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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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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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시점은?


 


▣ 성화는 생전, 영화는 사후로 구별 (출처:Pkist/문답)


성화는

'생전에' 나의 마음과 몸이 죄를 벗고 의로 사용되면서 깨끗하게 되어지는 분량을 말하고


영화는

성화 된 나의 마음과 몸이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니

영화는 성화의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성화에 포함 시키면 되는 개념입니다.


 




▣성화와 영화 모두 생전 (출처:25.9.27 토새 신풍말씀 중)


...하나님이 됐다라고 인정을 하시면 수고한 그 수고를 그 자리에서 인적 요소를 신적 요소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걸 영화라고 그럽니다.


원래 인적 요소를 내가 말씀과 성령에 붙들리려고 애를 쓰면 성화가 됩니다. 그 성화 과정에 그 성화 과정에 하나님이 됐다 할 때 영화. 그게 막바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중생의 첫 순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믿어가는 순간순간에 모든 심신의 요소와 기회와 활동을 성령으로 그 순간 그 순간 손대어 만든 것은 전부 다 성화를 거쳐 영화가 되어 집니다.


 


▶문답의 글처럼 영화는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신풍말씀은 성화처럼 영화도 사후가 아닌 생전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인지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담당 2025.10.13 12:48  
기본구원적으로 보면
중생한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점점 말씀으로 깨끗해집니다. 성화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부활 때 우리의 몸은 영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의 심신 내부에 살아 생전에 미리 진행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다른 분이 따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담당 4- 2025.10.14 21:07  
(교리적 배경과 근본적 이해)

이 설명은 80년대 후반의 많은 설교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설교를 구원의 순서에서 '성화'와 '영화'를 기존 교리의 차원으로만 우리가 대했는데 그것은 기본구원적으로 우리의 심신 자체의 변화 과정이고 그 과정은 무조건 자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매 현실의 건설구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능구원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설교록에서는 기본구원적 성화와 영화는 물론 건설구원적으로 매 현실에서 우리 내면의 성화와 영화를 세세히 설명은 했으나 건설구원의 이름 하에 '성화 > 영화'로 묶은 적은 없습니다. 이것을 이번 집회 설교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시를 해 봤습니다. 마치 목사님은 '성경법 외에 법은 없다'라고만 하고 가셨는데 사후 '명문법이 아니라 불문법, 규범법이 아니라 관습법'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처럼, '전원일치'라는 말씀만 했는데 사후 '개인의 신앙 자유, 각 1인의 공회 전체 운영권' 또 목사님은 '회장은 비상존'이라고만 하셨는데 사후 '교권형성의 배제, 교권직의 배제'라고 이름을 붙인 것과 같습니다.

성화와 영화를 목사님은 50년대 고려신학교에서 전통의 정통 신학에서 한번 들어 상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혼자 깨달아 가는 과정에 건설구원을 파악하게 되면서 기존의 거의 모든 교리에 대한 분석이 너무 깊어 지고 많아졌습니다. 성화와 영화를 두고는 기존 교리의 순서를 기억만 하고 애매하게 사용하되, 그 내용은 세세히 밝히고 가셨는데 이번에 제사장 설교 때문에 기본구원의 구원 순서에 나오는 '성화와 영화'의 시간적 순서를 건설구원의 매현실에서 발생하는 내부 변화에 그대로 적용해 봤습니다. 해보고 나니 이제야 이 면의 애매했던 공회 교리가 또 한번 의미 있게 정리된 듯합니다. 감회가 너무 뜻깊습니다.



* 기존 교리에서 발전적 변화가 있을 때
- 신앙의 '보수 성장' 원칙
생명은 이어지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뭐든 최대한 지켜 가려 합니다. 개역 성경과 신편 찬송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도 그런 원칙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만 지키면 불교나 천주교의 생명이 없는 石化입니다. 신앙의 만사에 해당하는 원칙입니다.


- 교리의 '보수 성장' 원칙

* 원칙
신앙의 다른 면은 조금 바꾼다고 그 자체가 이단 되지 않으나 교리는 단어의 토씨 하나로 이단 시비가 생길 수 있는데 여기에 휘말리면 끝없이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거나 주변에서 들어 오는 어린 신앙의 진입이 막힙니다. 신앙은 생명성이 있고 보수 성장이 본질이지만 이단 시비의 손실을 피하는 면도 동시에 고려합니다.


