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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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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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 00:00
1. 전체적으로
1989년 8월 27일의 순교와 5 일 장으로 치르 졌던 당시 모든 절차는 일사분란하게 진행이 되었으나 장례의 마지막 순서라 할 수 있는 묘소 모습과 묘비 문제를 두고 막판에 가족 중에 한 분의 이의 제기로 당시 장례의 끝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둥근 대형 묘봉의 형태는 백 목사님의 뜻에 분명하게 반하는 것입니다. 이후 가족들의 의사가 합치 되지 않아 오랜 세월 묘비가 세워 지지 못하다가 2011년 경 가족들은 공회 전체 방향을 두고 총론적인 의사를 모으게 되지만 여전히 내적으로 성향의 차이가 있어 선뜻 건립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비석은 백 목사님 장례를 준비한 가족들에 의하여 생전에 미리 비문이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가족들 중에 이 노선의 원 모습에 충실한 분들이 계시고 또 다른 분들은 이 노선의 발전적 모습을 지향하는 분들도 계셔서 이 성향에 따라 비문을 적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문에는 단 몇 자만 적게 되는데 그 글자가 부친의 생애를 규정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 목사님은 평생 소원이 순교였고, 1982년 이후부터는 늘 하나님 앞에 서실 날을 손 꼽고 있었으며 자신의 최종 모습은 늘 순교가 소망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활 속에 지켜 보던 가족들과 답변자는 1987년부터 '아주 가까운 일시에' '갑자기' '주일'에 돌아 가시지 않을까 라는 전제로 준비를 했습니다. 가시는 날이 주일이 되면 서부교회의 규모와 목사님의 의미와 총공회 전체의 내부 상황 때문에 장례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단 가시는 목사님의 장례까지는 조용히 그리고 성의껏 끝을 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은 멀리 있는 다른 가족들께 양해를 구하고 주변에 있는 두 분의 가족이 중심이 되어 세세한 내용까지 답변자에게 미리 준비케 했습니다.
당시 장례의 준비 기록과 진행 과정은 훗날 역사적 자료가 될 듯하여 잘 보관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 절차나 비문의 내용까지 마련해 두었고 묘지의 위치도 전체 묘소 내에서 별도로 마련했습니다. 묘소의 위치가 서부교회 묘지의 제일 위 쪽으로 예정 되어 있었는데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묘의 모양과 입관의 옷 모습까지 유교적 색채를 탈피하고 목사님의 신앙 성향에 맞췄습니다.
이 준비 과정에 생각하지 않았던 막내 사위 서 목사님의 장례가 1987년 8월 15일에 발생했고 백 목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던 가족에게 서 목사님의 장례는 2 년 후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체 가족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89년 8월 27일 새벽에 백 목사님의 순교 즉시 가족들에 의하여 답변자는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고 바로 서부교회로 가서 전체 가족의 대표자로 전체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초기에는 전체 총공회의 장례라 해서 총공회의 교단 지도부가 모든 순서를 짜고 있었고 장례의 핵심인 예배 순서자들을 발표한 상태에서 가족들의 입장을 전하여 공회의 모든 회의는 취소 되고 장례의 순서를 맡은 공회 최고 지도자들에게 답변자는 그 날부터 지목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현재 이 홈의 간판을 바꾸라는 분의 제소 때문에 미리 공개하기 곤란한 면이 있어 좀 아쉽게 설명을 드리게 됩니다. 당시 장례 순서에 고신의 최고 원로 한명동 목사님과 계신 측의 이병규 목사님이 포함 되고 백태영 목사님 등 공회 내의 수정 노선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모든 순서가 배치 되었습니다. 총공회적으로 모인 회의에서 결정해 놓은 모든 결의사항을 답변자가 가족의 대표가 되어 모두 변경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훗날 여러 제명 절차 등으로 피해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묘비의 내용을 어떻게 적는가? 이 문제를 두고 장례 후에 공회의 수정을 추구하는 측에서 당시 묘비를 마련해 두고 있었으나 그 묘비를 만일 묘소에 들여 오게 되면 파괴 될 것이 명확하여 묘비는 아직도 외부에 보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노선을 추구하던 분들 역시 가족 중에 반대 의사가 있는데 묘비를 함부로 세울 수 없어 세월이 이렇게 오래 가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백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94세로 돌아 가셨고 그 장례에서도 백 목사님과 그 가정의 신앙 내력은 이 홈이 모두 가져 있기 때문에 답변자에게 가족의 부탁이 있어 사모님의 약력과 함께 묘비 내용을 보내 드렸으나 부친 목사님의 묘비를 확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모님 묘비를 세울 수 없어 역시 묘비로 드러 나지는 못했습니다.
