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과 인성론의 시차 발전 과정에서 목격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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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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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3 00:00
1. 전통의 정통설
- 사람을 이분설로만 아는 상황에서 구원론을 살폈다면
- 그리고 그 구원론의 첫 단계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이 2가지를 전제하고 평가한다면 개혁주의는 구원론에 대해 정말 잘 설명했고 2천 년의 교리사적 사건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1,500년대에 있었습니다. 개혁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천주교'로부터 개혁입니다. 그 어떤 다른 것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오로지 '천주교' 종교 사슬에서 탈출하는 개혁만을 말합니다. 이 역사적 상식을 재론하는 이유는 한 가지, 천주교가 1천 년 동안 천하를 장악하여 교회는 그 어떤 면에서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가들이 할 수 있는 일차 투쟁 대상은 교황권과 우상종교화 된 형식과 구원론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교황권은 사탄의 머리니 머리를 쳐야 했고, 우상종교화는 신앙의 실행 전반이 중증 동맥 경화로 온 몸을 다 썩게 만들었으니 그냥 둘 수 없었고, 교리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나 역시 구원론이 중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개혁주의 교리는 인성론까지 살피며 구원론을 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즉, 1차 함수를 잘 배워 아주 익숙해 지면 2차 함수라는 것은 저절로 눈 앞에 다가 오게 되고 1차 함수를 넘어 서는 사람은 2차 함수도 넘어 서게 됩니다. 그런데 1차 함수를 이제 막 이해하고 그 이론의 기초를 잡아야 하는 가감승제 걸음마 단계에서 바로 2차 함수의 세계를 기대했다면 너무 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사를 어린 생명을 길러 키워 가시도록 세상을 만드셨고 신앙의 세계도 그렇게 운영해 가십니다. 따라서 16세기의 개혁주의 선배들은 당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잘 풀고 충성했습니다.
2. 백영희 시대
백 목사님은 1936년 교회를 첫 출석하면서 바로 구원론 문제로 그의 평생 신앙을 행위로 구원을 얻는 길과 은혜로 천국 가는 두 길을 앞에 놓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워낙 유명한 술도가 사장이 신앙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안식교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며 백영희를 설득하여 단 한 주간 교회를 출석한 그를 안식교로 데려 가 버린 것입니다. 백영희는 전혀 알지 못했던 구원론이라는 교리사 분쟁의 한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를 전도한 장로교 교회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그를 구원해 내려 했습니다.
구원은 절대 은혜며 예정이라는 사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갈 수 없는 하늘의 세계라는 사실
이런 기본구원의 근본 방향은 백영희가 모르던 세계였으나 16세기의 개혁주의 교리가 영국을 통해 미국과 호주로 옮겨 갔고 호주로 간 이 교리가 경남을 선교 지역으로 삼은 호주선교부가 전도하고 가르친 교회를 통해 백영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리로 신앙을 굳게 잡고 출발한 백영희는 이후 성경에 빠져 들어 갈수록 이 교리의 일부가 비어 있는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계속 살피다가 건설구원을 잡게 되었으니 기본구원이 밝혀 진 1,600년대에서 4백 년을 더 지나며 공고해 진 상황에서 건설구원을 구성하게 된 것은 사실 교리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오히려 왜 4백 년이나 지난 시점에 백영희라는 무식한 교인을 통해 드러 난 지연 상황이 이상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건설구원 개념은 1500년대부터 간간히 나왔고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의 경우는 백영희 구원론과 같다 할 만큼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설구원은 인성론의 구조라는 또 하나의 벽 앞에서 큰 혼란을 일시 겪었고 삼분설이라는 열쇠가 이 모든 혼란을 일시에 정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삼분설이 열쇠가 되었으나 삼분설 역시 교회사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상식이었는데 왜 기본구원을 열었던 16세기에 삼분설의 열쇠를 사용하지 못했던가?
