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불신앙의 학자와 신앙의 학자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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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불신앙의 학자와 신앙의 학자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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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0
박윤선 목사님의 남 다른 점은 학자로서 특별한 면은 거의 없습니다. 원래 타고 난 실력은 남 다른 면이 있으나 그 정도 학자는 역사에 많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학자인데도 살아 있는 신앙이 그 학문에 늘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있는 학자는 거의 다 신앙은 없고 학문만 남아 있어 세상적으로 볼 때는 모습이 좋으나 신앙 세계에서는 불신자 취급을 해야 하는 경우인데 박 목사님은 신자로서 성도로서 신앙인으로서 학자의 길을 걸어 갔으므로 특별한 분입니다.


풍유적 해석이라며 박 목사님을 비판한 서영일 목사님의 글은 이 분이 불신자이거나 불신자급 학자이므로 그가 비판하는 박윤선 목사님의 신앙 세계가 기독교라는 범위 내에서 대화를 하는 것인지 광화문 네거리 불신 사회 범위에서 대화를 하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원래 그 분이 공개적으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는 분입니다.


풍유적 해석을 하다가 착오 착각 잘못이 있다면 그 것만 잘못 된 것입니다. 풍유적 해석의 흐름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을 읽지 말자는 정도의 주장입니다. 불신자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냥 신앙이 어려서 그리 말한 정도로 좋게 보고 넘어 가고자 합니다.


>> 영종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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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박사학위 논문에서 나온 언급입니다. 앞에 설명한 내용과 이어 구체적으로 평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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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고리적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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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이 교회를 위하여 성경을 교훈적이고 실천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알레고리(풍유)적 해석을 자주하게 된 것 같다. 한 신약 교수의 말처럼,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성경의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려 하는 모든 신자들이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241) 박윤선은 부당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많은 경우에 한국 신자들이 “영해(靈解)라고 부르는 것의 유혹에 넘어갔다. 이러한 이중적인 그의 모습이 요 21 : 11의 해석에 드러난다.”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짖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우선 고래(古來)의 알레고리를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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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이른바 153이란 숫자는, 학자들의 영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데, 100은 이방인들, 50은 유대인들, 3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한다(Cyril of Alexandria). 그러나 153은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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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도 일종의 이적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심을 상징한다(Godet)"고 덧붙였다. 243) 그러나 그물 안의 고기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이 교회를 보호하심이 될 수 있겠는가? 바로 앞 절(21 : 4)에 대한 해석도 헹스텐버그를 인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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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새어 갈 때”란 말은 구원운동의 서광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바다 가에 서신 것”은, 그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세상 건너편에 계심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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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진 것에 대하여도 박윤선은 헹스텐버그를 인용하면서 영적으로 해석한다. 오른쪽은 이방을 상징하여, 제자들이 이방 땅으로 간다면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을 말한다고 한다.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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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가지고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하여 죄인이 성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요 2 : 10의 “가장 좋은 포도주”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될 구원의 즐거움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246)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고대 교부들이 한 것처럼 알레고리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나, 기름과 포도주가 “상한 심령에 대한 유일한 치료약”인 복음을 “비유로” 가리킨다고 하였다. 247) 잃은 은전의 비유에서, 은전을 잃은 여인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확신하였다.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 해석이 당연한 이유는 그 아래 ‘등불을 켜고’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등과 같다. 교회는 등불 같은 복음 진리를 믿음과 행함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마 5 : 16).” 248) 박윤선은 여인이 등불을 켠 것은 근동 지방의 집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많은 주석가들의 해석을 채택하지 않았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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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에서도 “영해”는 계속된다. 레위기의 음식 규례에 대한 해석에서 이렇게 쓴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표준을 여러 가지로 靈解한다. 굽이 갈라진 것은 성별을 비유하고, 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비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영해는 성경적 뒷받침이 없으니 추측에 불과하다.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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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는 이렇게 영해를 반대하면서도 영해와 거의 다름없는 결론을 내린다. “위의 두 가지 특징[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을 가진 짐승들은 육식동물이 아니므로 사납지 않고 정결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온유의 덕과 성결의 덕을 숭상하는 하나님 백성은 이런 것들을 먹을만하다. 251) 물에 있는 짐승들에 관하여도 이렇게 영해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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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학자들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각각 영해하여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재미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성경적 보장이 없는 한, 우리는 안심하고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고기는 그것들이 없는 고기보다 정결한 것으로 믿는다. 성경의 이 부분 말씀은 이런 자연물들 가운데서도 깨끗한 것을 취하여 하나님 백성에게 성결의 도를 가르친 것뿐이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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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위의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 그러면 “비늘 없는” 고기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보통으로는 뱀처럼 생긴 것으로서 죄악을 상징한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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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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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들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9절)은 주로 물에 뜨며, 또 물 밖에까지 뛰어 오를 때도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에 소망을 두는 飛躍하는 생활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도 없는 고기들은 주로 진탕 속에 구멍을 뚫고 거기서 살거나 혹은 물 밑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고, 그것들의 생활 습관 특징은 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창 3 : 14). 그것들은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좋아하는 불택자들을 상징한다.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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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17 : 8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해석하면서, “살구나무[원래는 아몬드나무]란 뜻은 깨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죽은 것이 아니고 깨어 있어서 때가 이르매 마침내 성취를 본다”고 하였다. 255) 민수기 28 : 5~7의 소제(素祭)에 대한 해석에서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간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노력과 순종을 비유하고, ‘기름’은 성령을 비유하고, ‘독주’는 그의 기쁜 순종을 비유한다.” 256) 또한 새 소제를 드릴 때에 떡 두 덩이를 드리는 것이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는데, 첫째로 떡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고운 가루로 드려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둘”이라는 숫자가 증인의 숫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257)

