주교와 이후의 시대별 죄악들을 다 모아 놓아도 발바닥에도 차지 못할 21세기의 죄악 앞에 개혁주의 신앙이 맞설 여지는? 아예 없다고 봅니다.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음과 우리의 마음은 물질로 되어 믿는 우리도 범죄를 할 수 있음과 우리의 심신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고쳐 가는 것이 영원한 나라의 우리 모습과 생활이라는 것을 붙들어야 21세기 어떤 죄라도 대처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탈 천주교가 우리의 신앙의 전부가 된 개혁주의 신앙, 앞으로 나아 가며 개척해야 하고 싸워야 할 적들이 가나안에는 무수한데 광야에서 40년을 허송한 광야교회처럼 개혁교회는 500년이 된 오늘까지도 1517년의 전투만 하고 있으니 지금 문답하는 이런 답답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입니다.
결국 제 자리에 선 교회는 넘어 질 수밖에 없고, 제 자리에 머문 교회는 앞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기준에서 보면 탈락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김바울'께서 딤전3:2 한 말씀으로 지적을 하셨습니다. 한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골수 교회들이 이 성구를 몰랐겠습니까? 그들이 교과서에 수백 년 적어 놓고 암송하면서 여성의 안수를 금해 왔고 그 것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김바울'님이나 저희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의 자기 말로 오늘의 자기를 비판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화란의 31조파는 한국 교회의 외견상 가장 보수 정통이라는 고신의 아비 뻘입니다. 아비가 변절을 했으니 이제 한국의 고신이 가차 없이 31조 화란파를 그들이 가르친 과거 교훈으로 그 결정을 격파해 버리면 그래도 오늘의 고신이 제 자리 걸음은 할 수 있을 것이고, 부모가 변절을 했으니 결국 인지상정으로 보나 서열로 보나 세계 돌아 가는 눈치를 봐서 따라 가게 된다면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 지금 합동 합신 고신에서 학문적으로 제일 앞 선 이들은 공통적으로 화란에서 신학을 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자기를 가르친 스승의 나라의 기라성 같은 은사가 입장을 바꾸는데 그들에게 학위를 받은 제자가 맞선다?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잘 알 것입니다. 다만 한국의 교회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큰 소리를 치는 수는 있으나, 마치 한국의 생물학자 병리학자들이 광우병을 한국에서는 큰 일 났다고 부추기지만 미국의 학계에 논문을 발표 하는 자리에서는 그 어떤 말도 못하는 것이 상식인 것과 같습니다.
4. 최근의 연구소 일 때문에
주신 글을 낱낱이 설명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관련 글은 과거에 많이 안내했다고 기억합니다. 이 번에는 이런 안내를 통해 역사적 흐름에서 개혁주의의 오늘의 여력과 방향을 안내합니다. 마치 단기적으로 보면 북한의 남침 역량이 다양한 것같고 탁월한 것같지만, 근본적으로 오늘 상황에서 수령절대주의 하나로 버틴 그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큰 방향이며, 바로 그런 절대주의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 필연이니, 수령절대주의만 안다면 북한을 이해할 때 아주 요긴하며 실제로는 북한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개혁주의를 살펴 봤습니다.
'김바울'께서 딤전3:2의 말씀을 지적하셨고, 여기에 덧붙여 개혁주의 전통이 이 말씀으로 지난 날 교리차원에서 여성 안수를 금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면, 화란31조파든 고신이든 여성을 안수하려면 남들과 다투기 전에 우선 자신들의 지난 날을 회개를 해야 하고, 지난 날을 회개할 때는 문서 한 장을 공중에 흩날리고 자기 이마에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그런 죄를 짓지 말고, 그들이 지난 날 타 교회를 향해 정죄한 말들을 모두 모아서 자기들 머리 위에 숯불 화로를 올려 놓고 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고신은 형제 교회들이 말씀 하나 어겼다 하여 해방 후 그 형제들을 지옥 갈 사람들이라고 정죄했고 6개월 현직 교회를 비우라 하는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고신은 지난 날 잘못 된 교리를 가르쳤으니 고신 모든 직책을 6개월 이상 비우는 자기 길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신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화란31조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땅 위에 어느 교회가 그렇게 정말 자기를 먼저 징계 하겠습니까?
그냥 모두 말 장난이지요.
그러니 세상이 교회를 향해 웃습니다. 종교 직종 차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성의 안수는 안 된다 한 것은 옛날에 한 번 내다 질러 본 소리였습니다. 개혁교회가 처음부터 시대를 초월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결국 세월 속에 시대에게 떠밀려 가는 것입니다.
