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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희의 신앙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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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희의

신앙생애

‘격변기의 보수 신앙’




■ 소개하며




도서명

한종희를 통해 본, 「해방 후 한국교회 격변기의 보수 신앙」



출간 목적            

해방 후의 건전했던 한국교회 중심 신앙을 통해 속화 된 오늘의 신앙을 재고하게 촉구하며, 해방 후 한국교회의 보수측 제일 중심 인물인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의 관계를 살펴 본다.



도서 내용

1. 한종희를 통해 본 ‘해방 후 부산 경남 중심의 보수 신앙 사례’

2. 한종희를 통해 본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의 1960년대 초반사’

3. 한종희를 통해 본 ‘미국의 한인교회의 여러 모습’과 ‘자유주의’



2013. 7. 31.

신풍교회 목사 이영인

■ 한종희의 신앙 생애




1. 전공 분야

성경신학, 현대신학, 현대철학



2. 평생 현대 진보신학 비평에 주력

1956년 초등학교 교사를 사직하고, 단양과 제천에서 산중전도를 시작하면서 칼 바르트신학 연구도 하나님에게서 소명으로 받아, 1998년(67세)까지 계속하여 완성하였고, 1998년에 목회에서 은퇴한 후에 3년 걸려 칼 바르트신학 연구결과를 정리하였고, 2002년에 예장합동총회가「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이란 책명으로 출판하였다. 책에서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신성 및 내세를 불신한 신학자임을 드러냈고, 그 후 10년간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 비평에 주력하여 Billy Graham, C. S. Lewis, John Stott, James I. Packer 등이 다 그리스도의 신성 및 내세를 불신한 신학자들임을 드러냈다.







3. 신앙 성향

⑴ 평생 동안 말씀을 계명으로 삼아 한 말씀을 지키려 사력을 다했다.

⑵ 성경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성경 중심이다.

⑶ 박윤선을 통해 전수받은 칼빈주의와 계시의존사색으로 평생 외길 유지했다.



4. 공회 관계를 둔 한종희의 입장

⑴ 신앙 학습기에 이인재, 박윤선, 한명동, 김창인 백영희 목사님들의 영향은 컸다(1947-1960).

⑵ 성경을 따르는 원칙 때문에 박윤선의 전천년설과 백영희의 성화교리는 수용하지 않았다.

⑶ 공회 핵심에 있다가 새사람과 옛사람의 성화교리 문제로 공회에서 분리되었다(1961).  




2010. 11. 9.

저자에게 보낸 ‘한종희’ 목사님의 자기 소개




목   차




■ 소개하며                3

■ 한종희의 생애                4


1. 성정 과정               11

2. 제천 목회와 시련               85

3.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와의 관계               145

4. 대구 목회              175

5. 미국 목회              205


■ 부록 1(학술 활동)             239

■ 부록 2(각주 정리)             269




∎ 한종희를 통해 본,

  「해방 후 한국교회 격변기의 보수 신앙」



한종희의 신앙생애











교회사적 중요성과 자료의 객관성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저자의 일반 서술에까지 한종희 목사님의 회고 표현을 최대한 반영하며,    미세한 심리적 변화 등 당사자가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부분도 회고 당사자의 표현을 대필한다는 자세로 적었다. 다만 이 책의 출간  목적인 교회사적 자료 발굴이나 오늘 우리에게 공통으로 촉구하는  교훈적 내용이 아닌 경우, 즉 한 목사님의 교리나 성구해석이나 신학적 입장에 대한 학문적 주장은 한 목사님의 기본 입장과 활동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한 목사님의 구체적이며 자세한 입장에 대한   학술적 토론과 연구는 이 책이 출간 된 후 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별도 전개 되는 것이 이 책 출간 목적에 부합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제 1 장. 성장 과정






1. 가정 환경

2. 신앙생활의 시작

3. 학생신앙운동과 성령의 역사

4. 부산사범학교 학생신앙운동

5. 신앙의 성숙기

6. 평화로웠던 가정과 어머니 장례식

7. 중생이 낳은 새 피조물

8. 고신 교단의 내분 : 고소파와 반고소파

9. 진영읍교회에서 자원봉사

1. 가정 환경



어린 시절


한종희는 1931년, 전북 정읍 신태인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큰 형 준희, 작은 형 동희, 막내 종희 3형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종희가 만 2세 때 별세하셨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면서 아들 셋을 키우게 되니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세 아들들에게는 착한 심성을 심어 주셨다.


어머니 나이 일곱 살 때에 외할머님이 돌아가셨으나 외할아버지는 재혼하지 않고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고 한다. 한 번은 외가 집에 불이 나서 전소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협력하여 새로 집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어머님을 통해서 들었다. 세 이모님과 한 분의 외삼촌도 심성이 지극히 착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심성은 대를 이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친할머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보지는 못했다. 할아버지는 한문을 가르치시는 선생이셨고, 세 아들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큰 아들과 셋째 아들 집에 거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인 우리 어머님이 모셨다. 할아버지는 셋째로 태어난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종희 에미야, 네 아들대에서나 효도를 받으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상을 따로 차려드렸는데, 생선 중에서 가운데 토막은 항상 할아버지 상에만 놓았고 우리 상에는 꼬리 부분만을 놓아 주셨다.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일을 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술에 만취해 귀가하시다가 논둑에 빠졌다가 오시면 말없이 밤새워서 그 옷을 빨아 이튿날 입으시고 외출하게 해드렸다. 어머니는 민첩하고 지극히 착한 자부였다.



종희가 아직 어렸을 때 더 이상 그의 가족은 여느 가족처럼 모여 살 수 없었다. 큰 형 준희는 여수의 5촌 당숙이 운영하시는 잡화상에서 일했고 작은 형 동희는 시골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어린 종희만 데리고 김제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던 중 종희가 7살 때에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 할아버지 부고를 받고 어머니는 20리 길을 어린 아들과 걸어서 시신을 모신 큰 아버지 댁으로 갔다.


어머니는 그렇게도 슬프게 우셨는데 아마도 자신의 신세 한탄에 빠져 더 슬피 우셨던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과부되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어머니에게는 뼛속까지 시리도록 서러운 가난이었으나 어린 종희는 가난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 줄 몰랐다.

가족의 부산 정착 과정


친척 집에서 일하던 큰 형 준희는 얼마 후 정처 없이 여수를 떠나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부산항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무작정 길을 걷는데 어떤 사람이 간판을 달고 있기에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따라갔다. 자신의 처지를 소개하고 일꾼으로 써달라고 했다. 그 집에서 먹고 자고 일하게 됐는데 마침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신자였다.

준희는 그 집에서 지붕에 콜탈 칠을 하는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간판을 제작하는 일본인의 집으로 옮겼다. 간판 제작을 배우면서 숙식은 주인댁에서 함께 하며 지냈다. 밤이면 독학하였는데 밤늦도록 공부하면 안주인이 불을 꺼주며 자게 하였다.

청소를 하다 보면 돈이 떨어져 있었고, 한 번은 비오는 날 밤에 집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심부름을 갔으나 찾지 못하여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것이 주인이 시험을 친 것이었다고 한다. 주인은 딸만 다섯으로 맏딸이 도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주인은 이 맏딸과 준희를 결혼시켜 사위를 삼으려 한 것이었다.

그 집은 서부교회 건너편 근처에 있었고 전차가 다니는 대로변에 있었다. 2층 빌딩 상가였는데 건물 너비가 50m는 족히 되었다. 주인은 일본 미술전에서 입상까지 하였고 부산에서 자수성가 한 부자였다. 훗날 종희네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 곳이 바로 그 집에서 100m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큰 형 준희도 주인 집 맏딸과 정이 들게 되었으나, 그 집에 출입하는 다른 한국인이 그 집 재산을 보고 사돈을 맺으려 하였다. 준희는 그 사람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자 정신적인 병을 얻었고 더 이상 그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충남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 시골에서 계셨는데, 어머니와 막내 종희와 같이 있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 때에 어머니가 닭을 잡아서 옻나무 껍질을 넣고 고아 먹였는데, 어린 동생 종희가 그 김에 쬐인 탓에 옻이 올라 온 몸이 깍지 기둥처럼 부어 버렸다. 그래서 종희를 업고 다니면서 치료한다고 많은 고생을 했다. 누가 공동 묘지의 뼈로 몸을 비비면 낳는다고 하여 종희를 업고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뼈를 주워 몸을 비비기도 했다.



큰 형 준희는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일했다. 일본 군함 수리창에서 페인트칠 하는 사람으로 일하면서 1942년에 작은 형 동희와 종희와 어머니를 부산으로 불러내어 함께 살았다. 동희는 시골에서는 머슴살이를 하였으나 부산에서는 목공소에서 일하며 목공소에서 먹고 자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종희가 부산에 갔을 때에 만 11살이었고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준희가 셋 방 하나를 구하여 어머니와 종희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기압이 낮을 때면 화장 연기를 맡아야 하는 화장터 위 산비탈에 하꼬방이라는 쪽방을 얻어 겨우 세 식구가 몸만 의지하고 살았다.

보수동 1가 사거리에서 상점을 하는 젊은 한국인이 있었다. 아이 다섯을 낳았는데 맏이가 7살이라 종희를 아이 보는 사람으로 쓰고 방 한 칸을 내주어 시내 복판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며 방과 후에 틈틈이 아이들을 돌보았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3년간 아이 보던 일을 면하게 되었다.


준희는 당시 군함 수리창에서 월급으로 30원을 받았다. 당시의 도시에서는 양식을 배급하였는데, 배급도 일등 이등 등급이 있었다. 쌀 소두 한 되를 뒷거래로 사려면 5원이었는데 정상적으로 먹으면 온 가족의 10일 정도의 식량이었다. 지금 아프리카 난민들의 생활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는 큰 아들이 일을 나가고 나면 이웃집 여관에 가서 부엌일을 도왔고 종희는 따라가서 눈치껏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여관은 강제 보국대(報國隊)에 의해 일본 광산 노역자로 끌려가는 한국인들이 배 타기 전에 기다리며 며칠씩 묵었던 곳이었다. 일본에는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가고 광산에서 일할 사람이 없어 한국에서 강제로 끌어갔던 것이다.


두 동생은 큰 형 준희를 따라서 부산 항서교회에 출석하였다. 종희가 12살이었다. 당시 한국인 교회로는 부산 서부지역에 항서교회가 있었고 영도에 영도교회가 있었고 중부지역에 초량교회가 있었으며 북부지역에는 부산진교회가 있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한국인 교회의 전부였다. 부산에는 일본 절간이 시내에 가장 큰 건물로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일본인의 교회도 있었다.  



해방 후 학교 생활


1945년 해방이 되자 부산에 그 많던 일본인들은 다 본국으로 돌아가고 한국인만 살게 되자 이 가정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준희가 부평동 4가에서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얻어 간판업을 시작하였다. 상호는 개척사(開拓社)였고, 경상남도 도청 일을 독점하며 가정생활이 유족해졌다. 둘째 동희는 해방과 함께 즉시 경남상업중학교에 편입학하였고, 종희는 해방되었을 때에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나 한글을 이미 익혔기 때문에 5학년으로 월반했다. 이어 1947년에 부산사범부속 초등학교(화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큰 형 준희는 동희가 경남상고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동희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1951). 종희는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학과에 지원하였다. 시험은 치렀으나 ‘안식일 기억하여 지키라’는 2계명을 지키고자 주일에 행한 구두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였고 결국 입학하지 못하였다. 준희는 초중고를 독학하였는데, 동희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고 종희는 주일이라고 시험도 치르지 않은 것을 보자 자신은 즉시 경남대학 야간부에 입학하여 4년제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나는 사범학교에서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영어는 학원에서 안현필 선생님에게 직접 배웠고 서울대학교 유진 교수의 구문론으로 학습하였기 때문에 시험문제는 거의가 다 아는 것들이었다. 안용준 선생님이 사랑의 원자탄 원고 수집차 손의원 목사님이 계시던 서부교회에 자주 오셨는데, 나에게 미국 유학바람을 불어넣어 꿈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큰 형 준희는 어릴 때에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며 동네 교회를 다녔었고, 부산에서는 주경야독하며 항서교회에 다녔다. 두 동생을 성공시키는 것이 준희의 꿈이었으므로 아버지 이상의 책임을 다 하였다. 종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구두 집에 가서 구두를 맞춰 신게도 하였고 초등학교와 사범학교를 다니는 동안 생활이 유족하여 어려운 친구를 도와주기도 했다.

종희가 대학교 시험 치던 날에는 학교에 따라와서 시험이 다 마치기까지 종일 기다렸다가 같이 귀가했었다. 대학교 입학 시험 중 구두 시험이 있던 날에는 종희가 주일이라 시험장에 가지 아니할 것을 걱정하여 일꾼 편에 편지를 교회로 보내어, 예배드린 후에 꼭 시험장에 나가라고 당부했다. 끝내 나가지 아니하자 준희가 입학금을 준비하여 경희대학교에라도 입학시키고자 아는 교수의 안내를 받아 교무과에 갔었는데, 영문학과는 빈자리가 없고 역사학과만 있다고 하자 그냥 돌아왔다. 그렇게도 그리던 두 동생들에 대한 큰 형님이었던 준희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었다.



나는 구두시험이 있던 주일은 형님을 볼 낯이 없어 밤늦게 들어갔다. 평생을 아버지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길러 주셨던 형님을 뵐 낯이 없어 위로하려고 처음으로 편지를 써서 형님께 드렸다. 키워주셨음에 감사했고 앞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나에 대한 형님의 모든 기대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편지를 쓴 것인데, 형님은 뜻밖의 편지를 나에게 쓰셨다. 그 편지 내용은 평생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동생은 그만하면 되었네!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안심이 되네!”


형님은 고집스런 동생을 더 이상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신 것이다. 이제 동생이 다 컸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비로소 형님은 품에만 품고 있던 나를 스스로 살아가라고 자기 마음에서 독립시킨 것이다. 성실하게 자라준 막내에게 큰 소망을 품었던 형님이었으니 그 때 형님의 마음이 그 얼마나 허전하셨을까!


나는 그 때까지 형님에게서 꾸중 한 번 들은 일이 없었다. 형님은 항상 전적으로 나를 믿어 주셨다. 형님이 일이 바쁘시면 나는 학교에 결석하고 일을 도와드렸다. 형님과 같이 일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며 형님 혼자 일하시게 하는 것이 늘 마음에 부답이 되었으니 자연히 나는 학교 생활에도 성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같이 나를 키우셨기에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셨다. 고집을 부려 끝내 서울대학교에 대한 꿈을 날려 보냈지만 성실성에 대한 믿음이 형님 마음에 안심이 되셨던 것 같다.


나는 그 후로도 큰 형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막상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섬기다 보니 평생을 가난에 시달렸고, 형님은 그런 나를 보시다 딱하면 이 못난 동생을 항상 도와주셨으니 결국 나는 형님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동생이었고, 형님은 나에게 아버지 이상이었다.

종희가 훗날 결혼하여 제천에서 산중 전도할 때에 부산 큰 형인 준희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밥상에서 투정하는 큰 조카 필로를 그가 일어나서 매를 때렸다. 그래도 준희 부부는 그가 하는 일이면 보고만 있었지 전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동생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믿으셨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큰 조카 필로는 방학이 되면 제천 그의 집에 와서 지내다 가곤했다. 삼촌을 친 아버지같이 따랐다. 어린 조카가 느끼기에는 한없이 좋은 삼촌이었다. 결국 사랑으로 그의 가정과 형제들 사이의 모든 허물을 덮고 화목케 한 것이었다.  



한종희를 사랑했던 사람들


작은 형이었던 한동희도 동생 종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또한 끝없이 믿어 주었다. 신학교에 다닐 때에 친구들을 만나면 동생 종희 자랑에 신났었다고 했다. 그러면 동희에게 종희는 어떤 동생이었을까?

한동희는 서울 동도교회에서 부목으로 시무하시다가 1988년 1월에 뇌경색으로 소천하시고 동도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도 춥던 겨울에 산등성에서 동도교회의 담임이었던 최훈 목사님은 30분 가량을 설교하시며 한동희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홀로 남은 사모님은 현재 동도교회를 섬기며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그 사모님께 물어보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형수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형수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나 한종희는 작은 형님에게 어떤 동생이었습니까?”

일초도 기다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었지!”


나는 이 말이 너무 두려워 처음에는 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조심하여 말하려고 한다. 어떻게 감히 죄인에게 하나님이란 말을 써서 될 말인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다만 동생에 대한 형님의 마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당시에 우리 두 형제는 같이 신학교에 다녔다. 같이 지냈던 신학교 동창들 중에 형님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은 이 말뜻을 알 것이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와 학생회 일도 열심히 하며 교회의 모든 회집에 빠지지 아니했다. 수요일 밤 예배에 단 한 번 빠진 적이 있었다. 큰 형 준희를 도와 경남도청 정문에 아취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500m 거리에서 수요일 밤 예배를 알리는 서부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간판을 달다가 차마 형님 혼자 놓고 갈 수가 없어서 끝내 가지 못했다. 하지만 가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심히 고통스럽고 아팠다. 수요일 밤 예배 한 번 빠진 것이 당시의 그에게는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목사님들의 사랑을 입었다. 백영희 조사님의 그에 대한 사랑은 특별했다. 겨우 고등학생인 종희를 주일 대예배 시간에 회중의 예배 찬양을 지휘하도록 하셨다. 또한 사소한 심부름도 부탁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박윤선 교수님 댁에 가오리라는 생선을 전하라고 하셔서 다녀왔었다. 그를 깊이 신뢰하고 계셨기에 한부선(Hunt, Bruce F) 선교사 댁에 가서 미국 NAE 초대회장을 지낸 바 있는 헤럴드 옥켄가(Harold J. Ockenga)의 신학사상을 알아오라고도 하셨다.


사범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학생이었다. 담임이었던 김경택 선생은 비록 불신자였지만 그를 목사라고 부르며 서양교육사 시간에 교실마다 데리고 다니며 중세사 중 기독교의 부분을 당시 학생이었던 종희에게 강의하게 하며 자신은 들었다.


또한 그가 가까이 따랐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사랑을 베푸신 많은 분들이 계셨다. 김창인, 한명동, 박윤선, 이상근, 이학인, 홍근섭, 안용준 목사님들이다.

2. 신앙생활의 시작



일제시대에는 3형제가 항서교회에 함께 출석하였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물러간 후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예배당에 한국인의 광복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집에서 150m 거리에 있었기에 종희는 광복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작은 형 동희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항서교회에 계속 다니며 학생회를 이끌었다. 동희는 신사참배 반대로 5년간 옥고를 치른 이인재 전도사님를 모셔다 토요일에 항서교회 학생회 헌신예배에 세웠다. 동일한 총회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일제하에서 교회와 담임목사가 신사참배를 하였던 항서교회로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8.15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이 한국을 통치하다가 1948년에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과 미군정은 물러갔으며, 한국정부가 세워지던 1948년에 친일파를 구금하였는데 항서교회 담임목사인 김길창 목사님도 친일파로 구금되었다. 그러한 때에 이인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한 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그런 계기로 항서교회의 김영준 장로님과 이명달 여 전도사님과 조종석 선생님과 학생회장 한동희가 항서교회를 떠나 서부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현재 서부교회 자리에 2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건물 1층에는 김영준이 살았고, 또 김 장로님의 아들이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건물의 2층을 전세로 얻어 예배 드렸는데, 그것이 서부교회의 첫 출발이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복교회는 일본인들이 세운 교회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한국인 교회가 되었고, 일본에서 온 이수필 목사님이 담임 목사가 되었다. 한종희는 1947년 만 16세에 사범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으나 당시에는 학교에 다니지 아니하는 소년소녀가 더 많았는데, 소년 소녀와 학생들은 성인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부산에는 미국 군인이 주둔하였고 한부선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군인들이 월요일 밤마다 YMCA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중앙교회로 옮겨 예배를 드렸는데 소년 소녀들과 학생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미군 예배에 많이 동참했었다.

1948년에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 군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였지만 한부선은 예배장소를 고려신학교 강단으로 옮겼고, 박윤선 교장을 주 강사로 하여 학생연합예배의 성격을 띠고 집회를 계속하였다. 고려신학교 기숙사가 고려신학교 강당 아랫층에 있었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학생연합집회에 함께 참여하였고 부산시내 각 교회에서 청년들도 다수가 참석하였다. 또한 매월 격주로 주일 오후 2시에 마찬가지로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박윤선을 강사로 소년소녀와 학생들의 연합 집회를 계속하였다. 한종희는 손영준과 함께 광복교회 학생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이것은 박윤선의 강단으로 이름 없는 큰 교회였다.



손영준은 대를 이어오는 신앙 가정에서 자랐다. 광복교회에서 한종희보다 먼저 학생회 회장이 되었고, 10인 신앙협조회의 강력한 멤버로서 SFC 부산지구연합 창립에 기여하였고, 전국 학생신앙운동 창립에도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잠시 동안 이원홍 형이 발행인이었던 고신파 기관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손영준의 외할아버지 한정교는 보수공원 안에 있었던 애린원의 원장이었다. 애린원은 6.26 때 급조한 고아원이 아니었다. 일제 때에 사재를 들여 자선사업으로 운영해 왔으며 고아원 건물이 3층 빌딩으로 컸고 광복교회에서 500m 정도의 거리를 둔 산 속에 있었다. 작은 외조부 한영교 목사님(박사)은 1945년에 미국에서 입국하여 미군정청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광복교회에 출석하였고, 후에 연세대 총장을 지내셨다.

손영준의 부모님이 6·25전쟁으로 길이 막혀 서울에서 남하하지 못했는데, 손영준은 애린원에서 생활하면서 기독학생 신앙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1950년 6·25전쟁 중에 군에 입대하여 인민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부산까지 왔다. 바로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지 않고 한종희의 집에서 15일 정도 요양하며 회복했다.

후에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칼빈신학교(Calvin seminary)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신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정통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72년에는 정통장로교 선교사로 서울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사역하다 은퇴하였다. 현재(2012)는 미국 동부에서 미국인 시골교회에서 강단을 지키고 있다.



1948년 광복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은 다 장년들뿐이었으나 중학생 둘이 있었는데, 중2의 한종희와 중4의 여학생으로 박준호 장로님의 둘째 딸이었다. 한종희는 가족 없이 홀로 광복교회에 출석하였지만 주일학교 교사 중에는 최연소자였다. 담임 목사인 이수필이 그의 신앙생활을 보시고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였으며 새벽기도 후에는 그 자리에서 성경 10장을 채워 읽었다. 당시에 광복교회에 출석하던 40세 가량의 고려신학교 신학생이 전도대를 구성하여 교회 정문 앞에서 북치며 노방 전도를 하였는데, 한종희도 그 전도대에 합류하여 함께 전도하였다. 광복교회는 3층이나 되는 큰 교회였는데 예배실은 2층에 있었고 1층은 교육관이었다. 사찰이 교회를 떠나고 없을 때에 그는 교회 청소를 혼자 하기도 했으며, 학교에서 일찍이 귀가한 날에는 교회에서 풍금 연습을 했으며, 훗날에는 반주자와 성가대 지휘자로도 봉사하게 되었다.


1951년 경남 노회가 총회파(현재 합동 교단)와 고려파(현재 고신 교단)로 나누어지는 시기로 교계 전체가 어수선한 때였는데, 광복교회는 총회파에 속한 교회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총회파니 고려파니 하는 교회 어른들의 갈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광복교회에서 한종희는 손영준 다음으로 학생회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연말 학생회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수필 목사님과 학생을 지도하는 최종성 집사님이 연말 학생회장 선거에 참석하여 한종희의 회장 재당선을 막았다. 고려파로 지목받은 한종희를 총회파였던 광복교회가 용납할 수 없어서 두 어른이 직접 나서서 학생회장의 재당선을 막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송별회를 가진 후 조용히 떠나 서부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광복교회에서 생겼던 일


1950년 6·25 전쟁 전에 이미 썬다싱 전기와 루터 전기를 읽었고, 1948년부터 유년주교 교사였기 때문에 성경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가 있었고, 많은 순교자들의 기록을 읽었다. 특히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요셉과 다니엘은 나에게 신앙생활의 모델이 되었다.


교회에 가면 한 여학생이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일부러 내 앞을 지나갔다. 여러 번 그랬다. 그 여학생은 부산사범 부속초등학교 1년 후배로 병원 집 딸이었는데 그 여학생은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광복교회를 떠날 때까지 그 여학생은 끝내 그와 한 번도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심지어 나는 그 여학생의 이름도 모른 채 광복교회를 떠났다. 그 여학생이 못생겼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작정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교회 찬양대 준비실에서 주일이 아닌 평일 오후에 혼자 풍금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문인자라는 여학생이 평소보다 옷을 곱게 차려입고 혼자서 찬양대 연습실에 들어 왔다. 당시 예배당 건물 안에는 평일이라 그들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찰은 예배당 옆 다른 건물에서 살았다. 그 방은 문을 닫으면 작은 밀실이 되었다. 물론 그 여학생의 손에는 오르간 교습을 위한 책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여학생은 부속초등학교 동급생으로 부산여고에 다니며 광복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광복동에 있는 큰 상가 집의 딸이었고 빼어난 미인이었다. 나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가슴이 뛰고 당황했다. 그래서 즉시 일어나 말없이 그 방을 나와 오르간 교습 책인 바이에르를 쭉쭉 찢어 교회 밖에 있던 큰 쓰레기통에 넣고 집으로 왔다. 한 달간인가 지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자 다시 교습용 바이에르를 구하여 연습을 계속 했다.


2003년경에 사범학교 후배인 박하가 라는 자매가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하고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남침례교의 미국 신학대학원에 와서 대학원 교육학 석사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와 이야기 도중에 1950년대에 광복교회 성가대실에서 있었던 그 미인 여학생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한종희가 문 아무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서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나는 광복교회를 떠난 후로도 그 여학생을 전혀 만난 적이 없었다.

당시 문양과 나의 초등학교 동급생이던 박정태 권사가 미국 플로리다에 살고 있어서 연락을 주고받는데 옛적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여학생은 참 미인이었지요!”라고 하였다. 박정태와 아내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이지만 우편을 통하여 몇 번 선물이 오고 갔으며 전화도 주고받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나에게는 사범학교와 광복교회와 학생연합회 등 모든 기념사진이 한 장도 없다. 여자들을 보면 예쁜 사람이 생각나게 되어 학생신앙운동과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기에 다 태워버렸다(1950). 그 후로는 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부산 광복교회에서 같이 지낸 조동훈 후배가 이웃에 살고 있기에 광복교회 학생회 사진을 복사해서 받아 보았다. 비로소 문양을 다시 볼 수가 있었고 아내에게도 보여주었다.


사범학교는 학년마다 3학급이었고 학급마다 남녀가 반반이었다. 물론 해마다 동급생 세 반을 다 섞어서 새로 반을 구성하기 때문에 6년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가 친구처럼 지냈다. 게다가 우리 기독학생들은 매주 토요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기에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 나는 1학년에 입학했을 때에 상급생을 도와 기독학생회(SFC)를 창립하였고 처음부터 내가 실무를 도맡아 했다. 하지만 6년 동안 여학생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이성의 감정으로 대했거나 접근한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었다.


1955년, 내가 만 24세였던 되던 해였다. 혼기가 차서 결혼하려고 처음으로 구혼한 여자가 부산 부민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 권 교사를 찾아가 구혼했을 때에는 이미 교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부속초등학교 동창생으로 사범학교에서 6년 동안 나와 함께 기독학생회를 섬겼으며 서부교회에서 같이 주일학교를 섬겼다. 학년 말 졸업생 송별 예배 시에는 우리 집에서 음식을 해갔기 때문에 그 여학생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구혼하기 전에는 사담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두 형수님이 서부교회 교인으로 권 교사와도 가까이 지냈지만 구혼 이전에는 오며 가며 지나치면서도 나와 그녀 사이에는 이성적인 대화가 전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고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여러 성자들의 전기와 성경의 거룩한 인물들을 사모하며 순교자들의 기록을 읽은 것이 신앙의 양식이 되어 그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이성 면은 초월할 수가 있었다.


1949년에 박윤선 스승님이 첫 주석으로 요한계시록을 출판했을 때에 그 주석의 장마다 몇 편씩 있는 모든 설교를 얇은 습자지에 베껴서 가슴에 품고 다녔다. 동희 형이 자다가 밤에 잡혀가서 입대하였고 길에서 잡혀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잡혀갔을 때에라도 믿음을 지키려고 그리 했었다.

3. 학생 신앙운동과 성령의 역사



일본인들 치하에서는 글과 말과 이름과 신앙까지 다 빼앗겼으나 해방이 되면서 이 모든 것을 되찾았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중학교마다 기독학생회가 세워졌다. 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가 1950년 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각각 3년씩으로 나뉘었다. SFC는 부산에서 1947년에 처음으로 한명동 목사님의 지도하에 태동하였고, 각 중학교 회장들이 모여서 SFC 부산지구 연합회를 구성할 때에 한동희가 초대위원장이 되었다. 다음에는 SFC 전국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52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생이던 선배 조용석이 전국 SFC 위원장이 되면서 눈에 띠게 활발히 운영되었다.


조용석은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 뇌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 후에 계속 재발하여 6회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2010년 시카고에서 별세하였으며, 독자 아들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시에서 장례식을 하게 되었고 내가 추모사를 하였다. 미망인 박성금 선배는 신경질환으로 하체가 자유롭지 못하며, 아들과 이웃하여 오클랜드 시에 거주하는데, 나도 오클랜드시 이웃에 살고 있어 매달 주기적으로 만나며 회식하고 있다.


다음은 1947년 SFC 부산지구 연합회의 주역들이다. 김우진 도군삼 박성환 박영훈 손영준 신도관 이원홍 정보근 한동희 황창호. 이들을 10인 신앙협조회라 칭하였다. 김우진 도군삼 박성환 한동희는 소천하였고, 박영훈 손영준 신도관 이원홍 황창호는 현재 생존해 있으며, 정보근과는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이들의 모임을 ‘신앙협조회’라 칭하였으며, 한명동 목사님이 지도하였다. 그때에 한명동이 SFC 강령을 작성하여 전국 SFC 강령으로도 삼았다.

초기 얼마동안은 매월 1회씩 회원들 집을 돌면서 밤에 회집하였다. 한동희가 회원이었기에 그의 집에서도 모였다. 한동희는 서부교회(김창인 전도사)에서 1952년에 결혼식을 가졌지만 한명동이 주례하셨다. 어머니 병환이 중하여 어머니 생존 시에 결혼하고자 결혼 날짜까지 앞당겼지만 결국 결혼 날짜보다 6일정도 앞서 어머님이 돌아가셨기에 끝내 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고 가셨다.


해방과 함께 전국에 신앙의 첫 불을 붙인 부흥사는 감리교 박재봉 목사님이었다. 박재봉이 부산 광복교회와 항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모두 참석하며 큰 은혜를 받게 된 한동희와 손영준은 한 주간 학교를 결석하고 박재봉의 서울 집회까지 참석했었다. 그 때가 1947년이었다. 바로 그 얼마 후에 해운대제일교회에서 박재봉을 강사로 부흥회 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동희와 손영준은 다시 학교를 한 주간 결석하고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강사가 바뀌었는데, 그들이 처음 보는 박윤선 목사님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부흥회를 계기로 둘은 박윤선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로 둘은 SFC와 성령운동의 핵심이 되었고 또한 박윤선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박윤선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학생들 모두에게 말씀을 먹여주신 믿음의 아버지였다. 해방 후 1953년까지가 SFC 1세대의 전성기였고 고신 학생신앙운동의 절정기였으나 1953년 여름을 기점으로 1세대는 물러났다.


SFC가 부산 시내 가가호호에 전도지를 전한 것이 그때였고, 6·25가 일어나기 바로 전인 1949년에는 역시 전 부산 중학교 SFC들이 연합하여 가가호호에 요한복음을 전했다. 한부선 선교사가 미국에서 요한복음을 쪽복음으로 인쇄해 왔는데, 각 중학교가 단위가 되어 학교가 속한 마을을 배정받아 집집마다 그 요한복음을 전했다. 당시 부산 서부 지역 일대는 경남중학, 경남상업, 부산여중, 부산사범 학교 등이 있었는데, 사범학교에 다니던 한종희는 그 지역을 맡아서 가가호호 요한복음을 전하였다.

그 후에는 SFC 연합회와 청년연합회가 연합하여 지역마다 초등학교 강단을 빌려 지역 목사들을 강사로 모시고 같은 날짜에 일제히 전도 집회를 열었다. 서부지역에서는 남일초등학교, 토성초등학교, 사범부속초등학교의 강단을 빌렸었고, 영도에서는 영선초등학교의 강단을 빌려 집회를 하였고, 초량초등학교와 부산진초등학교에서도 별도로 집회를 하였다. 후에는 미국 공보원 홀을 빌려 전 부산연합집회를 하였는데, 강사가 손양원 목사님이었고, 연합성가대 지휘는 마두원(D. R. Malsbary) 선교사가 담당했었다. 그 때에 한종희는 합창대 단원이었다. 당시 손양원은 사랑을 설명하시며 예화를 말씀하셨는데, 천국에서는 숟가락이 길어서 자기 입에는 넣을 수 없고 서로가 다른 사람의 입에만 넣을 수 있다고 하셨다.



박윤선은 학자로 끝나지 않고 양을 치는 선한 목자였다. 강단은 항상 뜨거웠고 신학교에서는 경건회 설교 도중 계속되는 회개와 기도를 막을 수가 없어서 고려신학교가 학업을 중단하고 두 주간이나 집회가 계속되어진 적이 있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당시 성령의 역사와 박윤선의 역할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나는 그 때에 이 이야기를 다 들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자 당시에 고신 학생이었던 오병세 목사님에게 부산으로 전화하여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회개운동이 신학교로 그치지 않고 신학생들과 청년회와 SFC를 통하여 전국에 확산되어 갔다. 불길 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이 SFC 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 또 있었으니 전영창 선생님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나 어찌 홀로 미국에 평안히 있으랴’ 하여 즉시 귀국하여 학생들의 각성 운동에 앞장섰다. 부산지구 소년연합회 이름으로 학생들이 부산 동아극장을 빌려 전영창을 강사로 하여 강연회도 가졌다. 이때에 김천애(金天愛) 선생님이 독창을 했었다. 안용준은 전영창의 친구로서 6·25 전쟁 전에 먼저 미국 유학길에서 귀국하여 그 온화하신 성품대로 사랑의 원자탄을 집필 출판하여(1950년 9월 28일) 한국교회에 불을 지폈다.


나는 후에 미국 이민 생활 중에서도 안용준 목사님 곁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고 많은 사랑을 입었다. 안 목사님은 내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목회할 때에 서울대학을 졸업한 생질 전영덕 집사를 내게 보내 주셔서 함께 교회를 섬기게 해 주셨는데, 전영덕 집사는 후에 장로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낙동강은 전선이 되었고 전국에서 피난민이 부산으로 집결하여 광복동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광복동 길은 사람들이 마치 물결처럼 흘렀다. 바로 그 때에 청년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고신학생들과 청년들과 SFC 학생들이 회개 운동을 벌였다. 고려신학교 강단에 모여 기도회를 가진 후에 연합하여 회개하라고 쓰인 큰 현수막을 들고 광복동 거리를 누비며 회개하라고 외치고 전도하였다. 그 무리 속에 한종희도 함께 있었다. 마치 니느웨성처럼 회개운동 기운이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그 때 그 물결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이 회개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중에는 박윤선 목사님 말고도 이인재 목사님과 백영희 조사님이 있었다. 이 두 분도 부흥강사였기 때문에 전국에 다니면서 회개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을 반고소란 죄목으로 부산노회(백영희)와 고려신학교(박윤선)와 대구 성남교회(이인재)에서 1957년 이후 추방하면서 고신파는 회개의 열기가 식어갔다. 고소파는 송상석 목사님과 한상동 목사님을 중심으로 노회와 총회를 규합하고 하나로 뭉쳤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제일의 교수로, 이인재는 신사참배를 이긴 대표적인 출옥성도로, 백영희는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던 부흥사로 상당한 인지도와 신임이 있었지만 세력을 규합하지 않고 외롭게 반고소만을 외치다가 축출 되었다. 고신을 졸업했던 김창인, 홍근섭, 최훈 같은 목사님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경기노회가 반고소 운동을 동정하여 나섰지만 힘을 쓰지 못하였다. 개인적으로 동정자들이 있었겠지만 드러나게 나선 이는 없었다.



둘로 나뉘는 분쟁에서는 옳은 쪽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권을 가진 다수파가 승리하는 것이 교회 역사가 남겨준 교훈이다. 또한 분쟁과 분리에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상대편의 허물을 드러내어 매장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수호나 회개운동이나 사랑의 실천과는 멀어지고 속화와 타락이 자신들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가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양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단 한 말씀이니까 괜찮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건에서는 그 단 한 말씀에 하나님 말씀 전체가 하나가 되어 오기 때문에 그 말씀 하나가 성경 전체의 말씀이었고 하나님 전부가 다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배당 고소 사건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가 문제였다.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해지면 윤리타락이 오고,

윤리타락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주장한 교훈이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았고, 윤리 타락과 믿음 타락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에(약2장) 우리도 윤리 타락을 믿음의 타락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야고보 사도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권위, 말씀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 적을 끌어들여서라도 회개하게 하셨고, 죽이거나 망하게도 하셔서 타락이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차단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순종과 윤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로 믿고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에 복종해야 한다. 개인과 노회와 총회가 자기의 이익추구를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훈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을 명하셨는가? 형제끼리는 상대를 더 귀히 여겨(빌2:3-4) 먼저 양보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서 형제끼리 양보하여 교회와 노회와 총회를 섬길 때에 사랑이 회복되어지고, 형제가 화목하여 하나가 되어지고, 성령의 역사와 회개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가 지켜야할 대헌장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표를 자신에게서 하나님으로 바꾸어야 한다. 각자가 자신을 부인하여 자신의 이익 추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고, 하나님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에 복종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기를 죽기까지 하라고 하셨다.

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동반한다. 군에 입대한 청년이 지휘관에게 반드시 복종하는 것을 보라. 취직한 노무자가 감독관에게 반드시 복종하는 것을 보라. 군인과 노무자는 누가 시켜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하듯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믿음도 같은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간곡하신 요청이고,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성령이 가르치는 성서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흔들림이 없는 이 교훈을 우리 신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을 하나님이나 진리보다 우선하는 목회는 접어야 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회개하는 목회로 바꾸어야 하며, 그래야만 하나님이 다스리는 참 교회가 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교회가 되어진다. 반대로 인간이 다스리고 인간의 뜻을 이루어가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만일 교회 성장을 목회의 우선으로 하면, 순종과 복종과 순결과 거룩이 희생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어지며, 교회가 하나님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도 교회 성장을 우선으로 하여 순종과 거룩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어져 교회가 타락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개인과 공동체를 징계하신다(고전11:30-32).


오늘날 많은 경우 교회의 양적 성장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복종하여 일어난 부흥이 아니고, 인간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일으킨 양적 부흥이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성장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에 대한 순종이 없고 회개함이 없어도 권징하지 아니하여 얻어진 양적 부흥이다. 순종이나 회개함이 없고 책망과 권징이 없이 얻어진 교회성장은 하나님을 위한 목양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사업이다. 인간을 위한 사업은 윤리 타락과 신앙 타락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불러 올 따름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안식일을 율법으로 규정하셨고(출20:8-11), 우리가 반드시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셨다(사56:4, 6;58:13).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표징을 삼아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하셨다고 하였다(겔20:12, 20). 과연 안식일 계명은 표징으로서는 가장 적절한 계명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징계하셨지만(렘17:19-27) 금일의 교회는 교인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도 장로가 되고 장립집사가 되고 권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이미 폐기된 것과 같다. 경찰이 보는 앞에서 빨간 불에 지나가도 잡지 않고 벌칙이 없다면 그 교통법은 이미 죽은 것이다.


예배당 소송을 합법으로 주장하면 다른 율법을 거역해도 침묵으로 일관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큰 못의 작은 모래구멍을 막지 않으면 큰 방천 둑이 무너짐과 같다.

송상석 목사님과 한상동 목사님이 교회끼리 행한 소송의 합법성을 주장하거나 침묵한 것은 고신파에 불법을 끌어들인 발단이었다. 한상동 자신은 예배당을 내주었지만 예배당 소송을 지지하였고 반고소파를 교회와 신학교와 노회와 총회에서 축출함에 앞장섰다. 반고소파 주장자들(박윤선, 이인재, 백영희)과 반고소파로 고신총회에 대하여 행정 보류를 선언했던 경기노회는 고신총회 안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좁은 길이었고 추방되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동하고 처신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있기 때문에(롬12:1), 참된 성도는 마땅히 날마다 매사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복종하여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럴 때에 믿음이 산 믿음이 되어지고 구원에 이른다. 그러므로 거꾸로 말해서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과 복종과 동행이 없는 신자는 영혼 없는 몸과 같고(약2:26),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으나 순종치는 아니하는 마귀의 믿음과 같고(약2:19)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약2:17,26)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되어진다.

구약을 보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는 개인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징계하여 회개하게 하셨고 회개치 않으면 패망시키셨다. 순종하고 동행하여 순결과 거룩함이 있는 개인은 하나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시지만 순결과 거룩함이 없는 개인과 공동체는 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타락자로 돌렸다. 참 믿음과 순종은 동일한 사건이다.