* 천년왕국 교리
전통적으로 천년왕국설은 재림을 중앙에 두고 재림 전에 주님이 오시면 전천년설, 그 뒤에 오시면 후천년설인데, 주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재림이라는 사건 또는 현상을 중심에 두다 보면 신앙의 기본 시각이 흐려지며 별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목사님은 주님을 중심에 두고 천년왕국이 앞에 있으면 전천년설이고 뒤에 있으면 후천년설이라고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공연히 신학계를 흔드는 장난처럼, 호기처럼, 괜한 소동처럼 보이지만 깊은 중심에는 기존 신학계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외침의 효과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 설명의 내용은 같으나 표현을 뒤집은 경우입니다. 미국과 한국은 자동차 핸들이 왼쪽이고 통행이 오른쪽인데 일본과 영국은 공연히 핸들이 오른쪽이고 통행은 왼쪽입니다. 엄청난 낭비가 있지만 영국과 일본은 대륙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내심을 깔고 만사에 돼지 뒷발톱처럼 역사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 사죄와 칭의
교리사의 사죄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한 죽음을 말하고, 칭의라는 것은 그 죽음 때문에 천국에 갈 때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사건의 순서, 우리의 구원 과정의 선후를 설명합니다. 죽어야 부활이 있는 것처럼 사죄 다음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말씀을 어긴 죄를 해결한 것은 사죄이고, 내 뜻대로 산 불의를 해결한 것은 칭의라 하여 '사죄'라는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 죄를 해결할 때 그 죄는 겉으로는 하나처럼 보여도 내부에는 2가지 죄가 있다 하여 죄를 분해합니다. 1차원이 2차원으로. 차량의 1차선 통행이 2차선 통행처럼, 한의원의 통짜배기 치료를 의학이 해부학적으로 접근하는 듯이 차원을 달리했습니다.

주일에 출근한 죄만 죄인가? 주일에 교회를 와서 예배 때 잠만 자고 가도 죄를 범한 것은 아닌데, 말씀의 죄를 더 깊이 들어가면 또는 말씀을 어긴 죄 옆에 내 멋대로 산 죄가 내용적으로 더 고등 죄이며 신앙이 자라 감에 따라 이 죄가 더 큰 죄입니다.

지금 공회들의 목사님들이 해인사 중들처럼 교회 돈으로 도박하고 술을 먹어서 문제인가? 그것은 어린 교인들의 현안이고 목회자들은 지금 공회를 저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인가, 그들의 인간적 자기 생각인가? 이렇게 죄를 놓고 생각을 하다 보니 기존 신학서의 죄가 너무 어리고 유치하고 미개발이 된 상태여서 죄는 말씀을 어긴 역사적 전통적 신학의 죄도 죄지만 자기 뜻대로 산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깨닫는 순간, 더 발전된 이 개념의 단어를 새로 만들지 않고 기존 교리가 사용하는 '불의'에서 찾아 사용했습니다. 국산 소나타 부속이 고장 났을 때 가끔 그랜저 부속과 같은 규격이 있으면 그대로 갖다 사용하듯 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죄, 의와 칭의, 의와 불의 등등의 단어는 기존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있는데 목사님은 차원이 다르게 새로 체계화를 시키며 자라 가는 과정에 새로운 부속, 새로운 건설 자재,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면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단어 중에서 선발해서 그 단어를 더 낫게 살려 나갑니다. 화친과 소망의 세계는 생략합니다.


