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면을 주신 분, 여러 면을 주신 분, 이어 짐을 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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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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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1 00:00
1. 식견
- 사람 된 대로 아는 것
성인능지성인이라는 세상 말이 있습니다. 종종 세상 말을 인용합니다. 물론 누구나 아는 정도를 소개하지 특별한 말은 피하려 합니다. 성경 유일주의에 신앙 중심만을 지향하는 이 곳에서 세상 말을 인용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 말과 경험과 지식을 접할 때 우리가 자연을 관찰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자연계시가 되어 성경의 특별계시를 보충하는 지혜가 되고, 만일 하나님과 연관성을 떼 내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 지식에 가치를 두는 말이 되면 정죄 받을 인간 지식이 됩니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알아 본다는 말을 성인능지성인이라 합니다. 성자라야 성자를 알아 보고, 도둑은 도둑을 알아 본다는 말로도 통합니다.
- 백 목사님의 배경
백 목사님은 서당에서 정확히 2 년 반 정도 기간에 한문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일반 초등학교는 5학 년까지 공부하고 자퇴했습니다. 27 세에 성경학교 공부 몇 달 하셨고, 40 세가 넘어 신학교에서 조금 강의를 들었는데 졸업은 했으나 실제 출석과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견학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 대신 백 목사님은 현장만 발로 뛴 분입니다. 하나님 주신 세상을 실제 살아 본 분입니다. 이 면으로는 백 목사님은 성실했고 출중하며 거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가능한 일입니다만 어쨌든 세상을 실제 살아 본 면으로는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가 산 세상은 일반 서민이 사는 세상이어서 누구든지 들어 보면 실제 각자가 알고 있는 일입니다. 특수한 분야나 전문 과정이 아닙니다.
2. 신앙 접촉
- 주남선
백 목사님은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주남선을 직접 상대했습니다. 따로 연구를 해야 할 분입니다. 이 홈의 /연구실/자료/ 게시판에 이 홈의 자료를 중심으로 출간한 '주남선' 연구 글이 그 손주분의 석사 논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얼핏 들은 정도지 직접 교분을 가진 정도는 아닙니다. 그 분들은 교계적 거물이었고 백 목사님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피했습니다. 사실 찾아 가서 만나고 배우는 개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성경 하나로 전부를 삼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증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남선 목사님은 생활 범위에 계셨고 그의 언행과 신앙은 그 분을 닮아야 했고 그 분을 넘어 서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셨고 그 분은 백 목사님의 스승이었습니다.
- 신앙 전기
백 목사님은 신앙 초기에 성경 하나만 읽으면서 유일하게 신앙 인물들의 전기는 간식처럼 접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관심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에 전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박에 알아 차린 분이 프란시스와 선다싱입니다. 프란시스는 자연이 움직였고 선다싱은 복음 전파에 겪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상대하는 생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 이 것만을 사모했고 그리고 그런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못 견디는 생활이 백영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만 인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운 분들, 신학교를 세운 분들, 병원과 구호 기관을 설립한 분들, 찬송을 잘한 분들, 신학자들, 주해서를 편찬한 분들... 이런 분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백영희의 전심은 주님께 붙들리고 주님을 전하는 데만 쏟고 나머지는 눈에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주님께 붙들렸고 그의 걸음에는 겉 보기는 인간의 노력과 남 다른 성과와 우연의 일치적 기적이 많으나 속으로 들여다 보면 성프란시스와 견 줄 걸음을 걸었고, 그리고 그는 주님을 전하는 일에는 정신을 팔아 제 정신이 남지 않았으니 그는 정신 상실자였고 미쳤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그랬으니 그런 사람을 찾았고, 그런 사람을 찾아 읽거나 접할 때 그런 면이 강한 이들만 자기 눈과 귀와 머리에 남겨 져 있었습니다. 마치 마약자에게는 마약만 눈에 들어 오고 술꾼에게는 술만 보이고 장사에게는 돈 있는 곳만 보이듯이 그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 많은 유명인들
백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도로 교계와 세상의 유명인들을 남 다르게 많이 접할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질문자 말씀하신 그 정도의 인물만 그 분에게는 사람이었고 그 외의 분들은 배경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이 홈과 이 노선을 두고 편협함을 지적하고 심지어 성경보다 백영희 설교록을 중시한다는 표현이 많으나 그런 평가를 하는 이들이 입에 익히는 이름은 대개 성경 무시 인물들이고 성경에 없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인물입니다. 이 홈이 백영희의 이름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성경만 성경이고 성경이면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비교를 한다면
- 프란시스
주님과 동행한 실체가 역사에 손 꼽을 분이나 다른 시대를 자기처럼 그런 길을 걷게 하는 면이 없습니다. 프란시스의 개인 성화는 절정에 있었으나 후 시대에 그런 걸음을 걷게 하는 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굳이 무리하게 비교를 한다면 구약의 멜기세덱과 같아서 신약 교회에 프란시스의 신앙은 보이지 않고 신령한 면으로는 이어 지고 있겠지만 역사 교회에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 수준의 인물들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면은 없습니다.