예로 “불이야!” 소리를 들었을 때 반응은 둘이다. 사실로 믿는 자는 도망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자리를 지킨다.





4. 부산사범학교 학생신앙운동(SFC)



한종희는 1947년 만 16세에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는 중학교 1학년 과정이었다. 하루는 학교 일과가 끝나고 교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상급생이 청소 검사 차 교실에 들렸다가 ‘너는 예수 믿느냐?’고 묻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선배와 이야기 하다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게 되고 매주 토요일 오후만 되면 학교 교실에서 예배 드렸다. 시내 교회의 목사님들을 모셔다가 말씀을 들었다. 교실마다 돌면서 칠판에 “오늘 어느 교실에서 예배가 있습니다”를 써서 알리는 것도 처음부터 그의 몫이었고, 강사 교섭도 처음부터 그가 맡아서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계속하였다. 예배 후에는 또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부교회에서 토요일마다 예배드렸다.  

강사 중에는 황성수 국회부의장도 있었고,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로 가시기 전에 1년간 매주간 계속 모셨다. 진화론에 빠졌다가 정통신학에 정착하여 기독교 변증학에 권위자가 되고 한국 총회가 발간한 표준주석 창세기를 쓰셨던 함일톤(I. F. E. Hamilton) 교수도 강사 중에 있었다.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총격 받아 살해되었을 때에 부산에서는 시립종합운동장에서 전 부산시민이 모이는 추도회를 가졌었다. 그런데 그 날이 주일이었으며 부산사범학교에서는 전교생을 참석하도록 독려하는 행사가 토요일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주일 추도행사에 불참하는 학생은 퇴학 처분한다고 강경하게 말하며, 나오지 못할 학생들을 한 사람씩 미리 불러서 여러 교사들(담임, 훈육주임, 교감)이 일대 일로 면담하였다. 일일이 이유를 묻고 불참하면 퇴학 처분 당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출석 다짐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기독학생회원 중에서 주일을 지켜야 하기에 불참한다고 말한 학생이 무려 22명이나 되었다. 당시 사범학교 부녀회 회장이셨던 백 집사님은 광복교회 박준호 장로님의 부인이셨는데, 그 학생들의 일로 교장 선생님을 만나 많은 애를 쓰시고 덕분에 퇴학처분 당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1949년, 사범학교 졸업식 예행 연습하는 장소에서 당시 기독학생 회장이던 황창호 학생이 국기 배례를 거부한 일로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그는 1951년 제3회 졸업 예정자였는데 졸업식 예행연습장에서 국기배례 호령이 떨어졌을 때에 몸을 굽히지 않고 서 있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키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크기 때문에 유별나게 눈에 띄였던 것이다. 국기배례는 우상숭배라 하여 하지 않았는데 퇴학 처분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님이 교육계에 계셨고, 후에 경남중학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서울법대를 졸업하였다.



학교 선배였던 이영일(이학인 목사 장남)도 공군사관학교 생도로 국기 배례를 거부했다. 당시는 전시라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이승만 박사의 배려로 퇴학으로 끝났었다. 6·25 전쟁 중이라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도지사 관사에서 집무하였고 도지사 관사 바로 근처에 있던 부민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마침 이학인 목사가 담임한 교회였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언젠가 정부에서는 ‘국기에 대하여 배례’라는 구호를 ‘국기에 대하여 주목’으로 바꾸었으며 고개를 숙이는 대신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얹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제하에서부터 행해오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여 행사장에서 구호를 국기배례로 계속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고개는 숙이지 않고 오른 손을 가슴에 얹게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학교 건물은 미군이 병원으로 사용하였고, 학교는 장소를 옮겨 아미동 산비탈에 절간 마당을 빌려 천막치고 공부하였다. 한 번은 전교생이 부산 동아극장에 가서 ‘고아의 어머니’라는 영화를 관람하였는데 주연 배우는 최은희였다. 고아의 어머니를 통해서 전쟁고아들을 부각시킨 영화였으나 내 가슴에 채워진 것은 최은희의 아름다운 미모였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 미모의 모습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혼기가 차서 결혼할 나이가 되기까지는 결코 영화를 다시는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이다.

그렇게 결심한 후 내가 영화를 다시 본 것은 아이 셋을 낳은 이후였다. 1962년 서울 동산교회에서 박윤선 목사님이 개혁신학교를 운영할 때 그 교회 고응진 장로님 댁에서 며칠간 쉬게 되었을 때였다. 장로님 내외분이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십계라는 영화를 보시고 입장표를 사 주시면서 이 영화는 꼭 보아야 한다고 하여 보게 되었다.


1951년 여름 사범학교 본과 2학년 때에 기독학생회가 한부선 선교사를 모시고 바닷가로 수양회를 갔다. 상급생들이 주장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남녀가 바다에서 옷 벗고 무슨 수영이냐 하는 생각에서 나는 가지 않았다.

기독학생연합회 일로 이웃하고 있던 부산여고 허영숙 기독학생회 회장과 사범학교 여학생들이 내 집에 출입하는 일이 있었지만 결혼할 때까지 어떤 여학생과도 사담이나 정담을 나눈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킨 것이다.

한번은 기독학생회의 일을 의논하러 허영숙의 집을 방문했는데 마침 박정태 여학생과 같이 있었다. 우리 셋은 부산사범 부속초등학교 동기생들이었다. 사과를 깎지 않고 그릇에 담아주면서 나더러 깎아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에 ‘이것이 가정교육을 받은 여학생의 교양이구나!’ 생각했다. 허영숙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때에 정부 과도수반을 지내셨던 허정 선생님의 조카이기도 했다.





5. 신앙의 성숙기



경남노회가 고려파(현. 고신 교단)와 총회파(현. 합동 교단)로 갈라질 때에 한종희는 총회파 광복교회에서 고려파 서부교회로 옮겨 갔을 때가 1951년 연말이었다. 그때 서부교회 학생회 총회가 열렸는데 한종회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한종희의 신앙 열심과 충성은 아직 다닌지 얼마되지 않은 서부교회 학생회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쉽게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학생들을 이끌고 함께 고려신학교 강단에서 모이던 월요일 밤집회와 격주로 모이던 주일 오후 2시의 집회에도 계속 출석하였다. 서부교회에서는 고려신학교가 발행하던 월간지 ‘파숫군’ 을 보급하고 있었는데, 한종희가 보급하는 책임을 지고 보급하였다. 그는 유년주일학교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장년 주일예배 시에는 앞에 서서 교인들의 찬양을 이끌었고, 반주자가 없을 때에는 예배 반주도 하였다.

당시의 서부교회는 1층은 사택이고 2층이 예배당이었는데, 예배당은 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한 칸의 다다미방이었다. 전혀 다른 방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방에서 먼저 유년주일학교가 모였고 다음에 장년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에는 변영태 외무부 장관 부부와 고려대학 역사학 김성식 교수 부부가 주일마다 참석하였는데 두 집 아들들을 주일학교에서 그가 가르쳤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 대사관은 부산에 공보원을 개원했는데, 그 공보원이 그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동일한 전차 길가에 있었다. 공보원에 있던 도서관에는 도서 열람실이 있는데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전시라 열람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빈 상태였다. 공보원은 겨울에도 난방이 잘 구비되어 있었기에 입은 옷이 허술하여 그렇게도 추웠던 겨울이었지만 열람실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그는 시간만 나면 공보원 열람실에 가서 영어책을 읽으며 영어 공부도 하였는데, 특히 미국의 역사 중에서 청교도의 개척사 부분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학년 초나 졸업 시에는 사범학교 기독학생회가 환영회와 송별회를 가졌다. 그와 함께 서부교회에 출석하던 두 형수가 한 집에 살았기 때문에 사범학교 6년 과정 중 후반기에는 기독학생 신입생 환영회나 졸업생 송별회 때에 그의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가져갔다. 그러나 그렇게 사범학교 여학생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었지만 여학생과 교제했거나 사담을 한 적이 없었다.



조수경이라는 이화여고 학생이 있었다. 용모나 처신이 단정하고 정숙한 여학생이었다. 6·25 전쟁 중에 부산에 피난 와서 임시로 사범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서부교회에 출석하였다. 학년도 나와 동기였는데 사범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기독학생회 예배에도 성실하게 참석했었다. 얼마 후 이화여고가 영도 외딴 곳에 가교사를 짓고 개교했을 때에 본교로 돌아간 학생이었다. 학교를 옮기고도 계속하여 서부교회에 출석하였고, 고려신학교 월요일 밤과 주일 낮 집회에도 참석했었다.

1951년 12월 성탄절에 조수경 여학생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는데 은으로 만든 목걸이 십자가였다. 당시로서는 전쟁 중이라 구하기 어려운 귀한 선물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는데 사범학교 6년 동안에 그 선물이 전부였다.

한번은 제3영도교회 박상순 목사님의 중학생이었던 아들을 지도하러 밤에 방문했다가 자고 아침 일찍 귀가하게 되었다. 멀리 길 반대 방향에서 마주 오고 있는 조수경이 보였다. 부슬비가 내려 우산을 쓰고 있었기에 그 여학생을 보지 않으려고 우산을 내려 가리고 걸었다. 하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넓은 길 반대편에서 길을 건너 내가 있는 쪽으로 와서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내심 너무나 기뻤고 황홀한 경험이었지만 수인사만 하고 말없이 지나쳐 버렸다. 그 후로는 만난 적도 없고 말해 본 적도 없었다.

그 여학생은 1953년 봄에 이화여대에 입학하였다가 휴전이 되자 환도하면서 서울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 당시에는 마음이 허전하였고 추억이 되어 남았지만 그녀를 찾지 않았다. 혼기가 찰 때까지는 여자를 생각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에게는 하나님과의 약속,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요청이 항상 있었다. 사생활뿐만 아니라 목회와 노회와 총회를 섬기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뜻이 먼저였다.

아마 조수경이 보통 여학생 같았으면 말도 건네 보았을 것이지만 너무나 정숙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훌륭한 여학생이라 더 조심스러웠고 또 마음이 끌리기에 더욱 가까이 가지 못했었다. 내가 그 여학생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만일 손목이라도 잡았다면 혈압이 올랐을 것이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아주신 것이다. 지금은 살아있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1952년, 나는 서부교회 주일학교 일 때문에, 주일학교 회계를 맡은 여학생 성영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여학생의 집은 보수동이었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장원이 부평동 2가에 있는데 거기 있다고 하여 그 미장원으로 돈을 받으러 갔다. 미장원은 2층에 있었고 아래층은 여학생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양복점 유일사가 있었다. 두 내외분은 서부교회의 착실한 신자였다.

그 때 그 어머니 말씀이 “한 선생은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내가 학교에 가서 성적을 알아보았네.”고 하셨다. 그 집은 서부교회에서 부자였고 딸만 둘이었다. 큰 딸은 유년주교 회계를 맡고 있었으며, 사범부속초등학교를 나보다 1학년 늦게 졸업한 후배로 경남여고에 다녔다. 그러나 혼기가 차기까지는 여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두 자매는 의사가 되었다. 한번은 서부교회 전도사인 동희 형이 그 여학생을 제수 삼고 싶은 욕심에 우리 둘을 근처의 보수공원에 데리고 가서 만남을 주선했다. 그녀는 인물 좋고 성품 착하고 참 좋은 여자였지만, 역시 나는 응하지 못했다.  


나는 제천 동명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에 혼기가 찼다고 생각하여 만 25세 되던 해(1956)에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였다. 나는 다시 결혼해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것이다. 후회 없는 56년간의 결혼생활을 누렸으니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데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다.

현재 6남매와 손자 손녀 16명에 증손녀 하나가 더 있다.


2003년, 부산 브니엘 신학교 요한계시록 특강 차 갔을 때에 신학교 설립자이신 박성기 선교사가 미군 식당에서 그를 접대하였다. 거기에 SFC 후배이며 당시 고신 교단 기관지 “기독교보”의 사장이던 정금출 장로가 합석했었는데, 정 장로가 자신과 부속초등학교 동기였던 여의사 성영자 씨를 데리고 왔다. 셋이 옛적 서부교회 시절을 떠올리며 회포를 풀었는데, 이 만남은 사전에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로 정 장로가 몰래 혼자 연출한 극적인 만남이었다.



한종희는 광복교회에서 이수필 목사님의 교훈을 6년간 받고, 서부교회로 옮겨 손의원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백영희 조사님을 차례로 거치면서 교훈을 받았다. 그는 부산에서 해방 후 출옥하신 주남선 목사님, 한상동 목사님, 이인재 전도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을 기회가 많았고, 파숫군 지에 게재되었던 박관준장로님,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투쟁사도 읽었으며, 또한 미 공보원 맞은편에 기독교 서점이 있었는데 자주 드나들면서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여 읽었다.


한종희는 많은 책을 읽었는데, 사상계사(사상계의 출판사)가 번역 출판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전기도 읽었다. 큰 형 준희가 월간지인 사상계(思想界)를 정기적으로 구입하여 읽었는데 그도 함께 읽었다. 당시에는 단행본으로 된 신학 서적을 출판하기 어려운 때라 신학자들이 주로 사상계에 기고하였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씨는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정치 경제와 함께 철학 신학에 관한 깊이 있는 여러 신학자들의 논문들도 계속 게재했었다. 사상계는 그를 학문 세계로 입문하게 해준 책이었다. 특히 현대 사상에 대해서는 안병욱 교수가 쓴 책 ‘현대사상(現代思想)’에서 많은 교훈을 받았다.  


특히 한종희에게 있어 박윤선 목사님의 감화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사범학교를 다닐 때 광복교회와 서부교회를 거치면서 매달 6회 이상 6년간(1948-1953) 광복동에 있었던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박윤선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들었다. 또한 박윤선이 주로 학술을 발표하던 고신교단의 월간지 「파숫군」를 창간호(1949년)부터 빠지지 않고 정독하였다. SFC는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정기적으로 전국수양회로 모였는데, 한종희는 그 수양회의 주 강사였던 박윤선의 강의도 1952년 겨울까지 8회 동안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들었다. 1949년에 출판된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성경정경론(聖經正經論)」을 읽었는데 한종희는 그때 칼빈주의의 성서관에 확고히 서게 되었다고 한다. 성서가 가는 데까지 가고, 성서가 멈추면 그곳에서 생각을 멈추는 훈련을 철저히 받은 것이다.

결국 박윤선의 논문 「성경정경론」과 「계시의존사색」은 한종희로 하여금 「성경완전무오론」(complete biblical infallibility)에 굳게 서게 하였다. 그 후로 현재까지도 그는 ‘성경완전무오론’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기초가 든든했기에 성서의 기적들(miracles)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고 내세를 믿지 않는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을 미혹받지 않고 비평할 수 있었다.


또한 한종희의 생애를 성경에 고착시켜준 성경 한 구절이 더 있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예언하고 돌아갈 때에는 그곳에서 먹지도 말고 갔던 길로는 가지도 말고 딴 길로 가라고 하셨으나,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믿고 그곳에서 먹고 가다가 사자의 먹이가 된 말씀(왕상13:24)이었다. 그 말씀을 깊이 깨닫고 난 후부터는 모든 사람의 주장과 교훈을 성서에 맞추어 보는 습관이 생겼고, 누구의 교훈이든 성서와 다르다고 생각되면 일단 뒤로 물러섰고, 먼저 성서 전체를 종합적으로 읽고 연구하고 살피는 습관이 들었다고 한다. 모든 일에서 최후의 답변을 성경에서 찾은 것이다. 성경에서 최후의 답을 얻지 못하면 숙제로 돌려 계속 연구하였다.


한종희는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초판 주석을 1949년에 구입하여 읽었고, 점차 여러 주석을 비교해 보는 습관이 들었다. 일본 내촌감삼(內村鑑山)의 로마서 주석을 박상순 목사님 서재에서 빌려 읽기도 했다(1952). 그는 사범학교 학생에 불과했지만 주석들을 사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된 것이다.



한부선 선교사가 1956년에 제천 남천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물었다. “주석을 하나만 보아야 한다면 어떤 주석을 소개하시겠습니까?” 1871년에 출판된 영국 스코트랜드의 세 사람(Jamieson, Fausset and Brown)이 쓴 주석을 추천해 주었다. 당시 후배였던 송종섭 군이 그 해 1956년에 그 책을 구입하여 나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현재까지도 그 주석을 읽고 있다. 현재도 이 주석은 미국 잔더반(Zondervan)출판사가 계속 발행하고 있다.


나는 어려운 난제에 부딪칠 때마다 답을 받았다. 내가 이 주석을 선물한 사람이 열은 더 될 것이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이 나를 학교에 두 번 초청했을 때에도 이 주석을 선물하였다.



누구의 교훈이든지 성경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그는 숙제로 돌려 연구하였다. 상대가 제일 존경하는 스승이라도, 담임 목사라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성경을 보며 연구했다.



박윤선 목사님이 전천년설을 가르쳤지만 성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 신학교에 가서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믿었던 천년설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학파에서 믿었던 무천년설이었다.

백영희 목사님과 남을 돕는 문제로 이견이 있었다. 백목사님은 시련은 하나님이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도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연단은 하나님과 그 본인과의 문제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령은 도우라는 명령이니 이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극히 어려운 자는 도왔다.



한종희는 사범학교 학생이었을 때에 요한계시록과 로마서를 하도 많이 읽어서 손때가 묻어 있었다. 로마서는 믿음의 도리를 보여주고 계시록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걸어간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 생각되어 더 많이 읽었다. 그 누구의 교훈보다도 성서가 그에게는 유일한 교훈이었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친구도 밤에 와서 문 열어 달라 하면 열어주거든 하물며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요구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면 자기를 부인하여 십자가를 지고 목숨도 버리고 나를 따르리라.”


과연 믿음의 선진들은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고 순종하였다. 바울의 걸음이 그랬고 계시록이 증거하는 성도들의 걸음이 그랬다. 주남선, 이인재, 한상동의 걸음이 그랬고, 파숫군 지를 통해서 보았던 손양원, 박관준, 주기철의 걸음이 그랬다.



당시 파숫군 지에는 그분들의 신앙과 옥중에서의 신앙 투쟁 기록과 설교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많은 기록들이 안용준의 덕분이었는데, 안용준은 옛적 상업고등학교 은사였던 분이 상공부 장관으로 계실 때에 그의 비서로 일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일제 시대 옥중에서 고난 받으면서도 주님을 따라간 기록을 창고에서 뒤져 일제 시대의 경찰 조서를 통해 찾아내었고, 그 자료를 ‘사랑의 원자탄’ 책 집필에 사용하였으며, 파숫군 지에도 게재하게 된 것이다.



주님 싫어하는 것 싫어하고 주님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순종이고, 동행이고, 완전한 헌신이고, 구원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삶이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육체를 따르지 않았고(창6:1-3) 성령의 종이 되어(롬8:1-9)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랐다. 구원받고 성령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구원계약 안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을 때에 순종이 힘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고 또한 나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순종에는 종종 고난이 따랐지만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고 든든하였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채워주셨고 상황이 급박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도 가끔 보았다. 순종하여 기적을 볼 때에는 믿음이 더욱 강해졌고 힘이 더욱 솟아났다.



소설 읽기를 삼가다


1950년에는 사범학교 6년 과정이 병설중학교 3년과 사범학교 3년 과정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다시 사범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성경만 읽고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책은 읽지 않아 상식이 없으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불리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왔다. 조금 걱정되어 소설도 읽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 때가 1951년 한종희가 사범학교 2학년으로 만20살 때였다. 당시 사범학교 교감이었던 김계원은 예수 믿는 신자였고 국어 과목 선생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었기에 한종희는 김계원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좋은 소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선생님 본인의 서재에서 이광수 작 『사랑』을 상하권 가져다 주었다.


그 책을 읽는데 어찌나 재미가 있었던지 수요일밤 교회 종소리를 듣고도 가기 싫은 마음조차 생겨졌다. 예배에 다녀와서는 밤늦도록 계속 읽었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 남녀가 갖는 잠자리 장면을 묘사한 것을 읽고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에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워졌다. 소설이 믿는 사람의 경건한 삶을 파괴한다고 깨달아져서 결혼 후에 읽기로 하고 다시는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6. 평화로웠던 가정생활, 어머님의 장례식



한종희는 조금의 빈틈도 없을 정도로 참으로 바빴다. 매일 새벽기도회, 매주간 사범학교 학생회 예배, 매달 6회의 고신 강당에서 모이는 학생연합집회, 토요일 밤마다 모이는 교회 학생회 모임, 유년주일학교 교사, 주일 낮과 밤 집회와 수요일 밤 집회, 간간히 열리는 시내교회 부흥회 참석 등으로 한 주간 내내 교회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학교는 학교대로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는 말씀 순종으로 매순간마다 충성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는 공부했기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는 모범생으로 통했으니 전혀 간섭받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 일에 전혀 나몰라 하고 자기 일만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갑자기 큰 형의 일이 밀려 바쁠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도와 일을 했는데, 그도 스스로 학교를 결석하면서 함께 했다. 농촌 마을에 퇴비증산을 권장하는 10m 길이 정도의 현수막 수백 장을 제작하여 도청에 납품할 때에도 그랬다. 큰 형 준희는 공부하는 학생이니 학교 가라고 하였으나 나이가 들어 일하지 않고 형의 도움으로 학교 다닌다는 것이 그에게는 늘 마음의 큰 빚이었다.



나는 은혜를 갚는다고 했지만 아버지 역을 대신해 준 형님의 사랑만 평생 입었다. 내가 미국에 이민하여 살면서 광주 동명교회 집회 인도 차 갔을 때에도(1990) 큰 형님이 부산에서 광주까지 와서 집회에 참석하였고, 집회 후 고향인 전북 정읍군 신태인에 갈 때에는 동행하시며 미리 봉투를 준비하여 친사촌 큰 형님과 외사촌 큰 형님 댁에 주어 인사하게 하였다. 부산에 가면 형님은 항상 가난한 목사 생활에 쓰라고 봉투를 주었다.


큰 형님만 아니라 큰 형수님도 항상 어머니를 대신하여 주었다. 1967년일 것이다. 부산 큰 형수님이 대구 우리 집을 갑자기 방문하여 수표 10만원을 주어 흑백 TV를 6만원에 샀다. 형수님은 형님을 졸라서 받아왔다고 했다. 1995년 아내가 뇌종양으로 수술 날짜를 받았을 때에는 두 형수님이 다 과부였지만 한국에서 갑자기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방문해 주었다. 두 분이 조카들을 졸라 받아온 3,000불을 내게 주어 사용했는데, 내가 은행 카드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큰 형수님은 귀국하자 카드빚까지 다 갚아주셨다. 형수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선한 마음을 하나님이 그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큰형 준희는 효자였다. 동생들 교육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머니가 병환으로 부엌일을 못하시게 되자 황급히 결혼하였다. 그는 간판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데, 수입 전부를 어머니에게 맡겼고 필요할 때마다 타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학생이었던 두 동생들은 돈에 궁색해 본 적이 없었다. 준희가 결혼하자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하며 불편한 몸으로 부엌일도 거드셨다. 그렇게 가정을 사랑과 화평으로 다스리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해수기침으로 앓다가 1952년에 51세로 별세하셨다.

한동희는 어머니 생존 시에 결혼하기 위해서 결혼식 날짜까지 앞당겼지만 결혼식 6일 전에 숨을 거두셨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호상이었다. 부산 아미동 산비탈에 묘지가 있었는데, 매우 가파랐다. 장례식 날에는 비까지 왔다. 차가 올라갈 수 없어 그 때에 문상 왔던 작은 형 동희의 신앙동지들(도군삼, 박성환, 박영훈, 손영준, 이원홍, 한기범 등)과 그의 형제가 함께 버스를 밀고 올라갔다. 그날 장례식에 참석한 목사님들은 한명동, 이학인, 박상순, 이수필, 그리고 김창인 전도사님이었다.


목사님들과 형님의 친구들은 우리 형제들이 평생 잊지 못할 위로를 주었다. 동희 형님은 신앙의 용장이었고 친구들은 믿음 안에서 사귄 동지들이었다.




아버지 같았던 목사님들


나는 3살 때에 아버지가 별세하셨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 장례식에 찾아 주신 다섯 분 목사님들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박상순 목사님은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하여 사시다가 소천하셨다. 1980년에 독자 아들을 방문하여 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분의 묘지를 둘러보고 미망인 사모님을 만나 뵈었다. 이수필 목사님은 통합측에 계셨지만 1961년에 목사님의 강단에 나를 세워주셨는데 그때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목사님의 세 딸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한명동 목사님은 1997년 SFC 창립 50주년 기념감사 예배를 고신대학 강당에서 드릴 때에 한국을 방문해서 마지막으로 뵈었다.

이학인 목사님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이민하여 사셨는데 100수 때와 104세에 소천 하셨을 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참석하였다. 김창인 목사님은 사모님 소천 소식을 장례 후에 듣고 대구에서 서울 자택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목사님의 자택에서 잤다. 2004년 전국 목사장로 기도회 강사로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기도회 장소였던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김창인 목사님을 만났다. 부산 서부교회에서 시무하실 때에(1951-1952) 학생이었던 나를 떠올리며 차에 태우고 다니시면서 그렇게도 기뻐하셨다.

그분들은 다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셨고 인간적으로도 나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아버지의 품이었다. 그분들의 삶은 하나같이 신중하고 엄숙하고 경건하셨다.


박상순 목사님은 캐나다에 사는 아들의 초청으로 이민하여 오셨을 때에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을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자기가 직접 정부에 세금을 낸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생활보조금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들인 내가 세금을 내서 나온다” 고 말씀드렸지만 끝내 막무가내셨다고 한다. 생활보조금 거부의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지키려는 이 양심의 문제를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 분의 양심이었다. 하나님은 양심으로 심판하신다.

김창인 목사님의 상처는 1970년대였는데 서울 자택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목사님이 방에 들어오셔서 침대를 만져 보시고 이부자리를 살피신 후에 잘 자라고 하시며 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서부교회 강단에서는 사자처럼 외치셨던 모습만 보았던 나는 비로소 어른의 내면세계를 볼 수가 있었다. 마치 독방에 아기를 재우는 엄마가 아기 방에 들어가 자장가를 불러주며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가는 자상하신 엄마의 인자함을 느꼈다. 나에게 평생 지워지지 아니하는 인상을 못 박듯이 심어주신 것이다.


수년 전에 이수필 목사님의 차녀가 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언니 댁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내와 함께 자동차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었다. 차녀는 나와는 화랑초등학교 동기생이고 우리가 광복교회에서 자랄 때에는 말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만났더니 내 처가 내 옆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한종희!”라고 불렀다. 본래 남자 이상으로 호탕한 성격이라 남자들 하고도 친구삼아 지냈는데, 결혼한 후에도 아버지가 안심이 안 된다며 걱정하셨다고 언니가 전해주어 들었다.





7. 중생이 낳은 새 피조물



1953년 새해의 추운 겨울이었다. 한종희는 서부교회를 다니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학과 입학시험을 준비로 한참 바쁜 시기였다. 그러나 그 빠쁜 와중에도 교회 일에 충성하며 주일날 예배 시간에 회중의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1월경 후배인 정금출의 집에서 입시준비를 했다. 정금출은 외아들로 생활이 유족하며 좋은 환경이라 공부하기에 좋았다. 수학의 미분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유한수는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0”에 가까운 숫자가 되어졌다. 바로 그 때에 한종희는 지옥을 생각하였다.

지옥은 끝이 없는 무한수가 아닌가!

만일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 지옥의 고통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한종희는 지옥의 형벌에 기절해 버렸다. 정금출과 그의 어머님이 와서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에게는 지옥이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고 실제의 지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때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죄를 범하면 두렵고 회개하면 잠시 편해지다가 실족하면 또 두려움에 빠지곤 하였다.


그러던 중 바로 2월에 우태숙 선생님이 인도하는 부흥회가 서부교회에서 있었다. 한 주간 시험공부를 완전히 접고 부흥회에만 매달렸다. 원래 가까운 광복교회에 출석할 때도 항서교회와 중앙교회는 물론이고 집에서 먼 초량교회와 영도교회의 부흥회까지 다니면서 은혜를 사모하던 그였다. 은혜를 받고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학입시와 입학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우태숙은 원색적으로 죄를 회개하되 공중 앞에서 자백하라고 하셨다. 그에게는 구원을 얻고 평안을 얻기 위한 일이라면 못할 것이 없었기에 부끄럽지만 회중 앞에서 시키는 대로 철부지 어린 때의 일까지 자복했다.

그 당시 한종희는 서부교회 주일예배 시간에 회중들 앞에 서서 예배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죄를 낱낱이 자복하고 나니 죄인된 그가 회중들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는 것이 양심에 거리꼈다. 그래서 새벽예배를 마치고 즉시 백 조사님 방에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예배시간 찬양 인도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 조사님은 주일예배 찬양지휘를 계속 하라고 하셨다.

죄를 정하실 분도 하나님뿐이고 죄를 사하실 분도 하나님뿐이므로 하나님이 죄가 없다 하면 없는 것이니 계속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계속 인도할 수 없다고, 순종할 수 없다고 말씀 드렸다.


요한일서 1:9을 읽게 한 후에

“죄를 자백하면 다 사하신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믿느냐?”

“이미 믿었습니다.”

“그러면 죄가 없으니 나가서 계속 인도하라.”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화를 내시며 큰 소리로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의 가슴을 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수년 동안 구원 문제로 이 곳 저 곳 부흥회를 찾아다니며 마음에 평안을 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고심하던 그에게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네 죄가 사함 받았으니, 이제는 너에게 죄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 칭하시니, 이제 너는 의인이니라.”


그 순간에 천하 만물이 내 앞에서 변하는 경험을 했다. 우주는 온통 기쁨과 평강으로 차 있었다. 교회 맞은편에 있는 찻길 건너 사범학교 뒤뜰에는 큰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조차 그렇게도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교회에서 부평동에 있던 집까지 가는 동안 가로수들과 함께 모든 것이 다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를 보아도 기뻤고, 산을 보아도 기뻤고, 온통 기쁨뿐이었다. 나는 가슴이 터지도록 벅찼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바로 그 때에 내가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변화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이어서 나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 무엇도 다시는 나를 이전의 상태로 돌리지 못하였다. 구원은 나와 세상을 바꾸었고 나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한 재창조였다. 그 때에 내가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 우주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의 구원을 보장받았으니 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 마음은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드릴 것은 내 생명이니 나는 다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는 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교회 종치는 일이라도 그것을 평생 동안 하리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동행하는 것은 힘들지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순종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차차 쉬워졌고 나중에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다. 순종하다가 감옥에도 가고 대학에 못 가기도 했지만 평안하였다. 나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알고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나는 이전에 전도서를 여러 번 통독하여 인생은 짧고 하나님 없는 생활은 허무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나를 자기의 사람으로 부르셨고 종으로 포박하셨다.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나 노회나 총회를 섬길 때에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②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③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④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것이고

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고

⑥ 온전히 성화를 입는 길이고

⑦ 영원히 하늘 곡간에 채워지는 삶인 것을 믿게 되었다. 할렐루야! 아멘!


내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은 첫째가 거듭나는 일이다(고후5:7; 롬6:4,17,18). 거듭나면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목적이 바뀐다.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과 방법을 따라 산다. 내가 수년간 부흥회를 찾고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았고 수백번 회개를 반복했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불안하였고 죄의 종이 되기를 반복했지만, 복음을 믿고 거듭하니

① 비로소 구원의 확신을 가졌고,

② 구원의 확신이 천하를 덮는 기쁨과 평안을 안겨주었고,

③ 내 생각과 목적이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으로 바뀌어졌다.

④ 순종생활이 전과는 판이하게 잘 되어졌다.

⑤ 힘들지만 마땅히 동행생활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복음을 믿고 거듭남의 비밀은 이론으로는 연구해도 답이 없다. 내가 거듭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백영희 조사님이었다. 백영희 조사님이 나를 독대한 자리에서 속죄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내 주셨다. 백 조사님은 독대한 자리에서 복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요리저리 피해가던 나를 사자가 먹이를 쫓듯이 순간을 노치지 않고 쫓아서 복음을 확신하게 해 주신 것이다. 내가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계기를 만나지 못한 채 10년, 20년을 더 지냈을지도 모를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백영희 조사님을 통해서 내게 주신 것이다. 그 때 내 나이 22살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입안하시고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복음을 믿게 하신 역할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첫째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스승님께도 감사한다.  


8. 고신 교단의 내분 : 고소파와 반고소파



일제 시기나 해방이 된 후에도 한국의 장로교는 단일 총회 체제였다. 해방 후 과거의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총회 내에에서는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제기 되었다. 대부분 교회는 침묵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 난 운동이라 하여 당시에는 고려파(고신파)라고 했다. 이 운동의 찬반을 두고 고신파와 총회파로 교단이 분립 되었다. 정작 큰 문제는 분립이 되자 총회파 교단은 법적 교권을 앞세워 고신파 소속 교회의 재산 확보를 시도했고 분쟁이 지속되자 세상 법정에 제소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고신파 안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두고 맞소송 강행파와 이를 반대하는 반고소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타 교단의 소송에는 소송으로 상대한다는 주장을 고소파라 하고, 이를 반대하는 신앙 운동을 반소파 또는 반고소파라 한다.


반고소는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세 사람이 주동이었고 경기노회가 그 뒤를 따랐다. 반고소에 호응한 사람이 더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 교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는 송상석과 한상동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서 반고소를 개인적으로 드러나게 주장하지는 못했다. 한상동도 초량교회를 내주고 나왔기 때문에 초창기에 고신파에서는 반고소 측이 명분이 서는 듯 했지만, 한상동은 의외로 송상석을 지원하며 박윤선을 신학교에서 두 번 사면하게 하였고(1957, 1960), 백영희는 부산노회에서 제명하게 하였고, 이인재를 대구 성남교회에서 사면하게 하였다.  경기노회는 반고소 쪽을 동정하여 고신파 총회에 대해 행정보류를 선언하자(1958), 고신파 총회는 경기노회 중에서 고신 교단의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로 새로운 경기노회를 조직하여(1958) 대응하고 나섰다. 이에 원래 고신 교단에 속했다가 행정보류를 선언했던 경기노회는 1959년에 합동교단이라고 불리는 당시의 승동쪽 수도노회에 가입했다.

고신에서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는 반고소의 강경파였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에서 반고소를 가르치고 ‘파숫군’지에는 반고소의 글을 썼다. 이인재는 출옥 성도로서 많은 부흥회에 강사로 초청되었는데 거기에서 고소를 죄라고 외쳤다. 백영희는 유명한 부흥 강사였는데 부흥집회에서 반고소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파장이 있었다.


당시 고신에서 고소파와 반고소파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한동희가 서부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에 영도제일교회 청년헌신예배 강사로 초청되었다. 주일 밤에 준비하며 강단에 앉아 있을 때에, 교회 담임이신 박손혁 목사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즉시 한동희를 강단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한동희는 고신의 학생이었으며, 영도제일교회 청년회에는 이원홍 박영훈 신도관 박성환 등의 한동희의 신앙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초청한 것이지만, 한동희가 백영희의 직속이었기 때문에 강단에서 끌어 내린 것이었다. 당시 한동희나 그의 친구들을 포함하여 SFC 동지들은 고소나 반고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고 논쟁한 적이 없었지만 고신파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 고소와 반고소가 나와 너를 가르는 잣대였다.


박윤선을 고신에서 축출한 문제를 놓고 한상동 목사님이 축출한 것이 아니고 송상석 목사님이 축출했을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목사가 있어서 이 부분을 밝히고자 한다. 고신파 교육원에서만 28년간 사역하고 고신 60년사를 편집하는 목사가 던진 의문 제기였다. 이러한 의문은 당시의 상황을 지켜보지 못한 세대로서는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문은 초량교회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한상동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반고소파 축출과 한상동 의 신앙투쟁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제기되는 의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증인과 함께 살아있다.

물론 송상석이 몸담았던 경남노회는 송상석의 역할이 컸을 것이지만, 당시 부산노회나 경북노회는 전적으로 한상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경기노회도 한상동의 영향권이 미쳤다. 이인재 목사님은 나에게 증언하기를 한학수 목사님이 자기를 성남교회에서 축출할 때에 앞장섰다고 하였다. 한학수는 한상동의 직계였다. 고신을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 목회에서 은퇴한 황보연준 목사님은 나에게 말하기를 김의환 목사님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 한상동 목사님을 방문하여 물었다고 한다.


“한 목사님은 왜 박윤선 목사를 고신에서 내 보내셨습니까?”

한참을 침묵하시다가 말씀하셨다.  


“내가 그 때에 잠시 시험에 들었었지...”


한상동 목사님 뒤에는 그림자처럼 따르며 비서가 되어 형님을 도왔던 한명동 목사님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고신파 초기 25년간의 역사를 보아야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고신파에서 한상동 목사님에 의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던 역사적인 배경에는 항상 한명동 목사님의 지략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고신파 역사를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부분을 밝힐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본다. 일찍이 소천했지만 한명동 목사님의 장자 한기범과 한기태와는 막중한 친구였다. 한명동 목사님은 김창인 전도사가 시무하던 서부교회에서 나의 형 한동희의 결혼 주례를 하셨다. 사범학교 기독학생회를 이끌었던 6년 동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명동 목사님의 지도와 지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밝히기 전에 한명동 목사님의 친 아들이며 한상동 목사님의 양자이기도 한 한기영 장로님(뉴저지 거주)과 90분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며 한상동 목사님 두 형제분의 관계를 자세히 들었다.



1958년도 고신 교단은 제8회 총회에서 반고소 문제를 제기하고 행정보류를 선언한 경기노회의 요구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권 지도부를 지지하는 교회들만 가지고 별도로 경기노회를 조직한 후 그 경기노회를 총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되자 행정보류를 선언한 원래 경기노회 소속 교회들은 고신 교단과 대립하고 있던 합동 교단의 1959년 총회에 합류를 해 버렸다. 경기노회의 이학인과 김창인 등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고신 교단 내의 반고소 입장을 가진 경기노회를 합동 교단의 수도노회에 가입을 했다.

그러나 고신 교단과 합동 교단은 1960년도에 교단을 하나로 만들기를 추진했고 실제로 두 교단이 한 교단으로 합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교단 단일화는 1963년에 다시 분열하고 원래 교단으로 각각 돌아가게 되었다. 고신 교단을 대표한 한상동은 개인의 결단으로 합동을 취소하고 고신 교단의 환원을 선포했다.

이런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고신 교단에서 교권 지도부를 반대하고 반고소를 주장했던 박윤선을 고신에서 내보내는 과정에서 한상동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고신 교단이 합동 교단과 교단 통일을 깨고 환원을 선언하였으나 원래 고신 교단 안에서 소리 없이 반고소파에 동정하던 교회들은 한상동을 따라 원 상태로 환원하는 것을 동조하지 아니했고 한상동은 박윤선을 재영입해서라도 전체 흐름을 되돌리려고 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합동교단과의 교단 통일로 인해 고신 교단이 잃은 교회가 160개에 이르렀다.




9. 진영읍교회에서 자원봉사



한종희는 1953년 5월 만 22세에 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위장병이 생겨 집에서 쉬고 있었다. 대학 입시 준비에 몰두하다가 얻은 소화불량과 위장 확장증이었다. 그해 여름 손영준과 한동희 두 사람이 김해 창녕 청년연합집회 강사로 갔다가 그에게 들렸다. 형 동희가 진영읍교회의 김희도 목사님을 소개하며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할 것을 권했다. 그곳으로 가서 김 목사님 댁에서 침식을 제공 받으며 성가대를 지휘하고 유년주일학교와 학생회를 맡아 지도하였다.

진영읍교회에서 수고할 때, 교회의 사모님은 그의 치병을 위해서 정성을 쏟아 부으셨다. 당시 김희도에게는 중학교 2학년의 장남 만우와 6살의 어린 아들 진섭이 있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는 찰떡을 만들어 한종희만 먹이셨다. 위장병에는 찰떡을 3년만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없는 형편에 찰떡을 만들어 한 선생님의 약이라며 어린 아들 진섭에게조차 주지 않으신 것이다.



진영읍교회의 사모님은 참으로 자비로운 하나님의 딸이었다. 사모님은 밥을 푸실 때에는 항상 예수님 밥을 따로 퍼서 놓았다가 걸인이나 항상 드나드는 식객을 위해서 주셨다.

내가 같이 있을 때에도 고등학생인 심군식 군은 후에 목사가 되는데 당시에는 식객으로 자주 드나들었고, 후에는 시골에서 부산 고등성경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진영역에 기차를 타러왔다가 들려 쉬어갔다. 배경재 전도사(나의 SFC 동지)가 고려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시골에서 진영역까지가 멀기 때문에 주일 밤에 진영읍교회 사택까지 와서 저녁밥을 먹고 자고 월요일 아침에 통근차를 탔고, 토요일에 귀가할 때에도 기차가 늦게 도착하여 밤에 귀가할 수 없으므로 진영읍교회 사택에서 저녁을 먹고 자고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서 주일을 지켰다.

그러니 사모님의 고달픔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그 모든 짐을 지셨다. 결국 후에 영양실조로 몇 번을 쓰러지시다가 진영읍교회에서 소천하셨다. 김희도 목사님께서도 영양실조로 강단에서 3번이나 쓰러지셨다. 사모님이 가신 후에 목사님께서 아들 김만우에게 “네 어머니는 성자였다”고 하셨다고 한다.