3. 백 목사님의 묘비 형식
백 목사님의 육의 가족을 부인하지 않는 분이나 목회자로서 육의 자녀나 가족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상대하는 분이므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가는 분들, 특히 목회적 직책을 가졌던 분들의 묘비에는 백 목사님이 직접 묘비를 적게 한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서부교회 묘소에는 추순덕 집사님이라는 분부터 그 방법이 적용 되어 있는데 신앙의 자녀를 명기합니다. 따라서 백 목사님의 묘비에는 7남매를 적고 제일 밑에 답변자 이름 석 자를 적어야 하는데 가족들이 25년 동안 묘비를 세우지 않았으니 이제는 답변자가 공회도 서부교회도 가족도 부산의 연구소도 모두 포기하고 있는 묘비를 직접 그 분의 뜻과 신앙을 살려 건립할 시점으로 생각합니다.
적지 않는다 해도, 또는 답변자가 알고 있는 방향과 아주 다르게 건립이 된다 해도 그 것은 땅의 것이며 지나 가는 것일 뿐이고 神앙의 碑를 보는 영안에는 답변자는 물론 이 노선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분들의 이름이 보일 것이고, 이런 영안이 없는 분들이 묘비를 새긴다면 어떤 글을 적어도 그 글자는 이래 적으면 안 된다는 글자로 새겨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백 목사님 가신 지 26 년을 맞아야 할 날을 몇 일 앞 두고 있습니다.
>> 서부교인 님이 쓰신 내용 <<
:
: 백목사님의 김해 묘에 비석하나도 없던데 이유가 있나요?
1989년 8월 27일의 순교와 5 일 장으로 치르 졌던 당시 모든 절차는 일사분란하게 진행이 되었으나 장례의 마지막 순서라 할 수 있는 묘소 모습과 묘비 문제를 두고 막판에 가족 중에 한 분의 이의 제기로 당시 장례의 끝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둥근 대형 묘봉의 형태는 백 목사님의 뜻에 분명하게 반하는 것입니다. 이후 가족들의 의사가 합치 되지 않아 오랜 세월 묘비가 세워 지지 못하다가 2011년 경 가족들은 공회 전체 방향을 두고 총론적인 의사를 모으게 되지만 여전히 내적으로 성향의 차이가 있어 선뜻 건립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비석은 백 목사님 장례를 준비한 가족들에 의하여 생전에 미리 비문이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가족들 중에 이 노선의 원 모습에 충실한 분들이 계시고 또 다른 분들은 이 노선의 발전적 모습을 지향하는 분들도 계셔서 이 성향에 따라 비문을 적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문에는 단 몇 자만 적게 되는데 그 글자가 부친의 생애를 규정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 목사님은 평생 소원이 순교였고, 1982년 이후부터는 늘 하나님 앞에 서실 날을 손 꼽고 있었으며 자신의 최종 모습은 늘 순교가 소망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활 속에 지켜 보던 가족들과 답변자는 1987년부터 '아주 가까운 일시에' '갑자기' '주일'에 돌아 가시지 않을까 라는 전제로 준비를 했습니다. 가시는 날이 주일이 되면 서부교회의 규모와 목사님의 의미와 총공회 전체의 내부 상황 때문에 장례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단 가시는 목사님의 장례까지는 조용히 그리고 성의껏 끝을 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은 멀리 있는 다른 가족들께 양해를 구하고 주변에 있는 두 분의 가족이 중심이 되어 세세한 내용까지 답변자에게 미리 준비케 했습니다.
