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압은 압살롬을 왜 죽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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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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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10:44
사무엘하 18장에 요압은 왜 압살롬을 죽였을까요?
요압은 왜 아히마아스에게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구스 사람에게 전하게 했을까요?
먼저 지난 답변을 참고로 올려드립니다.
질문 :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면
글쓴이 : 목회자
삼하18:9에서 압살롬이 공중에 달려버렸습니다. 10절에서 이를 본 병사는 12절에서 은 천개를 받는다 해도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고 합니다. 요압은 14절에서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심장을 찔러버립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고 이런 난리가 나도 다윗은 자기 아들과 부자지간만 온전하면 되는 처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형교회를 일으킨 종들이 자녀 처리를 잘못해 가지고 문제가 생기지 않은 교회들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괜히 시비를 건 그런 교회는 제외하겠습니다. 충현교회처럼 아들과 아버지가 언론과 전 교인들 앞에 대놓고 싸우는 경우에는 교인들과 그 교회 직원인 부목들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합니까?
원래 압살롬이 삼하 13장에서 형을 죽이며 왕에게 반역을 했는데 다윗은 14장에서 용서를 해주어 장차 이스라엘 전체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18장 7절과 8절에 보면 4만명 이상의 수많은 군인들을 죽게 만듭니다. 압살롬과 같은 경우가 생길 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합니까? 모든 교회의 문제요 제 문제요 총공회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질문합니다. 압살롬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한국교회에 만연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
답변 : 1. 가능한 최소 방어 2. 사건의 원인 주목
글쓴이 : yilee
1. 다윗의 시선
압살롬의 반역의 원인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과 하나님과의 단 둘 사이에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압살롬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조장하거나 구경한 것이 아니라 압살롬을 앞 세워 일을 전개하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압살롬도 불행한 일에 사용 되는 불쌍한 사람이니 그 불쌍함을 동정하는 것이지 압살롬이 혈육이거나 그의 죄에 남의 집 자식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두고 가슴 아픈 것이 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그로 인해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굴뚝에 채집망을 설치하거나 투망을 던지거나 낚시질을 하거나 총을 쏘거나 아니면 요압처럼 굴뚝에 창 3 개로 찔러 대면 해결이 될 것인가? 아궁이에 불을 땐 것은 다윗 자기였습니다. 만사의 원인, 만사의 전개 과정, 만사의 결과를 맺게 만드는 그 과거 그 중심 그 배후 그 내면을 보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입니다.
2. 대처의 최소 방어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은 일단 도망을 했습니다. 압살롬, 그리고 그에게 충동 된 불쌍한 군인들과 인민들을 향해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백성을 죽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피하는 것이요, 그들이 더 죄를 많이 짓지 않도록 진영을 갖추어 그들을 자제 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그들의 진격을 막는 일이 할 일입니다.
다윗을 공격하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을 향해 압살롬이 달려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최소 방어만 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렸을 때, 요압이 할 수 있는 일은 잡아다가 다윗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경험상 다윗이 또 방심할 수 있고 자녀라고 특혜를 주게 되면 압살롬은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참에 화근을 아주 확실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통계적으로 경험적으로 인지상정으로 본다면 당연히 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다윗으로 입은 은혜와 그 시대 전체가 다윗으로 인해 받은 복을 고려한다면 다윗이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로서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3. 구체적 질문을 두고
- 지도부의 가족 놀이
조선 왕들의 형제 싸움에 신하들 목만 날아 갑니다. 그들이 다 자기 가정의 남편이며 아버지며 귀하고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왕들의 싸움에 죽어 나가는 것은 백성들인데 정작 양 쪽의 두목인 왕권 다툼의 당사자들은 한 쪽이 이기고 나면 제 형제라고 자기를 맞선 두목은 살려 두고 그 밑에 수하들만 모조리 도륙을 내 버립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마음 속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두목끼리 나뉘어 패싸움을 했다면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진 쪽에 두목이 앞에 나서 자기를 죽이고 부하들은 죄가 없으니 잘 사용하거나 살려 돌아 가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두목이 죽으면 부하들은 따로 일을 저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밑에 것만 전부 죽이고 두목은 오히려 살려 놓는 일을 두고, 오늘 대형교회 싸움에서도 실컷 자기들끼리 패싸움을 해 놓고 마지막에 가족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니까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자 하고 그 동안 자기가 데리고 썼던 사람들만 배신자니 믿을 인간이 없다느니 무능하다니 이렇게 해 버리면 그 집단은 희망조차 없는 세상 쓰레기통입니다.
