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중생, 칭의에 대한 관계 - 3282, 3293에서 이어 답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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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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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4 00:00
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성경-주해-로마서-]/[-성경-주해-에베소서-]/[-교리-인론-삼분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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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질문 내용은, 5세기 이후 오늘까지 교회사 교리사의 중심 문제입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린 하나님의 '의'와 살아난 우리가 순종하여 만들어진 '의'를 구별 못한 것이 천주교와 기독교의 1500여년 혼동역사라고 정의한다면, 교리사를 단번에 꿰뚫어 요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곳 시각입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가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1600여년 전의 펠라기우스였고 400여년 전의 알미니우스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은 털끝만큼도 개입될 수 없고 오직 무조건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것이 1600여년 전의 어거스틴이었고 또한 4-500여년 전의 루터와 칼빈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에 거쳐간 수도 없는 그외의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왔습니다. 칼빈쪽에 무게를 둔 사람들은 구원은 전적 은혜라고 고함을 질러놓고도 되돌아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의 노력이란 필요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성경이 이래라 저래라고 명령한 것이 수도 없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개운치 않은 뒷맛에 떨떠름했습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쪽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믿어야 천국에 가지 어떻게 무조건 은혜인가? 라고 반문은 해놓고도, 되돌아서면 인간이 노력해 봐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라는 고민에 휩싸여 온 것도 내면이 갈등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 노력해야 의로워지고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성경 성구도 한없이 많습니다. 또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개입될 수 없다고 단정해 놓은 성구도 그만큼 많습니다. 그 성구들을 예로 드는 것은 이미 교회사와 조직신학 과목에서 수도 없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2.성경의 명백성과 단순성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였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다만 이번 질문에 대하여 한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기독교 역사에 1600여년 이래로는 가장 핵심 논점이었는데도 항상 이 문제는 둘로 의견이 나뉘어 혼동만 일으켰지 둘 중에 하나로 명확하게 선을 긋고 결말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명백성이 있으므로 학문과 원어와 논리적 자질에 상관없이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일반적 양심과 생각으로 얼마든지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야 정상입니다. 명백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너무 많은 석학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너무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설명을 하려다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발설한 논리들이 너무 많아서 그 후시대 교회들은 그 논리들에게 파묻혀 방향감각을 잊어버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교회가 어려서 그런 면도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너무 학문적으로 해결하려 학설들이 난무하다가 성경의 명백성 단순성을 놓쳐버린 아쉬움이 있습니다.
3.영이 중생된다는 의미는 구원받아 이제 천국갈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의 중생은 신학에서 '구원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할 때 보통,
- 소명 : 하나님이 부르시고
- 중생 : 마음이 살아나고
- 회심 : 돌아서고
- 믿음 : 신뢰하고
- 칭의 : 의롭다하고
- 성화 : 몸과 생활이 거룩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께서 반복해서 의문을 가지고 계신 이유는 이런 정통 보수 신학의 구원론 설명은 기본적으로 영과 마음을 구별하지 못했고, 또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개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구원순서를 설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혼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과 마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구원받는 순간 기본적으로 가지는 것과 구원 후 평생 살아가며 각자가 노력해야 하는 면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 순서' 또는 '구원 서정'이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들이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분들에게 '결과적으로' '공연히(?) 혼동만 하게 된 것입니다.
4.성경 성구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든지 생명을 바쳐야 하든지 아니면 가진 것을 다 내놓아야만 구원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 곳이 허다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이나 영생은 무조건 은혜로 그냥 준 것이라고 단정해 놓은 곳도 많습니다.
동일한 성경 안에 있는 '은혜'와 '노력'으로 얻게 되는 2가지 상반된 방법을 가르친 성구들을 두고, 둘 중에 하나만 강조하고 그 하나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반대로 설명한 부분은 끌어다 붙이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노력으로 천국을 가려하는 이단이 되거나 아니면 노력으로 천국을 준비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전자의 경우는 펠라기우스나 천주교 또는 알미니우스(이 경우는 교계는 이단으로 보지 않으나 이곳은 이단으로 취급)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정통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 가는 은혜는 무조건, 전적 은혜로, 우리는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해결됩니다. 안 믿던 사람이 천국가도록 해결되는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 그 대속이 우리 영에게 입혀지는 과정, 그래서 영이 중생되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리고 영이 중생된 이후에는 살아난 내 속의 영이 나의 마음과 몸을 말씀으로 살도록 고쳐가고 길러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과 세상을 놓고 어느 쪽을 택하여 걸어갈지를 결정하라고 우리의 노력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를 건설구원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 교회사의 교리흐름에 대하여, 이 홈에서는 여러 곳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과 자료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일 이 문제가 질문자나 이곳 방문자 어느 분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신다면, 이곳에서 관련 자료를 충분히 제공했으나 그 자료를 찾아보시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소요된다 생각하시고, 차분하게 자료들을 찾아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5.답변자가 지난 주일 본문으로 읽었던 성구 하나를 예로 들겠습니다.