:

: 박윤선은 삼손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사건들 속에서도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는다. 사사기 15 : 4, 5에 여우의 꼬리를 묶고 횃불을 붙여 블레셋의 발을 태운 사건을 다루면서, 삼손이 혼자서 밭을 태울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한 데는 “수수께끼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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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로 번역된 그 짐승은 땅굴 속에 거하면서 썩은 것을 그 식물로 취한다. 그것은 부패한 성질의 소유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꼬리에 횃불이 매달린 것은 부패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심히 부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강퍅한 그대로 고집하다가 그 진노 가운데서 멸망한다. 그 짐승들의 꼬리를 맺어 놓고 거기에 횃불을 붙였으니, 그 짐승들이 발광하며 날뛰는 바람에 곡식 밭은 전부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회개할 소망이 없는 블레셋의 망동과 그 멸망을 비유하기도 한다.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이 취한 자 같이 발광하다가 망한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예언하였다.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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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이 이렇듯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자주 호소하는 약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몇몇 잘못된 해석 때문에 그의 신학적 체제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 스펄젼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박윤선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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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찰스 스펄젼은 때로 설교 본문을 의문스럽게 해석하고 있으나,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적인 메시지가 왜곡되지는 않았다. 259)

:

: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은 몇몇 특정한 구절들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60)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난해한 구절들에 접근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한다면, 261) 박윤선은 분명 이러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당연시하던 당시(1957년)의 한국교회에(오늘날에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알레고리의 위험성을 제기하고 경고한 사람이 바로 박윤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62) 그는 이렇게 썼다.

:

: (5)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諷諭濫用을 피하여야 한다. 갈 4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풍유로 해석한 일이 있으나 그것을 靈感된 풍유적 해석이니 만큼 특수 취급되야한다. 해석자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원칙상 풍유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해석가는 깊은 뜻을 찾아보려고 풍유해석을 방법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犯過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그 현재에서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모를 것을 둠이 합당하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만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교회에 준 까닭이다. 그 자신이 그 때에 찾지 못하는 깊은 뜻을 후대의 교회가 찾게도 될 것이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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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그도 다른 목사들처럼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오류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그 해악과 위험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알레고리화하려는 성향 때문에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되지 못하고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예화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레미야 18 : 13~16을 본문으로 한 다음의 설교 요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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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바논 산은 유대 북방에서 해발 1만 피트나 되는 높은 산인데 항상 눈으로 덮여 있다. “레바논”이란 말은 희다는 듯이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눈이 늘 덮여 있는 사실로써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는데, 눈이 레바논 반석을 떠나지 않는다 함은 충성을 비유한다. 레바논산에 쌓인 눈이 흘러 내려서 먼 곳에까지 찬물을 공급하므로 사람들을 시원케 한다. 충성은 남들은 시원케 해 주는 법이다. 잠 25:13에 말하기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아서 능히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하였다. 충성은 이렇게 귀하다. 충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명을 떠나지 않음이다.