최소한 신앙 단체라면 제 가족보다 자기와 신앙으로 함께 하는 사람을 아끼고 하나 되는 것이 세상의 도리요 신앙에서는 필수 요소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구약이어서 오늘 신약의 눈으로 볼 때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압살롬 수괴를 다윗이 너그러이 봐 주라고 부탁한 것은 비리 불법 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는 육체의 이스라엘이므로 다윗의 잘못이 아니라 요압의 잘못입니다. 요압은 그 수고와 실력은 출중했으나 요압의 자기 위치와 다윗의 위상을 몰랐습니다.
오늘 신약은 어떻게 될까요? 원수든 불신자든 그 누구에게든 외부적으로 맞서 충돌하는 것은 항상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 은사기관에 대해서 비록 의무사항은 아니라 해도 그 가족까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의무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요압의 사례를 보고 신약의 대형교회 목회자의 혈육 가족들이 교회와 복음운동을 휘젓고 있는데도 구약식으로 지켜 보거나 도와 준다면 바로 그들이 그 혈육 가족들의 오판을 부추긴 죄를 져야 할 것입니다. 신약에라도 여전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조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전체 복음 운동에 문제가 생길 정도면, 하나님께서 주신 범위가 넘어 간다면 어느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홈은 좀 지나 치게 이런 면을 조심 시키는 이유는 상기 문제가 생길 때 적절하게 대처하는 이들이 보면 항상 성급히 과도하게 압살롬을 치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중하게 잘 지켜 보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복음 앞에 더 이상 안 되는 선이 있다면 그 선은 십계명과 같은 것입니다.
- 공회의 경우
공회의 경우는 백 목사님께서 생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타 교단의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질문 :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면
글쓴이 : 목회자
삼하18:9에서 압살롬이 공중에 달려버렸습니다. 10절에서 이를 본 병사는 12절에서 은 천개를 받는다 해도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고 합니다. 요압은 14절에서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심장을 찔러버립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고 이런 난리가 나도 다윗은 자기 아들과 부자지간만 온전하면 되는 처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형교회를 일으킨 종들이 자녀 처리를 잘못해 가지고 문제가 생기지 않은 교회들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괜히 시비를 건 그런 교회는 제외하겠습니다. 충현교회처럼 아들과 아버지가 언론과 전 교인들 앞에 대놓고 싸우는 경우에는 교인들과 그 교회 직원인 부목들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합니까?
원래 압살롬이 삼하 13장에서 형을 죽이며 왕에게 반역을 했는데 다윗은 14장에서 용서를 해주어 장차 이스라엘 전체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18장 7절과 8절에 보면 4만명 이상의 수많은 군인들을 죽게 만듭니다. 압살롬과 같은 경우가 생길 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합니까? 모든 교회의 문제요 제 문제요 총공회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질문합니다. 압살롬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한국교회에 만연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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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1. 가능한 최소 방어 2. 사건의 원인 주목
글쓴이 : yilee
1. 다윗의 시선
압살롬의 반역의 원인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과 하나님과의 단 둘 사이에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압살롬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조장하거나 구경한 것이 아니라 압살롬을 앞 세워 일을 전개하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압살롬도 불행한 일에 사용 되는 불쌍한 사람이니 그 불쌍함을 동정하는 것이지 압살롬이 혈육이거나 그의 죄에 남의 집 자식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두고 가슴 아픈 것이 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그로 인해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굴뚝에 채집망을 설치하거나 투망을 던지거나 낚시질을 하거나 총을 쏘거나 아니면 요압처럼 굴뚝에 창 3 개로 찔러 대면 해결이 될 것인가? 아궁이에 불을 땐 것은 다윗 자기였습니다. 만사의 원인, 만사의 전개 과정, 만사의 결과를 맺게 만드는 그 과거 그 중심 그 배후 그 내면을 보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입니다.
2. 대처의 최소 방어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은 일단 도망을 했습니다. 압살롬, 그리고 그에게 충동 된 불쌍한 군인들과 인민들을 향해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백성을 죽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피하는 것이요, 그들이 더 죄를 많이 짓지 않도록 진영을 갖추어 그들을 자제 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그들의 진격을 막는 일이 할 일입니다.
