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자료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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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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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5 11:56
우리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절차를 따지는 민주절차가 사안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좌파식 문제라고 남단에서 매몰차게 치는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세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절차를 따지고 있습니다. 절차가 공정했는가 정당했는가 라는 문제는 증거의 오염문제로 지적 받는 순간 그 증거능력은 배제됩니다. 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이곳의 자료를 두고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 취득상 불법이라는 이의가 제기되는 경우가 있어 질문합니다. 타공회 일이지만 분쟁이 생기면 공회들마다 과거 이야기가 나오고 마침내 연구소의 역사게시판에 제공한 자료가 핵심증거로 사용됩니다. 평소 어린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연구소를 방문하지 말라고 하던 분들도 이곳 자료를 가지고 자기를 변론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반대측도 역시 그러고 있습니다. 공개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공회들의 사건들은 수십년동안 그랬습니다.
최근에 사석에서 과거 증거들이 너무 확실하다 보니까 총공회 행정실에서 몰래 빼돌려 간 자료기 때문에 자료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반론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예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연구소의 자료들 중에 설교 자료야 돌고돌아서 이제 그런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행정문서의 출처를 두고 적법하게 취득했는지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자료는 서부교회 2층 행정실 주일학교 총무 책상에 있어야 합니다. 손정복 전임자는 준 적이 없다 합니다. 행정실 자료도 그렇고 중간반 자료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총공회 교학실과 행정실 자료까지 어떻게 모두 취득하게 되었는지 공개 질문을 합니다.
특히 절차를 따지는 민주절차가 사안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좌파식 문제라고 남단에서 매몰차게 치는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세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절차를 따지고 있습니다. 절차가 공정했는가 정당했는가 라는 문제는 증거의 오염문제로 지적 받는 순간 그 증거능력은 배제됩니다. 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이곳의 자료를 두고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 취득상 불법이라는 이의가 제기되는 경우가 있어 질문합니다. 타공회 일이지만 분쟁이 생기면 공회들마다 과거 이야기가 나오고 마침내 연구소의 역사게시판에 제공한 자료가 핵심증거로 사용됩니다. 평소 어린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연구소를 방문하지 말라고 하던 분들도 이곳 자료를 가지고 자기를 변론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반대측도 역시 그러고 있습니다. 공개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공회들의 사건들은 수십년동안 그랬습니다.
최근에 사석에서 과거 증거들이 너무 확실하다 보니까 총공회 행정실에서 몰래 빼돌려 간 자료기 때문에 자료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반론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예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연구소의 자료들 중에 설교 자료야 돌고돌아서 이제 그런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행정문서의 출처를 두고 적법하게 취득했는지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자료는 서부교회 2층 행정실 주일학교 총무 책상에 있어야 합니다. 손정복 전임자는 준 적이 없다 합니다. 행정실 자료도 그렇고 중간반 자료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총공회 교학실과 행정실 자료까지 어떻게 모두 취득하게 되었는지 공개 질문을 합니다.
백영희 = 서부교회 = 총공회, 이렇게 이어 지는 개념이나 한편으로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나눠서 설명을 드리면
<백영희>
- 개인 자료
목사님 생전의 마지막 1980년대 대부분 시기에 연구 부장은 백 목사님의 모든 자료가 있고 목사님 혼자 거주하는 서부교회 5층 서재에 자유롭게 출입했습니다. 또 매주 월요일 아침 5층의 부서장 회의에도 부서와 상관 없이 늘 동석했습니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적다가 버린 서재 쓰레기통까지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직접 주어 챙겼습니다. 목사님 7남매 자녀가 공동으로 2013년 법원에 고소하면서 주장한 내용에도 다 나오는 사실입니다.
총공회와 서부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모든 연구를 일임한 것은 설교록에 공개 되어 있고, 이런 직책 때문에 5층 서재의 메모지까지 모을 수 있었으며, 목사님이 직접 기록한 노트를 5층 직원들이 보는 데서 하나씩 건네 주셨습니다. 그리고 1989.8.27. 돌아 가셨고 장례가 마친 후 5층 서재에 백순희 백은희 백도진 백도충 백명희 5명과 주교 총무와 연구소 부장이 함께 모여 후임을 의논했고 유품 처분을 의논한 자리에서 목사님의 개인 노트 자료 일체와 연구에 필요한 도서는 전부 연구 부장에게 맡기기로 하여 그 전부를 오늘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목사님의 인감 도장과 주민증은 참석하지 않은 분이 먼저 가져 갔고 그 것으로 충분하다 하여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한 분은 목사님의 휴대용 수첩 하나를 가지고 갔고 그 것으로 충분하다 하여 가족회 모임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1997년까지 이 모임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적법성 문제는 없습니다.