>> 김바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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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여성안수를 결정했다면),
: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3:2)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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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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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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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 : 승인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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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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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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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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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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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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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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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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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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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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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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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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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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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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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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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적인 디딤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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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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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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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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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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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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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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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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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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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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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개혁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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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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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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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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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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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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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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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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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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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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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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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소의 연구 외적 업무로 1일 답변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어 죄송합니다.
안내를 적게 되면 제목에 별도 표시하겠습니다.
>> 김바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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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여성안수를 결정했다면),
: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3:2)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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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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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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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 : 승인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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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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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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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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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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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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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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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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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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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 :
: :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 :
: :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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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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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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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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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적인 디딤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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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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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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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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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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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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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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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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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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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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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개혁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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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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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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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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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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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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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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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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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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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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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칼빈으로 시작 되는 탈 천주교의 16세기를 개혁교회라 합니다.
탈 천주교는 16세기 교회에 주신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개혁교회만 탈 천주교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개혁교회가 여러 단점과 빈 곳이 있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심이었고 제일 낫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노선은 개혁주의를 잇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개혁주의를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외에는, 또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닌 다른 곳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 위에서는 장단점을 함께 받아서 간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는 과정에 더 낫다고 판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전제 하에서 우리는 아무리 돌아 봐도 16세기의 탈 천주교 과정에 개혁교회가 제일 낫다는 것이 이 노선의 입장입니다.
2. 개혁교회의 시대적 사명
전쟁이 나면 전투적 영웅이 배출됩니다. 사람들은 국난의 위기를 건진 이들이 전후의 평화시는 나라를 너무 쉽게 잘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가끔 있으나 대개는 그 반대입니다. 탈 천주교에 공을 세웠으나, 교회의 훗날에 서툰 분들이 많았습니다. 칼빈은 드물게도 신학과 목회를 함께 잘했고, 탈 천주교와 이후 교회를 함께 잘 지도했습니다. 그렇다고 칼빈이 영원 불변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를 감당하고도 남았으나 17세기 이후 제자들은 그 스승이 너무 훌륭했던 만큼 그 반대로 그를 넘어 서지 않았고 그를 넘어 서지 못했습니다. 이 여파는 오늘 21세기 교회에까지 개혁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오로지 탈 천주교가 교회의 전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1919년의 실패한 삼일운동을 2017년 오늘까지 공휴일로 쉬면서 국경일로 삼는 우리의 미천한 수준을 돌아 봅니다. 왜적을 1명이라도 척살한 4.29과 10.26 등이 즐비한데. 일본에게 태극기를 들고 외친 것이 한민족 제일의 경사일까? 세계 10대 수출국이 된 날. 세계 선진국에 가입한 날. 압록강에 물을 담은 날. 하다 못해 골프 1등 한 날처럼 숱한 좋은 날들도 많은데.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는 것은 항상 환영하지만 그 날에 붙들리면 그 날에 다시 종밖에 되지 않으며 우리의 그 과거는 그 과거가 전부가 아니니 수치스러운 날을 기억하려면 중국에게 당한 수 없는 외침의 날들도 뼈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세계의 보수 정통을 견지하는 것은 늘 감사한데 왜 그 교회는 탈 천주교가 그들의 목표이며 전부일까? 언제 일인데. 16세기면 출애굽처럼 천주교 탈출기로는 충분하고, 17세기부터는 가나안에 정착하여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순종과 개척에 전념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 자라 갈 것이 끝도 없습니다. 21세기, 오늘에도 개혁교회가 탈천주교에 주력한다면 좁게 보면 의롭고 넓게 보면 불행입니다.
3. 개혁교회의 오늘
16세기 사명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오늘입니다. 그러니 16세기 천주교와 이후의 시대별 죄악들을 다 모아 놓아도 발바닥에도 차지 못할 21세기의 죄악 앞에 개혁주의 신앙이 맞설 여지는? 아예 없다고 봅니다.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음과 우리의 마음은 물질로 되어 믿는 우리도 범죄를 할 수 있음과 우리의 심신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고쳐 가는 것이 영원한 나라의 우리 모습과 생활이라는 것을 붙들어야 21세기 어떤 죄라도 대처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탈 천주교가 우리의 신앙의 전부가 된 개혁주의 신앙, 앞으로 나아 가며 개척해야 하고 싸워야 할 적들이 가나안에는 무수한데 광야에서 40년을 허송한 광야교회처럼 개혁교회는 500년이 된 오늘까지도 1517년의 전투만 하고 있으니 지금 문답하는 이런 답답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입니다.
