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서는 마음과 몸 모두 행위를 이뤄야 구원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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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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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00:00
주님께서는 저희들을 살리셨으니 바로 영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만들어진 이 말씀의 세계에서는 생명있는 자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세월을 통해 건설해야 하는 것으로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심신이 느끼는 목적, 감정, 감동은 없어질 물질로서의 느낌일 뿐입니다. 그 중에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 느끼는 느낌은 바로 주님이 살려주신 영을 통해 심신이 연결되어 느끼는 느낌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자 해도 영과 연결된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은 그저 문자를 그대로 읽을 뿐이고 세상에서 경험하거나 알 수 있는 차원(부모의 은혜, 병든자의 슬픔 등)으로만 받아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구약도 주님의 대속을 소급하여 받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부분까지 자세히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내용이 길 것 같고, 그래서 단순히 주님의 대속으로 살아난 영의 삶이 있는 신약과 영이 죽어 있어 물질의 심신만 있었던 구약이라는 단순한 면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과 연결된 느낌이라는 것은 영과 연결된 마음의 활동 전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모해야겠다는 마음, 주님이 명령하시니 순종해야겠다는 마음, 저 분은 꼭 전도해봐야겠다는 욕심과 같은 것을 예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구약에는 없었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영이 중생되었으니 생길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런 하나님과 연결된 영의 목적이 있는 후에 심신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목적에 그치지 않고 심신의 행위가 있으므로써 구원이 완성됩니다.
반대로 영이 없는 구약에서는 영의 목적이 없습니다. 영이란 엔진조차 빠져있는 껍데기 자동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께서 오실 것을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시고 율법이라는 말씀의 형식을 통해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의 삶을 살았습니다. 엔진은 없고 자동차 뼈대만 먼저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이 없으니 이 영이 움직이는 목적도 없어서 구약시대에서는 목적 없는 행위만 잔뜩 있었을 뿐입니다. 행위만 잔뜩 늘어뜨려 놓고 후에 주님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은 모두 내버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엔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니 엔진을 머리속에 넣고 자동차 껍데기를 만들어봤자 맞지도 않아 내버릴 것이 많고 최악에는 전부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만 지키면 전부라고 쉬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 율법만 지키는 것이 쉽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구원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니 구원목적 이루는데에는 아주 비효율 방법이 구약시대의 율법인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반대로 엔진이라는 것을 먼저 만들어주셨고 우리는 그저 이 엔진에 맞춰 자동차를 만들어 갑니다. 한번씩 죄를 지어 엉뚱한 부품을 엔진에 맞출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말씀대로만 살았다면 이는 모두 엔진에 맞게 부품을 하나 하나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율법 행위가 어떤 것은 쓸 데가 있고 어떤 것은 쓸 데 없는 상황이 아니라 전부 자동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떤 것은 마음가짐으로만 행위(건설구원)가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마음과 몸의 움직이는 것은 합해서 심신의 기능이고 이는 모두 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모두 구원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구약은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있는데 이게 과연 주님이 원하는 행위인지 아닌지는 그저 소망을 할 뿐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율법행위가 나중에 구원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지 아닌지는 마지막 결과를 볼때까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신약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여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예배를 드리면 이는 바로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억지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드리는 것은 옳은 행위이나 '목적'이 바르지 못하니 이는 껍데기 행위일 뿐입니다. 구원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지금 예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구약시대의 외식적인 율법행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예배를 보기 싫은 마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상관 없이 아담의 타락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타락한 마음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이후로 날짜가 만들어졌던 2014년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가 신약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중생된 영을 가지고 움직이는 자라야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중생된 영은 가졌으나 말씀대로 예배드리기 싫은 마음은 아담 때부터 있었던 타락한 몸과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겠다는 마음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구원완성, 행위완성이 아니라 이것은 그냥 아담의 타락 때부터 내려온 타락한 마음과 몸의 행동일 뿐이고 이것은 불태워 없어질 물질의 행동일 뿐입니다. 다만 예배를 드리고는 있으니 외부로는 표가 나지 않는 외식행위가 되겠지요.
