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이며 역사적인 설교 vs 신앙 있는 훌륭한 신학자의 설교
| 분류 |
|---|
yilee
0
2013.03.10 00:00
1 박윤선과 백영희
박윤선에 대한 자료는 교계에 넘칩니다만 3190번의 자료는 박윤선의 목회 내부를 겪은 분의 생생한 회고여서 그 동안 소개 된 자료에서 몰랐던 내용이 많습니다. 답변자가 외부 자료를 잘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3190번 글이 박윤선의 다른 소개 글과 비교할 때 특별한 것도 이유입니다.
어쨌든 박윤선의 이름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상 이상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이름 정도 들어서 아는 정도지만 그 일반 교인들을 가르치는 분들의 선생들 사이에서는 서로 그 분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최고의 신학자들, 그들 사이에서 최고니 한국 교계 최고 인물이라 표현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 노선은 박윤선과 1950년대를 중심으로 아주 가까왔던 시절을 10여 년 가졌고, 또 전체적으로는 40여 년을 통해 일반 교계가 모르는 접촉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박윤선과 접촉은 평생 박윤선을 노래하는 분들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접촉이나 더 중요한 것은 박윤선의 세계가 그 제자들의 말처럼 그렇게 깊고 높기 때문에 그런 세계의 인물이란 단순히 접촉의 시간과 면대의 거리만 가지고 안다 하기는 곤란합니다. 이 노선은 박윤선을 사실상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박윤선을 밑에서 올려다 봤으나 이 노선은 함께 나란히 있었고 때로는 그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기준에서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원고 작업이 끝나고 출간의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 되면 박윤선에 대한 이 노선의 관계가 일반인의 가시권에 들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3190번의 글은 정성구 목사님의 위치에서 자세히 그리고 유익 된 많은 자료를 담고 있으나 그 글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3190 글 이전과 이후까지 출간할 책은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190 글과 같은 시기에 박윤선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3190번과 이 곳에서 출간할 책을 함께 놓고 비교하면 박윤선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2. 질문하신 '설교 세계'만 우선 집중하겠습니다.
박윤선의 한국 교계 내에서의 가치는 '한국 교계가 알 수 없었던 세계 보수 신학의 성경 해석을 한글로 소개'한 것입니다. 신학으로는 박형룡이 박윤선의 스승급이면서 두 분의 절정기의 실력으로 비교해도 훨씬 위에 있습니다. 박윤선보다 앞 서 공부하거나 함께 공부했던 신학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 중에서는 박윤선을 능가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목회로 말하면 박윤선의 목회는 어린 교인들로서 그를 좋아 하는 분들이 좋았다고 기억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하지만 목회의 일반 모습으로 비교하면 박 목사님 평생 목회는 늘 목회에 관심과 정성은 쏟아도 왠 지 그렇게 잘 되지 않아서 늘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이름을 가진 박윤선의 이름을 고려한다면 목회자로서는 하위 그룹이지 중간도 되지 않습니다.
설교로 말하면 박 목사님은 학식 있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신앙 있는 신학 강사였지 일반 교회의 교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가는 아니었습니다. 정성구 목사님은 한국 보수 교계 최대의 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대 신학자입니다. 대 신학자인 정 목사님이나 그 주변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들에게 박윤선은 일반 신학 강좌가 아니라 신앙과 은혜와 능력을 쏟아 함께 전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가 될 분들이나 그런 수준에 있는 분들은 박윤선의 설교를 은혜롭게 기억하나 한국에 아무 교회나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반 교인들 중에 박윤선의 설교 기억은 그렇게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일반 교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면 그의 생애 중요한 대목 곳곳에 그렇게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한국의 일반 교계에는 설교를 잘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런 분들 중에 한 분 정도로 보이지 그 이상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분은 한국교회사적으로 너무 중요한 시기에 너무 중요한 위치를 받았고, 그 분은 진실 되이 충성했고 그 결과 한국교회사의 신학자 중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는 면은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3. 두 분의 설교 세계
박윤선의 설교 세계가 아주 특별하게 유명했던 것은 해방 후 고려파에서 진리 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들은 있지만 그 당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가 시대적으로 임할 때여서 교파마다 그런 일들이 있었고 물론 고려파가 제일 많았지만 고려파에 많은 강사들에게서 비슷하게 볼 일화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박영기 김창인 박인순 등은 전국을 휩쓸던 유명 강사들이었습니다. 박윤선은 이 분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고 이 분들 다음에 손을 꼽는 여러 분들 중에 한 분입니다. 이에 반해 백 목사님은 앞에 소개한 박영기 김창인 박인순 이런 인물들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라 그 분들을 훨씬 초월해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이 전도사로서 부산 지역에 사경회를 인도한다는 소문이 나면 고려신학교 학생들 전체가 술렁 거리며 공부하는 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학교 수업에 영향을 미쳤던 정도입니다.