당시 장례의 준비 기록과 진행 과정은 훗날 역사적 자료가 될 듯하여 잘 보관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 절차나 비문의 내용까지 마련해 두었고 묘지의 위치도 전체 묘소 내에서 별도로 마련했습니다. 묘소의 위치가 서부교회 묘지의 제일 위 쪽으로 예정 되어 있었는데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묘의 모양과 입관의 옷 모습까지 유교적 색채를 탈피하고 목사님의 신앙 성향에 맞췄습니다.
이 준비 과정에 생각하지 않았던 막내 사위 서 목사님의 장례가 1987년 8월 15일에 발생했고 백 목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던 가족에게 서 목사님의 장례는 2 년 후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체 가족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89년 8월 27일 새벽에 백 목사님의 순교 즉시 가족들에 의하여 답변자는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고 바로 서부교회로 가서 전체 가족의 대표자로 전체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초기에는 전체 총공회의 장례라 해서 총공회의 교단 지도부가 모든 순서를 짜고 있었고 장례의 핵심인 예배 순서자들을 발표한 상태에서 가족들의 입장을 전하여 공회의 모든 회의는 취소 되고 장례의 순서를 맡은 공회 최고 지도자들에게 답변자는 그 날부터 지목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현재 이 홈의 간판을 바꾸라는 분의 제소 때문에 미리 공개하기 곤란한 면이 있어 좀 아쉽게 설명을 드리게 됩니다. 당시 장례 순서에 고신의 최고 원로 한명동 목사님과 계신 측의 이병규 목사님이 포함 되고 백태영 목사님 등 공회 내의 수정 노선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모든 순서가 배치 되었습니다. 총공회적으로 모인 회의에서 결정해 놓은 모든 결의사항을 답변자가 가족의 대표가 되어 모두 변경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훗날 여러 제명 절차 등으로 피해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묘비의 내용을 어떻게 적는가? 이 문제를 두고 장례 후에 공회의 수정을 추구하는 측에서 당시 묘비를 마련해 두고 있었으나 그 묘비를 만일 묘소에 들여 오게 되면 파괴 될 것이 명확하여 묘비는 아직도 외부에 보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노선을 추구하던 분들 역시 가족 중에 반대 의사가 있는데 묘비를 함부로 세울 수 없어 세월이 이렇게 오래 가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백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94세로 돌아 가셨고 그 장례에서도 백 목사님과 그 가정의 신앙 내력은 이 홈이 모두 가져 있기 때문에 답변자에게 가족의 부탁이 있어 사모님의 약력과 함께 묘비 내용을 보내 드렸으나 부친 목사님의 묘비를 확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모님 묘비를 세울 수 없어 역시 묘비로 드러 나지는 못했습니다.
3. 백 목사님의 묘비 형식
백 목사님의 육의 가족을 부인하지 않는 분이나 목회자로서 육의 자녀나 가족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상대하는 분이므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가는 분들, 특히 목회적 직책을 가졌던 분들의 묘비에는 백 목사님이 직접 묘비를 적게 한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서부교회 묘소에는 추순덕 집사님이라는 분부터 그 방법이 적용 되어 있는데 신앙의 자녀를 명기합니다. 따라서 백 목사님의 묘비에는 7남매를 적고 제일 밑에 답변자 이름 석 자를 적어야 하는데 가족들이 25년 동안 묘비를 세우지 않았으니 이제는 답변자가 공회도 서부교회도 가족도 부산의 연구소도 모두 포기하고 있는 묘비를 직접 그 분의 뜻과 신앙을 살려 건립할 시점으로 생각합니다.
적지 않는다 해도, 또는 답변자가 알고 있는 방향과 아주 다르게 건립이 된다 해도 그 것은 땅의 것이며 지나 가는 것일 뿐이고 神앙의 碑를 보는 영안에는 답변자는 물론 이 노선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분들의 이름이 보일 것이고, 이런 영안이 없는 분들이 묘비를 새긴다면 어떤 글을 적어도 그 글자는 이래 적으면 안 된다는 글자로 새겨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백 목사님 가신 지 26 년을 맞아야 할 날을 몇 일 앞 두고 있습니다.
>> 서부교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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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목사님의 김해 묘에 비석하나도 없던데 이유가 있나요?
질문
백목사님의 김해 묘에 비석하나도 없던데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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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사님의 김해 묘에 비석하나도 없던데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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