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회개 과정과 레위기 제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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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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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31 00:00
- 죄 문제의 양면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 진 행위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실익이 있고, 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 쉽고 많아서 따로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죄가 되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생명과와 일반과만 먹었으니 이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았던 행위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이렇게 실제 기록 되어 있고,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음은 그렇게 나누어야 할 현실적 신앙 문제가 있습니다.
- 의 문제의 양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행위와 자기 마음대로 사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성경의 사례가 많고 신앙의 지도와 성장에 실익이 지대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 입은 것은 그 자체는 성경이 금하거나 명하지 않았으니 이는 죄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의' 문제로 봐야 할 사안입니다.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명문을 두고는 지켰다 어겼다는 문제가 없으나 잎사귀로 옷을 해 입은 것은 아담의 자기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불의라고 합니다. 실제 성경이 기록한 내용은 수도 없이 많다고 보이나 오늘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딱히 성경의 명문을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피다 보면 성경의 명문은 우리에게 울타리를 쳐서 넘어 가지 않도록 해 놓은 대략 대강이며, 실제 생활 속에 매 순간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들은 거의 다 누구의 뜻대로 하느냐는 것이 문제니 주님 뜻이면 의가 되고, 내 뜻대로 한다면 불의가 됩니다.
- 눅15장의 둘째 아들의 경우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그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훔쳐 먹는 시기가 있었고
그제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 갈 마음과 소망을 가진 면도 기록해 주셨고
말이나 생각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 나서 돌아갔다는 기록을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죄 하나를 두고도
11절에서는 죄 짓기 전의 상태
12절에서는 몸은 아버지 집에 아직 그대로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제 몫을 챙겨 내는 상태
13절에서는 아버지 집을 실제 나가는 상황
17절에서는 죄 짓고 살던 시절을 후회하고 탄식함이 나오고
18절에서는 회개할 마음, 각오를
20절에서는 실제 아버지께로 돌아 가는 행위와 그 회개의 종착지인 품에 안긴 상황을
별도로 기록했습니다.
사변이 아니라 성경을 면밀히 읽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성경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다 했으니 이렇게 기록해 준 것을 놓치면 안 될 것입니다.
- 한 편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 과정의 경우
레14:1-10 사이에 문둥병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 낫게 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을 가진 사람은 자기 집 바깥, 진 바깥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진 밖에 살다가 낫게 되면 진 안으로는 일단 들어 올 수 있지만 4절 이하의 조처를 통해 진 안으로만 들어 올 수 있을 뿐이고 진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는 들어 오지 못하고 다시 7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7일을 채운 다음 이제 자기 집인 장막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았고 이스라엘의 진 안으로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나 몇 일이 아니라 7일을 대문 밖에 머물게 합니다. 이런 절차의 일점과 일획도 다 필요해서 적은 것입니다. 건설구원을 제대로 이루어 가려 한다면 마치 집을 지을 때 벽돌 하나씩 쌓아 올라 가듯이 또는 창문 하나를 달아도 순서가 있고 위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전체를 봐가며 진행하는 것입니다.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
: 죄와 의를 말하지 않는 신학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교리체계 중에서도 죄와 의 문제가 예수님의 사활대속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면 성경의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사변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죄에서 무죄, 무죄에서 의, 의에서 화친, 화친에서 소망으로 나가는 설명은 논리정연하지만 성경의 근거가 없다면 사변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할 줄로 압니다. 건설구원의 논리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건설구원을 적극 지지합니다만, 70년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죄에게 삼키지 않는 것과 죄를 이기는 것 그리고 의를 행치 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을 일일이 구별하고 있는데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 배우다 보면 의문이 생기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배움의 일부라고 생각되어 반론적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 진 행위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실익이 있고, 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 쉽고 많아서 따로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죄가 되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생명과와 일반과만 먹었으니 이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았던 행위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이렇게 실제 기록 되어 있고,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음은 그렇게 나누어야 할 현실적 신앙 문제가 있습니다.
