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천 목사님이 백태영 목사님보다 낫다는 평가에 대하여
| 분류 |
|---|
목회자
1
0
2018.12.29 14:48
백 목사님은 백태영 목사님을 사직동교회에 보내면서 한 동네에 있는 내수동교회의 박희천 목사님이 태영 목사보다 낫다고 평을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평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중심지)
* 새문안교회
과거 우리 나라 중심은 서울의 광화문이었고, 그 광화문 사거리의 대로가에 바로 붙은 교회가 '새문안교회'입니다. 대한민국 제1호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의 간판은 거의 다 가졌던 교회입니다. 새문안교회가 있는 대로가 옆으로 돌아 들어 가면 주택가의 첫 교회가 '내수동교회'입니다.
* 내수동교회
6.25 전쟁이 끝나자 부산의 서부교회를 다니던 서울의 피난민이 돌아 가서 세운 '공회의 개척' 교회입니다. 백영익 목사님이 맡고 있다가 공회가 고신에서 제명을 당할 때 고신에게 뺏겼고, 고신이 합동교단과 합할 때 합동교단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박희천 목사님이 부임했으며 '박희천, 내수동교회' 출신들이 오늘 한국교회의 중심이라 할 정도로 전성기입니다.
* 사직동교회
내수동교회를 억울하게 빼앗기고 공회는 내수동교회보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 가서 성은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고 오늘의 사직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사직동교회는 1970년대 신도범 목사님이 계시면서 전성기였고 서울 지방의 타 교단 목회자 5 ~ 60여명이 매주 금요일 저녁 예배를 참석하며 사직동교인들과 함께 배운 정도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교계의 아주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백태영 목사님)
1979년, 백태영 목사님은 1년동안 미국에서 세인트루이스교회를 맡았다가 돌아왔습니다. 교인들과 교회 운영의 기본시각이 달랐기 때문인데, 묘하게도 교인들은 공회의 원칙을 요구했고 백태영 목사님은 새 시대에 맞는 변형된 운영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일반 교인들은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직동교회로 돌아 온 백태영 목사님은 초신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별로 없지만 그 때는 오늘의 북한과 남한처럼 달랐습니다. 1년을 미국에 살다 온 목사님은 현대적 목사가 되어 있었고 백 목사님은 이후 백태영 목사님을 해외 출신의 일반 목회자로 상대했지 과거처럼 핵심 제자들을 제대로 관리하듯 하지 않았습니다. 백태영 목사님은 훌쩍 커버렸고 마치 집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굵은 자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백 목사님 밑에서 덕유산 칼바위를 오가며 기도하고 오로지 말씀 하나밖에 없던 백태영 조사님이 아니라 세계를 알고 한국의 앞날을 예측하며 잠실동이 빈들판일 때 수도권의 차기 유망지라 하여 구도심의 사직동교회를 통째로 신시가지가 될 곳으로 옮기려는 '유능한 경영인'이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
공회는 공회 외부를 불신 세상으로 취급하지만 합동교단은 1961년 고신과 합한 이후로 한국교회의 최고 정통을 자부했고 실제 괜찮은 인물들이 많았으며, 고신을 거쳐 합동으로 들어 온 인물은 향후 한국교회의 중심에 섭니다. 많은 인재들 중에 박형룡 박윤선 등은 한국교계 수준에서도 최고의 어른들이었고 그들의 제자들로서 향후 한국교회의 거물급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박희천 목사님은 조용히 내수동교회를 목회하던 '합동교단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박 목사님은 소리 없이 한 걸음씩 발전을 했고 합동교단에 실질적인 최고의 신앙 지도자입니다.
