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사님 생전과 사후의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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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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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4 00:00
제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내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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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선 백목사님 생전과 오늘을 비교하기 위해 3가지 정도의 기준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던 말씀의 은혜, 구원의 감격
둘째, 주일학교 부흥의 발판이 된 운영 근본 체제 (반사 중심, 학년통합반 등)
세째,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외형 규모
2.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말씀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
백목사님 생전에는 1천여명 반사와 보조반사들이 장년반 정기 예배 시간에서 받는 말씀 은혜에 충만했었고 이 힘은 주일학교 부흥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지도를 해도 그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부교회 주일학교에 대한 평가는 그 규모에서 너무 충격적이고 압도적이어서 외부 교계에서는 그 규모에 대한 소문과 연구가 집중되었던 것은 심히 아쉬웠던 일입니다. 이런 힘의 원동력에서 비교한다면 백목사님 생전과 사후는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3.둘째, 주일학교 부흥의 발판이 된 운영 근본 체제 (반사 중심, 학년통합반 등)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흥의 체제적인 뒷받침은 반사 개개인이 개척교회의 단독목회자와 같이 움직이는 반사중심 주일학교였습니다. 남녀와 학년에 상관없이 전도하고 지도하는 반사선생님의 소속 학생이 되었고 그 선생님은 임기제가 아니라 목회자가 종신토록 개척교회를 맡아 수고하듯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일학교의 대부흥의 체제와 운영의 특징은 여기 있었습니다.
보다 원만하고 온전한 결과를 위해서는 첫번째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최소한 주일학교의 부흥면에서만 본다면 첫번째 요인보다는 두번째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담임목회자의 말씀은혜에 상관없이 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체제로 바꾼 교회들치고는 장년반 대비 주일학교의 부흥이 서부교회 이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곳은 희귀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흥의 요인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파악하려고 한다면 두번째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 반사를 개척교회 담임목회형으로 주일학교를 맡도록 하는 체제가 핵심일 것입니다.
이 두번째 요인을 두고 백목사님 생전과 사후를 비교한다면, 지금도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체제는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보시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4.세째,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외형 규모
백목사님 생전 매주 8천여명 출석에 성경학교나 성탄절 때는 1만 3천명 안팎으로 출석하던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현재 1천6백여명 안팎으로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외형 규모면으로 이렇게 된 이유는,
①교회의 분리 개척
백목사님은 생전 5년 전부터 사후를 대비하여 주일학교 중심의 서부교회 분산 개척을 대규모로 추진하게 됩니다. 교인들과 주일학생들의 출석거리를 고려하여 부산시내 전역에 30여곳의 개척교회 준비용 분교를 설립하고 앞으로 목회자로 나갈 반사와 중심교인이 될 분들을 분교 책임자로 세워 훗날을 대비하였던 것입니다.
백목사님 사후 단일 교회로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의 초대형교회였던 것이 첫째 이유였고, 둘째는 분리개척으로 보다 많은 종들과 중심교인들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적으로는 유익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째는 서부교회를 백목사님에 이어 단독으로 맡을 실력있는 사람이 그 당시는 없었지만 만일 앞으로 그런 인물이 나타나게 되면 분리개척한 작은 교회에서도 능히 이전 또는 그 이상의 부흥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서부교회를 단순히 외형 유지키 위해 인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여 후임이 자기 실력 이상의 교회를 맡게 되는 것을 피하고 그대신 목회자의 실력과 교회의 형편이 자연스럽게 조절되도록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백목사님 사후 서부교회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견지하자는 주장과 일반 교계체제로 환원하자는 주장이 나뉘고 결국 20% 정도의 교인과 주일학생이 분리개척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리개척 이후 새로 부임한 교역자는 백목사님 생전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했던 교회 차원의 30여곳 분리개척을 전면 백지화시키게 됩니다. 후임 목회자의 의도는 서부교회 본교 중심의 교세 유지만을 고려한 조처일 뿐 전체 교회와 주일학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위험한 방향이라는 비판이 주일학교 총책임자와 각 분교 책임자 사이에서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교회 전체적인 결론은 분리개척 엄금과 엄단으로 결정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더 따르고 있던 총책임자와 여러 중심 반사들이 부분적으로 분리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분리로 인해 줄어드는 주일학생의 숫자는 거의 무시할 정도였으나 이들의 분리개척이 반사전체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이들의 개척이 백목사님 원안대로 본교와 분교가 연결성을 유지하고 진행된 분리개척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는 분리개척이 되었는데 당시 분리개척의 중심에 있었던 책임자들은 사실상 백목사님 없는 서부교회의 신앙적 지도적 정신적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향은 단시일 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오르막을 만난 트럭이 오르막 초기에서 제동을 걸어 무섭게 달려온 탄력을 소실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백목사님 생전에 쌓아왔고 사후 그분 없는 시대에도 큰 힘으로 유지될 바를 전부 소실하게 된 것입니다.
