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의 순응성 - 교리와 신앙 노선 면을 중심으로
| 분류 |
|---|
yilee
0
2010.03.18 00:00
1. 사람의 순응성
인간이 타고 난 본능을 벗어 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기본 바탕에는 '순응성'이라는 성향이 있습니다. 위로는 자기를 만든 절대자인 '신'에게 순응하고, 주변으로는 하나님이 조성해 주신 환경에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아 가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해 놓은 것은, 우선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지시할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아야만 하는 복이 되고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 지자 인간의 위에서 지시하던 그 하나님 자리에 '다른 신'인 악령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인간을 오늘까지 제 멋대로 움직여 왔습니다. '신'에게 순응하게 만들어 진 인간의 구조가 타락 전에는 하나님께 무조건 순응하며 사는 장점이 되었는데 타락 후부터는 이제 그 신이 누군지도 구별하지 않고 - 구별해도 알 수 없는 어두운 상태입니다만 - 오로지 위에서 시키면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오늘까지 순종하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모두 지옥행입니다.
순응성의 두 번째 역할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안에서 직접 인도하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모든 주변 여건을 움직이며 아담을 인도했고 아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했으니 그 상황을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은 아담의 현실이었는데 그 현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도하는 사랑이며 아담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동시에 아담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환경의 순응성을 준 것은 아담이 주변 상황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해 놓은 것인데,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가 제거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순응성 때문에 자기의 출생지와 성장지와 현재 환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아 환경의 소산물이 되고 있습니다.
2. 한 번 길을 열어 놓으면 그냥 가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6세기 경에 출발을 하는데 한 번 자리 잡고 출발하니까 천주교의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와 행태를 따라 천하의 기독교인들은 1천 년 동안 그 길에 말 없이 그냥 다 걸어 갔습니다. 마녀 사냥을 한다며 화형을 해도, 교황을 신으로 만들어도, 성경을 읽지 말라고 해도, 그 어떤 명령에도 잘 순응했고 또 주변에 모두 순응하는 사람들을 따라 그냥 생각 없이 부지런히 걸어 갔던 것입니다. 천주교 신학의 거봉이며 최고봉이라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석학도 그 걸음 속에 하나였지 벗어 나지 못했으므로 사실 학자라는 이름조차 붙일 것도 없습니다.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 되는 천주교 시절의 개혁가들이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면입니다. 어떻게 천하가 1천 년 세월을 그렇게 내려 왔는데 위에서 내려 오는 지시에 의문을 품고 주변 모든 이들이 걸어 가는 천주교 환경을 거스리며 오늘 우리에게 이런 생명의 길을 열어 줄 수가 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직접 여시고 그들이 가야 할 생명 길로 직접 끌어 가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 역시 모든 인간이 가진 순응성이라는 본능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인 이상 천주교 천하에서 천주교로부터 벗어 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열어 놓은 1500년대 당시 신앙 모습은 더도 말고 덜도 말아야 하는 완전 목표 도달 상황이었겠는가? 루터와 칼빈이 그들 당대에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으나, 그 다음 세대는 앞 선 세대가 닦아 놓은 기초 위에 1층을 쌓고 2층을 쌓아 올라 가야 하는 후 시대의 사명이라는 것이 있고 발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니 신앙도 살아 있는 신앙이라면 발전을 위한 걸음은 멈추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1500년대에 천주교로부터 신앙의 발전을 향해 걸어 갈 수 있도록 천주교 탈출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후세대는 5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당시의 천주교 탈출 상황만을 가지고 그들이 투쟁할 그들 세대의 신앙 전부를 삼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출애굽의 모세 역할을 했다면 그 후세대는 여호수아가 되어 가나안 입성의 걸음을 걸어야 하고 그 후세대는 가나안 안의 왕국 건설에 나선 다윗과 솔로몬의 걸음을 걸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정통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이들은 천주교로부터 탈출했던 5백 년 전의 당시 상황을 오늘의 전투 상황으로 알고 흥분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천주교로 되 돌아 가서 그 때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고, 그 것조차 아닌 이들은 성경이 정말이니 아니니 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까지 나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부가 돌고 돌아 한 번 주어 진 환경에 순응 또는 부적응으로 인해 생기는 기형과 파행과 불치병 상황만 보이고 있지, 발전적 걸음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이 개혁교회 5백 년 역사입니다. 그 모든 이유와 배경에는 인간의 순응성이 있습니다. 한 번 세팅이 되자 그 다음부터는 오로지 꼭 같은 그 말에 그 행동 뿐입니다. 이 신학교든 저 신학자든 이 교파든 저 교회든 그냥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번쯤, 왜 그래야 했는가?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의 실제는 어떤가? 이런 문제로 조금만 생각했다면 루터와 칼빈이 수고하여 인간으로서는 탈출할 수가 없던 중세 1천 년의 종말 이후 개혁교회는 가속도로 발전을 했어야 하는데, 오늘까지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습니다.
