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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봉한 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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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남 지역과 신사참배 거부 운동
















호남지역의 신사참배




1910년에서 1945년까지 36년 동안 계속된 일본의 한반도 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일본 제국의 식민통치 기관)는 조선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제 이행하도록 명령했다. ‘신사참배’는 일본인이 섬기던 조상신을 모아 놓은 신사라는 곳에서 그들의 조상을 귀신으로 섬기며 참배하는 것이다.


그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 교회의 입장은 두 가지로 갈렸다. 성경말씀에 따라 신사참배는 죽은 사람이나 귀신을 섬기는 우상행위니 제2계명이 금한 죄라고 판단하여 반대해야한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본 경찰이 두려워서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신사참배에 목숨 걸고 거부한 교회들은 크게 두 지역으로 집계된다. 북한에서는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교회가 많았고, 남한에서는 경남과 부산 지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 지역이었고, 경남과 부산은 호주 선교 지역이었다.




전남․북으로 된 호남지역은 위의 두 지역에 비해 저항이나 순교자가 너무 허무했다. 호남 지역에서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심봉한 집사님을 비롯해 세 명의 순교자가 확인된다. 당시 호남지역의 교회는 미국의 남장로교가 선교활동을 통해 전도하고 신앙을 지도해온 곳이다. 미국 남장로교는 평화시에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의 친목을 강조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 때가 있다는 순교신앙 면은 소홀히 한 듯하다.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의 역사가 호남지방에는 너무 빈약하다. 앞의 두 지역과 비교할 때 차이가 크고 또 훗날 해방 후에 신사참배 후속 처리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는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의 이익을 오히려 적극 옹호하고 나선다. 이러한 신앙관과 분위기 때문인지 호남지역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신사참배 환란기에 신앙 승리자를 찾기 어렵고, 신사참배 항쟁에서 승리를 거둔 교회 역시 찾을 수가 없다.


최근 교단들이 현재의 교세와 함께 역사적 정통성 문제도 중요한 것을 느낀 나머지 순교자의 정의를 확대하여 순교자를 많이 발표하고 있다. 심지어 신사참배 수난사라는 이름으로 신사참배의 초기에 고초를 당한 사람들을 최종 승리자처럼 미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순교자를 발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나 대상이 매우 궁색하여 찾기 어렵게 되자 6.25 전쟁 기간에 교인 신분을 가진 상태에서 희생당한 분들을 대거 순교자로 발표하는 추세다.










일본 식민지 시기의 신사참배




1910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를 하게 된다. 이 시기 일본은 일본식 종교를 통해 일본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군인을 만드는 정신적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가 ‘신사참배’다. 신사참배는 ‘일본을 위해 죽은 군인과 애국자가 귀신이 되어 일본을 지킨다’는 논리다. 죽은 일본의 귀신들 앞에 머리 숙여 절하는 신사참배는 식민지 초기에는 일본인들만 참여했고 일본인의 특권처럼 되었다.


그러나 중국을 점령한 후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함께 군인까지 뽑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일본은 조선이 원래 일본과 같은 뿌리라며 일본을 뜻하는 ‘내’와 조선의 ‘선’을 합하여 ‘내선일체’라는 정책을 내 놓았다. 일본의 전쟁은 곧 조선의 전쟁이니 마음으로 하나 되어 함께 싸우자는 사상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의 성씨조차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과 일본을 위해 죽은 귀신들에게 함께 절을 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 신사참배는 하나님만 섬기는 기독교 신앙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국교회는 일본의 귀신에게 절을 하는 것은 미신이니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종교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교회를 향해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을 통해 사상범이라는 무서운 죄를 적용하여 감옥에 보내거나 고문을 하여 목숨을 빼앗는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일본의 식민지 정책 앞에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혹독한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하거나 아니면 숨어 버리게 된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 인물인 평양의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님은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4년 순교로 생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위협과 회유에 말려 하나씩 굴복하게 되고 한국 교회는 마침내 총독부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게 된다. 그래도 전국적으로 소수의 신앙인들이 끝까지 목숨 걸고 신앙 투쟁을 했는데, 선교지에 따라 투쟁 활동은 현저하게 편중이 된다. 구례 지역의 양용근 목사님과 심봉한 집사님 그리고 여수의 이기풍 목사님이 이 지역에서 순교하지만 이기풍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관할한 평양 출신이고 양용근도 평양 신학 출신이다.












호남의 순교자 3인




● 이기풍 (1865년 - 1942년 순교, 77세) 우학리교회


● 양용근 (1905년 - 1943년 순교 : 38세) 구례읍교회


● 심봉한 (1892년 - 1943년 순교 : 51세) 신월교회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마당에 세워진 호남지방 순교비


일본 강점 시대 순교자 3인과


여순 14연대 사건 순교자 7인






(1) 이기풍 (1865년 - 1942년 순교, 77세)








이기풍 목사님은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883년까지(19세)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평소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하던 청년 시기인 1893년(29세)에는 평양 거리에서 노방 전도하시던 선교사 마포삼열(S. A. Moffett) 목사님의 아래턱을 돌로 쳤던 불량배였다. 청일전쟁(1894년-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일어나자 함경남도 원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신자들을 박해하는 못된 행동을 하던 그는 어느날 전군보 전도사님의 전도를 받았으며, 1894년에는 소안론(W. L. Swall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후 1898년부터 1901년까지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도 안악, 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돌며 복음 전파활동을 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그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하여 1907년(42세)에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 한국교회 최초 목사 7인(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이기풍) 중 1인이 되어 한국교회사의 인물이 되었다.


장로교 목사가 된 후, 한국 최초 오지 선교사로 임명받아 당시 복음이 거의 미치지 못한 제주도 지역의 선교활동을 떠나게 된다. 그 시기만 해도 제주도는 오늘의 선교지보다 더 험하고 멀고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의 부인 윤함애 사모님은 선교사 이길함(Graham Lee)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제주도 오지 선교를 하던 중, 1918년 전남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초빙되어 전라 노회장 및 전국 총회의 부회장 등에도 역임되고 호남지역 교회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23년에는 전남 순천교회 목사에서, 1924년에는 전남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었다. 1934년에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갔다. 이 밖에도 이기풍 목사님은 돌산(전남 여수 지역)이나 완도(전남 신안군 지역) 등지의 도서지방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목사님은 제주도와 호남 지역 오지 선교에 충성하다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모진 고난을 당하신 후 순교하게 된다. 순교할 당시는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중이었으며, 칠순이 넘는 나이에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여수경찰서에 끌려가 2년의 고문과 옥고를 겪게 된다. 일본 경찰은 종교 때문에 탄압을 하는 것이 세계적 문명국가를 주장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을 자주 씌운다.


고문이 계속 되던 중 임종이 급하게 되자 여수경찰서는 이 목사님을 서둘러 내보냈고,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순교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1953년에 광주 기독묘지로 이장되었다. 평생 이기풍 목사님의 목회를 도와 헌신한 윤함애 사모님도 1962년 12월 25일 향년 84세에 생을 마감했으며, 유족으로 이사례 딸 한 분이 있다. 현재 그의 신앙행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도에는 이기풍선교기념관(www.lmmc.kr)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고, 여수 우학리에도 이기풍목사 순교기념관이 별도로 있다.




다음 기사는 이기풍 목사님의 신앙 고난사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인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통해 순교자 심봉한 집사님이 믿던 당시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신앙 생활을 위해 얼마나 고초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도록 인용해 본다. 신앙을 위해 순생의 걸음을 걷던 이들에게 순교가 주어지는데, 영광스런 순교에 이르기까지 평소의 생활은 모두 비슷했다. 복음에 붙들린 헌신, 고난, 사랑, 처자식의 어려움 등을 잘 짐작해 볼 수 있다. 신앙의 차원과 내용은 조금씩 달랐을지라도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놓아도 비슷할 분들이었다.  


