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가 신앙의 정화조통이어서 하필 그런 글이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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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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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7 00:00
1. 성경에 예수님의 언급이 없다는 논리
- 한신대와 논쟁할 때 상식
한신대는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근거로 삼아 말을 시작하면 그들에게 성경이 틀렸는지 옳은지를 먼저 살펴 보고 나서 대화를 시작하라고 돌려 보낼 일입니다. 그들과 성경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면 중과 성경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들과 한신대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전도할 대상이지 성경을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대화를 할 상대가 아닙니다.
- 성경의 최소 기록
요21:25에서 성경 기록은 최소한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교수는 성경에서 조선 반도가 있는지 한신대학과 그 교수 이름을 예수님이 언급했는지 먼저 찾아 보고 만일 성경에 없다면 그 교수는 이 세상에 없는 헛깨비이며 한신대와 조선 땅은 세상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 한신대를 조롱한다면
한신대와 그 교수는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믿지 않고 성경에는 틀린 곳이 많다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에 언급 되어 있지 않아서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이런 주장은 그들이 평소 주장한 대로 성경은 다 믿을 바가 안 된다고 말한 그 말과 서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이기는지 구경을 한 다음,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주장이 이기면 그 후에 성경으로 설명을 해 주면 되고 만일 성경이 틀렸다는 주장이 이기면 그들이 인정도 하지 않는 성경을 근거로 말하는데 우리가 대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2. 성경을 그대로 믿는 우리끼리 말한다면
이 대화의 시작은 그들이 했으나 그들은 중들과 같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이 대화에서 배제 시키고 이 대화를 우리 믿는 사람끼리 내부적으로 자체 토론의 주제로 삼아서 대화했으면 합니다.
- 성경은 최소한의 기록이므로
성경에 기록 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가르 친 적이 없다고 말하는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니 상대할 필요도 없는 말 장난이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해도 이미 구약과 신약의 롬1:27에서 가르 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적을 필요가 없어서 적지 않은 것입니다.
- 성경의 어떤 기록이든 다 예수님의 기록
보통 성경신학에서 성경을 모세 기록 다윗 기록 바울 기록이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신학자가 일반 교인에게 신학 지식을 자랑하는 데는 유리할지라도 일반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낮게 상대하게 만드는 위험이 너무 큽니다. 실은 신학자들도 어느 날 다 그런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세 오경이든 바울 서신이든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내용은 전부 예수님입니다. 요5:46 히10:7 등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했다고 적혔든 사도 바울이 말했다고 적혔든 예수님 소리 외에는 성경에 일점일획도 없습니다. 사복음이 아닌 곳에 기록 된 성구는 예수님이 하지 않은 말씀이며 예수님이 책임 지지 못할 말이니까 우리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것인가? 이런 소리는 불신자가 할 소리며 이런 소리는 세상 학문에서 입에 담을 소리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롬1:27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무슨 죄를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기록했는지는 별도의 이유가 있습니다. 4대강 반대 운동을 할 때는 성구를 근거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옹호할 때는 성경에 금지 된 기록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말을 반대로 하면 거의 다 진리가 될 정도입니다.
- 한신대의 관심과 전력
그건 그렇고, 그런 추악한 죄는 일반인들은 성경에서 읽은 기억은 있다 해도 생활 속에서 접촉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느 성구인지 기억조차 하기 어려운데, 한신대는 천국과 구원과 영생은 얼마나 그들 생활에서 거리가 먼지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믿지도 않는 정도이고, 그 대신 그런 괴악한 행동만 입에 달고 다니고 전공으로 삼고 전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안이든 주변에는 그런 죄가 가득하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멘 공장 노동자는 세멘이 어디에 묻든 묻는 것이고 그들은 생활 속에 늘 세멘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세멘에 대해서는 제법 전문 지식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대로 믿어 보려 하면 그런 죄는 참으로 거리가 멀고 그런 분들을 접촉한다는 것은 평생 어려울 정도인데 어떻게 그 주변에는 그런 행동이 그렇게 많은지? 환자를 치료하느라고 그런지, 아니면 그들의 토양이 그렇고 그들의 내부가 그렇고 그들의 생존 사활 문제인지 혼동할 정도입니다.
3. 원어의 경우
'남편'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려면, '남편'은 '남의 편'이니 내 편이 아닌 원수를 말하는 것이어서 부부가 아닌 옆 집 남자를 말한다고 논리를 세워 나가도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라 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귀신이 노리는 것은 유혹 시켜 성공하면 제일 좋고 실패를 해도 쓸 데 없는 말로 시간과 관심을 소비 시켰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성경의 '천국'은 '하늘'을 가리 키는 단어이니 구름 위에 저 하늘에 천국이 있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란 성경에 없다고 말하고, 성경의 '지옥'은 땅 밑에 있는 감옥이니 죽어서 가는 영계의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여호와증인의 논리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여호와증인은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끝없이 파헤치는데 그들의 논리 시작은 그 단어가 불신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성경에서 채용을 했다는 사실을 모른 척했으니 그들은 사기꾼입니다. 한신대가 원어의 단어를 짚고 나오면 같은 원리로 보시면 됩니다.
