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단어의 뜻에 주목해 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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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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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00:00
지옥 갈 죄인이 천국으로 가게 되는 기본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행위에 상관 없이 전적 하나님 은혜로 주시고 우리는 받기만 합니다.
만일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전적 은혜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어떤 힘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일반 신학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의 정확한 의미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뜻인데
과거 신앙이 어릴 때에는 마음의 수고를 제외하고 육체의 수고를 위주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와 교훈이 발전한 오늘 기준에서 과거 이 표현을 다시 한번 살핀다면
몸이 움직인 수고는 수고이고, 마음이 움직인 정신 노동은 수고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즉, 구원론에 있어
일반적으로
'행위'라고 할 때의 표현은 '몸의 활동'을 말하고
'믿음'이라고 할 때는 '몸은 전혀 수고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 실행하는 것은 아주 수고로운 것이니 사람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 말이고
마음이 '믿습니다.' 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니 이것은 수고가 아니라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행위를 잘 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고
기독교는 천주교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전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깨달았는데
천주교에서 개혁해 나오던 그 당시는 이 정도의 깨달음이라도 아주 굉장한 것이었으니
기독교의 깨달음은 앞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면에서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과거 천주교의 잘못된 점을 알았다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재출발의 발판을 잡았던 것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행위가 선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틀린 말이고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 표현에서 정확한 면은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믿음' 속에 들어 있는 '전적 은혜'라는 면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는데
천주교 천년 암흑에서 탈출하는 루터 칼빈은 천주교에서 벗어나는 사명을 맡았기 때문이고
이후 교회는 천주교의 행위 구원에서 벗어난 다음 '행위'는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인지를
바로 연구했더라면 현대 교회는 지난 5백년 간 그렇게 머물고 지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구원론 관련 설명에서
'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의 '믿음'은
몸의 수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수고한 것도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는 상관이 없고
지옥 갈 죄인이 천국 가게 되는 구원이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수고라는 것은
마음으로 믿으려 노력한 그 마음의 수고까지도 상관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 구원은... 택함으로 된다'고 한 것도
지옥 갈 죄인이 천국을 가게 되는 영의 중생이라는 것은
전적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렇게 중생 시키기로 택한 그 사람만 그렇게 중생되는 것이지
우리 몸은 노력지 않고 우리 마음이 믿는 수고를 하면 해결이 되는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아이가 뱃속에서 석달만에 낙태했을 때...'라고 설명한 것은
사람의 일반적 구원 얻는 외형은 앞서 믿는 사람의 전도로 뒤 따르는 사람이 믿게 되는데
만일 이 방법만 구원 얻는 길로 열어놓으셨다면 세례요한이나 야곱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모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 부모를 통해 뱃속 아이가 복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반드시 귀에다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가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고백을 해야 구원을 받는가?'
주로 일반 교회들이 죄 회개와 고백과 세례를 무조건 획일적으로만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으나 이방민족으로서 구원받은 경우가 있듯이
일반적으로는 도를 전달 받고 회개를 하고 고백을 하게 되며 세례를 베푸는 순서로 나가나
꼭 그런 모습이 외형을 통해 밟아나가는 것만은 아니라
어떤 때는 2-3가지 단계가 겹쳐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사람 성격상 주변 여건상 고백을 하지 않고 눈빛으로도 인정하고 나갈 수 있으니
만일 고백이라는 단어를 꼭 국어사전적으로만 고집한다면 벙어리의 구원은 어찌 되겠는가?
좀 폭넓게 그리고 여러 면으로 살펴보면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말씀도 다 맞는 말씀이고
그 말씀의 적용에 있어 실질적인 면이나 각 사람의 다른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다른 면을
고려하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질문하셨으나
신학적으로 굉장히 민감하고
동시에 루터 칼빈 이후 무조건 반복되어 내려왔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표현에서
'믿음'과 '행위'를 몸의 행위와 마음의 믿음으로만 그렇게 단정한다면 단정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5백년 신학의 답보가 바로 건설구원이라는 표현에서 해결되는 점을
아시게 될 듯 합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행위에 상관 없이 전적 하나님 은혜로 주시고 우리는 받기만 합니다.