이런 박희천 목사님이 내수동교회에 있었고, 그 분과는 관계가 없던 시절이나 그가 근무하던 내수동교회와 사직동교회는 한 골목 안에 있었기 때문에 소리 없이 합동교단의 내적 최고의 실력 있는 교회와 공회의 서울 지역에 제일 중심지에 있는 사직동교회는, 두 교회가 겉으로 비교 되지만 내적으로는 합동교단의 최고 신앙과 공회의 서울 교회 하나가 견준다고 보였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역사적으로 또 교단의 내면 실제적으로 볼 때 이런 의미가 있었으나 이런 의미를 표시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백태영 목사님은 당시 공회의 보통 목회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백영희 목사님의 수준'에서 타 교단보다 훨씬 뛰어 난다는 자부심을 슬쩍 빗대면서 자기 신앙도 마치 타 교단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그런 착각을 보였습니다. 사실 공회의 최고 수준 목회자들이 합동 교단에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하면 신청서조차 받아 주지 않을 수준입니다.
백 목사님께 열심히 배우고 그 보이지 않는 후원 때문에 전국 공회 교회에는 유력한 인물들이 교인으로 모였습니다. 사직동교회는 특히 그런 곳입니다. 호랑이 위세로 여우가 골짜기에 왕노릇을 한다는 말처럼 모두가 그러했고 사직동교회도 백태영 목사님은 자신의 지도력으로 운영하는 줄 알았으나 백 목사님은 사직동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백태영 목사님은 신도범 목사님만 못했고 사직동을 감당하기는 사실 어려웠습니다. 백 목사님의 친동생이라는 점, 백 목사님의 공회 분위기 때문에 백태영 목사님 식의 저돌적 지도가 먹히는 듯이 보이는 그런 상황 속에 사직동교회의 정말 신앙의 차원 높은 분들은 백태영 목사님의 활동에 양해를 하는 정도지 감동을 받아 순종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목회자들이 착각을 하듯이 앞에서 순종을 하면 마음까지 순종을 하는 줄로 압니다.
미국을 1년 다녀 온 백태영 목사님, 공회로서는 최고 수준의 목회자가 미국을 1년 다녀 왔기 때문에 사도바울이나 된 것처럼 봤으나, 타 교단에서는 흔하고 흔한 일이었고 더구나 내수동교회 합동 교단은 그런 일이 옆집 갔다 오는 정도였고 박희천 목사님은 미국에서 정규 신학을 제대로 다 마치고 왔던 분입니다. 바로 여기서! 공회는 타 교단의 경력이 해외까지 갔다 온 정도가 되면 타 교단과 달리 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신앙 면으로만 보면 해외 경력이 있는 사람은 대개 몹쓸 신앙입니다. 그런데 박희천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랜 해외 유학으로 그 분의 성경과 신앙이 흐려 지지 않고 더 곧아 지고 발전하는 특이한 분이었습니다. 합동교단에서는 그런 분이 없다 할 정도인데 박 목사님이 바로 그런 희귀한 경우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1952년 서부교회를 막 부임했을 때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와서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또 고려파 전도사로 활동하던 박희천 목사님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지 않은 접촉이나 사람 보는 눈과 기억해야 할 것은 놀랍게 기억하는 백 목사님에게 박 목사님은 아주 특이하고 귀하며 대단한 신앙의 사람으로 들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희천 목사님이 사직동교회 옆의 내수동교회에 부임을 했고 내수동교회를 개척한 분이 백 목사님이어서 내수동교회에는 공회에 서로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굳이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굳이 외면할 수 없이 건너집을 자연스럽게 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백 목사님에 관해서는 칼빈과 견줄 인물로 평생 백 목사님의 성경과 설교 세계를 합동교단에서 끈질기게 그리고 집요하게 소개했고, 합동교단은 박희천 정도의 인물이 아니면 벌써 내쳤을 정도였으나 박 목사님의 신앙과 실력이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뒤로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백 목사님 역시 백태영 목사님에게, 박희천이라는 인물은 백태영 목사 정도의 인물이 맞상대하기 버거운, 그에 미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 박 목사님은 공회의 특별한 장점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 스스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인물이라고 극찬을 합니다.
(결론)
백 목사님은 비록 합동교단에 신청서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한 공회의 목회자라 해도 백 목사님께 성경만 잘 배워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런 신령한 실력이 있으면 박희천 목사님처럼 한국교회의 최고 인물, 최고의 성경학자가 목회하는 내수동교회를 넘어서고 내수동교회가 넘볼 수 없는 교회가 될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백태영 목사님이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님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실력이 넘쳐서 사직동교회를 쉽게 목회하고도 넉넉하다는 자세를 보이자 공개석상에서 크게 책망을 합니다.
