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 목사님 - 성경과 신학 배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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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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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0 00:00
'백영희 전기' 또는 '공회 노선의 역사' 또는 '공회의 교리 형성 과정과 일반 신학의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쯤 깊게 살펴 볼 내용을 질문해 주셨습니다. 질문자 한 분만을 상대한다면 단답식으로 안내하면 간단하겠으나 이 시점에서 한 번 정도 요약할 필요를 느껴 조금 길게 글을 적고자 합니다. 우선 글의 서론 부분을 적고, 내일쯤 두 번째 글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백 목사님의 성경 깨달음
- 초기 상황
백 목사님은 1936년에 신앙을 출발했고 1952년 7월에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교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을 접하는 일은 있었으나 예배와 설교로만 상대했고, 한두 달의 진주 '경남성경학교'를 다녔으나 신학이 아니라 고등성경학과 과정이었고 그 것도 본과가 아니라 '예과' 과정이었습니다. 성경 통신과를 공부한 경우도 있으나 성경의 본문을 질문하는 문제에 본문을 보고 답을 적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성경 학습
백 목사님의 성경 지식은 엉덩이가 패여 방석을 5 - 6 개를 깔아야 하도록 정독에 정독을 거듭했고 본문을 다 외울 정도로 성경 하나만 알았지 그 외의 것은 머리에 담지도 않았고 또 체질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 설교를 자주 했고 삭개오 표현이 없다 해도 평생의 설교 흐름에는 그런 면이 대단히 강한데 예수님을 따르고 배울 때 그 제자들에게 전해 듣고 그 제자의 제자에게 전해 듣는 방식보다 뽕나무 위에 올라 가서 예수님을 직통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주력했고 모든 교인들에게 평생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백 목사님의 성경 배움은 일단 성경 그대로 읽고 머리에 담은 다음에는 틀렸든지 말았든지 아는 대로 생활에서 실행을 했습니다. 실행을 한다는 의지가 충천했기 때문에 교회를 출발한 지 한 주간만에 안식교의 설명을 듣고 성경대로 실행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안식교로 옮겼는데 두 주간만에 다시 돌아 옵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그 속에는 성경 지식이 들어 있었고, 그대로 살려는 진실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 된 것은 실행을 해 가다 보면 열매를 보아 틀린 줄 알고 돌아 서기도 했고 대부분의 실행은 비록 어리지만 방향을 바로 잡고 점점 자라 갔습니다.
- 1945년 해방 이후
1936년에 믿고 1939년까지 초기 신앙에 불이 붙었고 1939년부터 45년까지 6 년 정도를 신사참배 박해 속에 목숨 걸고 50여 명 전체 교인을 붙들고 교회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맺었는데, 벌써 이 정도가 되면 세계 최고의 신학을 머리 속에 전부 집어 넣고 신학교에서 최고 수준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 이런 이들과 비교할 때 성경에 대한 바른 깨달음에서는 이미 능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박 박사님들은 신사참배를 했거나 피해 다녔지 환란 속에서 승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분들의 성경 지식은 사람이 사람의 노력으로 더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던 신학의 이론이었고, 백 목사님은 엉성했을지라도 자기와 교인 전체의 목숨을 성경 말씀에 맡겨 놓고 환란을 그대로 통과를 했으니 이 결과를 볼 때 그의 성경 지식은 '살아 있었고' '옳은 방향이었으며' '실제 자기라는 사람을 말씀으로 변화를 시켜 놓았고' '그 말씀이 그를 붙들과 사선을 통과한 차원'이었습니다.