오늘 프란시스를 입에 담는 이들은 거의 전부 사회 구제 운동이나 좌파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프란시스가 걸어 간 고난과 자기 희생과 무소유와 자연주의 걸음은 불교나 인도의 고행주의가 예사로 하는 것이고, 프란시스가 보여 준 이웃 사랑은 오늘 불신 세상의 복지부도 하는 일입니다. 프란시스가 후 시대에 남겨 놓은 것을 보면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은 봇물처럼 넘치나 예수 없으면 지옥이라는 핵심이 빠졌고, 이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죄의 대형과 칭의의 대행과 하나님 동행과 소망이 있었는데 이런 구원의 생명은 쏙 빼버리고 거지 동냥 주며 거지들과 어울려 사는 낭만만 강조하고 현실 도피만 오늘 악용 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의 실제 신앙 세계는 너무 높아 일반인은 그의 전기를 읽어 봐야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작자의 글 장난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실제 오늘 보수 정통 신학까지도 그리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신앙의 절정에서만 가능한 주님과 높은 차원의 동행이 있었으니 백 목사님의 프란시스 언급의 내용을 유심히 살피면 다른 책이나 다른 이들에 의하여 인용 되는 것과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 선다싱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잊은 분, 자기를 잃은 분, 자기를 내 버린 걸음으로 우리는 선다싱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위치와 시대와 여러 면이 교회사에서 알려 져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기는 했으나 선다싱의 걸음과 같이 걸어 간 인물들을 살핀다면 우리 나라에도 최권능 목사님이 있고 복음 전파에 평생 앞을 돌아 보지 않은 인물들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더 낫고 더 못하고 문제를 떠나 알려 지고 말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처럼 알려 지고 있고 그 이유를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신앙은 비록 흔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애양원' '여순반란사건' '신사참배' 등 여러 가지가 모여 져서 이야기거리가 된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서부교회의 주일학교가 세계 최대로 소개 될 때 공회는 극단적으로 오해를 받던 시기인데 그 이야기들이 누가 들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 단번에 국내는 물론 해외 교회까지 굉장히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것만 가지고 이 노선을 평한다면 순복음교회야 서부교회보다 몇 배나 이야기거리가 많습니다. 이야기거리가 많다고 순복음교회를 서부교회에 비교해서 되겠습니까? 순복음교회야 전도 협회 정도지 교회가 아니고 서부교회는 교회였습니다.
선다싱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20세기의 험악한 말세지말에 우리를 교육 시키려고 마련한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 이야기 자체로 우리는 평생 기억하고 참고해야 하지만 그 분의 그 면 외에 다른 면은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어 가는 인물이 있고, 한 번으로 그치는 분이 있고, 한 면에 특별한 인물이 있고, 여러 면을 통해 세워 가는 교회의 한 중심에 두는 인물도 있습니다.
백영희라는 공회 노선은 경건이 프란시스만 못하고 전도가 선다싱만 못하고 신학 상식이 박형룡만 못하다 해도 교회사 전체를 통해 이 노선은 별도로 필요하고 중요하며 반드시 다음 세대를 주신다면 이 노선에서 움이 돋을 준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 신학 님이 쓰신 내용 <<
:
: 백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인용하는 분들이 몇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외국 사람으로서는 성프란스시와 선다씽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국내인으로서는 손양원 주기철 주남선 목사님 정도입니다. 본받을 신앙으로 회자되는 이런 분들의 특징도 궁금하고 왜 다른 유명한 분들도 많은데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
: 성프란시스와 선다씽과 백 목사님을 비교한다면 교회사에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요?