6살 난 어린 아들 진섭에게도 찰떡을 주지 않으시고 약으로 나에게만 먹이셨으니 그 가난 속에서 행하신 자비와 사랑을 어찌 다 측량하랴! 그런 중에서도 아들 김만우를 연세대학교와 고려신학교를 졸업시켰으니 그 고초가 오죽했을까! 두 내외분은 먹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성자들이었고, 나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주신 다시 없이 귀하신 어른들이었다.

당시에 김목사님의 큰 딸이 부산사범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부산에서 자취하기 때문에 방학이 되어야만 집에 왔었다. 김희도 목사님과 그 사모님의 신앙인격에 감격한 나는 사모님께 따님과 결혼할 마음이 있으니 약혼하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물론 그분들의 큰 딸과는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범학교 후배로 내가 기독학생회를 이끌면서 먼발치로 보았을 뿐이었다. 사모님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라며 거절하셨다. 훗날 철이 들어 깨닫고 나니 학생과 약혼하여 어찌하겠는가? 사모님은 현명하신 분이라 잘 지도해 주신 것이었다. 그 후 이듬 해(1954) 봄에 제천 남천교회의 부름을 받고 진영읍교회를 떠났다.



한종희는 진영읍교회를 봉사하고 있을 동안에 주중에는 매일 들판에 나가 산책하며 많은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인생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중이었다. 큰형 준희의 사업이 잘되어 두 동생의 교육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경제 문제로 고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졸업했으니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해야만 했다.


한번은 들판에서 산책 중에 웅덩이 물가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개구리와 메뚜기가 뛰노는 것에 집중하며 오랫동안 숙제로 품어왔던 그의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되었다.


개구리에게 물었다.

“개구리야, 너는 농사짓지 않고 항상 뛰어놀기만 하는데 무엇을 먹고 사느냐?”

“나는 나를 위해 농사짓지 않지만 먹을 것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시 메뚜기에게 물었다.

“메뚜기야, 너는 너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뛰어놀기만 하는데 무엇을 먹고 사느냐?”

“나는 나를 위해 농사짓지 않지만 먹을 것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메뚜기도 같은 답을 했다.


‘과연 그렇다. 개구리와 메뚜기도 농사짓지 않지만 굶어죽지 않고 사는데, 하물며 내가 먹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나는 한 평생 나의 성공이나 나의 영화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리라. 교회 사찰이든 주일학교 교사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결심하였다.


나는 당시에 전도서를 여러 번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그 때에 그 마음에 임하셨던 성령님의 부르심이 나의 생애를 지켜 주셨다. 평생을 살면서 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멀리한 적이 없었고, 무엇을 입고 마실까 하는 자신을 위한 이 문제로는 유혹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전도와 목회에 전념하면서 미친 사람 취급도 받았고 고생도 많았고 사람들이 너는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져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1953년에 나를 들판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요청이 평생동안 나의 마음을 지켜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어 교회와 노회와 총회를 섬길 때에도 하나님께 욕 돌리지 않고 영광 돌리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다른 목사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때가 자주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자기의 욕심을 따르지 않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마음을 두었기에 마음이 항상 평안하였다(롬12:1).

 






제 2 장. 제천 목회와 시련




10. 제천 남천교회 자원봉사

11. 결혼

12. 징계와 결단, 초등학교 교사직 사임

13. 고암교회 전도인

14, 바르트신학의 비판의 평생 사역 시작  

15. 군 복무 문제로 1년의 수감생활

16, 청주교도소와 시기죄

17. 교도소에서의 가중처벌

18. 귀가 후 성화교리 갈등

19. 거창 창동교회 개척

20. 제천 금성 개척지로 이동

21. 공회로부터 분리

22. 경기도 성환교회의 교역자 청빙

23. 시골 전도생활

10. 제천 남천교회 자원봉사



1954년 봄, 제천 남천교회에서 한종희를 초청하여 갔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신 김성환 전도사님은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월요일에 부산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토요일에 귀가하여 주일 예배에 설교하고 있었다. 한종희는 남천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를 겸하였으며 중고등부와 유년부를 지도하였다. 그는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아 오전에는 초등학교 2학년을 담임하고 오후에는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진영읍교회에 있을 때에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수입이 없어 헌금하지 못했으나 제천에서 첫 월급을 받고는 진영읍교회에 헌금으로 보냈는데, 김 목사님과 사모님이 무척 기뻐하셨다고 했다.


한국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선교 구역을 배정하여 정해진 곳에서만 전도하도록 했는데, 제천은 감리교 구역이었으나 해방이 되면서 이 제도가 없어졌다. 부산 서부교회에서는 제천에 개척교회를 설립하고 교역자로 김성환 전도사님을 파송하여(1953) 예배당을 짓는 1년간은 교역자 생활비를 도왔다. 그러나 예배당을 완공한 1954년 봄부터는 남천교회는 완전 자립하게 되었다. 남천교회의 최귀주 집사님이 예배 반주자와 주일학교를 담당해줄 사람을 구하러 서부교회에 왔었는데 한동희가 그의 동생 한종희를 추천하여 진영읍교회를 떠나 제천의 남천교회로 간 것이었다.


김성환은 6·25 때에 북한에서 피난 와서 고신에 재학하며 경남 방어진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서부교회 전도사였던 형 한동희에게 내가 소개하여 제천 남천교회의 첫 교역자가 된 사람이다. 김성환은 제천에서 부산 고려신학교를 마저 졸업하였고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5년에는 부산 전포교회로 갔다가 훗날 1964년에 박윤선 목사님이 개척한 서울 동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 때에 나는 동산교회를 설립하신 고응진 장로와 이능전 집사 내외분에게 김성환을 소개했다. 1964년, 박윤선이 총회신학교 부산분교장으로 가면서 후임 목사가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환 목사님은 후에 서울 성도교회로 옮겨 목회하던 중 50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모님은 현재 서울에서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고 계시다.


내가 전도사로 개혁신학교에서 박윤선 목사님에게 배울 때에 고응진 장로님 댁에서 하룻밤을 쉬면서 동산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었다. 김성환 목사님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러 강단에 섰다가 나를 보시자마자 즉시 내가 있는 자리에 와서 나더러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라고 강권하셔서 인도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형제 못지않게 지냈다.

11. 결혼



한종희는 1955년 여름 방학 때 잠시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서울에는 6·25 전쟁 시에 부산으로 피난 와서 부산의 서부교회를 출석하던 유명인들 중에서 고려대학교 역사학 김성식 교수 내외분이 있었고, 6·25 당시에는 외무부장관이었으나 국무총리가 되신 변영태 총리 내외분도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 두 집의 아이들을 서부교회 주일학교에서 그가 가르쳤었다. 김성식 교수가 한종희를 데리고 서울 중앙초등학교 교장을 방문하여 그를 인사 시키며 교사 발령을 의뢰하였다. 또한 그에게 자기 집에 유숙하며 아들을 지도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서울로 가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갈 뜻을 품고 제천에 돌아와 최귀주에게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서울에 갈 뜻을 밝혔더니 당황해 하셨다.


최귀주 집사님은 자나 깨나 교회밖에는 몰랐던 분이었다. 앞니가 튀어나와 보기 흉하여 남편이 교정하라고 두 번이나 돈을 주었지만 두 번 다 헌금하였다. 내가 그 집에 기거할 때에 3번째 돈을 받았는데 이를 교정하려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시며 나에게 의견을 물어 보셨다. 헌금 대신 교정하시는 쪽으로 말씀드렸으나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세 번째도 헌금하였다. 그처럼 교회밖에 모르는 분이 성가대, 학생회, 주일학교를 이끌어온 사람이 교회를 떠난다고 하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최귀주는 떠나지 말고 결혼하여 함께 살자고 강권하였다. 결혼으로 그의 서울 길을 막고 나선 것이었다. 한종희는 남천교회에는 마음에 썩 드는 신부감이 한 사람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혼하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당시 남천교회에는 초등학교 미혼 여교사도 세 사람이 있었고 여 교사들 말고도 다섯은 더 있었다.


최귀주는 먼저 인물이 고왔던 이씨를 지목하여 어떠냐고 물으셨다. 그는 아니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 당시 서울 사대 부속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본인의 따님을 말씀하셨으나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셔서 지금의 아내가 된 노재임을 지목하였다. 어려운 자리지만 나서보겠다고 했다. 최귀주와 남편 정기수 교장이 함께 중매에 나섰으나 어려워지자 다른 두 분을 중매자로 내세웠다. 한 분은 한전 지점장이고 또 한 분은 제천병원장이었다. 두 분은 다 혼주인 노의중 씨와 절친한 친구였다. 결국 1년 만에 어렵게 결혼이 성사되었고 최귀주의 의향대로 한종희는 제천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최귀주의 친정 아버지는 평양에서 이름난 부자로 최벽부라는 별호로 불리었으며, 일본 동경에서 유학을 마친 정기수를 사위로 삼았다. 정기수는 조만식의 최측근으로 조만식이 교장으로 지낸 오산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당시에 함석헌이 교사로 재직했으며 일제 때도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던 애국지사였다. 정기수의 사위는 1954년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김증한 교수였다. 한종희의 장인이 되신 노의중 씨는 당시 충북 도의회 의장이셨으며 가끔 정기수 교장 댁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수 교장은 힘있는 중매자였지만 1년을 끌어도 성사 되지 못하자 두 분이 더 나서서 결국 성사되었다. 한종희는 제천이 객지이고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두 형님뿐이니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

아내 된 노재임은 중학교 때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숙부님 댁에 들어가 숙부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할머니는 젊은 과부를 혼자 살게 할 수 없다고 하여 합가시켰다고 한다. 신부의 신앙 생활과 인품과 가품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또한 신부의 집안은 제천의 이름난 명망있는 집안이었다. 숙부되는 노의중씨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동명초등학교 사친회 이사장이었고 자유당 제천군 당수였고 충북도의회 의장이었다. 고모는 서대문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한 의사였고, 고모부 이기준 박사는 당시 영국 옥스퍼드 대학 경제학 박사로 대학 교수였으며 후에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이 되어 한국의 경제를 입안하신 분이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1년만에 어렵게 성사되었고, 한종희의 본가는 부산이나 결혼식은 처가댁 제천에서 하였다. 본가라야 부모님은 다 일찍이 떠나 가셨고 두 형님과 형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했을 뿐이었다. 교회에서 결혼 예식을 치렀는데 부산 고신파에서 성장한 동희와 종희는 결혼식에는 결코 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신부댁에 강력하게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은행장들과 군수와 읍장과 서장과 시내 4개 초등학교와 그 일대의 중고등학교의 교장들이 참석하고 많은 제천 유지들이 참석한 잔치인데, 술을 쓰지 말라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신부측 어른들은 참 난감하였다. 중매자가 처숙부가 어른으로 모시는 기독교 신자 정기수 교장이지만 많은 유력한 손님들을 모신 잔치에 술을 쓰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신랑 측 의견을 무시하고 술을 대접하려니 어른으로 모시는 중매자를 생각하면 그것도 참 입장이 난처했다. 결국 그 결혼 잔치에서는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고 뒤로 술을 사용했었다.



나는 1950년부터 5년간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할 때에 장차 결혼할 좋은 여자를 달라고 기도하였고,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는데 도움을 줄 아내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결혼 말이 있을 때에 아내에게 예수 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나의 결혼 목적인데 함께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여 1956년에 결혼하였고, 지금까지 56년을 이 약속대로 살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한종희의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다. 부산에서 1951년에 출석하던 교회의 사모님이 바람이 나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가족은 경주로 이사하여 과수원을 가꾸고 계셨다. 그 목사님에게는 3남매가 있었는데 맏딸이 그와는 동년배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 인사차 경주로 방문하였었다. 과수원에서 사모님과 함께 사과를 따고 있었는데 사모님이 느닷없이 변명조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음식도 먹다가 싫어지면 바꾸어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신 것이다. 그 말에 내심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그 사건 이후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이 더욱 강해졌다. ‘결혼은 한 번 하는 것이지만, 결코 적당히 하거나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라고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아내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 초기에는 늦잠 자고 새벽기도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명종을 사려고 하니 돈이 없었다. 6·25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귀했고 또 그 때에는 국산 시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계 값이 상당하였다. 가난한 그로서는 시계 하나 살 여유가 없었다. 결혼 직전에 하숙비가 만 환이었는데 학교 월급이 만 환이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아내가 결혼할 때에 가져온 아내의 옷 50벌이 전부였다. 아내가 옷을 팔아서 자명종을 구입한 후로는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결혼하고 1년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강원도 마찰리교회가 예배당 짓는다고 헌금할 때에 돈이 없어서 그의 아내가 결혼반지를 바쳤다. 1959년에 남천교회를 지을 때에는 놋 세수대야, 은 숟가락, 처가댁에서 해준 옷장 등을 팔아서 헌금하였다. 그들 부부는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것임을 믿었기에 무엇이나 다 드릴 수 있었다. 시골 사람이 길에 내다 팔던 궤짝 농짝을 사서 옷장을 대신하였다. 1963년 11월에 대구 남성교회 교역자로 갈 때에도 그 궤짝 옷장을 가져갔다.




12. 징계와 결단, 초등학교 교사직 사임



내가 1953년에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다짐하고 1954년에 충북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고 1956년에 결혼하여 행복한 삶에 빠져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새로 태어났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지만 시험에 빠져 범죄한 것이다. 죄가 매일 매시 마음을 짓눌렀다. “내가 너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었거든 네가 어찌 나를 거역하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 하시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계속되는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 빛이 창호지 문을 하얗게 비추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두려워 견디지 못하여 자는 아내를 깨웠다. “여보 나 좀 살려 줘!” 그리고 내가 범한 죄를 아내에게 자백하였다. 남천교회 여 전도사님은 처녀로 늙으신 분이라 그 분이 계신 예배당에는 벼락을 치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펴 든 채 천둥소리를 들으며 미친 사람처럼 교회로 뛰었다. 예배당 안에 첫 발을 디디면서, “아이고 살았구나!” 했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 다급한 것은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이었다. 그 때에 너무나 불안해서 이틀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안절부절 했던 일도 있었는데, 연세 많으신 여 전도사님은 “한 선생처럼 훌륭한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하셨고, 최귀주 집사님은 내게 어머니 같은 분이라 “집사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려 하십니다.” 낮이나 밤이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순간도 불안이 떠나지 않아 안절부절 하였다. 바로 지옥이었다. 하나님의 징계는 참으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때 나는 나를 억만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윗의 기도 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너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고치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1-4)

마침 그러한 때에 백영희가 제천에 부흥회의 강사로 오게 되었다. ‘이번에 은혜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지! 조사님만 오시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해결을 주시겠지!’ 마음에 평안을 주실 말씀이 그에게는 천금보다 귀하고 절실하였다. 강사가 월요일 밤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첫 집회는 화요일 새벽에 시작하였고 다음 월요일 새벽까지 계속하였다. 당시의 부흥회는 새벽과 오전과 밤, 매일 3회씩 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출근해야 하니 오전 집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화요일 첫날 새벽기도를 마쳤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낮 공부 빠지고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내 말을 가볍게 여기고 네가 어떻게 은혜를 받겠느냐!”라고 소리치셨다.


한종희에게는 그때 낮 공부에 참석하고 학교에 결근하려면 학교에는 사표를 내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가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였는데, 2주 후에는 문교부 지정 발표회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는 학교를 대표하여 음악 과목을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연구 발표에는 문교부 장학사와 충청북도 장학사가 오고, 제천군에 인접한 3개 군내 모든 초등학교가 문을 닫고 전 교사들이 참여하고, 충북도 내 모든 초등학교의 교장 교감 연구주임들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연구발표였다. 교감도 학교 울타리 안의 사택에 살면서도 도시락을 교무실에서 먹었으니 교사들은 어떤 이유로도 결근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사표내고 낮 집회에 참석하느냐, 아니면 학교에 나가고 낮 집회에 빠지느냐?’ 둘 중에 하나로 씨름하였다. 담임 목사님도 학교에 가라 하셨고, 여전도사님도 최귀주 집사님도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백 조사님이 사정을 들으시고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야지!”라고 하셨다. 그에게는 이미 성령의 지시가 와 있었다.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없이 답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아직 물어볼 사람이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침 밥상에서 아내의 의사를 물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따르겠습니다.”


학교에 가서 이야기하다 보면 첫날 낮 공부 참석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므로 즉석에서 사표를 써서 인편에 학교로 보내고 바로 교회로 가서 첫날 낮 공부에 무사히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분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처사였고 광증에 빠진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평안을 줄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절실하였고 죽고 사는 문제였으니 학교가 문제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교장 선생이 학교 사친회 이사장이며 그의 장인이 되는 노의중 씨에게 물었다. “한종희 교사의 사표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학교 사정대로 하십시오.” 마음만 먹으면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그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마음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랬다. 교장은 즉시 다른 교사를 발령 내 학급 담임의 공석을 메웠다. 그러나 음악 과목 발표는 구멍을 내고 만 것이다. 교장 선생님도 사표를 수리하기 전이나 후나 그를 보자고 연락하지 않았다. 너무나 기가 막혀 연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표 수리 후에도 다른 교사들 역시 그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가댁에서도 말이 많았을 것이지만 그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미쳤다고 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학교 교사들이나 교장이나 불신자였던 처숙부와 처숙모에게도 한종희 그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부산 본가에서도 전혀 말은 없었지만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 역시 교장이나 교사나 처가댁이나 부산 본가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고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말없이 끊어졌다. 그 후에 그는 모든 사람들을 떠나 깊은 산속 화전민 전도자로 들어갔다. 그의 아내는 말없이 묵묵히 동행하여 주었다. 결혼 전에 약속했던 대로 한 것이다.



한종희와 동명초등학교는 음악으로 이름이 나 있었기에 교장은 그의 음악 발표에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8.15 경축식과 같은 행사에서는 학생들만 2천 명이 넘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었다. 그런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 다른 선생이 나가서 지휘를 맡으면 처음에는 같이 시작했어도 끝에 가서는 2중 3중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가 지휘하면 연습이나 한 듯이 일치하여 끝났다. 졸업식 때에 그가 지휘하여 송별가를 합창하였는데 참석했던 천주교 신부님이 감탄하여 자기네 성당으로 와서 성가대 지휘를 맡아 달라고도 했었다. 2학년을 담임했을 때에는 오후에 중학교에 정기적으로 가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그를 학교의 자랑으로 알고 계셨고 연구 발표회에 기대를 잔뜩 걸고 있었는데 사람이 나타나지도 않고 사표만을 인편에 보냈으니 숨 막힐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었다. 1953년 초 서부교회 부흥회에서 중생하며 경험했던 교훈과, 김해 진영 들판에서 개구리와 메뚜기를 통하여 주셨던 교훈과, 전도서(1:2, 12:1)의 교훈 등으로 하나님이 그에게서 이중삼중으로 받아 놓았던 다짐대로 한종희를 온전한 헌신으로 몰아가신 것이었다. 비로소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력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누가 막으랴!



           “나의 나됨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3. 고암교회 전도인



한종희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마음은 평안을 찾았지만 직장을 잃었다. 그가 직장을 잃은 것은 결혼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니 직장을 잃은 그에게도 큰 문제였지만 교회에 붙들어 매려고 어렵게 결혼을 성사시킨 남천교회도 책임을 느꼈다. 그래서 그 부부를 고암교회로 보냈다.

남천교회는 3km 거리의 고암리에 개척교회를 세우면서 부산 서부교회 정재완 집사님을 청빙하여 사역하게 했었다. 정재완은 본래 목수였는데 15평 정도의 예배당을 지어놓고 부임한지 1년 만에 부산으로 돌아가 개척교회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조 전도사님을 청빙하여 부흥집회를 열어 참석하고 있었으며 부흥회가 끝나면 즉시 고암교회에 부임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 전도사님을 서울로 다시 돌려보내고, 한종희를 고암교회로 보내어 신혼부부의 직장을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조 전도사님은 훗날 강원도 마찰리교회에 부임하게 하였다. 마찰리교회는 제천 남천교회가 지원하여 세운 교회였다.


고암교회에는 큰 과수원을 가진 교인이 있어서 교회 대지로 500여 평을 바쳤고, 그가 부임한 이후에 사택도 과수원 주인이 지어서 교회에 바친 것이었다. 사택은 방 두 칸과 툇마루가 딸린 반듯한 한옥이었다. 중학교에서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 신혼 부부가 전도인으로 부임하니 시골 마을에 활기가 찼고 중학생들이 교회로 몰려 왔다. 교회 이웃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의 아들인 중학생도 초등학생 동생과 함께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였다. 그 학생은 훗날 목사가 되어 동부에서 목회하였다.

하지만 당시 시골의 일반적인 정서를 말해주는 사건이 있다. 전도인이 길을 가면 초등학교 아이들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놀려대며 말한다. “예수를 믿느니 내 손가락을 믿으라” 그때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진화론 일색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그 분을 믿는다는 예수교는 어리석고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초등학생이 길에서 전도자를 놀려대도 누구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참 어두운 곳이었다.  


30리 밖에서 감리교회에 출석하던 젊은 여성도 한 분이 고암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불신자 언니를 방문하였다. 몇 주간 있으면서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불신자였던 언니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두 자매는 둘 다 6·25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였는데 언니는 어린 아이 둘이 딸렸고 동생은 혼자였다. 감리교 교인이던 동생은 용문산에 다닐 정도로 믿음이 뜨거웠는데, 이름이 없어서 언니 지동순을 따라 지순금으로 지어주었다. 지순금이 사는 산골 마을을 30리 길을 걸어서 방문하니 같은 마을에 믿는 사람이 셋이 더 있었다. 이들의 마을에서 1km 떨어져 있는 면 소재지에 감리교회가 있었지만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자주 방문하여 그곳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다가 기도소로 발전하였고, 기도소를 근거로 하여 산중 전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또 제천 남천교회에 출석하는 송종섭이라는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단양군 적선면의 깊은 산 중에 살고 있어서 이 가정을 화전민 전도의 기지로 삼고 단양군 적선면과 제천군 삼곡면에 걸쳐 있는 화전민들을 찾아 전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단양 적선면과 제천 금성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는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고, 양옥은 초등학교와 지서뿐이었다. 한종희는 제천 금성면과 삼곡면, 단양 적선면이 접한 산줄기를 타고 전도했으며 부지런히 걸어서 이틀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에 마주친 걸인


한 겨울, 낮에 옆구리에 담요를 끼고 교회로 기도하러 가는 길이었다. 교회 마당 안에 사택을 짓기 전이라 교인 과수원집 사랑채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을 때이므로 교회로 가자면 50m 정도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교회로 가다가 걸인을 만났다. 걸인은 과수원집 헛간 처마 밑 길가에 앉아서 언 몸을 햇볕에 녹이고 있었다.

걸인은 헛간 벽에 기대어 앉아 그를 치켜 쳐다보고 있고 그는 선 채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런데 그 걸인은 그를 쳐다보다가는 곧 담요로 눈이 가더니 담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고 담요이다. 담요 한 장을 주지 못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즉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담요를 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제천으로 떠날 때에 형수님이 그를 위해서 이불 하나를 만드시고 군인 담요 두 장을 사주셨는데 아내가 결혼 할 때에 이불과 요를 혼수로 장만해 왔다. 그런데 교인 중 한 가정이 겨울에 이불 없이 군용 담요로 아들 딸 아버지 세 식구가 지내는 것을 보고 즉시 형수님이 해주셨던 이불은 주었고, 담요 한 장은 제천에 있을 때에 길가에서 만난 걸인에게 주었다. 이제 그의 아내가 첫 아이 분만을 앞에 두고 있어서 마지막 남은 담요로 애기를 받을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걸인과 마주친 것이다. 결국 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그 담요를 주고 전도하였다. 아무런 반응없이 헤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편했다.

그 시절은 전쟁을 치른 후여서 아무것도 생산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내가 결혼 시에 한복 50벌을 해온 것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결혼 1년 전에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자 즉시 큰 형 준희가 양복 한 벌과 구두를 새로 맞춰 주고 손목시계를 사 주었는데, 그 입던 양복을 입고 신던 구두를 신고 결혼식장에 나갔다. 결혼식 후에야 처가댁에서 해준 새 양복을 비로소 입었다. 처가댁에서 결혼을 끌다가 늦게 허락한 이유도 이같은 그의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14. 바르트신학의 비판의 평생 사역 시작



한종희는 1956년 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산중 전도에 나갈 때 풀지 못하여 고심하던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을 푸는데 평생을 바치기로 뜻을 정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에 더하여 정통신학을 수호하는 사명까지 주신 것이다. 반틸(Cornelius Van Til) 교수와 벌카우어(G. C. Berkouwer) 교수가 쓴 칼 바르트 신학 비평서를 번역서로 읽고, 또 그에 앞서 바르트에 대한 박윤선의 강의를 듣고 논문들을 읽고, 월간지 사상계에 게재했던 김재준, 윤성범, 박봉랑 교수의 논문도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1930-50년대 당시 세계 신학계를 이끌었던 칼 바르트 신학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계의 과제였다. 칼 바르트가 쓴 독일어 교회교의학(Der Kirchliche Dogmatik)이 권수로는 31권이고 분량으로는 9,000페이지나 되니 무슨 수로 다 읽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1957년, 고암교회에 있을 때에 사상계에 게재한 서울대학교 황산덕 교수의 법철학 논문을 읽다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심나게 하는 순간을 겪게 된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여러 권의 책을 불태우고 얼마동안을 쉬었다. 만일 내가 「성경완전무오」를 의심하여 하나님을 불신하면 나는 영원한 저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얼마나 내가 놀랐겠는가! 1949년에 출간한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주석에 박윤선 교수가 쓴 논문 「성경 정경론」이 들어 있었기에 이를 읽으며 의심을 물리치고 안정을 얻었다.


그 후에 다시 칼 바르트 신학과 현대 철학 연구에 몰입하였으나, 지금까지 성령님은 나를 일체의 의심에서 지켜 주셨고 진리 안에 품어 주셨다. 내가 가장 이기기 어려웠던 시험의 순간에 박윤선 교수가 쓴 「성경정경론」을 접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 논문 한 편으로 박윤선은 내 마음을 완전히 점령한 스승이었다. 나는 평생 스승의 품을 잊은 적이 없다. 지금도 내 책장에는 유일하게 그 어른의 사진 액자가 있어 항상 나를 바라보아 주신다. 그 어른의 인자함과 긍휼함이 오늘도 나를 부요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여 준다.

칼 바르트 신학을 연구한지 46년 만인 1998년에 문제의 해결을 보자 즉시 목회에서 은퇴를 선언하고(67세) 연구한 원고를 정리하는데 만 3년이 걸렸다. 2002년에 한국 합동파 총회가「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으로 출간하였다. 김상복 교수는 서평에서 “칼 바르트 신학이 출현한 후로 정통주의 신학에서 바르트 신학을 제대로 비평한 책으로는 한종희 목사의 책이 처음일 것이다.”고 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만한 비평서가 나오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난해한 바르트 신학 연구에 한 평생을 바칠 신학자가 또 나올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한다. 나는 책을 출간 후로는 여러 신학교에 바쁘게 다니며 신학 강좌를 해오고 있다.





15. 군 복무 문제로 1년의 수감 생활



한종희가 고암교회에 부임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에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초등학교 교사는 전시에도 영장이 나오지 않으나 그가 사표를 낸 이후였기에 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영장을 받고도 입대하지 않으니 그는 제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제천에도 법원이 있지만 단독심판이라 청주 법원으로 가게 되었다. 두 판사의 합의 재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수형하였다.



그 당시에는 다 군대를 갔는데 왜 나만 가지 않았는가? 당시 백 조사님의 교훈과 박윤선 교수의 교훈과 어떤 목사님의 교훈에도 입대하지 말라는 교훈은 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다. 그래서 박윤선 교수에게 물었다. “군대 가서 사람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까?” 침묵하시고 끝까지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답을 알 길 없는 나로서는 불안해졌다. ‘만일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인 것이 죄가 되면 어찌 하나!’ 나로서는 죄 되는 길은 갈 수 없었기에 군에 입대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박윤선 교수가 받았던 질문은 질문으로 끝나지 않고 감옥살이로 이어졌으니 답해주지 못한 것이 괴로우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박윤선 스승과의 만남이나 애정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1년의 수감생활을 마치면서 롬13:1절에 의해서 국가의 명령 중에 군복무는 가하다고 해결을 보았다.



1년간 청주 교도소에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제천 남천교회 배집사와 2살 된 큰 아이와 1살 된 둘째 아이를 데리고 청주교도소를 한 번 다녀갔다. 제천 가는 버스 편을 놓치고 청주 시내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아내는 철장 속에 갇혀 지내는 남편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둘째는 백일해를 앓다가 돌전에 죽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부산의 큰 형이 아내의 생활을 돌보아 주며, 두 형이 부산에서 청주 교도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16. 청주교도소와 시기죄



청주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은 한종희에게는 신학의 훈련장이 되었다. 그가 제천 유치장에서 수갑을 차고 청주로 갈 때에 최귀주 집사님은 말씀하시기를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신학을 하고 오라” 고 하셨다. 청주교도소 수감 생활 당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목공일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감 생활 중에 사상범이라 하여 가중처벌을 받아 얼마간 독방 생활을 했다. 사상범은 일체 사람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독방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시간이 많았다. 집에서 성경 주석들과 서적들을 가져와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가 쓴 『영생불사(Immortality)』란 책을 선교사를 통해 미국에서 주문하여 읽고 힘을 얻기도 하였다. 성경의 박윤선 주석과 영어 단권주석도 읽었다. 교도관을 대신하여 수감자를 지도하는 모범수가 매일 그에게 영어 강의를 들었다. 수감자 방은 모범수라도 열 수가 없으므로 밥 주는 창으로 강의를 주고받았으니 말이 죄수이지 선생으로 통하였다.



나는 박윤선의 공관 복음 주석을 읽다가 시기죄를 이기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가 하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다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성공했으면 그 결과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싫어하면 하나님의 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하나님이 망하기를 바라고서야 어떻게 그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잘하도록 소원하고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좋아하고 칭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성품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하여 시기죄를 벗어나게 되었다. 대단한 승리였고 다시없는 기쁨이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너무나 좋아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TV를 보다가도 선한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오게 된다.


나는 하나님이 요청하신 대로 욕심도 버렸다. 욕심을 버리니 삶이 단순해지고 평안해졌다. 가난해도 고생해도, 빼앗기고 쫓겨나도 가진 것으로 감사하게 되니 마음의 평안이 지속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목회하면서 신학교 강의로 한국과 브라질에 출타가 잦았다. 목회하는 사람이 작은 교회를 비워두고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교회에 늘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받은 사례금 전액을 매번 감사 헌금 명목으로 교회에 헌금하였더니 교인들이 목사의 출타와 교수 활동까지도 반기게 되었다. 목사의 외부 활동을 놓고 시험받는 사람이 없고 같이 기뻐하니 또한 마음이 항상 평안하게 되어졌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평안한 이것이 믿는 사람이 누릴 천국이다.


자기로 인하여 다른 이의 평안이 깨지면 자기의 평안 역시 깨어지고 마니, 이웃이나 공동체의 평안을 깨는 자기만의 평안은 평안이 아닌 것이다. 사도들은 서신서를 쓸 때마다 반드시 수신자의 평안을 위해 축원하였다. 평안은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니 하나님과의 사이가 좋고, 남이 잘하고 잘되는 것을 기뻐하고 자랑해주고, 또 겸손함으로 자기를 낮추어 형제를 사랑하여 섬기니 일체의 분쟁에서 벗어나 마음까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어졌다. 지상에서 항상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므로 사도들이 서신서를 쓸 때마다 반드시 수신자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확실히 진리이다. 물론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노라면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박해하여 괴로울 때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이 지라고 명하신 십자가이니 역시 마음은 평안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거역하여 범죄할 때에 평안이 깨진다.


지상에서 이러한 천국이 가능한가? 성경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평안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평화로운 것을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순종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고, 이웃을 사랑하여 먼저 섬기니(빌2:3-4) 이웃과도 분쟁과 경쟁과 다툼이 없이 평화롭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성도가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겸손하여 형제를 섬기면서 살 때에는 반드시 누리는 축복이 평강이다. 그러나 반대로 삶의 목적이 땅에 있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지 않고 이웃과의 관계도 평화롭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은 욕심(세상)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며, 자신의 지체를 죽이라고 하시며,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하신다. 이렇게 사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평강을 누리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하고, 평강이 없으면 즉시 회개하여 평강을 회복해야 한다. 평강이 구원받은 자의 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17. 청주교도소에서의 가중처벌



한종희는 수감 중에 사상범으로 가중처벌을 받아 독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교도소에 수감 중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이었고, 6·25 전쟁 때 공산당에 부역했던 상당수가 형을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 중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교도소에는 목사가 교도관으로 상주하며 사상범들을 교화하였고, 주일이면 정기적으로 모든 수감자들을 강당에 소집하여 예배드렸는데, 청주 시내 목사들을 번갈아 초빙하여 설교하도록 하였다.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모든 죄수들을 주일 예배에 참여하게 하였다. 경범자들 중에서 지도원을 뽑아 죄수들을 지도하게 하였는데, 그 지도원들이 각 방을 돌며 빠짐없이 예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때 예배에 참여할 때에 예배 전에 교도과장이 나와서 ‘우리의 맹세’를 선창하고 따라하게 하였다. ‘우리의 맹세’에는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고’ 하는 구절이 있었다. 예배하러 모여서 누구를 죽이고 부수자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 예배에 배치되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루는 예배에 참여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방에 있었는데 지도원은 그를 강제로 끌고 교도과에 갔다. 예배가 끝나고 지도 담당 목사님이 그를 접견한 후에 교도과장에게 넘기니 교도과장이 그를 심문하고는 가중 처벌을 내려 독방에 가두었다. 독방에 가두면 다른 모든 수감자와 일절 접촉을 끊고 공장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갑자기 사상범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성경과 주석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유진 교수의 구문론(構文論) 등으로 영어 실력도 더 쌓을 수 있었다.


수감생활 1년이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방에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책들이 쌓여 있었기에 차분히 앉아서 이 책 저 책을 번갈아가며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깨달은 것도 많고 다져진 것도 많고 연구가 진척된 것도 컸다. 산중을 돌며 순회 전도할 때에는 먹지 못하고 피로하고 시간도 얻기 어려웠으나 교도소에서는 하루 세 끼 규칙적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건강도 좋아졌다. 물론 독방 수감자에게도 교도관과 함께 매일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건강에도 이상이 없었다.


독방생활은 길지 않았다. 다시 공장에 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저녁을 먹고 나면 취침 전까지는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방에도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조심 없이 말을 하다가 그들 중 한 사람이 교도과에 고발을 한 것이다. 교도과에서는 그를 불러 진위를 알아보려 하였다. 사상범으로 독방까지 다녀온 그였기에 문제가 되려면 크게 문제 될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저녁이면 언제나 종이 뭉텅이를 만들어 귀를 막고 책만 읽었기 때문에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지나갔다.




18. 귀가 후 성화교리 갈등



한종희는 실속 있는 수감생활을 끝내고 1959년 9월에 교도소에서 나와 제천으로 귀가하였는데 고암교회는 비어 있었다. 고암교회는 비워둔 채 교인들은 3km 거리에 있는 제천 남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고암교회는 폐쇄되고 대신 제천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금성면에 교회를 개척하여 부산에서 다시 정재완 전도사님이 와서 사역하고 있었다. 백 목사님과 남천교회 한동희가 의논하여 그는 부산 서부교회에서 지내게 되었다. 형인 한동희가 제천 남천교회로 간 후로는 서부교회에는 이미 백영침 전도사와 백태영 전도사가 백 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우고 있었기에 그는 다만 예배에만 출석하였다. 생활 대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는 제천 처가댁에서 지냈고 그는 부산 큰형님 댁에서 식객으로 지냈다.

그 때에 장모님과 처남 처제는 처숙부님 댁에서 나와 따로 살았기에 일체의 경제적 지원도 없었다. 집은 처숙부 소유이나 큰 본채에는 다른 두 집이 세 들어 살았고 장모님은 처제와 처남과 셋이 달아낸 작은 옆채에서 지냈으며 그의 처자까지 합쳐 다섯 식구가 동거하였다. 처제와 처남은 학생이니 수입이 없었고 장모님이 과수원에서 날품을 팔아 생활하였다. 그가 교도소에서 나오니 큰 형님도 일체의 지원을 끊었고, 그의 아내는 뜨개질을 하며 얼마간의 수입을 만들었다.  



성화교리로 갈등하다


하지만 한종희의 출옥 후 가장 큰 어려움은 신앙문제였다. 그가 과거에는 듣지 못한 백영희의 성화 교리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에게는 그 말씀이 그만큼 충격이었고 혼란스러웠다.


수감 전에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던 ‘성화구원’ 교리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백영희 목사님 산상 집회에 빠진 적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반드시 필기를 했었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나온 후 설교를 들으니 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미 칼빈주의의 구원관에 확고히 서 있었던 나로서는 기존의 교리와 반대되는 구원관은 충격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목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백 목사님께 직접 물었으나 답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 말씀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만 하셨다.


그렇게 2개월을 지내다가 백 목사님이 거창에 교회를 개척해 보라고 하셨다. 제천에 있는 아내와 두 살 난 아이를 데리고 1959년 12월에 거창으로 갔다. 거창에 있을 때 백 목사님이 나를 부르시고 백영희 자신이 유일하게 참석하는 집회라며 김현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해 보라고 하셨다. 이전에는 김현봉 목사님을 몰랐으나 백 목사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처음 말씀하신 분이 김현봉 목사님이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백 목사님이 나에게 김현봉 목사님을 소개하신 것은 성화교리의 의문을 김현봉 목사님에게서 풀어보라는 뜻이었다. 김현봉 목사님의 집회는 해마다 두 번 관악산과 삼각산에서 여름과 겨울에 있었는데 2년간(1959-1960) 4회 참석하였다.


김현봉은 거듭난 새사람을 거듭난 영혼으로 해석하여 “거듭난 영혼은 죄범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나 여기서 더 발전시키려고 고심하지 않았다. 김현봉은 범죄의 실체가 영혼이 아닌 다른 무엇임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백영희는 김현봉의 주장을 수용하여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죄를 범하는 그 실체를 찾아내려고 여러 가지로 교훈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여러 차례 질문했지만 한 번도 답에 응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 보자고만 하다가 김현봉을 소개한 것이다.



한종희 목사님의 이 회고는 그가 백영희 신앙 노선을 떠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할 때마다 늘 그 출발 순간으로 제시 되고 있으며, 이후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가 결별하는 배경이 된다.


19. 거창 창동교회 개척



한종희가 두 살 난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거창에 갔을 때는 이운길 집사 자택 뒷마당에 친 천막이 예배 처소였고, 사택은 집사님 자택 뒷방이었는데 작은 부엌이 딸린 한 칸 방이었다. 예배당을 지으려고 온 교인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다가 그는 서울의 김현봉의 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김현봉 목사는 삭발이었는데 김현봉의 집회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도 머리를 완전히 삭발하고 강단에 서게 되었다. 일반 교인이 보기에 흉하였든지 연세 많은 강 집사님이 나서서 자신이 예배를 직접 인도했다. 이 일 때문에 1960년 12월 마지막 주일을 인도하고 교회를 사임했다. 이후 제천 금성 개척지로 갔는데 부임하고 만 1년 만에 거창을 떠난 것이다.


거창 창동교회는 교인이 장년과 유년주일학생 합해서 30명 정도였는데, 목회자 부부, 이운길 집사님 내외와 딸과 어린 아들 둘, 이순길 집사님 내외와 강 집사님 내외, 혼자 출석하던 여 집사님 한 분, 남자 고등학생 한 사람 그리고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이 전부였다.

그는 이운길이 원장으로 있던 양혜원을 지도하였다. 양혜원은 나병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였다. 가끔 환자의 집을 방문하였다. 한번은 한종희가 나환자 중 결핵으로 죽은 시신이 있는 방에 혼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다른 나환자들조차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당시 나환자가 그의 집을 방문하면 밥상에 밥을 차려 대접하였다. 나환자 결핵환자를 가리지 않았는데 믿는 자 중에서 병든 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라고 믿었고 가족의 병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부분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전권에 가족을 맡겼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가 1954년에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남천교회에서 교회에 나오는 중학생 10여명을 지도하였는데, 결혼한 지 4개월 후에 학교를 사임하고 제천읍에서 3km 지점에 있는 개척지 고암교회에서 전도할 때에(1956) 내가 남천교회에서 지도하던 중학생 중 하나가 결핵으로 학교에 갈 수 없어서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생활하게 하였다. 마침 방이 두 칸이라 가능했으며 아내가 끼니마다 밥을 해 주어 함께 먹고 살았다. 그 중학생은 완쾌되어 다시 학교에 갔고 청주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이민하여 지금은 필라델피아에서 장로로써 교회를 섬기고 있다.


말씀에 옳다고 생각을 하면 그대로 실행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당시의 신앙들, 한종희 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유일의 경우는 아니나 그렇다고 쉽게 발견하기는 어려운 신앙이었다.


20. 제천 금성 개척지로 이동



경남 제일 오지인 거창에서 충북의 이름 있는 오지인 제천의 금성으로 이동한 것은 거창의 전임 교회에서 교회의 얼굴인 전도사가 머리를 완전히 깎은 탓이었다. 1961년 1월 첫 주간에 거창에서 제천 금성 개척지로 이동하였다. 금성은 그가 1958년 10월에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고암교회에 있으면서 개척 전도하던 지역이었다.


