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한국 총공회 약사
제4장 한국 총공회 약사
오늘날까지 교회역사에는 시대 시대 세우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특별한 역사를 해온 경우가 많았다. 총공회의 진리노선 역사에도 하나님께서 백영희목사님을 통하여 역사하신 면이 특별하기 때문에 “총공회의 역사”는 “백영희 목사님의 신앙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일반의 신학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더 성경대로 온전한 깨달음”으로 많은 신학의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그뿐 아니라 그 깨달음대로 교회 행정을 실행하여 그 결과가 교회사에 찾아보기 힘든 하나님의 크신 사역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교단의 것과 다르다 하여 많은 오해와 박해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모든 사역을 마지막 순교로써 다 마치고 이 세대에 필요한 총공회의 교리,신조,행정을 세워 또한 이 세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복음운동이 더욱 힘있게 전개될 것이다.
1.태동기(1936년:백목사님신앙출발~1952년:서부교회부임)
⑴ 1910년,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백영희 목사님 출생.
⑵ 1936년, 윤봉기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신앙출발, 3년간의 연경으로 신구약성경암송, 산기도,
철야기도로 이어간 신앙생활.
(3) 1939년~ 1945년, 개명교회를 개척하고 전교인 6년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 승리
⑸ 1949년, 위천교회에 전도사로서 유급목회.
⑹ 1950년, 6.25 점령치하에서 계속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적으로 신앙 승리함.
⑺ 1952년, 부산서부교회의 분규 수습을 위해 파송받고 부산으로 이동.
2. 박해기(1951년~1970년: 주일학교운동기)
⑴고려파내 박해기 (1951년~1959년)
평양출옥성도들이 중심된 고려파에서 예배당소송, 유엔군 철수
반대 운동,I.C.C.C가담, 교권문제, 신조문제등의 내부문제와 행정 문제, 잦은 성경과 교리논쟁, 신조문제등의 내부문제로 8년간 고신의 지도적 목사님들로부터 개인적, 교회적인 마찰과 박해가 계속 되었다.
* 백영희목사님 제명내력 *
˙동일 기간중 고려파에서 대표적 부흥강사로 전국적 활도.
˙1954년 6월 17일 고려신학교 제8회로 졸업, 1957년 강도사 고시에 합격.
˙1957년 9월 3일, 고려파 부산노회에서 당회장 일임하에 서부교회문제를 처리 결정.
˙1958년3월 11일, “백영희강도사를 청하여 집회한 교회들은 시찰회로써 문책하고,
해당회장들은 노회 앞에서 사과하다”(진주노회)
˙1958년 9월 9일, “백영희강도사의 문제는 서부교회를 사면케하다”
˙1959년 3월 3일, “백영희강도사의 강도사 인허를 취소하고 해 당회장으로 특별집회금 지와 타 교회전임을 명하게 하다”(부산노회)
˙19598년 9월 8일, “서부교회 사건은 백영희씨를 파직하고 해 교회는 당회장으로 수습 처리하기로 가결하다”(부산노회)
8년간의 교단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진리노선으로만 걸어왔으나 결국 제명 당해 쫓겨남으로 독립적 노선을 걷게 되었다.
(2)전국적 박해기 (1960-1970)
고려파에서 제명당한 후 백영희 목사님은 그 동안 교단내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동안 발표하지 않은 새로운 교리적 깨달음과 개교회행정을 목사님의 독특한 성경 깨달음을 제2의 종교개혁적인 각오로써 밝혀 나갔다.
따라서 백목사님의 목회지인 부산 서부교회는 그의 “교회론”의 실천장이 되었고,40여년의 목회 강단에서 많은 새로운 교리들이 밝혀져 있으며 한국 총공회는 그의 “공회적 교단론”의 실천장이 되었다.
마치 칼빈이 제네바시에서 개혁교회의 모델을 제공하고 칼빈의 그 깨달음과 그의 실천이 오늘 장로교의 표준이 되었듯이, 백목사님의 그 깨달음과 또 서부교회와 총공회 통하여 보여준 실제가 총공회가 주장하는 참된 교회론인 것이다.