제목: “솔로몬의 영광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1. 부모님의 이삿짐


나의 아버지는 섬이나 농촌 시골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시던 개척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내가 어린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이삿짐에서 아버지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셨던 물건은 큰 벼루와 먹, 그리고 아주 큰 붓과 중간 붓, 다음에 제일 가느다란 붓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소중한 물건은 무거운 맷돌이었습니다. 맷돌에다 콩을 갈면 두부가 되고, 비지가 나왔고, 녹두를 갈면 맛있는 빈대떡이 되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섬에서 육지로 이사를 갈 때도 이 무거운 맷돌을 꼭 가지고 가셨습니다.






2. 아버님의 교훈 세 가지


부모님의 이사짐에는 붓이나 맷돌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집 안방 벽에 걸어 놓았던 가훈이었습니다. 제일 왼쪽에는 한글로 크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장 10절)”라고 쓴 말씀이었고, 그 옆에는 두 마디씩 한문이 적혀진 세 장의 종이를 붙여놓았는데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 단어를 그림처럼 구경만 했습니다.


그러나 5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나에게 세 가지 글귀를 하나씩 읽어주시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글은 ‘관용’이었고, 가운데 글은 ‘백인’, 그리고 맨 오른쪽은 ‘겸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레야, 네 친구가 아주 슬프고, 고통을 당할 때에 즉시 그 친구의 슬픔과 고통을 네 슬픔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즉시 그 친구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을 관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백인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잘 참되 열 번, 스무 번, 혹은 오십 번이 아니고 백 번이라도 참고 견디는 것을 간단하게 백인이라고 한다. 세 번째 겸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너보다 낫게 여기고 네 친구를 항상 칭찬해 주는 마음을 가질 때 겸손한 아이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 아주 쉽게 설명을 해 주신 말씀이지만 내가 85세가 된 이날까지 제 일기책에 써놓고 매일 몇 번씩 읽어보며 아버지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① 관용의 신앙     첫 번째 가훈은 ‘관용’입니다. 아버지는 아주 관용하신 분이셨습니다. 청년 시절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셨기 때문에 더욱 관용하신 아버지였습니다. 항상 상대방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셨으며, 때로는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끝까지 상대방을 도와 주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7년에 한국 최초로 일곱 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독노회가 조직이 되고, 졸업생이셨던 아버지는 1908년 2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렀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말과 풍속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한 아버지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 서양 귀신을 가르치는 야소교 목사라고 손가락질도 했습니다.


어느날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나서 관덕정 옆으로 흐르고 있는 냇물에는 급물살로 돼지가 떠내려 오고, 고리짝도 내려오며, 어떤 집 한 채는 산산이 부서진 채로 떠내려 왔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 이 가슴 아픈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저 위에서 사람이 떠내려 온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상류 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큰 통나무 가지에 매달려 떠내려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 대열에서 가슴 아픈 광경을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여인을 발견한 즉시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속바지만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까이 오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물에 첨벙 뛰어들어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여인을 언덕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평양 대동강에서 헤엄쳤던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주민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숨을 죽인 채 도대체 저자가 누구인가를 살폈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아버지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박해했던 야소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서양 귀신을 믿으라는 야소교 목사란 자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거참 대단하군”이라며 생각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아버지는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가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하여 교회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침 길거리에 지나가던 미치광이를 데려다가 기도한 즉시 귀신이 나가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을 보게 되자 이곳 저곳에서 신체적 장애로 인해 고생하고 있던 앉은뱅이나 소경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제주도 전체를 향한 전도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우선 교통편으로 조랑말 한 필을 구입해서 말을 타시고 한라산을 한 바퀴 도는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밤중에 인가를 만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서 마구간에서 주무실 때가 허다했고, 매 끼니 식사를 못할 때는 흘러내리는 물로 배를 채우셨다고 합니다.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시고 전도한 결과 제주도 사역 13년 동안에 열 다섯 군데에 작고 큰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② 백인의 신앙     두 번째 가훈은 ‘백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참으셨습니다. 1907년에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 받으신 후, 즉시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까지 걸어와서 조그마한 동선을 타시고, 서해바다를 건너 목포까지 왔습니다. 이때도 풍랑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목포에 어머니를 남겨두신 채 1908년 2월에 아버지 홀로 제주도를 향하여 돛단배를 타셨습니다. 사공이 노를 저어서 가는데, 제주도에 가까운 추자도 섬 근방에까지 도착했을 때 심한 조류에 강풍까지 몰아쳐서 갑자기 배가 뒤집어지면서 파도로 인하여 동선이 산산 조각이 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깨어진 배의 널판을 발견하고 재빨리 두 손으로 꼭 붙들고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둥둥 떠돌아 다녔습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물체가 보여서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점점 어두워지고 깜깜하게 되어 아무런 물체도 보이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때 추운 것과 배고픈 것은 참을 수가 있었으나 잠 오는 것은 참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물 위에서 하루 반(36시간)을 표류하고 다닐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부르짖는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저를 살려 주셔야 제주도의 불쌍한 영혼을 살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옵소서.” 계속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조금씩 환하게 날이 밝아오자 하나님의 기적으로 추자도 부근에 고기를 잡으러 나온 어부에게 발견되어 살아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끈질긴 인내심과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있었기에 제주도에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13년간의 제주도 사역 이후에 전남 벌교라는 시골에 8년간 5개 교회를 개척하시고, 70세가 되던 해에 전남 여수 남면 우학리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하필 우학리교회 목사관 뒷산에 신사가 세워져 있어서 국경일만 되면 온 섬마을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어서 목사관 담을 지나 신사에 절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시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안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고, 신사참배 행사가 끝나면 여수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아버지를 연행해 갔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죄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 둘째, 미국 남장로교에 속한 선교사들과 같이 교회개척을 했다는 이유로 영향력있는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죄, 셋째, 묵시록을 강해한 죄입니다. 강대상에 올라가셔서 힘찬 목소리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곧 망한다고 외치셨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몰아붙였습니다.


1940년 11월 15일 새벽 2시에는 순천노회 소속 17명의 목사님들이 일제히 검거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연세가 73세였는데, 17명 목사 중에 가장 악질분자로 구분되었습니다. 아버지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일본국기가 달린 경비정이 출동하여 사택에 당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체포된 상태로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취조를 받을 때마다 누가 취조를 받는 사람이고 취조하는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신사에는 절할 수 없다’라고 고함을 치셨다고 합니다. 일단 풀려 나온 목사님들이 ‘이기풍 목사님이 좀 순순하게 대답을 하시면 저렇게까지 고생을 안 하실 것인데’라고 말씀하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여수경찰서에서 시달리는 2년 동안에 아버지의 모습은 뼈와 가죽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고문이 있던 그 즈음 여수경찰서 형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상태가 너무 악화되었으니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 회복이 된 후 다시 광주형무소로 이감한다는 전제 조건을 아버지에게 전하자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셨으나, 강제적으로 끌어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우학리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극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그해(1942년) 6월 20일에 순교를 하셨습니다.




③ 겸손의 신앙     세 번째 가훈은 ‘겸손’입니다. 아버지는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제주도 성내 교회의 목사관에서 보냈습니다. 그 때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평생 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가 새벽기도회에 가셔서 식사 때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어 가끔 아버지를 모시러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하루는 교회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교회 강대상을 부여잡으신 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라고 큰 소리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나는 예배당 문간 옆에 있는 신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덩달아 눈물이 나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순교하시는 날까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성내교회에 유물로 남아있는 강대상을 볼 때 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세 가지 가훈에 대한 아버님의 행적과 함께 어머니의 생생한 가르침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외유내강의 저력을 가지셨고, 말할 수 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관용과 인내와 겸손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1908년 4월에 목포에서 머물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신 두 달 후에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그 당시에는 병원도 없었고, 아이를 낳다가 죽어 가는 산모가 많이 생기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이를 낳던 산모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가서 거의 살아날 소망이 없는 산모를 살리고, 아이까지 잘 받아내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게 되자 어머니는 여러 집의 아기를 받으러 다니는 일을 도맡게 되셨습니다. 아기 배꼽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동안 산모수발도 해 주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진 산모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게일 선교사에게 시체를 처리하는 법을 배운 어머니는 상갓집에 가서도 묵묵히 시체를 잘 닦아내고 옷을 입혀주는 등 여러 모로 어려운 일을 도맡으셨습니다. 상갓집 식구들도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폐결핵 환자가 각혈을 하고 사망한 특별한 경우에는 입에 마스크를 쓰고 시체 처리 때 입는 바지를 입고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어머니 홀로 방바닥에 흘러있는 피를 깨끗이 닦아내고 소독하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결핵 환자가 각혈할 때 가장 균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전염될까 봐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토록 어머니는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웃 사람이 울고 있는 곳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위로해 주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전남지역 벌교라는 시골로 이사를 왔을 때가 내가 아홉 살 때였는데, 그후 8년 동안도 어머니의 사랑 실천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 시절에는 거지들이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거지에게 밥을 주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믿고 대문을 꼭꼭 잠갔습니다. 이렇기에 거지들의 아침 식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대문이 없었습니다. 거지들이 아침에 들어오기가 쉬웠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많이 지어놓고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한 그릇씩 떠서 담아 보냈습니다.