답변자의 04.1.11. 주일오전 예배 설교 본문이 벧전2:1--2이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구에 의하면 '구원'이란 전적 은혜로 받는 것인지요, 아니면 사람이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것인지요? 그리고 이 성경이 말씀한 '구원'에는 영의 중생이 포함되었다고 봐야 하는지요? 이 성구에 해당되는 사람은 불신자인지, 아니면 이미 중생된 우리에게 해당되는지요? 수도 없는 모순과 논란을 주는 성구입니다. 이곳에서 잠깐 설명한 이런 문제로 성구들을 다시 한번 보시면, 구원문제는 은혜냐 노력이냐라는 문제로 끝도 없는 문제들이 있다고 보일 것입니다.
이미 이곳에서 소개하고 안내하는 교리와 해석은,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가장 보수 정통 신학을 주장하던 고신교단 합동교단 등에서 수도없이 이단성을 스크린했고 토씨 하나까지 시비를 벌여 이단으로 정죄한 발언과 발표가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합동측에서 현역 신학자 중 최고참에 해당되는 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이단의 정체라는 책에서 이곳 주장을 이단으로 단정했다가 출간된 책을 스스로 회수하느라고 대단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박윤선목사님까지도 이 문제에 교리적으로 간접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보수진영에서는 오랫동안 이곳 주장을 정죄할 때 항상 마지막 배경으로 박윤선목사님의 주장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반대 논리들은 다 꺾여져서 지금은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면으로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는 이의제기를 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안내하는 답변자는 KIST 수위실의 안내원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설명의 수준은 근대역사에서 꿈도 꾸지 못할 최첨단, 최상의 제품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검증된 기초과학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성경-주해-로마서-]/[-성경-주해-에베소서-]/[-교리-인론-삼분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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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질문 내용은, 5세기 이후 오늘까지 교회사 교리사의 중심 문제입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린 하나님의 '의'와 살아난 우리가 순종하여 만들어진 '의'를 구별 못한 것이 천주교와 기독교의 1500여년 혼동역사라고 정의한다면, 교리사를 단번에 꿰뚫어 요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곳 시각입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가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1600여년 전의 펠라기우스였고 400여년 전의 알미니우스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은 털끝만큼도 개입될 수 없고 오직 무조건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것이 1600여년 전의 어거스틴이었고 또한 4-500여년 전의 루터와 칼빈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에 거쳐간 수도 없는 그외의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왔습니다. 칼빈쪽에 무게를 둔 사람들은 구원은 전적 은혜라고 고함을 질러놓고도 되돌아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의 노력이란 필요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성경이 이래라 저래라고 명령한 것이 수도 없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개운치 않은 뒷맛에 떨떠름했습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쪽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믿어야 천국에 가지 어떻게 무조건 은혜인가? 라고 반문은 해놓고도, 되돌아서면 인간이 노력해 봐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라는 고민에 휩싸여 온 것도 내면이 갈등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 노력해야 의로워지고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성경 성구도 한없이 많습니다. 또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개입될 수 없다고 단정해 놓은 성구도 그만큼 많습니다. 그 성구들을 예로 드는 것은 이미 교회사와 조직신학 과목에서 수도 없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2.성경의 명백성과 단순성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였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다만 이번 질문에 대하여 한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기독교 역사에 1600여년 이래로는 가장 핵심 논점이었는데도 항상 이 문제는 둘로 의견이 나뉘어 혼동만 일으켰지 둘 중에 하나로 명확하게 선을 긋고 결말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명백성이 있으므로 학문과 원어와 논리적 자질에 상관없이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일반적 양심과 생각으로 얼마든지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야 정상입니다. 명백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너무 많은 석학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너무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설명을 하려다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발설한 논리들이 너무 많아서 그 후시대 교회들은 그 논리들에게 파묻혀 방향감각을 잊어버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교회가 어려서 그런 면도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너무 학문적으로 해결하려 학설들이 난무하다가 성경의 명백성 단순성을 놓쳐버린 아쉬움이 있습니다.
3.영이 중생된다는 의미는 구원받아 이제 천국갈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의 중생은 신학에서 '구원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할 때 보통,
- 소명 : 하나님이 부르시고
- 중생 : 마음이 살아나고
- 회심 : 돌아서고
- 믿음 : 신뢰하고
- 칭의 : 의롭다하고
- 성화 : 몸과 생활이 거룩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께서 반복해서 의문을 가지고 계신 이유는 이런 정통 보수 신학의 구원론 설명은 기본적으로 영과 마음을 구별하지 못했고, 또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개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구원순서를 설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혼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과 마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구원받는 순간 기본적으로 가지는 것과 구원 후 평생 살아가며 각자가 노력해야 하는 면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 순서' 또는 '구원 서정'이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들이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분들에게 '결과적으로' '공연히(?) 혼동만 하게 된 것입니다.
