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분화 전의 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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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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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08:33
천주교의 1천 년 때문에 일단 칼빈의 이신칭의는 도출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기본구원은 건설구원을 알고 구원론의 한 쪽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의 확실하게 틀린 쇠사슬을 끊고 탈출하는 과정에 그 감옥을 탈출해야 한다는 일념과 추진과 성공만 있었습니다. 탈출한 다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탈출 자체도 사실 불가능할 일이니 탈출 후는 두리뭉실하게 미래에 맡겨 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수고로 천주교 탈출이 확실하게 성공했고 이제 다시는 잡혀 들어 갈 위험이 없게 되자 천주교에서 살아 나온 기독교는 허탈감에 싸입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들어 오는 것에 목숨을 걸었으나 한국에 와서 안정을 찾게 되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하고 이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뒷골목의 찬바람을 겪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미니우스가 칼빈의 탈출 수고를 감사하고 그 탈출 수고 위에 바로 교회가 건설할 과제에만 집중했더라면 이미 400여년 전에 건설구원론의 기초가 확립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기능구원과 같은 고도의 난제들도 300년 전에 확립이 되었을 터입니다. 안타깝지만 천주교에서 나와야 했다는 것이 '개혁주의'라는 단어이며 이 단어는 오늘까지도 보수 정통의 모든 교회들의 '진행 중인'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개혁주의를 강조할수록 5백년 전에 해결한 과제에 스스로 발을 딛고 그 다음의 발전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1945년에 해방 된 이 나라가 21세기 국제 경쟁 속에 정신도 없는데 지금도 '친일'이라는 말이 나오면 몸서리를 치고 나라를 다 팔아 먹어도 친일을 색출하여 없애야 하는 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그 사고가 지난 다음에는 다음에 조심하면 되는 것을 당시 사고의 악몽으로 평생 그 사고 현장 중에 자기를 던져 버리는 정신적 투옥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허실이 없는 경제적인 하나님의 인도가 알미니우스와 칼빈의 4백년 소모전을 그냥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난 4백년의 논쟁이 칼빈의 이신칭의가 공회의 기본구원이 되게 했고, 그 기본구원론이 너무 탄탄하고 치밀해 져서 그 위에 건설구원을 세울 기초가 제대로 되게 한 효과가 있습니다. 마치 천주교가 1천년을 미친 듯이 교회를 절단 냈기 때문에 루터 칼빈의 이신칭의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그냥 나온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이신칭의를 찬 바람과 세상 온갖 원수들이 납치하려고 영아 살해 하려고 온갖 박해를 하는 바람에 지난 5백년은 건설구원으로 나가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기본구원론의 터가 견고해 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급한 마음은 63빌딩을 짓는다 해도 자고 나면 뚝딱 지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건축물은 문제가 많습니다. 서구의 넉넉한 저들은 1백년을 걸려 집을 짓고 2백년을 걸려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 세월 속에 다져지며 하나씩 쌓아 올라 간 건축의 견고함과 치밀함은 분명히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위해 1천년의 천주교 세월을 주신 주님이
건설구원을 위해 5백년의 개혁 후의 세월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의인들이 매 순간 주님 붙들고 기도와 말씀 연구에 인생을 쏟았는데 그 한 순간 순간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간단한 대화의 내용이 되어 우리에게 산삼보약의 역할을 합니다. 1천년 산속에 숨어 사슴에게 먹히지 않고 버틴 산삼을 어느 날 발견한 사람들, 그들이 한 입에 마셔 버린 산삼 끓인 탕재는 그들의 평생이 분명히 남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삼을 먹고 천하를 짓밟는 폭군 임금이 되거나 자기 멋대로 살아 수 없는 사람의 호소를 듣게 된다면 그는 산삼을 먹은 죄가 아니라 산삼을 먹고 활동한 행동 때문에 산삼의 1천년 수고 이상의 죄값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 2천년사를 손바닥에 쥐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는 과거 선배들과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며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대충 교회 운영하며 자기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서 끝날 수 없고
종교인으로 취업하여 안정 된 생활에 마음을 둘 수 없습니다.
이 노선의 존재 이유며, 이 사이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직원들과 회원들의 기본 자세입니다.
구체적 질문을 두고
어거스틴은 1천년 뒤를 넘어 섰던 영감의 사람입니다. 천주교 1천년이 그를 넘어 서지 못했고 칼빈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천주교 1천년의 구원론 탈선을 주시기 전에 먼저 어거스틴의 기본 교리를 주셨다고 봅니다. 칼빈의 이신칭의의 기본이 되는 어거스틴의 이신칭의가 먼저 나오고 그 것을 1천년 동안 짓밟고 그리고 칼빈이 다시 재정립하면서 이신칭의는 확고해 졌습니다.