이 외에도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온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환우들을 더 싫어했습니다(애양원은 한센병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어머니가 제일 반가와 하는 손님들이 바로 이 환우들이었습니다. 집을 찾아올 때 세 명 혹은 다섯 명씩 몰려서옵니다. ‘사모님!’ 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황급히 나가서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앉게 했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마루에 앉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급히 손을 움직여 밥과 국과 김치를 상에다 받쳐 들고 나오셨습니다.


나는 환우들의 모습이 무서워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창구멍을 뚫어 놓고 누가 제일 밥을 많이 먹는가를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찾아오는 분은 양손이 없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직접 밥을 먹여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을 떠나보내고 방으로 들어오셔서 어머니는 기도하는 지정방석에 앉아 불쌍한 환우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음성이 이 시간에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1940년 아버지가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어 2년간 경찰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어머니는 대담함으로 우학리교회를 지켜내셨습니다. 철저한 주일성수 및 수요예배까지 어머니가 강대상에 올라가서 아버지 대신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순교하시는 날까지 어머니는 아버지 뒤에서 말없이, 빛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힘을 모아 희생하고 봉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후 내가 결혼을 하였고, 딸인 저와 20년간 마음 편하게 계시다가 85세를 일기로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세상 떠나시기 전, 세 가지의 유언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세상과 짝하지 말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말라. 둘째,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라. 목사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마라. 미리암 같이 벌을 받게 된다. 셋째, 겸손한 사람이 되라. 겸손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시고 교만해지면 사탄에게 지게 된다.”


어머니는 진사의 딸로 세상부귀를 누릴 수 있는 솔로몬의 영광을 버리고 20세 꽃다운 나이에 처녀의 머리를 삭발 당한 채 개구멍으로 기어 나오는 수모 속에서도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욥과 같은 인내로 이겨내셨습니다. 어머니는 목회자의 아내(혹은 선배 목사의 아내나 총회장의 아내)로 누릴 영광에 관심을 두신 적이 전혀 없으셨다. ‘관용’하여 피전도자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며 사랑하셨고, 처음 예수 믿을 때의 핍박을 참고 참은 것은 물론 전도받는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에 이해할 때를 기다리며 끝없는 ‘인내’로 참으셨으며, ‘겸손’하여 어렵고 낮아진 사람들에게 혹은 버려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 돌보아 주셨다. 한센병 환자를 돌아보아 친구가 되었고 아이를 해산할 때 수발해 주었으며 상을 당할 때 심지어 폐결핵으로 죽은 환자에게까지 접근하여 철저히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로 사랑을 실천케 하는 위대한 교훈이 된 것입니다.








(2) 양용근 (1905년 출생 - 1943년 순교 : 38세)








일사각오 다짐 후 손양원 김형모 안덕용 양용근 (왼쪽 아래줄부터)


양용근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은 사상범에 대해 당시 일선 경찰이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고초를 겪게 만드는지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제 말기 부분에서 설명하며, 여기서는 일단 순교자의 간단한 내용을 소개한다. 특히 양용근 평전은 교계의 지도자며 문필가이자 신학인으로도 지명도가 있는 진병도 장로님이 저자이시며, 10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검증작업을 통해 제작되었고 생존해있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섬세한 기억 때문에 많은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우선 간단하게 소개한다.


양용근 목사님은 1905년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서 출생했으며, 순천 매산중학교를 다닌 후 ‘일본대학’ 법과를 정규 졸업한 엘리트였다. 기독교 재단의 매산중학교를 다닌 것이 그의 신앙의 첫 출발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후 자신이 전공한 법률은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1933년(28세) 늦은 나이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으며, 순천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고향에 있는 광양읍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셨고, 손양원 목사님이 계셨던 전남 여수 신풍에 위치한 애양원교회의 전임자로 1937년 3월부터 1939년 4월까지 시무하시는 등 전남지역 여러 곳을 다니며 목회를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 당시 양 목사님은 구례 지역의 신앙 지도자였고 신사참배 반대를 용감하게 주도하게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구례읍교회 목회 시기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열린 연합사경회에서 신사참배를 비난했다는 불경죄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3여년의 옥고를 치르고 1943년 12월 5일 광주형무소 옥중에서 순교하셨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유현덕 권사님과 장남 양영욱 장로님을 비롯해 4명의 아들이 있다.


손양원 목사님과는 평양신학교 동기였으며, 늘 함께 순교를 준비하셨다고 전해진다. 양용근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호남 출신의 유일한 순교자이기도 하다(이기풍 목사님은 평양 출생). 이름으로만 전해지던 양용근 목사님의 신앙생애와 순교사는 2010년이 되어서야 보수교계 지도자이신 진병도 장로님의 10년이 넘는 자료수집의 준비와 노력으로 [섬진강] 제목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순교집 [섬진강]에는 기록자료와 증언내용을 토대로 당시 치열했던 일제의 신사참배 탄압 과정과 고문 그리고 옥중 생활이 섬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섬진강]에는 오사육영학당, 관동대진재 사건, 광양읍교회, 신풍교회, 길두교회, 구례읍 중앙교회, 수감생활에 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심봉한의 신앙과 고난에 관련된 지역과 시기 등이 아주 자세히 증언되어 있다.








섬진강 : 순교자 양용근 평전






● 출간 : 2010년 1월 25일    


● 저자 : 전병도


● 설립쿨란출판사, 990페이지




강은 흐른다. 쉬지 않고 흐른다. 강물이 흐르는 동안 세월도 따라 흐르고 세상도 흐르고 인생도 함께 흘러서 간다. 강은 흐르는 동안 역사를 이룬다. 문화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그 가운데 인생도 익어가게 한다.




강은 그러나 모든 것을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역사도, 문화도, 세상도, 인생도 흘러가게 한다. 그래서 강물이 흘러간 강변에는 전설이 남는다. 신화가 남는다.


역사의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강물이 굽어보게 한 채 강물은 그대로 끝없이 흘러만 간다.




강물은 흘러 흘러서 바다에 이르지만 역사는 흐르고 흐르면서 인간의 가슴에 고여 소(沼)를 만든다.




1985년 겨울, 겨울치고는 무척이나 포근했던 어느 날 오후, 서울 종로 5가 '기영약국' 본가에서 유현덕 권사님(양용근 목사님 부인)을 만났다. 당신이 눈을 감기 전에 양용근 목사 순교 전기를 만드는 것이 소원이며, 그 일을 맡아 주기를 원해서 초청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다. 전기를 제작하는 작업이 어려운 일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순교자의 전기를 쓴다는 보람과 간절한 소망의 열기에 밀려서 주제넘게 수락을 하고 말았다.