- 사람 된 대로 아는 것
성인능지성인이라는 세상 말이 있습니다. 종종 세상 말을 인용합니다. 물론 누구나 아는 정도를 소개하지 특별한 말은 피하려 합니다. 성경 유일주의에 신앙 중심만을 지향하는 이 곳에서 세상 말을 인용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 말과 경험과 지식을 접할 때 우리가 자연을 관찰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자연계시가 되어 성경의 특별계시를 보충하는 지혜가 되고, 만일 하나님과 연관성을 떼 내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 지식에 가치를 두는 말이 되면 정죄 받을 인간 지식이 됩니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알아 본다는 말을 성인능지성인이라 합니다. 성자라야 성자를 알아 보고, 도둑은 도둑을 알아 본다는 말로도 통합니다.
- 백 목사님의 배경
백 목사님은 서당에서 정확히 2 년 반 정도 기간에 한문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일반 초등학교는 5학 년까지 공부하고 자퇴했습니다. 27 세에 성경학교 공부 몇 달 하셨고, 40 세가 넘어 신학교에서 조금 강의를 들었는데 졸업은 했으나 실제 출석과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견학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 대신 백 목사님은 현장만 발로 뛴 분입니다. 하나님 주신 세상을 실제 살아 본 분입니다. 이 면으로는 백 목사님은 성실했고 출중하며 거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가능한 일입니다만 어쨌든 세상을 실제 살아 본 면으로는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가 산 세상은 일반 서민이 사는 세상이어서 누구든지 들어 보면 실제 각자가 알고 있는 일입니다. 특수한 분야나 전문 과정이 아닙니다.
2. 신앙 접촉
- 주남선
백 목사님은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주남선을 직접 상대했습니다. 따로 연구를 해야 할 분입니다. 이 홈의 /연구실/자료/ 게시판에 이 홈의 자료를 중심으로 출간한 '주남선' 연구 글이 그 손주분의 석사 논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얼핏 들은 정도지 직접 교분을 가진 정도는 아닙니다. 그 분들은 교계적 거물이었고 백 목사님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피했습니다. 사실 찾아 가서 만나고 배우는 개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성경 하나로 전부를 삼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증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남선 목사님은 생활 범위에 계셨고 그의 언행과 신앙은 그 분을 닮아야 했고 그 분을 넘어 서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셨고 그 분은 백 목사님의 스승이었습니다.
- 신앙 전기
백 목사님은 신앙 초기에 성경 하나만 읽으면서 유일하게 신앙 인물들의 전기는 간식처럼 접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관심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에 전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박에 알아 차린 분이 프란시스와 선다싱입니다. 프란시스는 자연이 움직였고 선다싱은 복음 전파에 겪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상대하는 생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 이 것만을 사모했고 그리고 그런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못 견디는 생활이 백영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만 인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운 분들, 신학교를 세운 분들, 병원과 구호 기관을 설립한 분들, 찬송을 잘한 분들, 신학자들, 주해서를 편찬한 분들... 이런 분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백영희의 전심은 주님께 붙들리고 주님을 전하는 데만 쏟고 나머지는 눈에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주님께 붙들렸고 그의 걸음에는 겉 보기는 인간의 노력과 남 다른 성과와 우연의 일치적 기적이 많으나 속으로 들여다 보면 성프란시스와 견 줄 걸음을 걸었고, 그리고 그는 주님을 전하는 일에는 정신을 팔아 제 정신이 남지 않았으니 그는 정신 상실자였고 미쳤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그랬으니 그런 사람을 찾았고, 그런 사람을 찾아 읽거나 접할 때 그런 면이 강한 이들만 자기 눈과 귀와 머리에 남겨 져 있었습니다. 마치 마약자에게는 마약만 눈에 들어 오고 술꾼에게는 술만 보이고 장사에게는 돈 있는 곳만 보이듯이 그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 많은 유명인들
백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도로 교계와 세상의 유명인들을 남 다르게 많이 접할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질문자 말씀하신 그 정도의 인물만 그 분에게는 사람이었고 그 외의 분들은 배경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이 홈과 이 노선을 두고 편협함을 지적하고 심지어 성경보다 백영희 설교록을 중시한다는 표현이 많으나 그런 평가를 하는 이들이 입에 익히는 이름은 대개 성경 무시 인물들이고 성경에 없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인물입니다. 이 홈이 백영희의 이름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성경만 성경이고 성경이면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비교를 한다면
- 프란시스
주님과 동행한 실체가 역사에 손 꼽을 분이나 다른 시대를 자기처럼 그런 길을 걷게 하는 면이 없습니다. 프란시스의 개인 성화는 절정에 있었으나 후 시대에 그런 걸음을 걷게 하는 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굳이 무리하게 비교를 한다면 구약의 멜기세덱과 같아서 신약 교회에 프란시스의 신앙은 보이지 않고 신령한 면으로는 이어 지고 있겠지만 역사 교회에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 수준의 인물들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면은 없습니다.