①교리적 박해
가. 삼분설과 중생교리의 오해
인성의 구조에 있어서는 다수설이 이분설이며 따라서 사람을 둘로만 나누어 영혼과 육체로 알고 있으나, 사람은 영체로 된 영, 물체로 된 마음(영혼), 몸(육체)의 셋으로 더욱 세밀히 밝혔으며, 특히 이 삼분설은 182권의 설교록을 통하여 주장이 되어 있다. 오늘 마음이 물질로 밝혀져 이미 인성 구조에 정통한 신학자들은 과학이 영혼을 만들고 신령한 것을 만드는 모습에 종교의 근본을 상실하여 신학적 방황에 빠져 들고 있다. 이런 과학의 발전을 알고 합리화로 맞춘 교리가 아니라 이미 40년 전에 마음은 물질이며 다만 신비한 물질일 뿐이며, 물질계인 우주에서 신령한 존재로 영적인 존재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중생된 우리의 영이라고 주장한 것은 특히 새겨볼 일이며, 오늘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신학계로서는 조직신학의 대단히 중대한 논제로서 살펴볼 논제가 되었다.
백목사님의 주장을 정확히 듣지 않고 섣부른 이분설 주장자들이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중생 교리를“중생한 사람의 마음이 죄짓지 않는다”는 2분설의 자기들 생각으로 바꾸어 오해를 하여 마침내는 “백목사의 서부교회는 중생한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주장한다” 는 말로 전달되어 이단설의 진원이 되었다.
초기의 교리적 오해에도 불구하고, 1964년 이인재목사님(출옥성도), 이병규목사님(현 계약신학장), 등은 백목사님의 중생교리 동의문에 날인하여 중생교리를 지지하였다.
나.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오해
구원은, 택자라면 천국에 불택자라면 지옥에 가는 것이요, 같은 택자라도 평생의 신앙행위에 따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실력, 대우, 영광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전자를 기본구원 후자를 건설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을 이렇게 나누지 않으면 온 성경이 구원론에서는 바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없이 많은 오해가 있었으며 특히 마25장의 열처녀 비유에 대한 많은 시비가 있었다.
* 참 고 *
물론 이런 백목사님의 깨달음은 기존교단들의 통계, 역사, 상식에 배치되는 것이라 하여 일반 장로교로부터 대단한 정죄를 받게 되었고 심어는“이단”이라는 공식“정죄”를 비록하여 일반 장로교인들이“이단”혹은“이단적” 교회로 상대한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국에는 장로교가 대세인 까닭에 장로교 교리에 틀리면 이단 혹은 이단시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어 그러한 줄 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등 정통 보수 교단들은 자기대로의 성경 깨달음을 다 가지고 있다. 어느 교단이도“완전”이요“무흠”하며“장점”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자기 신앙양심으로는“더 나은 것이 없는 제일의 깨달음”이기에 어떤 사람은 이 교파를, 어떤 사람은 저 교파를 신앙하여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구원과 관계되는 교리, 예를 들면 삼위일체 하나님관, 성경관 ... 등에 크게 삐뚤어진다면 기독교와 비슷해도 실제로는 한 종교 안에 다른 교파가 아니라 아예 종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같은 기독교 내의 다른 교파를 자기들 깨달음과 다르다고 무조건 이단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②행정적 개혁에 의한 박해
교회사를 되돌아 볼 때 초기의 건전한 성경적 교회가 세월에 따라 성경 아닌 인간적 제도들이 많아짐으로 원래의 좋은 목적과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속화되곤 하였다.
백목사님은 이 시대 특히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교권투쟁과 이로 인한 단체 속화를 막을 수 있는 교회 운영을 개교회주의에서 찾았다. 교회사의 독립교회와 모양이 비슷하여 독립교회노선으로 오해하는 외부인들이 있지만, 총공회의 개교회주의는 '공회운영'이라는 특색이 있다.
전통을 참고하되 전통에 갇히지 아니하였다. 옳은 것은 세우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서슴없이 수정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통의 뿌리에서 뻗어가고 자라갔지 별개의 것을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즉, 백목사님의 노선은 보수성장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의 교단들은 자기들과 외형이 다르므로 정죄했다. 이것으로 많은 박해와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신앙양심에 띠라 깨닫는 성경관은 각자가 다를 수 있으면 각자가 성경 깨달음에 따라 교회를 행정하여 나가는 것은 교회자유의 원칙인 것이다.