: 1. 로마의 폼페이(Pompeii) 성은 갑자기 베수비우스 화산이 터지는 바람에 불구덩이에 파 묻혔다. 그것이 1000년 후에 발굴되었는데, 군대의 파수병이 그 초소를 떠나지 않고 무기를 들고 서서 죽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엇다. 그것이 충성이다.

: 2.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깊이 들어가 30년 동안 복음 전파에 충성하였는데, 마지막 2년 동안은 실종되었었다. 후에 발견된 대로 그는 꿇어앉아 기도하다 죽은 것이었다. 그것이 충성이다.

: 3. 다른 예화.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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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 Moises Silva,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in the Lifht of Current Issues, Grand Rapids : Zondervan, 1987, p. 64

: 242) 박윤선, [요한복음 주석], 서울 : 영음사, 1984, p. 605.

: 243) 위와 같음.

: 244) 위의 책, p. 603.

: 245) 위의 책, p. 604.

: 246) 위의 책, p. 103.

: 247) 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서울 : 영음사, 1985, p. 511.

: 248) 위의 책, p. 609.

: 249) I. H. Marshall, Luke :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 D. Guthrie ed., London : Inter-Varsity Press, 1970, p. 912 ; Lewis Foster, Luke : NIV Study Bible, Kenneth Barker ed., Grand Rapids : Zondervan, 1985, p. 1569.

: 250) 박윤선, [레위기·민수기·신명기 주석], 서울 : 영음사, 1985, p.441.

: 251) 위의 책, p. 442

: 252) 위의 책, p. 442

: 253) 위의책, p. 90. 그러나 사실상 뱀은 비늘이 있다.

: 254) 위의 책, pp. 91~92.

: 255) 위의 책, p. 249.

: 256) 위의 책, p. 306.

: 257) 위의 책, p. 310.

: 258) 박윤선, [여호수아·사사기·룻기 주석], 서울 : 영음사, 1976, p. 295.

: 259) Moises Silva,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 p. 93.

: 260) 위의 책, p. 92.

: 261) 위와 같음.

: 262)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서울 : 총신대출판부, 1986, p. 125f.

: 263) 박윤선, “성경해석 방법론,” <파수군> 62, 1957년 4-5월호, p.9.

: 264) 박윤선, “레바논의 눈을 본받자.” [영생의 원천]. 서울 : 영음사, 1968,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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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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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안에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 진다면, 그 모습이 세상 문학에서 은유라 하든 풍유라 하든 직유라 하든 그 무엇이라 하든 우리는 상관할 것이 없고 그냥 성경이 가르 치는 대로 성경을 깨닫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은 평생 그렇게 성경을 연구했고 전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 달리 하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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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회자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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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윤선 목사님조차 풍유적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후학들에게 비판 받는 모습이 자주 목격 됩니다. 신학에서 풍유적 해석은 설교자가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아전인수할 수 있으므로 아주 위험한 해석법처럼 되어 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성경 해석에서 풍유적 해석으로 문제가 된 부분은 없습니까? 풍유적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의 풍유적 해석
박윤선 목사님조차 풍유적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후학들에게 비판 받는 모습이 자주 목격 됩니다. 신학에서 풍유적 해석은 설교자가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아전인수할 수 있으므로 아주 위험한 해석법처럼 되어 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성경 해석에서 풍유적 해석으로 문제가 된 부분은 없습니까? 풍유적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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