결국 제 자리에 선 교회는 넘어 질 수밖에 없고, 제 자리에 머문 교회는 앞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기준에서 보면 탈락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김바울'께서 딤전3:2 한 말씀으로 지적을 하셨습니다. 한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골수 교회들이 이 성구를 몰랐겠습니까? 그들이 교과서에 수백 년 적어 놓고 암송하면서 여성의 안수를 금해 왔고 그 것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김바울'님이나 저희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의 자기 말로 오늘의 자기를 비판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화란의 31조파는 한국 교회의 외견상 가장 보수 정통이라는 고신의 아비 뻘입니다. 아비가 변절을 했으니 이제 한국의 고신이 가차 없이 31조 화란파를 그들이 가르친 과거 교훈으로 그 결정을 격파해 버리면 그래도 오늘의 고신이 제 자리 걸음은 할 수 있을 것이고, 부모가 변절을 했으니 결국 인지상정으로 보나 서열로 보나 세계 돌아 가는 눈치를 봐서 따라 가게 된다면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 지금 합동 합신 고신에서 학문적으로 제일 앞 선 이들은 공통적으로 화란에서 신학을 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자기를 가르친 스승의 나라의 기라성 같은 은사가 입장을 바꾸는데 그들에게 학위를 받은 제자가 맞선다?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잘 알 것입니다. 다만 한국의 교회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큰 소리를 치는 수는 있으나, 마치 한국의 생물학자 병리학자들이 광우병을 한국에서는 큰 일 났다고 부추기지만 미국의 학계에 논문을 발표 하는 자리에서는 그 어떤 말도 못하는 것이 상식인 것과 같습니다.
4. 최근의 연구소 일 때문에
주신 글을 낱낱이 설명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관련 글은 과거에 많이 안내했다고 기억합니다. 이 번에는 이런 안내를 통해 역사적 흐름에서 개혁주의의 오늘의 여력과 방향을 안내합니다. 마치 단기적으로 보면 북한의 남침 역량이 다양한 것같고 탁월한 것같지만, 근본적으로 오늘 상황에서 수령절대주의 하나로 버틴 그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큰 방향이며, 바로 그런 절대주의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 필연이니, 수령절대주의만 안다면 북한을 이해할 때 아주 요긴하며 실제로는 북한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개혁주의를 살펴 봤습니다.
'김바울'께서 딤전3:2의 말씀을 지적하셨고, 여기에 덧붙여 개혁주의 전통이 이 말씀으로 지난 날 교리차원에서 여성 안수를 금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면, 화란31조파든 고신이든 여성을 안수하려면 남들과 다투기 전에 우선 자신들의 지난 날을 회개를 해야 하고, 지난 날을 회개할 때는 문서 한 장을 공중에 흩날리고 자기 이마에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그런 죄를 짓지 말고, 그들이 지난 날 타 교회를 향해 정죄한 말들을 모두 모아서 자기들 머리 위에 숯불 화로를 올려 놓고 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고신은 형제 교회들이 말씀 하나 어겼다 하여 해방 후 그 형제들을 지옥 갈 사람들이라고 정죄했고 6개월 현직 교회를 비우라 하는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고신은 지난 날 잘못 된 교리를 가르쳤으니 고신 모든 직책을 6개월 이상 비우는 자기 길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신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화란31조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땅 위에 어느 교회가 그렇게 정말 자기를 먼저 징계 하겠습니까?
그냥 모두 말 장난이지요.
그러니 세상이 교회를 향해 웃습니다. 종교 직종 차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성의 안수는 안 된다 한 것은 옛날에 한 번 내다 질러 본 소리였습니다. 개혁교회가 처음부터 시대를 초월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결국 세월 속에 시대에게 떠밀려 가는 것입니다.
>> 김바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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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여성안수를 결정했다면),
: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3:2)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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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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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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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 : 승인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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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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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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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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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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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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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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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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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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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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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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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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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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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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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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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적인 디딤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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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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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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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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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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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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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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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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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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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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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개혁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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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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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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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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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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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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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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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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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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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 :
: :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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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소의 연구 외적 업무로 1일 답변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어 죄송합니다.
안내를 적게 되면 제목에 별도 표시하겠습니다.
>> 김바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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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여성안수를 결정했다면),
: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3:2)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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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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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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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 : 승인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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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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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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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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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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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 :
: :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 :
: :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 :
: :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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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 :
: :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 :
: :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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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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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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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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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적인 디딤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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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 :
: :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 :
: :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 :
: : 고신 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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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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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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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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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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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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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란개혁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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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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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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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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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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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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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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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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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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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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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화란 31조파의 변화와 국내 보수정통의 입장
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이세령 기자
승인 2017.07.09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성경적인 디딤돌들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고신 교회의 과제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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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개혁교회의 역사
변종길 교수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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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자유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이세령 기자
승인 2017.07.09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성경적인 디딤돌들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고신 교회의 과제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의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이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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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개혁교회의 역사
변종길 교수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는 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이 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 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 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 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과 ‘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와,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 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 제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 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은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 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다른 한편, ‘신오달’ 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출처] 화란개혁교회의 역사|작성자 주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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