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세계,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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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세계,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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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0
관련 책을 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세상 책, 세상 지식, 인간의 지혜와 지도의 경우는 각 현실에 따라 적용이 다 달라 질 것이니 한 사람에게 가르친 내용을 다른 사람이 다른 현실에서 그대로 써 먹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많은 문제가 야기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의 어떤 현실에도 꼭 같이 해당 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성경의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경을 칼빈이 A 도시의 B 교회 C 교인들에게 D 시점에 가르친 것을 우리가 설교라고 할 터인데 그 설교가 칼빈의 인간적 지도에 그치지 않고 그 설교가 진리인 말씀을 제대로 전했다면 그 설교를 가지고 E 도시의 F 교회에 G 교인들에게 H 시점에 그대로 전한다 해도 E 도시는 A 도시가 E 도시와는 다른 점을 감안해 가며 B 교회가 아닌 F 교회 환경을 비춘 다음 G 교인의 H 사건에 적용하려 든다면 바로 적용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성경은 진리는 진리지만 살아 있는 진리가 되지 못할 것이고 박제 전시 된 박물관 진열대의 물품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느 시대 어느 교인의 어떤 상황이라도 그 내막을 쪼개어 내면을 보며 배어 낼 부분은 없애고 살릴 부분은 살려 내는 수술 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더구나 말씀은 어떤 말씀이든 그 말씀을 기록한 성령이 그 말씀 속에 조명 영감의 역사로 함께 하여 누가 설교를 하든 바른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전하려 한다면 그가 전하는 말씀 안에서 듣는 이들의 각자 다른 환경을 그 듣는 각자 양심 속에 친히 일일이 찾아 들어 가서 필요한 감화와 감동의 역사를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인간 말은 불가능하나 말씀 속에 역사하는 성령은 그 어느 누구의 마음 속에라도 그에게 필요하도록 깨닫게 하시는 조명 역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그 이름이 그 정도는 되어야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이나 로이드 존스의 표현은 그들이 이런 정도의 세계는 일찍 알 수 있었을 것으로 보나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 괴수로 본 것처럼 자기 부족을 향해 외치는 자탄이지 그들의 설교를 수백 년이 지난 오늘 다시 우리들의 강단에서 그대로 읽을 때 그 설교는 우리와 시공의 차이 때문에 적용이 되지 않을 설교니 상관하지 말라고 적은 것이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유는, 칼빈이 주후 1540년 그 해 첫 달의 첫 주일의 첫 설교를 할 때 그 자리에 5백여 명이 앉아 있었다고 친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칼빈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 하나를 들을 때 5백여 명 모두가 꼭 같은 적용의 대상이 되었을까? 천부당 만부당한 말일 것입니다. 1540년이라는 시간은 그 5백여 명에게 동일했다 해도 그 동일 시간에 그 5백여 명 전부는 자기 가정이 다르고 자기 지난 과거가 다르며 그 예배를 참석한 각자의 심리와 동기와 내심의 목표가 다 다를 것이니 강단의 한 설교가 그 예배를 참석한 교인들에게 조차 동시에 적용 될 수는 없습니다.