반세기도 더 지나 버린 일들을 기억해내며 구술하는 것을 여러 날에 걸쳐 청취하면서 기록했다. 과거의 아팠던 일들을 떠올리며 울먹이면서 구술해 가시던 모습은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상실감에 젖은 팔순 노부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인생이었다고도 했다. 양용근 목사님과 함께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사수하기 위하여 싸웠고, 사남매가 장성하도록 양육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 머리말 중에서 -
















(3) 심봉한 (1892년 출생 - 1943년 순교 : 51세)




심봉한은 1892년 전남 구례읍 외곽인 신월리 출신으로, 고향 땅이 전국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지로 향하는 길목인 인연으로 일찍부터 복음을 받고 신월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의 평신도로서는 유일한 신사참배 순교자이다. 신사참배 거부자로서, 투옥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일본 경찰이 급히 귀가 조치를 취하였고 며칠만인 1943년 11월 26일 순교하였다. 새벽 3시, 하나님 앞에 선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이 시기 교인들은 금요일을 주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로 기억하며 신앙 생활을 했고 그런 자세로 부활의 소망으로 주일을 기다렸다. 다른 두 분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새소망을 주신 주일에 순교했다.


심봉한 집사님이 순교한 지 꼭 10일인 12월 5일 주일 새벽에 양 목사님도 순교하셨다. 한 분은 새벽 1시 30분 그리고 한 분은 3시였다. 밤중, 지리산 유역의 겨울 추위 속에 긴긴 밤이 끝이 없을 듯한 그런 시간이었다. 과연 새벽이 오고 또 해가 뜨는 그런 새 날을 볼 수 있을까? 순교자의 가족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시대였다. 그 순교의 새벽이 그런 순간이었다.




양 목사님은 여러 면에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아 많은 기록과 그 흔적들이 남겨져 있고 그 자세한 기록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에 비해 심 집사님은 동일한 시기에 인접 지역에 신사참배라는 같은 죄목으로 옥고와 고초를 겪었으나 순교 과정과 그 이후 가정에 대한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심봉한 집사님의 순교를 통해 신앙환란의 절정기에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 하나만 가지고 걷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며, 순교 후 역사의 평가라도 제대로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일말의 희망도 다 포기하고 가야 할 길임을 깨닫게 해준다. 어쨌든 이기풍과 양용근 전기 내용 때문에 심봉한 순교의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스럽다. 특히 두 분은 같은 구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같은 환란을 겪었고 순교한 시기조차 10일 차이다.


조선총독부가 국가 차원에서 강행한 신사참배 과정에서 전국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은 그 1차 조사 대상이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고 다시 지방에 실행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경찰서의 고등계는 절도 ․ 강도 ․ 살인 등의 일반 형사범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중죄인을 전담했는데, 그들은 독립운동을 꾀하는 국가 전복, 일본의 종교 대상이 되어 있는 천황에 대한 신성모독죄, 또는 사회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상범을 전담했다. 최종적으로 신사참배를 통해 모든 교회가 일본 신과 천황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일을 맡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고등계가 맡아 처결해야 할 사상범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 출석을 하는 모든 교인들이 일본의 종교의식인 신사에 참배를 하게 함으로 종교적으로 전향을 유도하는 일이 바로 고등계의 핵심 업무였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당연히 신사참배 탄압은 전국적 수준의 교회 지도자는 말할 것 없고 각 지방 단위로 대표적인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노회 또는 교회의 성직자를 향하고 있었다. 평신도의 경우는 적어도 장로는 되어야 그 지목 대상이 되었다. 물론 집사도 특별한 경우는 포함이 되었으나 여기 구례의 신월리 정도에서는 순교에 이르도록 가혹하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봉한은 여러 면에서 평소 경찰의 지목을 받을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 그 부친 심갑순이 경찰의 멱살을 잡고 대들 정도여서 평소 불손하게 보였고, 심봉한은 1919년 3.1만세 운동에 가담을 한 경력으로 주목을 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아니라 1920년부터는 국내 전 지역은 물론 만주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여름 수련기간에 지리산으로 모이는데, 그의 집이 출입구가 되는 구례 입구 기차역의 길목에 있어 지리산 수련지로 들어가는 모든 선교사를 접하는 문제가 있었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으로는 일본 신사참배에 적대적 방해 세력이 되고, 국가적으로는 일본을 막아서는 서방 출신 신앙인들이다. 일본은 세계적 주도 국가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 사생 결단을 내야 했고 국가 차원에서 선교사를 극단적으로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이 가정을 거쳐 간다는 점에서 참으로 밉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교사 몇 명만 알고 지내도 친미 스파이 혐의를 받는 이런 현상은 이 지역의 이기풍 ․ 안용근 두 분의 조사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전국 대부분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덮어 씌운 혐의였다. 심봉한은 만주를 포함한 전국의 선교사가 드나드는 길목에 부자로 살며 신앙이 특별하여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깍듯이 모셨으니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는 고등계 경찰이 그냥 둘 인물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심봉한은 신월리 마을이라는 시골 동네 유지 정도에 그칠 인물이지 구례 전체 지역 사회의 인물이 아닌데도, 이런 여러 이유가 겹치게 되면서 구례경찰서의 고등계로서는 꼭 꺾어 놓아야 할 인물이 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강제로 집행하던 시기는 미국과 전쟁의 기운이 돌고 있었으며 일본은 이미 중국 등 많은 지역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에 머리만 굽혔다면 이 모든 문제는 간단히 지나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의 신앙이 죽어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등계 경찰로서는 심봉한 한 명을 꺾는 것이 이 곳을 출입했던 모든 선교사들과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그 노력을 꺾는 상징적 의미까지 음미하게 되어 무자비하게 심 집사님을 고문하게 된다.


호남지역 3인의 순교자이자 유일한 평신도인 그는 신사참배로 수난 받은 누구와 비교해도 고초가 더 극심했다. 재판에 넘기지도 않고 계속 경찰에서 붙들어 놓고 죽도록 고문을 했는데, 이기풍 목사님은 70세를 넘긴 노령이었고 안용근 목사님은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심 집사님은 타고 난 강골이었다. 그들이 심 집사님을 단순히 죽이는 것만 목적이었다면 단기간에 고초를 당하고 절명했겠으나 그들은 심 집사님으로부터 신사참배를 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순응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재판에 넘겨지면 항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감옥에 가두기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에 넘기지 않으면 경찰이 조사를 핑계 대고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고문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그 상태를 4년이나 지속했다.


재판을 받아야 모든 기록이 남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다른 순교자들과 달리 심 집사님에 대한 조서나 기타 기록이 남지 않아 아쉽기 그지없고, 한 편으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순교 앞에 더욱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신사참배 순교자가 거의 없는 호남지역에서 배출한 순수 호남 출신의 순교자이어서 더욱 아쉽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주로 화합을 강조한다. 심 집사님은 진리를 고수하는 신앙 문제를 두고는 타협이 없고 외골수 신앙의 걸음이다. 지역의 교계 흐름과도 달라 교회의 도움이나 관심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이제 그의 순교와 순교자의 후손의 생애를 통해 그들이 겪은 고난을 되새김질하고 이 지역에도 결연한 신앙인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의 후예들을 기대하고 싶다.










사성암과 심씨 집안과 묘소에 대해 증언한 마을 주민


구례 고향에 있는 순교자 심봉한의 묘소








2. 심봉한의 신앙과 신사참배 거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 심 집사님에게 주신 가정 내력과 개인 생활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의 형편을 주실 때는 그 형편이라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로 인한 내일이 있고, 그 내일은 우리에게 소망일 것이다.












조선 선교사들의 통행로에 살며    




심봉한은 1892년 출생하여 1918년 박소열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가정은 고향인 지리산 유역 섬진강변에 위치한 신월리 지역의 유지였으며,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가문이었다. 그의 사는 곳과 경작지 위치가 외지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인 구례구 기차역 앞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찍부터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심봉한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는 전주예수병원 원장이셨던 폴 크레인(Paul Crane) 목사님이셨으며, 심봉한은 선교사들을 휴양관으로 안내도 하고 생활에서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미국 남/북의 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선교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교사들이 지리산 노고단 지역에 [지리산 선교사 휴양관]을 이용했으며, 휴양관으로 오가는 선교사들을 통해 심봉한은 신앙을 출발하게 되었다.