- 의 문제의 양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행위와 자기 마음대로 사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성경의 사례가 많고 신앙의 지도와 성장에 실익이 지대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 입은 것은 그 자체는 성경이 금하거나 명하지 않았으니 이는 죄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의' 문제로 봐야 할 사안입니다.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명문을 두고는 지켰다 어겼다는 문제가 없으나 잎사귀로 옷을 해 입은 것은 아담의 자기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불의라고 합니다. 실제 성경이 기록한 내용은 수도 없이 많다고 보이나 오늘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딱히 성경의 명문을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피다 보면 성경의 명문은 우리에게 울타리를 쳐서 넘어 가지 않도록 해 놓은 대략 대강이며, 실제 생활 속에 매 순간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들은 거의 다 누구의 뜻대로 하느냐는 것이 문제니 주님 뜻이면 의가 되고, 내 뜻대로 한다면 불의가 됩니다.
- 눅15장의 둘째 아들의 경우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그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훔쳐 먹는 시기가 있었고
그제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 갈 마음과 소망을 가진 면도 기록해 주셨고
말이나 생각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 나서 돌아갔다는 기록을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죄 하나를 두고도
11절에서는 죄 짓기 전의 상태
12절에서는 몸은 아버지 집에 아직 그대로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제 몫을 챙겨 내는 상태
13절에서는 아버지 집을 실제 나가는 상황
17절에서는 죄 짓고 살던 시절을 후회하고 탄식함이 나오고
18절에서는 회개할 마음, 각오를
20절에서는 실제 아버지께로 돌아 가는 행위와 그 회개의 종착지인 품에 안긴 상황을
별도로 기록했습니다.
사변이 아니라 성경을 면밀히 읽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성경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다 했으니 이렇게 기록해 준 것을 놓치면 안 될 것입니다.
- 한 편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 과정의 경우
레14:1-10 사이에 문둥병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 낫게 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을 가진 사람은 자기 집 바깥, 진 바깥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진 밖에 살다가 낫게 되면 진 안으로는 일단 들어 올 수 있지만 4절 이하의 조처를 통해 진 안으로만 들어 올 수 있을 뿐이고 진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는 들어 오지 못하고 다시 7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7일을 채운 다음 이제 자기 집인 장막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았고 이스라엘의 진 안으로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나 몇 일이 아니라 7일을 대문 밖에 머물게 합니다. 이런 절차의 일점과 일획도 다 필요해서 적은 것입니다. 건설구원을 제대로 이루어 가려 한다면 마치 집을 지을 때 벽돌 하나씩 쌓아 올라 가듯이 또는 창문 하나를 달아도 순서가 있고 위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전체를 봐가며 진행하는 것입니다.
>> 신학도 님이 쓰신 내용 <<
:
: 죄와 의를 말하지 않는 신학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교리체계 중에서도 죄와 의 문제가 예수님의 사활대속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면 성경의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사변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죄에서 무죄, 무죄에서 의, 의에서 화친, 화친에서 소망으로 나가는 설명은 논리정연하지만 성경의 근거가 없다면 사변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할 줄로 압니다. 건설구원의 논리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건설구원을 적극 지지합니다만, 70년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죄에게 삼키지 않는 것과 죄를 이기는 것 그리고 의를 행치 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을 일일이 구별하고 있는데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 배우다 보면 의문이 생기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배움의 일부라고 생각되어 반론적 질문을 드립니다.
사죄와 칭의, 대형과 대행, 죽음과 부활의 사변?
죄와 의를 말하지 않는 신학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교리체계 중에서도 죄와 의 문제가 예수님의 사활대속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면 성경의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사변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죄에서 무죄, 무죄에서 의, 의에서 화친, 화친에서 소망으로 나가는 설명은 논리정연하지만 성경의 근거가 없다면 사변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할 줄로 압니다. 건설구원의 논리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건설구원을 적극 지지합니다만, 70년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죄에게 삼키지 않는 것과 죄를 이기는 것 그리고 의를 행치 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을 일일이 구별하고 있는데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배우다 보면 의문이 생기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배움의 일부라고 생각되어 반론적 질문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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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의를 말하지 않는 신학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교리체계 중에서도 죄와 의 문제가 예수님의 사활대속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면 성경의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사변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죄에서 무죄, 무죄에서 의, 의에서 화친, 화친에서 소망으로 나가는 설명은 논리정연하지만 성경의 근거가 없다면 사변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할 줄로 압니다. 건설구원의 논리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건설구원을 적극 지지합니다만, 70년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죄에게 삼키지 않는 것과 죄를 이기는 것 그리고 의를 행치 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을 일일이 구별하고 있는데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배우다 보면 의문이 생기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배움의 일부라고 생각되어 반론적 질문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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