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14, 장난으로 12명의 부하를 죽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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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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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7 09:28
사무엘하 2:12~16에 아브넬은 요압에게 12명씩 병사를 내어 서로 머리를 잡고 서로 상대방 옆구리를 찔러 죽이도록 장난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는 14절 말씀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성경에 ‘장난’이라는 표현은 세 번 나옵니다. 두 번은 긍정적인 표현인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천년 왕국의 평화로운 한 모습으로 기록했습니다. 장난이란, 일반적으로는 아이들이 심심할 때 놀이로 하는 것이고, 성경 기록에도 그렇듯이 평화롭고 한가한 모습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삼하 2장 14절은 ‘장난’이라는 표현을 하기가 어려운 때와 장소였고 상황이었습니다. 나라가 둘로 갈라져 내전 중이고, 양쪽의 군대가 대치 중인 상황에서, 군사를 거느린 대장이 부하들의 목숨이 걸린 전쟁을 두고 ‘장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분명히 잘못된 표현입니다.
전쟁에서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욕도 하고 오만 말을 할 수 있지만, 해당 본문에서 아브넬이 사용한 표현은 그런 의도나 목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넬의 말실수인지, 평소 인식이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상황에서 그런 표현이 나온 것과 후에 아브넬의 죽음을 보면 이날 이렇게 표현한 아브넬의 인식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날의 싸움으로 아브넬은 원치 않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이게 되고, 그 원한 때문에 결국 요압의 손에 죽게 됩니다.
아브넬에 대한 다윗의 판단은 요압보다 의롭고 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유언하면서 한 말이니까 다윗은 실제 그렇게 판단한 것이지만, ‘요압보다’ 의롭고 선하다고 했으니까 상대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아브넬은 평생을 사울에게 속해서 사울과 함께했고 다윗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다윗에게 오지 않고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권세를 잡고 있다가, 뒤에 가서 입지가 곤란한 지경이 되니까 다윗에게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만났고, 표면적으로 유다 지파만 다스리고 있던 다윗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에게 돌리기로 약속하고 돌아가던 중에 뒤늦게 전장에서 돌아온,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한을 품고 있던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삼하2:14의 아브넬이 ‘장난’이라고 표현한 그 전투가 원인이 되어 다윗에게 소속하여 충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성공하지 못하고 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속과 입장이 얼마나 중요하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인식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내용을 살피고 답변을 기록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삼하 2장 14절은 ‘장난’이라는 표현을 하기가 어려운 때와 장소였고 상황이었습니다. 나라가 둘로 갈라져 내전 중이고, 양쪽의 군대가 대치 중인 상황에서, 군사를 거느린 대장이 부하들의 목숨이 걸린 전쟁을 두고 ‘장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분명히 잘못된 표현입니다.
전쟁에서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욕도 하고 오만 말을 할 수 있지만, 해당 본문에서 아브넬이 사용한 표현은 그런 의도나 목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넬의 말실수인지, 평소 인식이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상황에서 그런 표현이 나온 것과 후에 아브넬의 죽음을 보면 이날 이렇게 표현한 아브넬의 인식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날의 싸움으로 아브넬은 원치 않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이게 되고, 그 원한 때문에 결국 요압의 손에 죽게 됩니다.
아브넬에 대한 다윗의 판단은 요압보다 의롭고 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유언하면서 한 말이니까 다윗은 실제 그렇게 판단한 것이지만, ‘요압보다’ 의롭고 선하다고 했으니까 상대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아브넬은 평생을 사울에게 속해서 사울과 함께했고 다윗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다윗에게 오지 않고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권세를 잡고 있다가, 뒤에 가서 입지가 곤란한 지경이 되니까 다윗에게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만났고, 표면적으로 유다 지파만 다스리고 있던 다윗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에게 돌리기로 약속하고 돌아가던 중에 뒤늦게 전장에서 돌아온,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한을 품고 있던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삼하2:14의 아브넬이 ‘장난’이라고 표현한 그 전투가 원인이 되어 다윗에게 소속하여 충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성공하지 못하고 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속과 입장이 얼마나 중요하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인식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내용을 살피고 답변을 기록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상황을 전반적으로 두루 살펴 본 1차 답변에 더하여, 이 번에는 현장 상황만 두고 조금 좁은 눈을 더해 봅니다.