심봉한의 고향 : 구례군 신월리    










노고단에서 본 섬진강과 구례 지역


건너편에 철로가 있고 이 편은 신월리


지리산 노고단에서 본 섬진강 운해


남부 지방 전체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산은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3개 군과 전북의 남원시와 전남의 구례군을 동서와 남북으로 나누는 태산이다. 남북과 동서에 걸쳐 약 100리의 넓이를 가졌고,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m)과 서쪽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세 개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험악한 지형이 주변 곳곳을 완전히 딴 세상으로 갈라놓고 있다.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조선 선교 초기에 의료 기반이 없었던 우리나라에 와서 풍토병에 죽어 가는 경우가 너무 증가하자 풍토병이 창궐하는 여름에 고산 지역으로 일시 피난을 하게 된다. 심봉한의 가정이 전국의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선교사들 중에는 의사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제안으로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지리산의 해발 800미터보다 높은 위치에 휴양관을 마련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적합한 지리산 노고단 인근에 휴양지를 마련하게 되자 이 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선교사들은 심 집사님의 집을 거치게 되었다.


휴양관이 건립되던 1922년 즈음 구례의 노고단으로 진입하는 교통편은 시기별로 보면, 1914년에 대전을 거쳐 익산까지 철로가 개설되었고, 그 철로는 1931년에는 전주를 거쳐 남원까지 증설이 되었고 1936년에 이르러 구례와 순천까지 전라선 모든 구역이 개통된다. 이러한 교통편의 변화를 거치며 지리산을 동남쪽에서 접근하는 통로는 구례 입구역이라는 뜻을 가진 ‘구례구역’이 이용되었다.










지리산 입구에 위치한 구례구역


구례구역 앞 : 섬진강을 넘은 지리산 입구


사진의 도로 좌우에 심봉한의 가옥과 경작지




구례구역에 하차하여 섬진강을 건너고 구례군에 첫 발을 딛는 지점이 바로 신월리의 심봉한 토지였다. 심 집사님의 집 앞을 가로 질러 구례읍까지 4km, 그 곳에서 화엄사까지 다시 8km를 올라가면 그 지점부터는 본격적으로 태산을 향해 등산을 해야 한다. 섬진강을 건너 구례 땅에 첫 발을 딛는 곳, 바로 그곳 97번지에 심봉한이 살고 있었으며, 그의 가족은 마을의 장손 가정이고 살림이 넉넉하여 주변 요지에 대대로 농사를 짓던 넓은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나름 윤택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 심봉한은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을 드나드는 선교자들에 의해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시작은 장차 순교자를 낳게 하는 복음이 씨앗이 떨어지는 은혜로운 순간이었다.






가정 환경 : 철저한 불교 가문




심봉한의 고향 구례군 신월리는 섬진강의 구비를 품에 안고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는 큰 마을이었다. 일반적인 시골마을과는 달리 신월리의 형세는 재력가나 영향력 있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임을 지금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심봉한의 가정은 신월리 중앙 통행로에 가장 인접한 마을 어귀에 조부의 기념비를 따로 보유하고 있을 정도의 재력과 명망을 갖춘 가문이었다. 중앙 통행로 맞은 편에 집안 소유의 경작지가 있었는데, 그곳은 식민지 시기에 경찰 주재소가 들어설 정도의 요지로서 현재는 파출소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국도 현대화 사업으로 초대형 교량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 당시 구례구역에서 구례로 향하는 옛 교량 부근에 인접한 대부분의 토지들은 심봉한 가정의 소유지였다. 이 밖에도 구례 지역에서 심봉한 가정과 그 가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리산 입구 대로 주변 심봉한 가문의 비각


구례 입구 대로에 위치한 심봉한 가문의 기념비






심봉한은 신월리의 첫 교인이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된 처음부터 철저하게 출발했다. 시골동네에서는 어느 한 곳 모자라지 않는 잘난 가문의 잘난 인물들인데, 다행스럽게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면서부터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일사각오로 달려가게 된다. ‘성실’이라는 집안의 가훈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로 자녀교육의 지침으로 삼게 된다.


심봉한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의 이름은 심요한이고 둘째는 주일에 태어났다 하여 심안식으로 각각 짓게 된다. 그러나 시골 유지라는 자부심에 철저했던 문중에서는 족보에 없는 괴상한 서양식 이름을 지었다는 이유로 심봉한 가정은 엄청나게 큰 핍박을 받게 된다. 결국 호적에는 문중의 돌림자를 살려 첫째는 병식, 둘째는 성식으로 올리게 되나 가정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이름만을 사용했다. 믿을 때부터 시작된 문중과의 충돌은 훗날 일본 경찰 때문에 겪는 고통에 못지않은 고초를 불러 오게 된다.   좁은 국토에 100리 길이의 지리산이 뒤를 막고 있는 구례 지역에 위치한 신월리 마을 앞에는 섬진강변의 절벽이 앞을 막고 있다. 옛날 조선의 시골은 한 집안의 자손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어 흥망성쇠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으니 골짜기로 갈수록 그리고 그 골짜기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가문일수록 집안의 단결력은 철석같이 강했고 가문의 어른이나 전체 가족의 여론은 국법보다 엄하고 무서웠다. 훗날 일본 경찰의 고문과 비교될 만큼 집안의 핍박은 심봉한의 가정에게 집요하고 철저했다. 경찰은 외부를 공격하고 괴롭히지만 문중 집안이 마음을 먹으면 속속들이 피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심봉한 가정은 안팎의 환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심봉한의 부친인 심갑순은 체격도 좋고 단호한 성격으로 여러 면에서 대단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이다. 아들인 심봉한이 믿게 되면서 부친인 심갑순 부부는 아들의 신앙에 동조하여 단번에 신앙을 함께 출발하게 된다. 장손 가정으로 별별 종류의 제사나 미신 행위가 연중 끝이 없었고, 그 한 가운데는 심봉한이 서야 했다. 그 모든 요구를 일언지하에 전부 끊는다는 것은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들 모두를 원수로 돌려세우는 일이었다. 경찰에 불려 다니며 죽도록 고문을 받는 환란기가 오기 전에 벌써 소리 없는 주변의 환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큰 은혜를 받아 신앙생활을 출발한 그에게는 어떤 환란과 손가락질에도 미동도 없이 은혜의 길만 걷고 있었다.


특히 이 가문은 신월리 바로 뒷산의 사성암이라는 천년 고찰을 개인 소유로 운영해온 골수 불교 집안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 심봉한 가정은 가족 소유의 가산을 바쳐 1920년에는 예배당을 건축하고 신월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사성암에서 바라본 신월리 들판의 모습




사성암(전남문화재 33호)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강한 가정에 강한 복음




예수님을 믿기 전 심봉한의 가정은 철저한 불교집안으로 가문의 전통과 기풍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정의 분위기로 인해 식구들의 성격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집안에서 운영하던 절의 위치만 해도 특별하였다. 전국 곳곳에 여러 모양과 위치에 사찰이 있지만 사성암처럼 깎아 지른 절벽에 절을 매달아 놓은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성암의 위치는 그만큼 불심이 깊었으며, 불교의 혜택을 많이 받아 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불심은 사람들의 성격, 의지, 인내를 강하게 무장시켰다.  


심봉한의 아버지 심갑순은 일제 순사들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당당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으며, 손자인 심보라는 어린 시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자랐다. 밭에 거름을 하고 있던 심갑순에게 경찰 주재소 마사오 소장이 냄새가 난다며 호통을 치고 사정없이 일격을 가하면, 그는 순사의 멱살을 잡아 치켜 올려 세웠다. 기골이 장대한 심갑순은 강하게 대응했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결국에는 일본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당했다. 이 마사오는 훗날 신사참배 문제가 나자 구례경찰서 본서 지휘를 받아 이 가정을 24시간 감시하게 된다.