2. 신학과의 접촉
- 혼자 믿고 갈 신앙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백 목사님을 한국 교회 보수 정통 신앙의 중심지였던 부산으로 장소를 옮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손꼽는 유명 사경회 강사였으니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편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목회는 이미 신사참배와 6.25 점령 치하에서 예배 시간을 전부 평소처럼 지키거나 오히려 사경회를 열어 신앙을 펼치며 믿었으며 교인들을 순교와 순생의 신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실력과 결과는 검증이 다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동행의 세계를 누리며 사는 것으로 전부였다면 경남 거창의 덕유산 산속에 그냥 두셨을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백 목사님을 통해 세계 신학의 역사 계통에 세우고 그 계통에서 지난 역사와 비교할 때 한 차원을 더 끌어 올리는 일을 맡기고, 아마 말세 마지막을 맡아야 할 신앙의 노선과 내용을 책임 지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의 믿은 처음부터 평생의 모든 상황은 '역사 교회의 안에서' '역사 교회의 계통을 이어며' '역사 교회의 한 중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되' '과거와 차원을 아주 달리 할 내용을 주셨고' '실질적으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세 최종 순간에 세계 모든 교회나 믿는 사람의 신앙을 하나로 모아 주님의 재림을 맞을 정도'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일반 신학과의 접촉
미국의 신앙이 세계 신앙의 중심이거나 최고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것이 세상 학문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거나 최고가 아니라 해도 분명한 것은 미국이라는 그릇에는 세계 중심이나 최고가 담기거나 소개 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신앙 면에서도 보면 훌륭한 신앙들이 대륙에서 먼저 시작하지만 그 교회들이 미국으로 이주를 하든 아니면 최소한 미국 교회에 알려 지기라도 하여 미국을 통해 선교를 받은 한국 교회는 미국을 통해 괜찮은 신앙과 함께 역사와 당대 세계 최고의 신앙들을 소개 받고 전수 받는 등의 혜택은 있었습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미국과 세계의 그 수 많은 유명 신학교에 수도 없이 공부를 했던 학생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영어와 외국어가 너무 서툴어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외국어 실력이 너무 형편이 없다 보니 그들이 해외에서 무슨 세계 신학을 다 담아 온 것처럼 알려 졌고 과대 선전이 된 면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많은 책과 자료를 가지고 와서 우리 말로 번역을 한 다음 책으로 소개를 했는데 그들의 소개한 내용은 거의 전부 외국 것을 갖다 배껴 옮겼으니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표절 투성입니다.
여기서 이 글을 적는 이유는 그 분들의 실력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 분들을 그 시대에 그렇게 쓰신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하는 자세로 소개합니다. 그들이 더 유능했더라면 자기 생각을 많이 집어 넣어 아주 몹쓸 신학이 되었을 터인데 이미 오랜 세월 유럽과 미국에서 갈고 닦아 바로 형성 된 좋은 신학의 내용들을 성의 있게 믿음으로 잘 소개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을 거의 섞지 않았으므로 한국 교회는 박윤선을 통해 세계 교회의 성경 해석을, 그리고 박형룡을 통해 세곔 교회의 교리를 최대한 그대로 직접 받게 되는 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신학자의 숫자조차 통계로 잡을 수도 없을 만큼 많고 저서도 봇물이 터진 듯하고, 그냥 옮기면 표절이 되지 않을 수도 없고 또 이미 소개도 되어 졌고 또 요즘 시대 상황이 지식 도적놈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시대이니, 솔직히 자기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따다가 옮기면서 자기 것을 적절히 섞어 버리게 되니 분명히 성경에서 자기들이 직접 깨달은 것은 아닌데도 너무 많은 출처를 너무 교묘히 어지럽게 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이제 정품과 복사품과 변질품을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최근의 신학자들과 그 저서들은 바닷물처럼 넘쳐 나지만 거의 전부는 쓰지 못할 쓰레기들이라 난지도에 갖다 묻어야 할 정도인데, 박 박사님 두 분의 것은 아예 처음부터 외국에 좋은 것을 전부 표시하고 갖다 옮겼다고 표시를 해 놓았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를 막 벗어 나는 청소년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건전한 과거 좋은 신학을 바로 접할 기회를 맞았습니다.