박윤선과 비교보다는 차라리 다른 세 분과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김창인의 설교는 최근의 조용기 목사님 설교처럼 그렇게 인기가 폭발적이었습니다. 다만 깊이는 없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나 김창인과 백영희의 설교를 비교한 분들은 김 목사님 설교를 사이다로 표현하고 백 목사님 설교를 곰국으로 비교하곤 했습니다. 박인순 전도사님은 백 목사님의 선배요 동지였으나 실은 백 목사님을 따르는 분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신앙과 영감과 실력이 출중하여 고신 제일의 부흥사 등의 이름을 가졌으나 백 목사님께는 배우는 입장이며 교인 위치라고 해야 맞습니다. 박영기 조사님은 백 목사님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 보이는 인물이었으나 원고 설교만 반복하다가 훗날 더 자라 가는 면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실 곳이 없게 된 정도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해방 후 그리고 6.25 전쟁 직후 총회파와 고려파의 진리 투쟁이 격해 질 때 가장 어렵고 해결 못할 교회가 있으면 백영희 목사님을 강사로 가게 하여 수 많은 교회들을 총회파에서 고려파로 돌아 서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고신을 세우기 위해 총회파와 승산 없는 신앙의 전투를 할 때 백영희라는 인물은 임란에 이순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신의 지도부는 교권에 미련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백영희에 대한 견제와 핍박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이고, 이런 기록은 고신의 당시 이면사를 깊이 다루고 있는 남영환의 '한국교회와 교단' 등 곳곳에서 잘 드러 나고 있습니다.
4. 구체적으로
보통 정성구 목사님의 박윤선 소개와 같은 글은 위험스런 인물이라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독재자니 사이비 교주니 독주 독선이니 하여 입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고 또 최근 세계와 한국의 사회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홈에서 백 목사님을 두고 그렇게 표현했다면 온갖 비판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나 정성구 목사님이 박윤선을 그렇게 표현하게 되면 이 번에는 지도력이 그렇게 있었다, 역시 그런 남 다른 면이 있었다, 신령했다 등으로 미화가 됩니다. 사실 미화인지 정평인지 혹평인지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표현해야 할 것인데 제 것은 모두 정평이고 남의 것은 미화라고 혹평해 버립니다. 이 번에는 총신 신학교 교장 출신의 대 신학자가 박윤선을 평가한 것이니 이런 기회에 같은 기준으로 백영희를 소개한다면 외부 비판이 어려울 듯하여 제대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 설교 횟수
: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
백 목사님의 설교는 매일 새벽과 수금 밤 예배와 주일 오전 오후 총 11 회가 기본이었습니다. 예배의 설교 시간도 박 목사님의 두 배 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횟수와 분량으로 비교한다면 5 - 10 배 정도일 것입니다.