윤창렬 목사는 금성출신 목사 제 1호로써 군산에서 목회 중인데, 2007년 당시로 금성교회 출신으로 목사 안수 받은 사람이 14명이라고 윤창렬 목사에게 들었다. 윤창렬 목사는 내가 1964년에 대구에 불러내 고등성경학교와 대구신학교와 4년제 대학을 마친 후에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목사이다.


고암교회 담임 목회자였던 한종희가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자 교인들은 3km 거리의 남천교회로 출석을 했다. 원래 남천교회에서 개척한 교회였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거리 문제가 있어 다시 남천교회가 교회로부터 8km 떨어진 금성에 정재완 전도사님를 부산에서 불러 금성교회를 개척하였다. 정재완은 1년 동안 있으면서 예배 처소를 마련했다. 본래 목수였던 전도사는 마을 뒤 외진 곳에 담배 말리던 헛간이 비어 있어, 이 헛간을 헐값에 사서 바닥은 세멘을 하고 가마니를 깔았다. 헛간 옆구리에 작은 방 한 칸을 겨우 달아내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한종희가 도착한 날에 정재완은 부산으로 떠났는데, 이사 짐을 실은 두 집 차가 길에서 마주쳐 지나쳤다. 물론 떠나는 정재완과 그는 서부교회 교인으로 같이 지냈던 사이라 친숙한 관계였다.  


교인은 노인 부부와 한 과부와 박해 받으며 출석하는 한 여자가 전부였다. 전도 구역 안에는 작은 두 마을이 있었고 산간에는 한 집 두 집씩 흩어져 있었다. 교회가 있던 마을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고 다른 마을은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어린 아이 하나만 출석해도 제사 지내지 않는 교회라고 하여 온 집안이 반대하고 박해하였다. 그러나 이웃에 있던 감리교회는 제사에 관해서는 무관하여 오래 전에 들어와 있었지만 상당한 교인들을 확보하였고 반대나 박해도 받지 않았다.



활기 넘쳤던 금성교회의 출발


한종희가 예전에 제천의 동명초등학교에서 가르치던 일이 금성 지역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금성에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려면 제천읍으로 가야 했는데 이기재라는 동네 청년이 제천중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의 처남과는 중학교 동기생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통해서 금성 지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기재와 함께 김 씨 집안과 박 씨 집안의 청년들 중에서 한 둘씩 교회에 출석하면서 금성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던 청년들이 모여 교회 나무를 할 때에는 그가 직접 지게를 지고 같이 나무를 하였고, 제천읍에서 짐을 가져올 때에도 청년들에게 시키지 않고 차에서 교회까지 500m의 거리를 그가 직접 지게로 저 날랐다. 비록 예배당 바닥은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렸지만 매우 활기찬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있던 마을인 박 씨 집안에서는 청년들과 초등학생들이 교회에 출석해도 막지 않았다. 박 씨 집안에 시집온 새댁이 약방을 열었는데, 마침 그 약방 주인이 그의 아내와 중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청년들과 아이들이 교회에 출석해도 박 씨 집안은 더 이상 막지 않은 것이었다.


금성교회에서 목회하던 때의 일이다. 남천교회가 매월 만 환씩 금성교회에 목회자의 생활비로 지원하다가 1961년 1월 이후로 신앙 입장을 달리한 것 때문에 지원을 끊었다. 전혀 먹을 것이 없어 감자도 떨어지고 간장 된장도 없이 극한 가난 속에서 고생할 때가 있었는데, 교회에 출석하던 초등학생들과 청년들의 입을 통해서 이 소문이 마을에 퍼져나갔다. 한종희는 금성에 오기 4년 전에 학교를 그만 둔 사건으로 처가와 본가와도 멀어지면서 왕래도 끊어졌지만 그 역시 처가와 본가에 일체 도움을 청할 마음이 없었기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당시는 혁명 정부여서 마을마다 극빈자 두 가정을 골라 춘곤기에 무상으로 밀가루 두 포대씩 나누어 주었는데, 마을 구장이 그를 극빈자 명단에 올려 매월 밀가루 2 포대씩을 받게 되어 그것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동원하여 주신 긴급구호였다. 이래저래 그와 금성교회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소문을 낳는 교회가 되었다.

금성교회에서 500m 거리에 있던 초등학교에 미혼남이었던 6학년 담임선생님이 그 교회의 소식을 듣고는 가마니 깔고 모이는 예배에 함께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소문은 깊은 산중 마을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이야기거리가 되어 퍼져나갔다.


제천 지역은 옛날 선교사들이 선교 구역을 나눌 때 감리교 구역으로 이미 1905년에 감리교회가 세워져서 큰 교회가 되었다. 그가 제천 남천교회에 갔을 당시 1954년에 여름방학에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귀가하여 특별찬양을 하려는데 마침 반주자가 출타 중이라 그에게 부탁하여 반주를 하기도 했다. 감리교회에서도 그는 음악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부산에서 주간지 영문판 잡지인 ‘TIME’지가 그에게 매주간 학교로 배달되었는데 아직 시골이었던 제천에서는 그것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가 결혼할 당시 처가댁 어른이 제천 자유당 당수였고, 충북 도의회 의장이었고, 그가 근무하던 초등학교 이사장이었으니 시골에서는 이 모든 것이 소문거리였던 것이다.


인천 숭의교회 이호문 목사가 1985년에 미국 중부도시 덴버에 부흥회 왔을 때에 같이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천 이야기를 하는 중 이호문 목사가 내게 물었다. 자기는 제천읍내 동부감리교회 목사의 아들이었고 당시 중학생이었다고 하며 “당시에 장로교회에 영어 잘한다고 소문났던 그 한 선생이 당신이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결핵 환자를 돌보았던 일


1962년 겨울에 이인재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금성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금성교회가 문을 연(1958) 이후 처음 열리는 부흥회이었다. 그 부흥회에 결핵환자 3명을 참석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전쟁을 치른 직후라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매우 힘든 때였다. 가난한 살림에 결핵에 걸리면 거의 다 죽었다. 약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약값이 너무나 비싸서 시골에서는 그냥 죽기만을 기다리지 약 먹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복음을 받고 은혜를 받아 천국으로 가라는 뜻에서 사경에 헤매고 있는 세 사람을 참석하게 한 것이었다.

30리 밖에서 데려온 38세의 김창숙 씨는 전혀 활동이 불가능하여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 농사짓고 살림하였으며, 부인은 건넛방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혼자 지냈다. 또 한 사람은 22살의 불신자 청년으로 험준한 산 고개를 넘어 살고 있었는데 죽음을 앞두고 있는 청년이었다. 또 한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여자 아이였는데, 너무나 말라서 허리가 굽고 걸을 수조차 없어서 당시 교회 청년이던 윤창렬이 산 고개를 넘어 지게로 져다가 한 주간 참석 시켰다.

제천은 고산지대라 눈이 와서 녹지 않았으므로 부흥회를 하는 동안은 왕래할 수 없어 세 환자가 다 사택에서 함께 숙식을 해야만 했다. 사택으로는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담배 창고 벽에 붙여 달아낸 툇마루도 없는 지극히 작은 방이었다. 김창숙씨와 여자아이는 사모님과 3 남매와 한 주간을 한 방에서 같이 지냈다. 한종희와 22살의 청년은 이웃집 불신자의 사랑방을 빌려 한 주간 한 방에서 같이 지냈다. 식사는 사택에서 사택 식구와 다 같이 함께 했다. 집회는 화요일 새벽에 시작하여 주일 밤 집회로 끝났는데 강사의 침식은 교인들이 담당했다.


38세의 김창숙씨와 22세의 청년은 부흥회 후에 곧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여학생은 기적같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 6학년 여학생의 학급 담임이 금성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기에 담임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학우들이 돈을 얼마간 모금하였다. 한종희는 이 모금한 돈으로 매일같이 산 고개를 넘어 왕래하며 제천읍 약방에서 포도당액을 사다가 주사를 놓아 주었다. 또 제천 천주교회 평신도 회장이었던 약사(부인은 개업의사)에게 부탁하여 미국에서 무상으로 오는 종합비타민을 얻어다 먹였다. 그가 수년전 동명초등학교 교사일 때에 초등학교 2학년이던 회장의 딸을 그가 담임하였던 인연으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결국 살아났다. 후에 결혼하여 장로 부인이 되었고 지금도 제천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아들은 목사가 되어 대구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부흥회 당시에는 세 환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믿어 이미 구원을 얻은 가족의 육신보다는 먼저 챙겨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가족의 목숨은 하나님께 맡겼다. “데려가시든지 살리시든지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이처럼 목숨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일은 그 전이나 그 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늘 하나님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다. 후에 도청 보건과에서 시골 면 소재지를 자동차로 돌면서 결핵환자 퇴치를 위해 X-Ray 사진을 1년에 1회 무상으로 찍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그의 가족들이 사진을 찍어보았으나 다 건강하였다.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었다. 기적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더욱 순종하게 되었다.


혹시 위생관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어머님이 옛날 분이라 공부도 못해서 한글 편지도 남에게 시켜 쓰게 하고 읽게 하였으니 위생관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집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1km 남직하기 때문에 자주 생선을 장보셨는데 헐한 맛에 가끔 한물 간 것을 사오는 때가 있었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파리가 않았던 음식은 떼어내 버리고 먹었다.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행한 것이다. 누구보다 위생관념에 철저했다.





21. 공회와 한종희의 분리 및 결과  



매 월요일이면 제천 남천교회를 맡고 있던 동희와 금성교회의 종희 형제는 금성교회 근처의 산굴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 연구하며 지냈다. 1961년 1월, 한종희는 창세기 3장을 깨닫고, 동희에게 아담의 죄로부터 구원 받은 자의 죄까지 설명하였다.


『우리가 구원 받으면, 로마서 8장이 말하는 대로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에게 종살이 합니다. 사도 바울이 중생 후로는 성령님에게 종살이 하였는데(롬6:17-18,22; 롬8:1-9), 중생한 바울이 어찌 의는 행하여 보지 못하고 다만 죄만 지었다(롬7:14-23)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생애 마지막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바울이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죄만 짓고 있다가 비로소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겨우 구원받았다(롬7:24-25)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은 신령한 줄 알았기 때문에(롬7:14)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애쓰다가(롬10:1-3) 실패한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사죄함과 구원을 받았던(롬7:24-25) 옛적 일을 현재에서 재현하다 보니 현재동사로 말한 것입니다(롬7:14-25).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이 신령한 줄(롬7:14) 알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애써 보았지만(롬10:1-3), 육체에 속하여 죄만 지었기 때문에”(7:14-24)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죄함과 구원을 받았기에 감사한 것입니다.”(7:25절) 』

“동생 큰일 났네, 우리가 지금 공회(公會) 안에 있고, 백 목사님이 중생한 영혼은 다시는 죄 범하지 아니한다고 성화교리를 열어가고 있는데, 동생은 백 목사님을 틀렸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거듭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범죄 한다고 하니 우리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동희는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어 본인이 목회하던 남천교회에 가서 즉시 한종희를 강사로 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는 집회를 마치고 그길로 부산으로 내려가서 백영희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중생한 영혼이 죄 범하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면, 중생 후에 범한 죄를 중생한 영혼이 책임지지 아니할 것임으로 우리가 이단이 됩니다.”


백 목사님은 책망하시며 그를 돌려보냈다.


이후 한종희는 백 목사님이 공회에서 이단자로 쫓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목사님이 반대했던 바로 그 백영희의 성화 교리는 한 목사님과 같은 중생자는 지옥을 갈 수 없고 어떤 죄를 지어도 반드시 천국을 간다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일단 한 목사님의 입장은 그대로 인용하여 배려한다.


두 달 후에 서울 청량리교회에서 백영희의 집회가 있었는데, 남천교회의 한동희와 20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였다. 집회에서 백영희는 “중생 후에도 중생한 영혼이 범죄한다”고 주장하는 한종희는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이단과 동질의 이단으로서 지옥 간다고 선포하였고, 그러므로 한종희와 일체의 교제를 끊을 것과 인사도 나누지 말 것을 교인들에게 명하였다. 한동희는 청량리의 집회에서 돌아오자 자신이 시무하던 제천 남천교회 교인들에게 한종희는 지옥 갈 이단자이니 인사도 하지 말 것을 예배시간에 선포하였으며, 남천교회는 매월 지원하던 금성교회의 교역자 사례비를 즉시 끊었다. 남천교회는 교회를 설립하신 최귀주 집사와 그를 따르는 집사들이 전적으로 백 목사님의 지도와 지시를 좇는 교회였다. 한동희는 행정적인 실권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선 백 목사님의 지시대로 명령을 선언한 것이었다.


지금 경기도 양구에 생존한 나의 사촌 처제 되는 노정희 집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한동희는 노정희에게 남천교회에 출석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만일 출석하면 교회 앞에서 한종희와 동일한 이단이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으니 출석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노정희는 그 때부터 남천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숙대를 다니다 신앙의 문제로 중퇴하고 최귀주 집사의 오른 팔이 되어 교회만 섬겼다. 그러기 때문에 집에서도 박해를 받았다.



그 후 한동희는 한종희를 지지하여 1963년 봄에 남천교회와 공회를 떠나 부산에 있는 합동측 교회를 담임하였다. 김성환 목사님과 김의환 목사님의 주선으로 서울 동도교회 최 훈 목사님의 부목으로 시무하다가 1988년 1월 61세에 뇌경색으로 소천하여 동도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 가족들은 현재도 동도교회를 섬기고 있다.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백영희 목사님의 교리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 이유는 성화교리가 틀렸어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의 대속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의 대속과 내세를 믿지 않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와 복음주의라고 자칭하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과 내세를 믿지 않는 다음 목사들과 신학자들(Billy Graham, C. S. Lewis, James I Packer, John Stott, Harold J. Ockenga, Carl Henry, Edward Carnell, John Woodbridge, 김재준, 조향록, 곽선희, 김세윤 등)은 내세와 영생을 불신하기 때문에 내세의 영생을 받지 못한다.



1961년 봄에 한종희는 백영희로부터 분리 된 후에는 김현봉의 집회나 백영희의 집회에 가지 않았다. 1962년 여름에 김현봉은 허영희 전도사를 통해 집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한종희에게 보내어 만났다.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느냐고 물으셨다. “고쳤으면 진작 말씀 드렸지요”라고 답하고, 헤어진 후로는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김현봉은 만났을 때에 그 질문 외에 다른 말씀은 전혀 없었고 헤어진 후로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집회에 참석하라는 김현봉의 연락을 받고 갔었는데, 하루는 쉬는 시간에 김현봉은 산 바위 위에 서서 한종희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온 골짜기에 그의 이름이 쩡쩡 울려 퍼졌다. 그가 집회에 갈 때마다 김현봉은 어김없이 왕복 기차표 값을 주었다. 가난한 자의 시정을 살펴주시는 자상하신 어른이었다. 사랑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한 번은 주무시는 방에 한종희가 들어갔더니 송판 벽에 신문지로 도배한 그대로였다고 한다.


허영희 여전도사는 내가 제천 동명초등학교 교사일 때에 제천 의림초등학교 교사였으며 내가 몸담고 있던 남천교회에 출석하였다. 제천여고 출신으로 나의 아내의 선배였다. 신앙의 문제로 초등학교를 사직하고 남천교회에 있다가 내가 거창 창동교회에 있을 때에 함께 교회를 섬기겠다고 찾아왔었다. 나이가 나와 한 살 차이뿐이고 미혼으로 같이 지내는 것이 조심이 되어 서울 김현봉 목사님에게 안내하였다. 김현봉 목사님은 즉시 허 선생을 유급 전도사로 채용하였으며 지금도 김현봉 목사님의 명맥을 잇고 있는 서울 염천교회에 몸담고 있다.



한종희는 공회에서 분리 된 후 박윤선의 개혁신학교에 간 것이 1961년 가을이었다. 그때에 개혁 신학교에는 백영희의 지도를 받는 공회 전도사들이 5명이 더 있었다(백영익, 백태영, 백영침, 김병도, 한동희).

한종희는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에 머리를 박박 깎고 검정색 작업복을 입은 데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니 시골 농군만도 못해 보였다. 나이는 30이었지만 왜소한 키에 산중 전도로 먹지도 못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행색이 걸인에 가까웠다.

신학교 기숙사가 박윤선이 담임하고 있던 동산교회 예배당 건물 안에 있어서 신학생들이 돌아가며 동산교회 새벽기도를 인도하였으나 그는 세우지 않았다. 한번은 새벽기도 후에 보니 그의 곁에 헌 두루마기와 헌 한복이 놓여 있었다. 교인 중 어느 분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고 간 것이다. 비록 헌 옷이었지만 그가 입은 옷보다는 나았다. 그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귀가했다.


한번은 변영태 전 국무총리의 부인을 서울 시내버스 안에서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반색하시고 지갑을 털어 있는 돈을 다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현재 자기가 가진 전부이니 받아쓰라’고 하셨다. 물론 그의 몰골이 안타깝기도 했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1950년 전쟁 시에 부산으로 피난 와서 서부교회에서 함께 지낼 때에 그에게서 받았던 인상이 컸던 탓이었을 것이다. 당시 20세로서 주일학교에서 그 분의 아들을 가르쳤고 장년 주일예배 시에는 회중들 앞에 홀로 서서 예배 찬양을 인도하였는데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부인은 다다미 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리면서 그의 뜨거웠던 열성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교의 과목 중에 설교학 시과목이 있어서 설교 실습으로 다른 신학생들 앞에서 설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가 설교할 차례가 되었다. 성경 출20:1을 본문 삼아 설교하였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계명을 지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십계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이것이 그날 설교 내용이었다. 원래는 학생들만 듣는 설교였으나 그 날에는 동산교회 설립자들(우경신 여전도사, 이능전 집사, 김 집사, 최 집사)과 두 교수(박윤선 김진홍)의 부인들이 출석하여 함께 들었다. 박윤선 교장의 이화주 사모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 학생이었으니 그를 익히 알고 있기에 동산교회 설립자들에게 사전 설명이 있었던 것이다. 5년간 산중 전도를 하면서 머리는 밀고 고무신을 신고 검정색 작업복을 입고 거지 행색을 한 시골뜨기 신학생이 서울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였겠지만 1947년부터 14년 동안 죽 지켜본 박윤선과 이화주 사모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교에 대한 반응이 썩 좋아서 동산교회 설립자들은 즉시 동산교회 새벽기도는 한종희만 시켜달라고 박윤선 담임목사에게 청하였고, 갑자기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던 모든 전도사들을 제치고 동산교회 새벽기도회 전임 설교자가 되었다.


한 주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서 학교 분위기가 발칵 뒤집혔다. 지옥 갈 것이라던 이단자가 교장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전임 설교자가 된 것도 문제지만, 기숙사의 학생들이 다 갑자기 설교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윤선 교장은 다급하게 나를 자택으로 호출하였다. 식모가 가져온 쪽지에 적힌 글 문구가 싸늘했다. 어찌나 싸늘했던지 지금도 그 문구가 내 눈 앞에 선하다. 쪽지에 적힌 글은 다음 한 줄 뿐이었고, 아무것도 더는 쓰인 것이 없었다.


‘전략, 한종희 전도사는 즉시 나의 집으로 오시오.’


박윤선 교장에게도 당시의 상황이 급박한 상황이었고 충격적인 상황이었음이 분명했다. 그 때의 사택은 서대문에서 독립문을 지나 홍제동에 있었다. 갔더니 동산교회 설립자들이 다 와 있었다. 우경신 여전도사와 세 분 집사들과 두 교수의 부인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나의 신앙을 조사하는 심문이 있었다. 심문 후에 나를 잠시 내보내고 회의한 후 다시 불러 하시는 말씀이 이 후로는 새벽기도회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설교를 하지 말라는 말뿐이고 전혀 정황설명이나 다른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참으로 궁금하였다. 나중에 동산교회 설립에 주역이었던 이능전 집사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한종희 전도사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전도사들이 항의하여 부득이 취해진 처사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한종희가 교장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설교하게 된 것은 공회의 전도사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나의 이단문제는 공회에서만 문제가 되었고 밖에는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때라 두 교수(박윤선, 김진홍)는 물론이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내가 이단자로 정죄 받았을 때에 생각하기를 신학교도 거치지 못한 터에 교리를 거론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신학교 졸업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지냈었다.

그러나 백영희의 제자들이 한종희를 이단자로 고발했기 때문에 나를 소환하여 신문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박윤선 목사님이 문제가 된 성화교리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진홍 교수의 생활비를 공회의 교회가 지원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했다. 김진홍 교수도 해방 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셨던 교수였다.

내가 1961년 가을 학기에 동산교회의 새벽기도 전임 설교자가 되었다가 중지당한 다음 방학하고 집에 있을 때에 “연락이 있을 때까지는 신학교에 오지 말라”는 무기정학의 통지를 받았다. 내가 백영희 목사님으로부터 지옥 갈 이단자로 정죄당한 후로 붙잡고 있던 구원 줄이 끊어진 셈이라 그 때의 마음은 참담하였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박윤선과 이인재와 백영희는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이 세 분 중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고 벗어날 마음도 없었다. 빨리 로마서 7장 주석을 써서 박윤선 교수에게 보여 문제의 교리를 바로 세우고 이단도 면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산 중에서 원고지도 구할 길이 없었고, 아직은 헬라어도 배우지 못한 때라 주석을 쓰는 일도 막막하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매이천(J. Gresham Machen)이 쓴 영문판 헬라어 문법책을 부산 칼빈사(고신대학교 서점)에서 구하여 3개월 걸려 독파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출판사 편집부에 근무중이던 이동성 친구에게 말해서 원고지 1,000매를 구했다. 로마서 7-8장의 주석을 450매에 담았다. 헬라어 준비와 주석을 완성하는데는 8개월이 걸린 셈이다.

이런 작업을 1962년 여름까지 완성하여 박윤선 교수에게 보냈으나 한 달 후에 회답 없이 원고지만 돌아왔다. 고신 출신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박윤선 교수가 교장인 개혁신학교에 부임하려 했다가 강능 관동대학(TEAM선교부가 운영) 교수로 와 있던 강진선 교수가 원고를 읽고 즉시 박윤선 교수에게 보내어 영음사에서 출판할 것을 권하였고, 다시 부산 고려신학교 조직신학 담당자였던 이상근 교수(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에게 보냈더니 만나자고 하여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만났다. 이상근 교수는 소리 질러 말하기를, “거듭난 영혼이 범죄치 않고, 무엇이 범죄하느냐?”고 하여, 나의 주장을 강변하셨다.


내가 개혁신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동산교회를 설립하신 고응진 장로(이능전 집사의 남편)의 권유로 1962년 가을 학기에 총신에 편입하여 한 학기 동안 박형룡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었는데, 개혁신학교에서 다시 등교하라는 연락이 있어 1963년 봄에 등교하였더니 박윤선 교장은 나를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동거하게 하셨고 비서로서 교장 개인 편지도 읽고 써서 보내게 맡기셨다. 장자 춘호와 동배인 제자를 다시 찾으신 것이다.

공회에 소속한 전도사들은 한종희가 무기정학을 당함으로서 다시는 개혁신학교에 오지 못할 것으로 알았는데, 두 학기를 지나고 다시 와서 공부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박윤선 교장 자택에서 먹고 자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목격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다시 학교 분위기는 소란스러워졌고, 한종희를 신학교에서 내 보내라는 소리가 교장에게 빗발쳤다. 어느 날 박윤선 교장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켜 명신홍 교수에게서 화란어 주석을 빌려다 드렸다. 그 이튿날 박윤선 교장이 아침 첫 시간 강의 전에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여기에 누구든 한종희가 이단이면 나와서 말해 보라고 감정 섞인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사건이 1963년 봄에 있었는데 성화교리의 시비가 이것으로 끝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나를 신학교에서 추방하려는 공회 전도사들의 시위는 부산 총신에서 다시 한 번 더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다. 세 번째는 공회의 전도사들이 부산총신에서 공부할 때에 박윤선 교장에게 한종희를 신학교에서 축출할 것을 호소할 때였다(1965년 봄학기). 박윤선 교장이 담당과목인 계시록 학기말 시험을 치르던 자리에서 성화교리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거듭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한다고 하였고,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는 교리는 틀린 교리라고 선포하였다.

박윤선 교장이 1965년 5월경 봄학기말 요한계시록 시험문제를 출제한 후 나를 불러 밖으로 나가 쪽지를 주시며 교정을 보라고 하여 교정을 보아 드렸더니 시험 치른 후에 그 자리에서 발표하였다. 그 쪽지에 적힌 내용은 “거듭난 후에는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는 잘못이라”는 것이었다(박윤선, 요일주석 증보증정판 3:9의 특주, p. 357-363, 1965.6).


1965년 봄 학기에 있었던 이 사건 이후로 백영희 목사님은 거듭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한다고 주장하는 두 목사님(박윤선, 이인재)와 단절하였고, 같은 시기에 이인재 목사님은 동일한 교리 문제로 대구 동성로교회에서 추방당했다. 동성로교회는, 이인재 목사님이 고신파 경북노회 소속인 성남교회에서 반고소 주장으로 추방된 후에, 이인재 목사님이 친히 개척한 교회였으나 교회 주동인 우동팔 장로님과 장로의 사위되는 신도관 의사가 백영희 목사님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추방당한 것이다. 신도관 의사는 나의 형 한동희 전도사의 신앙의 동지였다.





22. 경기도 성환교회의 교역자 청빙



1962년 12월, 한종희는 경기도 성환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했다. 이능전 집사님이 소개하였고 이능전 자신도 부흥회에 참석하여 시종 자리를 같이 했었다. 성환교회는 이능전의 친정 식구들이 주동이 되어 섬기는 교회였다. 오라버니는 공장을 경영하였고, 언니는 과수원을 경영하였고, 여동생 남편은 의사로서 개원 중이었다. 통합 측에 속한 교회였으나 담임 목사가 막 떠나 비어 있었으며 합동파로 넘어오려는 찰나에 그가 간 것이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 한종희더러 담임 교역자로 부임해 달라고 하였다. 예배당과 유치원 건물이 별도로 갖추어진 교회였고 경부선이 통과하여 신학교 다니기도 좋았다. 경제적인 빈곤과 고생도 벗어날 수 있는 교회였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즉시 말씀하셨다. “너의 일터는 여기가 아니고 제천 금성이다. 성환교회는 올 목사들이 많지만 금성은 네가 떠나면 올 사람이 없다.” 그래도 이동할 마음이 완전히 지워지지를 않아서 기도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귀가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분명하였다. “너의 일터는 성환이 아니고 금성이다.” 부임하면 가족들의 고생은 끝날 것이고 신학교를 계속하는 일도 쉬워지겠지만 성령님께서 허락지 않아 그는 결국 가지 못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기차비가 없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갔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그의 신앙생활을 따르던 사촌 처제 노정희가 주일 강단을 대신 지켰다. 숙명여대에 다니던 사촌 처제 노정희가 신앙문제로 학교를 휴학하고 제천 집에 있었기에 20리 길을 와서 주일 강단을 대신 지켰다. 노정희는 그의 신앙생활을 따랐으며, 후에 그의 중매로 방세호와 결혼하였다. 남편 방세호는 서울 공대 출신으로 제일제당 공장장을 거쳐 이사로 은퇴하였고, 서울 화성교회(장경재 목사) 장로였다가 지금은 경기도 양구 시골에서 살고 있다.  



23. 시골의 전도생활



한종희는 전도자가 전도를 받는 자들에게 맞추어 생활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다. 전도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멸망 길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므로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전도자는 마땅히 전도를 받는 자들에게 맞추어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1956년 5월에 결혼하고 9월에 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산중 전도를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가 25살이었고 그의 아내 나이가 22살이었다. 한참 예쁘게 꾸미고 싶을 나이였으나 산중 전도할 시절에 그의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결혼할 때에 가져온 화장품도 사용하지 않았고 여름에 파라솔도 사용하지 않았다.


만일 화장하고 파라솔을 들고 다녔다면 논과 밭에서 뙤약볕을 쬐며 일하던 농부들을 괴롭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저들은 무슨 팔자가 저렇게도 늘어져서 두 부부가 짝을 지어 유람이나 다니는가!”  신세 한탄을 하며 스스로 더 고통에 빠졌을 것이다. 남을 괴롭히는 것은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는 것이고 또한 전도 받을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종희가 금성에서 산중 전도에 들어갈 때는 산중 사람들은 겨울철에도 옷이 형편없었다. 전쟁이 휴전된 것이 1953년이니 산중 사람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산중 사람들은 옷이 없어서 거지처럼 겨울을 보냈다. 더욱 예배 처소는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는데 겨울이라도 난로 하나 없었다. 그런 교인들에게 그의 아내는 옷들을 다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할 때에 친정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옷이 50벌이었지만, 두 형수에게 옷으로 선물하였고, 헌금할 때나 물건을 구입할 때에도 그 옷을 팔아서 사용했고 금성에서 겨울철을 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진 것이 모두 동났다. 그 후로는 옷 없이 어렵게 살았다. 처가댁이나 본가와는 보이지 않는 담이 쳐져 있어서 왕래가 없었고 외면하였으니 도울 리가 없었다. 두 부부의 행보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좋을 때도 아니었다.









제 3 장.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와의 관계


박윤선과 신학교 (고신, 총신, 합신)






24. 박윤선과 개혁신학교

25.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의

26. 이인재와 한종희

27. 박윤선과 이인재, 그리고 한종희

28. 박윤선 화란유학의 중도 포기

29. 고신 교단의 환원과 박윤선

30. 총신, 합신과 박윤선

24. 박윤선과 개혁신학교



1957년, 고신에서 박윤선을 밀어낼 때에 경기노회가 제8회 고신총회에 행정보류까지 단행하면서 박윤선과 반고소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고신총회는 교단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서 박윤선을 황급히 다시 재영입 하였다. 하지만 박윤선은 그 필요성이 다하게 되자 다시 고신에서 제거를 당했으니 1960년에 고려신학교 이사회가 박윤선에게 교장 및 교수직 사면 통보를 했다. 그 통보를 받고 박윤선은 동래 금정산 산자락에 고독하게 지내고 있었다.

당시 고신 교단은 송상석과 한상동이 하나가 되어 반고소자들을 처단했고 그 교권이 무서워 아무도 박윤선을 찾아오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이재만 목사님만 박윤선의 생활을 도왔다. 평양신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방지일 목사님은 통합 교단에 몸을 담고 있어 행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박윤선의 소식을 접하고 금정산을 찾아왔다. 외로운 시절의 박윤선에게는 친구 방지일의 방문이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서울 내수동교회를 담임하던 홍근섭 목사님을 시켜 박윤선 목사님을 위하여 동산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홍 목사는 6·25 전쟁 시에 이북에서 피난 와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박윤선의 제자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홍근섭을 가리켜 현대판 다니엘이라고 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신앙 때문에 수없이 박해를 받기도 했다.


홍근섭 목사님이 서울 삼각산 산상집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였는데, 강신명 목사님이 담임했던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내수동교회로 이적하려고 하자 홍근섭은 박윤선을 담임으로 하는 교회를 신설해 보도록 권하였다. 그래서 새문안교회의 우경신 여전도사님(후에 여자신학교 교장)과 같은 교회 여전도회 회장이던 이능전 집사님(훗날 합동교단 전국여전도회 연합회 회장 2회 역임) 이 중심이 되어 박윤선을 청빙하여 동산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1년이 지나서는 이능전의 남편인 고응진 장로님도 새문안교회 시무장로 직에서 떠나 동산교회 창립에 동참한다. 그리고 박윤선은 1961년 봄에 동산교회에서 개혁신학교를 열었다.


박윤선은 개혁신학교는 몇 년의 짧은 기간이었고 그 이전에는 고려신학교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에는 합동 교단의 총회신학교에서 활동하게 된다. 지금 이야기는 박윤선이 고신에서 총신으로 소속을 바꾸는 과정이다. 박윤선은 이 시기에 지난날의 고신측과도 그리고 곧 가입하게 될 합동측과도 아무런 연락이 없고 혼자 외로운 길을 가야 했다. 고신과 단절 되는 이유는 고신 내에서 반고소를 주장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합동 교단과도 단절 된 것은 그는 고신에 있을 때 합동교단과 투쟁을 벌인 고신 측을 대표한 학자였기 때문이고 한 편으로는 박윤선을 제거한 고신이 합동 교단과 교단을 합하는 중이었으니 합동 교단으로서는 고신과 연합을 추진하려는 마당에 박윤선을 영입하거나 가까이 할 수는 없었다.


이때에 박윤선이 가장 신임하는 이인재가 신학교 설립에 관여하면서 독립교회를 지향하던 목사들 세 분(김현봉, 백영희, 이병규)이 개혁신학교에 가까워졌고, 김현봉이 첫 학기에 야고보서 강의도 하였다. 1958년에 반고소를 주장하여 고신파 총회에 행정보류를 선언했던 경기노회가 1959년에 승동측 총회(합동파) 수도노회에 가입하자, 한상동은 1960년에 박윤선을 고신에서 면직시킴과 동시에 같은 해(1960년)에 승동측 총회와 합동하였으니 고신파나 경기노회에서 그 누구도 감히 박윤선에게 가까이 할 수 없었고 가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박윤선과 함께 반고소편에 섰다가 함께 추방당한 이인재와 백영희가 가까이 있었고 이병규사와 김현봉도 개혁신학교 설립에 협력하였다.

 

25.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의 관계,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세 인물은 고신 교단에 있을 때에 신앙적으로 가장 가까웠다. 고신 교단에 고소 문제가 나올 때 입장이 동일했다. 입장과 성향 때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먼저 비판하고 나온 것은 백영희였다. 박윤선과 이인재는 고소를 반대한다는 신학과 신앙의 입장은 분명했으나 교단 지도부가 되어 늘 고소파인 한상동과 송상석을 마주해야 했고 그들을 안고 가야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둘러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백영희는 거침없이 치고 나갔다. 백영희의 맹공 때문에 고신 교단은 내부적으로 갈수록 고소와 반고소의 두 길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박윤선도 전면에 나와서 반고소를 비판하게 되었다. 고신에서 제거 되는 순서도 백영희가 제일 먼저 제명 되고 이인재 박윤선도 차례로 그렇게 된다. 박윤선의 경우는 한 차례 복직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복직은 하나의 이용물이었지 진정성은 없었다는 점에서 이 3인은 1960년 이전에 고신파에서 제거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61년에 박윤선이 개혁신학교를 세울 때에는 서로 협력하며 3인은 고신 내에서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영희는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평생 그 몸과 마음이 범죄와 회개를 거듭하며 계속하여 성화 되어 나간다는 교리를 주장했고, 박윤선, 이인재는 “중생한 영혼도 범죄한다”는 주장으로 하나가 되어 백영희와는 점점 멀어지다가 1965년에 완전히 헤어졌다.  





26. 이인재와 한종희



한종희는 박윤선 백영희 이인재 3인과 다 각각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3인의 노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인재와 관계가 제일 가까웠다. 아들이라 할 정도였다. 원래 알고 있었고 은혜를 받고 있었으나 특별하게 가까워지게 되는 동기는 다음 그의 회고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① 백영희는 1961년 봄에 서울 청량리교회 집회에서 한종희를 정죄하였으나, “중생한 영혼이 죄 범한다”고 쓴 로마서 7장 주석을 학자들(박윤선, 이상근, 이근삼, 강진선, 김의환)이 옳다고 인정하고부터는(1962년) “중생한 영혼은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백영희의 주장에 침묵하였다.

② 한종희는 1963년 봄 학기부터 다시 개혁신학교에 등교하였고, 동시에 박윤선 교장의 자택에서 숙식을 하였고, 1963년 11월에 이인재를 제천 금성교회에 초청하여 집회를 한 후에는 이인재가 한종희를 동정하여, 이인재 목사는 자기가 당회장이던 대구 남성교회에 한종희를 부흥회 강사로 소개한 후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게 하였다(1963년 12월).

③ 박윤선 교수가 1965년 초에 중생한 후에도 중생한 영혼이 범죄한다고 주장하자 이인재는 이 교리를 수용하였고 이 교리를 수용한 문제로 이인재는 시무하는 대구 동성로교회에서 사면되었다.(1965년 봄).



한종희는 백영희를 떠나 이인재 박윤선을 모시고 합동교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다. 합동 교단에서는 제일 힘이 있는 경북노회에 소속이 되어 1960년대 중후반을 비롯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는 전 기간을 통해 노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때의 이인재 박윤선과의 관계가 큰 배경이 된다.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3인이 반고소파를 주장하다가 고신파에서 함께 밀려나 같이 협력하였으나, 백영희가 1965년에 성화교리를 주장하여 이인재, 박윤선과 관계는 끊어졌다.



27. 박윤선과 이인재, 그리고 한종희



박윤선과 이인재에 대해 소개 된 내용은 많다. 그러나 한종희의 회고를 통해 또 여러 면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개한다.



박윤선 목사님의 성품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1963년 봄, 그 때에는 내가 박윤선의 자택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같이 지낼 때였다. 동산교회 우경신 여 전도사와 이능전 집사가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한 성도의 집을 심방할 때에 나도 동행하였다. 다 같이 한 밥상에 앉았다. 박윤선 목사님이 김치국을 거의 혼자 다 드시고는 김치국을 더 청하여 드셨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아직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박 목사님은 숟가락을 놓고는 앉은 그대로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셨다. 그 천진스러운 모습을 그 무엇에 비교하겠는가! 조용하신 것만 빼고 그 모습만 보면 꼭 어린 아이였다.


스승님을 자주 만난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일이지만 신학생이 스승님과 같이 이야기 할 때의 모습만을 보고 있으면 어느 쪽이 교수이고 학생인지 전혀 분간하기 어렵다. 그만큼 스승님은 언제나 학생 앞에서도 소탈하고 겸손하여 학생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이인재 목사님 역시 박윤선 목사님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들이 두 분을 성자라고 불렀다.

박윤선 스승님의 인품을 말해주는 편지 한통을 소개한다. 1988년 2월 2일에 쓴 편지다.



『하나님의 은혜 중 온 가정의 평강과 교회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지나간 달 잠간 만나서 피차간 자세한 이야기를 못하고 이별한 후 나는 이곳에서 볼 일을 더러 보고 2일 후 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갑니다. 오늘 오전 중에 전화로 접촉한 바 있었으나 댁에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않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전에 목사님께서 전달해 주신대로 Ms. Jackie Lee께서 개인의 사정상 원조를 더 하실 수 없다고 하셨기에 오늘 감사는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동안 몇몇 고학생들이 도움을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학교신문 어느 호에 통합적으로 감사의 뜻을 밝히겠습니다. 매번 도울 적마다 도움 받는 이도 목사님에게 혹은 Ms. Lee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드리라고 하였는데 실행된 여부에 대하여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불초인(不肖人)은 이제는 매우 노쇠한 처지이므로 교수를 그만 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부족한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학교는 여전히 잘 되고 있습니다. 앞날 언제 내한하시면 나의 Chapel 시간에 한 번 주님의 말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지식의 재료나 설교재료가 입수 되는대로 나에게도 좀 보내 주십시오. 나는 84세이고 늘 부족합니다. 3월초에 시작되는 새 학기에는 변증론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번에 이곳서 그 방면 연구를 조금하고 갑니다. 이것으로 간추립니다.』

1988. 2. 2 이후불초례 박윤선 杯



정확하게 말해서 1948년부터 평생 동안을 따르며 설교를 듣고 지도 받아온 제자이고, 한 때는 자기 집에서 숙식까지 하며 지냈고 맏아들 고 춘호 씨와 동년배인 제자에게 쓰신 편지가 그랬다. 그의 겸손한 자세는 누구를 대하든 항상 동일했다. 비록 예배당 소송 문제로 송상석 목사님이나 한상동 목사님과 뜻을 달리했지만 다만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자 글을 썼을 뿐 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인재와 박윤선 두 분이 각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두 분이 동일하게 평생을 두고 자기의 사람이 없었고 자기의 당이 없었고 항상 혼자였던 사실이 증거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따르다가 누군가가 싫어하고 비평해도 전혀 분쟁한 적이 없었고 조용히 지내셨기 때문에, 세도 있는 분들이 두 분을 다루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박윤선이 반고소가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논증은 했지만 고려신학교에서 두 번 밀려날 때에도 어느 개인과도 분쟁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비방하지 않았다. 이인재가 경북노회(성남교회)와 공회(동성로교회)에서 밀려날 때에도 역시 분쟁하거나 상대를 비방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어린 양처럼 조용히 떠났다.

동시에 두 분은 생각이나 삶이 하나님만 상대하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지극히 단순하여 어린 아이와 같았다. 나 한종희가 평생을 곁에서 지켜본 사실이다.  



이인재는 해방 후 백영희와 제일 가까운 동지로 살았다. 백영희의 성화구원 교리 때문에 박윤선과 백영희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인재의 당시 고민과 박윤선의 입장을 알 수 있는 회고가 있다.


이상문 사모가 거침없이 말한 일화가 있다. 이인재가 백영희를 만났을 때에 말하기를, “나나 너는 무식하니 박윤선 목사의 주장을 따르자”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박윤선이 “중생한 영혼이 범죄한다”고 교리를 확정하자 이인재는 박윤선을 따랐다. 백영희 박윤선 이인재 3인은 성화교리의 입장 차이 때문에 1965년에 완전히 헤어진다.