3. 모든 교리와 신앙 행적에서 다 마찬 가지입니다.
왜 영혼은 단일성인가? 실제 그런가? 그렇다면 근거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
배워도 제대로 배우려면 여러 면을 두루 살펴 보며 질문을 하고 따지고 살펴야 합니다. 또 그 교리의 그 신앙 노선을 제대로 수성을 하려면 그 주장의 반대 쪽 면을 더 열심히 관찰해서 공고히 해야 정말 든든해 집니다. 그런데 앵무새 말하듯 뜻은 모르고 외워서 옮기기만 하니 탄식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순응성만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성 생명의 발전성 구별성을 함께 주셨습니다. 과거를 습득하여 나가는 '지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과거 학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 가야 할 '지혜'의 속성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들 현실 안주로 끝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면을 좀 더 연구해 가려면 일반 신학에서 한도 없이 연구 되고 발표 된 일반 '종교개혁사'가 아니라 그 종교개혁사의 제대로 된 '종교개혁 배경사' '종교개혁 본질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 지고 방만해 질까 해서 이 정도에서 일단 그치겠습니다.
삭개오의 신앙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고, 또 그 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는 그 사람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는 식으로 행렬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니 제일 앞에 있는 예수님 하나만 골라 내어 죽이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앉히면 천주교 길에도 1천 년 동안 앞 사람이 먼저 걸어 간 걸음만 보고 뒤 사람은 또 따라 가는 식으로 그런 세월을 다 허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듣기는 했으나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 가서 예수님을 직접 목도 했던 것입니다.
신학서를 통해, 앞 서 간 수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소개 받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고, 삼분설과 이분설이 무엇인고, 인간의 영적 요소는 무엇인고? 이런 문제를 전해 듣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때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이런 생각과 노력이 있어야 '순응성'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구별의 '거룩성성'과 그 구별한 결과 알게 된 진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거머 쥐고 나갈 수 있는 '진실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 가지 속성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만 가지면 일방적 사람이 되어 다른 면들의 단점 때문에 신앙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사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기독교가 이렇게 이어 져 내려 온 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성자와 성녀 그리고 신학자와 유명한 경건자들이 계셨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진심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순응성은 뛰어 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 진 역사와 환경과 신앙의 노선이 다행스럽게도 루터와 칼빈의 수고로 종교개혁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명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만일 그들이 천주교 시대에 태어 났더라면? 천주교 1천 년 시기에 천주교 내에 공헌하고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남기고 간 이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에게는 주신 옳은 것을 붙드는 보수성 순응성도 생명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 인도하시는 길을 찾아 앞으로 나가는 발전성 생명의 성장성도 없어서는 아니 될 신앙의 필수 요소입니다. 바로 이 면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목회로 대성공한 분들이 많고 또 신학적으로나 개인의 경건 면에서 탁월한 종들이 일반 교단에 더러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노선은 마치 그 분들을 외면하는 듯 걸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점과 훌륭한 신앙 경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순응성에서 나오는 장점은 인정하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야 할 길로 가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분들과 대화할 시간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
:
: >> 윤영삼 님이 쓰신 내용 <<
: :
: : 질문의 전체적 방향 : 목사님이 보시기에, 또 지금까지 보아온 목회자나 신학자들중에
: : 정통신학(칼빈주의)에서 이분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분들이
: : 얼마나 되는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또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싶습니다.
: :
: :
: :
: : 신학교때, 청교도를 전공한(조나단에드워즈 전공) 교수님께 질문을 했었습니다.
: : `박형룡교수님 책에 영혼은 한쪽 성향의 경향성만 있는(의된 성향만, 아니면 죄된 성향만)
: : 일체성의 성질인데, 중생후 우리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있는 것은
: :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지 않느냐 하니? 그 교수님이 제가 지적한 부분이 옳다 하시면서,
: : 청교도신학자 윌리엄쉐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부분은 영혼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처럼 논리적모순인데, 진리이니, 영혼부분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부분이라 이야기 하신것 같습니다.