천년 고찰을 지닌 불교집안이었으므로 처음 믿음을 받아들일 때 어려웠으나 일단 믿고 난 후로는 신앙에 깊이 빠져 들었다. 집안의 박해가 극단적이었으나 신앙에 전혀 타협을 하지 않자 당연히 잘 사는 가정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친척들 사이에 거래를 하면 금전 거래뿐 아니라 심지어 부동산까지도 서류를 남기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 당시의 재산이라는 것은 거의 다 그런 상황이었다. 부모의 말 한 마디 혹은 집안 어른이나 문중 회의에서 말이 나오면 그것이 바로 법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문중을 지켜 가라는 뜻에서 장손들에게 집과 터와 산은 물론 사찰 운영권을 준 것인데, 이 모든 것을 거부하면 문중에서 권리를 취소를 하게 되고 다 잃게 된다.


그런 사정을 너무 잘 알면서도 복음의 첫 걸음을 디딘 이상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고향과 재산을 다 포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심봉한은 극한 가난을 겪는 처지가 되고 훗날 처자식까지도 다 잃게 된다. 그의 담대하고 강력한 신앙노정은 예수님을 믿되 제대로 믿었고, 가르침을 받은 후 전부를 다 바치는 곧은 신앙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시절 심봉한 가정을 전도하고 가르쳤던 선교사들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신약을 번역했던 핵심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들 중에는 남한 지역의 신사참배 고난을 이겨낸 대부분의 신앙인물을 양육한 호주 선교사들도 포함되었다. 지리산 선교사 휴양관을 가기 위해 거치는 신월리에서 심봉한과의 역사적인 신앙 교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    




심봉한의 집 앞을 지나가던 전국의 선교사들의 지역별 담당을 보면, 미국의 남장로교가 지리산 주변의 호남지역 전체를 맡았고,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북 지역은 미국의 북장로교의 관할 지역이었다. 경남 지역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호주 선교부가 맡았는데,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하여 신사참배 반대에 앞 장을 선 고신 교단 인물들을 길러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1년에 40일 정도는 지리산 노고단에 위치한 선교사 수양관에서 수양회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위생 관념이 없고 서구적 선진화된 의료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안타깝게 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선교 초기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은 말라리아나 학질 또는 수인성 전염병인 이질 등에 전염이 되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원인 때문에 큰 병고를 치르거나 죽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질병치료와 휴식, 그리고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전국의 선교부가 이런 문제를 공감하여 1922년에 지리산 노고단의 수양관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교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한글 문법책을 만드는 활동도 병행하였다.










왕시루봉 예배당


선교사 수양관 (숙소)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이 위치한 지리산 노고단은 지리산의 3대 산이며, 기차를 이용하여 쉽게 이를 수 있는 접근성을 갖춘 고원지대이다. 완만한 경사지대로 이루어진 35만평의 넓은 초원지대로 구성된 노고단은 해발 1507m의 높이로 인해 여름에도 기온이 낮아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요지였다. 더위와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은 선교활동을 하며 1년 동안 고생한 서구 선교사들과 가족이 몸을 추스르는 최적의 장소였다.


수양관에는 56채 정도의 집이 있었으며, 여름이 되면 전국 선교사들이 함께 모였고 이 나라의 복음운동에 필요한 의논과 기도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935년 신사참배문제로 조선총독부와 선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941년에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하게 되자 모든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을 당하고 총독부는 수양관을 국가 소유로 흡수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1950년에 전쟁을 거치면서 노고단 지역의 선교사 유적지는 전쟁의 참화를 비껴가지 못한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본거지였고 그 토벌 과정에서 선교사 시설 대부분은 훼손되었다. 순천에서 결핵요양원을 하던 인휴(Linton, 린턴) 선교사와 전주에서 성격학교를 하던 하퍼(Joseph Hopper) 선교사가 1961년부터 왕시루봉 일대에 목조와 토담집을 조성하였으며, 현재 이곳은 12동의 건물이 선교사들의 숨결을 간직한 채 보존되고 있다.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이 필요했던 사례




1892년 미국 선교사 새뮤얼 무어(Samuel Foreman, 1860~ 1906) 가족이 한강 나루 양화진에 내렸다. 이들이 남대문까지 걸어왔을 땐 이미 성문이 닫혀 있었다. 어린 아들이 먼저 성벽 아래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부부는 6m 성벽에 로프를 걸고 넘어갔다. 무어는 지금 을지로1가, 곤당골에 터를 잡고 백정과 천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양반·천민이 함께 예배를 보게 했고 고종에게 신분제 철폐를 탄원했다. '백정 해방의 아버지' 무어는 그리스도신문 사장으로 재직중이던 1906년 장티푸스로 숨져 양화진(서울 마포구 합정동 부근,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으로 불리는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이 있는 곳)에 묻혔다.


이화학당 3대 학장을 지냈던 조세핀 페인(Josephine Paine, 1869~1909)은 기숙사 학생들을 먹이려고 날마다 가마를 타고 나가 장을 봐왔다. 그녀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외교권을 잃자 매일 오후 3시 전교생을 모아 주권 회복 기도회를 열었다. 학장에서 물러나서는 하루 수십 리 길을 걸으며 전도하다, 1909년 해주에서 콜레라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0년에는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처음 묻힌 존 헤런 선교사가 이질로 목숨을 잃었다.


평양 광성학교를 세운 윌리엄 홀은 환자에게서 발진티푸스가 옮아 세상을 떴다. 경신학교 교장 기포드는 이질로, 숭실대 설립자 베어드는 장티푸스로 숨졌다.




위 예화와 같이, 1910~20년대 호남에서 포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67명은 말라리아 등의 풍토병에 목숨을 빼앗겼다. 미국 선교본부가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선교사들은 조선에 남기 위한 대안으로 지리산 노고단에 휴양관을 짓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번지는 6월부터 9월까지 깊은 산속으로 피해 성경을 번역하며 건강을 돌봤다. 1940년대 56채에 이르던 휴양관은 6·25 때 대부분 파괴되고 예배당 벽체 일부만 남았다.




몇몇 후배 선교사들이 그 뜻을 이어, 1960년대 지리산 왕시루봉에 휴양관을 다시 세웠다.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선교사들이 각각 자신의 출신국가 건축양식으로 지었고, 또 한국식 아궁이와 온돌을 설치하여 특별한 건축물이 되었다. 현재 남은 12채를 직접 사비로 관리해온 분은 인요한(John Linton, 1959~) 세브란스 외국인진료센터장이다. 그는 외증조부로부터 할아버지·아버지를 거쳐 117년 동안 한국 사랑을 이어온 유력한 선교 집안 린튼가(家)의 4대손이다.


인요한은 아버지 휴 린튼이 휴양관에서 미국인들에게 후원금 보내달라는 편지를 종일 타자로 치고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현재 교계는 휴양관을 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되기를 원하고 있다.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순수한 청교도 정신과 '복음의 빚진 자'라는 전도 사명에 뜨거운 젊은이들이었다. 예화에 소개된 여선교사 페인은 마흔의 나이에 콜레라로 숨지면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서운 풍토병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수많은 선교사들의 신앙에 대한 용기와 열정이 지금도 지리산 선교사 휴양관에 살아 있을 것이다.  
















심봉한의 신사참배 고초




심봉한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고향 신월리에 예배당을 세웠다. 신사참배 옥고와 집안의 핍박 가운데서도 심봉한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장소였다.