개인 자료의 내용은 1936년 믿던 날부터 매일 적은 일지, 교계 사경회 인도 기록, 평소 성경 연구한 노트 수십 권, 설교를 준비한 노트 수십 권, 고려신학교 강의 필기 노트 40여권 일체, 크고 작은 쪽지에 적은 메모, 불신 시절 촬영한 사진 등 개인 앨범이 있습니다. 공개 설교에서도 또 가족들도 연구 부장을 목사님의 아들 또는 아들 중에서도 아들로 표현했습니다.
- 생활용품
목사님의 생활은 서부교회 예배당 5층의 서재와 양산동 기도실 2 곳에 생활용품 일체를 꼭 같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서부교회 5층은 가족들이 영구 보존을 하겠다 하여 그렇게 되었고, 양산동 기도실의 생활용품 일체는 연구소에 맡겼으며 연구소 소장과 주교 총무와 연구 부장이 협의한 다음 연구소 소장품으로 처리하면서 해운대 주택가에 연구소 외부 자료실을 마련하여 보관했고 1997년 이 자료 일체를 신풍연구실로 이전했습니다. 연구소의 당시 소장 결정이었습니다. 연구소 소장은 1997년 하반기에 연구 부장을 횡령과 저작권 등으로 고소하면서 이 자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 것이 적법이라는 증거입니다.
생활용품의 내용은 의복 등 생활용품과 산기도를 다니실 때 사용하는 모든 물품 및 파리채나 쓰레기통 선풍기와 작업용 공구까지 있습니다.
<서부교회>
서부교회 자료는 크게 주일학교와 중간반 그리고 장년반으로 나뉩니다. 각 부서 책임자들이 5층에 늘 함께 했고 목사님께서 연구 부장에게 맡긴 업무와 내용을 알기 때문에 평소 연구 부장이 부탁하면 목사님께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목사님의 승인을 알기 때문에 모두 협조를 했고,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의 리모델링 등의 여러 과정에서 목사님의 승용차, 서부교회의 소장용 설교록 일체, 1층 등의 주교 강단과 주변 집기 등을 받게 되었고, 회의록 등 진행 중인 자료는 복사본으로 받았습니다.
<총공회 자료>
- 생전 자료
목사님 생전에 연구 부장은 총공회 노선 연구가 맡겨 졌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자료는 교학실과 행정실에 원본만 보관하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교학실장 및 행정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일체 복사를 하게 하여 생전에 모든 자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학실에 양성원 시절부터 내려 오던 자료는 분량이 너무 많고 신앙 노선 차원에서는 2차 자료 정도였기 때문에 생전에 받지 못했으나 2009년 대구공회의 백도영 목사님의 주선으로 동성로교회 회합 중 당시 양성원장님께 자료를 함께 가질 수 있도록 요청했고 교학실에 지시하여 거창의 완대 본부를 방문하고 교학실장님 입회 하에 모든 자료를 촬영해 왔습니다.
한편 1987년에 탈퇴한 김철수 목사님이 1970년대부터 교학실장을 하면서 초기 자료를 많이 가지고 계셨는데 임종 직전에 직접 방문하고 공회 시절 자료를 요청하여 자료를 전부 받아 왔습니다.
- 사후 자료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와 부산공회2의 자료는 대구공회 소속이 박윤철 목사님 장례 때 사모님으로부터 유품 일체를 기증 받으며 대구공회 자료와 목사님 생전의 자료 일체를 받았습니다. 부산공회의 대부분 시절 교학실 행정실을 맡은 이만기 목사님께 임종 직전에 직접 방문하여 모든 자료를 다 받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각 목사님이 연구 부장에게 주신 신임을 고려하여 불가피한 사안이 아니면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적어도 10 년 등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해당 자료가 모든 교역자를 통해 더 이상 비밀 자료가 아니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90년 11월에 불신임을 받은 교역자가 1991년부터 부산공회의 교학실 행정실에 직원으로 부임하면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연구 부장에게 일체 자료를 요청했고 연구 부장이 일체 자료를 제공하는 대신 양측은 평생 모든 자료를 공유하기로 약속을 했으며 직원은 서영호 목사님의 부임 후 서부교회 교권을 장악한 김효순 권사님의이교역자회에서 백 목사님의 부정 부패를 질타한 녹음까지 연구 부장에게 공유함으로 각자 자기 할 일은 하되 자료에 관한한 항상 긴밀히 공유해 왔었습니다. 이말출 노트 자료는 10명의 전원일치가 필요해서 제공하지 못한다며 지금까지 거부했지만 이 외 자료는 서로 치명적인 내부 자료를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부장은 담당자 외에 두세 곳을 통해 자료가 교차 검증이 되지 않으면 신의를 위해 해당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왔습니다.