만일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전적 은혜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어떤 힘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일반 신학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의 정확한 의미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뜻인데
과거 신앙이 어릴 때에는 마음의 수고를 제외하고 육체의 수고를 위주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와 교훈이 발전한 오늘 기준에서 과거 이 표현을 다시 한번 살핀다면
몸이 움직인 수고는 수고이고, 마음이 움직인 정신 노동은 수고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즉, 구원론에 있어
일반적으로
'행위'라고 할 때의 표현은 '몸의 활동'을 말하고
'믿음'이라고 할 때는 '몸은 전혀 수고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 실행하는 것은 아주 수고로운 것이니 사람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 말이고
마음이 '믿습니다.' 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니 이것은 수고가 아니라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행위를 잘 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고
기독교는 천주교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전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깨달았는데
천주교에서 개혁해 나오던 그 당시는 이 정도의 깨달음이라도 아주 굉장한 것이었으니
기독교의 깨달음은 앞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면에서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과거 천주교의 잘못된 점을 알았다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재출발의 발판을 잡았던 것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행위가 선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틀린 말이고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 표현에서 정확한 면은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믿음' 속에 들어 있는 '전적 은혜'라는 면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는데
천주교 천년 암흑에서 탈출하는 루터 칼빈은 천주교에서 벗어나는 사명을 맡았기 때문이고
이후 교회는 천주교의 행위 구원에서 벗어난 다음 '행위'는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인지를
바로 연구했더라면 현대 교회는 지난 5백년 간 그렇게 머물고 지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구원론 관련 설명에서
'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의 '믿음'은
몸의 수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수고한 것도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는 상관이 없고
지옥 갈 죄인이 천국 가게 되는 구원이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수고라는 것은
마음으로 믿으려 노력한 그 마음의 수고까지도 상관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 구원은... 택함으로 된다'고 한 것도
지옥 갈 죄인이 천국을 가게 되는 영의 중생이라는 것은
전적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렇게 중생 시키기로 택한 그 사람만 그렇게 중생되는 것이지
우리 몸은 노력지 않고 우리 마음이 믿는 수고를 하면 해결이 되는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아이가 뱃속에서 석달만에 낙태했을 때...'라고 설명한 것은
사람의 일반적 구원 얻는 외형은 앞서 믿는 사람의 전도로 뒤 따르는 사람이 믿게 되는데
만일 이 방법만 구원 얻는 길로 열어놓으셨다면 세례요한이나 야곱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모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 부모를 통해 뱃속 아이가 복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반드시 귀에다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가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고백을 해야 구원을 받는가?'
주로 일반 교회들이 죄 회개와 고백과 세례를 무조건 획일적으로만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으나 이방민족으로서 구원받은 경우가 있듯이
일반적으로는 도를 전달 받고 회개를 하고 고백을 하게 되며 세례를 베푸는 순서로 나가나
꼭 그런 모습이 외형을 통해 밟아나가는 것만은 아니라
어떤 때는 2-3가지 단계가 겹쳐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사람 성격상 주변 여건상 고백을 하지 않고 눈빛으로도 인정하고 나갈 수 있으니
만일 고백이라는 단어를 꼭 국어사전적으로만 고집한다면 벙어리의 구원은 어찌 되겠는가?
좀 폭넓게 그리고 여러 면으로 살펴보면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말씀도 다 맞는 말씀이고
그 말씀의 적용에 있어 실질적인 면이나 각 사람의 다른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다른 면을
고려하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질문하셨으나
신학적으로 굉장히 민감하고
동시에 루터 칼빈 이후 무조건 반복되어 내려왔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표현에서
'믿음'과 '행위'를 몸의 행위와 마음의 믿음으로만 그렇게 단정한다면 단정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5백년 신학의 답보가 바로 건설구원이라는 표현에서 해결되는 점을
아시게 될 듯 합니다.
87년 5월집회 말씀에서 질문(기본구원)
목사님!
87년 5월집회 설교록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드립니다.
백목사님께서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5월6일 새벽집회, 집회록 140페이지 중간), 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140페이지 중간), 택함으로 된다고(설교내용중에) 말씀하시고, 아이를 밴지 석달만에 낙태를 했을 때(5월5일 오전집회, 72페이지 중간), 아이가 택했으면 천국 갈 것이고, 택하지 안했으면 지옥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듣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아도 오직 택함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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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87년 5월집회 설교록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드립니다.
백목사님께서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5월6일 새벽집회, 집회록 140페이지 중간), 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140페이지 중간), 택함으로 된다고(설교내용중에) 말씀하시고, 아이를 밴지 석달만에 낙태를 했을 때(5월5일 오전집회, 72페이지 중간), 아이가 택했으면 천국 갈 것이고, 택하지 안했으면 지옥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듣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아도 오직 택함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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