②서부교회 외부 환경 중 가장 큰 것은 모든 교회들의 열심 때문입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전성기는 1970년 1천명에서 1980년 8천명까지 그 매주 평균출석률이 증가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전국도 마찬가지였겠으나 특히 부산지역 모든 교회들이 주일학교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서부교회 한 교회가 국내 2대 도시인 부산 전역을 상대로 골목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데려와도 모든 교회들이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세상 언론에 의하여 특종보도로 나가게 되자 교계 언론이 집중 취재를 하였고 수년 내에 국내 모든 교회 주일학교의 관심이 총집중되면서 주일날 교회나 노회 신학교 또는 지역의 주교책임자들이 집단으로 1천여회 이상 방문 견학을 하게 됩니다.
사실상 서부교회의 외적 성장은 1970년에서 1980년까지이며 이후 1989년 백목사님 순교 때까지 10여년간에는 7천에서 8천으로 유지될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간 부산시내 1천여개가 넘는 교회들은 언론을 통해서 들었던 서부교회 주일학교가 바로 한 도시안에서 그리고 자기 교회 골목 옆에서 무수한 아동들을 동원하는 것을 보며 즉시 따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초량교회가 수백명 주일학생에서 단기간에 2천여명이 넘는 주일학교로 성장하면서 예배당 한 층을 바로 증축하는 등 부산 전역은 다 함께 주일학교에 힘쓰는 도시가 되어집니다.
서부교회가 개교회부흥중심의 야망을 가졌다면 주일학교의 운영법을 비법으로 감추었을 것이고 수 만명 이상의 주일학교로 기록이 증가되었을 것입니다. 1989년 백목사님 순교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부산지방 전체 주일학교의 활동은 그 열심으로 서부교회 못지 않았고 서부교회는 서부교회 주변 지역 외의 지역에서는 주일학생을 데려오는 일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 현상이 1990년 이후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출석 외형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서부교회가 백목사님이 준비한 대로 자기 내부의 정상적인 분리 개척의 순서를 밟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내부적인 문제점으로 지적이 되어야 하지만, 최소한 주일학교의 외부 규모로만 두고 말을 한다면 서부교회 반사들은 분리개척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7-8천여명의 출석수를 유지할 수 있는 열심과 전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부산시내 모든 교회가 함께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추가 전도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③비교될 수 있을 정도의 두번째 큰 원인은 출산률입니다.