1965년에 이인재 박윤선은 각각 성화교리 때문에 백영희를 떠나게 되지만 1980년대에 백영희를 다시 찾게 된다. 이인재와 박윤선은 1965년에 헤어질 때 이단으로 나갈 문제라고까지 오해할 정도였으나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우려했던 것과 전혀 달리 백영희와 서부교회는 더욱 건전하게 성장했고 또 교리 문제는 서로가 다르게 깨달을 수 있는 사안이지 나누어 설 정도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79년까지 단 한번도 교계에 나타나지 않고 고요히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목회하던 백영희의 존재는 일반 사회 신문에 세계최대의 주일학교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이후 백영희 생존 마지막까지 한국교회 전체의 최고 관심사가 되었으며 그 부흥의 내막은 성경과 신앙의 근본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결과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보루라고 자타가 인정할 만한 박윤선 이인재로서는 지난날의 오해를 풀고 먼저 달려와 격찬을 하며 다시 손을 마주 잡게 된다.

이에 대해 한종희는 회고를 통해 그럴 가능성을 강하게 부정한다.



현재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 이인재의 미망인 이상문(92세) 사모님의 증언이 있다. 이상문 사모님은 결혼 전에 전도사였고 이인재의 일거일동에 항상 내조자로서 관여하였고 동행하였기 때문에 이상문 사모가 모르는 일은 이인재에게 발생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이인재 목사님과 이상문 사모님을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즉시 수긍이 갈 일이다. 이인재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이상문 사모는 전도사 출신으로 성품이 적극적이고 강력할 뿐만 아니라 14년 연하로서 남편의 일거일동에 관여하였으므로 이상문 사모의 증언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인재가 상처하여 재혼하였고 2000년 4월 20일에 소천할 당시 94세였으나 사모는 당시 80세였다.


이인재가 교리에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백영희의 초청에 응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가 이상문 사모에게 전하자(2011년) 심히 노하였는데 이유가 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손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1965년 즉 47년 전에 대구 동성로교회에서 축출당하여 밀려나면서 확정된 교리를 두 본인이 떠나고 없는 마당에 이제 와서 왜 다시 다른 각도에서 논하려 하는가에 대하여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백영희가 1965년 이후에 박윤선과 이인재와 가졌던 만남은 백영희가 먼저 손을 내미니 응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 분이 1965년 이후에 가졌던 최후의 만남은 교리를 초월한 만남이었으니, 곧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최후의 시간 앞에서 지난 세월에 가졌던 형제애를 회복하는 만남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나는 1952년인가 “한부선 선교사를 찾아가서 1942년 37세로 NAE 창립총회장을 지낸 오켄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오라는 백영희 조사님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었고, 같은 무렵에 백영희 조사님이 가오리를 사 주시며 박윤선 목사님 자택에 전하라고 하여 부산 남부민동 사택을 방문하여 전한 일이 있었고 두 분의 교분을 계속하여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우리의 스승들은 후진들에게 경건 생활의 선례(pattern)를 남겼다. 즉 백영희가 박윤선과 이인재와 가졌던 교리의 차이는 상대를 청하여 만날 수 있었고(박윤선의 경우), 상대를 청하여 강단을 줄 수 있었다(이인재의 경우).


물론 백영희 스승님이 나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아버지와 어린 자식과 같은 관계였으니 백영희에게는 한종희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년간 내가 스승의 교훈과 교리에 대하여 여러 번 질문했어도 답하지 못하시다가 끝내는(1961년) 자식 같은 제자로부터 먼저 부정을 당했으니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절대시 하던 분이라 심히 자존심이 상하셨을 법도 하다. 여하튼 어른께서는 1961년 이후로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박윤선과 이인재와는 다시 만나시고 강단을 주어 대화하신 것으로 나는 만족해야만 했다.


특히 백영희가 이인재를 서부교회 강단에 세운 것은 이인재를 동성로교회에서 사면케 한 사건에 대한 사과의 뜻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백영희가 고신파 부산노회에서 제명당하기까지(1959년)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을 때에 이인재는 끝까지 백영희를 감쌌고, 이인재는 근 10여년 동안 백영희만을 청하여 집회를 하였고, 백영희는 박윤선과 직접 대화가 쉽지 않았으나 이인재가 백영희와 박윤선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도 해주었으니 백영희에게는 이인재가 다시없이 고마운 선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같이 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이인재를 교리문제로 동성로교회에서 밀어낸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므로 모든 문제가 끝난 후에는 청하여 아픔을 씻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회고 내용의 일부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인재 박윤선은 백영희의 성화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결별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윤선 이인재가 속한 합동 교단의 경북노회는 1968년에 한종희 이인재 박윤선의 주장을 인용하여 백영희 신앙노선을 이단으로 공식 선언을 하게 된다. 물론 당시 공식 기록에는 이 3인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지만 공회는 경북노회 당시 임원들을 일일이 찾아 당시 책임을 물었을 때 모두 이 3인을 거명했다.

백영희가 사과를 하고 손을 잡으려 한다 해도 이단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다면 이인재 박윤선은 목숨을 걸고 그런 사화에는 응하지 않는 진리의 투사들이다. 백영희의 주장은 바뀐 것이 없다. 바뀐 것은 박윤선 이인재가 세월을 통해 백영희에 대한 신앙의 실체를 봤고 드러난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알 수가 있었고, 그들이 오해를 했던 것이다. 물론 박윤선 이인재의 경우는 성화 교리에 대해서는 칼빈 신학에서 한 걸음도 더 들어 가지 않고 과거 그대로를 고수했고 백영희는 칼빈의 성화 교리는 더 발전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세 분이 교리로 갈라서고 멀어지고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임종이 가까워지자 청하고 응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 분은 동일하게 삶의 비중이 자신이나 세상과는 무관하였고 오직 하나님과 천국영생에 있었으며, 세상만사가 헛되다고 믿었으며(전1:2) 아브라함처럼 인생을 나그네로(히11:13) 여겨 가볍게 사셨으니, 우리도 이러한 차원에서 세 분을 보아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세 분은 동일하게 하늘의 사람이었고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기독교를 성서대로 이해하게 하고 살게 하신 스승들은 주로 이 세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세 분에 대한 나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다.





28. 박윤선 화란유학의 중도 포기



한종희는 1962년 가을학기에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용산 캠퍼스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게 되었다. 김채빈, 장차남, 조해수 등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박형룡 교수로부터 숙제를 받았다. 숙제는 네델란드의 교수 벌카우어가 쓴 “칼 바르트신학”을 읽고 요약하라는 내용이었다. 조동진 목사님이 영어번역에서 2차 번역한 것인데, 원 저자의 책명은 “칼 바르트신학의 은총의 승리”였다. 그는 책을 읽은 후에 비평서가 아니고 벌카우어가 칼 바르트신학을 수용하고 소개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종희가 이후에 박윤선에게 벌카우어가 좌경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더니 박윤선 자신도 화란으로 유학 갔다가 화란의 개혁교회가 좌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화란에 유학을 갔는데, 1954년 4월에 사모님이 선교사의 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린 아기 다니엘은 살았으나 사모님이 소천 하셨다. 즉시 귀국한 후에 이화주 사모와 재혼하여 자녀들을 맡긴 후 화란으로 제2차 유학하러 가는 길에 미국에 들렸는데 거기서 화란의 개혁교회의 신학이 좌경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화란으로 가지 않고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벌카우어는 화란의 개혁교회 신학교인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서 13권의 조직신학을 저술하였는데, 벌카우어의 좌경은 곧 화란 개혁교회의 좌경이었고, 이 좌경이 1990년대에 와서는 미국 CRC 총회의 여자목사 안수 결의로 표면에 드러난다.

왜 여자목사 안수를 좌경화로 보는가? 성경은 여자목사 안수를 절대로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여자목사 안수를 하려면 성경을 불신하여 비평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계시의 점진성은 믿지만 성경의 완전영감을 믿기 때문에 신약이 금지한 여자 목사 안수를 할 수 없다고 믿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성경의 완전영감을 불신하여 비평하기 때문에 성경이 금지한 여자 목사 안수를 실행한다. 미국장로교(PCUSA)는 1926년에 ‘그리스도의 성령 수태’와 ‘몸의 부활을 불신’하는 오번선언(Auburn Affirmation)을 수용하였고 1956년에 여자 목사 안수를 시작하였다. 미국연합감리교(UMC)도 1956년에 여자목사 안수를 실시했다.


미국 개혁교회(CRC)가 여자목사 안수를 거론하자 김의환 목사는 개혁교회에서 탈퇴하였고, 미주총회(KAPC)가 한종희에게 여자목사 안수의 부당성에 대한 논문을 요청하여 해당 논문을 미주총회 회지에 게재하였고, 미주총회는 1997년에 미국 개혁교회(CRC)와의 교류를 단절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29. 고신 교단의 환원과 박윤선



반고소 문제로 파숫군 지를 통한 박윤선과 송상석의 지상논쟁이 있었고, 경기노회는 반고소와 박윤선을 지지하여 고신 총회에 행정보류를 선언하였고(제8회 총회, 1958), 고신총회는 행정 보류한 경기노회를 제치고 새로 구성한 경기노회를 정식 노회로 받아들였다(1958). 이학인과 김창인은 행정보류한 경기노회를 대표하여 승동측 43회 총회 시에(1959) 승동측 수도노회에 가입하였고, 고신 이사회는 1960년에 박윤선을 고신에서 축출하면서 동시에 승동측 총회와 합병하였으니, 고신총회는 반고소자들(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경기노회)을 다 축출한 후에 승동측과 합병한 것이다.


그러나 1963년에 한상동 개인의 결단으로 화급하게 고신파의 환원을 선언하며 승동측 총회와 결별한다. 하지만 고신파 교회들 중에서 보류측 경기노회나 반고소를 동정하던 목사들이 환원하지 않고 승동측 총회에 남을 기세였기 때문에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서 한상동은 박윤선을 재영입하고자 영입위원들을 파송하였다. 당시 개혁신학교 신학생으로 박윤선의 자택에서 숙식을 하고 있던 한종희는 영입위원들의 방문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고신에서는 남영환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등 여러 분이 왔었고, 총신에서는 박형룡 명신홍 김득용 안용준 등 여러 분이 왔었다고 한다. 영입위원들이 양쪽에서 동시에 오게 된 것은 박윤선이 고려신학교 교수로 가면 대부분의 고신파 교회들이 환원할 것이지만, 만일 박윤선이 총신 부산분교장으로 가면 많은 고신파 교회들이 합동 교단에 남을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박윤선의 몸값이다...

1960년에 고신파가 박윤선을 버리고 총신파와 합칠 때에는 아무도 박윤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동래 금정산 산자락 밑에 홀로 있을 때에 이재만 목사를 제외하고는 왕래하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그러나 고신파가 환원하는 마당에서는 박윤선을 차지하는 쪽의 승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박윤선을 영입하려 하였다.

사람들이 왜 박윤선을 그토록 좋아하였을까? 그의 학문인가? 그만한 학문은 박윤선 말고도 가진 분들이 있었다. 학문으로 치면 훨씬 탁월한 박형룡 교수가 총신에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박윤선을 그렇게도 좋아했는가?

“박윤선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사람들에 대한 겸손과 사랑이 넘쳤다. 오직 선한 목자였으며, 결코 자기의 당을 만든 적이 없었고, 또한 누구를 대항하거나 분쟁한 적도 없었고, 박윤선은 항상 혼자였다.”


우리는 박윤선에게 있었던 경건의 깊이를 바로 여기에 보아야 한다. 박윤선은 항상 기도에 파묻혀 살았고 항상 말씀 묵상 속에서 살았다. 하나님만 상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박윤선을 앞지를 자가 없다. 지식으로도 성경의 두 원문과 일어 영어는 물론이고 독일어 네델란드어 한문을 통달하였다. 주경으로는 한국에 박윤선을 앞지를 자가 없다.


양 편에서 다녀간 후에 박윤선 스승이 나에게 조용히 물으셨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는가?”

성화교리 문제로 내 논문을 읽고 옳다고 인정하셨고, 내가 부산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5년간(1948-1953) 나를 가르치셨고, 이제는 신학생으로 가르치시며, 자택에 동거하게 하고, 비서로 개인의 편지회답까지 맡기셨으니 안심하고 나의 의견을 물으신 것이다.

나는 고응진 장로의 권유로 1962년 가을 학기에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한 학기 공부한 후이기 때문에 총신의 분위기를 체감하였으므로 나는 고신과 총신을 비교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이 말씀 드렸다.

“목사님은 고신파에는 안 가셔도 잘못이 없습니다. 반고소 문제로 1957년에 신학교에서 밀어냈지만 경기노회가 박 목사님을 지지하여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고신이 다시 영입하였지만, 1960년에 또 다시 내 보낸 것이니 이제는 들어가지 않으셔도 목사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신파 목사들은 이미 목사님의 제자들이니 목사님의 주석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신파 사람들은 지금이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총신파 목사들이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 주석을 보게 하려면 총신 편이 좋겠습니다.”



그 후 박윤선은 총신의 부산 분교장을 택했다. 이학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고신파는 이때에 교회 160개를 잃었다고 한다. 한편 박윤선이 부산 분교장으로 가면서 서울 동산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게 되자 동산교회는 한종희의 추천으로 김성환을 부산에서 담임으로 모셔왔다. 동산교회의 이능전 집사님과 고응진 장로님 내외분은 그와는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에 교역자에 대한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고응진 장로님은 황해도 사람으로 연전(연세대학교) 출신이며 제일제침회사 사장이었고 1960년대에 서울 YMCA 6층 빌딩을 신축할 때에 YMCA 회계였으며 새문안교회와 동산교회의 장로직을 역임하였다.

부인인 이능전 집사님은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출신에 새문안교회와 동산교회의 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합동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두 번 역임하였다. 양가의 어른들께서도 다 독실한 장로님으로 교회를 섬기셨으며, 이능전 집사의 친정은 이름난 황해도 부자로 십일조 노적가리가 따로 있었다고 하며 공산당이 북한을 집권한 후에 마을 사람들이 이능전 권사의 친정아버님의 비석을 마을에 세워 기념했다고 한다.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며 미주총회(KAPC) 창립(1977)과 미주총회의 직영신학교인 국제개혁신학교 발전(1977년-)에 공로가 큰 고응보 목사는 이능전 권사의 시동생이다.


내가 1978년에 미국에 이민한 후에 1986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김성환 목사님이 성도교회로 옮겨간 후였는데, 고응진 장로님은 나를 동산교회 강단에 세웠고 출국 시에는 두 내외분이 공항에 나와 이불을 선물하며 전송해 주셨다. 내가 이단으로 정죄 받고 환난 중에 있을 때에도 고응진 장로님 내외분은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를 나에게 베푸신 분들이다.



30. 총신 합신과 박윤선



총신과 고신이 1960년에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지만 1963년에 고신파가 환원을 선언하며 신학교가 다시 둘이 되자 두 신학교는 서로 박윤선을 영입하려는 강한 뜻을 보였다. 두 신학교의 교수들이 서울 홍제동 박윤선의 자택을 방문한 후에 박윤선은 총신 부산 분교장을 선택했다.

총신 부산분교에 박윤선이 부임한다는 소식에 부산과 대구 지역의 고신파 교회들 중 상당수가 합동파에 머물게 되었고 합동파 경남북 일대가 다 신학생들을 총신 부산분교로 보내자 총신 부산 분교가 부산 총회신학교로 승격하였고, 1964에는 신학생들이 서울 총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산 총신에서 졸업하였다. 나도 1965년에 부산총신에서 졸업하였다.


부산 총신이 활발해졌지만 서울 총신이 약화되어지는 것을 막고자 박윤선을 서울 총신에 출강하도록 하다가 나중에는 교장직을 맡기면서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 총신에서만 강의하게 되었다. 대구 이영수 목사님이 대구신학교를 강화하려고 부산 총신 이상근 교장을 대구신학교로 모시고자 나를 부산 총신에 보냈는데, 이상근 교장이 대구로 뜻을 정하자 서울 총신에서 이상근 교수까지 서울로 데려가 대구신학교의 확장을 막았다. 결국 신학교가 서울총신 중심으로 안정이 되자 총신의 지도층은 박윤선의 거세에 나섰지만 거세의 명분이 없어 은근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1967).


이 부분에 대하여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박윤선은 새벽이면 항상 산에 올라가 기도하였다. 그래서 주택은 항상 산 밑으로 하였다. 부산에서는 남부민동, 동래 금정산 산자락, 서울에서는 홍제동, 불광동, 상도동 다 산 밑이었다. 한 번은 서울 동산교회 강단을 지키고 계실 때인데 주일 아침에 주일설교 준비하다가 소리를 질러 기도하기를 ‘말씀을 주시옵소서’ 만을 반복하셨는데 벽돌집 옆방에 거하는 나에게도 또록또록 다 들렸다. 경건회 시간을 인도하면 영권이 강력하여 항상 학생들이 박윤선에게 집중하였다. 고신에서는 경건회 시간에 회개운동이 돌발적으로 일어나 강의를 계속할 수 없어서 학업을 중지하고 부흥회를 가졌는데 2주간이나 계속한 일이 있었다. 박윤선의 강단은 항상 뜨거웠다. 이러한 영권에서는 총신 교수들에게는 대책이 없었고, 수용하기 힘겨웠을 것이다.



이인재 목사님이 서울에서 목회하다 은퇴하고 1967년에 대구 아들 이정빈 교수댁에 와서 쉬고 계셨는데 하루는 방문했더니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박윤선 교수가 총회신학교를 사직하려고 한다고 하셨다. 서울 총신에는 이미 박형룡, 명신홍 두 거장이 계셨다. 당시 총회에는 황해도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전 총회장을 역임한 박찬목 목사님과 이환수 목사님의 체제였다. 총회 지도층은 부산과 대구에 대한 작업이 끝나고 서울 총신이 안정이 되자 박윤선 거세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눈치 챈 박윤선이 총신을 떠나려 한 것이다. 분쟁이나 투쟁을 싫어하는 박윤선으로서는 고신파로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박윤선 스승이 꼭 10년간(1957-1967)을 사람들 손에 휘둘리고 이리저리 밀리고 쫓기는 형세가 너무나도 속상했다. 예배당 소송문제로 고신에서 첫 번째로 밀려난 사건이 1957년이니 꼬박 10년 동안 참으로 고달픈 삶을 보내셨다.


나는 이인재 목사님의 말씀을 듣자 즉석에서 이인재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 상도동 박윤선 목사님 자택을 방문하였다. 박윤선 목사님이 총신에 가만히 계시면 그 누구도 나가라고 밀어내지는 못하니 가만히 계시라고 강권하였으나, 이화주 사모님은 나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가라고 소리치셨다.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큰 아들 춘호가 나와 동배이고 나는 십대부터 그의 교훈을 받았고 박윤선 목사님 비서로 동거하기도 했으니 나는 만만한 아들이었다. 사모님도 고신에서 공부하시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고신학생 시절부터 나와는 친숙한 사이였고 돌아가는 형편을 잘 알고 있어서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자문하시는 편인데 고신으로 가기로 이미 뜻을 정한 상태였으니 내게 화를 내실만도 했다.


그 길로 즉시 이인재 목사님이 서울에서 총신 이사장이신 부산 노진현 목사님에게 가시게 하여 노진현 목사님이 친히 박윤선 목사님을 만류하도록 부탁했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 자택에서 자고 이튿날 대구로 돌아왔다. 내가 대구에 도착한 바로 그 이튿날 박윤선 스승으로부터 속달편지를 받았다. “내가 서울 중앙교회(윤봉기목사)와, 대구 성밖교회(손명복목사-출옥성도)의 집회를 취소하였으니 잘해 보라”고 쓰인 속달편지였다. 박윤선 스승은 고신파의 청빙에 응하려 했지만 이인재와 나의 방문을 계기로 총신에 계속 머무는 쪽을 생각하신 것이다. 즉 부산 노진현 총신 이사장의 전화를 받으신 것이 분명했다.


그후로 박윤선은 총신에 정착하였다. 그 후로도 총신대학에 정규오 목사님이 발기했던 신복음주의 색깔 논쟁까지 있었지만 총회가 이영수의 체제가 되고부터는 이영수의 강력한 후원을 입어 박윤선 스승은 몇 제자들과 함께 13년간(1967-1980) 서울 총신에 평안히 계시게 되었다.



합동신학교 설립


총회가 이영수의 체제로 짜인 후로는 건축 중이던 총회신학교 건물을 완비하였고 총회회관 빌딩을 신축하였고 일사분란하게 총회를 이끌었다. 하지만 총회가 경북 중심이 되어지면서 총회 안에 갈등이 일어났고 이 갈등을 이기고 기성체제를 지키려 하여 일당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총신 안에서 새싹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합동신학교 신설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나는 1970년도에 대구 남성교회에서 대구 성지교회로 이동하였는데, 같은 해 여름방학 기간에 총신에서 박희천 교수가 헬라어 특강을 한 달간 개강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헬라어 특강 참석을 위해 성지교회 당회에서 한 달간 휴가를 얻었고 서울 내수동교회 옥상에서 한 달간 홍근섭 목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내수동교회 주일설교를 대신해 드렸다.

한 달간의 헬라어 수강을 마치고 귀가 길에 후암제일교회 이학인 목사님을 인사차 찾아뵈었다. 이학인 목사님 말씀이 “이영수 목사님이 황금천 목사님의 총회장 차례를 막고 있다”고 하셨다. 즉석에서 대전 중앙교회 이영수 목사님에게 전화하여 귀가 길에 방문할 뜻을 전하고 방문하여 이학인 목사님의 뜻을 전하였더니 바로 9월 총회에서 황금천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세웠으며 이 총회가 심히 소란하여 성찬상을 엎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67년에서 1970년 사이에는 총회 지휘봉 장악문제로 시끄러운 시절이었다. 결국 총회 서기였던 이영수 목사님이 1970년에는 대전 양화석 목사님과 광주 정규오 목사님과 부산 노진현 목사님의 지지를 얻어 총회를 장악한 후였다.


박윤선은 이미 고신에서 절대 교권이 가져오는 속화를 경험한 터이라 총회와 총신이사회에서 절대 교권을 저지할 수 없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자신의 안일을 버리고 1980년도 합동신학교 설립에 동참하였으며 황급히 헌법주석을 발표하여(1982) 한국 장로교의 바른 행정을 촉구하였다. 박윤선은 합신 창립에 혼신을 다하였고, 영음사 출판수입금을 신학교에 다 쏟았다.

1986년, 내가 미국에 이민한지 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영음사 이창숙 사장이 나를 만난 자리에서 말하기를 그 당시에도 박윤선이 합동신학교에 1억 수천만원을 헌금했다고 했다. 고신을 졸업하고 화곡동에서 화성교회를 섬기던 장경재 목사님역시 스승 박윤선을 도와 교회로 하여금 합동신학교 설립에 수억원을 헌금하게 했다.

 





제 4 장. 대구 목회







31. 대구 남성교회로 이동

32. 걸인의 협박

33. 연탄가스 중독사건

34. 두 교회의 목사 교환

35. 배승욱

36. 침산제일교회에서

31. 대구 남성교회로 이동



1961년에 남천교회가 매달 지원하던 생활비를 끊고 과부인 지순금 집사님이 행상을 하여 그의 생활을 도왔지만 1963년 봄부터 서울 전칠홍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던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전혀 수입원이 없었다. 그때에(1963. 11) 이인재 자신이 당회장으로 있던 대구 남성교회 집회를 그에게 인도하게 하였다. 남성교회는 60명 정도가 모이는 고신파 교회였으며 마침 교역자였던 유영덕 목사님이 서울 동산교회(박윤선) 심방목사로 가고 비어 있었는데 교회가 그를 원하였다.

예배당은 30평 남짓 하였으며, 사택은 예배당 옆에 붙여서 만든 쪽방 한 칸이 있었으며 방바닥은 다다미였다. 겨우 예배당이 서 있었고 사방이 주택이라 빈 공간이 없었다. 화장실은 소변기 하나 없었고 한 사람의 겨우 몸을 가릴 수 있는 한 칸의 공간에 변기 하나로 남녀 모두 모든 볼 일을 해결했으니 참으로 옹색했다.


한종희는 대구 남성교회의 청빙에 응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제천 금성교회를 지원하는 목회자로 갔다. 남성교회가 그에게 주는 사례금은 월 3천원과 교회가 성미를 모아서 주었다. 그는 남성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로 하여금 금성교회 교역자 생활비를 매달 보내게 하였고 금성교회 예배당 대지금과 건축비도 특별 헌금하여 보내게 했다. 남성교회는 장로는 없었으나 집사들이 잘 따랐다.

그는 총신에서 만났던 친구인 김웅규 전도사와 김현구 전도사를 차례로 금성교회로 보냈는데, 김현구 전도사는 산 밑에 있던 창고 예배당을 버리고 마을 입구에 대지를 구입하여 새로 예배당을 반듯하게 지었다. 그 당시 그는 걱정 없이 하루에 밥 세 때 먹는 것을 부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전혀 고생을 몰랐다. 있는 힘을 다해 산중교회를 지원하였고, 온 교인들은 하나같이 뜨겁게 함께 하여 주었다.



1963년 대구에 갔을 때에 아내는 치마가 떨어져도 바꾸어 입을 옷이 없어 공장에서 재단하다 남은 자투리를 구해다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은 거의 구제금으로 나갔다. 시골 전도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우리는 방 한 칸뿐이라 교회 구석에서 자게 하였고 도와주었다. 우리 가정이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먹는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부자였기 때문에 먹지 못하는 시골 전도사들을 돕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다.


나도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었다.

“내가 어느 정도의 사람을 도와야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분명하였다.

“너 보다 더 어려운 자는 네게 도움 받을 권리가 있느니라.”

그러니 먹지 못하는 사람을 어찌 외면할 수 있는가? 사람이 벗지 않고 입고 굶지 않고 먹는 것은 최소한의 욕심이자 권리이다.



목회하던 형 한동희가 동생이 겉옷 없이 겨울에 떨고 다니는 것이 하도 딱해서 한번은 자기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주었다. 하지만 한종희는 새벽에 부산신학교로 가는 길에 대구역 대합실에서 허리를 드러내놓고 의자에 누워 자는 아이를 보자 그 스웨터를 벗어주었다. 한번은 한겨울에 대구 교도소 앞을 지나치다가 여름 남방 차림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얼른 근처의 술집에 데리고 들어가서 자기의 입고 있던 내의를 벗어 그 사람에게 입혔다. 여름에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형을 마치고 나왔는데 그 사람에게는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남성교회에 황 집사라고 있었다.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남매를 키우며 조그만 찐빵 가게를 운영하는 분이었다. 본인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목회자를 보다 못해 양복과 두꺼운 코트를 맞추어 입혀주기도 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결혼한 후 40년 세월이 지나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지난 세월을 반추할 여유가 생겼다. 한 번은 큰 딸 집을 방문했는데 방바닥에 대중가요 테이프가 있기에 보니 거기에 “한 송이 백합꽃”이 있었다. 딸에게 테이프를 주며 “한 송이 백합꽃” 테이프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노래를 듣고 있는데 가사 중에 한 송이 백합꽃이 가시에 찔려 향기를 낸다는 대목이 있었다. 6남매를 키워낸 아내가 고생했던 시절을 돌아보니 내가 처에게 너무나 가시노릇을 많이 한 것이 주마등처럼 재현되어 살아났다. 그러나 가시에 찔릴 때마다 향기만 풍겼고 단 한 번도 나에게 불평하지 않았고,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않고 참고 살아온 아내를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딸이 이런 나를 보고 말하기를 “아버지 또 우시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한 말이다.


지금도 지난날을 생각하니 아내가 6 남매를 키우며 고생하던 아내를 너무나도 몰라보았던 것이 마음이 저리고 아파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 잔등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아내는 못 먹고 헐벗어 허리가 형편없이 작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자녀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생각한다.    

얼마 전에  한국에 나가 있는 53세 난 큰 딸이 나와 전화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매일 큰 절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맞장구를 쳐, “매일 수백 번이라도 절하며 살아야지!” 여섯 아이들 중 딸 막내(1968년생)가 하는 말이, “우리는 어머니하고만 살 겁니다. 아버지는 소용없어요!”라고 말할 때면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래도 나는 걱정 없단다. 너희 어머니 치맛자락만 꼭 잡고 있으면 만사가 OK다.”

32. 걸인의 협박



남성교회에 있을 1965년에 구걸을 일삼던 청년들에게 협박당한 사건이 있었다. 너댓 청년들이 몰려와서 군대 가게 되어 술 한 잔 먹어야 하니 목돈을 달라고 졸랐는데 목돈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들을 구원해 보려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친구나 한 가족같이 대하며 잘 해 주니까 그를 만만하게 본 것이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평소에 잘 보살펴 주지 않았더라면 협박까지 하면서 목돈을 요구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줄 만한 목돈도 없었지만 술 마시라고 돈을 줄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큰 아들과 5살 난 둘째 딸은 집에 가두어 둘 수가 없었기에 제천 처가댁으로 피난을 보냈는데 아들은 그가 근무하던 제천 동명초등학교에 전학시키게 되었다. 나중에 안정을 찾은 후에야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당시는 휴전 직후이기에 가난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라 상이군인들과 걸인들이 교회로 줄지어 오던 시절이었다. 여비가 떨어져 기차를 탈 수 없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그가 직접 동대구역까지 가서 표를 사 주기도 했다. 그들의 거짓에 속아서 주는 것도 안 되지만, 실제로 노자가 떨어진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12살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교회에 있을 동안 평생에 단 한 번 내가 술을 대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화장실 인분을 치워주는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는 인분 자동차에 인분을 퍼서 나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인분을 저으며 그 지독한 냄새를 맡아야만 하였다. 이것을 보다가 너무 딱해서 그들에게 돈을 주어 술을 사 마시게 한 것이다. 그 때 그 사람들에게는 그 술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한종희는 대구 남성교회와 성지교회 목회 당시에 힘없는 자들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기울였다. 준비한 음식을 갖고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이 고아원을 방문하여 고아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게 하였다. 중고등부 학생들은 겨울에 내의를 준비하여 신천교 다리 밑에 천막치고 살아가는 넝마주이들을 방문하여 나누어 주게 하였다. 당시의 대구신학교 학생들의 기숙사 생활이 말이 아니었는데 쌀을 가마니로 구입하여 도왔다. 교인 중에서 아주 가난한 가정이 한 가정 있었는데 명절이 되어 선물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선물과 음식으로 그 가난한 집을 방문하였다.



선물이 들어오면 아버지가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홍시나 카스테라 같이 귀한 음식은 당시에는 평소에 먹지 못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장모님에게 드리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주지 못하게 하였다. 아이들이 많으니 즉석에서 없어지기 때문에 할머님만 드시게 하였고 이 법이 어김없이 지켜졌다. 아내가 언제나 나의 모든 방침을 따라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와 가정을 다스려 주셨음에 감사할 뿐이다.


우리가 미국에 이민한 후에는 장모님이 부산 처남댁에 계셨는데 우리가 이민한지 4년째 되던 1982년에 방문 비자로 모신 후 8년간을 우리와 같이 지내시다가 1990년 만 80세에 내 집에서 별세하셨다. 생존 시에는 6남매 손자 손녀들이 할머님께 효도하였으나 할머님이 떠나시고는 그 효도가 우리 두 내외에게 그대로 돌아왔다. 장모님이 오시자마자 1만 불 생명보험을 8년간 부어 장례비로 사용하였다.  





33. 연탄가스 중독 사건



대구 남성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겪었던 연탄가스 중독 사건은 그의 전 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 1963년 12월에 입주한 남성교회의 사택 방은 이북에서 오신 유영덕 목사님이 독신이었기 때문에 다다미방이었다. 한종희를 청빙하면서 어린아이 셋 때문에 다다미방을 온돌로 급조하였다. 방 벽은 송판이었고 예배당 터는 낮은데 집 10여 채가 교회당 위쪽 언덕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을의 시궁창 물이 방 바깥의 송판 벽을 타고 흘렀다. 그가 부임할 때에 송판 벽에 온돌방을 꾸린 이후 4년 동안에 방과 송판 벽 사이가 점점 갈라지며 틈이 생기면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다. 10살 난 맏이와 7살 난 딸이 자주 학교 결석을 하였고, 그도 멍해져서 설교하기가 힘들기도 했다고 한다.

1967년에는 아이들이 다섯이었고 장모님까지 여덟 가족이었다. 8가족이 좁은 방 한 칸에서 생활한 것이다. 그러니 대구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신천교 다리 밑에 사는 걸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과부가 사택을 방문했다가 여덟 가족이 좁은 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빨리 방을 구해서 나가야 합니다. 내가 방 두 칸을 전세로 들어 있는데, 방 한 칸을 빼고 전세금을 드릴 터이니 빨리 나가세요.”라고 하였다. 약속한 방 한 칸 전세금은 2만원이었다.


남성교회에서 직경으로 200m 거리에 피난민들이 세운 대성교회가 있었는데, 건물은 60평 정도였고 대지는 150평이 넘었다. 하지만 남의 땅에 예배당을 지었다가 땅주인이 철거령을 내려 옮겨 짓게 되었다. 한종희는 심방 중에 대성교회 장로님이 작은 집터를 측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물었더니, 새로 구입할 대지가 25평인데 예배당을 옮겨 지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동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그런데 그 장로님 말씀이 바로 옆에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가에 35평 대지가 있는데 25,000원만 더 있으면 구입할 수 있으나 더 이상 헌금할 수 없어서 25평에 짓는다고 하였다. 35평 대지는 남성교회에서 직경으로는 200m 정도의 거리였다.


대성교회 장로님에게 그런 말을 듣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방망이질을 하였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아무러면 예배당이 먼저지 네 집이 먼저냐!”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였기에 더 이상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그날 밤 즉시 제직회를 소집하였다. 몇년간을 연탄가스로 온 사택식구가 고생하다가 어렵게 마련된 사택 구할 연보를 바로 이웃해 있는 대성교회에 건축헌금으로 하자는 목사의 말을 들은 유급 여 전도사와 다섯 집사들은 그 누구도 말문을 열지 못하였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연세 많으신 박원백 집사님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억지로 순종해도 복은 받을 것이니 순종해 봅시다.” 그래서 결의가 되었다.


여 성도에게서 받은 2만원과 회계를 맡은 장성남 집사님이 5천원의 빚을 내어 2만5천원을 마련하여 대성교회에 지원하여 35평 땅으로 옮겨 짓게 하였다. 그 때 남성교회도 사정은 궁색하여 5천원도 여유가 없어서 이자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급 여전도사와 다섯 집사들은 감히 목회자의 뜻을 꺾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미 제천 산중 교회에 전도사 생활비를 지원하면서 예배당까지 신축해 주었으니 목회자의 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고 또 그와 싸울 수도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성교회 신축부지 중 10평 구입대금으로 25,000원을 지원한지 얼마 안 되어 남성교회에 큰 이변이 생겼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부산과 서울로 행상 다니며 톱을 파는 젊은 박상화라는 집사님이 있었는데, 목회자보다는 나이가 세 살 많았고 아이들은 올망졸망 다섯이었다. 그런데 그 박상화 집사님이 갑자기 교회에 10만원을 감사헌금으로 작정한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딸이 두 동생을 양 손에 잡고 신작로 언덕진 길을 걷고 있었는데 쓰리쿼타 트럭이 아이들 셋을 차 복판으로 치고 지나갔으나 셋이 다 바퀴를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도 다친 곳이 없이 걸어다녔으며, 막내 인석이가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을 뿐이었다. 신앙이 독실한 분이었던 박상화 집사는 하나님이 자녀 셋을 살려주신 목숨 값으로 10만원을 감사명목으로 작정한 것이다. 당시 10만원은 봉산동 땅 40평 값이었고, 셋방살이 하는 가난한 박상화에게도 거금이었다. 현재 박상화 장로님은 만 84세(1928)로 고신파 남부산노회 연제교회 은퇴 장로로 생존해 계신다.


하나님은 25,000원을 헌금으로 받으시고 10만원을 주신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리라”

이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 사건을 그 누가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나의 눈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10만원을 받은 남성교회는 문제의 방을 모래와 자갈로 돋아 올린 후에 완전한 온돌방으로 꾸몄고, 예배당 바로 앞집에 사는 김 검사 댁 방 한 칸을 세내어 방 두 칸을 사용하였으며, 당시 대구는 3국 전화를 신설할 때라 값이 엄청났지만 값비싼 청색전화를 신설하였다.



나는 당시 이름도 성도 없이 지내던 시골뜨기 전도사였는데 갑자기 대구 교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대구신학교(대신대학교) 교수가 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당회장이던 이영수 목사님이 즉시 나를 교수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믿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욱 더 매여 사는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겼다.


첫째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교회이고 다음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고 마지막이 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하신 바라 인간이 범접할 수 없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아내가 올망졸망 6남매를 키우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동참해 준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아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함께 감수하였다. 성령께서 둘을 종으로 부르셨고 둘 안에 계셔서 다스리셨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고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순종하게 하여 하나님이 성취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은총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막내의 출산


1968년은 막내를 출산한 해였다. 막내를 출산하던 날 그는 부산 큰댁을 방문 중이었는데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전화를 받고 즉시 기차를 탔다. 병실에 갔더니 그의 아내는 출산 대기실에 누워 있었고 간호원들은 출산 준비에 바빴다. 그는 이동식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의 곁에서 자연히 주변을 살피며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다. 산모가 갑자기 들이닥친 터라 의사와 간호원들이 출산 준비에 바빴는데 간호원들은 연신 산모의 얼굴만을 힐끗힐끗 보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아내를 보니 아내의 얼굴은 분명 당장에 아이가 나오는 중이었는데, 간호원들은 산모의 얼굴을 보고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판단하여 분만 대기실에서 대기하도록 한 것이다. 그가 급히 소리쳤다. “여보세요. 지금 이 정도면 아이가 나옵니다.” 간호원들이 확인해 보니 아이가 나오는 중이라 급히 분만에 들어갔다.

아이는 무사히 출산되었다. 막내의 출산이었다. 전에는 단 한 번도 병원에서 출산하거나 의사나 산파의 도움을 받아 출산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집에 있었으면 이번에도 그랬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집을 비우는 바람에 바로 두 집 건너에 살고 있는 동산병원 외과과장이던 박영관 의사 부인에게 말하게 된 것이었다. 의사 부인이 택시로 병원에 데리고 가고 입원 수속을 대신 해 주어 병원에서 생전 처음으로 호강스럽게 출산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는 평소에 아기를 출산할 때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통은 참고 얼굴 표정만 힘든 표정을 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겪는 일반적인 출산을 기준하면 아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것은 비단 출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삶에 있어서 그랬다. 결혼하고 내가 학교 사직을 할 때에도 반대 의사를 말하거나 다투지 않았다. 1956년 결혼하고 1968년 막내를 낳을 때까지 모든 일에서 그랬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로는 아내와 의견 차이를 본 적이 전혀 없었고 더욱이 다툰 적이 없었다. 전적으로 나를 따라 주었다. 항상 나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주었다.

결코 성격이 느리거나 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고 시절에는 배구 선수였기에 몸도 날쌘 편이었고 수학도 우수해서 지능지수도 높았다. 그렇다고 나와 나이 차이가 큰 것도 아니다. 우리가 결혼하던 1956년에 나는 1931년생이었고, 아내는 1934년생이었으니 불과 3살 차이였다.



그의 아내는 출산 전에 몸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았다. 박의사 부인의 안내로 산부인과를 다녀왔었는데, 산부인과 의사는 혈압이 너무 높기 때문에 아이를 지우라고 권하였다. 의사의 소견에는 잘못하면 아이와 산모 중에 누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그럴 수 없었다. 뱃속의 아이이지만 엄연히 우주보다 귀한 하나님의 한 생명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을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함부로 없애는 것은 가당치 않았으며, 또한 하나님이 주셨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의심없이 믿었다. 그가 집을 비운 것이 전화위복으로 병원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출산하게 되었고, 무사히 출산했으니 하나님의 예정하신 순서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 박 의사는 대구 중앙교회 집사님이셨으나 세 아이들은 그가 섬기는 남성교회 유년 주일학교에서 성장하였기에 평소에도 가까운 사이였다.



2011년에 아내가 뇌경색으로 응급실에서 2주간 보낼 때에도 막내는 며칠을 어머니 곁에서 꼬박 밤을 새우며 병석을 지켰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집에서 병원 거리가 35마일은 되는데도 그랬다. 물론 셋째 언니와 올케도 번갈아서 밤을 지켰다. 다른 두 딸은 오레온 주와 한국에 있어서 밤을 지킬 수 없었다. 특히 막내는 나와는 농담도 즐기는 친구이고 어머니와의 모든 이야기를 해도 되는 친구이다. 하나님께서 좋은 친구를 주셨음에 더욱 감사드린다.





34. 두 교회의 목사 교환



1) 남성교회와 성지교회


한종희는 남성교회에서 시무하던 7년(1963-1970) 동안에 아이 셋을 더 낳아 자녀는 여섯이 되었다. 그의 장모님이 오셔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셨으니 모두 아홉 식구가 되었다. 그가 교회에 부임한지 7년이 지나도 양적으로는 변화가 없었는데, 아이들이 커가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목사 가정의 생활이 교회에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한 때에 이웃의 성지교회에서 교역자를 바꾸자고 먼저 청하여 왔다. 양쪽 교회에서 다 좋아하였다.