이런 역사나 건전한 협의와 자료 공개에 관한 사항은 1998년 사이트 운영 초기부터 공지해 왔기 때문에 본 연구소에는 각 공회 별로 어떤 지시가 내려 오던 백 목사님 생전과 각 공회 별 교학실과 행정실과 함께 하기로 한 언약 때문에 이 곳에 자료 제공을 금하는 이들이 사리 사욕으로 뭔가 의도를 가지고 불법으로 막는 것이므로 전국 교역자나 교인들과 다양한 자료를 교류했습니다. 따라서 이 곳의 자료 출처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 해도 신앙적, 인간 도의적, 업무 절차상 문제가 있는 것은 자체적으로 외면했고 절차적으로 당연한 것만 확보해 왔습니다. 혹 애매하고 곤란하면 훗날의 역사 평가를 위해 따로 보관하고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 또는 평생
원칙과 신의와 약속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곳의 신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회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목사님의 그런 면을 생전에 봐 왔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백영희>
- 개인 자료
목사님 생전의 마지막 1980년대 대부분 시기에 연구 부장은 백 목사님의 모든 자료가 있고 목사님 혼자 거주하는 서부교회 5층 서재에 자유롭게 출입했습니다. 또 매주 월요일 아침 5층의 부서장 회의에도 부서와 상관 없이 늘 동석했습니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적다가 버린 서재 쓰레기통까지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직접 주어 챙겼습니다. 목사님 7남매 자녀가 공동으로 2013년 법원에 고소하면서 주장한 내용에도 다 나오는 사실입니다.
총공회와 서부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모든 연구를 일임한 것은 설교록에 공개 되어 있고, 이런 직책 때문에 5층 서재의 메모지까지 모을 수 있었으며, 목사님이 직접 기록한 노트를 5층 직원들이 보는 데서 하나씩 건네 주셨습니다. 그리고 1989.8.27. 돌아 가셨고 장례가 마친 후 5층 서재에 백순희 백은희 백도진 백도충 백명희 5명과 주교 총무와 연구소 부장이 함께 모여 후임을 의논했고 유품 처분을 의논한 자리에서 목사님의 개인 노트 자료 일체와 연구에 필요한 도서는 전부 연구 부장에게 맡기기로 하여 그 전부를 오늘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목사님의 인감 도장과 주민증은 참석하지 않은 분이 먼저 가져 갔고 그 것으로 충분하다 하여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한 분은 목사님의 휴대용 수첩 하나를 가지고 갔고 그 것으로 충분하다 하여 가족회 모임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1997년까지 이 모임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적법성 문제는 없습니다.
개인 자료의 내용은 1936년 믿던 날부터 매일 적은 일지, 교계 사경회 인도 기록, 평소 성경 연구한 노트 수십 권, 설교를 준비한 노트 수십 권, 고려신학교 강의 필기 노트 40여권 일체, 크고 작은 쪽지에 적은 메모, 불신 시절 촬영한 사진 등 개인 앨범이 있습니다. 공개 설교에서도 또 가족들도 연구 부장을 목사님의 아들 또는 아들 중에서도 아들로 표현했습니다.
- 생활용품
목사님의 생활은 서부교회 예배당 5층의 서재와 양산동 기도실 2 곳에 생활용품 일체를 꼭 같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서부교회 5층은 가족들이 영구 보존을 하겠다 하여 그렇게 되었고, 양산동 기도실의 생활용품 일체는 연구소에 맡겼으며 연구소 소장과 주교 총무와 연구 부장이 협의한 다음 연구소 소장품으로 처리하면서 해운대 주택가에 연구소 외부 자료실을 마련하여 보관했고 1997년 이 자료 일체를 신풍연구실로 이전했습니다. 연구소의 당시 소장 결정이었습니다. 연구소 소장은 1997년 하반기에 연구 부장을 횡령과 저작권 등으로 고소하면서 이 자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 것이 적법이라는 증거입니다.