고전6:9 딤전1:10 두 성구에서는 그 단어가 이런 경우에도 사용 되고 저런 경우에도 사용 된다고 애매하게 빠져 나갈 여지가 있을지라도 롬1:27에서는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라고 기록하여 누가 누구를 상대하는 문제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 참고로
한신대 글은 읽는 순간부터 읽을수록 변증을 할수록 이미 그들의 귀신 놀음에 더 빠져 들어 가는 것이므로 최소한에 그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글을 접하지 않고 살 수가 없는 세대이므로 처음 몇 곳만 읽고 간단히 설명을 해 보았습니다.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가 양 새끼에게 꼬리를 들켰고 새끼 양이 꼬리를 보니까 아닌데 라고 말하면 이리는 꼬리만 보지 말고 내 앞 발을 만져 보고 나서 이야기 하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입 속에 머리를 넣어 보면 내가 먹는지 안 먹는지 보면 알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삼킵니다.
한신대는 성경을 부인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성경 장절을 제시하고 그 성경의 단어 하나에 담긴 뜻을 풀어서 설명하되 심지어 고대 언어체계와 당시의 문화 환경까지 제시한다는 것은 그 글에 담긴 모든 주장이 지금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의 발동이라고 보일 것 같습니다. 한신대 측과 대화는 한 가지로 모아 져야 합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
평양의 김 씨가 정말 하나님이냐?
박정희만 죽으면 이 땅은 가나안이 되느냐?
그들과 대화할 때 사용할 주제는 이런 것 하나에서 끝장을 내야 합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 전혀 하지 않았다.(11)
:
: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
: 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
: 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
: 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
: 자들도 포함된다.(12)
:
: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
: 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
: 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 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
: 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
: 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
: 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
: 다.
:
: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
: 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
: 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
: 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
: 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
: 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
: 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
: 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
: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
: 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
: 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
: 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
: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
: 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
: 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
: 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
: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
: 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
: 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
: 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
: 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
: 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
: 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
: 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
: 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
: 다.(15)
:
: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
: 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
: 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
: 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
: 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
: 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
:
:
: -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결론 -
:
: 끝내면서
:
:
: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
: 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
: 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
: 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
: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
: 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
: 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
: 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
: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
: 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
: 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
: 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
: 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
: 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
: 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 것이다.(21)
:
: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
: 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
: 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
: 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
: 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
: 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 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
: 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 다.”(22)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
: 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
: 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
: 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
: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
: 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 희망한다.
- 한신대와 논쟁할 때 상식
한신대는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근거로 삼아 말을 시작하면 그들에게 성경이 틀렸는지 옳은지를 먼저 살펴 보고 나서 대화를 시작하라고 돌려 보낼 일입니다. 그들과 성경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면 중과 성경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들과 한신대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전도할 대상이지 성경을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대화를 할 상대가 아닙니다.
- 성경의 최소 기록
요21:25에서 성경 기록은 최소한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교수는 성경에서 조선 반도가 있는지 한신대학과 그 교수 이름을 예수님이 언급했는지 먼저 찾아 보고 만일 성경에 없다면 그 교수는 이 세상에 없는 헛깨비이며 한신대와 조선 땅은 세상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 한신대를 조롱한다면
한신대와 그 교수는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믿지 않고 성경에는 틀린 곳이 많다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에 언급 되어 있지 않아서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이런 주장은 그들이 평소 주장한 대로 성경은 다 믿을 바가 안 된다고 말한 그 말과 서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이기는지 구경을 한 다음,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주장이 이기면 그 후에 성경으로 설명을 해 주면 되고 만일 성경이 틀렸다는 주장이 이기면 그들이 인정도 하지 않는 성경을 근거로 말하는데 우리가 대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2. 성경을 그대로 믿는 우리끼리 말한다면
이 대화의 시작은 그들이 했으나 그들은 중들과 같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이 대화에서 배제 시키고 이 대화를 우리 믿는 사람끼리 내부적으로 자체 토론의 주제로 삼아서 대화했으면 합니다.
- 성경은 최소한의 기록이므로
성경에 기록 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가르 친 적이 없다고 말하는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니 상대할 필요도 없는 말 장난이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해도 이미 구약과 신약의 롬1:27에서 가르 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적을 필요가 없어서 적지 않은 것입니다.
- 성경의 어떤 기록이든 다 예수님의 기록
보통 성경신학에서 성경을 모세 기록 다윗 기록 바울 기록이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신학자가 일반 교인에게 신학 지식을 자랑하는 데는 유리할지라도 일반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낮게 상대하게 만드는 위험이 너무 큽니다. 실은 신학자들도 어느 날 다 그런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세 오경이든 바울 서신이든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내용은 전부 예수님입니다. 요5:46 히10:7 등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했다고 적혔든 사도 바울이 말했다고 적혔든 예수님 소리 외에는 성경에 일점일획도 없습니다. 사복음이 아닌 곳에 기록 된 성구는 예수님이 하지 않은 말씀이며 예수님이 책임 지지 못할 말이니까 우리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것인가? 이런 소리는 불신자가 할 소리며 이런 소리는 세상 학문에서 입에 담을 소리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롬1:27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무슨 죄를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기록했는지는 별도의 이유가 있습니다. 4대강 반대 운동을 할 때는 성구를 근거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옹호할 때는 성경에 금지 된 기록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말을 반대로 하면 거의 다 진리가 될 정도입니다.