: :
: : 하지만 다른 교수님들이나,목회자들은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 : 학교에서 다른 칼빈주의 교수님께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 교수님은 제 나이를 물으면서
: : 몇살이냐며? 벌써 그것을 아느냐며? 조금 놀라셨지만, 그리스 헬라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 : 도통 제가 못알아 들을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그 질문을 한것은 이영인목사님
: : 의 글을 보고 질문을 한것이었습니다.)
: : 열린교회(김남준목사님)에 있는 목회자와(신학교 강사도 잠깐 하셨음) 인터넷에서 물어보았는데 영혼의 단일성에 대해, 영혼이 단일성이 아닌 복합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것 같았습니다. 일반정통교단 목회자들이과 이야기 해봐도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 : 없는것 같습니다.
: :
: : 제 생각으로는, 윌리엄쉐드는 정확하게 영혼의 성질을 파악했고, 또한 중생후 영혼안에
: :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을 이해했는것
: :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전공한 교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일반교단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려면
: : 윌리엄쉐드의 깨달음까지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삼분론으로 들어갈수 있는데, 영혼이
: : 단일성의 성질을 가졌다는 것도 인식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도 별로 없으니, 삼분론으로
: : 건설구원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 :
: : 개인적으론, 열린교회 정도의 목회자라면 이해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 :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 :
: : 삼분론이 백목사님 교리의 핵심중에 핵심이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인것으로
: : 알고있는데, 정통칼빈주의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려면
: : 윌리엄쉐드처럼 영혼의 일체성(단일성)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생후 영혼안에
: : 두 방향의 경향성(성질)이 있는것이 논리적 모순인것을 알아야 하는데, 영혼이 단일성
: : 성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이해도 잘 못하는것 같습니다.) 복합성의 경향성이 있다고
: : 그러니, 조금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 :
: :
: : 이영인 목사님은 일반교단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 : 고신이나 총신의 교수들은 어느정도 이분론의 모순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 물론 저도 목사님 글을 몰랐다면, 홈페이지를 몰랐다면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이 타고 난 본능을 벗어 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기본 바탕에는 '순응성'이라는 성향이 있습니다. 위로는 자기를 만든 절대자인 '신'에게 순응하고, 주변으로는 하나님이 조성해 주신 환경에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아 가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해 놓은 것은, 우선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지시할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아야만 하는 복이 되고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 지자 인간의 위에서 지시하던 그 하나님 자리에 '다른 신'인 악령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인간을 오늘까지 제 멋대로 움직여 왔습니다. '신'에게 순응하게 만들어 진 인간의 구조가 타락 전에는 하나님께 무조건 순응하며 사는 장점이 되었는데 타락 후부터는 이제 그 신이 누군지도 구별하지 않고 - 구별해도 알 수 없는 어두운 상태입니다만 - 오로지 위에서 시키면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오늘까지 순종하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모두 지옥행입니다.
순응성의 두 번째 역할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안에서 직접 인도하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모든 주변 여건을 움직이며 아담을 인도했고 아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했으니 그 상황을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은 아담의 현실이었는데 그 현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도하는 사랑이며 아담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동시에 아담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환경의 순응성을 준 것은 아담이 주변 상황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해 놓은 것인데,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가 제거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순응성 때문에 자기의 출생지와 성장지와 현재 환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아 환경의 소산물이 되고 있습니다.