성지교회는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목회자가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기에 남성교회로 교역자를 바꾸자는 청을 해온 것이었다. 양 교회는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성지교회는 회집만 160명에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교회였다. 결국 양쪽 교회는 목회자를 바꾸었다. 그때가 1970년이었으니 남성교회에 부임한지 7년만의 일이었다.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절대 가난 중에서 살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는 목사의 가족 수가 목사 청빙에서 우선 순위의 고려 대상이었던 시절이었다.



2) 성지교회(1970-1975)와 침산제일교회


한종희가 성지교회에 부임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에 일이다. 수석 장로님은 소천 하였고, 장로님 한 분은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로 세 분 정도는 더 장립해야 할 처지였다. 연로하신 권사님 한 분이 병환중이라 여러 권사님들과 함께 병문안을 하였다. 심방하는 자리에서 병환 중의 권사님이 교회를 걱정하여 “장로를 세워야 하는데 장로 후보자들이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고 목사님에게 물었다. 당장에 투표를 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권사님의 질문에 한종희는 세 명의 후보를 거론하였다.

한 사람은 공군 준위로서 비행기 수리창에 근무하는 분이었고, 한 사람은 그의 옛 친구로서 고신대학 교수로 있다가 대구의 한 회사에 전무로 근무하는 분이었다. 그 회사는 800명 정도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회사였는데 그의 추천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성지교회 박장로님의 아들로 성지교회에서 성장하였고 미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동산병원 내과 과장이었다. 다들 연세도 많고 모든 면에 덕이 되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목사가 가볍게 사석에서 세 분의 이름을 장로 후보로 거론한 것은 그의 큰 실수였고 또 그것이 실제로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 교회에는 유년부 부장, 중고등부 부장, 회계를 맡은 토박이 집사들이 있었으나 그의 생각에는 학력이나 나이가 적다하여 당시 후보 거명에서 말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심방 자리에는 후보의 언급에서 빠진 유년부 부장과 중고등부 부장과 회계 집사의 가족들이 있었다.

가족들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되자 그들 세 사람은 시험에 들게 되었다. 열심히 충성한다고 충성했는데 장로 후보 언급에 빠지자 그들로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 일로 교회가 3년간 시끄러웠으나 그 시끄러운 원인을 아무도 그에게 귀띔해 준 사람이 없었다. 전혀 모르다가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목사도 알게 되었다. 한종희는 자기의 실언으로 교회가 편치 아니한 것을 알고부터는 참으로 미안했다.



장로 후보의 거명에서 빠졌던 유년부 부장 집사가 부장직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애를 먹였다. 여러 번 심방하여 권해도 말을 듣지 않았는데 한 번은 심방을 갔더니 나의 말을 잘 들었다. 가구 만드는 목수였는데 손가락이 하나 잘려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 번은 장로 후보 거명에서 빠졌던 세 사람이 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아니한 사건이 있었다. 한 목사를 내보내기 위해서 세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모임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중고등부 부장이 탔던 오토바이가 굽은 길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져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다. 부장의 아내와 누님이 나에게 와서 용서하고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도 같은 죄인이고 허물이 많은데 무슨 소리냐’ 며 위로하고 매일 동산병원을 찾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며칠 후 깨어나 회복하였다. 후에 내가 그 교회를 떠난 후 장로가 되어 충성하였으니 그 셋 중에서 그 한 사람만 장로가 되었다.  



그 때에 대구 시내에 성인만 280명 정도가 회집하는 침산제일교회에서 황해영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침산제일교회 목사가 교회를 사임해야 할 형편이었는데, 목사님이 직접 한종희에게 교회를 바꾸어 달라고 청해 왔다. 그 분도 한종희가 침산제일교회의 정순 장로님에게 추천하여 교회를 받았던 터이라 침산제일교회가 한종희를 받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성지교회에 그 사실을 전하자 중진들은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장로 후보 거명에서 빠졌던 세 명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서 바꾸게 되었다. 바꾸자마자 그 청년들과 어머니 권사들이 제일 먼저 침산제일교회로 찾아와 미안한 표시로 인사하였다. 성지교회의 학생들 권사들 집사들 장로들이 차례로 찾아와 인사하느라고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같이 있을 때에는 교회가 시끄러움에 파묻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목자와 양 사이의 깊은 정을 헤어지면서 찾게 된 것이었다.


한종희가 성지교회를 떠나자 교회 입구 양편에 있던 구멍가게 아주머니들이 그가 떠난 것을 서운해 했다고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는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떡을 하면 반드시 토요일에 먼저 불신자 이웃집에 떡을 돌려 나누어 먹었다. 주일에 유년부 아이들이 떡을 들고 가면 다 볼 것이니 미리 나누어 먹게 했다.


성지교회를 5년간 시무하면서 교회 옆 한옥 두 채를 사서 터를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떠나자 후임자가 잘 지도하였고 구 건물을 정리하여 큰 길 가에 성전을 좋게 지었다. 그가 성지교회를 떠나자 장로 투표를 했는데, 그가 말했던 세 사람이 먼저 장로가 되었고 장로 후보로 거명하지 않았던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 한종희는 성지교회를 떠남으로서 성지교회의 교인들과 더욱 화목하게 되었고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후에도 성지교회가 어려울 때에도 미국에서 대구까지 와서 돕기도 했다. 그들 부부는 항상 교인들을 사랑하여 섬겼기 때문에 사택은 개방되어 식당과 같았고 김장 김치는 봄이 오기 전 겨울 동안에 늘 동났었다.

35. 배승욱 장로님



성지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배승욱씨는 경북대학교 공과대학 화공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한종희와는 동갑내기였다. 불신자였으나 신앙이 독실했던 집안을 처가로 삼았다. 부인 이영은 집사는 5년간 시무했던(1970-75) 성지교회 여선교회 회장이었다. 배씨의 여동생은 의사 장로의 아내가 되었다. 배씨는 성품이 호탕하고 선이 굵고 대화할 때에는 농담도 곧잘 하였다.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아내가 교회 섬기는 생활을 좋아하였고 목사가 심방하면 함께 가정예배도 드렸다. 공장에서 옷감을 염색하여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는데, 당시에 성지교회에서 유일하게 기사를 두고 자가용을 타던 분이었다.

한 번은 여선교회 회장이던 그의 부인이 한종희를 찾아와서 다른 여성도 세 사람과 더불어 3박 4일간 산상기도를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30대 후반과 40대에 막 접어든 여성들이었는데, 넷 다 식모가 있었고 생활이 유족하였다. 네 가정 중에서 배씨와 한의사가 불신자였다.


“다녀오십시오. 단 남편들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다녀오십시오. 남편 허락 없이 아이들과 식모만 집에 두고 주부가 집을 비우는 것은 신자로서는 결코 행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남편의 허락 없이 아내가 3일이나 남편과 분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 허락하지 않습니다(고전7:4-5). 그러므로 산에 갈 형편이 아니거든 본 교회 새벽기도회에 출석하든지 본 교회가 먼 사람은 이웃교회의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하십시오.”


당시에 나의 목회 방침은 철통같이 강했고 교인들이 감히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고등부 학생회 회장이 여자 부회장과 은밀히 데이트 하는 장면을 목격하자 회장직을 사면시켰다. 고등부 학생들이 여러 번 목사의 지도를 거역하자 학생회 회장과 지육부장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작대기로 종아리를 때렸다. 제직회와 당회와 교회 운영에서 범사에 단호하였다.



결국 여선교회 임원들의 산상기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배승욱씨가 교회 출석을 시작하였다. 산행 금지 사건이 배씨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목사가 여성도들의 산행 기도를 막는 것은 당시의 정서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성지교회는 방언파가 있었고 항상 예배당에서 밤을 세우는 철야기도 그룹이 있었는데, 기도하기 위한 여성도들의 산행을 막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정서였다. 아내의 산행을 막아주는 담임 목사의 지도가 불신자 배씨에게는 신선하게 비쳤다.

배씨는 그가 성지교회를 떠난 후에 바로 집사가 되었고 건축위원장이 되어 자기가 헌금하여 큰 도로변에 있는 부지를 구입하였고, 구 건물을 정리하고 더 헌금하여 예배당을 아주 크게 신축하였다. 예배당 공사 시작 예배에 그를 초청하여 설교하게 하였고 기쁨을 함께 하였다. 배승욱 집사는 곧 장로가 되어 굵게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미국에 이민한지 8년이 되던 1986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배승욱 장로는 나에게 간청하기를 대구 변두리 호텔에 함께 유숙하며 회포를 풀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성지교회와 후임 목사를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자기 집에 유숙하며 함께 지내자고도 간청하였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전임 목사와 교회의 유력한 장로가 너무 친밀하면 후임 목사에게는 부담이 되고, 또한 목사가 부자에게 안기는 듯 보이면 가난한 교인들은 외로워하고 허전해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배승욱 장로 내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임 목사와 다른 가난한 교인들과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내가 떠날 때에 배 장로는 배웅하며 아이들 선물대라 하면서 100만원을 주기도 했다.

36. 침산제일교회(1975-1977)



1975년에 대구성지교회를 떠나 대구 침산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주일 회집 수는 장년 280명 정도였고 네 분의 시무 장로가 있었고, 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서 연세 많은 장립 집사와 권사들이 많았다. 전임 목사는 2년 전에 부임하였지만 당회와 마찰이 있어 떠나야 할 형편에서 두 목사가 강단을 교환하여 한종희가 부임한 것이었다.


당회는 가장 연세 많은 정순 장로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거의 그 한 분의 의사로 안건이 처리되고 있었다. 당회에서 목사가 수석 장로에게 말하였다. “장로님, 이제부터는 당회에서 5분의 1 역할만 하세요.” 나의 전 담임 목사도 내가 수석 장로에게 추천하여 부임했었고 나도 수석 장로가 환영하여 받았으니 나도 모르게 앞 뒤 재보지 않고 가볍게 한 말이 큰 실수였으나 내가 교회를 떠난 지 10여년이 지나고서야 실수임을 깨달았다.


그가 실언하고도 교회는 마찰없이 조용히 지냈고 아무 일도 없었다. 2년 동안에 장로와 집사도 더 많이 장립하였고 권사도 더 많이 세웠다. 남녀 전도사도 목사의 지시를 잘 받았다. 그런데 당회에서 이변이 생겼다. 당회는 담임 목사 위임을 하지 않고 임시 목사로 사역하게 하더니 2년이 되었을 때에 담임 목사의 사면을 결정하였다. 대구 시내에 있는 비산제일교회로 이동을 결정하고 침산제일교회에서는 사면시켰다.


비산제일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안 된 작은 교회였다. 교회가 작아 목사 생활비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침산제일교회가 지급하던 월 15만원에서 부족한 금액 10만원을 매달 지원하겠으니 1년 후에는 자립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비산제일교회 건물은 떠나는 전임 목사님의 아들이 월남에서 전사하여 받은 전사금으로 지은 예배당이었기 때문에 그 200만원을 드려서 나가게 해야 했다. 하지만 비산제일교회는 재력이 없으므로 침산제일교회가 건축비로 비축한 재정에서 빌려주며 교회가 부흥하는 대로 갚으라고 하였다.

한종희는 침산제일교회의 갑작스런 처사에 대하여 원망 불평은 없었다. 교회가 목사의 설교를 싫어하면 목사는 당연히 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믿었고, 나갈 곳 없이 나가라고 해도 조용히 나가야 하거든 하물며 나갈 곳까지 준비하고 나가라 하니 당회의 처사에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러므로 당회와 그의 사이에는 전혀 마찰이나 분쟁 없이 조용히 사표가 수리 되었다.


그런데 새로 가는 교회에는 사택이 없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6남매와 장모님을 합쳐 아홉 식구였고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맏이가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두 교회가 사택에 대하여는 전혀 대책이 없었고 아무 말도 없었다. 교회 이동이 확정되었으니 사택은 목사가 준비해야만 했다. 6남매를 교육시키며 대학생까지 있었으니 그는 스스로는 사택을 준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아홉 가족이 들어갈 수 있는 단독 주택을 전세 내려면 200만원이 필요하였다. 별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200만원을 모금하기로 하고 나섰는데, 한 달 안에 200만원이 모금되었다. 모금에는 교회 회계가 관여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부산 큰집과 서울 사촌 처제가 각기 30만원씩을 도왔고, 대구시내 봉산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음악교사였던 김승호 선생이 30만원을 도왔다. 김승호는 그와 같이 음악동호회 회원이었으며, 김승호의 처남이던 김무목 목사님은 그와 총신 동창으로 돈독한 친구였다. 나머지를 대구 시내의 몇몇 장로들과 목사들이 도왔다. 교회를 사임한지 한 달 만에 침산제일교회 사택을 비워줄 수 있게 되었다.



이민의 과정


한종희는 비산제일교회에 부임한지 5개월 만에 여덟 가족이 미국영주권 비자를 받았다. 물론 영주권을 받기까지는 그 가족의 이민에 대하여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이민의 뜻을 교회에 미리 말할 수 없었다. 월남이 공산화 되어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한 후였고 미국 37대 대통령(1969-1974) 닉슨이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라가 안팎으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그것이 그 당시 한국 사회의 정서였다.

이인재 목사님은 서울에서 목회하다 은퇴하고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하던 동생 이명재 목사님의 초청으로 이민하였다. 이인재 목사님이 1975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나는 이민의 뜻을 말하며 가족 초청을 부탁하였더니 1976년에 초청장을 보내주었고 1978년 3월 첫 주간 월요일에 8 가족이 영주권을 받았다.

비자를 받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엄마의 여권에 얹힌 어린 넷째, 다섯째, 여섯째 중에서 넷째가 14세가 넘어 단독 여권을 소지해야 했다. 또한 큰 아들이 같은 주간 토요일이면 만 21살이 되는데, 만 21세부터는 군복무를 마쳐야만 출국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중학교 3학년이던 남동생도 형을 따라 21살까지 한국에서 기다렸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출국해야 했다. 그러니 미국 시간으로 금요일 밤 12시 이전에 그의 가족이 탄 비행기가 미국영토를 통과하거나 도착해야만 두 아들이 온 가족과 함께 갈 수 있었다.


급히 서둘러 수속을 밟았다. 월요일에 서울에서 비자를 받았지만 화요일에 넷째(둘째 딸)의 여권 수속을 하고 화요일 밤 늦게 대구에 도착하였다. 밤10시에 제직회를 열어 비로소 교회에 미국 이민을 알렸고 원일교회 김성수 목사님이 임시당회장과 제직회장을 맡게 되었다. 수요일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두 형수님들이 오셔서 함께 이삿짐을 꾸려서 부쳤다. 나는 아무에게도 인사할 시간이 없어 노회 서기이신 신세원 목사님에게만 인사하고 가족과 함께 목요일 아침에 고속버스로 대구를 떠났다. 비산제일교회는 이민 가는 목사에게 당시에 전별금으로 50만원을 주었었다.


미국에 이민한지 8년 만에 대구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사택비 명목으로 모금하고 곧 이민 가는 것을 보고 이민가기 위해서 모금했구나 생각했는데, 전세금 200만원 전액을 비산제일교회에 두고 간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침산제일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집


미국에 이민하고 수년이 지나서 침산제일교회 김정권 장로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교회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집을 발간하려 하니 글 한 편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글을 쓰려하니 망설여졌다. 내가 침산제일교회에 부임했을 때에는 나이가 44세에 불과하여 경험부족과 철이 들기 전이라 조심 없이 말하고 처신하여 교회행정에서 질서를 깨고 평화를 깼던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순 장로님은 교회 초석을 놓으신 분이었고 북한에서 피난 와 평생을 한 교회만을 섬겨온 충성스러운 분이었다. 다만 그 분의 공적이 크고 지도력이 강하여 권위가 강력했기 때문에 주일 오전에 장년 교인 전체가 참석하는 주일학교를 22년간 홀로 가르치고 있었고 부인이 16년간 홀로 여전도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내가 부임한 첫 해에 연말 당회에서 두 번째 서열인 김정권 장로님에게 장년주일학교 교사직을 담당하게 하였고, 여전도회 연말 총회에 참석하여 회장직을 다른 분이 맡게 지도하였다. 이 두 사건이 나를 2년 만에 사면하게 작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한 것이 교회를 위해 옳았다고 생각되었지만 40주년 기념집을 놓고 회고록을 쓰려하니 나는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40년의 전통과 역사를 바꾸려면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였고 또 가급적이면 본인이 알고 스스로 후배에게 직책을 넘기는 것이 교회의 전통과 역사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혁명식으로 단숨에 뒤엎어버렸을 때에 22년과 16년의 노고와 충성은 온 데 간 데 없고, 도리어 두 내외분이 한꺼번에 죄인으로 부각되고 말았으니 그 마음에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겠으며 그 충격이 오죽이나 컸겠는가!


나보다 10여년 연배인 정순 장로님은 나보다 한 주 뒤에 미국에 이민하여 먼저 소천 하였지만 미망인과 가족들을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이 컸다. 처음에는 글 쓰는 것이 망설여졌으나 결국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의 미숙을 글로 써서 보냈고 그대로 40주년 기념 집에 들어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단순히 잘못 되었다는 내용만 써 보냈지만 이번에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밝히게 되어 마음이 후련하다. 상처받은 가족들은 40주년 기념집으로 어느 정도는 마음이 편안해졌겠지만 더욱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제 5 장. 미국 목회






37. 시카고에서

38. 덴버에서

39. 샌프란시스코에서

40. 목회 은퇴

41. 미국의 문화

42. 목회활동을 위해 자제했던 일들



1975년에는 내가 가까이 지내던 김의환 목사님이 미국에 이민하였고, 내가 스승으로 모시던 세 분들도(박윤선, 이상근, 이인재) 다 이민하여 미국에 계셨다. 김의환 목사님은 동희 형과 친구였고, 김의환의 손위 처남 강유중 박사(화란 박사)는 나의 대구 목회 시절에 나와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너무나 외로워서 이인재 목사님이 1975년에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부탁하여 미국 이민 초청장을 받았고 여덟 가족이 1978년에 시카고에 이민하였으며, 콜로라도 덴버에서 목회하다가(1978-1984)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옮겨 1998년까지 목회하다가 바르트신학 책 집필을 위해서 사면하고 만 3년간 원고를 정리하여 합동파 총회가 출판하였고(2002), 그 후로는 지금까지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 집필에 전념해 왔다.

37. 시카고에서



한종희와 그의 가족은 1978년 3월에 시카고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방 두 칸의 아파트를 월 180불에 세내어 입주했다. 부부와 네 딸이 한 방씩을 사용하고 두 아들은 거실에서 잤다. 그를 초청한 교회는 보직 없이 초청만 했기 때문에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도 직장을 구하여 공장에서 일했고 그의 아내는 TV를 만드는 공장(Zenith)에서 일했다. 그가 구한 직장은 헌 천막을 수선하는 일이었다. 보통 천막이 아니고 화물 자동차를 덮는 덮개였기 때문에 그 천이 쇠가죽처럼 두껍고 무거워서 작업 과정이 중노동에 속했다. 새 천막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찢어진 헌 천막을 꿰매고 당기고 접고 옮기고 하는 전 작업을 손으로 하였기에 더욱 힘들었다.


이민간지 한 달 남짓한 4월 초에 필라델피아에서 목회하는 이종윤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교회 헌신예배에 설교해 달라는 전화였다. 한종희와 이종윤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당시 LA 개혁신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이상근 교수님이 필라델피아의 교회 장로였던 사위 지창욱에게 한종희를 소개하신 후였다. 하지만 그는 헌신예배에 가지 않았다. 미국도 잘 모르고 또 초청해준 교회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에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같은 전화를 다시 받았지만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며칠 후 월요일에 지창욱과 이종윤은 비행기로 시카고에 와서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는 임시직이라 결근할 수도 없었기에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는 직장에 나갔지만 결국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수요일에 따라나섰다. 한종희는 주일에 설교하고 월요일에 비로소 제자 신해균 장로님 집에 들려 하루를 쉬고 돌아왔다. 물론 직장은 떨어지고 말았다. 이종윤은 그와 초면일 뿐만 아니라 연대 동창인 김만우 목사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창욱과 이상근의 청원을 가볍게 넘기기 힘들어서 인사로 그를 강단에 세웠었을 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 초청해 주신 이명재 목사님의 맏사위 장로님이 주중에 그를 데리고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그 당시 처음으로 들어간 식당이 맥도날드였고, 햄버거를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장로님이 매일 나오실 수 없으므로 그와 아내는 함께 아침을 먹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시카고 북쪽 공장지대에 가서 공장마다 들어가 일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미국에 이민간 목사의 처음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미국에서는 작은 교회를 시무하는 미국인 목사들이 일하는 것이 일반이라 그의 행동이 그 나라에서는 흉이 되지 아니했다.


그 때에 내가 직장을 구하려고 공장지대를 방문했을 때에 나는 참으로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일자리가 없다고 간단히 말하는 곳도 있었지만 거의가 예외 없이 하는 말은 지금은 일자리가 없지만 일자리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정중하게 말하면서 연락처를 적어놓고 가라는 것이었다. 말도 더듬거리는 서툰 영어에 동양 사람이니 쓸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그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훗날 안 일이지만 미국은 누구나 개인이 총기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이 총기가 사고의 원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의와 질서를 지켜지게 하여 주는 안전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총기 소지 법을 개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종희는 결국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강철회사에 직장을 잡았다. 그 당시의 최저 임금이 2불이 조금 넘었는데, 강철회사는 초임이 5불이 넘었고 6개월 수련 기간이 지나 정직원이 되면 7불이 넘는다고 하였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그의 큰 아들은 미국에 와서 대학에 가지 못하고 동생들을 위해서 일하였다. 6개월이 되었을 때 큰 아들이 예배 반주를 하던 교회의 목회자였던 이진삼 목사님이 그에게 덴버교회를 추천하였다. 자기 친구 목사가 덴버에서 목회하다가 플로리다 지방으로 가게 되어 교회가 비었으니 가 보라고 하였다.


6개월간 공장에서 일하면서 주일이면 강단에서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앞뒤 생각지 않고 덴버로 가서 선을 보았고, 교회는 나를 원하였다. 교인은 25명 정도였고 매달 4백 불을 사례금으로 줄 터이니 일하며 목회하라고 하였다. 얼마나 설교하는 것을 원했든지 앞뒤 재보지 않고 무조건 이사하였다. 시카고에 있으면 7개월 후에는 월급이 1,200불이 넘는데도 월 400불 준다는 덴버 교회로 가기로 한 것이다.

시카고에서 덴버는 1,600km이니 4천리 길이었다. 여덟 명의 온 가족이 앞과 뒤가 찌그러진 8기통 웨건을 타고 뒤에는 이삿짐을 실은 짐칸을 달고 갔다. 헌 승용차 웨건은 800불에 구입했는데 수리비가 차 값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민 초년생이 겪어야 했던 과정이었다.





38. 덴버에서              



부임한지 2달 만에 사임하다


한종희에게는 덴버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마치 다 큰 나무들을 파서 옮겨 심은 것과 같아서 교인들도 이질문화권에서 겪는 교회생활이 말이 아니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비록 한국인 교회를 섬겼지만 사는 곳이 미국의 생활권이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많았다.

덴버교회 교인은 25명 정도였고 두 가정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운영하였는데 두 가정의 가장 되시는 두 분 다 그보다 연세가 많았다. 한 분은 한국에서 경찰서 서장을 지냈고 다른 분은 농협지점장을 지내신 분이었다. 두 분 다 신앙생활은 가족을 따라 미국에서 시작하신 분들이었는데, 한국의 직장 생활에서 부하들을 거느렸던 분들이라 젊은 목사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일일이 명령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두 달 가량을 지냈는데 그가 자기 주장을 하다가는 분쟁만 일어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형편도 아니었다. 그는 분쟁은 불신자들에게 전도는 고사하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되겠기에 사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임의 이유를 밝히면 두 분을 탓하는 것이 되어 더욱 강한 분쟁에 빠질 염려가 있기에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고 조용히 사임하였다.

덴버에는 박윤선의 둘째 아들과 둘째 따님이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한 번은 자동차가 가다가 문제가 생겨서 근처의 카센터에서 즉시 고쳤는데 고친 곳에서 불과 수백 미터 정도 갔을 때에 엔진부분에서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가까운 카센터에 들려 살펴보니 라지에타에 구멍이 나서 김이 치솟은 것이었다. 처음에 간 카센터에서 수리하다가 기술자가 라지에타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라지에타 부품을 바꾸고 처음의 카센터에 배상을 요구했지만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후에 박윤선의 사위 유걸 씨와 함께 가서 말했으나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군인 청년 주씨와 같이 다시 가서 말했을 때에는 순순히 배상해 주었다. 유걸 씨는 점잖게 말했지만 주 씨는 거의 협박조로 말했더니 순순히 배상해 주었다. 인생을 배우고 미국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후 처음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수요일 밤에도 출석하였다. 한 교회를 정해 놓고 다니지 않고 교회를 바꿔가며 출석하였다. 찬양만 40분 정도 하는 교회도 있었는데 오순절파 순복음교회 였다. 그러고 2주가 지난 주일오후에 청년 세 사람이 한종희의 집을 찾아왔다. 그 청년들은 그가 부임했던 덴버교회에 출석하던 미국 군인들이었다. 세 청년이 다 미혼이었는데 목사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교회에서 사라지고 없자 사택을 찾은 것이었다. 사임의 이유를 듣더니 목사님 자택에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자고 간청했다. 객지에서 외롭던 차에 청년 세 사람과 그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곧 미국교회의 방을 얻어서 예배를 드렸다. 불과 2개월 만에 교인이 20여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교회 버스를 사자고 할머니  한 분이 졸랐다. 그래서 그는 아직은 교회 버스 살 형편이 아니라고 했더니 주일 예배를 마치고 친교 시간에 한 여 집사가 일어나서 종이에 써온 그의 죄목들을 나열하며 성토하였다. 물론 성토한 분은 혼자가 아니었다. 즉석에서 어떤 군인이 목사에게 말하기를 “덴버 길에서 똥을 치워야겠다”고 하며 걷어붙이고 나섰다. 형편을 보니 수습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다시 세 군인 청년이 중심이 되어 침례교회 예배당을 빌려 따로 예배를 시작하고는 평안하게 되었다. 당시는 이민 초기라 누구든지 힘을 쓸 만하면 교회 주인이기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 한국인 교회들의 형편이었다. 게다가 그도 처음 겪는 일들이라 매사에 서툴렀다. 불과 수개월 만에 교회를 세 번째 개척한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들이 빌려서 예배를 드리던 미국 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중남미에 선교사로 갔었던 분이었다. 그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들을 편하게 대해 주었다.


이렇게 홍역을 치르는 동안에 나와 헤어진 교인들이 목사의 흉허물을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나는 결심하였다. ‘결코 내 변명을 스스로는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변명은 부득이 교우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되어질 것이고, 그 후에는 다시 분쟁에 휘말릴 것이니 관계가 나빠지면 교회가 빛을 잃고 말 것이므로 이 모든 불행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 일절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일이 많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빛을 막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범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변명 없이 지내도 억울하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다. 내가 그 지역을 6년 후에 떠났지만 시종 그 누구에게도 변명하지 않았기에 분쟁은 더 일어나지 않았고 잠재워졌었다.



그 때 한종희의 소식을 접한 LA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연락이 왔다. 먼저 LA 지역에 살고 있던 김의환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렌지 카운티 지역으로 와서 박윤선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면 금방 교회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니 LA로 오라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던 이근신 목사님은 이사 비용 3천 불을 빌려 줄 수 있으니 산호세(San Jose)에 와서 개척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LA에서 개혁신학교 교장이던 이상근 목사님이 신학교 이사장이신 조천일 목사님에게 한종희를 도와달라고 간청하여 1979년 3월에 조천일에게서 전화로 그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LA의 빌라델비아교회를 방문했더니 ‘매월 300불을 지원할 것이니 우선 일하면서 덴버에서 개척해 보라’ 는 제안을 하셨다.

덴버는 고산지대이기에 3월이면 혹독한 겨울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로키산맥을 차로 넘어 이사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3 가지 길을 놓고 고심하다가 조천일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매월 300불의 지원을 받으며 덴버에서 서머나교회를 개척했다. 지원을 받기 시작한 후부터는 쉽게 떠날 수 없었는데 5년 동안 지원을 받았다.


한종희는 그럭저럭 덴버에서 서머나교회를 시작한지 5년이 되던 1983년이었다. 교인은 한 40명 정도가 되었고 직장을 그만 두고 목회에만 전념한지도 2년이 흘렀다. 교회에 출석하던 황기석이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LA에 계시고 덴버에 있는 대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었다. 몇년을 그와 같이 지내다가 말했다. “목사님 목회를 하시렵니까? 그만 두시렵니까? 결단을 내리십시오. 술에 물 탄 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로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 가시렵니까?” 그 청년은 최헌우 목사님 밑에서 자랐고 장로님의 아들인데 아주 당차고 현명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때에 대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집사를 임명할 대상이 없었고 그렇다고 목사가 돈을 만지거나 교회 살림을 해서는 안 되겠기에 교회 운영을 위해 운영위원을 명하여 위원회가 교회 살림을 하게 했다. 하지만 운영위원회를 이끄는 연장자가 믿음이 없었다. 부인은 미국에서 약사였고 남편은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와서 덴버에서 지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연방정부가 관장하던 미국 서부지역 개발국 토목설계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운영위원의 누님은 대구에서 동산병원 수간호사로 한종희가 시무했던 교회의 집사님이었으며, 그의 아버님도 대구에서 잘 알고 지내던 장로님이었다.


이 운영위원의 서울 대학교 동창생 둘이 가족들을 데리고 유학 와서 지질학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그 두 불신자 가족도 그가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앙 없이 교회에 출석하니 설교도 윤리적인 권면이나 헌신이나 충성을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려고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해설하며 수년을 보냈다. 이러한 목사의 중심을 제대로 볼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청년에게는 목사의 모습이 맥 빠져보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종희는 1983년 가을에 결단을 내렸다. 연말은 왔고 새해에는 교회에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교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뜻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 운영위원회를 이끌어오던 연장자 가족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심방을 했더니 서슴지 않고 말했다.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목사도 오래 참았지만 그 분도 오래 참은 것이었다. 그러나 쏟은 물을 거둘 수는 없었다. 믿음이 확실한 대학생을 집사로 임명하고 회계 임무를 맡겼다. 신년도 예산을 짜보게 했더니 교회 실정에 맞게 제대로 짰다.


봄에 LA 산상 기도원에 가는 기회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처음으로 비행기 표를 사주었다. 조천일이 한종희에게 전화하여 산상기도회에 오라고 하였다. “우리의 스승 박윤선의 친구 방지일을 모시고 산상기도회를 하니 아들 같은 한종희도 와야 한다.” 산상 기도회에 갔다. 비행기 표 값이라고 하시며 봉투를 주셨다. 본 교회에서 이미 비행기 표 값을 받았다고 하여 사양했더니 개척교회 목사가 별 소리를 다 한다고 하시며 기어코 주셨다. 그래서 그 봉투를 받아 본 교회 회계 집사에게 주었다. 한 가지 명목으로 두 곳에서 비행기 값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회계 집사는 받아들였다.

39.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으로 이민간지 6년 만에 처음으로 생활이 안정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던 최영교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회자를 찾는 교회가 있으니 와 보라는 것이었다.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에는 한국을 왕래하는 비행기가 있어서 한국인의 왕래가 많았지만, 덴버는 한국을 왕래하는 비행기도 없었다. 5년간을 덴버에 살면서 사범학교 1년 선배인 김상철 장로가 미국 동부에서 목회하던 동생 김상복 목사님을 방문했다가 그를 만나고자 덴버를 방문해 준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던 최영교에게 목회지를 부탁했었는데 1984년 봄에 연락이 온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김상권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던 교회가 있었는데 풀러(Fuller) 신학교 박사과정 중에 있던 최영교를 김상권이 초청하여 목회하게 하였다. 김상권과 교인들 몇 가정이 30마일 떨어진 지점에 살면서 샌프란시스코 교회를 출석하다가 사는 지역에 기성 예배당을 구입하여 에덴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김상권은 1년동안 설교하였으나, 연세가 많으셔서 차 운전을 못 하고 심방을 못 하여 한종희를 담임 목사로 초청했다(1984. 9.). 교회는 설립한지 1년 정도로 30명이 모였으나 자체 예배당에 여유 있게 자립하는 교회였다.



에덴교회를 사임하다


한종희는 1984년 4월에 에덴교회에 부임했으나 만 1년을 채우고 1985년 3월 말로 사임하였다. 그가 부임하고 부터는 교회에는 부흥의 기운이 감돌며 새로운 교인들이 한 두 사람씩 찾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12월 원로 목사님이 뉴욕에 있는 의사 아드님 댁에 3개월간 다녀오시자마자 그를 부르시고 고함을 지르며 책망하고 교회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즉시 대답했다. “다음 주일에 그만 두겠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그만 두면 시끄러울 것이니 조금 기다려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원망 불평도도 없이 조용히 처분을 기다렸다.


해가 바뀌고 3월이 다 간 마지막 주간 월요일 아침 7시에 교회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도 전혀 몰랐던 부흥회를 하자고 하였다. 강사는 원로 목사님이 후임으로 추천하려는 분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의 의중을 감지하고는 즉시 부흥회를 하자고 답하고 수요일에 당회를 소집하여 부흥회를 결의하고 사표를 냈다. 다음 주일부터 강단에 설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그날로서 사임하겠다고 뜻을 말하자 다음 주일 설교는 하고 그만 두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가 사임하였으나 장로님들의 반대로 원로 목사님이 추천한 목사는 모시지 못하고 다른 분을 모시게 되었다.  


한종희는 1984년 12월에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이듬해 3월까지 그의 사정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떠날 때에 따라나선 장로나 집사가 전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덴버에서 그를 따라 이사 왔던 여 집사가 그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자 그를 따라 나왔다. 그 과부 집사는 10학년 딸이 있었는데 그의 네 딸 중 같은 또래가 있었기에 딸의 친구를 따라 나온 것이었다.


사임한 교회에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CRC 교회를 빌려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CRC 교단은 그를 미국에 초청하신 이명재가 1960년대부터 회원이고 김의환도 회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교회는 그의 가족이 본당을 사용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환영하였고 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 드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1년이 지나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정도가 되자 교통이 좋은 곳에 감리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어 CRC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에 CRC 교회 목사님은 같이 있자고 만류했으나 떠났다.



한종희는 처음 에덴교회를 사임했을 때에 앞길이 막막하였다. 그가 에덴교회에 있을 동안 왔다가 떠난 사람이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연세는 그와 비슷했으며 아들이 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교회를 정하여 정착했으니 떠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에덴교회에서 30마일(46km) 떨어진 곳에 사는 박태균 장로님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를 미국에 초청해 준 이명재의 둘째 사위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토목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연방정부 공무원이었다. 부인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하여 주정부 공무원이었다.

박태균은 그의 사정을 듣더니 가족은 다니던 미국교회에 계속 있게 한 채 자기 혼자 와서 돕겠다고 하였다. 서울대학교 동창 두 가정을 더 데리고 첫 예배에 출석하였는데 이 두 가정을 따라나선 가정이 둘 더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그가 시무하던 에덴교회에서는 집사 권사 장로 한 분도 그를 따라 나온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의 친구들도 예배에 함께 참석했다. 박태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한 일이 없었지만 첫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의 가족 8명을 포함해서 32명이였다. 이렇게 내몰려서 어렵게 성지교회는 시작이 되었다.

1년이 지난 후 교회 수입이 월 2,000불이 되자 박태균은 교회 예산을 목사생활비와 경상비를 ‘6 대 4’ 로 편성하여 목사에게 1,200불을 지불하였다.




이현달 목사님이 학장으로 있고 김상권 목사님이 이사장인 신학교가 있었는데, 교수들과 이사들의 합동 모임이 있어 참석했더니 김상권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목사가 노회에 가입한다며?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걸!“


기막힌 말을 들은 것이다. 내 보내는 것은 내 보내는 측의 권한의 문제이니 나는 조용히 나왔지만 교회를 세워 노회에 가입하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 법인가? 그 날 즉시 최영교 목사님을 증인으로 동행하게 하고 김상권 목사님 자택을 방문하여 항의하였다. 그리고 사과를 받았다. 그 후 최영교 목사님을 증인으로 하고 김상권 목사님 내외분을 초청하여 대접하고 화해하였고 노회에 갈 때에는 내 차로 모시고 다녔다.


성지교회 창립 1주년에 이인재 목사님을 강사로 모신 부흥회에서 김상권 목사님이 축도하게 했는데 두 어른은 한국에서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말도 놓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김 목사님은 1930년대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신 노장이었고 이인재 목사님은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분이다. 그 때에 김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한 목사, 에덴교회 사면하고 독립한 것 백번 잘한 일이다. 지금 얼마나 좋으냐 !”


나는 에덴교회를 사면하고 나오는 일이 참 감당하기 힘겨운 일었지만 지나고 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 산호세 임마누엘장로교회 함영선 장로님은 전혀 모르는 분이었는데 2008년에 처음 만났을 때에 나에게 너무나 많은 호의를 베푸시기에 한 번은 물었다.

“장로님은 처음 만나는 저에게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호의를 베푸십니까?”

“1985년에 한 목사님이 에덴교회를 사면하시는 것을 산호세 남부교회 장로였던 나의 장인어른이 보시고 한 목사님을 훌륭하신 분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에덴교회 사면 건은 23년 전의 일인데도 함 장로님은 그때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다.

뉴욕에 수천 명이 넘게 모이는 이영희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부흥회를 다녀와서 어깨를 펴고 자랑하던 총신 후배 목사가 있었는데 내가 에덴교회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고부터는 나를 만나면 90도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작은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분에 넘치는 큰 상을 베푸신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아느냐, 얼마나 지체 높으냐를 보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를 보았다.

40. 목회 은퇴



1998년, 한종희가 만 67세 되던 해였다. 1956년부터 연구해 오던 칼 바르트신학의 분석이 완성된 해였다. 바르트신학 분석에는 40여 년간 연구한 현대 철학이 밑거름이 되었다. 완성한 바르트신학의 분석 내용을 책으로 엮으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므로 분석이 끝나자 즉시 교회를 사임하고 책 집필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만 3년 걸려 원고를 완성하고 이듬해(2002)에 한국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출판부가 출판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가 개척한지 만14년이 되어 자립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당시에 그는 사례금으로 매월 2,000불을 받았는데 교회 사택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의 아파트비가 2,000불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질환으로 1991년에 직장을 그만 둔 상태였으나 방 한 칸의 아파트비가 월 700불이었으므로 생활이 충분히 되었다.

은퇴 전 10여 년 동안은 한국 부흥회를 몇 곳 다녀왔고 브라질 쌍 파울로 신학교 강의를 8회 다녀왔으나 비행기 값을 뺀 나머지 사례금 전부를 교회에 반드시 헌금하였음으로 교회와 그와의 관계는 원만하였고 평화로웠으며, 부흥회를 위한 그의 출타나 신학교 출강을 교회는 반겨주었다.  



한종희는 교회를 은퇴하기로 했을 때에 당회에서 교회 문을 닫고 교인들을 흩어 각자 교회를 찾아가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장로님 두 분이 절대 반대하였다. 교회가 이토록 은혜롭고 평화로운데 왜 교회 문을 닫아야 하느냐며 반대하였다. 그가 1986년에 헤이워드 다운타운으로 교회를 이전할 때에는 헤이워드 지역에 교회가 없었다. 다만 그들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감리교회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사이에 헤이워드에 많은 교회가 들어섰다. 특히 교회가 있는 같은 길 양쪽으로 한 쪽에는 순복음교회가 반대편에는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성지교회와의 거리는 둘 다 300m 안팎이었다.

다 같은 복음을 전하면서 세 교회가 나란히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 쪽에는 가지 말고 서로 자기 교회로 오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고, 복음주의 교회들끼리 경쟁하는 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고, 불신자들에게는 비방의 빙거를 주는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욕 돌리는 것이라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졌다. 다른 교회더러 문을 닫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침 그가 은퇴하게 되었으니 문을 닫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로님들과 교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후임 목사님을 청빙하였지만 떠나는 교인들이 생기자 2년이 지났을 때에 후임 목사님은 사임을 밝히고 교회를 떠났다. 그래서 원로목사였던 한종희는 결단을 내렸다. 교인들이 교회 흩는 것을 싫어하니 교회를 주일학교가 갖추어진 교회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능한 목사를 모시기로 하고 시애틀에서 박수준 목사님를 모셔다가 교회에 선을 보였다. 그리고 생활비로 월 2,000불에 사택비 1,500불을 더해 드리자고 제안하였다. 사택비 마련은 원로 목사 은퇴금과 유급 반주자 사례금을 사택비로 전환하여 마련하자고 하였다. 당시 교회에는 유급 반주자 외에 무급 반주자도 있었기 때문에 반주자 사례비를 사택비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때는 이미 목사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한 목사가 5명이 있었지만 힘들어도 유능한 목사를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회원 중에서 생활비 없이도 오겠다는 목사가 있는데 왜 사택비까지 더 지급해야 하느냐며 반대하였다. 교회가 분쟁으로 비화될 것을 염려하여 그리고 손자들을 위하여 그는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로 떠났다. 물론 은퇴연금도 받지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 그에게는 은퇴연금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분쟁 없이 헤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였고 손자 손녀들의 신앙 교육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분쟁으로 인한 불화는 하나님 나라를 어지럽히는 범죄라고 생각되었다.


