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절대 전제인 '믿음'은 '피동' - 구원론 교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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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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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3 00:00
- 양해
교회의 가장 오래 된 논쟁 중 하나이며 여러 종류의 반론과 이론이 존재하는 분야여서 변증적으로 답변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곳 답변을 일부 인용하여 왜곡하며 죄 짓는 분들이 생길까 해서 여러 면을 고려한 것입니다. 질문자가 아니라 이 홈을 방문하는 여러 종류의 인물들과 사례를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 역사
우리는 죄로 죽을 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로 죽었으나 우리 속에 일부 숨을 쉬고 살아 남은 생명의 씨를 가졌던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죄로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앞의 경우를 설교록에서도 자주 예를 드는 1,600 년 전의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인 400 년 전의 '알미니우스'가 주장했고, 완전히 죽었다는 입장이 1,600 년 전의 '어기스틴'이며 그의 제자가 500 년 전의 '칼빈'입니다.
- 전제
우리는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게 되면 '중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것이 살아 나야 중생이지 죽을 뻔했거나 일부 목숨이 붙어 있는 부분이 있다면 소생 또는 구사일생이라고 하지 중생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이 없는 우리의 마음은 불신자 시절이니 영은 죽었고 몸과 마음은 오로지 악령에게 붙들려 죄로만 사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마음이 중생에 이르는 '믿음'을 순간이라도 가졌다면 악령에게 100 % 붙들린 마음이 악령 몰래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럴 가능성은 0 %입니다.
- 오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한 '행위'는 보통 육체의 노력으로 해석을 하는데 이 것이 국어사전만 봤지 성경을 성경으로 보지 못해서 생긴 언어의 표현 착각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중생 전의 우리 영은 완전 죽었습니다. 그 자리를 악령이 완전히 우리 심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이 영을 중생 시켰고, 영이 살아 난 후에야 영이 자기의 마음에 신앙을 심기 위해 건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마음은 어느 날 어디로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르고 믿을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반인의 일반 심리 상태를 기준으로 표현 된 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 관찰이지 원인적 과정의 전후 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함정
만일 이렇게 설명을 할 때 문법적으로 또는 성경 기록의 문장 표현 그대로를 제시하면서 오로지 성경대로만 믿고 다른 해석을 붙이지 말라는 분들이 마치 어느 선교사처럼 대들고 나오면? 그런 주장이 성경만을 가지고 오로지 성경에 붙들려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교묘한 이단에 빠질 위험한 발상입니다. 마태복음 4장의 귀신이 성경 근거 없이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좌로 치우쳐도 죽지만 우로 치우쳐도 죽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의 말이 언제 성경을 떠났습니까? 성경이 표현 하나 움직일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고 거듭 말씀하셨고, 하나님께 오른 손이 있고 눈이 있고 코도 있고 코로 숨도 쉰다고 했으니 이 성구들을 그리스 사람들이 읽었다면 자기들의 신화를 배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합니다. 이 홈의 이 주장을 배끼면서 성경을 성경으로 전체를 읽지 않고 성경의 한 부분만 갖다 대는 바람에 성경을 강하게 말할수록 성경에서 자꾸 멀어지는 또 하나의 부작용을 목도합니다.
- 결론
중생에 앞 서 먼저 필요한 것이 우리 마음의 믿는 작용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을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에 맞춘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넘어 갈 수 없는 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 역시 성경이니 이 말씀은 영이 죽었다가 살아 나면 영이 우리의 마음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음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마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건설구원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주변 사람이나 심지어 본인의 인지에서도 최초 목격 되는 바, 이 부분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내면은 영의 중생이므로 우리 자신도 주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믿는 행위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그 노력의 이면에는 영의 중생을 우리는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 보충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것은 기본구원에서 조차 '구원의 절대 전제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믿음'을 더 넓게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다 맞춰집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넓게 해석하면 마음의 작용인데, 그 믿음을 성경은 순종이라 했으니, 순종의 넓은 의미에는 주동에 피동을 말합니다. 성령이 영을 살리는 기본구원의 첫 과정에 '피동'이 되어졌다는 의미입니다.
>> 동천교인 님이 쓰신 내용 <<
:
: 갈라디아서에 보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강조를 합니다.
: 일반교단에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을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 것으로
: 대개 이해하는것 같습니다.
:
: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에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영접'
: 하는것도 포함이 되는것인가요?