그 당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가는 [십자가 군병들아]였는데, 가족 모두는 힘주어 하나님께 찬송예배를 드렸고 신앙의 힘을 구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에 일어나


기들고 앞서 나가 담대히 싸우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 나팔 소리 듣고 곧 나가 싸우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으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에 일어나


이 날에 접전하고 곧 개가 부르라












신월교회


오른쪽 첫 건물이 일제시대 주재소로 현 파출소




종교적으로는 불교 집안과 원수가 된 그들을 문중에서는 배신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심갑순도 함께 집안에서 추방을 했다. 제사를 없애고 사찰 운영에서 손을 뗐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로 인해 동네에서까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어려운 고난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39년부터 본격화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심봉한에게는 경찰의 체포와 고문과 투옥이 반복되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린 기억이지만 저희 집은 부유했습니다. 제 기억에 문중으로부터 이어받은 땅과 재산도 많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시작하면서 문중으로부터 버려지고 동네사람들은 저희 가족을 비웃었습니다. ????심봉한 집구석 봐라. 망하고 싶으면 예수 믿어라????라고 소리지르며 저희 가족을 비난했던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심봉한의 넷째 아들인 심보라가 구례중앙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때는 1939년이었다. 이미 이 가정 아이들은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하여 요주의 인물의 자녀로 분류되어, 심보라는 초등학교 정규 입학이 거부되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교실 부족으로 한 학급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는데, 오전은 정규반이고 오후는 곁가지로 붙여둔 정도였다. 심봉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오전의 정규반에는 거부가 되고 오후반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행은 1938년부터 본격화 되었고, 넷째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에까지 그 영향은 미치고 있었다. 천황을 모독하고 일본의 귀신을 모아 놓은 신사에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반국가사범으로 간주되었고, 이런 사상범과 연루된 자녀에게 교육의 기회를 줬다가는 훗날 일본에게 대드는 호랑이를 기르게 된다는 이유에서 초등학교 입학까지 문제가 된 것이다. 구례경찰서의 고등계가 직접 조사를 하고 신월리 경찰주재소가 24시간 동향을 파악함은 물론 요주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면사무소는 일상생활을, 학교는 아이의 입학이나 학교생활에까지 관리를 했다.


최근에는 아이들의 기독교식 이름이 흔하나 현재 80대가 넘은 1930년대 출생한 자녀에게 호적에 기독교식 이름을 올린 경우는 희귀하다. 심봉한의 신앙과 의지는 이처럼 확고부동했다. 문제는 아이들의 신앙은 부모를 따라 순종할 뿐이었지 아무 것도 알지를 못했다는 점이다. 첫째와 둘째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호적에는 집안식 이름을 올렸으나 셋째는 심갈렙으로 그리고 넷째는 심보라(바울의 한자 표현)라고 올렸으며, 이 이름 때문에 겪는 고초는 너무 가혹했다. 일제 말기였고 전쟁이 진행 되는 기간이었고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죽도록 고문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이름에 박힌 신앙의 표시는 그 시대 모두에게 핍박을 불러오는 낙인이었다.


학교의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에 대해 학습 내용뿐 아니라 가정 사항까지 적게 되어 있고 그 곳에는 모든 가족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평소에는 기록 내용이 학생 지도에 참고사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로 가면서 국가 전체가 전시상황이 되었고 교육기관도 이런 기록을 세심히 살피며 학생 지도와 학교 운영에까지 적극 반영하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강하게 집행 되던 시기에 이를 반대한 식구가 있을 때 이 기록은 국가가 관리하는 사상범의 자녀를 뜻하게 된다.










35회 졸업생 학적부와 전 가족이 교인이라는 기록, 당시의 이 표시는 사상범 낙인








친구들은 아버지가 붙여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밥바구니’라고 놀리며 괴롭혔다. 학교 가는 길은 5km나 걸렸다. 하루에 왕복 10km 걷는 일이 초등학생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신사참배 거부가 계속되자 독이 오른 경찰은 심보라의 동생들의 초등학교 입학 자체를 거부시켰다. 동생들은 모두 해방이 된 후에야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너무 늦은 나이에 학교를 입학하게 되자, 해방 이후의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불편과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가파르게 다가오는 환란




1936년 총독부는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부임과 동시에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교육령을 개정하여 일본식으로 학교명을 개정하였다. 즉,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을 조선교육의 3대 강령으로 내세워 조선인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어 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였고 조선어학회와 우리말 신문도 폐간시켰다.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을 외우게 하였다. ‘애국하는 일’을 정해 놓고 신사참배, 일본 국기인 일장기 게양, 동경의 천황에게 절하는 궁성요배, 정오의 묵도, 국민복 착용을 의무화하였다.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을 시켜 조상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학교에서는 1940년 4월 신학기를 맞아 모든 각 학급 담임교사는 학생을 한 사람씩 교실의 교단 위에 세워 창씨 개명한 이름을 말하게 하고 단체로 박수를 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집집마다 소위 일본의 천조대신이라는 귀신의 표시인 가미다나를 배부하였으며, 그것을 벽에 걸어 놓고 경배하도록 하였다. 20세에서 50세까지는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을 했으며, 1937년부터는 20세가 된 자를 군인으로 지원하게 했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기독교 신자로 살아가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환란이 가파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구례경찰서 고등계    




다음은 양용근 목사님의 경우다. 이 경우를 통해 심봉한을 취조한 당시 구례경찰 고등계의 연행과정과 조사절차를 소개한다.




1940년 4월 2일 오후 2시, 목사 사택에 사복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왔다. 아예 조선말은 사용하지 않고 일본어로만 말을 했다. 두 사람 가운데 키가 좀 작고 어깨가 딱 벌어진 자가 낮은 베이스 음성에 권위를 과시하며 말했다. ‘구례경찰서에서 왔습니다. 안에 계신지요?’ ‘네, 계십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두를 신은 발을 마루에 딛고 선다. 키가 좀 크고 당꼬바지에 도리우찌를 쓴 자가 방문 고리를 잡아 당겼다. ‘경찰입니다. 서까지 갑시다.’


그들은 구례경찰서 고등계 형사실로 양 목사를 연행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키가 작은 경찰이 과장 자리로 보이는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자에게 거수경례를 하더니 ‘구례읍교회 신임 목사를 연행해 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나는 이노우에 겐지입니다.’


그러나 3-4일이 지난 그 주간 토요일에 그때 왔던 두 경관이 다시 사택에 나타난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 그들이 와서 독촉한 것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성도는 4월 10일 이내로 하라고 설교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상자를 하나 가져와서 두 손으로 받들어 상장을 수여하듯이 전해 주었다. 가미다나라는 일본의 천조대신 위패였다. 그것을 교회의 강대상이 있는 벽 정면에 모셔놓고 예배드리기 전에 가미다나 참배부터 하고 난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함께 교회 예배당에 가서 그 가미다나를 벽에 달자고 했다.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불경죄요 치안유지법에 저촉이라고 협박을 했다.


이틀이 지나자 또 찾아왔다. 어제 주일 설교한 것을 다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교인이나 누구를 시켜서 설교 내용을 경찰에 보고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내 이름은 김삼식이고 저 사람은 신준모요. 우리도 다 반도인(조선인)이오.’ 두 경관의 일본 이름은 이소까와 사부로(五十川三郞), 이즈하라 미즈꾸니(出原穗國)이었다. 회유와 협박이 섞여 있었다. ‘고흥에서 설교할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라는 설교를 했고 작년 겨울 사경회에서는 예수가 재림할 때가 가까이 왔고 일본의 패망도 멀지 않았다는 설교를 했다는 전력조회서가 왔는데 당신은 불령선인이며 계속 사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하였다.


기록된 내용을 보면 구례경찰서에서는 평소 곳곳에 심어 놓은 연락책들을 통해 말 하나 행동 하나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기록해 두고 있었다. 겉으로는 법을 지키고 있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속으로는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해서 무조건 굴복시킨다는 목적을 향했다. 타 지역에서의 말 한 마디까지 조사하고 여차하면 관련자로 엮어버리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하며 남을 보호할 리는 없다. 그런데 심봉한은 한 마을에서만 살았고 집안까지 원수가 된 지경에 일본 경찰이 장차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기초 조사를 하고 다니는데 교회에 관련된 질문을 받게 되면 협조를 하면 했지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법적 문제




일제는 소위 치안유지법과 형법의 불경죄를 최대한으로 악용해서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어떤 종류의 사상이나 신앙이라 할지라도 천황제 국가의 체제를 벗어나는 것은 처벌할 수 있었다. 그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의 연혁은 1925년에 시작되며, 최고형을 징역 10년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1년에는 ‘유사종교단체’라는 처벌규정이 붙어서 불경죄도 포함할 수 있었다. 고등경찰의 자료에 따르면 1935년까지는 종교단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기독교 탄압이 심해졌다. 일제가 기독교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한 이유는 일본의 종교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순천지방의 일제 검거




1940년 9월 20일 순천 노회의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을 일제히 검거하는 일이 있었다. 노회 차원에서 전국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반대하여 총회 대의원을 보내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정보를 경찰이 입수하여 압박을 가했다. 이들을 잡아 들인 뒤에 경찰은 일단 풀어 줬다. 그리고 11월 15일에 다시 구속했다. 박용희, 선재련, 김형모, 김상두, 라덕환, 오석주, 김정복, 김순배, 양용근, 김형재, 강병담, 안덕윤 등 12명의 목사님과 선춘근, 박창규, 임원석 등 3명의 전도사님을 포함하여 15 명이 검거 되었다. 3 명의 전도사님들은 장로님 신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순천노회 회원이었다. 안용근 목사님도 일제 검거 지시에 따라 그 시기에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구례경찰서가 아니라 순천경찰서에서 직접 나왔다. ‘여기 구속영장입니다. 스파이 혐의로 구속합니다.’