연구소의 방향 설정을 두고 이 번 주간에 많은 업무가 있어 답변을 성실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
: * 이영인목사님께서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 성경론(계시론) - 삼위일체론(신론) - 신인양성일위론(기독론) - 이신칭의론(기본구원)
: - 건설구원론(기능구원론)
:
: 총론질문)
: 2000년 교리사의 과정을 보면 위의 내용과 같습니다.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교리사과정 가운데서, 어떠한 `위치-가치`가 있을까요?
:
: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죄론논쟁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
: 어거스틴은 원죄론과 타락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밖에 없고
: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해서만 죄와 사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인간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새로운 삶에로 이끄실때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실때(구원받았을때) 인간의 참된 자유가 성취될수 있다고
: 보았습니다.
:
: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했으며, 태어날때 부터 죄에 저항할 수 있고
: 의를 행할수 있는 참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에 대해서 논쟁을 했는것 같습니다.
:
:
: 각론질문1)
: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어거스틴의 인죄론(원죄- 자유의지 -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한 구원)도 기독론과 종교개혁의 기본구원(종교개혁) 사이에
: 위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
:
: 각론질문2)
: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어거스틴으로 돌아간 종교개혁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준비 예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요?
: 실제 어거스틴의 깨달음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시대의 깨달음들을 가질수 있었을지?
: 의문이기도 하고, 루터목사님은 성경만으로도 이신칭의를 혼자서 깨달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칼빈의 수고로 천주교 탈출이 확실하게 성공했고 이제 다시는 잡혀 들어 갈 위험이 없게 되자 천주교에서 살아 나온 기독교는 허탈감에 싸입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들어 오는 것에 목숨을 걸었으나 한국에 와서 안정을 찾게 되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하고 이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뒷골목의 찬바람을 겪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미니우스가 칼빈의 탈출 수고를 감사하고 그 탈출 수고 위에 바로 교회가 건설할 과제에만 집중했더라면 이미 400여년 전에 건설구원론의 기초가 확립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기능구원과 같은 고도의 난제들도 300년 전에 확립이 되었을 터입니다. 안타깝지만 천주교에서 나와야 했다는 것이 '개혁주의'라는 단어이며 이 단어는 오늘까지도 보수 정통의 모든 교회들의 '진행 중인'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개혁주의를 강조할수록 5백년 전에 해결한 과제에 스스로 발을 딛고 그 다음의 발전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1945년에 해방 된 이 나라가 21세기 국제 경쟁 속에 정신도 없는데 지금도 '친일'이라는 말이 나오면 몸서리를 치고 나라를 다 팔아 먹어도 친일을 색출하여 없애야 하는 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그 사고가 지난 다음에는 다음에 조심하면 되는 것을 당시 사고의 악몽으로 평생 그 사고 현장 중에 자기를 던져 버리는 정신적 투옥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허실이 없는 경제적인 하나님의 인도가 알미니우스와 칼빈의 4백년 소모전을 그냥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난 4백년의 논쟁이 칼빈의 이신칭의가 공회의 기본구원이 되게 했고, 그 기본구원론이 너무 탄탄하고 치밀해 져서 그 위에 건설구원을 세울 기초가 제대로 되게 한 효과가 있습니다. 마치 천주교가 1천년을 미친 듯이 교회를 절단 냈기 때문에 루터 칼빈의 이신칭의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그냥 나온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이신칭의를 찬 바람과 세상 온갖 원수들이 납치하려고 영아 살해 하려고 온갖 박해를 하는 바람에 지난 5백년은 건설구원으로 나가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기본구원론의 터가 견고해 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급한 마음은 63빌딩을 짓는다 해도 자고 나면 뚝딱 지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건축물은 문제가 많습니다. 서구의 넉넉한 저들은 1백년을 걸려 집을 짓고 2백년을 걸려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 세월 속에 다져지며 하나씩 쌓아 올라 간 건축의 견고함과 치밀함은 분명히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위해 1천년의 천주교 세월을 주신 주님이
건설구원을 위해 5백년의 개혁 후의 세월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의인들이 매 순간 주님 붙들고 기도와 말씀 연구에 인생을 쏟았는데 그 한 순간 순간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간단한 대화의 내용이 되어 우리에게 산삼보약의 역할을 합니다. 1천년 산속에 숨어 사슴에게 먹히지 않고 버틴 산삼을 어느 날 발견한 사람들, 그들이 한 입에 마셔 버린 산삼 끓인 탕재는 그들의 평생이 분명히 남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삼을 먹고 천하를 짓밟는 폭군 임금이 되거나 자기 멋대로 살아 수 없는 사람의 호소를 듣게 된다면 그는 산삼을 먹은 죄가 아니라 산삼을 먹고 활동한 행동 때문에 산삼의 1천년 수고 이상의 죄값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 2천년사를 손바닥에 쥐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는 과거 선배들과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며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대충 교회 운영하며 자기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서 끝날 수 없고
종교인으로 취업하여 안정 된 생활에 마음을 둘 수 없습니다.