1970년대의 출산률과 1980년대의 출산률은 급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1990년대에 이르면서 출산률은 최저로 떨어집니다. 답변자는 1970년대 80년대 그리고 90년대를 계속 현장 반사로 활동하던 때입니다. 1970년대 주일학생에 해당되는 아동들의 출생은 주로 1960년생들인데 이때는 한 집에 4-5명 주일학교 대상이 되는 집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고 한 대문에 여러 집이 쪽방으로 세들고 있었기 때문에 5-10여명을 한 대문에서 전도하고 데려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대문 수십개가 있는 골목 한 곳을 힘껏 돌아나오면 4-50여명의 학생이 뒤를 따라오던 때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면서 2-3명, 1990년대는 1-2명이 되면서 밀집주택들이 시외곽에 건설되는 신주거 아파트단지로 대거 이동되며 도심의 주민 공동화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서부교회에서 도보 30분 거리 내의 초등학교 6개 기준으로 그 학생수의 감소는 거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현재는 그 이상이겠지요? 주일학교에 해당되는 주일학생의 거주 숫자의 절대치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 주일학교는 현 출석수만으로도 이전보다 더 힘을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④기타 요인으로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노동환경을 들 수 있습니다.
백목사님 사망 시점인 1989년을 전후로 한다면, 1980년대는 서부교회 주일학생의 가정 대부분에 해당되는 노동자 서민계층이 일요일 근무가 혼재되어 있었고 1990년대에는 일요일의 휴무가 확립됩니다. 노동권의 급작스런 신장으로 이어지면서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일요일에 목욕탕, 외출, 출타가 잦아지는 바, 거의 불신자 가정의 학생을 인도하는 입장에서는 가정의 단체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⑤학생들의 여가 문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도 고려해야 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학생들이 마땅히 놀 것이 거의 없었고 주일 아침 8시 20에서 40분까지 방영된 만화영화 정도가 문제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컴퓨터 등등 놀이문화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발달됩니다. 더구나 아이들 주머니에까지 용돈이 충분히 들어가게 되고 또 저희들끼리 움직이는 일정까지 생기게 됩니다. 이전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이었고 이제는 어려도 제대로는 너무도 바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두 명을 가진 가정마다 그 부모들이 아이의 안전과 개인 생활의 보호 등으로 인해 외부에서 쉽게 가정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심방활동이 심각하게 차단되는 경우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대개의 서민 가정은 아침 7시 정도에 그 집을 방문하여 아직도 부모와 함께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울 수 있었고 필요하면 방문을 열고 이불 안에 있는 아이들을 끄집어 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5.이제 정리를 하자면
백목사님 생전 매주 평균 8천여명의 주일학생이 출석하던 때와 사후 현재 매주 평균 1천 6백여명이 출석하는 환경은 여러 요인으로 비교할 때, 그래도 백목사님의 주일학교 체제가 아니면 그 유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분리개척의 갈등 때문에 내부의 중심축이 빠져버린 안타까운 일은 교회의 역량문제라 하더라도, 외부환경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인들 즉 부산시내 모든 주일학교들의 열심과 부흥, 출산률과 교회 부근 거주공간의 아동수의 격감, 학생들의 생활환경과 가족중심의 휴일 생활 등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출석수는 과거 못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혹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최근 대규모 주일학교 성공 사례 등을 가끔 듣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서부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서부교회 주일학교 체제는 놀이 선물 동화 율동 등 아동심리학적 방법을 일체 없애버린 장년반식 주일예배 체제와 그 운영입니다. 그리고 서부교회는 식민지시절부터 부산시내 가장 도심에 위치하여 서울로 말하면 광화문 주변의 주택가와 같은 곳입니다. 거주민과 도심이 일치하던 때와 대규모 거주단지를 외곽 등으로 이전하고 도심은 행정 상가 등으로 유지되는 현대 도시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역시 백목사님의 주일학교 운영체제는 오늘 비록 그 외형 규모에 있어 대단한 축소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 교계 모든 교육제도와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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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선 백목사님 생전과 오늘을 비교하기 위해 3가지 정도의 기준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던 말씀의 은혜, 구원의 감격
둘째, 주일학교 부흥의 발판이 된 운영 근본 체제 (반사 중심, 학년통합반 등)
세째,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외형 규모
2.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말씀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
백목사님 생전에는 1천여명 반사와 보조반사들이 장년반 정기 예배 시간에서 받는 말씀 은혜에 충만했었고 이 힘은 주일학교 부흥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지도를 해도 그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부교회 주일학교에 대한 평가는 그 규모에서 너무 충격적이고 압도적이어서 외부 교계에서는 그 규모에 대한 소문과 연구가 집중되었던 것은 심히 아쉬웠던 일입니다. 이런 힘의 원동력에서 비교한다면 백목사님 생전과 사후는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3.둘째, 주일학교 부흥의 발판이 된 운영 근본 체제 (반사 중심, 학년통합반 등)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흥의 체제적인 뒷받침은 반사 개개인이 개척교회의 단독목회자와 같이 움직이는 반사중심 주일학교였습니다. 남녀와 학년에 상관없이 전도하고 지도하는 반사선생님의 소속 학생이 되었고 그 선생님은 임기제가 아니라 목회자가 종신토록 개척교회를 맡아 수고하듯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일학교의 대부흥의 체제와 운영의 특징은 여기 있었습니다.
