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한계

문의답변      


언어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한계

분류
yilee 0
원어는 단어와 문법 문제입니다. 어느 나라 단어든지 한 단어에 포함 되어 있는 뜻이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 된 단어의 뜻은 그 나라의 사전을 보고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사용 된 앞 뒤를 먼저 살핀 다음,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단어의 뜻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단어가 사용 된 세상 의미는 말 그대로 그냥 '참고'만 하는 것입니다.


원어의 한계는 이 게시판에서 언제 한 번 자세히 살펴 본 기억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 된 구약을 읽고 그 구약에 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들이 모국어로 읽은 히브리어 구약 원어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 키고 있었습니다.


한글에서 '버리다'라는 단어는 내게 필요 없어 밖으로 던지는 폐기라는 뜻인데, 조동사로 사용 되어 먹어 '버리다'가 되면 내 버릴 것이 없도록 내 속에 다 채웠다는 뜻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미운 녀석!'이라는 글의 '밉다'라는 단어는 '밉다'라는 뜻과 '이쁘다'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쁜 자식을 조금 예쁠 때는 '예쁘다'라고 하는데 너무 이쁘면 그 때는 '미워 죽겠어'라고 합니다.


원어는 많이 공부할 대상이 아니어서 알파벳과 기초 문법을 몇 시간 구경한 것이 전부지만 영어나 한글은 유심히 지켜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언어의 특수성 또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한 단어가 극단적으로 다른 두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경우는 흔한 일입니다.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어의 경우 정반대가 되는 정도까지는 연구해 보지 않았으나 한 단어가 아주 다른 뜻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그래도 모든 언어는 문맥으로 가면 오해가 적고 문장으로 가면 오해의 소지가 좀 있고 단어로 들어 가면 그 단어는 어디로 튈지 어떤 뜻일지 천차만별이 됩니다. 바로 이 면을 가지고 신학자는 원어를 강조하여 원어를 모르는 이들에게 지식을 자랑하고 뭔가 더 아는 것을 과시하나 그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의 단어에게 맡겼고 이후부터는 안 믿는 언어학자가 신학자를 누르게 됩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

: 감사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원어에서 성경의 정확한 해석을

: 찾으려는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제 안에도 그런 모습이 많습니다.

:

: 원어는 참고만 하고 성경으로만 나아가는

: 제가 되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원어 2. 동성애에 대해서
동성애에 대한 한신대신학교수의 글입니다.

원어적으로 성경은 동성애를 부정한다고 생각지 않는것 같습니다.


질문내용)

1.아래글의 원어적인 해석에 대한 평가(옳은지 그른지)해주셨으면 합니다.

2.동성애가 성경적으로 죄인지 알고싶습니다.

3. 원어에 대한 성경적 바른 시각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4. 아가서의 원어들도 적나란 성관계를 묘사한다던데? 어떻게 이해를 해야합니까?


(여기 홈페이지는 원어적인 해석을 참고만 하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도 그러한 신앙을 가졌는데, 아래글을 읽어보고 조금 시험이 들었습니다.)

아래 글의 원어적 해석이 타당한지도 알고싶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11)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

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

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

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

자들도 포함된다.(12)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

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

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 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

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

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

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

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

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

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

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

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

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

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

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

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

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

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

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

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

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

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

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

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

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

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

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

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

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

다.(15)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

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

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

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

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

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결론 -


끝내면서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

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

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

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

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

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

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

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

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

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

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

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

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

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

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

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

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

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다.”(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

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

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

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

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
쓰기 문의답변 초기목록
(1) 항목별 검색 주제별 | 가나다별 쉬운 문답
(2) 게시판 검색
(3) 통합 검색
번호제목이름날짜
  • 8462
    신학생
    2010.07.18일
  • 8461
    yilee
    2010.07.18일
  • 8460
    신학생
    2010.07.18일
  • 8459
    yilee
    2010.07.18일
  • 8458
    총공회
    2010.07.16금
  • 8457
    yilee
    2010.07.16금
  • 8456
    고신
    2010.07.14수
  • 8455
    yilee
    2010.07.15목
  • 8454
    교사
    2010.07.10토
  • 8453
    yilee
    2010.07.12월
  • 8452
    교사
    2010.07.13화
  • 8451
    산곡의 백합
    2010.07.12월
  • 8450
    yilee
    2010.07.12월
  • 8449
    신학
    2010.07.12월
  • 8448
    교인
    2010.07.12월
  • 8447
    bsh
    2010.07.09금
  • 8446
    yilee
    2010.07.09금
  • 8445
    일어나걸어라
    2010.07.08목
  • 8444
    산곡의 백합
    2010.07.09금
  • 8443
    yilee
    2010.07.08목
  • 8442
    교역자
    2010.07.07수
  • 8441
    help1
    2010.07.08목
  • 8440
    yilee
    2010.07.07수
  • 8439
    서울교인
    2010.07.07수
  • 8438
    yilee
    2010.07.07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