* 새문안교회
과거 우리 나라 중심은 서울의 광화문이었고, 그 광화문 사거리의 대로가에 바로 붙은 교회가 '새문안교회'입니다. 대한민국 제1호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의 간판은 거의 다 가졌던 교회입니다. 새문안교회가 있는 대로가 옆으로 돌아 들어 가면 주택가의 첫 교회가 '내수동교회'입니다.
* 내수동교회
6.25 전쟁이 끝나자 부산의 서부교회를 다니던 서울의 피난민이 돌아 가서 세운 '공회의 개척' 교회입니다. 백영익 목사님이 맡고 있다가 공회가 고신에서 제명을 당할 때 고신에게 뺏겼고, 고신이 합동교단과 합할 때 합동교단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박희천 목사님이 부임했으며 '박희천, 내수동교회' 출신들이 오늘 한국교회의 중심이라 할 정도로 전성기입니다.
* 사직동교회
내수동교회를 억울하게 빼앗기고 공회는 내수동교회보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 가서 성은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고 오늘의 사직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사직동교회는 1970년대 신도범 목사님이 계시면서 전성기였고 서울 지방의 타 교단 목회자 5 ~ 60여명이 매주 금요일 저녁 예배를 참석하며 사직동교인들과 함께 배운 정도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교계의 아주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백태영 목사님)
1979년, 백태영 목사님은 1년동안 미국에서 세인트루이스교회를 맡았다가 돌아왔습니다. 교인들과 교회 운영의 기본시각이 달랐기 때문인데, 묘하게도 교인들은 공회의 원칙을 요구했고 백태영 목사님은 새 시대에 맞는 변형된 운영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일반 교인들은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직동교회로 돌아 온 백태영 목사님은 초신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별로 없지만 그 때는 오늘의 북한과 남한처럼 달랐습니다. 1년을 미국에 살다 온 목사님은 현대적 목사가 되어 있었고 백 목사님은 이후 백태영 목사님을 해외 출신의 일반 목회자로 상대했지 과거처럼 핵심 제자들을 제대로 관리하듯 하지 않았습니다. 백태영 목사님은 훌쩍 커버렸고 마치 집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굵은 자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백 목사님 밑에서 덕유산 칼바위를 오가며 기도하고 오로지 말씀 하나밖에 없던 백태영 조사님이 아니라 세계를 알고 한국의 앞날을 예측하며 잠실동이 빈들판일 때 수도권의 차기 유망지라 하여 구도심의 사직동교회를 통째로 신시가지가 될 곳으로 옮기려는 '유능한 경영인'이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
공회는 공회 외부를 불신 세상으로 취급하지만 합동교단은 1961년 고신과 합한 이후로 한국교회의 최고 정통을 자부했고 실제 괜찮은 인물들이 많았으며, 고신을 거쳐 합동으로 들어 온 인물은 향후 한국교회의 중심에 섭니다. 많은 인재들 중에 박형룡 박윤선 등은 한국교계 수준에서도 최고의 어른들이었고 그들의 제자들로서 향후 한국교회의 거물급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박희천 목사님은 조용히 내수동교회를 목회하던 '합동교단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박 목사님은 소리 없이 한 걸음씩 발전을 했고 합동교단에 실질적인 최고의 신앙 지도자입니다.
이런 박희천 목사님이 내수동교회에 있었고, 그 분과는 관계가 없던 시절이나 그가 근무하던 내수동교회와 사직동교회는 한 골목 안에 있었기 때문에 소리 없이 합동교단의 내적 최고의 실력 있는 교회와 공회의 서울 지역에 제일 중심지에 있는 사직동교회는, 두 교회가 겉으로 비교 되지만 내적으로는 합동교단의 최고 신앙과 공회의 서울 교회 하나가 견준다고 보였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역사적으로 또 교단의 내면 실제적으로 볼 때 이런 의미가 있었으나 이런 의미를 표시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백태영 목사님은 당시 공회의 보통 목회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백영희 목사님의 수준'에서 타 교단보다 훨씬 뛰어 난다는 자부심을 슬쩍 빗대면서 자기 신앙도 마치 타 교단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그런 착각을 보였습니다. 사실 공회의 최고 수준 목회자들이 합동 교단에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하면 신청서조차 받아 주지 않을 수준입니다.