가. 성경기준의 원칙
어떤 교회의 제도 형식이라고 성경적이 아닌 것은 즉시 수정하였다. 또한 성경적 깨달음에 합당한 것이면 단행하였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대원리였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의결은 소수도 다수도 아닌 “진리대로”되어야 함을 제1원칙으로 세워 다수결을 배격하고 단체적 속화의 위험을 방지하였다. 한편 성경절대의 원칙에 따라 명문의 “법”을 두지 않았다.
교회의 명문 헌법은 결국 성경을 제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개교회주의의 교회 운영, 목회중심의 교역자 양성및 목회자관, 구원중심의 권징실행이 그것이었다.
나. 초대교회의 원칙
속화 타락되기 이전의 초대교회처럼 비록 성경이 명문으로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할찌라도 인간 생각대로의 복잡한 조직제도를 지양하고 초대교회와 같이 말씀과 인간구원을 중심한 단순성을 가졌다.
예를 들면, 각종 호칭, 예배 형식 등
③박해의 대표적 예
가.“백파”라는 명칭
이단적 교파라는 선입관을 주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지금도 전국적으로 “총공회”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백파”라는 이단시하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교회들이 더 많고, 초기에는 “백파”라는 이름으로 접촉조차도 금하도록 했던 총공회 박해사의 대명사이다.
나. 이단 정죄및 제재조처
합동측 경북노회등은 노회결의를 통하여 이단이라 정죄를 했고(1968) 이외에도 다수의 교단이 비공식적으로 이단교파로 취급했으며(1960연대, 70년대 초반) 최근에도 포항연합회(1988년), 제천지방연합회(1988년)에서 이단시비가 있었으나 스스로 사과하고 중단되었다.
초기는 교단, 노회, 교회적으로 아예 총공회 소속 교회들과는 접촉을 공식, 비공식 제재하였다.
다. 한종희목사의 “이단의 정체”사과 사건
1975년 10월 박윤선목사님 등의 간접적 도움을 받던 한종희 목사가 김의환저 “이단의 정체”라는 책에서“일부독립교회편”이라는 제하로 총공회의 교리와 행정이 전통 장로교의 성경원리에 어긋난 이단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한종희 목사는 책이 출판된 지 한달이 채 못된 1975년 12월 23일 자신이 거짓으로 잘못 기록했음을 정식 사과하고 문제의 책을 자진하여 회수, 폐기처리 하였다.
라. 장로교신학교 신문의 “이단 표현 정정”사건
1987년 2월 21일 장로교신학대학이 기고문에서 총공회를 “이단”으로 표현했다가 1주후 자진 정정하고 “극보수 교단”이라 수정하였다.
3. 발전기(1970년: 주일학교부흥~1980년)
상기와 같은 많은 박해 가운데서도 1966년 백목사님은 그동안의 초기 박해기를 극복하고 “총공회”를 발족했으며 장로교단 내의 비성경적 제도 조직을 지양하고 성경적 개교회주의를 밝혀 나갔다.
⑴총공회 발족 3대 성경원칙 천명
(제 2부 「총공회행정체제」 편 참고)
1966년 5월 26일 백영희목사님을 비롯 목사 10명, 장로 1명이 모여 개교회주의 공회를 발족하며 진리대로 전원일치제, 성경법주의, 총공회장 비상존직 등 3개안을 개교회주의의 근본 성경원칙으로 천명하고 출발했다.
( 총공회 제 1회 회의록 참고)
⑵교역자회를 이용한 목회자 양육 및 전국 개교회 지도
1973년 12월 4일 개교회 교역자를 서부교회에 소집 2박 3일로 성경공부와 목회지도 등을 계속하여 교회부흥의 근간이 되었다.
⑶목회자 양성및 개척 주력
타 교단과의 교회쟁탈을 철저히 배제하고 목회자를 일일이 기르고 개척시켜 공회를 부흥시켜 나갔다. 외부적 선전을 지양하고 내적에 충실한 실질적 부흥을 위주 하였으므로 구호나 운동은 전혀 없었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숨어 꾸준히 충성하는 것뿐이었다.
⑷목회자양성원 설립
일찍부터 일반 신학교 체제와 다른 성경중심의 목회자 양성에 뜻을 두고 최재현목사님, 서영호목사님, 송용조목사님등을 도미시켜 교수 양성을 하였고, 1976년 3월 양성원을 발족시키고 이어 송종관, 이영인, 이진석, 류정현 목사님등 3명을 추가 도미시켜 양성원교수를 확보하고 백목사님이 직접 성경과목을 담당하여 비록 소수이나 최상의 양성원을 이루었다.