4.성경 성구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든지 생명을 바쳐야 하든지 아니면 가진 것을 다 내놓아야만 구원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 곳이 허다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이나 영생은 무조건 은혜로 그냥 준 것이라고 단정해 놓은 곳도 많습니다.
동일한 성경 안에 있는 '은혜'와 '노력'으로 얻게 되는 2가지 상반된 방법을 가르친 성구들을 두고, 둘 중에 하나만 강조하고 그 하나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반대로 설명한 부분은 끌어다 붙이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노력으로 천국을 가려하는 이단이 되거나 아니면 노력으로 천국을 준비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전자의 경우는 펠라기우스나 천주교 또는 알미니우스(이 경우는 교계는 이단으로 보지 않으나 이곳은 이단으로 취급)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정통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 가는 은혜는 무조건, 전적 은혜로, 우리는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해결됩니다. 안 믿던 사람이 천국가도록 해결되는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 그 대속이 우리 영에게 입혀지는 과정, 그래서 영이 중생되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리고 영이 중생된 이후에는 살아난 내 속의 영이 나의 마음과 몸을 말씀으로 살도록 고쳐가고 길러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과 세상을 놓고 어느 쪽을 택하여 걸어갈지를 결정하라고 우리의 노력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를 건설구원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 교회사의 교리흐름에 대하여, 이 홈에서는 여러 곳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과 자료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일 이 문제가 질문자나 이곳 방문자 어느 분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신다면, 이곳에서 관련 자료를 충분히 제공했으나 그 자료를 찾아보시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소요된다 생각하시고, 차분하게 자료들을 찾아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5.답변자가 지난 주일 본문으로 읽었던 성구 하나를 예로 들겠습니다.
답변자의 04.1.11. 주일오전 예배 설교 본문이 벧전2:1--2이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구에 의하면 '구원'이란 전적 은혜로 받는 것인지요, 아니면 사람이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것인지요? 그리고 이 성경이 말씀한 '구원'에는 영의 중생이 포함되었다고 봐야 하는지요? 이 성구에 해당되는 사람은 불신자인지, 아니면 이미 중생된 우리에게 해당되는지요? 수도 없는 모순과 논란을 주는 성구입니다. 이곳에서 잠깐 설명한 이런 문제로 성구들을 다시 한번 보시면, 구원문제는 은혜냐 노력이냐라는 문제로 끝도 없는 문제들이 있다고 보일 것입니다.
이미 이곳에서 소개하고 안내하는 교리와 해석은,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가장 보수 정통 신학을 주장하던 고신교단 합동교단 등에서 수도없이 이단성을 스크린했고 토씨 하나까지 시비를 벌여 이단으로 정죄한 발언과 발표가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합동측에서 현역 신학자 중 최고참에 해당되는 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이단의 정체라는 책에서 이곳 주장을 이단으로 단정했다가 출간된 책을 스스로 회수하느라고 대단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박윤선목사님까지도 이 문제에 교리적으로 간접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보수진영에서는 오랫동안 이곳 주장을 정죄할 때 항상 마지막 배경으로 박윤선목사님의 주장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반대 논리들은 다 꺾여져서 지금은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면으로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는 이의제기를 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안내하는 답변자는 KIST 수위실의 안내원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설명의 수준은 근대역사에서 꿈도 꾸지 못할 최첨단, 최상의 제품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검증된 기초과학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기본구원] 재질문입니다..
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성경-주해-로마서-]/[-성경-주해-에베소서-]/[-교리-인론-삼분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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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고 말씀할 때의 의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영을 살려내기 위해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 영에게 입혀 영을 중생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주시는 것을 마치 뚜껑열린 독에 폭우로 인하여 물이 담기듯이 그렇게 담기게 되었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기본구원의 경우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고 느끼고 '믿으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는 중생 후 영이 마음을 설득시켰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마음의 성화문제이며 건설구원의 경우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중생도 하나의 믿음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믿음을 가지고 언급할때는 위의 두가지 믿음이라는 말씀을 구분하며 말씀을 읽어야 된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렇다면 이 두가지를 어떻게 구분하며 지금까지의 성경해석들은 많이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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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기본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성경-주해-로마서-]/[-성경-주해-에베소서-]/[-교리-인론-삼분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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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고 말씀할 때의 의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영을 살려내기 위해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 영에게 입혀 영을 중생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주시는 것을 마치 뚜껑열린 독에 폭우로 인하여 물이 담기듯이 그렇게 담기게 되었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기본구원의 경우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고 느끼고 '믿으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는 중생 후 영이 마음을 설득시켰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마음의 성화문제이며 건설구원의 경우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중생도 하나의 믿음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믿음을 가지고 언급할때는 위의 두가지 믿음이라는 말씀을 구분하며 말씀을 읽어야 된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렇다면 이 두가지를 어떻게 구분하며 지금까지의 성경해석들은 많이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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