백 목사님께 열심히 배우고 그 보이지 않는 후원 때문에 전국 공회 교회에는 유력한 인물들이 교인으로 모였습니다. 사직동교회는 특히 그런 곳입니다. 호랑이 위세로 여우가 골짜기에 왕노릇을 한다는 말처럼 모두가 그러했고 사직동교회도 백태영 목사님은 자신의 지도력으로 운영하는 줄 알았으나 백 목사님은 사직동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백태영 목사님은 신도범 목사님만 못했고 사직동을 감당하기는 사실 어려웠습니다. 백 목사님의 친동생이라는 점, 백 목사님의 공회 분위기 때문에 백태영 목사님 식의 저돌적 지도가 먹히는 듯이 보이는 그런 상황 속에 사직동교회의 정말 신앙의 차원 높은 분들은 백태영 목사님의 활동에 양해를 하는 정도지 감동을 받아 순종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목회자들이 착각을 하듯이 앞에서 순종을 하면 마음까지 순종을 하는 줄로 압니다.
미국을 1년 다녀 온 백태영 목사님, 공회로서는 최고 수준의 목회자가 미국을 1년 다녀 왔기 때문에 사도바울이나 된 것처럼 봤으나, 타 교단에서는 흔하고 흔한 일이었고 더구나 내수동교회 합동 교단은 그런 일이 옆집 갔다 오는 정도였고 박희천 목사님은 미국에서 정규 신학을 제대로 다 마치고 왔던 분입니다. 바로 여기서! 공회는 타 교단의 경력이 해외까지 갔다 온 정도가 되면 타 교단과 달리 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신앙 면으로만 보면 해외 경력이 있는 사람은 대개 몹쓸 신앙입니다. 그런데 박희천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랜 해외 유학으로 그 분의 성경과 신앙이 흐려 지지 않고 더 곧아 지고 발전하는 특이한 분이었습니다. 합동교단에서는 그런 분이 없다 할 정도인데 박 목사님이 바로 그런 희귀한 경우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1952년 서부교회를 막 부임했을 때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와서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또 고려파 전도사로 활동하던 박희천 목사님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지 않은 접촉이나 사람 보는 눈과 기억해야 할 것은 놀랍게 기억하는 백 목사님에게 박 목사님은 아주 특이하고 귀하며 대단한 신앙의 사람으로 들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희천 목사님이 사직동교회 옆의 내수동교회에 부임을 했고 내수동교회를 개척한 분이 백 목사님이어서 내수동교회에는 공회에 서로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굳이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굳이 외면할 수 없이 건너집을 자연스럽게 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백 목사님에 관해서는 칼빈과 견줄 인물로 평생 백 목사님의 성경과 설교 세계를 합동교단에서 끈질기게 그리고 집요하게 소개했고, 합동교단은 박희천 정도의 인물이 아니면 벌써 내쳤을 정도였으나 박 목사님의 신앙과 실력이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뒤로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백 목사님 역시 백태영 목사님에게, 박희천이라는 인물은 백태영 목사 정도의 인물이 맞상대하기 버거운, 그에 미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 박 목사님은 공회의 특별한 장점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 스스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인물이라고 극찬을 합니다.
(결론)
백 목사님은 비록 합동교단에 신청서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한 공회의 목회자라 해도 백 목사님께 성경만 잘 배워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런 신령한 실력이 있으면 박희천 목사님처럼 한국교회의 최고 인물, 최고의 성경학자가 목회하는 내수동교회를 넘어서고 내수동교회가 넘볼 수 없는 교회가 될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백태영 목사님이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님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실력이 넘쳐서 사직동교회를 쉽게 목회하고도 넉넉하다는 자세를 보이자 공개석상에서 크게 책망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