공회는 바로 이런 면을 고려하기 때문에 공회 목회자들로서는 백영희 목회 설교록의 내용을 다르게 변경하려다 숨어 있는 깊은 뜻이 훼손 될 우려 때문에 차라리 겉으로 전하는 설교 내용은 될 수 있으면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하되 그 설교를 맡아 그대로 전하는 설교자가 마음 속으로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이 친히 움직여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깨닫게 해 주시고 또 각자의 회개와 생활에서 따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정성을 보시고 그리고 듣는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준비를 보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설교를 각 환경에 적용을 시킴으로 그 설교들이 듣는 이들 속에서 경우에 맞게끔 될 수도 있으나 설교는 옛날의 다른 교회에서 전달 된 내용이라도 그 내용을 듣는 이들 속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 새로 듣는 이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현실에 필요한 말씀으로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회는 1950년대부터 60여 년을 그렇게 해 왔고 전국과 해외까지 그렇게 시행해 봤으며 교회와 교역자와 시대와 장소와 현실을 넘어 서서 하나의 원고를 가지고 전해 봤을 때 그 어떤 설교자의 새로 준비한 새로운 설교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 맞춘 설교를 전할 때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이 없었다는 일치 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처음 전해 질 때 성경과 성령에 붙들려 잘 증거 된 설교는 상황이 아주 다른 교회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들에게 전해 져도 그 은혜가 거의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는 것이고, 매순간 새로운 설교를 한다 해도 그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이 부족하면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설교를 준비한다 해서 그 새 설교가 새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경험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만일 윗 글에서 소개한 칼빈과 로이드 존스의 표현이 정말 그 표현 그대로가 전부라면 백영희 설교 세계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제대로 된 기초가 있어 로이드 존스는 칼빈만큼 되지 않아도 시대의 설교자가 되었을 것이고, 백영희의 경우는 그런 선배들의 기도와 가르침을 받은 분들이 밑바침 되어 그의 설교 세계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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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자료 게시판의 '3392 [신학] 설교 표절은 죄다! " 2014-02-21'라는 자료를 보며 최근 우리 교계는 설교 표절이라는 가장 뜨겁고 가장 민감한 부분까지 전부 노출되는 상황입니다. 칼빈도 로이드존스라는 역사적 유명한 설교가들의 고민을 인용해 봅니다. 공회 설교관과 비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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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를 따르는 '베끼기의 달인들'

: 20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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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길 목사

: 고려신학대학원

: 탈봇신학대학원 박사과정

: 성안교회 유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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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하는 설교가 이렇게도 결실이 적은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