보다 원만하고 온전한 결과를 위해서는 첫번째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최소한 주일학교의 부흥면에서만 본다면 첫번째 요인보다는 두번째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담임목회자의 말씀은혜에 상관없이 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체제로 바꾼 교회들치고는 장년반 대비 주일학교의 부흥이 서부교회 이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곳은 희귀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흥의 요인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파악하려고 한다면 두번째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 반사를 개척교회 담임목회형으로 주일학교를 맡도록 하는 체제가 핵심일 것입니다.
이 두번째 요인을 두고 백목사님 생전과 사후를 비교한다면, 지금도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체제는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보시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4.세째,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외형 규모
백목사님 생전 매주 8천여명 출석에 성경학교나 성탄절 때는 1만 3천명 안팎으로 출석하던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현재 1천6백여명 안팎으로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외형 규모면으로 이렇게 된 이유는,
①교회의 분리 개척
백목사님은 생전 5년 전부터 사후를 대비하여 주일학교 중심의 서부교회 분산 개척을 대규모로 추진하게 됩니다. 교인들과 주일학생들의 출석거리를 고려하여 부산시내 전역에 30여곳의 개척교회 준비용 분교를 설립하고 앞으로 목회자로 나갈 반사와 중심교인이 될 분들을 분교 책임자로 세워 훗날을 대비하였던 것입니다.
백목사님 사후 단일 교회로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의 초대형교회였던 것이 첫째 이유였고, 둘째는 분리개척으로 보다 많은 종들과 중심교인들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적으로는 유익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째는 서부교회를 백목사님에 이어 단독으로 맡을 실력있는 사람이 그 당시는 없었지만 만일 앞으로 그런 인물이 나타나게 되면 분리개척한 작은 교회에서도 능히 이전 또는 그 이상의 부흥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서부교회를 단순히 외형 유지키 위해 인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여 후임이 자기 실력 이상의 교회를 맡게 되는 것을 피하고 그대신 목회자의 실력과 교회의 형편이 자연스럽게 조절되도록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백목사님 사후 서부교회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견지하자는 주장과 일반 교계체제로 환원하자는 주장이 나뉘고 결국 20% 정도의 교인과 주일학생이 분리개척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리개척 이후 새로 부임한 교역자는 백목사님 생전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했던 교회 차원의 30여곳 분리개척을 전면 백지화시키게 됩니다. 후임 목회자의 의도는 서부교회 본교 중심의 교세 유지만을 고려한 조처일 뿐 전체 교회와 주일학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위험한 방향이라는 비판이 주일학교 총책임자와 각 분교 책임자 사이에서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교회 전체적인 결론은 분리개척 엄금과 엄단으로 결정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더 따르고 있던 총책임자와 여러 중심 반사들이 부분적으로 분리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분리로 인해 줄어드는 주일학생의 숫자는 거의 무시할 정도였으나 이들의 분리개척이 반사전체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이들의 개척이 백목사님 원안대로 본교와 분교가 연결성을 유지하고 진행된 분리개척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는 분리개척이 되었는데 당시 분리개척의 중심에 있었던 책임자들은 사실상 백목사님 없는 서부교회의 신앙적 지도적 정신적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향은 단시일 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오르막을 만난 트럭이 오르막 초기에서 제동을 걸어 무섭게 달려온 탄력을 소실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백목사님 생전에 쌓아왔고 사후 그분 없는 시대에도 큰 힘으로 유지될 바를 전부 소실하게 된 것입니다.