2. 한 번 길을 열어 놓으면 그냥 가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6세기 경에 출발을 하는데 한 번 자리 잡고 출발하니까 천주교의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와 행태를 따라 천하의 기독교인들은 1천 년 동안 그 길에 말 없이 그냥 다 걸어 갔습니다. 마녀 사냥을 한다며 화형을 해도, 교황을 신으로 만들어도, 성경을 읽지 말라고 해도, 그 어떤 명령에도 잘 순응했고 또 주변에 모두 순응하는 사람들을 따라 그냥 생각 없이 부지런히 걸어 갔던 것입니다. 천주교 신학의 거봉이며 최고봉이라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석학도 그 걸음 속에 하나였지 벗어 나지 못했으므로 사실 학자라는 이름조차 붙일 것도 없습니다.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 되는 천주교 시절의 개혁가들이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면입니다. 어떻게 천하가 1천 년 세월을 그렇게 내려 왔는데 위에서 내려 오는 지시에 의문을 품고 주변 모든 이들이 걸어 가는 천주교 환경을 거스리며 오늘 우리에게 이런 생명의 길을 열어 줄 수가 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직접 여시고 그들이 가야 할 생명 길로 직접 끌어 가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 역시 모든 인간이 가진 순응성이라는 본능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인 이상 천주교 천하에서 천주교로부터 벗어 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열어 놓은 1500년대 당시 신앙 모습은 더도 말고 덜도 말아야 하는 완전 목표 도달 상황이었겠는가? 루터와 칼빈이 그들 당대에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으나, 그 다음 세대는 앞 선 세대가 닦아 놓은 기초 위에 1층을 쌓고 2층을 쌓아 올라 가야 하는 후 시대의 사명이라는 것이 있고 발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니 신앙도 살아 있는 신앙이라면 발전을 위한 걸음은 멈추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1500년대에 천주교로부터 신앙의 발전을 향해 걸어 갈 수 있도록 천주교 탈출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후세대는 5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당시의 천주교 탈출 상황만을 가지고 그들이 투쟁할 그들 세대의 신앙 전부를 삼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출애굽의 모세 역할을 했다면 그 후세대는 여호수아가 되어 가나안 입성의 걸음을 걸어야 하고 그 후세대는 가나안 안의 왕국 건설에 나선 다윗과 솔로몬의 걸음을 걸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정통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이들은 천주교로부터 탈출했던 5백 년 전의 당시 상황을 오늘의 전투 상황으로 알고 흥분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천주교로 되 돌아 가서 그 때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고, 그 것조차 아닌 이들은 성경이 정말이니 아니니 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까지 나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부가 돌고 돌아 한 번 주어 진 환경에 순응 또는 부적응으로 인해 생기는 기형과 파행과 불치병 상황만 보이고 있지, 발전적 걸음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이 개혁교회 5백 년 역사입니다. 그 모든 이유와 배경에는 인간의 순응성이 있습니다. 한 번 세팅이 되자 그 다음부터는 오로지 꼭 같은 그 말에 그 행동 뿐입니다. 이 신학교든 저 신학자든 이 교파든 저 교회든 그냥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번쯤, 왜 그래야 했는가?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의 실제는 어떤가? 이런 문제로 조금만 생각했다면 루터와 칼빈이 수고하여 인간으로서는 탈출할 수가 없던 중세 1천 년의 종말 이후 개혁교회는 가속도로 발전을 했어야 하는데, 오늘까지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습니다.
3. 모든 교리와 신앙 행적에서 다 마찬 가지입니다.
왜 영혼은 단일성인가? 실제 그런가? 그렇다면 근거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
배워도 제대로 배우려면 여러 면을 두루 살펴 보며 질문을 하고 따지고 살펴야 합니다. 또 그 교리의 그 신앙 노선을 제대로 수성을 하려면 그 주장의 반대 쪽 면을 더 열심히 관찰해서 공고히 해야 정말 든든해 집니다. 그런데 앵무새 말하듯 뜻은 모르고 외워서 옮기기만 하니 탄식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순응성만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성 생명의 발전성 구별성을 함께 주셨습니다. 과거를 습득하여 나가는 '지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과거 학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 가야 할 '지혜'의 속성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들 현실 안주로 끝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면을 좀 더 연구해 가려면 일반 신학에서 한도 없이 연구 되고 발표 된 일반 '종교개혁사'가 아니라 그 종교개혁사의 제대로 된 '종교개혁 배경사' '종교개혁 본질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 지고 방만해 질까 해서 이 정도에서 일단 그치겠습니다.
삭개오의 신앙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고, 또 그 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는 그 사람들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 가는 식으로 행렬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니 제일 앞에 있는 예수님 하나만 골라 내어 죽이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앉히면 천주교 길에도 1천 년 동안 앞 사람이 먼저 걸어 간 걸음만 보고 뒤 사람은 또 따라 가는 식으로 그런 세월을 다 허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듣기는 했으나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 가서 예수님을 직접 목도 했던 것입니다.