■ 다른 설교자
: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
백 목사님도 그러했는데 백 목사님이 그렇게 하면 독재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정성구 목사님이 박윤선을 그렇게 소개하면서 극찬하는 말에는 아무 감히 입을 열지 못할 듯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양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백 목사님은 세계 10대 교회에 한국 5대 교회 시절에도 혼자 그렇게 설교를 다했습니다. 병환이나 누구를 좀 시켜서 지켜 보려고 가끔 세울 때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한 주간 11 회 설교 전부를 다 맡았습니다. 그리고 서부교회는 부목이라는 제도, 부교역자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혼자 죽기로 충성했습니다. 서부교회의 부목이나 부교역자 개념은 백 목사님 70대에 나타 나는데 일반 교인으로서 교회 일을 너무 많이 맡고 있는 경우 그 일에 대한 기초 생활비를 조금 지출하는 정도였습니다. 자원봉사자가 기초 비용을 받는 정도로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 교회 특별 행사
: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
총공회 교회는 원래 헌신 예배나 특별 예배는 없습니다. 전체 교인이 한 자리에 함께 하는 고정 예배가 전부입니다. 행사식 예배, 행사식 교회 운영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 설교 중심 운영
: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
▷
이런 면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박 목사님은 백 목사님의 주변에도 다가 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산 시절에 박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자기 제자였으나 목회와 설교를 두고는 너무 부러워서 백 목사님 목회를 연구하고 많은 면으로 따라 했던 정도입니다.
■ 신본 중심 설교
: 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
정 목사님은 신본 인본이라는 표현을 적지 않았으나 그런 내용으로 읽었습니다. 교인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교인들이 무엇을 원할까 이런 현장의 수요를 보며 물건을 공급하는 것은 장사의 상술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펴 그 뜻을 전하는 위치입니다. 백 목사님의 평생 설교는 매 시간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은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여기에 주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찾아 오신 주님은...'이라는 표현을 1950년대 10여 년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진실 된 심부름꾼의 자세조차도 그를 비판할 때 자기 말은 하나님의 말이라고 교인을 세뇌했다는 식으로 돌려 친 것이 외부의 비판들이었습니다. 박윤선 역시 이런 세계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자기를 감화 감동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전하는 전달자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백 목사님 역시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그렇게 노력한 것과 실제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 세계는 남의 속에 들어 있어 알기는 어려우나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씀으로 짐작하면 역시 백 목사님의 세계가 훨씬 위에 있습니다.
■ 목회와 신학
: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
이 면에서는 이제 백 목사님과 박 목사님은 각각 아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앞에 사안들은 뜻은 같으나 그 정도 차이라 한다면 박윤선은 신학자며 백영희는 신학 자체를 박윤선만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교회와 신앙에 큰 폐단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면은 이 번 답변에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 산 신학, 신학 있는 설교
: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
박윤선은 그의 설교를 자기가 교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던지고자 하는 말씀을 받아서 전했고 그 과정에서 박윤선은 단순히 마이크와 같은 기계가 아니라 본인이 먼저 그 말씀을 받을 때 감사했고 기뻤으며 그 말씀을 전할 때 역시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니 유기적 관계를 가진 참 종이었습니다.
백영희 역시 그러했고 백영희는 이런 면에서 더욱 뜨겁고 간절했으나 신학자가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신학자라는 간판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사이비라는 말을 쉽게 붙여 버리는 것이 문제인데 3190번의 글은 이 노선의 상식이며 백영희의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걸음을 극찬하는 효과가 있어 남 다르게 읽고 '일반자료'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나중에 공회에 대해 시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성구 목사님의 박윤선에 대한 글을 먼저 비판 좀 해 보라 할 것입니다. 학위 앞에 입을 닫는 사람, 그에게 학위는 우상입니다. 박윤선 이름에는 무조건 입을 닫는 사람, 그는 박윤선을 우상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백영희 신앙 노선은 그런 일을 초월한 길입니다.