백 목사님은 1952년부터 고려신학교를 직접 다녔고 그 기간에 세계 정통의 신학을 최적의 교수로 구성 된 신학교에서 접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초등학교 공부만 5 년 했고, 이후 세상 일만 하고 농사만 지었던 이유로 신학의 복잡한 용어나 일반 학문의 배경을 알지 못하여 학습 과정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 곤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그 신학 과정에 고려파와 총회파의 양분을 겪으며 백 목사님은 전국의 교회에 사경회를 다니며 고려파로 돌아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바로 이 기간에
백 목사님은, 고려신학교를 오기 전까지 신학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덕유산 골짝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인들 가정에 시대적 가정적 환란이 있을 때 목회자로서 그들을 지도하는 일에만 주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읽은 성경과 그가 깨달은 성경 그리고 그가 가르치며 스스로 수정하며 자라 가며 형성했던 자기의 성경 체계와 교리 체계가 혹시 시골 무식한 목회자의 착오에서 끝이 나지 않을지? 이 문제를 두고 자기의 실행과 결과를 놓고 보면 확신이 있는데 하나님은 역사와 세계 모든 교회의 한 분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이 다른 시대와 다른 세계의 종들에게 가르친 것과 비교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원래 이런 인간 방법론적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것조차 시간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할 분은 아니었으나, 1936년에 개척한 개명교회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를 통과하고 1949년에 이르런 시점에 주남선 목사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지방의 일반 교회의 인사 이동에 대상이 되도록 권면을 했는데 그런 체계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했고, 그 거부 즉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아 즉시 돌아 서고 순종을 하게 되자 1959년 7월에 산 너머 마을에 있는 위천교회로 이동을 했습니다. 일단 이렇게 이동을 하게 되자 죄 되지 않으면 또는 명확하게 잘못 된 것이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일단 신앙의 선배들에게 순종을 한다는 자세로 목회를 했고 당시 장로교의 일반 상식과 체계에 따라 신학교 진학도 시도하게 됩니다. 백 목사님은 성경이 아닌 신학서를 들고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은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 자체가 죄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할지라도 견문하는 정도로 거친다면 훗날 신학을 잘못 알고 잘못 전하는 이들을 접할 때 불편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신학교를 진학하게 됩니다.
- 고려신학교에서 얻은 것
고려신학교에서 당시 미국의 제일 보수신학교들을 거쳐 나온 분들을 통해 백 목사님은 역사와 당대 세계 신학의 제일 엄한 것들을 소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과 상관이 없는 철학 과목이나 교양과목이나 교회 역사 같은 것을 제외하고 '주경신학'이나 '교리' 과목에 있어서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거의 전부 자신이 평소 덕유산 골짝에서 성경 하나를 들고 배운 것과 일치했습니다.
바로 이 때 한 강의실에서 함께 배운 분 중에 총신신학교 박희천 목사님이 젊은 청년으로 있었고 '백 목사님은 당시 강의를 들을 때 하나님은 참 묘하시다, 어떻게 덕유산 골짝에서 성경 하나만 들고 깨달은 것과 역사에 훌륭한 신학자들이 깨달아 적어서 이렇게 전해 지는 것과 꼭 같을까 라고 했었다'며 당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성경과 설교를 두고는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되 학적인 면보다 신앙 경건과 실천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학적으로도 국내 최고 신학교에서 오랜 세월 성경을 가르친 학자로 인정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 몸을 담고 최고 지도자로 존경 받아 온 교파는 다른 곳이 아니라 공회를 정죄했던 경북 노회가 속한 합동 교파이며 그 배경에는 박윤선 목사님까지 개입 되어 있는 줄을 아는 분입니다. 그런 박희천 교수님이 평생 합동교단의 총신 신학교에서 성경과 설교는 칼빈과 백영희 두 인물이라 소개하여 국내 유명 지도자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입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떠 올리다 보면 착오의 가능성도 제기하겠는데 박희천 목사님은 그의 강의 시간에 늘 인용했던 인물이고 그 때의 그런 말을 반복했으며 1950년대 초반에 한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들으며 백 목사님의 그런 면을 본 것은 누구의 독백을 줏어 듣고 반복하는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불과 20여 명 정도가 한 학년이며 기숙사를 함께 사용했고 그 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며 실제 그렇게 신앙과 생활과 공부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었습니다. 당시 백 목사님은 신학교와 그 지역과 고신을 휩쓸고 다녔던 분이며 그 별명이 면도칼이었습니다. 사석이나 쉬는 시간에 말 한 마디도 강단의 설교처럼 조심하며 들어야 했다는 것이 당시를 아는 분들의 증언입니다. 그 분의 80 세 최후까지도 늘 그러했습니다.
-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백 목사님의 설교는 1936년 그 분의 처음 믿던 시절에 그 분보다 먼저 믿고 그를 전도했던 그 주변의 믿는 친지들과 초기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분들, 심지어 답변자가 당시 첫 순간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한결 같이, 백영희라는 인물은 처음 믿고 술담배를 정리하며 출발한 순간부터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의 신앙 자세와 걸음, 설교의 방법과 내용이 늘 동일했다고 일치합니다. 조금 다른 면을 보이는 시기는 바로 1950년대 신학교를 다녔던 때와 그 직후만 질문자께서 지적한 대로 '델리취'라는 이름도 인용하거나 심지어 원어까지도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여기서 최종 결론을 잠깐 유보하겠습니다.