오늘 프란시스를 입에 담는 이들은 거의 전부 사회 구제 운동이나 좌파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프란시스가 걸어 간 고난과 자기 희생과 무소유와 자연주의 걸음은 불교나 인도의 고행주의가 예사로 하는 것이고, 프란시스가 보여 준 이웃 사랑은 오늘 불신 세상의 복지부도 하는 일입니다. 프란시스가 후 시대에 남겨 놓은 것을 보면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은 봇물처럼 넘치나 예수 없으면 지옥이라는 핵심이 빠졌고, 이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죄의 대형과 칭의의 대행과 하나님 동행과 소망이 있었는데 이런 구원의 생명은 쏙 빼버리고 거지 동냥 주며 거지들과 어울려 사는 낭만만 강조하고 현실 도피만 오늘 악용 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의 실제 신앙 세계는 너무 높아 일반인은 그의 전기를 읽어 봐야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작자의 글 장난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실제 오늘 보수 정통 신학까지도 그리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신앙의 절정에서만 가능한 주님과 높은 차원의 동행이 있었으니 백 목사님의 프란시스 언급의 내용을 유심히 살피면 다른 책이나 다른 이들에 의하여 인용 되는 것과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 선다싱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잊은 분, 자기를 잃은 분, 자기를 내 버린 걸음으로 우리는 선다싱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위치와 시대와 여러 면이 교회사에서 알려 져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기는 했으나 선다싱의 걸음과 같이 걸어 간 인물들을 살핀다면 우리 나라에도 최권능 목사님이 있고 복음 전파에 평생 앞을 돌아 보지 않은 인물들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더 낫고 더 못하고 문제를 떠나 알려 지고 말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처럼 알려 지고 있고 그 이유를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신앙은 비록 흔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애양원' '여순반란사건' '신사참배' 등 여러 가지가 모여 져서 이야기거리가 된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서부교회의 주일학교가 세계 최대로 소개 될 때 공회는 극단적으로 오해를 받던 시기인데 그 이야기들이 누가 들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 단번에 국내는 물론 해외 교회까지 굉장히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것만 가지고 이 노선을 평한다면 순복음교회야 서부교회보다 몇 배나 이야기거리가 많습니다. 이야기거리가 많다고 순복음교회를 서부교회에 비교해서 되겠습니까? 순복음교회야 전도 협회 정도지 교회가 아니고 서부교회는 교회였습니다.
선다싱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20세기의 험악한 말세지말에 우리를 교육 시키려고 마련한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 이야기 자체로 우리는 평생 기억하고 참고해야 하지만 그 분의 그 면 외에 다른 면은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어 가는 인물이 있고, 한 번으로 그치는 분이 있고, 한 면에 특별한 인물이 있고, 여러 면을 통해 세워 가는 교회의 한 중심에 두는 인물도 있습니다.
백영희라는 공회 노선은 경건이 프란시스만 못하고 전도가 선다싱만 못하고 신학 상식이 박형룡만 못하다 해도 교회사 전체를 통해 이 노선은 별도로 필요하고 중요하며 반드시 다음 세대를 주신다면 이 노선에서 움이 돋을 준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 신학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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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인용하는 분들이 몇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외국 사람으로서는 성프란스시와 선다씽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국내인으로서는 손양원 주기철 주남선 목사님 정도입니다. 본받을 신앙으로 회자되는 이런 분들의 특징도 궁금하고 왜 다른 유명한 분들도 많은데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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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프란시스와 선다씽과 백 목사님을 비교한다면 교회사에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요?
선다씽
백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인용하는 분들이 몇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외국 사람으로서는 성프란스시와 선다씽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국내인으로서는 손양원 주기철 주남선 목사님 정도입니다. 본받을 신앙으로 회자되는 이런 분들의 특징도 궁금하고 왜 다른 유명한 분들도 많은데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성프란시스와 선다씽과 백 목사님을 비교한다면 교회사에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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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인용하는 분들이 몇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외국 사람으로서는 성프란스시와 선다씽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국내인으로서는 손양원 주기철 주남선 목사님 정도입니다. 본받을 신앙으로 회자되는 이런 분들의 특징도 궁금하고 왜 다른 유명한 분들도 많은데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성프란시스와 선다씽과 백 목사님을 비교한다면 교회사에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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