⑸ 주일학교 운동
한편 초창기부터 소신있는 목회로 계속한 결과 중 제일 대표적인 예는 주일하교 부흥이었다.
1970년대부터 불붙기 시작한 주일하교 부흥은 80년대로 계속 이어져 성령이 친히 능력으로 함께 하는 확실한 표적이 되고 있다. 70여명의 주일학생으로 시작한 서부교회가 2만 5천 재적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4.확립기 (1980년~1989년)
1982년 7월부터 83년 2월까지 약 반년동안 갑작스런 병환으로 사선의 고비를 넘긴 후 목사님은 초기의 창설기적인 시기를 지나 목사님 사후에도 진리노선의 보수를 위해 필요한 중요한 몇가지 방향을 설정하였다.
⑴교리적 면
중생교리, 3분설, 기능구원에 이어 중생이 하나님으로 난 것임을 밝히고 중생한 성도의 불의의 기능이 지옥에서 호소하는 건설구원의 깊은 면까지 밝혀 나가고 있었다. 이는 초기의 중생 및 구원교리를 더욱 밝힘으로 정성경적 체계화의 중요한 깨달음의 발표였다.
(1986년~1989년)
⑵공회행정 3대 성경원칙의 재확인
발족 당시 밝힌 3대원리가 총공회 창설의 초창기 때는 과도기적으로 불분명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순교를 내다본 백목사님은 마지막 수년을 이러한 근본성경 3대원리의 확립과 실천적 모범을 보여 총공회 진리행정을 확립하였다.
특히 1987년 11월 김철수목사님의 탈퇴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시 한번 노선문제가 대두되고 한편 총공회 수정노선주의 교역자들의 명문법 제정 혹은 조직 제도화의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백목사님은 1년 이상의 연구기간을 통해 발족의 “성경법유일주의”를 재확인 하였다.
(1987년~1989년)
⑶행정 8개안 및 3대 원칙의 보완적 확립
총공회의 진리노선 자체를 반대하는 수정노선주의 교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총공회 노선에 대한 마지막 입장 정리를 8개 안으로 마무리햐여 발표하였고, 공회체제가 교권에 의하여 일시에 무너질 수 있는 “교역자 파송제”를 “개교회의 완전 청빙제”로, 총공회장의 비상존에서 오는 행정처리 문제를 “노원, 소원위원회”를 설치하여 보완하였다.
(제 19회 총공회록 89년 1월 교역자회의록 참고)
⑷설교를 통한 총공회 노선 재확인
순교전 마지막 수년간 5월, 8월 집회는 물론하고 새벽기도, 양성원 경건회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입장을 일반 교단과의 차이점과 순교후 되어질 일에 대하여 외치며 예언까지 하여 총공회의 진리노선에 대한 성경적 정립을 하였다.
⑸서부교회의 분교활동 강화
1987년 8월 15일 교단의 후임 지도자로 인정되던 서영준목사님이 먼저 사망하였고 목사님은 신앙지도의 위치를 담당할 후임에 대한 염려와 또한 원거리의 주일학생 혹은 장년반의 오후 예배나 새벽예배에 대한 불편을 생각하고 예배장소를 보완하기 위하여, 또 장차 개척교회를 염두에 두어 기존의 부산 시내 분교를 적극 확장시켜 30처를 두었다
⑹“목회연구소”설립
1982년 3월 10일 백영희 목사님은 서부교회 내에 설교 및 목회기록보관을 위한 편집실을 설치하였고 편집실에서는 목회 설교집을 주간 혹은 월간으로 발행하며 녹음 또는 녹화 설교를 출간하도록 하였다. 1984년부터 백영희목사님과 총공회의 신앙노선을 교리적으로 정립하도록 연구소 연구부장 이영인을 Covenant 신학원에 유학을 보냈고 이후 총공회 교리 정립이 추진 중에 있다.
1988년 3월 10일 백영희 목사님은 순교의 임박을 느껴 서부교회 소속의 편집실을 완전“독립기관”으로 발족시켜 이시대에 주신 이 복음을 연구할 수 있도록“목회연구소”를 출발시켰다.
