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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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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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9 00:00
>> 공회성도 님이 쓰신 내용 <<
:
: 부산에서 신학공부하시다가 걸어서거창으로 들어가섰다고 설교하시는데 전쟁(6월25일)이후상황를 아시는데까지 상세하게 알고믿음에 확신를 갖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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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님의 기억력은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인데 자신에 대한 과거 기록은 어떤 때는 정확하고 어떤 때는 착오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공회 내부 학자들 중에서 설교록만 가지고 백 목사님의 전기를 재구성한 논문들 내용은 사실과 크게 다르게 기술 된 경우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설교록의 한 쪽만 가지고 인용을 했기 때문인데 인용하는 분들은 설교록을 근거했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자신하나 설교록 전체를 살펴 보면 백 목사님의 자기 기억에 착오나 실수가 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 됩니다.
이로 인해 이 홈은 이런 면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오랫동안 백 목사님이 일제 시기의 믿던 초기부터 적어 오던 개인 일지와 집안의 호적과 다니던 학교나 주변 관공서를 포함하여 백 목사님의 신앙 초기를 여러 면에서 기술하고 있는 거창지방 교회들의 관련 자료들을 다 모으고 분석하여 백 목사님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물론 설교록 자료도 최대한 전체를 살펴 보았습니다.
현재 /초기화면/백영희/인물사로본백영희/ 게시판에 시대 별로 자세히 적어 보았습니다. 다음 내용을 우선 살펴 봐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답변자가 누락한 중요 근거나 자료가 있다면 모든 자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
(거창의 교역자수양회)
이런 급박한 전황 속에서 주남선목사님은 거창 함양 합천 3개군 지방교역자들을 모아 7월19일 수요일부터 26일까지 한 주간 예정으로 21명 교역자 수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남선목사님과 백영희 남영환 배수윤 이종대 안태수 추교경 추국원 이백원 임상율 정우덕 이성옥 하종숙 조갑득 이재순 김상수 장익진 강진실 박기천 임동선 장병용전도사님들이었습니다. 이미 신사참배 환란을 통해 사선을 넘어본 사람은 주목사님과 백조사 뿐이었고 나머지는 첫 환란을 맞고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유다서와 함께 찬송가 20장을 외우도록 시켰습니다.
(거창 점령)
예정대로 7월 26일 새벽예배를 끝으로 수양회가 끝마치고 백조사는 40리길 위천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길은 바로 하루 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미군들이 엄청나게 피해를 입은 흔적이 아직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거창을 방어하는 미34연대 1150명은 거창 북쪽 경북 김천 쪽에서 인민군4사단이 공격하리라고 생각하고 방어망을 구축했으나 그들은 험로인 충북 금산과 전북의 전주를 통해 거창의 측면인 안의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안의는 바로 위천교회의 옆쪽입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로를 따라 신속하게 전진하는 인민군에게 미군은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안의에서 거창으로 들어오는 좁은 계곡을 따라 무수한 차량들이 파괴되어 굴러 떨어졌고 미군들의 시체가 늘려 있어 7월 여름의 푸른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에서 일본군을 이긴 미군들은 군기가 세고 장비가 좋아서 모두들 기대하였으나 막상 이곳 거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국군이 먼저 쫓겨 내려오면 미군은 그들 뒤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무수히 내려가고 나면 그 뒤를 따라 한국군이 내려왔고, 한국군의 퇴각하는 그 뒤를 따라 미군이 쫓겨내려 오면 마지막에는 인민군이 싹 쓸어버리며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거창 외곽을 5리나 벗어나면 씨악실 모퉁이가 나옵니다. 계곡이 아주 깊은 곳인데 이곳에는 몇백 대인지 모를 정도의 미군차량들이 파괴되어 있었고 전사한 미군의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앞서 침투한 인민군들이 지뢰를 설치해서 차량을 대량 파괴하였고 좁은 계곡 위의 산쪽에서 공격을 하여 전멸을 당한 것입니다. 참혹한 장면을 일일이 다 눈에 담아야 지나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남한을 북한에게 사정없이 붙여 놓았으니 미군들이 그렇게 강했지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진격하는 인민군을 거스르며)
7월 28일의 거창읍 점령작전을 두고 안의를 통해 거창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민군행렬들은 끝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오는 길을 향해서 반대로 걸어 올라가는 백조사는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인민군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20리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전도사,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성경 가방을 들고 대로를 걷고 있는 그를 지나가는 모든 인민군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후 2개월간 서울과 대전 전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맞붙은 전투마다 이기며 내려왔으니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그 독한 일본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는 미군들이 이렇게도 무참하게 당하다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치려고 매를 들지 않았다면 저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인민군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평양에서 오는 길입니다.’ ‘발이 괜찮습니까?’ ‘아, 예. 쌩쌩합니다.’ ‘차를 타고 왔습니까?’ ‘아니 걸어왔습니다.’ ‘발은 불어 켜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전투를 하며 내려오는데 발 하나 저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그래도 전투를 하다보면 막혀서 오랫동안 쉴 때도 있지 않던가요?’ ‘아뇨. 대전을 점령할 때 5시간밖에 안 걸렸습니다. 산 쪽에서 총소리 몇 번 나니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곧장 온 건가요?’ ‘하루 200리를 걸어왔습니다.’