②서부교회 외부 환경 중 가장 큰 것은 모든 교회들의 열심 때문입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전성기는 1970년 1천명에서 1980년 8천명까지 그 매주 평균출석률이 증가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전국도 마찬가지였겠으나 특히 부산지역 모든 교회들이 주일학교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서부교회 한 교회가 국내 2대 도시인 부산 전역을 상대로 골목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데려와도 모든 교회들이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세상 언론에 의하여 특종보도로 나가게 되자 교계 언론이 집중 취재를 하였고 수년 내에 국내 모든 교회 주일학교의 관심이 총집중되면서 주일날 교회나 노회 신학교 또는 지역의 주교책임자들이 집단으로 1천여회 이상 방문 견학을 하게 됩니다.
사실상 서부교회의 외적 성장은 1970년에서 1980년까지이며 이후 1989년 백목사님 순교 때까지 10여년간에는 7천에서 8천으로 유지될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간 부산시내 1천여개가 넘는 교회들은 언론을 통해서 들었던 서부교회 주일학교가 바로 한 도시안에서 그리고 자기 교회 골목 옆에서 무수한 아동들을 동원하는 것을 보며 즉시 따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초량교회가 수백명 주일학생에서 단기간에 2천여명이 넘는 주일학교로 성장하면서 예배당 한 층을 바로 증축하는 등 부산 전역은 다 함께 주일학교에 힘쓰는 도시가 되어집니다.
서부교회가 개교회부흥중심의 야망을 가졌다면 주일학교의 운영법을 비법으로 감추었을 것이고 수 만명 이상의 주일학교로 기록이 증가되었을 것입니다. 1989년 백목사님 순교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부산지방 전체 주일학교의 활동은 그 열심으로 서부교회 못지 않았고 서부교회는 서부교회 주변 지역 외의 지역에서는 주일학생을 데려오는 일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 현상이 1990년 이후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출석 외형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서부교회가 백목사님이 준비한 대로 자기 내부의 정상적인 분리 개척의 순서를 밟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내부적인 문제점으로 지적이 되어야 하지만, 최소한 주일학교의 외부 규모로만 두고 말을 한다면 서부교회 반사들은 분리개척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7-8천여명의 출석수를 유지할 수 있는 열심과 전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부산시내 모든 교회가 함께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추가 전도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③비교될 수 있을 정도의 두번째 큰 원인은 출산률입니다.
1970년대의 출산률과 1980년대의 출산률은 급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1990년대에 이르면서 출산률은 최저로 떨어집니다. 답변자는 1970년대 80년대 그리고 90년대를 계속 현장 반사로 활동하던 때입니다. 1970년대 주일학생에 해당되는 아동들의 출생은 주로 1960년생들인데 이때는 한 집에 4-5명 주일학교 대상이 되는 집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고 한 대문에 여러 집이 쪽방으로 세들고 있었기 때문에 5-10여명을 한 대문에서 전도하고 데려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대문 수십개가 있는 골목 한 곳을 힘껏 돌아나오면 4-50여명의 학생이 뒤를 따라오던 때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면서 2-3명, 1990년대는 1-2명이 되면서 밀집주택들이 시외곽에 건설되는 신주거 아파트단지로 대거 이동되며 도심의 주민 공동화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서부교회에서 도보 30분 거리 내의 초등학교 6개 기준으로 그 학생수의 감소는 거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현재는 그 이상이겠지요? 주일학교에 해당되는 주일학생의 거주 숫자의 절대치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 주일학교는 현 출석수만으로도 이전보다 더 힘을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④기타 요인으로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노동환경을 들 수 있습니다.