연구소의 성격은 어느 개인이나 교회, 교단에 소속되지 않는 독자적 연구기관으로“백영희 목사님”에 관한 개관적 연구평가와 그 반포사업을 하는 것이다.
* 참 고 *
1989. 10. 9. 국민일보의 白永僖 목사 추모기
순생의 복음 사역이 순교로 끝맺어지기를 그토록 간구하며 속화되지 않은 신앙과 목회상으로 한국과 세계교회를 밝히던 백영희 목사님 (부산 서부교회 담임목사, 예장한국총공회장)이 마침내 8월 27일 설교하던 강단에서 순교를 당했다.
일평생 오해와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고독한 진리의 외길을 끝까지 고수한 白永僖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6. 25동란 점령치하의 환난을 승리하여 나왔으나 묵묵히 목회에만 일념하여 교계에서 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에 비판적인 어는 기자가 서부교회의 미아 발생 사건을 취재하던 중 너무나 감동적인 주일학교의 모습에 오려 극찬의 기사를 실은 것이 그가 세상의 세상과 교계에 알려진 동기였다.
한 강단에서 40여년, 주일예배부터 새벽기도회 설교, 반사회 주재로 빠짐없이 80노령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하여 이룬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 1백 72권에 이르는 방대한 교리적 교훈이 담겨진 목회 설교록. 매년 수백명의 병자들이 치료되고 수만 명이 참석하는 32년간의 집회. 반사 하나 하나를 목회자로까지 길러 1백 20여 교회를 개척하는 등 목회도 정말 값진 것이었으나 한편으로 순교의 마지막은 자신이 신앙이 최종 완성되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범인은 일부 보도와는 달리 교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정신 질환도 없었던 점과 목사님의 순교 전 예견한 설교 등으로 미루어 이는 진리를 증거하는 목회자를 증오한 배후가 있었음을 쉽게 알게 한다.
다가오는 범인을 보았으나 대속을 언제나 생각하라 는 설교가 600여 성도들을 사로잡고 있었고 찔리는 순간까지 모든 교인의 입도 몸도 얼어붙어 있었다.
설교를 녹화하던 카메라에 잡힌 최후 순간은 평소 가르친 대로 목사님은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범인을 향해 말렸고 '아버지여'를 두 번 외치는 목사님의 음성과 함께 20㎝의 칼은 가슴에 완전히 박혔다.
그제야 앞줄의 청년들이 범인을 덮쳤으나 범인은 꽂은 칼을 다시 뒤틀어 목사님의 가슴에 완전히 절단되었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은 지극히 평안한 가운데 조금도 요동이 없었고 오히려 부축하는 청년들에게 조용하라 하시며 순교의 상처를 확인하시고 강단에서 피를 다 쏟은 체 순교하셨다.
그는 높은 차원의 독특한 깨달음으로 정통 교리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으며 특히 人論, 救援論의 신학체계는 많은 조직신학자들과 신학생들에게 큰 주목을 받고있어 그 연구 결과에 대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李敏泳(목회연구소소장)
5. 백목사님 순교후 노선 확립기(1989.8.27.~현재)
백목사님의 생전 총공회 노선은 지도자와 스승의 위치를 가진 백목사님으로 인하여 주로 총공회 진리노선의 본류가 확립되고 지켜졌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생전부터 총공회 안에는 본류 노선외에 수정노선주의가 있었다.
⑴수정주의의 태동(1970년대)
원래 백목사님의 총공회노선은 정통의 교단, 특히 일반 장로교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개혁적인 교리, 신조, 행정이므로 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교역자들이나 교인들에게는 많은 선입적 갈등이 있기 마련이었다. 옳은 줄은 알지만 문제는 실행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영감과 설교와 신앙지도에 이러한 갈등이 일시적으로는 없어지는 듯하다 결국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노선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소의 “교훈은 좋으나 행정이 틀렸다.”는 주장이었다. 한종희, 백영익, 김병도, 김석준, 신도범목사님 등이 다른 외적 요인을 말하지만 깊은 속 중심은 결국은 교훈대로 행하면 되는 행정, 즉 실행에 어려움이 그 원인이었다.
많은 교역자들이 총공회의 노선이 옳은 줄 알고 들어 왔다 나가는 경우가 거의 이러한 경우였으나 초기에는 개인적, 개별적 사건이었다.