백조사는 성경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한 교회를 진노하고 벌을 주시는 것이니 그들의 발에다 힘을 줘서 당나귀 힘같이 되고 도무지 쇠해지지도 않고 병도 나지 않게 한다는 말씀대로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범의 발과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남한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다! 한국교회가 버림을 받는구나! 하나님이 인민군과 함께 하며 남한을 치시는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남한과 함께 남한교회는 전멸하겠구나!’
3.점령지의 위천교회
(모여드는 교인들)
천지가 뒤바뀐 첫날이었습니다. 위천으로 들어가자 거리는 한산하고 가끔 만난 사람들은 모두들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대신 그동안 좌익에 속해 암약하던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세상이 되면 잡혀 죽을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갔고 위천지서 경찰들과 지서장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주목 받을 사람은 교회 전도사 백영희조사 한 사람 뿐입니다. 대로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집회 다녔던 주변 다른 지역 교인들이 눈에 띄입니다. ‘어짠 일입니까?’ ‘예, 조사님께 와야 살 것 같아서 모두들 이리 피난을 왔습니다.’ 위천교인들만 모인 것이 아니고 주변 여러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여 있었습니다.
교역자수양회를 한다고 교역자들이 교회를 비우던 7월 19일, 바로 다음날인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되었고 미군들도 인민군에게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두들 동요하고 일제히 피난길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위천교회 부근이나 함양과 안의지역 등에서 백조사에게 평소 말씀을 배우거나 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던 이들이 위천교회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교역자수양회가 끝나면 백조사님이 돌아올 터이니 그때까지 함께 모여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천에 온지 1년 동안 말씀으로 길렀고 환란을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를 위해 죽을 교인들로 만들었으며 국기배례사건을 통과하며 비록 작지만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불과 28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평소 7-80명 모인 예배당인데 이제는 3개 군에서 날마다 모여드는 교인들 때문에 4백여 명까지 모인 대형집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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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신학공부하시다가 걸어서거창으로 들어가섰다고 설교하시는데 전쟁(6월25일)이후상황를 아시는데까지 상세하게 알고믿음에 확신를 갖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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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님의 기억력은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인데 자신에 대한 과거 기록은 어떤 때는 정확하고 어떤 때는 착오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공회 내부 학자들 중에서 설교록만 가지고 백 목사님의 전기를 재구성한 논문들 내용은 사실과 크게 다르게 기술 된 경우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설교록의 한 쪽만 가지고 인용을 했기 때문인데 인용하는 분들은 설교록을 근거했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자신하나 설교록 전체를 살펴 보면 백 목사님의 자기 기억에 착오나 실수가 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 됩니다.
이로 인해 이 홈은 이런 면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오랫동안 백 목사님이 일제 시기의 믿던 초기부터 적어 오던 개인 일지와 집안의 호적과 다니던 학교나 주변 관공서를 포함하여 백 목사님의 신앙 초기를 여러 면에서 기술하고 있는 거창지방 교회들의 관련 자료들을 다 모으고 분석하여 백 목사님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물론 설교록 자료도 최대한 전체를 살펴 보았습니다.
현재 /초기화면/백영희/인물사로본백영희/ 게시판에 시대 별로 자세히 적어 보았습니다. 다음 내용을 우선 살펴 봐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답변자가 누락한 중요 근거나 자료가 있다면 모든 자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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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의 교역자수양회)
이런 급박한 전황 속에서 주남선목사님은 거창 함양 합천 3개군 지방교역자들을 모아 7월19일 수요일부터 26일까지 한 주간 예정으로 21명 교역자 수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남선목사님과 백영희 남영환 배수윤 이종대 안태수 추교경 추국원 이백원 임상율 정우덕 이성옥 하종숙 조갑득 이재순 김상수 장익진 강진실 박기천 임동선 장병용전도사님들이었습니다. 이미 신사참배 환란을 통해 사선을 넘어본 사람은 주목사님과 백조사 뿐이었고 나머지는 첫 환란을 맞고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유다서와 함께 찬송가 20장을 외우도록 시켰습니다.