한종희와 그의 가족이 간 교회는 같은 노회에 속한 교회이며 장년반이 30명 안팎으로 주일학교가 잘 운영되었고 은퇴한 원로 목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도 간지 2년 만에 시끄러워져서 그와 가족들은 비로소 흩어지기로 하고 각자 원하는 교회로 가게 되었다. 쓴 경험을 하고나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작은 교회일수록 목사의 많은 가족이 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외줄타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 그의 가족이 갔던 교회가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쉽게 시험에 든 것이었다. 또 담임 목사가 목회가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한 몫 했었다. 가족들이 흩어지고부터는 다 편안하게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성도 개인의 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평안과 평화는 첫 번째로 지켜야 할 덕목이 아닌가! 성도는 어떤 경우에서도 평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서신서를 쓸 때면 반드시 은총 위에 평안을 더하여 기원하였다. 나의 목회 은퇴에 따른 어려움이 2년으로 끝났고 평안을 다시 찾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41. 한종희가 바라본 미국의 문화



청교도적 제도의 정직성


미국 문화는 한국 문화와 다른 점이 많았다. 청교도들이 물려준 깨끗한 도덕생활이 미국을 개척했던 북부 유럽인들에게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정착한 곳이 시카고였다. 3월 초에서 9월까지 7개월 동안 살면서 길을 걷다가 길 안내를 몇 번 받아 보았고, 시카고를 떠나 외국인이 별로 없는 중부도시 덴버에 살면서 길 안내를 받아 보았다. 북구 유럽인들은 대단히 친절하였으나, 키가 작은 남부 유럽인들(스페인, 폴튜갈, 이탈리아)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웃을 돕는 정신이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이 전혀 달랐다. 그런데 북부는 개신교 문화권이고 남부는 가톨릭의 문화권이다. 청교도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만 카톨릭권은 그렇지 않았다.



자녀들 여섯 중에서 5남매가 초중고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운동선수가 과목 하나만 낙제하여도 그 선수는 아무리 탁월한 선수라도 선수로 뛰지 못하게 하였다. 낙제한 과목을 끌어올려야만 운동선수로 뛰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적 정직성이 시카고나 덴버가 동일하였다. 봉사적인 생활과 정직한 생활이 사회와 학교 어디에서도 지켜지고 있었다.

1978년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겪었던 일인데, 공중전화가 15센트 동전을 삼키고 통화는 하지 못했다. 즉시 교환수가 나와 주소와 이름을 대라 해서 말했더니 며칠 후에 15센트 수표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비단 이것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직성이 삶의 바닥에 깔려 있음을 목격할 때마다 놀라게 되었다.


나는 조금 철이 들기 시작했던 10대부터 감옥에서 나오신 분들(손양원, 주남선, 이인재, 한상동)에게서 감화를 받으며 자랐고, 일본 국회에 들어가 2층 방청석에서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일본은 망한다”는 두루마리를 사회석으로 던지고 그 길로 순교하신 박관중 장로와 역시 순교하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옥중기를 파숫군 지에서 읽으며 자랐다. 그랬기에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급훈을 “거짓말 하지 말자”로 했던 나에게는 신선하게 비쳐졌다.


다음은 중부도시 덴버에서 겪은 일이다. 큰 아들은 일하고 아래로 다섯이 초등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였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사방 300미터 안에 모여 있었다. 체육관과 수영장과 축구장도 초중고가 같이 사용하였다. 초중고를 한 교육청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학교를 자주 방문했는데, 학교가 끝날 무렵에 초등학교를 방문하면 교장이 교무실 창문을 일일이 닫고 다녔다. 시간이 많은 교장이 사환 노릇을 하는 것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을 이끌고 있는 정신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1954-1956), 영어회화도 기초적인 회화가 가능했기에 자유롭게 학교를 방문했다. 나의 자녀들은 한국에서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에 교실에서 문제가 많았다. 초중고를 통해서 다른 한국 학생이 단 한 명 있었는데, 그나마도 아버지가 미국 사람이고 어머니만 한국인이니 한국말도 못하는 형편이라 아이들은 전혀 학우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각 학교 교장을 만나 간청하였다. 아이들을 위해서 맞춤 영어 교실을 운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학교는 나의 청을 받아들여 순전히 우리 다섯 남매만을 위하여 영문학 석사를 마친 교사와 통역 교사를 채용하여 다섯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 놓고 각자에게 맞는 수준별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나대로 전혀 영어를 접한 일이 없었던 두 초등학생 딸에게는 집에서 별도로 매일 영어 숙제를 주어 공부하게 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의 막내는 영어에 가장 빨리 적응해서 중학교(8학년) 졸업 때에는 전 학년에서(250여명) 1등을 차지하였다. 학교에서 나에게 전화하기를 오늘 밤 졸업식에는 딸 모르게 살짝 오라고 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당신 딸을 놀라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졸업식장에 갔더니 상장과 트로피와 합창대에서 한 사람에게만 주는 금색 트로피(National Award) 등을 쓸어담다시피 하였고, 중학교 배구 여자대표팀 팀장까지 했기 때문에 인기도 높았다. 미국에서는 중학교에서도 운동 선수는 인기가 높았다.

네 딸 중에서 둘째 딸과 셋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합창대에서 한 사람에게만 주는 금색 트로피를 각기 받았다. 막내인 넷째 딸에게도 운동만 할 것이 아니라 합창대에 들어가서 금색 트로피를 받아 달라고 했더니 막내가 8학년 때에는 운동 선수로 뛰면서 동시에 합창대에 들어가 이 트로피를 받아 주었다. 나는 중학교 합창대에서 세 딸이 받은 동일한 트로피 셋을 책장에 놓고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고 고달픈 이민생활에 위안이 되었다. 딸 셋이 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후에 비로소 세 딸에게 각기 금색 트로피를 돌려주었다. 중학교에서는 합창대에서 뽑혀 트로피를 받은 학생의 이름만은 학교 벽에 동판글로 새겨 기념하였다. 내가 목회에서 은퇴하던 1998년에 처음으로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시도해 보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덴버까지 왕복 2,600마일(4,160km) 거리였다. 그 때에 중학교를 방문해 보았는데, 중학교 벽에는 세 딸의 이름이 여전히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금수현(금난세의 부친, 그네 작곡) 선생님과 윤이상(세계적인 작곡가) 선생님의 지휘를 받아 노래를 많이 불렀고 1949년인가 내가 사범학교 2학년 때에는 부산방송국에 가서 금수현 선생님의 지휘로 합창을 한 적도 있다. 해마다 열리는 학교 예술제 행사 때에는 윤이상 선생님의 지휘로 대곡들을 합창 연주하였고 나는 합창대에서 노래를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1960년대에 대구에서 목회할 때에도 시간만 나면 집에서 합창, 오케스트라, 독창곡, 기악곡들을 전축으로 항상 들었기에 아이들이 좋건 싫건 같이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라면서 다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동참시킬 수 없는 무도회


미국에서는 학교 졸업식 때에 프람(prom)이라는 무도회가 열린다. 해가 지지 않던 영국에서 영화가 극에 달했을 때에 성행하던 무도회가 현대에 와서는 노출까지 더하여 향락과 타락이 극에 달하였기에, 다섯 남매 아이들에게 기독교 문화가 아닌 프람 참여를 허락지 않았는데 잘 지켜졌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식이 있던 날 밤 선상무도회에(배타고 갖는 무도회) 가려고 어머니를 속여 돈을 받아냈지만 엄마에게 돈을 돌려주며 실토하여 들었다. 이 막내는 1968년생이라 지금 나이가 44세이고 17세난 아들과 16세난 아들을 두고 있다. 6남매 모두가 효자효녀이다. 하나님의 상급이다.




42. 목회활동을 위해 자제했던 일들



1) 욕심을 버리다.


남미 브라질 쌍 파울로에서 목회하시던 이장수 목사님이 국제개혁신학교를 운영하셨는데 나는 1980년대 말부터 8회 출강하였다. 한번 가면 2주간을 강의하기 때문에 내가 목회하던 교회는 주일을 한 번 빠지게 되었다. 내가 목회했던 교회는 작은 교회라 부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목사님을 초청하여 교회에 세웠다. 하지만 교인들이 걱정되었다. 교인들은 직장에 나가 일하는데 담임 목사는 작은 교회를 비워놓고 정기적으로 브라질에 2 주간씩이나 다녀오니 시험에 들만도 했다. 그래서 비행기 요금 외에 강의에서 받은 사례금 전액을 매번 교회에 헌금하였다. 또한 8회의 출강 동안 결코 아내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브라질에 가서도 단 한 번도 관광을 하지 않았다. 오직 강의하고 매일 시험치고 매일 평가하여 강의에 전심을 다했다.  


그랬더니 본 교회 회계 집사와 교인들은 내가 출강하는 것을 환영하였고 기뻐해 주었다. 나도 마음이 편하였고 일하는 기쁨도 컸다. 브라질에서도 신학교 운영자들이 기뻐하였다. 신학교는 야간이었지만, 전날 배운 것을 매일 시험 친 후에 강의하였기 때문에 시험 출제, 강의 준비, 채점과 평가에 바쁜 일정이었다. 이렇게 빠듯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 주간에 한 학기 분량을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2011년 가을에도 그 때에 같이 지냈던 이웅재 장로님과 회계를 맡았던 전영덕 장로님이 지금은 다 각기 다른 교회들을 섬기고 있지만 옛 일을 잊을 수 없어서 우리 두 내외를 식사에 초대하여 같이 지냈는데 거의 해마다 초청해 주시곤 한다. 이토록 사랑으로 성도의 교제를 가질 수 있게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이다. 나의 자녀들도 이런 일을 보면서 기뻐하고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2) 회갑 감사 예배


회갑은 살면서 누구나 맞이하는 60번째 생일이므로 회갑이 특별할 것이 없다. 옛날에는 전염병과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여 60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장수하여 회갑이 의미가 없어졌다. 교인들은 생일을 지내고 감사 헌금을 했지만 나는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어려서는 가난해서 그랬고 성장하면서는 6·25 전쟁을 치르느라 못했고, 25살이 되면서부터는 산 중에서 화전민 전도 생활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생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1963년 이후 도시 목회에서는 생일을 챙겨서 생일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교인들에게 폐가 될까하여 생일상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항상 말했었다. “내가 60이 되면 너희들이 차려주는 생일상을 받겠다.”

결국은 나에게도 회갑이 왔다. 그래서 6 남매 자녀들이 1991년에 회갑 감사예배를 준비하였다. 친구 최영교에게 예배를 인도하도록 부탁하였다. 6 남매 중에 5 남매가 결혼한 상태였으나 모두가 결혼 초기라 생활이 어려웠지만 혼다 자동차(Acura Legend) 새 차를 자녀들이 선물로 준비하였다. 자동차를 교회 앞에 세워 놓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말 그대로 떠벌린 것이다. 홍반식 목사님을 설교자로 모셨는데 1950년대 초에 서대신동 교회에서 목회하셨고 신앙운동에서 항상 협력했기 때문에 잘 아는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설교하시다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멀쩡한 젊은 것들이 회갑을 한다.”고 하셨다. 내가 떠벌렸기에 하신 말씀이고 많이 변해버린 시대상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평생 처음 갖는 생일잔치이고 보니 나에게는 감격에 찬 날이었다.



3) 장거리 자동차 여행


미국은 땅이 광활하고 세계2차 대전 시에 전국을 잇는 교통망이 발전하였고 개인이 누구나 자동차를 가질 수 있는 형편이기에 1980년대 당시에 자동차로 며칠씩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동쪽 뉴욕에서 서쪽 샌프란시스코의 거리가 2,929마일이니 4,686km이므로 1만1천리가 넘는 거리이다. 한 직장에 오래 있으면 보통 1년에 3주간 유급 휴가를 받기 때문에 휴가 때에는 사람들이 자동차 장거리 여행을 즐긴다.

나는 목회생활에서 주말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목회하는 20년 동안에는(1978-98) 단 한 번도 자동차로 장거리 여가를 즐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비로소 목회에서 은퇴하여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 때에 내 나이는 만 67세였고, 풀타임 전도사역은 42년이었다(1956-98).


내가 은퇴하면서 제일 먼저 해 보고 싶은 것이 자동차 장거리 여행이었다. 큰 아들에게 내 뜻을 말했더니 자동차를 1,400불에 정비하여 주었다. 내 차가 Acura Legend였으니 70,000마일 주행이면 새 차나 다름없는데도 스프링 네 개를 새 것으로 바꾼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왜 멀쩡한 스프링을 다 바꾸었느냐고 했더니 장거리를 가려면 차가 조용히 가야 한다고 하였다. 아들은 현금 2,000불을 주었다, 자동차로 중부도시 덴버까지 만 3일을 걸려 2,080km (1,300마일)를 달려서 갔다. 덴버는 내가 5년간(1979-1984) 목회했던 곳이라 덴버에서 며칠을 쉬고 옛 성도들을 만났는데 덴버 성도들이 여비로 준 것이 1,500불이었다. 대학생으로서 내가 시무했던 교회의 회계집사였던 황기석 청년은 가정을 이루었는데 500불을 주었다. 귀가했더니 현금 1,000불이 남아 큰 아들에게 남은 1,000불을 돌려주었다.

4) 유럽여행


목회에서 은퇴하자 자녀들이 여러 곳(Las Vegas, Hawaii, Europe)으로 여행을 준비해 주었는데 특히 유럽여행을 하고 느낀 바가 많았다. 처음 비행기에서 내린 곳이 독일 프랑푸르트였는데 비행장 건물이 옷을 벗은 것처럼 시멘트 벽 그대로였다. 전세버스를 타고 중세의 성곽을 둘러보고 곧장 알프스 산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치고 이태리의 도시들을 차례로 여러 곳 돌아보았고, 특히 로마 법황청을 보았으며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유럽은 어디를 가든 공중 화장실에는 화장지를 팔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소형이었고 제네바만은 중형차들이 상당히 보였다. 스위스는 국민소득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나라였다. 독일에서 한 기차역을 버스로 통과하는데 역 앞에 자전거 수천대가 겹겹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분명 자전거로 역까지 와서 기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자전거였다. 독일은 분명히 유럽에서는 부강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소형차에 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유럽의 경제사정이 미국의 경제와 비교되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무렵에는 세계의 총 생산에서 40%를 미국이 소비한다는 통계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안내자의 말은 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리게 해주었다. 유럽은 사회주의 나라들이기 때문에 모든 국민에게서 고액의 세금을 받아 국민들이 누구나 병원 치료가 무료이고 대학도 무료라고 하였다. 과연 사회주의의 무한복지 제도가 소련과 유럽 국가에서 사회를 발전시켜 왔는가? 선진을 주도했던 유럽이 왜 신생국가인 미국이나 미국의 제도를 받아들인 일본, 한국, 중국보다 뒤져가고 있는가? 복지만을 내세운 것이 너무 지나쳐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는, 저축이 없으니 투자가 미진하여 생산이 떨어졌고 무역에서 경쟁력이 떨어졌고, 둘째는 백성들을 게으르게 하고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했으니 생산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소련 연방은 사회복지에 공산주의를 적용하다가 경제 파산으로 1991년에 해체되었다. 유럽이 늦게나마 미국의 자본주의가 더 옳았음을 깨닫고 고액의 세금 제도를 저축형 세금 제도로 개선해 가고 있는 중임을 신문에서 읽었다.


미국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1930년대에 경제 공황을 맞았지만 경제 공황을 기회로 삼아 사회복지 정책을 실행하여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봉건적인 노동 정책에서 벗어났고 활기찬 경쟁 속에서 생산하고 발전하되 정의와, 복지와, 자본주의를 모두 지키는 나라가 되었다.







부록 1. 학술 활동




43. 육체부활을 믿지 않는 한국의 신학자들

44. 칼 바트트신학(Karl Barth)

45.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


       





다음 내용은 한종희 목사님이 평생 주력한 ‘칼바르트 자유주의 신앙을 비판’ 한 글의 일부입니다. 한 목사님의 신앙 사상과 주력 분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부록에 담았습니다.


               

43. 육체부활을 믿지 않는 한국의 신학자들

 - 곽선희, 문익환, 조향록, 허 혁, 김동수, 박봉랑.


1) 곽선희 목사의 부활론


곽선희 목사의 부활관은 1985년 여름호 ‘神學指南’(신학지남)에 게재한 “칼 바르트의 성경관” 비평에서 이미 언급하였고, 합동파총회가 2002년에 발간한 책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였다. 다음은 곽선희 목사의 부활 해설이 들어있는 글들이다.

(a) 설교,「나는 부활이다」

(b) 사도신경 강해


그림  ㅣ

(c) 부자와 나사로 비유 해석



(a) 곽선희 목사의 설교, 「나는 부활이다」에서


『본문에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을 때, 누이동생인 마르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부활개념을 가지고 “마지막 날에 오라비가 다시 부활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세상 끝 날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다 부활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는 일반적인 유대인의 개념에서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부활이라면 역시 흥미가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있었기에 정의가 영원하고 사랑이 영원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 단순히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니 우리도 오래 산다는 뜻으로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곽 목사는 육체부활을 부정하였다. 본문에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을 때, 누이동생인 마르다가 “마지막 날에 오라비가 다시 부활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세상 끝 날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다 부활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는 일반적인 유대인의 개념에서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부활이 마르다가 말한 대로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니 우리도 오래 산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역시 흥미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곽 목사가 주장하기를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정의가 영원하고 사랑이 영원함을 뜻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정의를 외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12 제자들이 그 정의를 위해서 순교하였고 지금은 그 정의를 따르는 무리가 세계에 20억을 헤아리고 있으니 정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부활하여 지구를 덮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곽 목사가 부정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부활 개념은 어떤 것인가? 오늘날 정통신학이 믿고 있는 부활 개념이다. 즉 사람은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세상 끝 날에 무덤에서 해골들이 생명을 가진 몸으로 살아나되,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몸으로 살아나서 최후의 심판을 거쳐 지옥과 천국에서 영원히 형벌 아래 들어가든지 혹은 영원히 영광 중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든지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곽 목사가 오늘의 정통신학의 부활 개념과 동일한 유대인의 부활 개념을 부정한 것은 내세를 부정한 것이고 지옥과 천국을 부정한 것이고 동시에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부정한 것이다.

곽선희 목사가 주장한 부활 개념은 정의가 영원하고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으니 인간이 정의와 사랑으로 채워진 “새로운 인간”(실존)이 되어 정의롭고 평화로운 국제 질서를 이루어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을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b) 곽선희 목사와 사도신경 강해


곽선희 목사는 부활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인성변화(人性變化)를 말하고 시신부활(屍身復活)이나 육체부활(肉體復活)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 부활은 자연적 생명의 변화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마치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생명의 자연적 성장 과정과도 다르다. 동물의 세계에서 한 생명이 죽었다가 회생하여 다시 옛 생명으로 되살아난다고 하는 그런 사상과도 다르다.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꼭 죽은 것처럼 동면하다가 새봄이 되면 뛰어나오는 것과도 다르다. ... 그러면 과연 기독교의 부활은 어떤 부활인가 ? 기독교의 부활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생명의 신비로운 변화로서 그리스도적인 부활을 의미한다. ...

혹자는 톨스토이가 “부활”이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활이 성서적인 부활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영혼 불멸설(immortality)을 의미한다. 영혼 불멸설에는 정신적 부활은 있지만,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실제적인 부활은 없다. 몸은 죽지만 정신과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영혼불멸설과 부활을 혼돈하기 쉽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결코 영혼불멸설과 같은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영과 육이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표적은 그리스도적인 부활이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그 예를 볼 수 있다. 』


이 주장에서 곽 목사는 기독교의 부활이「자연적인 생명의 변화가 아니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부활이「자연적인 생명의 변화가 아니라」는 주장은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고백해온 육체 부활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부활인가? 「그리스도적인 부활」이 기독교의 부활이며,「그리스도적인 부활」은 「영과 육이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부활이「자연적인 생명의 변화」가 아니라, 영과 육이 함께 사는「그리스도적인 부활」이라고 하였으니「영과 육이 함께 산다.」는 뜻은, 「자연적인 생명의 변화」(육체부활)가 아님을 주장한 것이므로, ①「영과 육이 함께 산다.」는 뜻은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영과 육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다. ② 그러면 인간이 살아 있으면서 입는다는「그리스도적인 부활」은 어떤 부활인가? 곽 목사가 설교「나는 부활이다」에서 주장한대로 예수님이「정의가 영원하고 사랑이 영원하다」는 교훈을 주셨으니 그 교훈대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이 「그리스도적인 부활」을 입는 것이다.



(c) 곽선희 목사와 나사로의 비유 해석


곽선희 목사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말하는 내세와, 심판을 유대인의 전승적인 계시문학으로 돌려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사실이 아니면 무엇인가? 사실이 아닌 것은 설화(geschichte) 혹은 소설(fiction)을 뜻한다. 다음은 곽 목사의 주장이다.


『 본 비유는 읽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예로 드셨는데, 오늘 여기 본문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가르치는 교훈의 대부분의 내용이 신화적이고 설화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의 교훈하시는 방법의 특징은 언제나 실제적인 사건과 사물을 소재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당시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예수님의 교훈은 가장 과학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그 많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단 하나 사실성을 벗어난 예외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계시문학적인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되는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죽은 다음의 사람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숙히 잘 아는 계시 문학의 한 토막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다 실제적인 것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오늘 이 비유만은 저들이 잘 알고 있는 전승적인 계시문학을 그 소재로 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는 이 글에서 주장하기를, 「하늘나라에서 되는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품의 이야기와, 죽은 다음의 사람들 이야기」는 사실성을 벗어난 이야기, 곧 전승적인 계시문학의 한 토막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곽 목사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진보주의 신학이 요한계시록을 사실성을 벗어난 전승적인 계시문학에 포함시켜 그 소재를 신화(myth)와 설화(geschichte)로 취급하는데, 곽 목사가 바로 이 진보주의 신학의 성서관을 따라서 말한 것이다. 곽 목사는 분명히 진보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또 말하기를,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이 아닌 계시문학을 소재로 하여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은 항상 사실만을 소재로 하여 교훈하셨으나, 예수님께서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한해서 단 한번「사실이 아닌 전승적인 계시 문학을 설교의 소재」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내세를 말한 것은, 단지 설교의 소재로 말했을 뿐, 실제로 내세(來世)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2) 문익환 목사의 부활론


두 목사(문익환, 조향록)와 세 교수들(허 혁, 김동수, 박봉랑)에 대한 글은 필자가 1991년 3월 30일자, 합동파 기관지인 기독신보에 2쪽 분량으로 게재했던 글이다.


다음은 문익환 목사의 부활에 대한 해설이다.    


『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함으로 주의 부활에도 동참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세례의 뜻인 것이다. 세례는 주와 함께 죽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죄에 대해서도 죽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주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인 동시에, 죄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정복하지 않고, 죽음을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활한 몸에 관한 호기심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놓아둔다고 해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 믿는 자가 전인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 이 글에서 문익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고전15장이 말하는 몸의 부활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놓아두고 넘어가자고 하였다. 왜냐하면 몸의 부활(육체부활)을 수수께끼로 놓아둔다고 해서 손해 보거나 나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몸의 부활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보는 것은, 모든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러므로 진보주의 신학자들 모두는 하나같이 고전15장의 육체부활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보며, 또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거침돌」로 표현해왔다. 기적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고,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말했지만, 바르트는 이 육체부활을 더 강하게 부정하여, 스캔들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표현하였다.


⒝ 문익환 목사가 말하기를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실존적으로 동참하여 전인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실존적으로 동참하여 얻어진다는 전인적인 구원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실존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현재의 생활에서 자기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을 뜻하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실존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전 인격과 성품이 새로워지는 인성변화를 뜻한다. 문 목사나 현대신학은 이러한 인성변화를 가리켜 전인적인 구원이라고 하며, 바로 이 전인적인 구원이 진보신학이 주장하는 기독교의 구원이다.

현대는 인간이 짐승이하로 악랄해져가기 때문에 인성변화와 인간혁명이 요청되고 있다. 슈바이쳐는 비록 육체부활과 내세는 불신하였지만,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 가서(1913-65) 평생을 지내며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는 운동을 펼치다가 아프리카에서 임종하였다. 독일인 칼 바르트는 1919년에 로마서 강해를 출판하여 문명보존 운동에 나섰고, 영어권에서는 늦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참전했던 C. S. Lewis가 영국 BBS Radio Talk Shows에서(1942-44) 문명보존 운동에 나서 새 바람을 일으켰다. 20세기 현대는 철학(생명의철학, 실존주의철학, 분석철학, 실용주의철학)이나 신학(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 복음주의)이 하나같이 문명보존운동에 나섰다. 물론 귀한 일이고 또 누구든 해야 할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에는 내세(來世)와 영생이 없고, 현세(現世)와 현실뿐이었다.

문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동참되어지며, 비로소 전인적인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신자가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한다는 말은, 신자가 생활현장에서 십자가 정신을 발휘하여 생활하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생활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고, 동시에 전인적인 구원을 뜻한다고 하였다.

3) 조향록 목사의 부활론


다음은 1976년 4월 26일자, 주간조선의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 . 문제는 이 사건을 받아드리는 수용 자세에 있다. 바로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대상이 된다.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문제나 사건이 신앙하는 자에게 의미적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서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부활의 뜻을 해석하여 받아드리는 신앙의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입증하여 믿고 고백해온 것이 정통신학이다. 또한 부활사건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되 역사적인 사실임을 부정해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런데 조향록 목사는 부활사건을 정통신학처럼 사실로 입증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처럼 역사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다 무의미한 짓이라고 하였다. 조 목사가 두 신학을 부정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19세기에 독일과 영국에서 득세한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에 상륙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을 때에, 정통신학이 자유주의를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때에 제1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었고, 세계대전에서 충격을 받아 궐기한 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신정통주의가 제일 먼저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를 공격하고 나섰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려는 정통신학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은 분쟁과 분열만 가져올 뿐, 전혀 유익이 없다고 하여 배격하였다. 조향록 목사가 이러한 신정통주의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 여기에서 조향록 목사가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 대안을 다시 여기에 옮겨 적는다.

「문제는 이 사건을 받아드리는 수용 자세에 있다. 바로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대상이 된다.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문제나 사건이 신앙하는 자에게 의미적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조향록 목사는 부활사건을 보는 두 시각을 비교하고, 부활사건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두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는 버렸고, 부활사건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는 신학을 주장하고 나섰으니,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복음주의신학(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이다. 조향록 목사는 부활사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신앙의 창문을 열고, 부활사건이 주는 교훈을 받아 신앙하자고 하였는데, 조 목사가 제시한 신앙에서는 성서(하나님)가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되어 부활내용을 규정하여 뜻을 풀어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대신학에서는「부활사건」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신앙행위」를 사건으로 보며, 신앙자가 임의로 해석한「신앙고백」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의 계시관인데, 조향록 목사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향록 목사가 해설한 신학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사건이나 성령수태나 동정녀의 탄생 등은 전혀 의미가 없고, 다만 인간이 이 사건들을 수용하는「신앙행위」와 「신앙고백」이 중요할 뿐이다.

4) 허 혁 교수의 부활론


基督敎思想 1973년 4월호의 “박아론 교수와 허혁 교수의 대담”에서, “부활사실과 부활신앙”이란 제목으로 부활절 메시지를 발표한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허 혁 교수는 부활사실(역사, 이적)을 뒤로 밀어내고, 부활신앙만을 내세운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허 혁 교수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 그러므로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으냐 하는 생각입니다. 』


이 글도 앞에서 해설한 조향록 목사의 글과 동일한 형식의 해설이다. 허 혁 교수는 부활사실과 부활보도를 대조하고, 부활보도를 취하고 부활사실은 버렸다. 왜 부활사실은 버리고 부활보도는 취하였는가? 부활사실은 부활보도에 비해서 실재(reality)를 말하는 용어이지만, 부활보도는 사실을 확인하기 이전의 소문 혹은 전언 정도의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사실에는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의 의미가 들어 있지만, 부활보도에는 보도내용이 사실이냐 거짓이냐는 아직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허 혁 교수가 부활보도를 취하고 부활사실을 버린 이유는 부활취급에서 이적을 제외시키려는 의도에서 행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허 혁 교수는 부활사실 대신 부활신앙을 사건으로 보자고 한 것이다. 부활사실 대신 부활신앙을 사건으로 보자고 한 말은 이미 앞에서 말한 조향록 목사의 해설에서 그 뜻을 읽었다.

현대신학에서는 성경의 기적들을 역사적인 사실로는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기적들을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로 받지 않는다. 다만 성서의 기적에 인간이 어떤 의미를 주어 신앙하면, 이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바르트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적의 육체부활로는 불신하였지만, 인간의 인격이 성숙해가는 것을 부활로 해석하여 신앙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바르트의 부활관을 수용하였으니, 이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이고,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허 혁 교수가 주장한 신학을 남미의 해방신학에 적용해 보자. 남미는 1960년대까지도 민중은 종에 가까운 하대와 학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학대와 가난과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 해방신학이다. 필자가 브라질에 신학강의 차 1980년대에 8회 방문해서 목격했던 일이다. 해방신학자들이 십자가의 보혈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형벌에서 구원한 것은 버렸으나, 바로의 학대와 억압에서 해방을 가져왔던 출애굽 사건을 구원의 복음으로 받자고 하였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에서 발생했던 기적들은 신화로 보았다.

해방신학이 일어나고 성장한 토양 남미는 백인들이 지배하였고 원주민은 종으로 부렸다. 필자가 브라질에 가서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주인과 종의 차이가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에레베타도 주인 전용과 종의 전용이 나란히 있었다. 내가 가르친 신학생 중 한 사람은 공장주인데 한국 사람은 월 800불을 주는데 원주민 기술자가 받는 최고의 대우가 200불이었고 당시 식모 한 달 월급이 50불이었다. 선진국에서는 의학도가 졸업 전에 시체 해부를 한 구나 두 구도 어렵다는데 그 곳에서는 수도 없이 많이 시체를 해부하여 공부한다고 하였다. 즉 원주민들은 수 없이 죽어도 별로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박해받고 억압받은 것과 같은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중신학도 남미의 해방신학과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운동을 폈었다. 민중신학은 가난과 억압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서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을 구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중신학과 그 신학자들은 성서의 기적이나 내세나 영생과는 전혀 무관하였다.  

물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민중을 가난과 억압에서의 해방하는데 공헌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해방은 매우 갚진 운동이었고, 운동에 참여하다가 당대의 세도가들에게 박해를 받았던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필자가 민중해방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민중신학이 기독교 신학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5) 두 목사(김동수, 박봉랑)의 부활론


(a) 1973년 4월 2일자 한국 크리스챤신문에 게재한 부활절 메시지에서, 두 분은 한국교회가 인간의 영혼불멸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저적했으며, 한국교회가 영혼불멸사상을 지니게 된 것은, 불교와 샤머니즘의 영향 탓이라고 하였다.


(b) 두 분 교수는 같은 글에서 또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부활은 2천 년 전의 골고다의 예수의 부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 한국 땅에서 날마다 사는 부활의 승리에서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2천 년 전의 골고다의 무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 한국 땅에서 날마다 사는 승리의 생활에서 찾자고 하였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예수님의 부활을 2천 년 전의 골고다의 무덤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에서는, 부활이 예수님이 골고다의 무덤에서 나오신 육체부활일 수밖에 없다. 골고다의 육체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신도 무덤에서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할 소망을 품고 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면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매일 순종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두 목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2천 년 전의 골고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생활현장에서, 날마다 사는 승리의 삶에서 찾자고 하였으니, 지상에서 신자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곧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몸의 부활과 내세의 영생을 불신하고, 지상에서 전쟁과 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부활로 믿으며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44. 칼 바트트신학(Karl Barth)



1) 나와 칼 바트트신학의 신학


내가 1947년부터 박윤선 목사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고 월간지 파숫군을 고신이 1949년에 창간하였는데, 창간호부터 정독하면서 현대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글뿐만 아니라 설교에서도 칼 바르트신학을 소개하고 비평하였다. 월간 思想界(1953년 4월 창간)에서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루돌프 불트만 등 신정통신학에 대한 글이 김재준, 윤성범, 박봉랑 등 교수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브루너(Emil Brunner) 교수와 신정통신학의 지지자로서는 미국에서 선두주자이며,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 교수 및 교장(1936-1959)을 역임하였고, WCC회장(1948-1954)이었던 맥캐이(John A Mackay) 교수가 1949년 각기 다른 시간대에 한국을 방문하여 신학강연을 하였는데, 두 교수의 강연집 팜플렛이 지금도 필자에게 있다. 그러나 바르트신학의 정체성만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초등하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산중전도에 전념하던 1956년에 성경연구와 더불어 바르트신학을 연구하기로 뜻을 정했었다.

미국에 이민하면서(1978) 신학연구에 시간을 더 얻었고, 1998년에 칼 바르트신학의 핵심인 sage와 geschichte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에 목회에서 은퇴하고 책 집필에 나서서 만 3년 걸려 원고를 탈고하여 합동 총회가 2002년에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이란 표제로 책을 출간하였다. 책 서문은 총회장(예종탁 목사)이 썼고, 이근삼, 김의환, 홍치모 세 교수가 추천하는 글을 썼다. 책 출간 후에 김상복, 김길성 두 교수도 서평을 썼다. 칼 바르트에 대한 책은 너무나도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라 이 교수들의 서평이 없었으면 책이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상복 교수는 평하기를 「바르트가 출현한 후로 정통신학에서 제대로 바르트를 비평한 사람으로는 한종희 박사가 처음일 것이라고 하였고, 앞으로도 한종희 박사 같은 비평가가 나오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한 학자가 다른 학자를 40년이 넘도록 집중 연구할 사람이 또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필자에 의해 Geschichte의 분석이 이루어진 것은 바르트신학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들어나게 한 세기적(世紀的)인 사건이다. “정통신학에서 변증신학의 대가인 Van Til 교수(1895-1987)가 이 숙제를 안고 몇 권의 책을 썼지만 풀지 못한 채 갔다”고 Van Til의 제자 John Frame 교수가 「밴틸의 사상분석」(Cornelius Vantil, An Analysis of His Thought)이란 책에서 증언하엿다. Westminster신학교 변증신학 Van Til 교수와 Calvin 신학교 조직신학 Fred Klooster 교수와 Weathen 대학교 철학교수 Clark가 합동하여 1961년에 각기 두 문제씩 K. Barth에게 질문서를 Christianity Today 잡지에 게재하여 세계에 알렸었는데, 특히 Van Til와 Klooster 교수는 Geschichte에 대하여 질문하였지만 K. Barth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필자가 속편으로 집필 중인「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도 칼 바르트를 수장으로 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그대로 답습한 Billy Graham과 Billy Graham의 군단을 이끌어온 복음주의 신학자들(C. S. Lewis, John Stott, James I Packer, Harold J. Ockenga, Carl Henry, Edward Carnell, John Woodbridge, 김세윤)이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과 내세를 불신한 사실이 들어났다.



2)  Kal Barth 신학의 요약


①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한 진보주의 신학자였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요람에서 성장하였으며, 자유주의 신학 위에 S. Kiekegaard에게서 받은 실존(existence)을 더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실존은 20세기에 악랄해진 인류의 인성을 회복하여 정의로운 인성으로 변화한 인간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칼 바르트의 신학은 성서를 설화(고대소설)로 보았기 때문에 성서에 있는 모든 기적들과 초자연적인 사건들 일체를 신화로 보았으나, 현대인들과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 신화에서 교훈을 해석해 낸 것이다.


② 칼 바르트는 성서를 설화(geschichte)라고 하였다.


바르트가 성서를 geschichte라고 표현하였으나,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을 동시에 공격하므로 세계의 신학자들이 geschichte로 표현되는 바르트의 신학이 자유주의도 아니고 정통주의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바르트신학에 신(new)을 더하여 신 정통주의 신학(New-Orthodoxy Theology)이라고 칭하였다. 이 용어의 뜻은 바르트신학이 정통주의 신학이지만 새로 나온 정통주의라는 뜻이다. 결국 바르트신학이 자유주의가 아니고 새로 나온 정통주의가 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geschochte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바르트가 쓴 『교회 교의학』은 독일어로는 31권이고 9,000쪽이 되는데, 바르트가 이 책에서 성서를 geschichte라고 칭하였다. 이 용어의 뜻은 고대소설이라는 뜻이고 학술용어로는 설화라고 한다. 설화는 고대에 전설과 신화를 섞어 쓴 고대소설을 뜻힌다. 미국 신학자들은 영역에서 Historie와 geschichte를 동일하게 History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geschiche의 뜻을 몰라서 곡해한 결과이다.

바르트가 왜 성서를 설화(geschichte)로 취급했는가? 바르트가 성서를 설화라고 함으로서, 성경이 신화니 하나님의 계시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주의나 정통주의와 논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대신 바르트가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를 동시에 공격하면서 자기의 신학을 복음주의라고 하니 사람들이 바르트신학을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을 새로 나온 정통주의라고 하여 신정통주의라고 호칭하며 좋아하였다.

독일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그대로 답습한 영국과 미국의 신학을 H. J. Ockenga가 신복음주의라고 호칭하고부터는 사람들도 신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불렀지만, Ockenga 자신도 평상시에는 자신의 신학을 “신복음주의” 라고 칭하지 않고 반드시 복음주의라고 하였다. 정확하게 말해서 Ockeaga는 자신의 신학을 “근본주의 신학에서 출발하여 신복음주의 신학을 거친 복음주의 신학”(From fundamentalism, through New Evangelicalism, to Evangelicalism)이라고 칭하였다. 출발은 근본주의에서 했지만 신복음주의(자유주의 신학)를 거쳤다고 하니 Ockenga가 믿는 복음주의 신학은 신복응주의 신학을 그대로 답습한 신학이다.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니, 결국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동일한 혈통이다.



③ 칼 바르트에게는 인성회복과 문명보존이 구원이었다.


칼 바르트가 성서를 설화로 취급하여 설화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냈는가?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몸의 부활과 내세를 불신하였기 때문에 설화에서 교훈을 받아내 인성을 회복하고 문명을 보존하여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었다.


45.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



20세기에서 주류를 이룬 “복음주의 신학”은 전반세기와 후반세기로 나눈다. 전반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이고 후반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은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신정통주의는 독일인 신학자들(Barth, Bultmann, Brunner, Tillich, Niebuhr 형제)에 의해서 일어났고, 신복음주의는 영어권(C. S. Lewis, John Stott, James I. Packer, Billy Graham, Harold J. Ockenga, Carl Henry, Edward Carnell, John D. Woodbridge)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신학이다. 그러므로 20세기의 전반세기에 주류를 이룬 신정통주의나 후반세기에 주류를 이룬 신복음주의는 본인들은 자신의 신학을 복음주의 신학이라 칭하였지만, 그들의 신학적인 뿌리는 동일하게 자유주의 신학이다. 즉 그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신성(동정녀탄생, 몸의 부활, 몸의 승천)과 내세를 믿지 않았지만, 그들의 신학을 복음주의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보수주의 신학이 그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2002년에 바르트신학에 대한 책을 발표한 후로 지금까지 10년간을 20세기 후반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의 정체성 규명에 매달려왔으며 지금까지 여기에 대한 자료들을 준비해왔다. 전반세기든 후반세기든 앞에서 열거한 신학자들이 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를 믿지 않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추구 하는 목적 즉 구원이 무엇인가?

20세기 복음주의 신학의 목적


20세기 전반세기 복음주의 신학(신정통주의)과 20세기 후반세기 복음주의 신학(신복음주의)이 신학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세계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우리의 관심은 그들의 구원에 내세가 포함 되는가, 포함되지 않는가에 있다. 정통신학과 진보신학의 차이가 내세의 유무(有無)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신정통, 신복음)에는 내세구원이 없고 현세구원뿐이다.

19세기는 격변의 해였다. 과학사상인 계몽주의가 출현하여 사상계가 하나님과 내세를 버리고 현세만을 인정하는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영국인 Charles Darwin이 1885년에 책으로 발표한 “짐승이 인간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확산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8)으로 죽은 자들만 850만 명이었고, “러시아 혁명(1917)에서는 최소한 자기 동족을 재판 없이 2,000만 명을 학살하였고, 1934년에 집권한 힛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과, 폴란드인 400만과 러시아 포로 200만을 후방에서 학살하였다.” 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1,650여만 명이 죽었다. 온 세계의 정신계는 왈칵 뒤집혔다. 철학과 문학과 종교가 다 인류와 문명을 파멸에서 구원해 내야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20세기는 그 초기부터 인류와 문명이 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선각자들이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인류와 문명을 파멸에서 구원하고 보존할 수가 있는가? 이 목적을 성취하고자 생명의 철학, 실존주의 철학, 분석철학, 실용주의 철학이 일어났고, 20세기의 전반세기와 후반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그러면 20세기의 문학과 철학과 신학이 추구해온 목적이 무엇인가? 20세기의 사상계는 철학과 문학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도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내세와는 전혀 무관하였고, 오직 인류와 문명을 전쟁과 파멸에서 구하는 것이 목적의 전부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현대철학들(생명의 철학, 실존주의 철학, 분석철학, 실용주의 철학)이 일어났고, 20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이 일어나 성경의 기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모든 기적은 신비이다(mystery). 신비를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은 비유이다(allegory). 비유를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은 은유이다(metaphor). 은유를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은 상징이다(symbol). 상징을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은 역설이다(paradox). 역설을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은 실존이다(existence). 실존을 해석하여 교훈을 받아냈다.