■ 설교의 능력
: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
이런 표현과 기억을 기준으로 두 분을 비교한다면 박희천 목사님처럼 백영희 설교는 한국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교회 역사적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박윤선이 시시하거나 함부로 해도 될 인물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나, 이 노선에 비교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성구 목사님의 글은 박윤선이 고려파에서 쫓겨 나고 합동 교단에 들어 가기 전의 1960년대 3 년 기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의 동산교회가 박 목사님으로서 목회자로서는 가장 성공했던 시기인데 그 동산교회 박윤선 목사님이 동산교회를 두고 그 다음 갔던 곳이 총공회 대구 지방의 동성로교회였습니다. 이 곳에는 고려파와 합동 교단에서도 주목하고 알아 주는 대구 교회사 한 중심에 있는 유력 교인들이 있는 곳입니다. 동성로교회로 부임한 박윤선 목사님은 이 곳에서, 세계 최고의 정통 보수 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한국 최고의 신학자 박윤선의 이름으로 목회를 시작했다가 총공회 교인들과 교리 성경 목회 예배 설교 등 모든 면을 두고 정면으로 난상토론과 신앙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석 달 정도에 바로 떠났습니다. 백영희가 아니라 백영희 신앙 노선의 교인들과의 논쟁에서 손을 들고 나간 정도입니다. 당시 기록은 별도로 전할 내용이 많으나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칩니다.
5. 현재 두 분이 가신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강단에는 별별 강단용 설교 자료가 쏟아 지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기 위한 신학의 배경을 살피는 데는 여전히 박윤선의 주석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가진 듯합니다. 그러나 설교 내용에 직접 인용 되는 '설교' 자료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홈에서 제공하는 백영희 설교 내용과 박윤선의 내용은 하늘과 땅 사이입니다. 박윤선의 설교 내용을 그대로 읽거나 그대로 전해 주면서 목회를 하거나 그런 설교를 듣고 있는 교회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이렇게 말하더라, 스펄젼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박윤선 주석에 이 단어의 뜻이 이렇다고 되어 있다... 이런 식의 인용이 전부입니다. 백 목사님 설교는 전국에 수 많은 교회에서 그 내용이 대량으로 그대로 옮겨 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답변자로서는 박윤선 목사님조차 멀리서 지켜 보며 부러워 할 정도의 신앙인데 박윤선 백영희 두 분을 비교하라면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변자는 뒷 동산이지만 백두산과 에베레스트산의 높이를 비교하라면 하나는 국내 최고요 하나는 세계 최고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
: 일반자료방에서 흔치 않는 흥미로운 자료를 보고 문의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보수교계 대표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교가 자주 있어 참고가 됩니다. 우리가 당장 따라할 일은 아니나 염두에 두고 소망할 일로 생각합니다.
:
: 박윤선 목사님은 설교를 혼자 독주하셨군요. 민주적 교회는 한 사람의 훌륭한 점을 답습하게 하는 것보다 체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주신 은사를 고루 전하게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교인으로 자라가지 않을까요? 비록 훌륭하다하나 한 사람이 전부를 다 맡을 수는 없는데 손님 목사님께도 강단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독선으로 비판을 받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백목사님과 닮은 점이 많더군요. 백목사님을 비판한 분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
:
: +++++++++ ( 인용 ) +++++++
:
: ①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목회하던 시기는 50대 초반으로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데다 가장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이사야서를 주석하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증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
: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은 50대를 막 넘 긴,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가장 힘 있게 설교할 때인데, 주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당시 박 목사님은 이사야서를 집필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재에서 주석을 쓰시다가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메시지를 온 몸을 던져 외치실 때는 실로 간장이 녹는 듯 했다.”
:
:
:
박윤선에 대한 자료는 교계에 넘칩니다만 3190번의 자료는 박윤선의 목회 내부를 겪은 분의 생생한 회고여서 그 동안 소개 된 자료에서 몰랐던 내용이 많습니다. 답변자가 외부 자료를 잘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3190번 글이 박윤선의 다른 소개 글과 비교할 때 특별한 것도 이유입니다.