다윗을 공격하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을 향해 압살롬이 달려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최소 방어만 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렸을 때, 요압이 할 수 있는 일은 잡아다가 다윗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경험상 다윗이 또 방심할 수 있고 자녀라고 특혜를 주게 되면 압살롬은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참에 화근을 아주 확실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통계적으로 경험적으로 인지상정으로 본다면 당연히 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다윗으로 입은 은혜와 그 시대 전체가 다윗으로 인해 받은 복을 고려한다면 다윗이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로서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3. 구체적 질문을 두고
- 지도부의 가족 놀이
조선 왕들의 형제 싸움에 신하들 목만 날아 갑니다. 그들이 다 자기 가정의 남편이며 아버지며 귀하고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왕들의 싸움에 죽어 나가는 것은 백성들인데 정작 양 쪽의 두목인 왕권 다툼의 당사자들은 한 쪽이 이기고 나면 제 형제라고 자기를 맞선 두목은 살려 두고 그 밑에 수하들만 모조리 도륙을 내 버립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마음 속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두목끼리 나뉘어 패싸움을 했다면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진 쪽에 두목이 앞에 나서 자기를 죽이고 부하들은 죄가 없으니 잘 사용하거나 살려 돌아 가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두목이 죽으면 부하들은 따로 일을 저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밑에 것만 전부 죽이고 두목은 오히려 살려 놓는 일을 두고, 오늘 대형교회 싸움에서도 실컷 자기들끼리 패싸움을 해 놓고 마지막에 가족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니까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자 하고 그 동안 자기가 데리고 썼던 사람들만 배신자니 믿을 인간이 없다느니 무능하다니 이렇게 해 버리면 그 집단은 희망조차 없는 세상 쓰레기통입니다.
최소한 신앙 단체라면 제 가족보다 자기와 신앙으로 함께 하는 사람을 아끼고 하나 되는 것이 세상의 도리요 신앙에서는 필수 요소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구약이어서 오늘 신약의 눈으로 볼 때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압살롬 수괴를 다윗이 너그러이 봐 주라고 부탁한 것은 비리 불법 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는 육체의 이스라엘이므로 다윗의 잘못이 아니라 요압의 잘못입니다. 요압은 그 수고와 실력은 출중했으나 요압의 자기 위치와 다윗의 위상을 몰랐습니다.
오늘 신약은 어떻게 될까요? 원수든 불신자든 그 누구에게든 외부적으로 맞서 충돌하는 것은 항상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 은사기관에 대해서 비록 의무사항은 아니라 해도 그 가족까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의무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요압의 사례를 보고 신약의 대형교회 목회자의 혈육 가족들이 교회와 복음운동을 휘젓고 있는데도 구약식으로 지켜 보거나 도와 준다면 바로 그들이 그 혈육 가족들의 오판을 부추긴 죄를 져야 할 것입니다. 신약에라도 여전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조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전체 복음 운동에 문제가 생길 정도면, 하나님께서 주신 범위가 넘어 간다면 어느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홈은 좀 지나 치게 이런 면을 조심 시키는 이유는 상기 문제가 생길 때 적절하게 대처하는 이들이 보면 항상 성급히 과도하게 압살롬을 치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중하게 잘 지켜 보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복음 앞에 더 이상 안 되는 선이 있다면 그 선은 십계명과 같은 것입니다.
- 공회의 경우
공회의 경우는 백 목사님께서 생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타 교단의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 왜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말리고 구스 사람을 시켰을까?
아히마아스가 먼저 요압에게 승전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압은, 왕의 아들이 죽었으니 이 소식을 가지고는 상을 얻지 못할 것이니 다른 날에 전하라고 아히마아스를 말리면서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명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꼭 자기도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아히마아스는 연락병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승전했으니 소식은 전해야 되는데 왕의 아들이 죽었으니 기쁜 소식만은 아니고, 요압의 말처럼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을 아히마아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히마아스는 승전의 기쁜 소식은 자기가 전하고 싶었고,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나쁜 소식은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출발했지만 구스 사람을 앞질러 먼저 도착해서 승전 소식만 전하고 압살롬에 대한 것은 살짝 피해서 얼버무렸습니다.