백목사님 사망 시점인 1989년을 전후로 한다면, 1980년대는 서부교회 주일학생의 가정 대부분에 해당되는 노동자 서민계층이 일요일 근무가 혼재되어 있었고 1990년대에는 일요일의 휴무가 확립됩니다. 노동권의 급작스런 신장으로 이어지면서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일요일에 목욕탕, 외출, 출타가 잦아지는 바, 거의 불신자 가정의 학생을 인도하는 입장에서는 가정의 단체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⑤학생들의 여가 문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도 고려해야 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학생들이 마땅히 놀 것이 거의 없었고 주일 아침 8시 20에서 40분까지 방영된 만화영화 정도가 문제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컴퓨터 등등 놀이문화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발달됩니다. 더구나 아이들 주머니에까지 용돈이 충분히 들어가게 되고 또 저희들끼리 움직이는 일정까지 생기게 됩니다. 이전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이었고 이제는 어려도 제대로는 너무도 바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두 명을 가진 가정마다 그 부모들이 아이의 안전과 개인 생활의 보호 등으로 인해 외부에서 쉽게 가정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심방활동이 심각하게 차단되는 경우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대개의 서민 가정은 아침 7시 정도에 그 집을 방문하여 아직도 부모와 함께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울 수 있었고 필요하면 방문을 열고 이불 안에 있는 아이들을 끄집어 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5.이제 정리를 하자면
백목사님 생전 매주 평균 8천여명의 주일학생이 출석하던 때와 사후 현재 매주 평균 1천 6백여명이 출석하는 환경은 여러 요인으로 비교할 때, 그래도 백목사님의 주일학교 체제가 아니면 그 유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분리개척의 갈등 때문에 내부의 중심축이 빠져버린 안타까운 일은 교회의 역량문제라 하더라도, 외부환경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인들 즉 부산시내 모든 주일학교들의 열심과 부흥, 출산률과 교회 부근 거주공간의 아동수의 격감, 학생들의 생활환경과 가족중심의 휴일 생활 등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출석수는 과거 못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혹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최근 대규모 주일학교 성공 사례 등을 가끔 듣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서부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서부교회 주일학교 체제는 놀이 선물 동화 율동 등 아동심리학적 방법을 일체 없애버린 장년반식 주일예배 체제와 그 운영입니다. 그리고 서부교회는 식민지시절부터 부산시내 가장 도심에 위치하여 서울로 말하면 광화문 주변의 주택가와 같은 곳입니다. 거주민과 도심이 일치하던 때와 대규모 거주단지를 외곽 등으로 이전하고 도심은 행정 상가 등으로 유지되는 현대 도시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역시 백목사님의 주일학교 운영체제는 오늘 비록 그 외형 규모에 있어 대단한 축소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 교계 모든 교육제도와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사]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현황에 대하여
제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내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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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경기도 00군에 있는 00교회 교회학교 전도사입니다.
교회학교의 부흥을 연구하다가 부산서부교회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였던 서부교회가
백영희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금은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만명 이상씩 몰려 오던 교회학교의 상황과 현재교회의 형편은 어떠한지 알고 싶습니다.
다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문의드립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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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분류 : [-교회사-서부교회-주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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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경기도 00군에 있는 00교회 교회학교 전도사입니다.
교회학교의 부흥을 연구하다가 부산서부교회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였던 서부교회가
백영희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금은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만명 이상씩 몰려 오던 교회학교의 상황과 현재교회의 형편은 어떠한지 알고 싶습니다.
다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문의드립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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