왜 '신학을 부정하다시피' 하는 백 목사님의 50년대 자료에 일반 신학자나 신학 이론들이 그대로 인용이 되고 있을까요? 백 목사님은 신학자, 신학서, 신학, 원어...를 전면 비판하는 분입니다. 자기 모순이 아닐까요? '이분설을 옳다 하고 삼분설을 비판한 사실' '델리취와 같은 신학자들을 인용하고' '원어까지 자주 인용한 사실'들은 80년대의 백 목사님 설교록을 가지고 본다면 50년대의 백 목사님은 탈선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80년대 설교를 읽다 보면 백 목사님은 자기의 50년대 과거를 잊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백 목사님도 세계 신학의 전통을 신학을 통해 배웠거나 신학서를 몰래 읽고 공부를 해 놓고 80년대 설교할 때는 마치 신학 없이 성경에서 바로 배운 것처럼 우리를 속인 것일까요?
답변자가 직접 상대할 기회가 있는 분들 중에 설교록의 깊이를 다른 서적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이런 문제를 미리 설명했습니다. 내일 답변자가 설명을 이어 가겠지만, 이 곳에서 직문직답으로 소개를 받는 것보다 '주관식 과제'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함께 마음 속으로 자기 답을 마련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계속 중)
>> 니고데모 님이 쓰신 내용 <<
:
: 1.백영희목사님은 신학교에 가기전에,어느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않고
: 칼빈주의의 깨달음을 혼자서 성경만 읽고 깨달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요?
:
: 백목사님도 1954년까지는 이분론을 믿었고, 삼분론을 배격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혼자서 성경만 읽고 이분론을 믿으신것인지? 아니면 신학교에 가서 정통칼빈주의가 이분론을 믿고 삼분론을 배격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료방에 보면 백목사님이
: 델리취를 언급하면서 삼분론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영향을 받은것 같기도 합니다.
:
: 2. 삼위일체교리도 혼자서 깨달으셨는지요?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혹시 혼자서 성경을 읽고
: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 3. 백영희목사님은 죄를
:
: (1)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 (2) 불의의 죄 (3) 원수된 죄 (4) 절망의 죄로 크게 4가지로
: 구분을 하셨습니다.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는 위의 4가지의 분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 2000년 기독교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모든 구원론들은 기본구원 - 건설구원 - 기능구원 안에 들어갑니다.2000년 모든 죄에 대한 깨달음들은 백목사님이 분류한 4가지 종류안에
: 들어가는 것인가요?
:
: 백목사님이 죄를 4가지로 분류하셨는데,4가지의 분류도 `구원을 기본구원 건설구원 기능구원처럼 명확하게 나눈것처럼`, 죄를 성경적으로 가장 바르게 나눈것으로 봐도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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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스마트폰이나 테블릿PC로는 스팸방지바로밑에 스팸방지 번호가 뜨지 않아서
: 일반문답방에 질문이 올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총공회문답방에는 스팸방지시스템
: 자체가 없어서 질문이 올려집니다. 일반문답방에도 스마트폰이나 테플릿PC로 질문을
: 올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백 목사님의 성경 깨달음
- 초기 상황
백 목사님은 1936년에 신앙을 출발했고 1952년 7월에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교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을 접하는 일은 있었으나 예배와 설교로만 상대했고, 한두 달의 진주 '경남성경학교'를 다녔으나 신학이 아니라 고등성경학과 과정이었고 그 것도 본과가 아니라 '예과' 과정이었습니다. 성경 통신과를 공부한 경우도 있으나 성경의 본문을 질문하는 문제에 본문을 보고 답을 적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성경 학습
백 목사님의 성경 지식은 엉덩이가 패여 방석을 5 - 6 개를 깔아야 하도록 정독에 정독을 거듭했고 본문을 다 외울 정도로 성경 하나만 알았지 그 외의 것은 머리에 담지도 않았고 또 체질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 설교를 자주 했고 삭개오 표현이 없다 해도 평생의 설교 흐름에는 그런 면이 대단히 강한데 예수님을 따르고 배울 때 그 제자들에게 전해 듣고 그 제자의 제자에게 전해 듣는 방식보다 뽕나무 위에 올라 가서 예수님을 직통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주력했고 모든 교인들에게 평생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백 목사님의 성경 배움은 일단 성경 그대로 읽고 머리에 담은 다음에는 틀렸든지 말았든지 아는 대로 생활에서 실행을 했습니다. 실행을 한다는 의지가 충천했기 때문에 교회를 출발한 지 한 주간만에 안식교의 설명을 듣고 성경대로 실행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안식교로 옮겼는데 두 주간만에 다시 돌아 옵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그 속에는 성경 지식이 들어 있었고, 그대로 살려는 진실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 된 것은 실행을 해 가다 보면 열매를 보아 틀린 줄 알고 돌아 서기도 했고 대부분의 실행은 비록 어리지만 방향을 바로 잡고 점점 자라 갔습니다.
