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방탕, 율법과 순종 - 고전7:22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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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방탕, 율법과 순종 - 고전7:22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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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와 방탕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누구에게도 거리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과 진리에 붙들려 살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과 진리를 버릴 수 있는 자유까지를 포함해야 진정한 자유라 하고, 성경의 자유는 그런 자유를 자유라 하지 않고 방종 방탕이라고 하며 그런 죄와 세상과 악령을 이길 수 있고 그들을 떼 낼 수 있는 자유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겉보기는 비슷한데 속을 보면 세상의 자유와 성경의 자유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이 노선은 매사에 단어 정의부터 철저히 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실컷 믿고 나서 나중에 단어를 오해하여 정반대 결과를 맺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대로 사는 것은 성경의 자유이며 말씀을 어기는 자유는 방종과 방탕입니다. 방종 방탕하는 것조차 자유나 그 자유의 댓가는 지옥의 영원한 멸망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방종에 나가지 알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2. 신약과 구약


구약은 신앙이 어린 초기여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르쳐서 깨닫게 한 다음에 자라고 나면 신령한 이치를 알게 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지시사항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았습니다. 이 수 많은 지시사항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그 율법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 지시사항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지시사항은 그 하나하나가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며 국가의 안보와 시대의 평화를 유지하는 법이고 더 나아가 천국의 영생 소원을 이루는 비법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게 자세하게 철저하게 기록했는가? 구약은 어리고 초기여서 그러했습니다. 그 많은 지침을 읽고 배우고 순종하면서, 구약 교회는 점점 자라 가야 했고 철이 들어야 했고 그 결과 그들은 그렇게 수 많은 명령을 내리게 된 이유와 목적과 내용 전부를 알아 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신 없이 그 지시 자체만 뜻 없이 마음 없이 움직였으니 그들의 속은 비어 있었고 그들의 겉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모습을 가졌습니다. 요런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한 것은 그 율법이 잘못 되었거나, 그 율법들을 지킨 그 행위 그 자체를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귀신이 예수님의 그 책망을 살짝 뒤집어서 오늘 교회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외식자로 책망을 받았는데 그들은 구약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 그렇게 야단을 맞았다고 변조를 시킨 다음, 오늘은 모든 성경 말씀을 각자 알아서 지키려면 지키고 버리려면 버려야 자유인이 되는 것이고 외식자로 책망을 받지 않는다고 정반대의 길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구약을 잘 지킨 것은 죄가 아니라 의가 됩니다. 구약의 외형 말씀을 지키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신앙에 알맹이가 없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신약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제 신약 우리에게는 주일이나 몇 가지 필수 사항만 공통적으로 지키게 하고 거의 전부는 각자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신령한 인도를 따르게 해 놓았습니다. 이런 시기에 주일처럼 믿는 모든 사람이 철저히 지켜야 할 말씀조차 내 버리는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가르치고 신약에서도 지켜야 할 몇 말씀을 지키는 신앙인들을 외식가로 비판하는 것은 교회 내에 들어 와 있는 귀신들의 활동입니다.


3. 성구 몇 곳을 참고한다면


고전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세상 신분은 남의 집에 종이라 해도 믿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자유자라는 뜻입니다. 주인 집에서 나와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종을 데리고 있는 그 집의 주인이 믿게 되었다면 그 주인은 자기 노예에게는 주인이지만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에게는 종입니다. 성경의 '자유'는 세상 사회 정치적인 해방 운동이나 인권 운동을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길 자유, 죄에서 벗어 날 기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진리에 완전히 붙들려 살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4. 결론적으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 어떤 시험이나 진학이나 진로나 회사를 다 내어 던지는 것은 불신자가 볼 때는 맹신이며 종교에 붙들려 자기 자유를 버린 정신 빠진 사람이지만, 우리가 볼 때는 잠깐 살다 갈 세상 것에게 붙들리지 않고 진리에 자유하기 위해 주일 하나를 지키려고 세상 사람들 전부가 목을 매다는 시험 진학 진로 취직을 초개처럼 던져 버린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대속으로 중생 시킨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것에게서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봄 나들이를 가고 싶은데 주일에 묶여 도살장으로 가듯 끌려 가는 사람은 아직도 죄에 종이 되어 있는 노예들입니다. 전국이 봄 나들이를 가도 그들이 불쌍하게 보이고 자기는 주일에 예배당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진리의 자유인입니다. 칼빈이 벗어 나고자 했던 율법주의 금욕주의의 얽매이는 상황은 천주교가 천국을 가는 조건으로 교황을 통해 내어 놓은 수 없는 그런 헛 된 규정들이었습니다.


공회는 칼빈주의보다 한 걸음 더 발전을 하는 바람에 마치 칼빈주의와 맞서거나 칼빈주의에서 벗어 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해 부족이고 착시 현상이며 오판일 뿐입니다. 공회는 이런 문제를 두고 정확하게 칼빈주의의 신앙 노선에 서 있고 오히려 그 때보다 한 걸음 더 나아 갔습니다. 오히려 오늘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신앙을 외치는 교회들이 칼빈주의가 가르친 최소한의 신앙 필수 사항마저 세상 방종과 방탕에 물이 들어 포기하고 있으니 이런 것은 워낙 역사에 뚜렷하고 세계적으로 평범한 일이 되어 별로 논란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신학'님께서 소개한 내용은 약간 애매하지만 공회의 주일이나 남녀 분리나 예배 노력을 예시했기 때문에 '신학'님께서 우려하시는 문제는 오히려 공회의 절묘하고 철저한 균형적 신앙을 오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공회가 주일날까지 놀러 가고 돈을 벌러 가는 것은 자제 절제를 해야 하는 방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추세는 불과 20세기 초반까지도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들의 상식이었고 이 나라 교계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모두가 비슷했었음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또한 공회의 이런 엄한 행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에게 붙들리지 않고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넘치는 세상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입고 싶은 것을 다 입고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가고 싶은 곳을 다 다니면서도 주일 하나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이 것은 외식 신앙을 입에 담을 것이 아니라 죽고 또 죽어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 한 유다서 말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겨울 나무라 하고 싶습니다.


>> 신학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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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발표된 칼빈론 중에 일부입니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공회의 주일성수나 예배참석과 남녀분리 등의 엄한 규율은 칼빈이 벗어나고자 했던 율법에 얽매이는 금욕주의가 아닐까요? 칼빈은 세속주의를 반대하면서 금욕주의도 함께 반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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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은 기독자의 자유로서 율법과 영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은 자유를 오용하고자 하는 세속주의와 율법에 얽매이는 금욕주의 모두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를 통하여 법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아디아포라(부차적 영역, 불간섭 영역)의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의 양심의 영역이지만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자유가 아니니 자유와 절제 모두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칼빈의 자유론에서 본다면
최근에 발표된 칼빈론 중에 일부입니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공회의 주일성수나 예배참석과 남녀분리 등의 엄한 규율은 칼빈이 벗어나고자 했던 율법에 얽매이는 금욕주의가 아닐까요? 칼빈은 세속주의를 반대하면서 금욕주의도 함께 반대했습니다.


...........


칼빈은 기독자의 자유로서 율법과 영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은 자유를 오용하고자 하는 세속주의와 율법에 얽매이는 금욕주의 모두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를 통하여 법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아디아포라(부차적 영역, 불간섭 영역)의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의 양심의 영역이지만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자유가 아니니 자유와 절제 모두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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