* 단어, 표현, 조직, 운영에까지 보수 성장
사람도 외부에서 반주 전문가, 지휘 전문가, 주교 운영 전문가, 중고등부 특화 프로그램의 전문가를 선발해서 교회를 발전시키는 것이 성공한 교회들의 당연한 인사 원칙인데 목사님은 현재 교회를 다니는 교인 중에서 임명합니다. 공회의 목회자도 공회 교인 중에서 임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말이 되지 않는 직책을 맡게 되고 이런 모습은 아파트의 리모델링에 고물상 폐차장에서 주워온 것으로 땜방하듯 기이한 모습인데, 생명이 자라 가듯 한 가정도 교회도 공회도 만사 기본 인식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교리의 새로운 깨달음이 있으면 학자들은 역사에 없는 새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이 단어는 내가 역사의 첫 공로자라고 로고를, 브랜드를, 상표를 박아 버립니다. 제자 훈련, 중보 기도 등등의 수많은 유행어가 난무합니다. 교회의 조직을 아주 특별히, 운영을 아주 기교적으로, 예배당의 건물까지 만사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신앙은 기교에 있지 않고 내용이 든든하고 강하면 저절로 번져 나오는 생명력이 자생력으로 그리고 발전으로 방향을 잡을 때 좀 느린 듯해도 좋은 것입니다.


* 운영위원회, 노소원 심의
공회 교회들이 고신에서 나왔을 때 어떤 초보적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많아지게 되자 조직이 필요했고 이 순간 모든 단체는 단체화의 길을 걷습니다. 모두가 발전이라고 하는데 부패와 산화를 위해 노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공의회'라는 기존의 이름을 사용하며 3대 원리만 확정했고, 그리고 세월 속에 '공의회 > 공회'라고 하다가 해외 교회가 생기고 현재 해외 교회는 없다시피 하지만 소망의 교리 때문에 해외 교회를 염두에 두고 '총공회'라고 이름을 남기고 갔습니다. 어느덧 실시간의 연결이 너무 원활하여 지금은 공회라는 이름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보고 총공회 대신 공회가 입에 붙어 있습니다.

총공회에 평소 업무 처리가 필요하게 되자 총회장 체제가 되면 대통령제가 될 수 있어서 운영위원회를 마련합니다. 운영위는 백 목사님의 행정을 배우는 것이 첫째 기능이고 둘째는 사후에 지도자가 뚜렷하지 않을 때 공회적 운영을 위해 실무를 맡는 기관입니다. 운영위는 어떤 권한이라도 총공회가 모여 전원일치로 결의할 사안을 염두에 두고 실무 집행을 하는 곳이지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처리를 하는 고유 권한, 독자 권한, 또는 권력화가 되면 총공회 발족 3대 원리의 3번째 교권 배제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현재 부공2의 행정실은 갖은 통치 기술을 다 선보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공회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멸로 가는데도 모두가 지켜보니 동참죄가 되고, 아예 모르고 있으니 자다가 끝나는 셈입니다. 운영위를 목사님 가시기 1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노소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명칭 때문에 많은 날을, 대략 한 달 정도일까 고생을 하셨습니다. 미국의 상원 하원 명칭을 약간 참고한 것이 노소원입니다. 신앙이란 생명성으로 자라 가기 때문에 더 겪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 이제 막 출발한 사람의 단행과 헌신을 향후 늘 하나로 묶어서 가야 하는 날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묶는 밧줄을 심의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둘이 하나가 되라 했습니다. 이 단어조차 이해를 하지 못해서 맴돌고 맴돌다가 대구공회는 결국 저렇게 되었고 부산공회는 전원일치의 현장 사용법처럼 겨우 살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려 나가는 것도 현재 흉내만 내지 내용은 대구공회와 같고 교계화가 되어 있습니다.


* 대속 > 중생 > 성화 > 영화
지옥 갈 우리를 살려내고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과정을 두고 '예수님의 대속'이 먼저 진행이 되었고, 그 대속으로 우리의 죄가 씻어지면서 '중생'이 됩니다. 중생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믿으니 중생 된 것이냐' '중생이 되었으니 믿게 된 것이냐'라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전통의 교리는 구원의 순서를 '예수님의 대속 > 우리의 중생 > 이후 신앙생활 과정에 성화 > 천국에 들어가도록 완전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순서로 설명해 왔습니다. 영광스러운 천국의 영광의 성도로 살아 간다고 영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죄를 자꾸 분석하면서 죄의 종류와 차원을 '죄 > 죄, 불의 > 죄, 불의, 불목 > 죄, 불의, 불목, 절망'으로 분석해 놓고 가셨습니다. 죄를 이렇게 분석하다 보니 예수님의 대속도 당연히 '죄 - 사죄, 죄 불의 - 사죄 칭의, 죄 불의 불목 - 사죄 칭의 화친, 죄 불의 불목 절망 - 사죄 칭의 화친 소망'으로 그 해결의 4차원을 분석해 나갔습니다.