어쨌든 박윤선의 이름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상 이상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이름 정도 들어서 아는 정도지만 그 일반 교인들을 가르치는 분들의 선생들 사이에서는 서로 그 분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최고의 신학자들, 그들 사이에서 최고니 한국 교계 최고 인물이라 표현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 노선은 박윤선과 1950년대를 중심으로 아주 가까왔던 시절을 10여 년 가졌고, 또 전체적으로는 40여 년을 통해 일반 교계가 모르는 접촉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박윤선과 접촉은 평생 박윤선을 노래하는 분들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접촉이나 더 중요한 것은 박윤선의 세계가 그 제자들의 말처럼 그렇게 깊고 높기 때문에 그런 세계의 인물이란 단순히 접촉의 시간과 면대의 거리만 가지고 안다 하기는 곤란합니다. 이 노선은 박윤선을 사실상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박윤선을 밑에서 올려다 봤으나 이 노선은 함께 나란히 있었고 때로는 그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기준에서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원고 작업이 끝나고 출간의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 되면 박윤선에 대한 이 노선의 관계가 일반인의 가시권에 들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3190번의 글은 정성구 목사님의 위치에서 자세히 그리고 유익 된 많은 자료를 담고 있으나 그 글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3190 글 이전과 이후까지 출간할 책은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190 글과 같은 시기에 박윤선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3190번과 이 곳에서 출간할 책을 함께 놓고 비교하면 박윤선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2. 질문하신 '설교 세계'만 우선 집중하겠습니다.
박윤선의 한국 교계 내에서의 가치는 '한국 교계가 알 수 없었던 세계 보수 신학의 성경 해석을 한글로 소개'한 것입니다. 신학으로는 박형룡이 박윤선의 스승급이면서 두 분의 절정기의 실력으로 비교해도 훨씬 위에 있습니다. 박윤선보다 앞 서 공부하거나 함께 공부했던 신학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 중에서는 박윤선을 능가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목회로 말하면 박윤선의 목회는 어린 교인들로서 그를 좋아 하는 분들이 좋았다고 기억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하지만 목회의 일반 모습으로 비교하면 박 목사님 평생 목회는 늘 목회에 관심과 정성은 쏟아도 왠 지 그렇게 잘 되지 않아서 늘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이름을 가진 박윤선의 이름을 고려한다면 목회자로서는 하위 그룹이지 중간도 되지 않습니다.
설교로 말하면 박 목사님은 학식 있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신앙 있는 신학 강사였지 일반 교회의 교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가는 아니었습니다. 정성구 목사님은 한국 보수 교계 최대의 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대 신학자입니다. 대 신학자인 정 목사님이나 그 주변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들에게 박윤선은 일반 신학 강좌가 아니라 신앙과 은혜와 능력을 쏟아 함께 전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가 될 분들이나 그런 수준에 있는 분들은 박윤선의 설교를 은혜롭게 기억하나 한국에 아무 교회나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반 교인들 중에 박윤선의 설교 기억은 그렇게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일반 교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면 그의 생애 중요한 대목 곳곳에 그렇게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한국의 일반 교계에는 설교를 잘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런 분들 중에 한 분 정도로 보이지 그 이상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분은 한국교회사적으로 너무 중요한 시기에 너무 중요한 위치를 받았고, 그 분은 진실 되이 충성했고 그 결과 한국교회사의 신학자 중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는 면은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3. 두 분의 설교 세계
박윤선의 설교 세계가 아주 특별하게 유명했던 것은 해방 후 고려파에서 진리 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들은 있지만 그 당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가 시대적으로 임할 때여서 교파마다 그런 일들이 있었고 물론 고려파가 제일 많았지만 고려파에 많은 강사들에게서 비슷하게 볼 일화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박영기 김창인 박인순 등은 전국을 휩쓸던 유명 강사들이었습니다. 박윤선은 이 분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고 이 분들 다음에 손을 꼽는 여러 분들 중에 한 분입니다. 이에 반해 백 목사님은 앞에 소개한 박영기 김창인 박인순 이런 인물들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라 그 분들을 훨씬 초월해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이 전도사로서 부산 지역에 사경회를 인도한다는 소문이 나면 고려신학교 학생들 전체가 술렁 거리며 공부하는 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학교 수업에 영향을 미쳤던 정도입니다.