생활용품의 내용은 의복 등 생활용품과 산기도를 다니실 때 사용하는 모든 물품 및 파리채나 쓰레기통 선풍기와 작업용 공구까지 있습니다.
<서부교회>
서부교회 자료는 크게 주일학교와 중간반 그리고 장년반으로 나뉩니다. 각 부서 책임자들이 5층에 늘 함께 했고 목사님께서 연구 부장에게 맡긴 업무와 내용을 알기 때문에 평소 연구 부장이 부탁하면 목사님께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목사님의 승인을 알기 때문에 모두 협조를 했고,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의 리모델링 등의 여러 과정에서 목사님의 승용차, 서부교회의 소장용 설교록 일체, 1층 등의 주교 강단과 주변 집기 등을 받게 되었고, 회의록 등 진행 중인 자료는 복사본으로 받았습니다.
<총공회 자료>
- 생전 자료
목사님 생전에 연구 부장은 총공회 노선 연구가 맡겨 졌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자료는 교학실과 행정실에 원본만 보관하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교학실장 및 행정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일체 복사를 하게 하여 생전에 모든 자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학실에 양성원 시절부터 내려 오던 자료는 분량이 너무 많고 신앙 노선 차원에서는 2차 자료 정도였기 때문에 생전에 받지 못했으나 2009년 대구공회의 백도영 목사님의 주선으로 동성로교회 회합 중 당시 양성원장님께 자료를 함께 가질 수 있도록 요청했고 교학실에 지시하여 거창의 완대 본부를 방문하고 교학실장님 입회 하에 모든 자료를 촬영해 왔습니다.
한편 1987년에 탈퇴한 김철수 목사님이 1970년대부터 교학실장을 하면서 초기 자료를 많이 가지고 계셨는데 임종 직전에 직접 방문하고 공회 시절 자료를 요청하여 자료를 전부 받아 왔습니다.
- 사후 자료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와 부산공회2의 자료는 대구공회 소속이 박윤철 목사님 장례 때 사모님으로부터 유품 일체를 기증 받으며 대구공회 자료와 목사님 생전의 자료 일체를 받았습니다. 부산공회의 대부분 시절 교학실 행정실을 맡은 이만기 목사님께 임종 직전에 직접 방문하여 모든 자료를 다 받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각 목사님이 연구 부장에게 주신 신임을 고려하여 불가피한 사안이 아니면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적어도 10 년 등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해당 자료가 모든 교역자를 통해 더 이상 비밀 자료가 아니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90년 11월에 불신임을 받은 교역자가 1991년부터 부산공회의 교학실 행정실에 직원으로 부임하면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연구 부장에게 일체 자료를 요청했고 연구 부장이 일체 자료를 제공하는 대신 양측은 평생 모든 자료를 공유하기로 약속을 했으며 직원은 서영호 목사님의 부임 후 서부교회 교권을 장악한 김효순 권사님의이교역자회에서 백 목사님의 부정 부패를 질타한 녹음까지 연구 부장에게 공유함으로 각자 자기 할 일은 하되 자료에 관한한 항상 긴밀히 공유해 왔었습니다. 이말출 노트 자료는 10명의 전원일치가 필요해서 제공하지 못한다며 지금까지 거부했지만 이 외 자료는 서로 치명적인 내부 자료를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부장은 담당자 외에 두세 곳을 통해 자료가 교차 검증이 되지 않으면 신의를 위해 해당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왔습니다.
이런 역사나 건전한 협의와 자료 공개에 관한 사항은 1998년 사이트 운영 초기부터 공지해 왔기 때문에 본 연구소에는 각 공회 별로 어떤 지시가 내려 오던 백 목사님 생전과 각 공회 별 교학실과 행정실과 함께 하기로 한 언약 때문에 이 곳에 자료 제공을 금하는 이들이 사리 사욕으로 뭔가 의도를 가지고 불법으로 막는 것이므로 전국 교역자나 교인들과 다양한 자료를 교류했습니다. 따라서 이 곳의 자료 출처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 해도 신앙적, 인간 도의적, 업무 절차상 문제가 있는 것은 자체적으로 외면했고 절차적으로 당연한 것만 확보해 왔습니다. 혹 애매하고 곤란하면 훗날의 역사 평가를 위해 따로 보관하고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 또는 평생
원칙과 신의와 약속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곳의 신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회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목사님의 그런 면을 생전에 봐 왔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