⑵수정주의의 탈퇴(1980년대 후반)
초기의 일개 사건적인 수정주의 즉, 교훈은 좋고 행정은 수정해야한다는 말이 1982년 백목사님 중환을 전후하여 하나의 기류로 형성되었다. 목사님의 “사후”가 눈앞에 닥쳤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했고 따라서 목사님의 “사후”를 대비한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었다.
즉 총공회의 노선이 30여년 확립되어온 중 백목사님과 총공회노선에 대한 수정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신 좁은 길과 넓은 길의 성경역사요 교회역사인 것이다.
결국 1987년 11월 교역자회의 때 “성경은 독재주의냐 민주주의냐”문제를 김철수목사님이 제기하고 이어 “은퇴제 도입”“교단헌법제정”등을 주장하며 결국 탈퇴했고 이를 전후하여 정의진, 송용조, 정풍섭목사님 등의 탈퇴로 7교회가 총공회 노선을 탈퇴하게 되었다.
정풍섭(87.6) 정의진(87.10) 김철수(87.11) 송용조(88.2)
송용석(88.4) 이창환(88.4) 방영남(89.1)
⑶수정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
(1988년 후반~1989년 8월 27일)
이러한 탈퇴 사건이 일어나자 도의적, 혹은 신앙 양심적으로 배반하고 탈퇴는 못하지만 원래의 총공회 정통노선 즉, 백목사님의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수정주의가 총공회 자체를 내부에서 수정하려는 운동이 생겨났다. 공회 탈퇴후 20년 만에 돌아온 백영익목사님이 백태영목사님과 합하여 수정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모든 공석회의 때마다 총공회의 진리노선을 지키자는 보수노선과 노선을 수정하자는 수정노선 사이에 논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①수정주의의 “교단 개선 5개안”발표
1989년 1월 3일 백영익목사님은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던 수정주의 교역자들의 극단적인 주장들을 5가지로 요약 백영희목사님에게 요구 하였는데
첫 째: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이름 변경문제
둘 째: 공회의 “찬송가” 사용문제
세 째: “교역자 시무투표”문제
네 째: “행정보고의 간소화”문제
다섯째: “성경난해절”즉 교리문제 등 5가지였다.
벌써 수많은 회의와 설교를 통하여 상기 5가지 뿐 아니라 유사 관련된 많은 공회의 신앙노선적 입장을 가르쳤던 백목사님은 앞날의 공회 진로를 하나님 앞에 맡기고 총공회의 신앙 노선적 입장을 8가지로 요약하여 발표하게 된다.
②백목사님의 “행정 8개안”정리, 발표
수정주의의 “교단 개선 5개안”에 대하여 백목사님은 총공회 발족의 유래부터 설명하며 총공회 노선에 대한 보완 설명적 8개안을 발표, 수정주의의 노선 수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최종적으로 밝혔다.
행정 8개안 (1989.1.3. 발표), 자세한 설명은 제2부 “총공회 행정체제”의 제2장 “총공회행정의 특성”을 참조
③총공회노선 “보수주의”와 “수정주의”의 갈등
88년 6월 이후 89년 7월까지의 교역자회와 총공회 석상에서 수정주의의 상반된 주장들은 대개 사소한 행정적인 문제 같았으나 실은 “총공회 진리노선”의 입장 자체를 달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측 교역자들은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되었다.
목사님 순교 이후 일어난 모든 일을 이러한 노선입장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이나 일반 교인들이 볼 때는 서로가 조금만 양보하면 해결될 사소한 감정 싸움으로 보고 있지만 근본적 신앙노선 자체가 다른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보수주의 노선: 이재순(인산),이재순(교학실),이진헌,이원일,최재현
김응도, 송종관, 송종섭, 이영인 등
*수정주의 노선: 백태영,백영익,백영침,김명재,배종일목사님...
⑷백목사님의 순교(1989년 8월 27일)
1989년 8월 27일 갑작스럽게 목사님이 순교하자 총공회 전체의 노선문제가 전면에 떠오르게 되고 그동안 눌려왔던 수정주의가 적극적으로 총공회 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 1989년 9월, 10월 교역자회의록 참고)
⑸제 20회 총공회 (1989년 10월 17일)
수정주의는 적어도 교역자의 수에 있어서는 2/3정도였고 수정측의 원하는 것은 “다수결원칙”만 채택한다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노선을 수정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아무리 찾아도 총공회 3대 원리에 걸려서 할 수 없게 되자 총공회의 발족 3대 원리 자체를 변개시키려 했으니 이것이 1989년 10월 17일 20회 총공회에서 예배 설교 중 비디오 재독은 금한다는 결정을 다수결로 강행 처리 했던 서건이었다.