모든 기적을 설화(geschichte-독일), 소설(fiction)이라 하여 설화와 소설에서 교훈을 받아냈다.


진보신학은 기적을 믿지 않지만 기적을 직설적으로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 기적을 신비, 은유, 비유, 상징, 역설, 실존, 설화, 소설이라고 말하고 교훈을 해석하여 받았다. 만일 기적불신이나 기적부정이 은폐되지 않고 들어나 보였으면, 보수신학의 신학생들이 진보신학의 신학교를 떠났을 것이고, 보수신학의 교인들이 진보신학의 교회를 떠났을 것이고, 보수신학의 독자들이 진보주의 책들을 기피했을 것이다. 신학생이 없는 신학교와 교인이 없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고 독자들이 없는 책은 출판할 수 없으므로 진보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가진 묘안을 다 동원하여 기적불신과 기적부정을 은폐할 수밖에

그러므로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기적을 불신하여 폐기하되 기적폐기의 사실을 은폐하고자 대부분의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그 용어(신비, 은유, 비유, 상징, 역설, 실존)사용에 대한 내막은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이처럼 유럽과 영국의 신학계가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로 채워져 가던 때에 John Gresham Machen(1881-1937)이 등장하였다. Machen은 Hopkins University와 Princeton 신학교를 거쳐, 독일의 Marburk과 Gottingen 대학에서 공부하고 1906년 25살에 Princeton 신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23년에는 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발표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정면 공격하고 나섰다. Machen이 소속한 PCUSA 총회가 1926년에 자유주의 신학(Auburn Affirmation)을 받아드렸고, 1929년에는 Princeton 신학교가 같은 Auburn Affirmation을 받아드리자 Machen이 Princeton을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고, PCUSA 총회가 1936년에 Machen 일파를 총회에서 제명하자 제명당한 자들이 미국장로교(PCA)를 세웠다가 1939년에 정통장로교(OPC)로 개명하였다.






부록 2.





• 각주의 인물 정리

• 관련 교회

• 신학교

• 기타


1. 인물 정리


• 강신명 : 1909-1985, 경북 영주, 프린스턴 신학교, 새문안교회 담임, 당대 기독교 대표로 활동, 숭실대학교 총장과 이사장, 연세대학교 이사장, 통합 교단 총회장 제5공화국 발족의 입법위원, 서울장로회신학교(서울장신대)를 설립, 1962년부터 1985년까지 교장.

• 강유중 : 화란 자유대학교와 미국 임마누엘신학대학 출신. 세계적인 신학자 화란의 헤르만 리덜보스 교수의 문하에서 한국인으로는 첫제자. 박사학위받고 돌아와 대구신학대학교에 교수, 이후 고려신학교수, 서울 총회신학교장을 역임.

• 강진선 : 박윤선의 개혁신학교 교수로 내정 되었다가 이북에 두고 온 부인 문제로 재혼의 위법이 제기 되어 관동대학으로 간 신학자.

• 김득용 : 총신대 교수, 비블리칼 신학교 총장, 신학교와 교단 활동, ‘현대목회실천론 신강’ ‘한국교회 영성운동’ 저자.

• 김길성 : 총신신대원 조직신학 주임교수, 고려대학 및 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 김길창 : 1892∼1977, 신사참배를 주도한 친일파 핵심 인물, 부산의 10여 개 학교를 운영한 인물. 항서교회 담임 목사.

• 김만우 : 고신의 김희도 목사 큰 아들, 한상동의 부목으로 미국 고신총회 총회장 역임, 한국고신총회 순회선교사, 필라델피아제일장로교회 원로 목사. 미주중동선교후원회 고문.

• 김병도: 서부교회 출신. 서울대 영문학과. 내수동교회 개척 교인. 총공회 동문교회 목회자.

• 김상권 : 평양신학교 출신. 고신과 합동의 통합과 분열 당시 서기, 예장합동 한남노회장, 평양신학교졸업, 에덴교회 개척, 샌프란시스코 기독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사장.

• 김상복 : 횃불트리니티신학원대학교 교수,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아시아신학연맹회장(ATA), 아시아복음주의신학협회회장(EFA), 세계신학교 총학장회의 회장(PADO).

• 김성식[金成植] : 1908-86,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평양 숭실학교 교원이 되었으나 1938년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폐교되자 해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월남, 1946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어 1973년 정년퇴직하였는데 다음해인 1974년 다시 명예교수로 위촉되어 후진양성에 주력.

• 김성환 : 고려신학교와 공회 출신의 목회자 남천교회(1953-55) 개척, 전포교회, 동산교회(1964-72), 성도교회 (1972-78) 목회 중 별세.

• 김의환 : 1933-2010, 전남 장흥,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학사 과정,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거쳐 템플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총신대학교 교수 및 총신대 총장, 성북중앙교회, 칼빈대 총장, 칼빈교회 담임, 새한교회와 에덴교회를 개척, 1975년 ‘독립교회 이단설’을 포함한 [이단의 정체] 출판하고 그 해에 미국으로 이민, LA 한인교회 개척, 국제개혁대학교 1977년 초대 교장.

• 김연준 : 부산 항서교회 장로, 서부교회 개척, 한신대 김정준 교수의 형

• 김정준 : 1914-81, 부산 동래, 영국 에딘버러 출신, 한신대와 연세대 신대원 학장. 김재준과 함께 한신대 창립자로 성경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계의 거물.

• 김재준 : 1901-87, 함경도 경흥, 미국 프린스턴과 웨스턴 출신, 성경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 기독교장로회 창단(1953), 한신대 학장.

• 김증한 : 1920-88, 충남 부여, 서울대 첫 강의로 유명한 민법학자, 문교부차관, 동아대부총장, 총공회 교인.

• 김진홍 : 방지일 박윤선 김진홍 3인이 평양 신학교에서부터 신앙과 신학의 동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961년 박윤선이 개혁신학교를 열었을 때 교수로 공회에서 생활비 지원.

• 김창인 : 1917-2012, 평북 의주, 재건파 고려파 합동파의 유력 지도자, 평북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 재건교회 운동에 참여하다 48년 이북에서 신앙자유 위해 남하, 부산 서부교회(1951-52) 2대 목회자, 예장합동 서울충현교회 개척(1953년).

• 김천애[金天愛] : 1919 -95《봉선화》를 부른 한국의 성악가.

• 김현봉 : 1884-1965, 경기 여주. 서울 아현교회를 개척하여 1960년대 국내 최대 교회를 만들었고 극단적인 경건과 절제로 유명. 성경적 교훈에 철저했고 교권을 인정하지 않는 독립교회를 유지. 신앙과 교회 운영 및 교리 등 전반에 걸쳐 총공회와 기초적인 모습이 동일.

• 김희도 : 진영읍교회, 고신 교단의 총회장과 고려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지도자.

• 고응보 : 동산교회 고응진 장로의 동생으로 동산교회의 부목으로 활동(1961-69), 국제개혁대학교 이사장,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며 미주총회(KAPC) 창립(1977)과 미주총회의 직영신학교인 국제개혁신학교 발전(1977년-)에 공로.

• 남영환 : 1915-2008, 경북 영덕, 주남선 목사님의 거창읍교회 후임, 고신 총회장. 구호 물자를 실고 오다 차가 고장나서 주일날 새벽에 들어와서 이 문제로 3개월 근신 치리.

• 노진현 : 1904-2002 , 부산 구포, 부산 중앙교회 개척, 총신 이사장, 합동 교단 유명 정치 목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 마두원 : 말스베리(D. R. Malsbary, 1899-1977) 미국 캘리포니아, 1929년 한국 최초의 음악 선교사로 내한, 고려신학교 교수.

• 명신홍 : 1904-75.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을 합동 교단 총신 신학교의 3대 거목, 웨스트민스터, 대구 서문교회 담임, 총신 교장, 대신대학교 설립,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3회 경북노회는 대구지역의 보수주의적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을 위해, 1954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야간신학교(뒤에 대신대학교로 변경)를 개교.

• 박관준 : 1875-1945, 동경의 일본 의사당 내에서 신사참배 반대 선언. 6년 옥고 후 1945년 3월 13일 옥에서 순교.

• 박봉랑 : 1918-2001, 평안남도 출생, 칼 바르트의 성서영감론, 바르티안, 조선신학교 교수 한신대교수, 조직신학 중 칼 바르트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

• 박상순 : 영도 제3교회.

• 박성기 : 부산 브니엘중고교 설립자, 교육가. 미국 Azusa와 Western에서 신학. 88올림픽 선수촌장.

• 박손혁 : 경남 밀양, 고려신학교 교수, 교장, 고신 교단 총회장.

• 박수준 : 칼빈신학교 교수.

• 박윤선 : 1905-88, 대표적인 신학박사, 고신, 총신, 합신 교수.

• 박영관 : 1925-2012. 한국 외과계 거목,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터전을 마련. 3대 동산의료원 원장.

• 박재봉 : 이성봉과 함께 해방 후 유명한 부흥사, 집사 시절의 백영희에게 ‘가난에서 겸손을 배우라’는 말을 전해 준 일화가 있음.

• 박찬목 : 1915-79, 1959 혜성교회 위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 박희천 : 1926-현, 내수동교회 원로목사, 총신대 교수, 합동교단의 성경과 설교에 최고 권위자. 오정현 김남준 오정호 최성규 화종부 송태근 등 유명 설교가를 제자로 기름. 2012년 현재 성경 670독을 읽고 여전히 설교하며, 합동 교단에서 성경과 설교로 가장 유명한 인물. 백영희를 성경적 설교로는 세계적으로 평가하며 칼빈과 비교하는 인물.

• 박형룡 : 1897∼1978, 프린스턴신학교,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 평양신학교 교수, 총회신학교 교장, 칼뱅주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적 정통신학.

• 방지일 : 1911-현, 평북 선천. 박윤선 김진홍과 평양신학교 동지.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고 1957년 공산화 된 중국에 최후의 선교사 신분으로 철수함.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산동선교자 방효원의 아들.

• 백영익 : 1918-2011, 경남 거창 출신. 1963년 12월 대한신학교 졸업. 1967년 서울합정동교회 개척.

• 백영침 : 1921-2004. 경남 거창 출신, 대구 비원교회 개척.

• 백태영 : 1925-현. 경남 거창 출신, 대구 달산교회와 서울 잠실동교회 개척.

• 백영희 : 1910-89년, 거창 출신. 신사참배 거부는 물론 6.25 점령지에서 신앙을 지켰고, 부산 서부교회와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 및 세계 10대교회. 설교록 182 권이 전해지며 관련 전문 연구기관은 ‘백영희목회연구소’ pkist.net

• 변영태 : 1892-1969, 1951년 전쟁 당시 외교부 장관, 1954 전후에는 국무총리. 서부교회 교인 가족.

• 손명복 : 1911년 경남 의창, 신사참배로 거부로 마천교회 사임, 평양에서 해방 때 출옥. 고신교단 총회장.

• 손양원 : 1902-50, 나환자 애양원교회, 신사참배 거부로 구금,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잃고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양자로 삼고, 6.25때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

• 손의원 : 손양원 목사님의 동생, 부산 서부교회 개척 목회자.

• 송삭석 : 1896~1980, 해방 후 고신 교단의 유명 지도자. 마산 문창교회의 송사 사건을 주도. 고려신학교 이사장, 1974년 이사장직 사면, 이후 경남 노회 분열.

• 송종섭 : 1936-현. 충북 제천 출신. 총공회 목회자. 연세대 영문학과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 합격.

• 신도관 : 경북의대 출신으로 대구의 유명 외과 의료인이며 현재 총공회 소속 목사.

• 심군식 : 1935-2002. 주남선목사님 전기 ‘해와같이 빛나리라’의 저자. 1991-2002년 기간 고신 교단 총무 역임

• 안병욱 : 사상계 주간을 역임, 숭전대학 교수, 철학자, 첫 저서『현대사상』(1957)

• 안용준 : 손양원 전기 ‘사랑의 원자탄’ 저자, 거창고교 설립자 전영창과 서부교회 나인숙과 전국순교자유가족협회 운영, 고려신학교 교수.

• 안현필 : 1913-99, 경기고 서울고 서울대에서 가르쳤고, 70년대까지 영어교육의 대표 인물.

• 양화석 : 대전중앙교회, 대전신학교 2대 교장.

• 오병세 : 1926-, 카브넌트신학교와 컨콜디아신학교를 거친 고신대학교 총장, 고신의 총회장, 고려신학교 5회 동기생으로 동방박사 3인(홍반식 이근삼 오병세)으로 불리움  1962. 10. 한상동의 고려신학교복귀 선언 후 1963. 2. 3인의 고려신학교 복고 공동성명서 발표 .

• 우태숙 : 1915. 장님이 된 남편을 지성으로 섬겼고 6․25 시기에 찬송 기도 말씀으로 유명했던 부흥사.

• 윤봉기 : 1936년 7월, 술도가를 하던 백영희를 전도한 인물

• 윤성범 : 자유주의 신학자, 국내 바르트신학학회를 주도한 대표적인 바르트 지지 학자: 감리교 목사. 그리스도교와 한국사상과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적 신학을 정립〈환인·환웅·환검은 곧 하나님이다〉〈칼 바르트〉

• 이근삼 : 1923-2007, 고려신학교 5회 동기생으로 고신 내에서 동방박사 3인으로 불리움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삼일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한상동의 처조카와 결혼, 한상동목사님의 양자, 고려신학교, 미국 고든칼리지 카버넌트 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1962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조직신학교수로 재직, 고신신대원 학장역임 (1962-82)             네덜라드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소개.

• 이근신 : 샌프란시스코 제일장로교회 원로 목사, 캘리포니아 개혁신학대학교 이사장.

• 이명재 : 이인재의 동생,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 고신 졸업, 미국 시카고 개혁교회 목회.

• 이병규 : 김현봉 제자, 계약신학교 이사장.

• 이상근 : 대구제일교회,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가(신약,구약,외경), 총회신학교(사당동) 제 6대 학장, LA국제개혁대학교 2대 교장.

• 이수필 : 일본 유학 후 광복교회 2대 목사(1946-61), 경남노회 중도 세력.

• 이영수 : 1928-87, 대전중앙교회, 총회신학교 이사장,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대회 대회장 찬송가를 하나로 통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을 역임, 중부대학교 설립, 경북 봉화. 총신 이사장과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유명한 정치 목사.

• 이영희 : 뉴욕장로교회, 간음죄 고백으로 해임, 뉴욕예람교회의 청빙.

• 이인재 : 1906-2000, 1938 평양신학교에 입학 후 신사참배 반대의 핵심 인물. 만 5년 4개월 옥고를 치르고, 평양 감옥에서 해방과 함께 출옥. 해방 후 보수 교계의 지도자, 1974년 6월 29일, 도미(渡美), 미주 합동측 예수교장로회 총회 창설, 초대 총회장 역임, 여러교회 개척과 사역 후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교회 원로 목사.

• 이종윤 : 한국기독교학술원원장, 서울교회원로목사,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 개척, 서울교회 개척,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회 서영호 목사와 동문 수학.

• 이학인 : 고신의 지도자,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중국과 북한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월남한 후로는 서울 충무로교회, 후암제일교회 등을 개척.

• 이환수 : -1985, 1948 청암교회 개척,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69. 여자신학교 개교, 70. 서울신학교 개교.

• 이현달 : 예장합동 경청 노회장, 1977년 성서신학원(샌프란시스코 기독대학교) 설립, 이사장.

• 장경재 : 1918-2001, 평북 의주. 만주 동북신학원에서 박윤선의 제자. 서울 화성교회, 합동신학원을 세워나가는데 주력, 합신 건축위원장 및 후원회장.

• 장준하 : 1918-75, 언론인, 정치가, 고신의 목사의 아들, 옥중 국회의원 당선.

• 장차남 : 1939-현. 1977년 온천제일교회 8대 담임, 합동교단 2006년 95대 총회장.

• 전영창 : 1947년 미국 유학, 고신의대 복음병원의 설립자, 거창고등학교 교장. 한국의 대표적 진보 교육학자.

• 전칠홍 : 대구 서문로교회 개척, 필라델피아 한인개혁장로교회 71년 개척, 1950년 불신법정 송사 반대 총회 탈퇴한 경기노회 노회장, 이후 고신교단의 경기노회, 57년 임시노회에서 경기노회 행정보류결정,

• 정규오 : 1914-2006, 전남 나주, 광주의 대표적인 중앙교회 목회. 합동 교단의 강경 보수주의 신앙 지도자,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광신대 초대총장, 광주중앙교회, 예장 합동과 개혁 두 교단을 통합하는 데 헌신.

• 정금출 : 1933-. 서부교회 출신, 고신언론사 사장, 교계 연합운동의 핵심 인물.

• 정재완 : 1922년, 경남 하동, 부산 서부교회 개척 교인이며 총공회 목회자로 15여 개 교회 목회.

• 조동진 : 우리나라 최고의 선교학자, 선교사 훈련과 양성, 바울의 집, 총회세계선교회(GMC)

• 조종석 : 경남 거창 위천 출신. 부산 기독학생 운동가, 대구기독교방송 광고업무 부장, 달성제일교회 장로.

• 조천일 : LA 빌라델비아교회 담임. 국제개혁 신학대학교(원) 총장 조천일 목사, 한종희의 덴버 서머나교회 5년동안 지원.

• 조해수 : 미주 총신대학교 총장.

• 주기철 : 1897-1944.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님으로 한국교회 대표 인물로 신사참배를 거부, 옥중 순교.

• 주남선 : 1888-1951, 거창교회,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 후 한상동과 고려신학교 설립, 일생 순교를 원하였지만 순교하지 못하고 별세.

• 최귀주 : 평양 부자 최벽부의 딸, 평양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정기수의 부인. 총공회 주력 교인.

• 최영교 : 캘리포니아 개혁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대전대학 졸업, 총회신학 졸업(1963)

• 최헌우 : 오렌지카운티 제일장로교회 창립.

• 최훈 : 1926-2008, 평남 출신, 동도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총회장, 김창인과 함께 교계 지도자로 동도교회와 길자연 목사를 기른 분.

• 한동희 : 1927~88, 서부교인으로 고신교단의 해방 후 SFC 운동의 대표적 인물, 공회 목회자, 고려신학교 다니며 서부교회 전도사(1951-58), 남천교회(1959~63)후에 동생 한종희의 문제로 공회를 나가 동도교회 부목 재직(~88).

• 한명동 : 한상동의 동생. 학생신앙운동(SFC)의 창설자, 칼빈대학교(고신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 부산남교회 담임목사, 학생신앙운동과 기독교 고등교육과 해외선교의 기초를 놓은 분.

• 한부선 : 한국에서 태어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평양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현장에서 반대한 선교사. 1942년 박윤선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함께 공부, 후에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과 함께 일함.

• 한상동 : 1901-76, 경남 김해 출신.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고려 신학교 설립, 대한예수교장로회 결성, 해방 후 교계 유력 목사, 초량교회에서 고소 반대 입장으로 삼일교회로 분리.

• 한영교 : 연세대총장, 신학박사, 광복교회 합동목사로 있다가 사임

• 한정교 : ‘한국판 페스탈로치’ ‘고아의 아버지’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후 심방목사로 안수, 부인 이정자 집사는 평양 여자 신학교를 나옴, 광복교회 뒤편의 애린원과 구포에 에덴고아원 운영. 손양원 자녀들을 일제 말기에 맡음.

• 함일톤 : 평양신학교 교수였으며, 미국 선교사.

• 함석헌 : 1901-89, 사학자, 민권 운동가.

• 홍근섭 : 박희천 목사님의 내수동교회 전임. 공회를 가까이 했던 인물. 평양에서 유명한 목사로 6.25때 내려와 서울 내수동교회 3대 교역자(1959), 박윤선의 서울 동산교회 개척에 결정적 역할.

• 홍반식 : 1918-93, 고려신학교, 칼빈신학교, 고신대학 총장 역임.

• 황금천 : 1958. 홍성교회의 개척 목사님.

• 황산덕 : 1917-1989, 법학자, 행정가,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형법학자이자 법철학자로, 문교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 역임.

• 황성수 : 주한 미 군정청 사법부 고문관, 대한민국 외무부 초대 정보국장 겸 법무부 법무관.

• 황보연준 : 1930년, 평양 출신. 고려신학교 출신, 미국의 대표적인 한인교회인 LA 세리토스장로교회 개척.

• 황창호 : 신앙협조회의 일원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거창고등학교 등 교육계 종사.

• 칼 바르트(Karl Barth) : 1886-1968, 스위스 출신이며 독일에서 활동한 신학자, 성경과 구원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 하나 그 전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어서 보수 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비판. 대표적 저서는 독일어로 된 31권 분량의 교회교의학.

• 반틸(Cornelius Van Til) : 1895-1987,  네델란드 출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

• 벌카우어(G. C. Berkouwer) : 1903-96, 네델란드의 조직신학 교수.

•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 1901-90,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주장자

• 매이천(J. Gresham Machen) : 미국의 근본주의(根本主義:fundamentalism) 신학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 그 신학 교수가 되고, 동시에 교수회의 의장.

• 헤롤드 존 옥켄가(Harold J. Ockenga) : 1905-85,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Park Street) 교회 목사, 1947년에 저명한 라디오 복음전도자였던 풀러(Charles E. Fuller)와 풀러신학교 설립.

2. 교회


• 항서교회 : 부산시 서구 부용동, 190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사이드 보탐) 목사 전도로 시작, 신사참배 핵심 세력인 김길창 목사님으로 유명한 교회, 한종희 3형제가 1942년부터 출석, 1948년에 이명달 전도사, 김영준, 조종석, 한동희가 서부교회로 개척하여 나감.

• 광복교회 : 부산시 중구 보수동, 국제시장 주변 주택가에 위치하여 북한 출신의 재력가들이 많았음. 일본인 교회를 광복 후 인수, 제1대 윤인구 목사와 1946년 한영교 협동목사가 1947년 사임 후 일본에서 온 이수필 목사 부임. 후에 고신과 총회로 나뉠 때 총회파 교회.

• 초량교회 : 1892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이 시작한 부산의 당시 제일 중심 교회, 3대 주기철 목사, 고려진영과의 분열로 1946년 부임한 6대 한상동이 1951년 삼일교회로 분리되어 나감.

• 서부교회 :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1948년 항서교회의 김영준 장로님과 이명달 여 전도사님과 조종석, 한동희, 장렬 등이 서부교회 초대 설립 교인. 서부교회 1대 목회자 손의원 목사(손양원 목사 동생), 2대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3대 백영희 조사. 한상동, 박윤선의 일치된 청빙에 의해 부임. 이후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를 만든 교회가 됨.

• 새문안교회 :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1887년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가 됨. 당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 받는 강신명 목사님(1955-80)이 계셨음.

• 내수동교회 : 1954년 백영희의 예배 인도로 개척 출발. 부산서부교회 출신 김병도(서울대 영문학과) 등 학생들과 이재순(대림건설 설립 및 임원, 국회의장 이재영 사촌) 가정 등이 개척 교인, 1대 김승곤, 2대 백영익, 3대 홍근섭, 6대 박희천 등.

• 동산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1가, 1961. 1. 설립, 박윤선(1961.2.5.-64.3.29.) 김성환(1964.5.31.-72.4.2.) 재임. 박윤선 재임기간 동산교회에서 개혁신학교 운영됨. 1960년 홍근섭목사님의 서울 삼각산 산상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우경신 여전도사님(후에 여자신학교 교장)과 이능전 집사님(훗날 합동교단 전국여전도회 연합회 회장 2회 역임)이 중심이 되어 박윤선을 청빙하여 동산교회를 개척.

• 고암교회 :  남천교회에서 1955 정재완 개척, 1958 한종희의 수감으로 남천교회에 흡수.

• 금성교회 : 남천교회에서 1958년 정재완 개척, 1961. 1. 한종희 이동(1961-63)

• 남천교회 : 1953년 10월 최귀주 집사님 등 성도 10명이 백영희 목사님을 모시고 첫예배, 김성환(1953-55) 조사님으로 고려신학교를 다니며 담임, 한동희(1959-63)

• 동성로교회 : 이인재 박윤선 목사님이 시무했던 공회 교회. 대구의 유명한 신앙인 우동팔 장로가 개척 때부터 중심 교인. 대구의 3 대 교회 중 하나인 제일교회는 대구에서 유력했던 최제화 목사님이 있었으나 1952년 교단 분리 때 고신을 따르는 교인들이 우동팔 집사가 중심이 되어 성남교회를 개척했고, 1962년에 이인제 목사, 1964년에는 박윤선 목사가 목회를 했으나 백영희 신앙노선을 지키는 교인들과 의견이 달라 각각 교회를 떠나고, 우동팔 장로의 사위인 신도관이 의사로 평생 봉사하고 장로를 거쳐 목사로 종신하는 공회의 대구 지역 중심 교회.

3. 신학교



• 평양신학교 :

1901년 평양에서 미국인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에 의해 설립된 신학교.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였고, 평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평양신학교로 불림. 신학교의 교사로는 마포삼열과 이길함(Graham Lee:1861~1916)이 맡았으며 최초의 학생은 김종섭과 방기창. 1904년 마포삼열이 신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학교건물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개인 주택을 교사로 이용. 당시 수업진행은 3개월만 진행하고 9개월은 교회에서 일을 맡아 보는 방식으로 진행.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이기풍, 양전백, 한석진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09년에는 시카고에 거주하는 사이러스 맥코믹(Cyrus Mccomick) 여사의 후원으로 학교건물을 새로 건축.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한국교회 지도자를 배출. 1930년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였기에 강제 폐교..


• 고려신학교 => 고려신학대학원

1946년 주남선 한상동의 설립, 박윤선의 신앙 강좌 개설로 기초 마련, 고신교단의 모태가 되는 신학교로 해방 후 정통 신학의 중심. 1961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신측)와 합동(총신측)의 교단 통합으로 말미암아 부산에 있던 고려신학교는 서울에 있는 총회 신학교와 병합. 1962년 10월 17일 양측의 재분열로 인하여 부산에서 다시 고려신학교가 복교. 1964년 9월 고신측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가결. 1970년 12월 30일 고려신학교를 폐교하는 대신 고신대학을 인가 받음.


• 박윤선과 개혁신학교

1961년 봄 동산교회에서 개혁신학교 시작, 박윤선 김진홍교수(백영희목사의 공회에서 생활비 지원)  

[1962년 6월 6일 김진홍이 발송한 한부선 수신의 편지 내용]

박윤선의 개혁신학교 학생 총 33 명, 합동 교단 13명, 고신 교단(경기노회 보류) 8명, 백영희 공회 7명, 통합 교단 2명, 그리스도의 교회 2명, 기타 1명, 개혁신학교 학기 종료 5월 마지막 주간


• 박윤선과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1948.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박형룡 교장)

1951.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직영(박형룡 교장)

1964. 4대 이상근, 5대 박윤선 교장, 6대 명신홍,

1995 총신대학교, 총장 김의환


• 박윤선과 합동신학교

1980. 총회신학교로부터 분리하여 합동신학원을 개교, 원장 박윤선

1985. 박윤선 명예교장, 본관 완공

1996. 교육부로부터 합동신학대학원대학으로 승격 인가


• 부산장신대학 :

1953. 노진현, 이수필, 구영기, 김현준, 장승환 5인 발기회에 의해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신학교 부산분교

1956.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산신학교 (총회신학교)

1970. 영남신학교의 분교 형태인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로

1983. "장로회부산신학교"로 제68회 총회에서 독립신학교 인준

2000. 교육부로부터 부산장신대학교 설립을 인가(초대총장 김창인)


• 칼빈대학교 :

1954.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로 개교 (교장 김규당)

1959. 총회의 합동, 통합 분열에 따른 일시폐교  

1960. 재 개교  

1960. 노진현 목사 제2대 교장 취임  

1961. 박형룡 목사 제3대 교장 취임  

1962.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로 개칭  

1996. 교육부로부터 4년제 칼빈대학교 인가(신학과 정원 40명)  

1999. 교육부로부터 칼빈신학대학원 신설 인가  

2002. 제2대 총장으로 김의환 박사 취임  

• 대구신학교, 대신대학교 :

대구야간신학교>대구신학교>대구신학대학>대신대학교(합동)

1954. 경북노회 주관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야간신학교' 설립(초대 이사장 명신홍),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야간신학교 대구분교'로 개칭,

1959. 합동 통합 분리로 기존의 학교가 통합측이 되자 다시 합동측의 신학교('대한장로회신학교')를 재설립,

1972. 학교법인 대구신학교(동산성서학원)를 인수 운영,

1982. 대한장로회신학교(총회인준)를 대구신학교 신학부(야간4년제)로 재개설,

1996. 4년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아 '대구신학대학'으로 승격. 1997. ‘대신대학교’ 로 명칭 변경.


• 서울장로회신학교 => 서울장신대 (통합측 신학교) :

1954.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에 "총회 야간신학교"로 설립.

1962. 한성교회로 이전하고 2 대 교장에 강신명 취임.

1963. 서울장로회신학교로 개칭.

1969. 새문안교회로 이전.

1982. 학교법인 광명학원 설립 허가.

1984. 광주캠퍼스 4년제 대학과정(각종학교) 설립인가.

1997. 4년제 정규대학(서울장신대학교)으로 개편승인.



• LA 국제개혁대학교 :

국제개혁대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들이 이민을 와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목회자와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1977년 9월 김의환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이진태 목사를 초대 학감으로, 이상근 목사, Dr. Michael De Vries가 교수로 국제개혁대학교가 시작.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어 신학대학인 국제개혁대학교는 그동안 미주 이민 교회와 세계선교를 위해 훌륭한 많은 졸업생들을 배출. 역대 총장으로는 이상근 박사, 장상선 박사, 황보연준 박사등이며, 역대 이사장으로는 고응보 박사, 최헌우 박사, 서재승 박사, 김덕영 장로, 이운영 박사 등.


• 샌프란시스코 기독대학교 신학대학원 :

1977년 상항 성서 신학원(San Francisco Bible Institute) 설립

성서신학대학으로 승격 후 이사장으로 김상권 목사 , 학장에 이현달 목사, 학감겸 대학원장에 최영교 목사가 취임, 현재 종합대학교로 인가받아 한국을 비롯 세계 여러 나라에 분교를 두었으며, 미국 전역에서 가장 큰 한인 기독대학으로 성장.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29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그래함 메이천박사와 반틸박사를 주축으로 세워진 미국 장로교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여기며, 개혁신학과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 게할더스 보스의 성서신학과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법으로 유명.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주)에 위치. 분교로 런던과 뉴욕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있고 한국의 유명 신학자와 목회자가 제일 많이 배출 되었으며 2009년 기준으로 6백여 명 학생 중에 한국인 학생이 2백여 명 재학할 정도.


• 풀러신학교 (Fuller Theological Seminary) :

1947년에 저명한 라디오 복음전도자였던 풀러(Charles E. Fuller)와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Park Street) 교회 담임목회자였던 헤롤드 존 옥켄가(Harold J. Ockenga)에 의해서 풀러신학교 개설.


4. 기타


• 오번선언(Auburn Affirmation) :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1910년 총회가 채택한 "5개조"(Five Points)를 1923년 다시 확인하는 순서를 가짐. 성경의 영감과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그리스도의 이적, 이상 다섯 가지는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거나, 목회를 희망하는 목사에게 최소한의 신앙고백으로 확인된 것. 이에 자극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1923년 12월 26일자로 149명의 목사들의 서명과 함께 "오번 선언서"(The Auburn Affirmation)를 선언하고, 위의 다섯 가지 교리들은 "이론"에 불과하며,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 이후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메이천을 비롯한 보수신학자들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구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을 계승하는 일을 계속하게 됨.


• 파숫군 :

고신 교단 창설 당시 1948년에는 ‘파수꾼(월간지)’이라는 이름으로 발행,  1956년 고신지도부는 돈이 든다며 폐간하려고 하자 서부교회 단독으로 비용을 내어 1년간 발행하다가 1957년 돌려달라는 제의에 돌려줌. 60년대(1964) 초 합동과 환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합동 측 기관지가 됨. 이후 고신교단은 ‘개혁신앙’, ‘고신대학보’ 등으로 맥을 이어오다가 마침내 1981년 7월부터 ‘월간 고신’이란 새 월간잡지를 발행.


• 사상계[思想界] : 1953년 4월 장준하가 창간, 1970년 5월 종간되었던 월간 종합교양지.


• 신학지남 :

초대 편집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G. 엥겔(한국이름은 王吉志)이 맡았고 처음 10년 동안은 신학교 교수진을 이루고 있던 선교사들이 집필자로 참여. 국판 160쪽 안팎으로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출간. 1918~27년에는 계간으로, 1928~40년에는 격월간으로 발간. 1938년 6월 일제에 의해 신학교가 폐교된 뒤에도 선교사와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간행되다가, 1940년 10월 제22권 5호를 끝으로 폐간. 6·25전쟁 등으로 계속 이어오지 못하다가 신학교가 서울 남산으로 옮긴 후 1954년 2월 제23권 1호를 발행하여 14년 만에 다시 속간. 공백기간 동안인 1949년 1월, 1950년 1월, 1953년 1월 등 3차례에 걸쳐 박형룡 등이 신학정론 神學正論〉이라는 이름으로 발간. 1955, 1958, 1959~62년에는 교단분열로 매년 1권씩밖에 간행하지 못하다가 현재는 총신대학 출판부에서 발행.


• 신학정론 :

1949년 1월 25일 창간된 신학연구 논문지. 계간. 편집 겸 발행인 박형룡. 발행처 장로회신학교. 국판 60여 면. 보수주의적인 신학운동을 문서를 통해 전개하고자 발행. 50년 1월에 폐간되었으나 53년 속간호를 내었으나 이내 폐간되고 박형룡은 <신학지남>의 발행인이 됨.


• 통합 : 교리와 신앙 노선에 상관 없이 세계 모든 기독교를 통합하자는 WCC 운동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색채의 교파. 서울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과 장신대 및 숭실대학교 등이 대표적인 인물


• 합동 : 보수 신앙을 가진 교단으로 1만 1천여 교회가 속한 한국 최대 교단. 총신대를 운영하며 김창인 목사님의 충현교회가 초기에는 중심이었고 교권은 대구 경북 지역에서 행사했으며 최근에는 사랑의교회(오정현) 삼일교회(전병욱) 수영로교회(정필도) 등의 국내 초대형교회들이 다수 소속하고 교계의 중심에서 활동.


• 미국공보원 : 미국 정부가 해외홍보를 위해 세계 각국에 설치한 기관, 미국 문화의 소개, 세계 각국과의 문화교류협력 증진, 학자 및 문화인과의 교류사업 추진, 정기간행물 발간, 도서관 운영 등.


• SFC (Student For Christ 학생신앙운동) 고신 교단의 전국 학생신앙운동 단체. 교회사에 특별하게 기록할 만큼 신앙과 열심히 특별함.한명동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부산 제1영도교회에서 모닥불 기도회로부터 시작, 1947년 전영창 선생의 주도로 10 명의 학생들이 “학생신앙협조회”란 이름으로 정식 조직.

 1948-52, 기독청년을 위한 수양회 개최(고려신학교의 도움)

 1953년 1월 임시대회에서 “전국학생신앙운동”으로 개칭.

 1953년 8월 SFC 강령 채택 - 초안 박윤선, 한명동 목사.


•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복음주의협회.) 1942년 창설된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 협의체, WCC 반대 단체.

• CRC 교단: (Christian Reformed Church) 북미주 개혁 장로교회.

• 성경정경론 : 성경 66권만 하나님의 성경임을 밝히는 것, 정경의 형성과 전승 과정을 밝혀 정경으로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연구.

• 계시의존사색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영향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고를 사색하는 것”

• 법철학 : 서양의 법철학을 동양적 불교사상으로 소화하여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을 극복한 법도구론(法道具論)을 정립하려는 분야.

•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19세기 개신교 신학에서 나타난 진보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진정한 복음주의 즉 개신교 정신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영미 지역의 보수주의 개신교 사상을 지칭. 현재는 원래 신복음주의 의미 이외에 미국 개신교 보수주의 중 기독교 근본주의내 온건파들을 포함.

■ 후기




1. 출판 의미


1) 교회사적 의미


한종희의 개인 신앙과 이력은 특별한 면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 인물의 의미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생각 되어 집중 연구하게 되었다.

보수 교계의 내면을 깊게 살피는 이들은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3인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3인의 일부를 아는 이들은 많으나 3인을 함께 겪고 그들의 관계까지 아는 인물 중 본 연구소로서 객관적 자료를 제공할 분은 한종희 목사님으로 판단하여 면담을 포함하여 3년의 재확인을 통해 다음 내용을 출간하게 되었다.

박윤선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 ‘고신’에서 ‘합동’으로 교단을 변경했다. 그 시기에 한국교회 보수 교단사는 고신과 합동이라는 두 교단이 교단을 합했다가 나누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나 그 이면에는 박윤선의 소속 변경이 갖는 인물사의 전개가 있고 박윤선으로 인해 보수교단의 내적 중심은 대변혁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바로 이런 역사적 전환을 가져온 1960년대 초반의 박윤선 행적은 이상하게도 알려 진 부분이 거의 없다.

이 시기가 그렇게 된 것은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세 사람의 관계가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고신이나 합동이라는 보수 교계의 주요 교단과 연락은 두절 되어 있었고 이들은 개인적인 이런 관계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1960년대 초반 이전에는 가장 가까운 동지들이었으나 이 시기를 거치며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분야를 맡겨 서로의 길이 달랐고 모두 자기 분야에서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따로 접할 일이 없었거나 거의 없었다. 한종희 목사님은 1950년대 초부터 세 분을 다 가까이에서 모셨고 상기 시기의 목격자며 관계자였다.



2) 신앙의 사례


오늘 한국교회의 발전상과 역량은 우리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또한 지금 교계 안팎에서 제기 되는 제반 문제를 두고 현재 불신 세상과 자유주의 교회들은 두고 갈 세상의 윤리 문제만 비판하여 교회의 외곽을 잘 꾸미라고 촉구하고 있으나 우리는 천국과 부활까지 잊어버린 교회의 내면을 개탄하며 고민하고 있다.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사랑하셨는가, 어떤 모습이 원래 우리의 건전했던 신앙이었던가, 오늘을 만든 어제를 생존 증인을 통해 살펴본다. 증언이 생생하고 교회사 및 오늘 교계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등장한다. 다 함께 존경할 점도 보이고 아쉬워 할 점도 보인다. 각자 판단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부분도 더러 보인다. 이 책은 한종희 생애를 추적해 가며 이 모든 부분을 살핀다.


요약하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내용이 많다. 우리가 몰랐던 중요한 내용도 많고 개인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으나 한국교회를 위해 한종희 목사님은 최선을 다해 증언했다. 저자는 소중한 교회사 자료를 제공하신 당사자를 예우하고 또 최대한 당시 상황에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회고 당사자의 어투나 미묘한 심리 표현까지도 최대한 살렸다. 다만 책의 전체 흐름과 이해를 위해 어떤 때는 인용으로 어떤 때는 저자의 직접 기술로 처리했으나 이 책 전체를 회고 당사자가 자신의 회고록이라고 인정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성의를 기울였다.

책 내용 중에 교리나 역사나 구체적 사실 자체에 이견이 있다면 이 책의 출간 후 별도로 연구할 과제로 제안한다. 회고 내용 중에 당사자 한 목사님의 의견을 전부 반영하지 못한 것은이 책이 변론서가 아니라 한종희가 본 한국교회사의 일부이므로 일단 교회사적 내용으로 일관하고 연구 과제는 출간 후 문제로 분리했다.



2. 출간 확인 사항



저자 이영인 목사는 2009.3.25. 한종희 목사님의 자택에서 대담하며 그 전체를 녹취했고

⑴ 방문 시에 얻은 자료를 정리한 뒤, 3 년간 1백 통 이상의 메일을 통해 수정을 받았다.

⑵ 회고록은 사실을 적어야 하고 과장이나 미화는 삼가할 대상이다.

⑶ 역사적 의미를 강조할 때는 이름 석 자만 적되, 필요할 때는 이름에 직함이나 님을 붙인다.

⑷ 인문과학 생리학 등 기초학문도 신학과 교리에 관련이 있으므로 고려해야 한다.

⑸ 현대 언론 현황에서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한다.

⑹ 한종희는 백영희, 이인재, 박윤선을 평생 동안 측근에서 모시며 배운 사람으로서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관계를 지켜 본 근접 목격자이기 때문에, 한종희의 생애에는 세 분의 사상과 삶이 녹아있고 베어있다.

⑺ 한 목사의 생애(1931-)는 1945년 해방부터 현재까지 그 생애 자체가 한국 보수교회사의 자료이다.

⑻ 한종희가 백영희의 교리를 비판한 근거와 배경에 대한 해설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게 하여 줄 것이다.



이영인

1982-현 : 백영희목회연구소 근무

1984-86 : Covenant Seminary

1986-89 : 부산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장

1989-현 : 여수 신풍교회(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이 1952년 개척)
















한종희의 신앙생애

「해방 후 한국교회 격변기의 보수 신앙」

           

2013년 7월 31일 초판발행

           

저 자 • 이영인

편 집 • 장현주


발 행 • 백영희목회연구회


등 록 • 제03-86호 (2000. 11. 18)

주 소 • 556-893 전남 여수시 율촌면 여순로 419-5

      pkist.net, yileepkist@naver.com

전 화 • 061-682-9800, 010-4631-1631



값 6,000원


한종희의 신앙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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