이 노선의 존재 이유며, 이 사이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직원들과 회원들의 기본 자세입니다.
구체적 질문을 두고
어거스틴은 1천년 뒤를 넘어 섰던 영감의 사람입니다. 천주교 1천년이 그를 넘어 서지 못했고 칼빈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천주교 1천년의 구원론 탈선을 주시기 전에 먼저 어거스틴의 기본 교리를 주셨다고 봅니다. 칼빈의 이신칭의의 기본이 되는 어거스틴의 이신칭의가 먼저 나오고 그 것을 1천년 동안 짓밟고 그리고 칼빈이 다시 재정립하면서 이신칭의는 확고해 졌습니다.
연구소의 방향 설정을 두고 이 번 주간에 많은 업무가 있어 답변을 성실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 신학생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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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인목사님께서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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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론(계시론) - 삼위일체론(신론) - 신인양성일위론(기독론) - 이신칭의론(기본구원)
: - 건설구원론(기능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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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론질문)
: 2000년 교리사의 과정을 보면 위의 내용과 같습니다.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교리사과정 가운데서, 어떠한 `위치-가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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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죄론논쟁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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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은 원죄론과 타락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밖에 없고
: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해서만 죄와 사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인간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새로운 삶에로 이끄실때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실때(구원받았을때) 인간의 참된 자유가 성취될수 있다고
: 보았습니다.
:
: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했으며, 태어날때 부터 죄에 저항할 수 있고
: 의를 행할수 있는 참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에 대해서 논쟁을 했는것 같습니다.
:
:
: 각론질문1)
: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어거스틴의 인죄론(원죄- 자유의지 -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한 구원)도 기독론과 종교개혁의 기본구원(종교개혁) 사이에
: 위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
:
: 각론질문2)
: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어거스틴으로 돌아간 종교개혁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준비 예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요?
: 실제 어거스틴의 깨달음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시대의 깨달음들을 가질수 있었을지?
: 의문이기도 하고, 루터목사님은 성경만으로도 이신칭의를 혼자서 깨달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교리사에서 어떤위치에 들어가는지?
* 이영인목사님께서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론(계시론) - 삼위일체론(신론) - 신인양성일위론(기독론) - 이신칭의론(기본구원)
- 건설구원론(기능구원론)
총론질문)
2000년 교리사의 과정을 보면 위의 내용과 같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교리사과정 가운데서, 어떠한 `위치-가치`가 있을까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죄론논쟁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원죄론과 타락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밖에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해서만 죄와 사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새로운 삶에로 이끄실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실때(구원받았을때) 인간의 참된 자유가 성취될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했으며, 태어날때 부터 죄에 저항할 수 있고
의를 행할수 있는 참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에 대해서 논쟁을 했는것 같습니다.
각론질문1)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어거스틴의 인죄론(원죄- 자유의지 -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한 구원)도 기독론과 종교개혁의 기본구원(종교개혁) 사이에
위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각론질문2)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어거스틴으로 돌아간 종교개혁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준비 예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요?
실제 어거스틴의 깨달음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시대의 깨달음들을 가질수 있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루터목사님은 성경만으로도 이신칭의를 혼자서 깨달었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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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인목사님께서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론(계시론) - 삼위일체론(신론) - 신인양성일위론(기독론) - 이신칭의론(기본구원)
- 건설구원론(기능구원론)
총론질문)
2000년 교리사의 과정을 보면 위의 내용과 같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교리사과정 가운데서, 어떠한 `위치-가치`가 있을까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죄론논쟁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원죄론과 타락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밖에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해서만 죄와 사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새로운 삶에로 이끄실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실때(구원받았을때) 인간의 참된 자유가 성취될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했으며, 태어날때 부터 죄에 저항할 수 있고
의를 행할수 있는 참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에 대해서 논쟁을 했는것 같습니다.
각론질문1)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인간이란 어떤존재인가? 어거스틴의 인죄론(원죄- 자유의지 -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의한 구원)도 기독론과 종교개혁의 기본구원(종교개혁) 사이에
위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각론질문2)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어거스틴으로 돌아간 종교개혁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준비 예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요?
실제 어거스틴의 깨달음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시대의 깨달음들을 가질수 있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루터목사님은 성경만으로도 이신칭의를 혼자서 깨달었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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