목사님 순교 직후부터 총공회의 노선 수정울 계속 주장하다 결국 비디오 예배를 문제 삼은 것은 다음 이유이다.
첫째 : 백목사님의 교훈 기록에는 교훈뿐 아니라 노선문제의 세밀한 것까지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재독하게 되면 수정노선의 주장이 꺾이게 되기 때문이었고
둘째 : 노선수정을 위해서 외부적으로 가장 장애가 되는 서부 교회의 교훈 줄을 초기에 끊어버림으로 서부교회의 보수노선을 약화시키고
셋째 : 교리문제까지 다수결로 강행 처리함으로 진리전원일치라는 총공회 근본원리를 사실상 수정하고 다수결제도를 기정 사실화하자는 것이었다. 즉, 총공회 발족 3대 원리를 사실상 수정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고, 그것을 위하여 외부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 “녹화설교재독”이었다.
네째 : 한편 다수결 강행처리에 따른 사후 수습책으로서는 다수결 자체를 반대할 보수측을 회의 진행 방해등의 명목으로 공격하여 노선을 수정한 본질은 따로두고 인간도덕적 언행문제만을 시비하면 오히려 보수측을 공격학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가지 기록과 전후 상황을 종합하여 보수노선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는 백목사님 생전에 수정측도 “녹화설교재독”을 성경적으로 알고 수년간 “녹화설교재독”을 함께 보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리적으로는 “녹화설교재독”자체가 문제이지 화면에 나오는 사람의 생사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 제 20회 총공회 녹음속기록 참고)
⑹일반 장로교로 환원한 수정측의 12. 12조처
①발단
˙총공회 노선변경 시도 및 행정지도체제 변경시도
목사님 순교 1주일만에 모여진 9월 교역자회를 시발로 10월 교역자회등을 거치면서 백태영목사님의 수정측에서는
첫째 노선적으로는 총공회의 발족 3대 원리를 전면 개정할 것과
둘째 행정적으로는 총공회 지도체제를 공회적 개교회주의에서 일반 장로교의 총회장식 지도체제로 전면 개정할 것을 주장하면서 소위 “삼두마차제”의 대안을 제시 하였다.
1차 시도 : 9월 총공회 소집 실패
9월 21일 이러한 수정측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순교한 지 1달도 되지 않아서 수정측은 “제 20회 총공회 소짐”을 전국 교회에 공고하였다가 철회하는 사건이 있었다.
(부록편에 총공회 철회공문 참고)
2차 시도 : 10월 교역자회
총공회 노선 변경을 위한 9월 임시 총공회 소집이 실패하자 수정측에서는 수정측으 중간층 교역자등을 위주로 하여 노선 수정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하는 동시에 10월 교역자회를 통하여 그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즉, 총공회 발족의 3대 원리를 변경하자는 “노선 변경 안건”대신 총공회 3대 원리를 “백목사님도 말만했지 사실상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와 같이 총공회 노선의 3대 원리는 하나의 이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라는 등의 새로운 논리를 폈다.
결국 총공회 소집 통지서를 발송하는 과정에서 의제를 임의로 바꾸어 수정주의의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부록편의 제 20회 총공회 소집통지서 참고)
3차 시도 : 제 20회 총공회
“사인구명”을 위해 긴급히 소집한다는 원래의 의제는 몇 분도 안 걸렸고 수정측은 회의의 대부분을 삼두마차체제 구축을 위해 시도하였만 이것이 실패되자 총공회 3대 원리의 수정을 목적으로한 발언과 주장만 계속하였다.
심지어 서영호목사님의 동의에 재청까지 들어온 노원, 소원위원회와 총공회장의 성격 규명에 관한 동의안이 “종전과 같은 총공회장의 비상존기관”을 주장하고 이것이 토론을 통해서 대세가 되어질 분위기가 되자, 사회를 보던 백태영목사님은 총공회장직을 상존 전권으로 방향을 틀며 사회자가 회의의 발언을 독점하였다.