(거창 점령)
예정대로 7월 26일 새벽예배를 끝으로 수양회가 끝마치고 백조사는 40리길 위천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길은 바로 하루 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미군들이 엄청나게 피해를 입은 흔적이 아직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거창을 방어하는 미34연대 1150명은 거창 북쪽 경북 김천 쪽에서 인민군4사단이 공격하리라고 생각하고 방어망을 구축했으나 그들은 험로인 충북 금산과 전북의 전주를 통해 거창의 측면인 안의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안의는 바로 위천교회의 옆쪽입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로를 따라 신속하게 전진하는 인민군에게 미군은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안의에서 거창으로 들어오는 좁은 계곡을 따라 무수한 차량들이 파괴되어 굴러 떨어졌고 미군들의 시체가 늘려 있어 7월 여름의 푸른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에서 일본군을 이긴 미군들은 군기가 세고 장비가 좋아서 모두들 기대하였으나 막상 이곳 거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국군이 먼저 쫓겨 내려오면 미군은 그들 뒤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무수히 내려가고 나면 그 뒤를 따라 한국군이 내려왔고, 한국군의 퇴각하는 그 뒤를 따라 미군이 쫓겨내려 오면 마지막에는 인민군이 싹 쓸어버리며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거창 외곽을 5리나 벗어나면 씨악실 모퉁이가 나옵니다. 계곡이 아주 깊은 곳인데 이곳에는 몇백 대인지 모를 정도의 미군차량들이 파괴되어 있었고 전사한 미군의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앞서 침투한 인민군들이 지뢰를 설치해서 차량을 대량 파괴하였고 좁은 계곡 위의 산쪽에서 공격을 하여 전멸을 당한 것입니다. 참혹한 장면을 일일이 다 눈에 담아야 지나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남한을 북한에게 사정없이 붙여 놓았으니 미군들이 그렇게 강했지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진격하는 인민군을 거스르며)
7월 28일의 거창읍 점령작전을 두고 안의를 통해 거창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민군행렬들은 끝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오는 길을 향해서 반대로 걸어 올라가는 백조사는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인민군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20리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전도사,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성경 가방을 들고 대로를 걷고 있는 그를 지나가는 모든 인민군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후 2개월간 서울과 대전 전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맞붙은 전투마다 이기며 내려왔으니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그 독한 일본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는 미군들이 이렇게도 무참하게 당하다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치려고 매를 들지 않았다면 저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인민군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평양에서 오는 길입니다.’ ‘발이 괜찮습니까?’ ‘아, 예. 쌩쌩합니다.’ ‘차를 타고 왔습니까?’ ‘아니 걸어왔습니다.’ ‘발은 불어 켜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전투를 하며 내려오는데 발 하나 저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그래도 전투를 하다보면 막혀서 오랫동안 쉴 때도 있지 않던가요?’ ‘아뇨. 대전을 점령할 때 5시간밖에 안 걸렸습니다. 산 쪽에서 총소리 몇 번 나니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곧장 온 건가요?’ ‘하루 200리를 걸어왔습니다.’
백조사는 성경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한 교회를 진노하고 벌을 주시는 것이니 그들의 발에다 힘을 줘서 당나귀 힘같이 되고 도무지 쇠해지지도 않고 병도 나지 않게 한다는 말씀대로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범의 발과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남한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다! 한국교회가 버림을 받는구나! 하나님이 인민군과 함께 하며 남한을 치시는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남한과 함께 남한교회는 전멸하겠구나!’
3.점령지의 위천교회
(모여드는 교인들)
천지가 뒤바뀐 첫날이었습니다. 위천으로 들어가자 거리는 한산하고 가끔 만난 사람들은 모두들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대신 그동안 좌익에 속해 암약하던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세상이 되면 잡혀 죽을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갔고 위천지서 경찰들과 지서장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주목 받을 사람은 교회 전도사 백영희조사 한 사람 뿐입니다. 대로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집회 다녔던 주변 다른 지역 교인들이 눈에 띄입니다. ‘어짠 일입니까?’ ‘예, 조사님께 와야 살 것 같아서 모두들 이리 피난을 왔습니다.’ 위천교인들만 모인 것이 아니고 주변 여러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여 있었습니다.
교역자수양회를 한다고 교역자들이 교회를 비우던 7월 19일, 바로 다음날인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되었고 미군들도 인민군에게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두들 동요하고 일제히 피난길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위천교회 부근이나 함양과 안의지역 등에서 백조사에게 평소 말씀을 배우거나 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던 이들이 위천교회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교역자수양회가 끝나면 백조사님이 돌아올 터이니 그때까지 함께 모여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천에 온지 1년 동안 말씀으로 길렀고 환란을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를 위해 죽을 교인들로 만들었으며 국기배례사건을 통과하며 비록 작지만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불과 28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평소 7-80명 모인 예배당인데 이제는 3개 군에서 날마다 모여드는 교인들 때문에 4백여 명까지 모인 대형집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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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희목사님6:25전쟁직후문의
부산에서 신학공부하시다가 걸어서거창으로 들어가섰다고 설교하시는데 전쟁(6월25일)이후상황를 아시는데까지 상세하게 알고믿음에 확신를 갖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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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신학공부하시다가 걸어서거창으로 들어가섰다고 설교하시는데 전쟁(6월25일)이후상황를 아시는데까지 상세하게 알고믿음에 확신를 갖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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