* 대규모 전투 상황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 다윗과 사울 아들측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서로 충분히 준비한 상태였고 전쟁에 대한 의지도 군사력도 만반으로 준비한 듯 보입니다. 이기는 쪽도 많이 죽어야 하는데 양측은 12지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혹시 한 쪽이 준비나 의지가 부족한데 마지 못해 나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양쪽의 전체 군인이 한꺼번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보다 골리앗처럼 대장끼리 1대 1로 해결 보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요압과 아브넬은 서로가 잘 압니다. 문제는 부하들입니다. 부하들의 실력과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
* 12명 대표의 의미
이스라엘은 12라는 숫자를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양측에 가장 용감하여 목숨을 내놓을 사람 12명을 뽑아 100% 무조건 죽는 방법에 나가라고 해본다면 양측은 서로의 의지와 준비와 전체 군인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도 있고, 이기기 위해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인은 이기고 지고 살고 죽고를 떠나 명령 떨어 지면 무조건 몸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전쟁은 더욱 그렇습니다. 수만 명씩 맞붙는다 해도 대상 12장을 보면 이미 다윗 쪽이 20만 30만을 헤아릴 때입니다. 양측의 가장 중요한 전투며 오랫 동안 준비한 전장에서 12명을 뽑아 무조건 죽는 일을 지시할 때 그들의 자세, 그들의 모습, 그들의 장렬한 최후라는 것은 수도 없는 불필요한 죽음을 줄일 수 있는 희생입니다.
* 눅14:31
몸과 몸이 부딪혀야 승패를 파악하는 군대도 있고,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고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 지혜로운 왕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딪혀 보지 않고는 판단할 수가 없고 그리고 세월 속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면 그 때는 맞붙는 수밖에 없습니다. 삼하 2장의 전쟁은 서로가 피하려 했고 서로가 살피려 했으나 사울을 잇는 신앙의 계통과 다윗으로 바뀌는 노선을 두고 최근 총공회 교단의 공회들 중에 부산공회2처럼 칼 외에 길이 없다고 나서는데 부공3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어 보이면 할 수 없이 부딪혀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측의 대장 아브넬이 부산공회2처럼 그렇게까지는 미련하지 않기 때문에 12명을 대표로 일단 시험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수만 명의 대군이 맞붙어도 내가 이길 수 있고 피할 수 있고 혹 살 수 있다는 소망이 있어야 전투에 임하는 법인데 서로 머리카락을 잡고 동시에 옆구리를 찌르는 12명이란 양측이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살기 위해 전쟁에 나온 것이 아니고 원수와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 것이 순교며 하늘의 무한한 영광이라는 이스라엘 군대의 순수함이 확실하다면 다윗 하나로 골리앗과 원수 전부를 무찌르는 일이 됩니다. 이는 무모해 보이고 잔인해 보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전쟁을 피할 수 없고, 교회의 건설에 제단 위에 한 목숨을 올릴 때 모리아의 이삭이나 골리앗을 향한 다윗은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명령에 내가 해야 할 사명이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자기를 아낌 없이 바치는 순교, 헌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 결과적으로
양쪽이 12명씩을 뽑을 수 있었고, 그들은 허트러짐 없이 상대의 머리를 잡았고, 신호와 함께 꼭 같이 서로가 자기를 죽였습니다. 한 쪽이 흐트러졌다면 일시에 전열이 무너졌을 것인데 사울의 잔존 세력은 아직도 옛사람의 독기로 뭉쳐 있었습니다. 12명은 자기의 사명을 다했지만 양측 대장이 볼 때는 수만 명이 더 죽어 나간다 해도, 한 쪽은 사울의 신앙 계통을 지켜 내야 한다는 사명감은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또 요압도 다윗의 신앙 노선으로 새출발하는 것에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가 붙어야 하고 수없이 죽어 나가야 합니다. 결과를 가지고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해야 합니다. 대장 한 사람의 오판에 이런 큰 불행이 따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넬이 인간적으로는 자기 왕 사울의 계보를 잇겠다고 최선을 다하고 그 밑에 군사가 그렇게 따른 것은 훌륭하지만 노선 자체가 틀렸으니 이들은 이겨도 지고 져도 지는 전쟁을 한 것입니다.