: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위의 말이 이제 막 교회개척을 시작한 풋내기 목사가 고작 단 두 명의 성도를 앉혀 놓고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자기 하소연쯤으로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리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칼빈의 말이다. 혹자는 이걸 두고,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천재 신학자가 "난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식의 얄미운 푸념 정도로 받아 드릴 수 도 있을 것이다. 왜 학창시절 반에서 늘 1등 하는 친구가 기말고사치고 나면, "이번 시험 망쳤다." 고 엄살을 부리고선, 어김없이 1등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온갖 눈총을 받던 '범생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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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분명 칼빈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근삼 박사가 그의 책 [칼빈과 칼빈주의]에서 칼빈 같은 대 설교자에게도 많은 교인들이 권태증을 느끼고 감격 없는 교회생활에 빠져갔으며, 이 사실이 칼빈을 심히 괴롭혔다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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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은 알려진대로 그의 전속 속기사를 통해서 2,000편이 넘는 설교를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당시에 흥황을 이루던 인쇄술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설교가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자신의 설교들 중 단 몇 편만이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되었는데, 그것도 동료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죽고 난후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출판되었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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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돈 교수가 그의 책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서 지적한 것 처럼, 저명한 신학교 교수들도 평생 몇 권의 역작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는데, 지식도 경험도 일천한 목회자들이 수십 권의 책을 쓰면서 업적 위주의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만약 박영돈 교수의 말처럼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집을 수십권씩 펴내는 이가 있다면,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듣게 되는 순간 부끄러운 맘이 들 것이다.칼빈은 "자신의 설교는 자신의 교회의 회중만을 위해서 한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설교는 자신의 목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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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재정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중의 콘텍스트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가 "아무리 최고의 설교라도 그것을 다른 곳에서 다시 하게 될 때 결코 그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목사와 설교, 390)라고 했던 말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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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칼빈의 말을 좀더 확대해서 해석해 보자.칼빈의 설교론은 철저히 자신의 목양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는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위해서 '최적화'된 설교라는 의미이다. 좀더 나아가서 그는 혹, 다른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또는 비슷한 방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빈의 신학과 설교의 대가 파커(T.H.L. Parker)는 칼빈이 생각하는 설교자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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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는 의사며, 최고 권위자(magister)며, 선생인데,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목회하는 특정 교회(his own particular Church)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the preacher's own view of Scripture)을 가져야 한다."(Calvin's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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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다. "설교자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과 처방을 줄 수 있는 말씀의 권위자이며, 설교자는 자신만의 성경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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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적으로 필자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했는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측면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설교자의 가장 우선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것을 전제한다. 간혹 교인들은 '설교 외식'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교를 은혜스럽게 전한다는 목회자들의 교회를 한번 들여다 보라. 그런 교회의 교인들의 특징은 '설교 외식'을 썩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해 주는 엄마의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누가 굳이 '돈 써가며' 외식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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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만약 교인들의 마음은, 자기 목회자의 잘 요리된 영적 양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그 목회자가 자꾸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가져다 와서 먹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게다가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든지,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고 노력해서 만든 것처럼 행세한다면 이것이 상식적인 일인가? 이 문제는, 옆집 호박을 몰래 따다가 호박전을 부쳐먹는다는 식의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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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제의 핵심은, 설교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명의 설교자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교육을 받는가? 신학대학원 3년간만을 살펴보더라도, 각 교단마다 거의 100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하게 된다. 이수과목에는 구약학, 신약학, 교의학(조직신학), 역사신학, 설교학, 성경원어 등이 필수과목이다. 이 모든 과목이 왜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과목을 공부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근삼 박사 또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다."