- 1945년 해방 이후
1936년에 믿고 1939년까지 초기 신앙에 불이 붙었고 1939년부터 45년까지 6 년 정도를 신사참배 박해 속에 목숨 걸고 50여 명 전체 교인을 붙들고 교회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맺었는데, 벌써 이 정도가 되면 세계 최고의 신학을 머리 속에 전부 집어 넣고 신학교에서 최고 수준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 이런 이들과 비교할 때 성경에 대한 바른 깨달음에서는 이미 능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박 박사님들은 신사참배를 했거나 피해 다녔지 환란 속에서 승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분들의 성경 지식은 사람이 사람의 노력으로 더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던 신학의 이론이었고, 백 목사님은 엉성했을지라도 자기와 교인 전체의 목숨을 성경 말씀에 맡겨 놓고 환란을 그대로 통과를 했으니 이 결과를 볼 때 그의 성경 지식은 '살아 있었고' '옳은 방향이었으며' '실제 자기라는 사람을 말씀으로 변화를 시켜 놓았고' '그 말씀이 그를 붙들과 사선을 통과한 차원'이었습니다.
2. 신학과의 접촉
- 혼자 믿고 갈 신앙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백 목사님을 한국 교회 보수 정통 신앙의 중심지였던 부산으로 장소를 옮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손꼽는 유명 사경회 강사였으니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편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목회는 이미 신사참배와 6.25 점령 치하에서 예배 시간을 전부 평소처럼 지키거나 오히려 사경회를 열어 신앙을 펼치며 믿었으며 교인들을 순교와 순생의 신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실력과 결과는 검증이 다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동행의 세계를 누리며 사는 것으로 전부였다면 경남 거창의 덕유산 산속에 그냥 두셨을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백 목사님을 통해 세계 신학의 역사 계통에 세우고 그 계통에서 지난 역사와 비교할 때 한 차원을 더 끌어 올리는 일을 맡기고, 아마 말세 마지막을 맡아야 할 신앙의 노선과 내용을 책임 지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의 믿은 처음부터 평생의 모든 상황은 '역사 교회의 안에서' '역사 교회의 계통을 이어며' '역사 교회의 한 중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되' '과거와 차원을 아주 달리 할 내용을 주셨고' '실질적으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세 최종 순간에 세계 모든 교회나 믿는 사람의 신앙을 하나로 모아 주님의 재림을 맞을 정도'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일반 신학과의 접촉
미국의 신앙이 세계 신앙의 중심이거나 최고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것이 세상 학문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거나 최고가 아니라 해도 분명한 것은 미국이라는 그릇에는 세계 중심이나 최고가 담기거나 소개 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신앙 면에서도 보면 훌륭한 신앙들이 대륙에서 먼저 시작하지만 그 교회들이 미국으로 이주를 하든 아니면 최소한 미국 교회에 알려 지기라도 하여 미국을 통해 선교를 받은 한국 교회는 미국을 통해 괜찮은 신앙과 함께 역사와 당대 세계 최고의 신앙들을 소개 받고 전수 받는 등의 혜택은 있었습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미국과 세계의 그 수 많은 유명 신학교에 수도 없이 공부를 했던 학생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영어와 외국어가 너무 서툴어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외국어 실력이 너무 형편이 없다 보니 그들이 해외에서 무슨 세계 신학을 다 담아 온 것처럼 알려 졌고 과대 선전이 된 면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많은 책과 자료를 가지고 와서 우리 말로 번역을 한 다음 책으로 소개를 했는데 그들의 소개한 내용은 거의 전부 외국 것을 갖다 배껴 옮겼으니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표절 투성입니다.