박윤선과 비교보다는 차라리 다른 세 분과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김창인의 설교는 최근의 조용기 목사님 설교처럼 그렇게 인기가 폭발적이었습니다. 다만 깊이는 없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나 김창인과 백영희의 설교를 비교한 분들은 김 목사님 설교를 사이다로 표현하고 백 목사님 설교를 곰국으로 비교하곤 했습니다. 박인순 전도사님은 백 목사님의 선배요 동지였으나 실은 백 목사님을 따르는 분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신앙과 영감과 실력이 출중하여 고신 제일의 부흥사 등의 이름을 가졌으나 백 목사님께는 배우는 입장이며 교인 위치라고 해야 맞습니다. 박영기 조사님은 백 목사님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 보이는 인물이었으나 원고 설교만 반복하다가 훗날 더 자라 가는 면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실 곳이 없게 된 정도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해방 후 그리고 6.25 전쟁 직후 총회파와 고려파의 진리 투쟁이 격해 질 때 가장 어렵고 해결 못할 교회가 있으면 백영희 목사님을 강사로 가게 하여 수 많은 교회들을 총회파에서 고려파로 돌아 서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고신을 세우기 위해 총회파와 승산 없는 신앙의 전투를 할 때 백영희라는 인물은 임란에 이순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신의 지도부는 교권에 미련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백영희에 대한 견제와 핍박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이고, 이런 기록은 고신의 당시 이면사를 깊이 다루고 있는 남영환의 '한국교회와 교단' 등 곳곳에서 잘 드러 나고 있습니다.
4. 구체적으로
보통 정성구 목사님의 박윤선 소개와 같은 글은 위험스런 인물이라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독재자니 사이비 교주니 독주 독선이니 하여 입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고 또 최근 세계와 한국의 사회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홈에서 백 목사님을 두고 그렇게 표현했다면 온갖 비판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나 정성구 목사님이 박윤선을 그렇게 표현하게 되면 이 번에는 지도력이 그렇게 있었다, 역시 그런 남 다른 면이 있었다, 신령했다 등으로 미화가 됩니다. 사실 미화인지 정평인지 혹평인지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표현해야 할 것인데 제 것은 모두 정평이고 남의 것은 미화라고 혹평해 버립니다. 이 번에는 총신 신학교 교장 출신의 대 신학자가 박윤선을 평가한 것이니 이런 기회에 같은 기준으로 백영희를 소개한다면 외부 비판이 어려울 듯하여 제대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 설교 횟수
: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
백 목사님의 설교는 매일 새벽과 수금 밤 예배와 주일 오전 오후 총 11 회가 기본이었습니다. 예배의 설교 시간도 박 목사님의 두 배 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횟수와 분량으로 비교한다면 5 - 10 배 정도일 것입니다.
■ 다른 설교자
: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
백 목사님도 그러했는데 백 목사님이 그렇게 하면 독재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정성구 목사님이 박윤선을 그렇게 소개하면서 극찬하는 말에는 아무 감히 입을 열지 못할 듯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양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백 목사님은 세계 10대 교회에 한국 5대 교회 시절에도 혼자 그렇게 설교를 다했습니다. 병환이나 누구를 좀 시켜서 지켜 보려고 가끔 세울 때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한 주간 11 회 설교 전부를 다 맡았습니다. 그리고 서부교회는 부목이라는 제도, 부교역자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혼자 죽기로 충성했습니다. 서부교회의 부목이나 부교역자 개념은 백 목사님 70대에 나타 나는데 일반 교인으로서 교회 일을 너무 많이 맡고 있는 경우 그 일에 대한 기초 생활비를 조금 지출하는 정도였습니다. 자원봉사자가 기초 비용을 받는 정도로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 교회 특별 행사
: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
총공회 교회는 원래 헌신 예배나 특별 예배는 없습니다. 전체 교인이 한 자리에 함께 하는 고정 예배가 전부입니다. 행사식 예배, 행사식 교회 운영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 설교 중심 운영
: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
▷
이런 면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박 목사님은 백 목사님의 주변에도 다가 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산 시절에 박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자기 제자였으나 목회와 설교를 두고는 너무 부러워서 백 목사님 목회를 연구하고 많은 면으로 따라 했던 정도입니다.