결국 서영호목사님의 동의안이 통과가 되었지만 수정측에서는 동의, 재청도 없었던 사회자 백태영목사님의 발언이 통과된 것처럼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는 수정측만으로 준비한 “비디오예배”정죄건을 교리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한번 없이 다수결로 강행 처리해 버리고 말았다.
다수결처리의 와중에 반대발언을 한 회원만해도 김응도, 서영호, 최재현, 이영인, 이재순, 강행수, 장영목, 김춘도(발언순) 등이 있었으나 회장은 확인절차도 없이 총반대자는 “4명”이라 급히 선언했던 것이다.
(부록편 비디오 정죄 녹음기록 참고)
4차 시도 : 11월,12월 교역자회
임시 총공회에서조차 3대 원리 수정과 삼두체제 구축의 시도가 실패되자 11월 교역자회를 통하여 재시도를 하였으나 서부교회의 장소변경 공고로 관철되지 아니했다. 12월에는 거창기도실로 회의 장소를 일방적으로 옮긴 다음 비공개회의로 처리하려 하였으나 역시 이를 알게 된 서부교인들의 방청허락 요구로 실패하였다.
˙89년 10월 2일 교역자회 : 백태영목사님 발족 제 2원리 수정발언
“앞으로는 규칙과 법이 있어야 될 것이고...” (녹음속기록 4권 62페이지)
˙89년 10월 3일 교역자회 10월 17일 총공회 12.12조처 : 백태영목사님,백영침목사님 발족 제 1원리 수정발언
“앞으로는 총공회를 다수결로 하겼다” (녹음속기록 4권 109페이지, 12.12발표문...)
˙89년 10월 3일 총공회 : 백영침목사님, 발족 제 3원리 수정발언
“총공회장은 상존기관이다” (녹음속기록 4권 78페이지)
이러한 주장들은 87년, 88년 탈퇴측의 수정노선과 동일한 것이었다.
② 소위 수정측 “12.12조처”
12월 교역자회가 무산된 1주후 서울 합정동교회에서 백태영목사님의 집회가 있었다. 이때 수정측의 장로님이 작성한 12.12조처 발표문을 백태영목사님과 지방공회장에 이르기까지 8장에 이르는 그 내용을 통과시켰는 바, 초점은 총공회 발족 3대 성경원리를 전면 부정하고 총공회(교리,신조)행정과는 상반되는 일반 장로교의 행정으로 노선을 환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은 상기 조처의 근거로 제시한 총공회 규칙은 총공회 산하 교회의 등기 제출용 서류로만 존재했던 것이며 등기 관련 교역자 외에는 전혀 공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부록편의 부동산 등기용 총공회규칙 참고)
어쨌든 수정노선에서는 그 “규칙”을 법적 근거라 하여 실질적인 총공회의 발족 3대 원리를 전면 부인하는 선언을 하고 이름까지 “12.12.조처”로 명명하였다.
③12.12.조처의 노선
첫째 : 총공회는 “총공회 규칙”이 있다.
(총공회 발족 제 2원리 “명문법 대신 성경만을 법으로 삼는다”를 부인)
둘째 : 다수결이 “총공회 의결 원칙”이다.
(총공회 발족 제 1원리 “다수결을 배격하고 진리 전원일치로 한다”를 부인)
셋째 : 총공회장은 일반회의 “장”이 가지는 임명권 등을 가지는 기관으로 소신있게 일한다.
(총공회 발족 제 3원리 “총공회장은 비상존으로 한다”를 부인)
( 총공회 간부회의 통보사항 12.12.조처 발표문 참고)
(7)총공회 분리 개최
이원일 목사님, 서영호 목사님 등이 주축되어 12.12. 수정측과 보수측의 단일 총공회 개최를 마지막 날까지 노력했으나 결국 12.12. 수정조처만은 취소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끝끝내 대구로 탈퇴하여 개최하게 되었다.
①제 21회 총공회 결의상황
˙제 20회 임시 총공회의 비디오 예배 정죄결의 및 불법 무효선언
˙백목사님의 교리, 신조, 행정노선의 유지 결의.
˙노선대조표의 비교 발표
˙참석 교회및 공회원 (별지참조)30개교회 54명의 공회원
②대구 수정측의 공회
˙12. 12. 조처 재확인
˙녹화설교재독정죄 재확인
참석교회및 공회원 66교회. 117명
(부록편의 21회 총공회시 결의한 양측의 노선대조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