- 한신대의 관심과 전력
그건 그렇고, 그런 추악한 죄는 일반인들은 성경에서 읽은 기억은 있다 해도 생활 속에서 접촉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느 성구인지 기억조차 하기 어려운데, 한신대는 천국과 구원과 영생은 얼마나 그들 생활에서 거리가 먼지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믿지도 않는 정도이고, 그 대신 그런 괴악한 행동만 입에 달고 다니고 전공으로 삼고 전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안이든 주변에는 그런 죄가 가득하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멘 공장 노동자는 세멘이 어디에 묻든 묻는 것이고 그들은 생활 속에 늘 세멘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세멘에 대해서는 제법 전문 지식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대로 믿어 보려 하면 그런 죄는 참으로 거리가 멀고 그런 분들을 접촉한다는 것은 평생 어려울 정도인데 어떻게 그 주변에는 그런 행동이 그렇게 많은지? 환자를 치료하느라고 그런지, 아니면 그들의 토양이 그렇고 그들의 내부가 그렇고 그들의 생존 사활 문제인지 혼동할 정도입니다.
3. 원어의 경우
'남편'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려면, '남편'은 '남의 편'이니 내 편이 아닌 원수를 말하는 것이어서 부부가 아닌 옆 집 남자를 말한다고 논리를 세워 나가도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라 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귀신이 노리는 것은 유혹 시켜 성공하면 제일 좋고 실패를 해도 쓸 데 없는 말로 시간과 관심을 소비 시켰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성경의 '천국'은 '하늘'을 가리 키는 단어이니 구름 위에 저 하늘에 천국이 있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란 성경에 없다고 말하고, 성경의 '지옥'은 땅 밑에 있는 감옥이니 죽어서 가는 영계의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여호와증인의 논리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여호와증인은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끝없이 파헤치는데 그들의 논리 시작은 그 단어가 불신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성경에서 채용을 했다는 사실을 모른 척했으니 그들은 사기꾼입니다. 한신대가 원어의 단어를 짚고 나오면 같은 원리로 보시면 됩니다.
고전6:9 딤전1:10 두 성구에서는 그 단어가 이런 경우에도 사용 되고 저런 경우에도 사용 된다고 애매하게 빠져 나갈 여지가 있을지라도 롬1:27에서는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라고 기록하여 누가 누구를 상대하는 문제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 참고로
한신대 글은 읽는 순간부터 읽을수록 변증을 할수록 이미 그들의 귀신 놀음에 더 빠져 들어 가는 것이므로 최소한에 그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글을 접하지 않고 살 수가 없는 세대이므로 처음 몇 곳만 읽고 간단히 설명을 해 보았습니다.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가 양 새끼에게 꼬리를 들켰고 새끼 양이 꼬리를 보니까 아닌데 라고 말하면 이리는 꼬리만 보지 말고 내 앞 발을 만져 보고 나서 이야기 하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입 속에 머리를 넣어 보면 내가 먹는지 안 먹는지 보면 알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삼킵니다.
한신대는 성경을 부인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성경 장절을 제시하고 그 성경의 단어 하나에 담긴 뜻을 풀어서 설명하되 심지어 고대 언어체계와 당시의 문화 환경까지 제시한다는 것은 그 글에 담긴 모든 주장이 지금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의 발동이라고 보일 것 같습니다. 한신대 측과 대화는 한 가지로 모아 져야 합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
평양의 김 씨가 정말 하나님이냐?
박정희만 죽으면 이 땅은 가나안이 되느냐?
그들과 대화할 때 사용할 주제는 이런 것 하나에서 끝장을 내야 합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 전혀 하지 않았다.(11)
:
: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
: 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
: 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
: 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
: 자들도 포함된다.(12)
:
: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
: 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
: 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 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
: 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
: 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
: 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
: 다.
:
: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
: 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
: 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
: 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
: 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
: 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
: 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
: 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
: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
: 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
: 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
: 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
: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
: 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
: 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
: 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
: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
: 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
: 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
: 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
: 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
: 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
: 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
: 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
: 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
: 다.(15)
:
: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
: 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
: 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
: 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
: 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
: 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
:
:
: -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결론 -
:
: 끝내면서
:
:
: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
: 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
: 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
: 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
: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
: 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
: 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
: 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
: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
: 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
: 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
: 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
: 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
: 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
: 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 것이다.(21)
:
: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
: 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
: 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
: 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
: 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
: 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 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
: 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 다.”(22)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
: 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
: 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
: 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
: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
: 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