* 장난이라 한 것은
먼저 표현을 했다 해도 '장난'이란 참 민망한 일입니다. 또 그 표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맞받은 요압도 그렇게 보입니다.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주인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했지만 사람 죽이는 것이 장난 삼듯 했습니다. 다윗도 평생에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늘 한 생명을 아꼈고 혹 오판했을 때는 엎드려 회개하고 돌아 섰습니다. 내친 김에 휘두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짐승을 먹을 수 있으나 필요하여 먹는 것과 우습게 장난 삼아 맛으로 멋으로 휘둘러 잡고 함부러 찢어 먹는 것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둘다 출물꾼 신세를 벗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전장에서 양측의 대장이 약하게 보이면 휘하 모든 부하를 위태롭게 합니다. 대장부터 제 목숨을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가장 아끼지만 제 자식을 내보내는 심정으로 12명을 던지는 일도 태연한 척해야 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그릇이 되어야 대장 노릇을 합니다. 양측이 가장 아끼면서도 가장 용맹하여 허트러짐이 없을 12명을 선발했을 터인데 막상 뽑으려 할 때 웅성거리든지 밀려서 나가며 운다든지 어깨가 축 늘어 진다면 이 전쟁은 해 볼 것도 없이 얼른 숨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될 때 양측의 제일 대장들이 목숨 걸고 일선을 내달린 것을 보면 이들이 '장난'이라 한 것은 그 날의 전쟁 상황만을 놓고 볼 때는 목회 현장의 목사가 제 가족을 아낌 없이 내던지는 자세로 보입니다. 비록 신앙의 노선을 잘못 선택해서 아깝게 된다 해도 목회자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앙의 걸음이 실은 그렇습니다.
* 대규모 전투 상황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 다윗과 사울 아들측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서로 충분히 준비한 상태였고 전쟁에 대한 의지도 군사력도 만반으로 준비한 듯 보입니다. 이기는 쪽도 많이 죽어야 하는데 양측은 12지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혹시 한 쪽이 준비나 의지가 부족한데 마지 못해 나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양쪽의 전체 군인이 한꺼번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보다 골리앗처럼 대장끼리 1대 1로 해결 보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요압과 아브넬은 서로가 잘 압니다. 문제는 부하들입니다. 부하들의 실력과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
* 12명 대표의 의미
이스라엘은 12라는 숫자를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양측에 가장 용감하여 목숨을 내놓을 사람 12명을 뽑아 100% 무조건 죽는 방법에 나가라고 해본다면 양측은 서로의 의지와 준비와 전체 군인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도 있고, 이기기 위해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인은 이기고 지고 살고 죽고를 떠나 명령 떨어 지면 무조건 몸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전쟁은 더욱 그렇습니다. 수만 명씩 맞붙는다 해도 대상 12장을 보면 이미 다윗 쪽이 20만 30만을 헤아릴 때입니다. 양측의 가장 중요한 전투며 오랫 동안 준비한 전장에서 12명을 뽑아 무조건 죽는 일을 지시할 때 그들의 자세, 그들의 모습, 그들의 장렬한 최후라는 것은 수도 없는 불필요한 죽음을 줄일 수 있는 희생입니다.