(칼빈과 칼빈주의,74)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설교를 위한 신학 전문교육을 받고서도, 설교자가 맨 먼저 성경을 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널린 설교문들을 이리저리 주워 모으고서는 그것을 열심히 묵상하고 있다면, 차라리 신학대학원에 '인터넷 설교학개론' '인터넷 설교리서치 방법론' 같은 것들로 교육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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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는 '베끼기의 달인'들로 인해 시끄럽다. 그들은 차라리 구약시대의 성경필사자로 태어났더라면 그 능력과 재주를 인정받았을 것을, 스스로를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는 보수교단들이 설교 라이선스를 주고, 목사 안수까지 준 사람들인지라 그냥 한 개인의 문제로만 봐 넘기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신학교 설교학 수업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총회신학부의 강도사 인허 면접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두고 노회법으로 엄격히 다루자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방법론보다는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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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에 대한 실력을 쌓자. 실력을 쌓는다는 것은 IQ(Intelligence Quotient, 지능지수)의 문제가 아니라, PQ(Practical and Physical Quotient, 신체훈련지수)와 SQ(Spiritual Quotient, 영성지수)에 관한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의 실력은 두뇌로 쌓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이와 영성으로 쌓는 것이다. '엉덩이'는 얼마나 오래 앉아서 연마하느냐를 일컫는 시쳇말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요즘 목회자들도 건강바람이 불어서 운동 하나씩은 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PQ는 신체단련을 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능력을 쌓기 위해 신체를 '혹사'시키라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런데 요즘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신체단련에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정작 의자에 앉아 있질 않는다. 한국 목회자가 세상에서 가장 바쁜 목사라고 서양 학자들의 책들에서도 비아냥 거리는 걸 보면, 의자에 앉을 시간이 있는 목사가 이상할 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다."(딤전4:8)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딤전4:13에서 아주 더 분명히 명령한다. "성경을 읽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 설교자가 실력을 쌓는 일은 '말씀에 전념'할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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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목회와 신학]편집부에서 578명의 한국 목사에게 물었다. "설교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단수응답)" 이에 364명(63%)이 '개인의 영성 및 경건생활'이라고 답했다. 그 다음 이어 154명(26.7%)이 '본문 해석능력'이라고 답했다.(한국교회설교분석,두란노아카데미,2009.33). 한국교회 설교자의 90 퍼센트는 '영성 및 성경해석 능력'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이라고 답한 셈이다. 그런데 질문 한가지 더 살펴보자. "귀하의 설교 사역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단수응답)" 이에 49.1 퍼센트가 '설교 전달력 및 자료준비 부족'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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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두 가지 리서치에서 필자는 한국설교자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 한국설교자들의 대부분은 '영성 및 성경해석 능력'을 가장 '이상적인' 설교자의 덕목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설교자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성경해석과 영성'은 사라지고, 당장 써먹어야 되는 것에 급급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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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왜 생겨나겠는가? 실력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기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 당장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그러나, 정작은 썩은 양식들인--것들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영적 하이에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을 먹이기 위해서 옆집 쓰레기통을 뒤지겠는가? 그런데 요즘에는 남이 이미 먹고 난 음식을 잔뜩 모아서는 돈을 받고 되파는 이도 있다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맛없는 식당은 손님이 금방 알아채니 손님이 없어서라도 문을 닫게 되지만, 교회는 다르다. 설교자가 매주 주워온 썩은 양식들을 먹이는 데도, 교인들은 맛있다며 먹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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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왜 계속 생겨날까? 아니 이미 많이 존재해 왔는데, 점차 들통이 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니 질문을 바꿔서 해 보겠다.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어떻게 그 동안 은혜의 사자로 행세하며, 버젓이 강단의 거룩함을 좀먹고 있었던 걸까?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니, 거기에 동조해주고, 단골고객이 되어 준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실력 없는 설교자를 알아볼 실력 있는 교인이 없다는 말이다. 명장 밑에 졸장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현실은 설교자가 이미 졸장이니, 졸장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무슨 수로 영적전쟁을 치룰 명장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을 이끄는 장군이, 칼도 쓸 줄 모르고, 게다가 들고 있는 칼마저 칼집 속에서 잔뜩 녹슬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들의 장군이 칼을 빼어서 연마해 본적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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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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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씀을 오용해서, 말씀준비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하는 설교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고전 2:1-4에 가서야 더욱 분명해진다. 사도 바울은 정작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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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언급한 개신교 목사들의 반수가 '자료준비 부족'으로 고민한다고 했던 리서치 결과를 기억할 것이다. 설교자의 지적 모자람과 영성의 부족함을 과연 인터넷을 뒤적거린다고 채울 수 있을까? '훌륭한 말이나 자신의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은 인터넷으로, 다른 설교자의 먹다 남은 양식으로 잠시는 채워질 수 있을 지 모르나, 그런 식으로 매주 설교를 연명하듯 하는 설교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끼기의 달인들'의 설교에는 바울의 설교에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 배끼기 - 칼빈과 로이드존스의 고민
일반자료 게시판의 '3392 [신학] 설교 표절은 죄다! " 2014-02-21'라는 자료를 보며 최근 우리 교계는 설교 표절이라는 가장 뜨겁고 가장 민감한 부분까지 전부 노출되는 상황입니다. 칼빈도 로이드존스라는 역사적 유명한 설교가들의 고민을 인용해 봅니다. 공회 설교관과 비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빈주의를 따르는 '베끼기의 달인들'