아히마아스의 행위를 나쁘게 보면 약삭빠르게 볼 수도 있지만, 좋게 보면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다윗왕을 기쁘게 하고 싶은 복된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왕 소식을 전할 것 같으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좋고, 불행한 나쁜 소식은 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 아히마아스는 연락의 역할을 맡았을 뿐 선지자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아히마아스를 두고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입니다. 요압도 잘 아는 인물이고 신앙도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다윗이 도망갈 때 예루살렘의 상황을 살피고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남겨 둔 사람 중에 아히마아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구스 사람은 그냥 군인 중의 한 명으로 연락병입니다. 구스 사람에 비해서 아히마아스는 상대적으로 이름도 있고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압의 입장에서는, 전투가 끝났고 승리했으나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이 소식으로 다윗왕이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요압도 알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승전의 소식이 오히려 왕을 슬프게 하고 진노를 쌓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중이 있는 인물인 아히마아스보다는 그냥 일반 연락병인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게 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아히마아스가 자기도 꼭 가겠다고 하니 마지 못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보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먼저 요압에게 승전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압은, 왕의 아들이 죽었으니 이 소식을 가지고는 상을 얻지 못할 것이니 다른 날에 전하라고 아히마아스를 말리면서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명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꼭 자기도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아히마아스는 연락병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승전했으니 소식은 전해야 되는데 왕의 아들이 죽었으니 기쁜 소식만은 아니고, 요압의 말처럼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을 아히마아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히마아스는 승전의 기쁜 소식은 자기가 전하고 싶었고,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나쁜 소식은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출발했지만 구스 사람을 앞질러 먼저 도착해서 승전 소식만 전하고 압살롬에 대한 것은 살짝 피해서 얼버무렸습니다.
아히마아스의 행위를 나쁘게 보면 약삭빠르게 볼 수도 있지만, 좋게 보면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다윗왕을 기쁘게 하고 싶은 복된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왕 소식을 전할 것 같으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좋고, 불행한 나쁜 소식은 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 아히마아스는 연락의 역할을 맡았을 뿐 선지자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아히마아스를 두고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입니다. 요압도 잘 아는 인물이고 신앙도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다윗이 도망갈 때 예루살렘의 상황을 살피고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남겨 둔 사람 중에 아히마아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구스 사람은 그냥 군인 중의 한 명으로 연락병입니다. 구스 사람에 비해서 아히마아스는 상대적으로 이름도 있고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압의 입장에서는, 전투가 끝났고 승리했으나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이 소식으로 다윗왕이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요압도 알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승전의 소식이 오히려 왕을 슬프게 하고 진노를 쌓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중이 있는 인물인 아히마아스보다는 그냥 일반 연락병인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게 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아히마아스가 자기도 꼭 가겠다고 하니 마지 못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보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과 '요압'을 읽을 때는 항상 '자세'라는 색안경을 끼고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비교할 때 더 적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은 뒤의 자세를 보면 사울과 기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평생 최고의 충신이며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기본적으로 다윗에게 위치적으로 신분적으로 부하였지 내면의 최종 인격은 가는 길이 달랐고 세계가 서로 달랐습니다. 리브가의 배 속에 쌍둥이가 들어 있었으나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인 것처럼 서로가 평생을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압살롬이란 다윗 속에 잘못 된 다윗, 회개하지 않은 다윗, 옛사람 다윗, 잘라 내야 하는 암덩어리였습니다. 남들에게 압살롬은 다윗과 하나님 나라의 원수였으나 다윗에게 압살롬은 자기가 회개해서 바른 사람을 만들었어야 할 자기 내면이었습니다. 