:
: 본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교회의 가장 오래 된 논쟁 중 하나이며 여러 종류의 반론과 이론이 존재하는 분야여서 변증적으로 답변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곳 답변을 일부 인용하여 왜곡하며 죄 짓는 분들이 생길까 해서 여러 면을 고려한 것입니다. 질문자가 아니라 이 홈을 방문하는 여러 종류의 인물들과 사례를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 역사
우리는 죄로 죽을 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로 죽었으나 우리 속에 일부 숨을 쉬고 살아 남은 생명의 씨를 가졌던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죄로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앞의 경우를 설교록에서도 자주 예를 드는 1,600 년 전의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인 400 년 전의 '알미니우스'가 주장했고, 완전히 죽었다는 입장이 1,600 년 전의 '어기스틴'이며 그의 제자가 500 년 전의 '칼빈'입니다.
- 전제
우리는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게 되면 '중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것이 살아 나야 중생이지 죽을 뻔했거나 일부 목숨이 붙어 있는 부분이 있다면 소생 또는 구사일생이라고 하지 중생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이 없는 우리의 마음은 불신자 시절이니 영은 죽었고 몸과 마음은 오로지 악령에게 붙들려 죄로만 사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마음이 중생에 이르는 '믿음'을 순간이라도 가졌다면 악령에게 100 % 붙들린 마음이 악령 몰래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럴 가능성은 0 %입니다.
- 오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한 '행위'는 보통 육체의 노력으로 해석을 하는데 이 것이 국어사전만 봤지 성경을 성경으로 보지 못해서 생긴 언어의 표현 착각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중생 전의 우리 영은 완전 죽었습니다. 그 자리를 악령이 완전히 우리 심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이 영을 중생 시켰고, 영이 살아 난 후에야 영이 자기의 마음에 신앙을 심기 위해 건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마음은 어느 날 어디로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르고 믿을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반인의 일반 심리 상태를 기준으로 표현 된 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 관찰이지 원인적 과정의 전후 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함정
만일 이렇게 설명을 할 때 문법적으로 또는 성경 기록의 문장 표현 그대로를 제시하면서 오로지 성경대로만 믿고 다른 해석을 붙이지 말라는 분들이 마치 어느 선교사처럼 대들고 나오면? 그런 주장이 성경만을 가지고 오로지 성경에 붙들려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교묘한 이단에 빠질 위험한 발상입니다. 마태복음 4장의 귀신이 성경 근거 없이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좌로 치우쳐도 죽지만 우로 치우쳐도 죽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의 말이 언제 성경을 떠났습니까? 성경이 표현 하나 움직일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고 거듭 말씀하셨고, 하나님께 오른 손이 있고 눈이 있고 코도 있고 코로 숨도 쉰다고 했으니 이 성구들을 그리스 사람들이 읽었다면 자기들의 신화를 배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합니다. 이 홈의 이 주장을 배끼면서 성경을 성경으로 전체를 읽지 않고 성경의 한 부분만 갖다 대는 바람에 성경을 강하게 말할수록 성경에서 자꾸 멀어지는 또 하나의 부작용을 목도합니다.
- 결론
중생에 앞 서 먼저 필요한 것이 우리 마음의 믿는 작용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을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에 맞춘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넘어 갈 수 없는 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 역시 성경이니 이 말씀은 영이 죽었다가 살아 나면 영이 우리의 마음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음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마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건설구원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주변 사람이나 심지어 본인의 인지에서도 최초 목격 되는 바, 이 부분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내면은 영의 중생이므로 우리 자신도 주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믿는 행위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그 노력의 이면에는 영의 중생을 우리는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 보충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것은 기본구원에서 조차 '구원의 절대 전제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믿음'을 더 넓게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다 맞춰집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넓게 해석하면 마음의 작용인데, 그 믿음을 성경은 순종이라 했으니, 순종의 넓은 의미에는 주동에 피동을 말합니다. 성령이 영을 살리는 기본구원의 첫 과정에 '피동'이 되어졌다는 의미입니다.
>> 동천교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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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에 보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강조를 합니다.
: 일반교단에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을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 것으로
: 대개 이해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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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에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영접'
: 하는것도 포함이 되는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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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율법의 행위의 범위'
갈라디아서에 보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강조를 합니다.
일반교단에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을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 것으로
대개 이해하는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에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영접'
하는것도 포함이 되는것인가요?
본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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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에 보면 의롭게 되는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강조를 합니다.
일반교단에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을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하는 것으로
대개 이해하는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에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영접'
하는것도 포함이 되는것인가요?
본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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