* 눅14:31
몸과 몸이 부딪혀야 승패를 파악하는 군대도 있고,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고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 지혜로운 왕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딪혀 보지 않고는 판단할 수가 없고 그리고 세월 속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면 그 때는 맞붙는 수밖에 없습니다. 삼하 2장의 전쟁은 서로가 피하려 했고 서로가 살피려 했으나 사울을 잇는 신앙의 계통과 다윗으로 바뀌는 노선을 두고 최근 총공회 교단의 공회들 중에 부산공회2처럼 칼 외에 길이 없다고 나서는데 부공3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어 보이면 할 수 없이 부딪혀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측의 대장 아브넬이 부산공회2처럼 그렇게까지는 미련하지 않기 때문에 12명을 대표로 일단 시험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수만 명의 대군이 맞붙어도 내가 이길 수 있고 피할 수 있고 혹 살 수 있다는 소망이 있어야 전투에 임하는 법인데 서로 머리카락을 잡고 동시에 옆구리를 찌르는 12명이란 양측이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살기 위해 전쟁에 나온 것이 아니고 원수와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 것이 순교며 하늘의 무한한 영광이라는 이스라엘 군대의 순수함이 확실하다면 다윗 하나로 골리앗과 원수 전부를 무찌르는 일이 됩니다. 이는 무모해 보이고 잔인해 보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전쟁을 피할 수 없고, 교회의 건설에 제단 위에 한 목숨을 올릴 때 모리아의 이삭이나 골리앗을 향한 다윗은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명령에 내가 해야 할 사명이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자기를 아낌 없이 바치는 순교, 헌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 결과적으로
양쪽이 12명씩을 뽑을 수 있었고, 그들은 허트러짐 없이 상대의 머리를 잡았고, 신호와 함께 꼭 같이 서로가 자기를 죽였습니다. 한 쪽이 흐트러졌다면 일시에 전열이 무너졌을 것인데 사울의 잔존 세력은 아직도 옛사람의 독기로 뭉쳐 있었습니다. 12명은 자기의 사명을 다했지만 양측 대장이 볼 때는 수만 명이 더 죽어 나간다 해도, 한 쪽은 사울의 신앙 계통을 지켜 내야 한다는 사명감은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또 요압도 다윗의 신앙 노선으로 새출발하는 것에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가 붙어야 하고 수없이 죽어 나가야 합니다. 결과를 가지고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해야 합니다. 대장 한 사람의 오판에 이런 큰 불행이 따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넬이 인간적으로는 자기 왕 사울의 계보를 잇겠다고 최선을 다하고 그 밑에 군사가 그렇게 따른 것은 훌륭하지만 노선 자체가 틀렸으니 이들은 이겨도 지고 져도 지는 전쟁을 한 것입니다.
* 장난이라 한 것은
먼저 표현을 했다 해도 '장난'이란 참 민망한 일입니다. 또 그 표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맞받은 요압도 그렇게 보입니다.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주인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했지만 사람 죽이는 것이 장난 삼듯 했습니다. 다윗도 평생에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늘 한 생명을 아꼈고 혹 오판했을 때는 엎드려 회개하고 돌아 섰습니다. 내친 김에 휘두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짐승을 먹을 수 있으나 필요하여 먹는 것과 우습게 장난 삼아 맛으로 멋으로 휘둘러 잡고 함부러 찢어 먹는 것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둘다 출물꾼 신세를 벗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전장에서 양측의 대장이 약하게 보이면 휘하 모든 부하를 위태롭게 합니다. 대장부터 제 목숨을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가장 아끼지만 제 자식을 내보내는 심정으로 12명을 던지는 일도 태연한 척해야 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그릇이 되어야 대장 노릇을 합니다. 양측이 가장 아끼면서도 가장 용맹하여 허트러짐이 없을 12명을 선발했을 터인데 막상 뽑으려 할 때 웅성거리든지 밀려서 나가며 운다든지 어깨가 축 늘어 진다면 이 전쟁은 해 볼 것도 없이 얼른 숨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될 때 양측의 제일 대장들이 목숨 걸고 일선을 내달린 것을 보면 이들이 '장난'이라 한 것은 그 날의 전쟁 상황만을 놓고 볼 때는 목회 현장의 목사가 제 가족을 아낌 없이 내던지는 자세로 보입니다. 비록 신앙의 노선을 잘못 선택해서 아깝게 된다 해도 목회자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앙의 걸음이 실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