여기서 이 글을 적는 이유는 그 분들의 실력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 분들을 그 시대에 그렇게 쓰신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하는 자세로 소개합니다. 그들이 더 유능했더라면 자기 생각을 많이 집어 넣어 아주 몹쓸 신학이 되었을 터인데 이미 오랜 세월 유럽과 미국에서 갈고 닦아 바로 형성 된 좋은 신학의 내용들을 성의 있게 믿음으로 잘 소개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을 거의 섞지 않았으므로 한국 교회는 박윤선을 통해 세계 교회의 성경 해석을, 그리고 박형룡을 통해 세곔 교회의 교리를 최대한 그대로 직접 받게 되는 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신학자의 숫자조차 통계로 잡을 수도 없을 만큼 많고 저서도 봇물이 터진 듯하고, 그냥 옮기면 표절이 되지 않을 수도 없고 또 이미 소개도 되어 졌고 또 요즘 시대 상황이 지식 도적놈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시대이니, 솔직히 자기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따다가 옮기면서 자기 것을 적절히 섞어 버리게 되니 분명히 성경에서 자기들이 직접 깨달은 것은 아닌데도 너무 많은 출처를 너무 교묘히 어지럽게 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이제 정품과 복사품과 변질품을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최근의 신학자들과 그 저서들은 바닷물처럼 넘쳐 나지만 거의 전부는 쓰지 못할 쓰레기들이라 난지도에 갖다 묻어야 할 정도인데, 박 박사님 두 분의 것은 아예 처음부터 외국에 좋은 것을 전부 표시하고 갖다 옮겼다고 표시를 해 놓았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를 막 벗어 나는 청소년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건전한 과거 좋은 신학을 바로 접할 기회를 맞았습니다.
백 목사님은 1952년부터 고려신학교를 직접 다녔고 그 기간에 세계 정통의 신학을 최적의 교수로 구성 된 신학교에서 접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초등학교 공부만 5 년 했고, 이후 세상 일만 하고 농사만 지었던 이유로 신학의 복잡한 용어나 일반 학문의 배경을 알지 못하여 학습 과정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 곤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그 신학 과정에 고려파와 총회파의 양분을 겪으며 백 목사님은 전국의 교회에 사경회를 다니며 고려파로 돌아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바로 이 기간에
백 목사님은, 고려신학교를 오기 전까지 신학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덕유산 골짝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인들 가정에 시대적 가정적 환란이 있을 때 목회자로서 그들을 지도하는 일에만 주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읽은 성경과 그가 깨달은 성경 그리고 그가 가르치며 스스로 수정하며 자라 가며 형성했던 자기의 성경 체계와 교리 체계가 혹시 시골 무식한 목회자의 착오에서 끝이 나지 않을지? 이 문제를 두고 자기의 실행과 결과를 놓고 보면 확신이 있는데 하나님은 역사와 세계 모든 교회의 한 분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이 다른 시대와 다른 세계의 종들에게 가르친 것과 비교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원래 이런 인간 방법론적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것조차 시간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할 분은 아니었으나, 1936년에 개척한 개명교회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를 통과하고 1949년에 이르런 시점에 주남선 목사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지방의 일반 교회의 인사 이동에 대상이 되도록 권면을 했는데 그런 체계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했고, 그 거부 즉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아 즉시 돌아 서고 순종을 하게 되자 1959년 7월에 산 너머 마을에 있는 위천교회로 이동을 했습니다. 일단 이렇게 이동을 하게 되자 죄 되지 않으면 또는 명확하게 잘못 된 것이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일단 신앙의 선배들에게 순종을 한다는 자세로 목회를 했고 당시 장로교의 일반 상식과 체계에 따라 신학교 진학도 시도하게 됩니다. 백 목사님은 성경이 아닌 신학서를 들고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은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 자체가 죄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할지라도 견문하는 정도로 거친다면 훗날 신학을 잘못 알고 잘못 전하는 이들을 접할 때 불편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신학교를 진학하게 됩니다.
- 고려신학교에서 얻은 것
고려신학교에서 당시 미국의 제일 보수신학교들을 거쳐 나온 분들을 통해 백 목사님은 역사와 당대 세계 신학의 제일 엄한 것들을 소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과 상관이 없는 철학 과목이나 교양과목이나 교회 역사 같은 것을 제외하고 '주경신학'이나 '교리' 과목에 있어서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거의 전부 자신이 평소 덕유산 골짝에서 성경 하나를 들고 배운 것과 일치했습니다.