■ 신본 중심 설교
: 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
정 목사님은 신본 인본이라는 표현을 적지 않았으나 그런 내용으로 읽었습니다. 교인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교인들이 무엇을 원할까 이런 현장의 수요를 보며 물건을 공급하는 것은 장사의 상술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펴 그 뜻을 전하는 위치입니다. 백 목사님의 평생 설교는 매 시간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은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여기에 주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찾아 오신 주님은...'이라는 표현을 1950년대 10여 년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진실 된 심부름꾼의 자세조차도 그를 비판할 때 자기 말은 하나님의 말이라고 교인을 세뇌했다는 식으로 돌려 친 것이 외부의 비판들이었습니다. 박윤선 역시 이런 세계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자기를 감화 감동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전하는 전달자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백 목사님 역시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그렇게 노력한 것과 실제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 세계는 남의 속에 들어 있어 알기는 어려우나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씀으로 짐작하면 역시 백 목사님의 세계가 훨씬 위에 있습니다.
■ 목회와 신학
: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
이 면에서는 이제 백 목사님과 박 목사님은 각각 아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앞에 사안들은 뜻은 같으나 그 정도 차이라 한다면 박윤선은 신학자며 백영희는 신학 자체를 박윤선만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교회와 신앙에 큰 폐단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면은 이 번 답변에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 산 신학, 신학 있는 설교
: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
박윤선은 그의 설교를 자기가 교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던지고자 하는 말씀을 받아서 전했고 그 과정에서 박윤선은 단순히 마이크와 같은 기계가 아니라 본인이 먼저 그 말씀을 받을 때 감사했고 기뻤으며 그 말씀을 전할 때 역시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니 유기적 관계를 가진 참 종이었습니다.
백영희 역시 그러했고 백영희는 이런 면에서 더욱 뜨겁고 간절했으나 신학자가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신학자라는 간판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사이비라는 말을 쉽게 붙여 버리는 것이 문제인데 3190번의 글은 이 노선의 상식이며 백영희의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걸음을 극찬하는 효과가 있어 남 다르게 읽고 '일반자료'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나중에 공회에 대해 시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성구 목사님의 박윤선에 대한 글을 먼저 비판 좀 해 보라 할 것입니다. 학위 앞에 입을 닫는 사람, 그에게 학위는 우상입니다. 박윤선 이름에는 무조건 입을 닫는 사람, 그는 박윤선을 우상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백영희 신앙 노선은 그런 일을 초월한 길입니다.
■ 설교의 능력
: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
이런 표현과 기억을 기준으로 두 분을 비교한다면 박희천 목사님처럼 백영희 설교는 한국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교회 역사적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박윤선이 시시하거나 함부로 해도 될 인물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나, 이 노선에 비교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성구 목사님의 글은 박윤선이 고려파에서 쫓겨 나고 합동 교단에 들어 가기 전의 1960년대 3 년 기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의 동산교회가 박 목사님으로서 목회자로서는 가장 성공했던 시기인데 그 동산교회 박윤선 목사님이 동산교회를 두고 그 다음 갔던 곳이 총공회 대구 지방의 동성로교회였습니다. 이 곳에는 고려파와 합동 교단에서도 주목하고 알아 주는 대구 교회사 한 중심에 있는 유력 교인들이 있는 곳입니다. 동성로교회로 부임한 박윤선 목사님은 이 곳에서, 세계 최고의 정통 보수 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한국 최고의 신학자 박윤선의 이름으로 목회를 시작했다가 총공회 교인들과 교리 성경 목회 예배 설교 등 모든 면을 두고 정면으로 난상토론과 신앙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석 달 정도에 바로 떠났습니다. 백영희가 아니라 백영희 신앙 노선의 교인들과의 논쟁에서 손을 들고 나간 정도입니다. 당시 기록은 별도로 전할 내용이 많으나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칩니다.