반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느냐? 일단 목적은 바르지만 행위가 있지 않았습니다. 영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있으니 이게 마음으로 표출되는데 예를 들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이 어떤 행위를 하려는지 목적을 가지려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마음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그것이 주체가 아니고 영이 주체이고 그게 마음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감사할 것 뿐이라는 것은 마음이 생각하므로, 그렇게 깨달으므로 행위가 바로 완성됩니다. 어떤 것은 마음가짐으로 끝나는 행위구원의 완성도 있지만 어떤 것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주일 오전예배 시간이 다가오면 실제 육의 몸이 움직여 예배를 드려야 완성되는 구원도 있습니다. 만약 예배를 드리지는 않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끝난다면 마음은 구원을 이루었으나 육체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마음이 중요하지 행위를 꼭 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봐보면 행위가 꼭 육체가 움직여야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도 행위구원의 대상이 되는 물질입니다. 육체의 일부입니다. 바른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마음이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행위까지 있는 곳이니 몸의 행위까지 이뤄야 행위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글에도 제가 답한 글이 있지만 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분이 보충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 공회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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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시대에서 율법행위를 없애고자, 정확히 말하면 더 완전케 하고자 신약시대를 주셨습니다. 행위. 마치 겉으로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이나 하루 종일 성경 읽는 그 모습이 외식일뿐 속이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
: 그런데 신약에 있는 우리는 행위로써 건설구원을 완성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 읽어야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배를 보기 좋든 싫든 예배를 봤으니 행위 완성이 아닌가요?
:
: 글쎄 이 행위를 보고 더 잘되기 위해 신약을 주셨는데 왜 신약에서조차 이 행위를 꼭 요구하는 것인지요? 신약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이 아닌지요?
구약도 주님의 대속을 소급하여 받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부분까지 자세히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내용이 길 것 같고, 그래서 단순히 주님의 대속으로 살아난 영의 삶이 있는 신약과 영이 죽어 있어 물질의 심신만 있었던 구약이라는 단순한 면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과 연결된 느낌이라는 것은 영과 연결된 마음의 활동 전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모해야겠다는 마음, 주님이 명령하시니 순종해야겠다는 마음, 저 분은 꼭 전도해봐야겠다는 욕심과 같은 것을 예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구약에는 없었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영이 중생되었으니 생길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런 하나님과 연결된 영의 목적이 있는 후에 심신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목적에 그치지 않고 심신의 행위가 있으므로써 구원이 완성됩니다.
반대로 영이 없는 구약에서는 영의 목적이 없습니다. 영이란 엔진조차 빠져있는 껍데기 자동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께서 오실 것을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시고 율법이라는 말씀의 형식을 통해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의 삶을 살았습니다. 엔진은 없고 자동차 뼈대만 먼저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이 없으니 이 영이 움직이는 목적도 없어서 구약시대에서는 목적 없는 행위만 잔뜩 있었을 뿐입니다. 행위만 잔뜩 늘어뜨려 놓고 후에 주님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은 모두 내버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엔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니 엔진을 머리속에 넣고 자동차 껍데기를 만들어봤자 맞지도 않아 내버릴 것이 많고 최악에는 전부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만 지키면 전부라고 쉬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 율법만 지키는 것이 쉽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구원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니 구원목적 이루는데에는 아주 비효율 방법이 구약시대의 율법인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반대로 엔진이라는 것을 먼저 만들어주셨고 우리는 그저 이 엔진에 맞춰 자동차를 만들어 갑니다. 한번씩 죄를 지어 엉뚱한 부품을 엔진에 맞출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말씀대로만 살았다면 이는 모두 엔진에 맞게 부품을 하나 하나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율법 행위가 어떤 것은 쓸 데가 있고 어떤 것은 쓸 데 없는 상황이 아니라 전부 자동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떤 것은 마음가짐으로만 행위(건설구원)가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마음과 몸의 움직이는 것은 합해서 심신의 기능이고 이는 모두 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모두 구원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구약은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있는데 이게 과연 주님이 원하는 행위인지 아닌지는 그저 소망을 할 뿐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율법행위가 나중에 구원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지 아닌지는 마지막 결과를 볼때까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신약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여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예배를 드리면 이는 바로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억지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드리는 것은 옳은 행위이나 '목적'이 바르지 못하니 이는 껍데기 행위일 뿐입니다. 구원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지금 예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구약시대의 외식적인 율법행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예배를 보기 싫은 마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상관 없이 아담의 타락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타락한 마음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이후로 날짜가 만들어졌던 2014년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가 신약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중생된 영을 가지고 움직이는 자라야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중생된 영은 가졌으나 말씀대로 예배드리기 싫은 마음은 아담 때부터 있었던 타락한 몸과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겠다는 마음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구원완성, 행위완성이 아니라 이것은 그냥 아담의 타락 때부터 내려온 타락한 마음과 몸의 행동일 뿐이고 이것은 불태워 없어질 물질의 행동일 뿐입니다. 다만 예배를 드리고는 있으니 외부로는 표가 나지 않는 외식행위가 되겠지요.