바로 이 때 한 강의실에서 함께 배운 분 중에 총신신학교 박희천 목사님이 젊은 청년으로 있었고 '백 목사님은 당시 강의를 들을 때 하나님은 참 묘하시다, 어떻게 덕유산 골짝에서 성경 하나만 들고 깨달은 것과 역사에 훌륭한 신학자들이 깨달아 적어서 이렇게 전해 지는 것과 꼭 같을까 라고 했었다'며 당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성경과 설교를 두고는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되 학적인 면보다 신앙 경건과 실천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학적으로도 국내 최고 신학교에서 오랜 세월 성경을 가르친 학자로 인정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 몸을 담고 최고 지도자로 존경 받아 온 교파는 다른 곳이 아니라 공회를 정죄했던 경북 노회가 속한 합동 교파이며 그 배경에는 박윤선 목사님까지 개입 되어 있는 줄을 아는 분입니다. 그런 박희천 교수님이 평생 합동교단의 총신 신학교에서 성경과 설교는 칼빈과 백영희 두 인물이라 소개하여 국내 유명 지도자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입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떠 올리다 보면 착오의 가능성도 제기하겠는데 박희천 목사님은 그의 강의 시간에 늘 인용했던 인물이고 그 때의 그런 말을 반복했으며 1950년대 초반에 한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들으며 백 목사님의 그런 면을 본 것은 누구의 독백을 줏어 듣고 반복하는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불과 20여 명 정도가 한 학년이며 기숙사를 함께 사용했고 그 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며 실제 그렇게 신앙과 생활과 공부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었습니다. 당시 백 목사님은 신학교와 그 지역과 고신을 휩쓸고 다녔던 분이며 그 별명이 면도칼이었습니다. 사석이나 쉬는 시간에 말 한 마디도 강단의 설교처럼 조심하며 들어야 했다는 것이 당시를 아는 분들의 증언입니다. 그 분의 80 세 최후까지도 늘 그러했습니다.
-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백 목사님의 설교는 1936년 그 분의 처음 믿던 시절에 그 분보다 먼저 믿고 그를 전도했던 그 주변의 믿는 친지들과 초기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분들, 심지어 답변자가 당시 첫 순간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한결 같이, 백영희라는 인물은 처음 믿고 술담배를 정리하며 출발한 순간부터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의 신앙 자세와 걸음, 설교의 방법과 내용이 늘 동일했다고 일치합니다. 조금 다른 면을 보이는 시기는 바로 1950년대 신학교를 다녔던 때와 그 직후만 질문자께서 지적한 대로 '델리취'라는 이름도 인용하거나 심지어 원어까지도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여기서 최종 결론을 잠깐 유보하겠습니다.
왜 '신학을 부정하다시피' 하는 백 목사님의 50년대 자료에 일반 신학자나 신학 이론들이 그대로 인용이 되고 있을까요? 백 목사님은 신학자, 신학서, 신학, 원어...를 전면 비판하는 분입니다. 자기 모순이 아닐까요? '이분설을 옳다 하고 삼분설을 비판한 사실' '델리취와 같은 신학자들을 인용하고' '원어까지 자주 인용한 사실'들은 80년대의 백 목사님 설교록을 가지고 본다면 50년대의 백 목사님은 탈선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80년대 설교를 읽다 보면 백 목사님은 자기의 50년대 과거를 잊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백 목사님도 세계 신학의 전통을 신학을 통해 배웠거나 신학서를 몰래 읽고 공부를 해 놓고 80년대 설교할 때는 마치 신학 없이 성경에서 바로 배운 것처럼 우리를 속인 것일까요?
답변자가 직접 상대할 기회가 있는 분들 중에 설교록의 깊이를 다른 서적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이런 문제를 미리 설명했습니다. 내일 답변자가 설명을 이어 가겠지만, 이 곳에서 직문직답으로 소개를 받는 것보다 '주관식 과제'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함께 마음 속으로 자기 답을 마련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계속 중)
>> 니고데모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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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백영희목사님은 신학교에 가기전에,어느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않고
: 칼빈주의의 깨달음을 혼자서 성경만 읽고 깨달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요?
:
: 백목사님도 1954년까지는 이분론을 믿었고, 삼분론을 배격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혼자서 성경만 읽고 이분론을 믿으신것인지? 아니면 신학교에 가서 정통칼빈주의가 이분론을 믿고 삼분론을 배격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료방에 보면 백목사님이
: 델리취를 언급하면서 삼분론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영향을 받은것 같기도 합니다.