신학서를 통해, 앞 서 간 수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소개 받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고, 삼분설과 이분설이 무엇인고, 인간의 영적 요소는 무엇인고? 이런 문제를 전해 듣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때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이런 생각과 노력이 있어야 '순응성'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구별의 '거룩성성'과 그 구별한 결과 알게 된 진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거머 쥐고 나갈 수 있는 '진실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 가지 속성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만 가지면 일방적 사람이 되어 다른 면들의 단점 때문에 신앙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사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기독교가 이렇게 이어 져 내려 온 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성자와 성녀 그리고 신학자와 유명한 경건자들이 계셨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진심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순응성은 뛰어 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 진 역사와 환경과 신앙의 노선이 다행스럽게도 루터와 칼빈의 수고로 종교개혁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명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만일 그들이 천주교 시대에 태어 났더라면? 천주교 1천 년 시기에 천주교 내에 공헌하고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남기고 간 이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에게는 주신 옳은 것을 붙드는 보수성 순응성도 생명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 인도하시는 길을 찾아 앞으로 나가는 발전성 생명의 성장성도 없어서는 아니 될 신앙의 필수 요소입니다. 바로 이 면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목회로 대성공한 분들이 많고 또 신학적으로나 개인의 경건 면에서 탁월한 종들이 일반 교단에 더러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노선은 마치 그 분들을 외면하는 듯 걸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점과 훌륭한 신앙 경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순응성에서 나오는 장점은 인정하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야 할 길로 가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분들과 대화할 시간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
:
: >> 윤영삼 님이 쓰신 내용 <<
: :
: : 질문의 전체적 방향 : 목사님이 보시기에, 또 지금까지 보아온 목회자나 신학자들중에
: : 정통신학(칼빈주의)에서 이분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분들이
: : 얼마나 되는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또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싶습니다.
: :
: :
: :
: : 신학교때, 청교도를 전공한(조나단에드워즈 전공) 교수님께 질문을 했었습니다.
: : `박형룡교수님 책에 영혼은 한쪽 성향의 경향성만 있는(의된 성향만, 아니면 죄된 성향만)
: : 일체성의 성질인데, 중생후 우리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있는 것은
: :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지 않느냐 하니? 그 교수님이 제가 지적한 부분이 옳다 하시면서,
: : 청교도신학자 윌리엄쉐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부분은 영혼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처럼 논리적모순인데, 진리이니, 영혼부분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부분이라 이야기 하신것 같습니다.
: :
: : 하지만 다른 교수님들이나,목회자들은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 : 학교에서 다른 칼빈주의 교수님께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 교수님은 제 나이를 물으면서
: : 몇살이냐며? 벌써 그것을 아느냐며? 조금 놀라셨지만, 그리스 헬라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 : 도통 제가 못알아 들을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그 질문을 한것은 이영인목사님
: : 의 글을 보고 질문을 한것이었습니다.)
: : 열린교회(김남준목사님)에 있는 목회자와(신학교 강사도 잠깐 하셨음) 인터넷에서 물어보았는데 영혼의 단일성에 대해, 영혼이 단일성이 아닌 복합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것 같았습니다. 일반정통교단 목회자들이과 이야기 해봐도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 : 없는것 같습니다.
: :
: : 제 생각으로는, 윌리엄쉐드는 정확하게 영혼의 성질을 파악했고, 또한 중생후 영혼안에
: :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을 이해했는것
: :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전공한 교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일반교단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려면
: : 윌리엄쉐드의 깨달음까지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삼분론으로 들어갈수 있는데, 영혼이
: : 단일성의 성질을 가졌다는 것도 인식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도 별로 없으니, 삼분론으로
: : 건설구원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 :
: : 개인적으론, 열린교회 정도의 목회자라면 이해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 :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 :
: : 삼분론이 백목사님 교리의 핵심중에 핵심이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인것으로
: : 알고있는데, 정통칼빈주의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려면
: : 윌리엄쉐드처럼 영혼의 일체성(단일성)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생후 영혼안에
: : 두 방향의 경향성(성질)이 있는것이 논리적 모순인것을 알아야 하는데, 영혼이 단일성
: : 성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이해도 잘 못하는것 같습니다.) 복합성의 경향성이 있다고
: : 그러니, 조금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 :
: :
: : 이영인 목사님은 일반교단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 : 고신이나 총신의 교수들은 어느정도 이분론의 모순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 물론 저도 목사님 글을 몰랐다면, 홈페이지를 몰랐다면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분론의 모순을 일반교단은 어느정도 파악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의 전체적 방향 : 목사님이 보시기에, 또 지금까지 보아온 목회자나 신학자들중에
정통신학(칼빈주의)에서 이분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또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싶습니다.
신학교때, 청교도를 전공한(조나단에드워즈 전공) 교수님께 질문을 했었습니다.