바로 백영희의 삼분론은 마음을 물질인 줄 알게 됨으로 역사 2천 년의 논란을 완벽하게 잠재우게 됩니다. 역사에 나타 났던 비슷한 건설구원론들 또는 역사에 아주 흡사했던 건설구원론과도 사실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고 이름도 당연히 나오게 되었고, 기능구원이라는 보충 정밀 용어가 체계화 과정에 형성 되었으며 이런 용어는 그냥 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진리 구성이 되어 나타 난 것입니다.
3. 중요하여
질문과 거리 먼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제 결론을 짓자면 개혁주의의 교리는 16세기에 형성 되었고 백영희 구원론은 20세기에 형성 되어 4백 년 이상의 시차를 갖습니다. 개혁주의의 출발은 천주교로부터의 탈출이 당시 상황이었고 구원론은 교리적 투쟁 과정에서 나타 납니다. 이 시점에는 인성론까지 살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천주교의 행위 구원에서 은혜 구원을 되 찾는 것만 절체절명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영희 노선이 나오기 수백 년 전에 끝났어야 할 문제가 세월을 너무 오래 지났고 이로 인해 시차가 너무 많이 생겨 버렸습니다.
(답변 계속 중 - 다른 일정 때문에 일단 답변을 마무리합니다. 내일 다시 살피고 답변을 정리하겠습니다.)
>> 신학 님이 쓰신 내용 <<
:
: 종교개혁을 일으킨 핵심교리는 `이신칭의`입니다.
: 천주교의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에 반대하여 성경적인 믿음으로 얻는 구원관을 정립했습니다.
:
: 이 당시에는 이분론으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믿음은 마음(영혼)으로 예수님의
: 대속을 영접하는 것인것 같습니다.(제가 바르게 보고 있는 것인지?)
: 총공회의 건설구원의 확립으로 종교개혁당시의 이신칭의는 기본구원의 확립으로
: 보게 되었습니다.
:
: 그런데, 총공회의 삼분론 건설구원론에 의하면, 기본구원은 영이 중생되고 심신은
: 법적으로 형체만 구원얻는 것인데,총공회의 교리로 보면 영혼이나 마음이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것은 건설구원에 속한것인데....
:
: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건설구원의 관점에서 엄밀히보면, 기본구원관도 잘못 깨달은
: 것은아닌지?
: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건설구원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을 이분설로만 아는 상황에서 구원론을 살폈다면
- 그리고 그 구원론의 첫 단계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이 2가지를 전제하고 평가한다면 개혁주의는 구원론에 대해 정말 잘 설명했고 2천 년의 교리사적 사건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1,500년대에 있었습니다. 개혁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천주교'로부터 개혁입니다. 그 어떤 다른 것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오로지 '천주교' 종교 사슬에서 탈출하는 개혁만을 말합니다. 이 역사적 상식을 재론하는 이유는 한 가지, 천주교가 1천 년 동안 천하를 장악하여 교회는 그 어떤 면에서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가들이 할 수 있는 일차 투쟁 대상은 교황권과 우상종교화 된 형식과 구원론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교황권은 사탄의 머리니 머리를 쳐야 했고, 우상종교화는 신앙의 실행 전반이 중증 동맥 경화로 온 몸을 다 썩게 만들었으니 그냥 둘 수 없었고, 교리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나 역시 구원론이 중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개혁주의 교리는 인성론까지 살피며 구원론을 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즉, 1차 함수를 잘 배워 아주 익숙해 지면 2차 함수라는 것은 저절로 눈 앞에 다가 오게 되고 1차 함수를 넘어 서는 사람은 2차 함수도 넘어 서게 됩니다. 그런데 1차 함수를 이제 막 이해하고 그 이론의 기초를 잡아야 하는 가감승제 걸음마 단계에서 바로 2차 함수의 세계를 기대했다면 너무 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사를 어린 생명을 길러 키워 가시도록 세상을 만드셨고 신앙의 세계도 그렇게 운영해 가십니다. 따라서 16세기의 개혁주의 선배들은 당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잘 풀고 충성했습니다.