2014.03.07


▲ 김태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탈봇신학대학원 박사과정

성안교회 유학목사


"매일 하는 설교가 이렇게도 결실이 적은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위의 말이 이제 막 교회개척을 시작한 풋내기 목사가 고작 단 두 명의 성도를 앉혀 놓고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자기 하소연쯤으로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리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칼빈의 말이다. 혹자는 이걸 두고,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천재 신학자가 "난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식의 얄미운 푸념 정도로 받아 드릴 수 도 있을 것이다. 왜 학창시절 반에서 늘 1등 하는 친구가 기말고사치고 나면, "이번 시험 망쳤다." 고 엄살을 부리고선, 어김없이 1등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온갖 눈총을 받던 '범생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분명 칼빈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근삼 박사가 그의 책 [칼빈과 칼빈주의]에서 칼빈 같은 대 설교자에게도 많은 교인들이 권태증을 느끼고 감격 없는 교회생활에 빠져갔으며, 이 사실이 칼빈을 심히 괴롭혔다고 묘사한다......


칼빈은 알려진대로 그의 전속 속기사를 통해서 2,000편이 넘는 설교를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당시에 흥황을 이루던 인쇄술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설교가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자신의 설교들 중 단 몇 편만이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되었는데, 그것도 동료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죽고 난후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출판되었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박영돈 교수가 그의 책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서 지적한 것 처럼, 저명한 신학교 교수들도 평생 몇 권의 역작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는데, 지식도 경험도 일천한 목회자들이 수십 권의 책을 쓰면서 업적 위주의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만약 박영돈 교수의 말처럼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집을 수십권씩 펴내는 이가 있다면,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듣게 되는 순간 부끄러운 맘이 들 것이다.칼빈은 "자신의 설교는 자신의 교회의 회중만을 위해서 한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설교는 자신의 목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재정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중의 콘텍스트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가 "아무리 최고의 설교라도 그것을 다른 곳에서 다시 하게 될 때 결코 그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목사와 설교, 390)라고 했던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럼 칼빈의 말을 좀더 확대해서 해석해 보자.칼빈의 설교론은 철저히 자신의 목양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는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위해서 '최적화'된 설교라는 의미이다. 좀더 나아가서 그는 혹, 다른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또는 비슷한 방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빈의 신학과 설교의 대가 파커(T.H.L. Parker)는 칼빈이 생각하는 설교자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설교자는 의사며, 최고 권위자(magister)며, 선생인데,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목회하는 특정 교회(his own particular Church)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the preacher's own view of Scripture)을 가져야 한다."(Calvin's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36).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다. "설교자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과 처방을 줄 수 있는 말씀의 권위자이며, 설교자는 자신만의 성경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계속적으로 필자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했는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측면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설교자의 가장 우선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것을 전제한다. 간혹 교인들은 '설교 외식'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교를 은혜스럽게 전한다는 목회자들의 교회를 한번 들여다 보라. 그런 교회의 교인들의 특징은 '설교 외식'을 썩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해 주는 엄마의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누가 굳이 '돈 써가며' 외식을 하겠는가?


그런데 만약 교인들의 마음은, 자기 목회자의 잘 요리된 영적 양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그 목회자가 자꾸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가져다 와서 먹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게다가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든지,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고 노력해서 만든 것처럼 행세한다면 이것이 상식적인 일인가? 이 문제는, 옆집 호박을 몰래 따다가 호박전을 부쳐먹는다는 식의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설교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명의 설교자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교육을 받는가? 신학대학원 3년간만을 살펴보더라도, 각 교단마다 거의 100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하게 된다. 이수과목에는 구약학, 신약학, 교의학(조직신학), 역사신학, 설교학, 성경원어 등이 필수과목이다. 이 모든 과목이 왜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과목을 공부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근삼 박사 또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다."(칼빈과 칼빈주의,74)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설교를 위한 신학 전문교육을 받고서도, 설교자가 맨 먼저 성경을 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널린 설교문들을 이리저리 주워 모으고서는 그것을 열심히 묵상하고 있다면, 차라리 신학대학원에 '인터넷 설교학개론' '인터넷 설교리서치 방법론' 같은 것들로 교육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는 '베끼기의 달인'들로 인해 시끄럽다. 그들은 차라리 구약시대의 성경필사자로 태어났더라면 그 능력과 재주를 인정받았을 것을, 스스로를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는 보수교단들이 설교 라이선스를 주고, 목사 안수까지 준 사람들인지라 그냥 한 개인의 문제로만 봐 넘기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신학교 설교학 수업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총회신학부의 강도사 인허 면접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두고 노회법으로 엄격히 다루자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방법론보다는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말씀에 대한 실력을 쌓자. 실력을 쌓는다는 것은 IQ(Intelligence Quotient, 지능지수)의 문제가 아니라, PQ(Practical and Physical Quotient, 신체훈련지수)와 SQ(Spiritual Quotient, 영성지수)에 관한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의 실력은 두뇌로 쌓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이와 영성으로 쌓는 것이다. '엉덩이'는 얼마나 오래 앉아서 연마하느냐를 일컫는 시쳇말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요즘 목회자들도 건강바람이 불어서 운동 하나씩은 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PQ는 신체단련을 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능력을 쌓기 위해 신체를 '혹사'시키라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런데 요즘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신체단련에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정작 의자에 앉아 있질 않는다. 한국 목회자가 세상에서 가장 바쁜 목사라고 서양 학자들의 책들에서도 비아냥 거리는 걸 보면, 의자에 앉을 시간이 있는 목사가 이상할 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다."(딤전4:8)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딤전4:13에서 아주 더 분명히 명령한다. "성경을 읽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 설교자가 실력을 쌓는 일은 '말씀에 전념'할 때 가능한 일이다.