`박형룡교수님 책에 영혼은 한쪽 성향의 경향성만 있는(의된 성향만, 아니면 죄된 성향만)
일체성의 성질인데, 중생후 우리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지 않느냐 하니? 그 교수님이 제가 지적한 부분이 옳다 하시면서,
청교도신학자 윌리엄쉐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부분은 영혼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처럼 논리적모순인데, 진리이니, 영혼부분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부분이라 이야기 하신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수님들이나,목회자들은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다른 칼빈주의 교수님께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 교수님은 제 나이를 물으면서
몇살이냐며? 벌써 그것을 아느냐며? 조금 놀라셨지만, 그리스 헬라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도통 제가 못알아 들을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그 질문을 한것은 이영인목사님
의 글을 보고 질문을 한것이었습니다.)
열린교회(김남준목사님)에 있는 목회자와(신학교 강사도 잠깐 하셨음) 인터넷에서 물어보았는데 영혼의 단일성에 대해, 영혼이 단일성이 아닌 복합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것 같았습니다. 일반정통교단 목회자들이과 이야기 해봐도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윌리엄쉐드는 정확하게 영혼의 성질을 파악했고, 또한 중생후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을 이해했는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전공한 교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일반교단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려면
윌리엄쉐드의 깨달음까지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삼분론으로 들어갈수 있는데, 영혼이
단일성의 성질을 가졌다는 것도 인식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도 별로 없으니, 삼분론으로
건설구원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열린교회 정도의 목회자라면 이해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삼분론이 백목사님 교리의 핵심중에 핵심이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인것으로
알고있는데, 정통칼빈주의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려면
윌리엄쉐드처럼 영혼의 일체성(단일성)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생후 영혼안에
두 방향의 경향성(성질)이 있는것이 논리적 모순인것을 알아야 하는데, 영혼이 단일성
성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이해도 잘 못하는것 같습니다.) 복합성의 경향성이 있다고
그러니, 조금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영인 목사님은 일반교단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고신이나 총신의 교수들은 어느정도 이분론의 모순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도 목사님 글을 몰랐다면, 홈페이지를 몰랐다면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질문의 전체적 방향 : 목사님이 보시기에, 또 지금까지 보아온 목회자나 신학자들중에
정통신학(칼빈주의)에서 이분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또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싶습니다.
신학교때, 청교도를 전공한(조나단에드워즈 전공) 교수님께 질문을 했었습니다.
`박형룡교수님 책에 영혼은 한쪽 성향의 경향성만 있는(의된 성향만, 아니면 죄된 성향만)
일체성의 성질인데, 중생후 우리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지 않느냐 하니? 그 교수님이 제가 지적한 부분이 옳다 하시면서,
청교도신학자 윌리엄쉐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부분은 영혼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처럼 논리적모순인데, 진리이니, 영혼부분의 삼위일체, 즉 영혼의 신비부분이라 이야기 하신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수님들이나,목회자들은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다른 칼빈주의 교수님께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 교수님은 제 나이를 물으면서
몇살이냐며? 벌써 그것을 아느냐며? 조금 놀라셨지만, 그리스 헬라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도통 제가 못알아 들을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그 질문을 한것은 이영인목사님
의 글을 보고 질문을 한것이었습니다.)
열린교회(김남준목사님)에 있는 목회자와(신학교 강사도 잠깐 하셨음) 인터넷에서 물어보았는데 영혼의 단일성에 대해, 영혼이 단일성이 아닌 복합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것 같았습니다. 일반정통교단 목회자들이과 이야기 해봐도 이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분들은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윌리엄쉐드는 정확하게 영혼의 성질을 파악했고, 또한 중생후 영혼안에
죄의 경향성과 의의 경향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을 이해했는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전공한 교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일반교단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려면
윌리엄쉐드의 깨달음까지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삼분론으로 들어갈수 있는데, 영혼이
단일성의 성질을 가졌다는 것도 인식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도 별로 없으니, 삼분론으로
건설구원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열린교회 정도의 목회자라면 이해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삼분론이 백목사님 교리의 핵심중에 핵심이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인것으로
알고있는데, 정통칼빈주의에서 삼분론으로 들어가고, 건설구원으로 들어가려면
윌리엄쉐드처럼 영혼의 일체성(단일성)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생후 영혼안에
두 방향의 경향성(성질)이 있는것이 논리적 모순인것을 알아야 하는데, 영혼이 단일성
성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이해도 잘 못하는것 같습니다.) 복합성의 경향성이 있다고
그러니, 조금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영인 목사님은 일반교단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고신이나 총신의 교수들은 어느정도 이분론의 모순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도 목사님 글을 몰랐다면, 홈페이지를 몰랐다면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