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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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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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12:11
마27: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으로는
눅23:33-43에 나오듯이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하였고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게 여기 마27에는 강도들이라 두 강도 모두 욕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는 것이 맞을지요?
(수정 2020-01-01 11:32)
단일 개별 계시
모든 성경은 단일 계시이지만 각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각도와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두 강도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첫 순간을 기록해주셨고 누가복음에서는 태도가 바뀐 모습만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성경의 전체 기록을 최소화하면서도 각각 다른 순간을 적으며 하나의 뜻을 다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내)
이런 기록의 분리와 단순화를 성경의 기록 착오로 보고 오해를 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참고로 안내를 추가한다면
개별 계시
예수님을 목격한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같은 사건인데도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내용이 질문하신 예수님과 함께 양쪽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분명히 둘 다 욕을 하고 끝이 났고, 누가복음에서는 왼편 강도만 욕을 했고, 우편 강도는 영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한 내용을 가지고 두 성경이 충돌이 일어나는가?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한 성경입니다. 주님이 유대인들이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 바로 그 혈통이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임을 기록하고 동시에 동정녀로 탄생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참된 메시야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멸시와 핍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두 강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영멸받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모르고 나를 구원하러 온 메시야를 멸시하고 죽인 이렇게까지 어리석고 극악한 유대인을 계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으니 바로 이 분이 유대인을 구원하러 오신 참된 메시야요, 왕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성 철학으로 유명한 헬라인을 향한 성경입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을 대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나 메시야라는 극적인 관점으로 설명하지 아니하고 보다 객관적 순서적 논리적 기록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우편 강도에 대한 기록은 분명히 마태복음보다는 객관적인 사실기록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역사책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수록 인간 예수가 어떻게 참된 메시야가 되시는지를 더욱 흠 없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일 계시
우편, 왼편 강도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님을 비방했고 (마태복음) 그러나 그런 비방과 비난을 당했는데도 주님의 한 없는 대속의 사랑을 접하고 우편 강도가 회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그 회개란 우편 강도의 턱걸이 기본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마귀가 심신을 쥐어짜고 죽음의 고통을 겪던 바로 그 순간 만인이 주님을 비난하고 멸시하던 저주의 굴레 안에서 주님의 대속의 사활 대속의 은혜가 우편 강도에게 도달했는데, 이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을 초월하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함으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을 영접하였고 천국만을 소망하다가 숨을 거두었으니, 우편 강도는 위대한 순교적 차원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록이 다른 두 성경에서의 단일 계시는, 두 강도는 바로 원죄로 말미암아 극악무도한 강도처럼 살다가 십자가라는 저주의 심판으로 영벌된 택자를 뜻하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죽어가면서 대속하러 오신 주님을 몰라보고 도리어 멸시까지 했던 장본인이며. 이런 죄인을 위하여 무죄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 그리고 이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이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며 주님을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끝까지 천국 소망으로 주님과 동행하였으니, 극악한 죄인이 전적 은혜로 중생되어 이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서 기꺼이 자기 전부를 다 바쳐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인생을 마감하는 건설구원 마지막 최고 절정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단일 개별 계시
모든 성경은 단일 계시이지만 각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각도와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두 강도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첫 순간을 기록해주셨고 누가복음에서는 태도가 바뀐 모습만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성경의 전체 기록을 최소화하면서도 각각 다른 순간을 적으며 하나의 뜻을 다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내)
이런 기록의 분리와 단순화를 성경의 기록 착오로 보고 오해를 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참고로 안내를 추가한다면
개별 계시
예수님을 목격한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같은 사건인데도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내용이 질문하신 예수님과 함께 양쪽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분명히 둘 다 욕을 하고 끝이 났고, 누가복음에서는 왼편 강도만 욕을 했고, 우편 강도는 영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한 내용을 가지고 두 성경이 충돌이 일어나는가?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한 성경입니다. 주님이 유대인들이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 바로 그 혈통이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임을 기록하고 동시에 동정녀로 탄생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참된 메시야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멸시와 핍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두 강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영멸받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모르고 나를 구원하러 온 메시야를 멸시하고 죽인 이렇게까지 어리석고 극악한 유대인을 계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으니 바로 이 분이 유대인을 구원하러 오신 참된 메시야요, 왕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성 철학으로 유명한 헬라인을 향한 성경입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을 대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나 메시야라는 극적인 관점으로 설명하지 아니하고 보다 객관적 순서적 논리적 기록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우편 강도에 대한 기록은 분명히 마태복음보다는 객관적인 사실기록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역사책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수록 인간 예수가 어떻게 참된 메시야가 되시는지를 더욱 흠 없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일 계시
우편, 왼편 강도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님을 비방했고 (마태복음) 그러나 그런 비방과 비난을 당했는데도 주님의 한 없는 대속의 사랑을 접하고 우편 강도가 회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그 회개란 우편 강도의 턱걸이 기본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마귀가 심신을 쥐어짜고 죽음의 고통을 겪던 바로 그 순간 만인이 주님을 비난하고 멸시하던 저주의 굴레 안에서 주님의 대속의 사활 대속의 은혜가 우편 강도에게 도달했는데, 이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을 초월하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함으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을 영접하였고 천국만을 소망하다가 숨을 거두었으니, 우편 강도는 위대한 순교적 차원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록이 다른 두 성경에서의 단일 계시는, 두 강도는 바로 원죄로 말미암아 극악무도한 강도처럼 살다가 십자가라는 저주의 심판으로 영벌된 택자를 뜻하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죽어가면서 대속하러 오신 주님을 몰라보고 도리어 멸시까지 했던 장본인이며. 이런 죄인을 위하여 무죄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 그리고 이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이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며 주님을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끝까지 천국 소망으로 주님과 동행하였으니, 극악한 죄인이 전적 은혜로 중생되어 이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서 기꺼이 자기 전부를 다 바쳐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인생을 마감하는 건설구원 마지막 최고 절정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