반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느냐? 일단 목적은 바르지만 행위가 있지 않았습니다. 영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있으니 이게 마음으로 표출되는데 예를 들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이 어떤 행위를 하려는지 목적을 가지려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마음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그것이 주체가 아니고 영이 주체이고 그게 마음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감사할 것 뿐이라는 것은 마음이 생각하므로, 그렇게 깨달으므로 행위가 바로 완성됩니다. 어떤 것은 마음가짐으로 끝나는 행위구원의 완성도 있지만 어떤 것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주일 오전예배 시간이 다가오면 실제 육의 몸이 움직여 예배를 드려야 완성되는 구원도 있습니다. 만약 예배를 드리지는 않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끝난다면 마음은 구원을 이루었으나 육체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마음이 중요하지 행위를 꼭 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봐보면 행위가 꼭 육체가 움직여야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도 행위구원의 대상이 되는 물질입니다. 육체의 일부입니다. 바른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마음이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행위까지 있는 곳이니 몸의 행위까지 이뤄야 행위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글에도 제가 답한 글이 있지만 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분이 보충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 공회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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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시대에서 율법행위를 없애고자, 정확히 말하면 더 완전케 하고자 신약시대를 주셨습니다. 행위. 마치 겉으로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이나 하루 종일 성경 읽는 그 모습이 외식일뿐 속이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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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신약에 있는 우리는 행위로써 건설구원을 완성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 읽어야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배를 보기 좋든 싫든 예배를 봤으니 행위 완성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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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이 행위를 보고 더 잘되기 위해 신약을 주셨는데 왜 신약에서조차 이 행위를 꼭 요구하는 것인지요? 신약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이 아닌지요?
구약의 행위와 신약의 행위는 어떻게 다른가요?
구약 시대에서 율법행위를 없애고자, 정확히 말하면 더 완전케 하고자 신약시대를 주셨습니다. 행위. 마치 겉으로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이나 하루 종일 성경 읽는 그 모습이 외식일뿐 속이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런데 신약에 있는 우리는 행위로써 건설구원을 완성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 읽어야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배를 보기 좋든 싫든 예배를 봤으니 행위 완성이 아닌가요?
글쎄 이 행위를 보고 더 잘되기 위해 신약을 주셨는데 왜 신약에서조차 이 행위를 꼭 요구하는 것인지요? 신약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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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에서 율법행위를 없애고자, 정확히 말하면 더 완전케 하고자 신약시대를 주셨습니다. 행위. 마치 겉으로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이나 하루 종일 성경 읽는 그 모습이 외식일뿐 속이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런데 신약에 있는 우리는 행위로써 건설구원을 완성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 읽어야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배를 보기 좋든 싫든 예배를 봤으니 행위 완성이 아닌가요?
글쎄 이 행위를 보고 더 잘되기 위해 신약을 주셨는데 왜 신약에서조차 이 행위를 꼭 요구하는 것인지요? 신약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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