역사적으로 파묻혀 그렇지 전통의 교리도 원래 죄를 죄와 불의 개념으로 어느 정도 구분을 했습니다. 해서 안 될 죄를 해결한 것은 소극적 대속이라 했고, 해야 할 의로운 일은 적극적 대속이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교회도 구원도 신앙도 흐려지고 사회 활동이 전부인 줄 알고 오랜 세월 방황을 하던 교회가 일거리가 없고 뭔가 새로운 창작물이 없게 되자 '적극적 순종 = 능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으로 교계의 쟁점을 삼고 있지만 주일도 없는 학자들의 장난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죄를 분석했고, 대속을 분석했고, 중생 후 우리의 건설 구원에 요소와 행위 문제를 깊이 살폈습니다. 소망 교리와 함께 우리의 죄 불의 원수 절망의 문제를 매 현실 심신 안에서 사죄로 칭의로 화친으로 소망으로 살아가는 대내전, 그 내면의 자기 전쟁의 승패에 따라 기능과 실력과 기회가 나뉘어지는 것까지만 가르쳤습니다. 이기면 '성화'가 되고 지면 '둘째 사망'으로 버려진다고 가르치고 가셨습니다.

이번 8월 집회에 '제사장'을 신약의 공회 교리로 살펴봤습니다. 목사님이 가르쳐 놓은 성경 해석과 교리의 더 자세한 시각으로 제사장을 살펴보니 땅의 분깃과 기업을 완전히 배제했고 이는 신약의 우리 신앙 내면을 표시했습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사용하되 천국으로 가져가는 것은 세상 그대로는 저주의 것이고 불의한 것이라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앙으로 사용되어 본질 본성이 하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바뀌는 것은 80점 99점이면 우수해서 봐주는 것이 아니라 100%의 완전 상태라야 합니다. 이 부분의 설교는 81년으로 기억이 되는데 지금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주님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열린 믿음의 순종 길에는 우리를 완전으로 만들어 데려가는 기능 구원 면을 말씀했습니다. 당시는 주님이 역사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느냐, 옷만 갈아 입었지 그 실상의 주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느냐 라는 설교가 주였습니다.

평소 목사님의 설교가 인간의 노력은 아무리 완벽해도 하늘의 것이 될 수 없고, 인간이 충성하면 그 충성을 보시고 직접 완전의 것, 신적 요소의 것으로 변화를 시킨다는 설교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구원의 순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 중에 내가 잘 믿었고 내 속의 나지만 세상 것과 다른 신앙의 기능화 본능화가 된 자기 내면은 자기가 볼 때 성화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성화를 내가 볼 때 성화면 성화인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늘의 것으로 변화를 시켜 주실 수가 있어야 성화이고 그 성화된 것을 하늘의 것으로 바꿔 주시는 순간,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현재 우리가 의의 기능으로 만들고 그 만들어진 기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이미 그 기능은 이 땅 위에 있어도 이 세상을 초월해 버림으로 부활까지 갈 것도 없고 현실에서 바로 죽음을 초월한 영생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설명은 80년대 후반의 많은 설교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설교를 구원의 순서에서 '성화'와 '영화'를 기존 교리의 차원으로만 우리가 대했는데 그것은 기본구원적으로 우리의 심신 자체의 변화 과정이고 그 과정은 무조건 자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매 현실의 건설구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능구원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LA 2025.10.15 05:48  
의문이 해결되어 제가 이해한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종말도(요한계시록, 2020년 5월집회 후)
재림의 역사적 종말, 죽음의 개인적 종말, 매 순간의 종말이 있듯이

성화와 영화도(제사장과 레위인, 2025년 8월집회 후)
기본구원적 시각의 성화는 생전, 영화는 사후 완성
건설구원적 시각의 성화와 영화는 매 순간 완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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