:
: 2. 삼위일체교리도 혼자서 깨달으셨는지요?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혹시 혼자서 성경을 읽고
: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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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영희목사님은 죄를
:
: (1)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 (2) 불의의 죄 (3) 원수된 죄 (4) 절망의 죄로 크게 4가지로
: 구분을 하셨습니다.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는 위의 4가지의 분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 2000년 기독교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모든 구원론들은 기본구원 - 건설구원 - 기능구원 안에 들어갑니다.2000년 모든 죄에 대한 깨달음들은 백목사님이 분류한 4가지 종류안에
: 들어가는 것인가요?
:
: 백목사님이 죄를 4가지로 분류하셨는데,4가지의 분류도 `구원을 기본구원 건설구원 기능구원처럼 명확하게 나눈것처럼`, 죄를 성경적으로 가장 바르게 나눈것으로 봐도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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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스마트폰이나 테블릿PC로는 스팸방지바로밑에 스팸방지 번호가 뜨지 않아서
: 일반문답방에 질문이 올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총공회문답방에는 스팸방지시스템
: 자체가 없어서 질문이 올려집니다. 일반문답방에도 스마트폰이나 테플릿PC로 질문을
: 올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몇가지 질문들
1.백영희목사님은 신학교에 가기전에,어느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않고
칼빈주의의 깨달음을 혼자서 성경만 읽고 깨달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요?
백목사님도 1954년까지는 이분론을 믿었고, 삼분론을 배격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혼자서 성경만 읽고 이분론을 믿으신것인지? 아니면 신학교에 가서 정통칼빈주의가 이분론을 믿고 삼분론을 배격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료방에 보면 백목사님이
델리취를 언급하면서 삼분론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영향을 받은것 같기도 합니다.
2. 삼위일체교리도 혼자서 깨달으셨는지요?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혹시 혼자서 성경을 읽고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3. 백영희목사님은 죄를
(1)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 (2) 불의의 죄 (3) 원수된 죄 (4) 절망의 죄로 크게 4가지로
구분을 하셨습니다.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는 위의 4가지의 분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2000년 기독교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모든 구원론들은 기본구원 - 건설구원 - 기능구원 안에 들어갑니다.2000년 모든 죄에 대한 깨달음들은 백목사님이 분류한 4가지 종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백목사님이 죄를 4가지로 분류하셨는데,4가지의 분류도 `구원을 기본구원 건설구원 기능구원처럼 명확하게 나눈것처럼`, 죄를 성경적으로 가장 바르게 나눈것으로 봐도 될까요?
4.스마트폰이나 테블릿PC로는 스팸방지바로밑에 스팸방지 번호가 뜨지 않아서
일반문답방에 질문이 올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총공회문답방에는 스팸방지시스템
자체가 없어서 질문이 올려집니다. 일반문답방에도 스마트폰이나 테플릿PC로 질문을
올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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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영희목사님은 신학교에 가기전에,어느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않고
칼빈주의의 깨달음을 혼자서 성경만 읽고 깨달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요?
백목사님도 1954년까지는 이분론을 믿었고, 삼분론을 배격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혼자서 성경만 읽고 이분론을 믿으신것인지? 아니면 신학교에 가서 정통칼빈주의가 이분론을 믿고 삼분론을 배격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료방에 보면 백목사님이
델리취를 언급하면서 삼분론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영향을 받은것 같기도 합니다.
2. 삼위일체교리도 혼자서 깨달으셨는지요?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혹시 혼자서 성경을 읽고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3. 백영희목사님은 죄를
(1)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 (2) 불의의 죄 (3) 원수된 죄 (4) 절망의 죄로 크게 4가지로
구분을 하셨습니다.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는 위의 4가지의 분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2000년 기독교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모든 구원론들은 기본구원 - 건설구원 - 기능구원 안에 들어갑니다.2000년 모든 죄에 대한 깨달음들은 백목사님이 분류한 4가지 종류안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백목사님이 죄를 4가지로 분류하셨는데,4가지의 분류도 `구원을 기본구원 건설구원 기능구원처럼 명확하게 나눈것처럼`, 죄를 성경적으로 가장 바르게 나눈것으로 봐도 될까요?
4.스마트폰이나 테블릿PC로는 스팸방지바로밑에 스팸방지 번호가 뜨지 않아서
일반문답방에 질문이 올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총공회문답방에는 스팸방지시스템
자체가 없어서 질문이 올려집니다. 일반문답방에도 스마트폰이나 테플릿PC로 질문을
올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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