몇 년 전 [목회와 신학]편집부에서 578명의 한국 목사에게 물었다. "설교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단수응답)" 이에 364명(63%)이 '개인의 영성 및 경건생활'이라고 답했다. 그 다음 이어 154명(26.7%)이 '본문 해석능력'이라고 답했다.(한국교회설교분석,두란노아카데미,2009.33). 한국교회 설교자의 90 퍼센트는 '영성 및 성경해석 능력'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이라고 답한 셈이다. 그런데 질문 한가지 더 살펴보자. "귀하의 설교 사역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단수응답)" 이에 49.1 퍼센트가 '설교 전달력 및 자료준비 부족'이라고 답했다.


위의 두 가지 리서치에서 필자는 한국설교자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설교자들의 대부분은 '영성 및 성경해석 능력'을 가장 '이상적인' 설교자의 덕목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설교자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성경해석과 영성'은 사라지고, 당장 써먹어야 되는 것에 급급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왜 생겨나겠는가? 실력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기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 당장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그러나, 정작은 썩은 양식들인--것들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영적 하이에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을 먹이기 위해서 옆집 쓰레기통을 뒤지겠는가? 그런데 요즘에는 남이 이미 먹고 난 음식을 잔뜩 모아서는 돈을 받고 되파는 이도 있다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맛없는 식당은 손님이 금방 알아채니 손님이 없어서라도 문을 닫게 되지만, 교회는 다르다. 설교자가 매주 주워온 썩은 양식들을 먹이는 데도, 교인들은 맛있다며 먹어준다.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왜 계속 생겨날까? 아니 이미 많이 존재해 왔는데, 점차 들통이 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니 질문을 바꿔서 해 보겠다. '설교 베끼기의 달인들'이 어떻게 그 동안 은혜의 사자로 행세하며, 버젓이 강단의 거룩함을 좀먹고 있었던 걸까?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니, 거기에 동조해주고, 단골고객이 되어 준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실력 없는 설교자를 알아볼 실력 있는 교인이 없다는 말이다. 명장 밑에 졸장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현실은 설교자가 이미 졸장이니, 졸장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무슨 수로 영적전쟁을 치룰 명장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을 이끄는 장군이, 칼도 쓸 줄 모르고, 게다가 들고 있는 칼마저 칼집 속에서 잔뜩 녹슬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들의 장군이 칼을 빼어서 연마해 본적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새번역).


이 말씀을 오용해서, 말씀준비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하는 설교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고전 2:1-4에 가서야 더욱 분명해진다. 사도 바울은 정작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새번역).


앞서 언급한 개신교 목사들의 반수가 '자료준비 부족'으로 고민한다고 했던 리서치 결과를 기억할 것이다. 설교자의 지적 모자람과 영성의 부족함을 과연 인터넷을 뒤적거린다고 채울 수 있을까? '훌륭한 말이나 자신의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은 인터넷으로, 다른 설교자의 먹다 남은 양식으로 잠시는 채워질 수 있을 지 모르나, 그런 식으로 매주 설교를 연명하듯 하는 설교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끼기의 달인들'의 설교에는 바울의 설교에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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