2. 백영희 시대
백 목사님은 1936년 교회를 첫 출석하면서 바로 구원론 문제로 그의 평생 신앙을 행위로 구원을 얻는 길과 은혜로 천국 가는 두 길을 앞에 놓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워낙 유명한 술도가 사장이 신앙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안식교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며 백영희를 설득하여 단 한 주간 교회를 출석한 그를 안식교로 데려 가 버린 것입니다. 백영희는 전혀 알지 못했던 구원론이라는 교리사 분쟁의 한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를 전도한 장로교 교회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그를 구원해 내려 했습니다.
구원은 절대 은혜며 예정이라는 사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갈 수 없는 하늘의 세계라는 사실
이런 기본구원의 근본 방향은 백영희가 모르던 세계였으나 16세기의 개혁주의 교리가 영국을 통해 미국과 호주로 옮겨 갔고 호주로 간 이 교리가 경남을 선교 지역으로 삼은 호주선교부가 전도하고 가르친 교회를 통해 백영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리로 신앙을 굳게 잡고 출발한 백영희는 이후 성경에 빠져 들어 갈수록 이 교리의 일부가 비어 있는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계속 살피다가 건설구원을 잡게 되었으니 기본구원이 밝혀 진 1,600년대에서 4백 년을 더 지나며 공고해 진 상황에서 건설구원을 구성하게 된 것은 사실 교리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오히려 왜 4백 년이나 지난 시점에 백영희라는 무식한 교인을 통해 드러 난 지연 상황이 이상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건설구원 개념은 1500년대부터 간간히 나왔고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의 경우는 백영희 구원론과 같다 할 만큼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설구원은 인성론의 구조라는 또 하나의 벽 앞에서 큰 혼란을 일시 겪었고 삼분설이라는 열쇠가 이 모든 혼란을 일시에 정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삼분설이 열쇠가 되었으나 삼분설 역시 교회사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상식이었는데 왜 기본구원을 열었던 16세기에 삼분설의 열쇠를 사용하지 못했던가?
바로 백영희의 삼분론은 마음을 물질인 줄 알게 됨으로 역사 2천 년의 논란을 완벽하게 잠재우게 됩니다. 역사에 나타 났던 비슷한 건설구원론들 또는 역사에 아주 흡사했던 건설구원론과도 사실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고 이름도 당연히 나오게 되었고, 기능구원이라는 보충 정밀 용어가 체계화 과정에 형성 되었으며 이런 용어는 그냥 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진리 구성이 되어 나타 난 것입니다.
3. 중요하여
질문과 거리 먼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제 결론을 짓자면 개혁주의의 교리는 16세기에 형성 되었고 백영희 구원론은 20세기에 형성 되어 4백 년 이상의 시차를 갖습니다. 개혁주의의 출발은 천주교로부터의 탈출이 당시 상황이었고 구원론은 교리적 투쟁 과정에서 나타 납니다. 이 시점에는 인성론까지 살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천주교의 행위 구원에서 은혜 구원을 되 찾는 것만 절체절명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영희 노선이 나오기 수백 년 전에 끝났어야 할 문제가 세월을 너무 오래 지났고 이로 인해 시차가 너무 많이 생겨 버렸습니다.
(답변 계속 중 - 다른 일정 때문에 일단 답변을 마무리합니다. 내일 다시 살피고 답변을 정리하겠습니다.)
>> 신학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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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을 일으킨 핵심교리는 `이신칭의`입니다.
: 천주교의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에 반대하여 성경적인 믿음으로 얻는 구원관을 정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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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당시에는 이분론으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믿음은 마음(영혼)으로 예수님의
: 대속을 영접하는 것인것 같습니다.(제가 바르게 보고 있는 것인지?)
: 총공회의 건설구원의 확립으로 종교개혁당시의 이신칭의는 기본구원의 확립으로
: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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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총공회의 삼분론 건설구원론에 의하면, 기본구원은 영이 중생되고 심신은
: 법적으로 형체만 구원얻는 것인데,총공회의 교리로 보면 영혼이나 마음이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것은 건설구원에 속한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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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건설구원의 관점에서 엄밀히보면, 기본구원관도 잘못 깨달은
: 것은아닌지?
: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건설구원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