다윗과 한 편이 아닌 사람은 압살롬에 대해 오로지 쳐 죽일 원수로만 보였고, 다윗에게 압살롬은 그냥 둘 수는 없는데 자기의 잘못의 결과이며 그로 인해 영원한 불에 던져 버릴 생이 되었으니 압살롬의 행위는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죽여야 하나 압살롬이라는 인물, 그 인격, 그 인생, 그 신세라는 것은 다윗이 자기 몸을 도려야 하는 아픔이었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상대하는 자세를 보면 단순한 원수 중 하나였습니다. 이 것을 고쳐 회개 시켜 바르게 만들어야 할 애정도 집착도 생각도 없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과 압살롬의 군장 아마사를 죽일 때 보면 다윗은 이들의 머리가 잘못 되었으니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을 처형한 친구를 살려 구원해 보려는 일념과 같고, 요압은 그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막고 나서면 오로지 처치하는 업무만 집중했습니다. 구원의 같은 길에서 다윗은 구원의 생명 역사에 주력했고 요압은 구원의 역사에 길만 닦고 있었습니다. 이 후자는 구원 운동에 이용만 되지 자기 구원은 실패합니다. 함께 했으니 서로가 알기는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처리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다윗의 실력으로 요압의 그런 면을 이용할 수 있고 손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나 솔로몬은 요압을 봐 주며 품고 가다가는 배가 침몰할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구원의 제사장 계통입니다. 구스 사람은 성경에 전쟁에 능한 하나의 종업원입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고 그 소식이 전해 질 때 다윗의 상황을 잘 압니다. 알면서 압살롬을 죽여 버렸고 업무 처리로 끝을 냈습니다.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사나 아브넬을 죽였다 하여 다윗이 펄쩍 뛰고 난리를 냈으나 조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경우도 그러리라고 봤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요압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 운동을 알고, 그 위기를 알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회생한다는 것도 압니다. 다윗이 슬퍼 할 것도 압니다. 아히마아스는 전쟁에서 이꼈으니 다시 다윗으로 이어 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만 알렸습니다. 요압은 구스인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 되는 소식이 아니라 압살롬을 쳐 죽인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본심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비교할 때 더 적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은 뒤의 자세를 보면 사울과 기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평생 최고의 충신이며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기본적으로 다윗에게 위치적으로 신분적으로 부하였지 내면의 최종 인격은 가는 길이 달랐고 세계가 서로 달랐습니다. 리브가의 배 속에 쌍둥이가 들어 있었으나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인 것처럼 서로가 평생을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압살롬이란 다윗 속에 잘못 된 다윗, 회개하지 않은 다윗, 옛사람 다윗, 잘라 내야 하는 암덩어리였습니다. 남들에게 압살롬은 다윗과 하나님 나라의 원수였으나 다윗에게 압살롬은 자기가 회개해서 바른 사람을 만들었어야 할 자기 내면이었습니다. 다윗과 한 편이 아닌 사람은 압살롬에 대해 오로지 쳐 죽일 원수로만 보였고, 다윗에게 압살롬은 그냥 둘 수는 없는데 자기의 잘못의 결과이며 그로 인해 영원한 불에 던져 버릴 생이 되었으니 압살롬의 행위는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죽여야 하나 압살롬이라는 인물, 그 인격, 그 인생, 그 신세라는 것은 다윗이 자기 몸을 도려야 하는 아픔이었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상대하는 자세를 보면 단순한 원수 중 하나였습니다. 이 것을 고쳐 회개 시켜 바르게 만들어야 할 애정도 집착도 생각도 없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과 압살롬의 군장 아마사를 죽일 때 보면 다윗은 이들의 머리가 잘못 되었으니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을 처형한 친구를 살려 구원해 보려는 일념과 같고, 요압은 그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막고 나서면 오로지 처치하는 업무만 집중했습니다. 구원의 같은 길에서 다윗은 구원의 생명 역사에 주력했고 요압은 구원의 역사에 길만 닦고 있었습니다. 이 후자는 구원 운동에 이용만 되지 자기 구원은 실패합니다. 함께 했으니 서로가 알기는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처리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다윗의 실력으로 요압의 그런 면을 이용할 수 있고 손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나 솔로몬은 요압을 봐 주며 품고 가다가는 배가 침몰할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구원의 제사장 계통입니다. 구스 사람은 성경에 전쟁에 능한 하나의 종업원입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고 그 소식이 전해 질 때 다윗의 상황을 잘 압니다. 알면서 압살롬을 죽여 버렸고 업무 처리로 끝을 냈습니다.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사나 아브넬을 죽였다 하여 다윗이 펄쩍 뛰고 난리를 냈으나 조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경우도 그러리라고 봤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요압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 운동을 알고, 그 위기를 알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회생한다는 것도 압니다. 다윗이 슬퍼 할 것도 압니다. 아히마아스는 전쟁에서 이꼈으니 다시 다윗으로 이어 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만 알렸습니다. 요압은 구스인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 되는 소식이 아니라 압살롬을 쳐 죽인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본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