5. 현재 두 분이 가신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강단에는 별별 강단용 설교 자료가 쏟아 지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기 위한 신학의 배경을 살피는 데는 여전히 박윤선의 주석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가진 듯합니다. 그러나 설교 내용에 직접 인용 되는 '설교' 자료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홈에서 제공하는 백영희 설교 내용과 박윤선의 내용은 하늘과 땅 사이입니다. 박윤선의 설교 내용을 그대로 읽거나 그대로 전해 주면서 목회를 하거나 그런 설교를 듣고 있는 교회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이렇게 말하더라, 스펄젼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박윤선 주석에 이 단어의 뜻이 이렇다고 되어 있다... 이런 식의 인용이 전부입니다. 백 목사님 설교는 전국에 수 많은 교회에서 그 내용이 대량으로 그대로 옮겨 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답변자로서는 박윤선 목사님조차 멀리서 지켜 보며 부러워 할 정도의 신앙인데 박윤선 백영희 두 분을 비교하라면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변자는 뒷 동산이지만 백두산과 에베레스트산의 높이를 비교하라면 하나는 국내 최고요 하나는 세계 최고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
: 일반자료방에서 흔치 않는 흥미로운 자료를 보고 문의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보수교계 대표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교가 자주 있어 참고가 됩니다. 우리가 당장 따라할 일은 아니나 염두에 두고 소망할 일로 생각합니다.
:
: 박윤선 목사님은 설교를 혼자 독주하셨군요. 민주적 교회는 한 사람의 훌륭한 점을 답습하게 하는 것보다 체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주신 은사를 고루 전하게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교인으로 자라가지 않을까요? 비록 훌륭하다하나 한 사람이 전부를 다 맡을 수는 없는데 손님 목사님께도 강단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독선으로 비판을 받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백목사님과 닮은 점이 많더군요. 백목사님을 비판한 분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
:
: +++++++++ ( 인용 ) +++++++
:
: ①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목회하던 시기는 50대 초반으로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데다 가장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이사야서를 주석하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증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
: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은 50대를 막 넘 긴,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가장 힘 있게 설교할 때인데, 주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당시 박 목사님은 이사야서를 집필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재에서 주석을 쓰시다가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메시지를 온 몸을 던져 외치실 때는 실로 간장이 녹는 듯 했다.”
:
:
:
박윤선의 설교 세계
일반자료방에서 흔치 않는 흥미로운 자료를 보고 문의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보수교계 대표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교가 자주 있어 참고가 됩니다. 우리가 당장 따라할 일은 아니나 염두에 두고 소망할 일로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설교를 혼자 독주하셨군요. 민주적 교회는 한 사람의 훌륭한 점을 답습하게 하는 것보다 체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주신 은사를 고루 전하게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교인으로 자라가지 않을까요? 비록 훌륭하다하나 한 사람이 전부를 다 맡을 수는 없는데 손님 목사님께도 강단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독선으로 비판을 받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백목사님과 닮은 점이 많더군요. 백목사님을 비판한 분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 ( 인용 ) +++++++
①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목회하던 시기는 50대 초반으로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데다 가장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이사야서를 주석하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증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은 50대를 막 넘 긴,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가장 힘 있게 설교할 때인데, 주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당시 박 목사님은 이사야서를 집필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재에서 주석을 쓰시다가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메시지를 온 몸을 던져 외치실 때는 실로 간장이 녹는 듯 했다.”
---------------------------
일반자료방에서 흔치 않는 흥미로운 자료를 보고 문의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보수교계 대표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교가 자주 있어 참고가 됩니다. 우리가 당장 따라할 일은 아니나 염두에 두고 소망할 일로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설교를 혼자 독주하셨군요. 민주적 교회는 한 사람의 훌륭한 점을 답습하게 하는 것보다 체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주신 은사를 고루 전하게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교인으로 자라가지 않을까요? 비록 훌륭하다하나 한 사람이 전부를 다 맡을 수는 없는데 손님 목사님께도 강단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독선으로 비판을 받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백목사님과 닮은 점이 많더군요. 백목사님을 비판한 분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 ( 인용 ) +++++++
①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목회하던 시기는 50대 초반으로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데다 가장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이사야서를 주석하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증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은 50대를 막 넘 긴,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가장 힘 있게 설교할 때인데, 주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당시 박 목사님은 이사야서를 집필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재에서 주석을 쓰시다가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메시지를 온 몸을 던져 외치실 때는 실로 간장이 녹는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