마침 순천에는 양 목사님의 ‘일본대학’ 법학부 동창생 하시모또 다께오가 변호사로 있었는데, 그의 구속 소식을 듣고 경찰서를 찾아 면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면회거부는 거부되었고 변호사가 경찰서장을 만나 그 연행 이유를 듣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했고 교인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에 위배된다는 설명이었다. 안 목사님과 변호사는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함께 통과했던 인연으로 서로에게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 양 목사님은 지병인 천식이 너무 심해 일단 병보석으로 출감을 했다. 그러나 당국의 명령에 따라서 구례경찰서 고등계에서는 1주일이나 10일을 주기로 병환의 차도를 보러 다녔다. 물론 주재소를 통해 일상을 계속 감시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상황은 심봉한 집사님을 경찰이 고문하다가 죽을 지경이 되면 일시 풀어 놓았다가 다시 잡아들이는 방식에도 그대로 그 경찰들이 하던 일이었다.










순천노회 수난비와 원탁회의 기념비


순천기독 박물관이 있는 순천기독진료소




한편 함께 체포된 다른 14명은 문초를 받고 기소되어 광주형무소로 넘어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재판을 기다리는 분들은 고문이 일단락 되지만 심봉한은 구례 경찰서 고등계에서 거물급 교계 지도자가 아니면서도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사 대상자 신분에만 묶어 두고 끝까지 경찰 차원에서 계속 고문을 하고 있었다. 재판에 넘겨지지도 못하는 상황, 경찰의 손에서 죽을 때까지 모진 고문만 겪는 상황, 이 것이 심봉한의 고난이었다.






생존조차 힘겹던 시대




이런 일로 경찰에 고초를 받지 않아도 온 나라는 전시 체제가 되어 전 국민은 배급 체제로 먹고 살았다. 총독부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필요한 물품들을 계속 착취했다. 배급을 주었지만 정상적으로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대두박과 속칭 불깨 자반을 주었는데, 대두박은 만주에서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깻묵이었고 콩 찌꺼기였다. 죽지 않을 만큼의 분량만 주어졌다. 그 대두박마저도 낫으로 깎아 양을 줄였다. 창고에 오래 저장되었던 것을 배급했으므로 퍼런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낫으로 깎아낸 가루를 물에 담가서 독기를 우려내야 먹을 수 있었다. 물에 우려낸 대두박은 영양가는 전혀 없고 위의 허기증만 마취시키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우려 내서 약간의 곡기가 있는 것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었는데, 그것을 송키밥이라 불리웠으며 보기에는 괜찮으나 입에 넣어 보면 사람이 먹을 양식은 아니었다. 영양 부족으로 모두 얼굴이 누렇게 들떠 있었다.


심보라는 훗날 1956년 미국의 인디애나주의 테일러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보내게 되는데, 그 내용에는 ‘며칠을 가도 온 식구가 밥 한 그릇을 만날 수 없어 모두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그 속에 있는 속껍질을 벗겨 먹거나 생풀을 뜯어 먹어야 했던 때가 허다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때 상황이었다.


먹을 것도 없는데, 가정마다 일할 청년들은 징병이나 징용으로 데려갔다. 한 번은 여름인데 트럭 두 대가 구례로 들어왔고 전투모와 가죽 각반까지 찬 관원들이 순천 지역에서 100명을 해군 노무자로 강제 차출을 하러 왔다. 그리고 구례경찰서를 거쳐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다. 징용토벌꾼들이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아버지는 스무살 안팎에 있는 첫째와 둘째가 일본 군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주로 도피시켰다. 사회에서도 신앙 지키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군대를 가게 되면 신앙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게 되니 일본의 손아귀에서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두 형이 만주로 망명을 가게 되었고, 가족의 생이별이 시작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는 순교하게 되고, 어머니가 70대를 넘긴 할아버지와 어린 다섯 아들을 포함하여 일곱 식구를 먹여살려야 했다. 이렇게 처참한 환경이 되자 셋째 아들 갈렙이 비누공장으로 돈을 번다며 나갔다. 갈렙은 해방을 맞은 지 얼마 후 스물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한 가정에 한 번만 있어도 고통스러울 일이 계속 이어졌다. 넷째 아들 심보라가 초등학교를 다니며 맏이 노릇을 해야 했다.




순천의 노회 지도부를 재판에 넘긴 상황에서 심봉한 집사님이 구례경찰서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도 계속 경찰에 불려 다녔다. 교계적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에는 넘기지 않았으나 구례경찰 고등계는 조사를 핑계 대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갖은 고문과 위협을 했다. 그 가정은 특별히 더 고초를 가했는데, 문중에서라도 도와주면 좀 나을 수 있었지만 기독교를 믿어 이미 추방된 상태였고 집안사람들은 차라리 왜놈의 손을 빌려서라도 그 예수 귀신을 씻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1942년 여름이 되자 공출할 것이 많아져서 주민 전체가 곤고했는데, 그 중에 ‘송탄유 짜서 바치기’가 있었다.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고 남은 등걸에서 송진을 도끼로 쪼아 내거나 뿌리까지 파내어 집에 와야 했다. 무게가 만만치 않아 지게에 가득 담아 온다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가까운 산에는 나무를 찾을 수가 없어서 멀리 가야 했다. 가지고 온 송진을 드럼통에 넣고 불을 땐 다음 밑쪽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진액을 받게 되는데, 한 드럼에 한 되 분량의 송탄유가 모아진다. 집집마다 할당된 양을 채워야 했다. 마을의 리사무소에서 애국반을 배정하고 여러 집이 공동으로 작업을 했다. 초등학생들은 학교를 마치면 머루 넝쿨을 채우러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일본은 벼와 보리, 목화(면화)를 거쳐 송진, 송탄유, 머루 넝쿨을 거둬 갔고 20세 청년은 지원병으로 21세에서 50세는 징용으로 끌어 갔다.






경찰의 고문




당시 경찰의 고문 정황을 양용근 목사님의 경우로 살펴 본다. 일단 고등계에서 잡아들이면 조사를 시작한다. 고등계에 들어가면 때리고 전기로 고문하는 것은 기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린내와 목욕탕에서 풍기는 냄새가 합해져서 묘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양 목사님의 고문 모습이다.




복도 끝에 가서 굽어진 곳에 철문이 있었다. 계단을 20개 내려가니 또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어둠이 앞을 막았다. 두 사람이 양팔을 붙잡고 그 중 한 사람이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고문실이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즐비하게 걸린 가지각색의 매였다. 가죽 같은 것이 많았다. 욕조가 긴 것이 하나 있고 나무 의자가 두 개 있었다. 대장간에서 본 적이 있는 풀무와 여러 가지 쇠갈고리가 걸려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밧줄을 가져오기 무섭게 양 목사님의 와이셔츠를 잡아당겨 갈가리 찢어 놓았다. 몸을 나무의자에 묶었다. 그리고 매가 걸린 곳으로 가서 몽둥이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몽둥이 같았으나 탄력성이 있어 보였다. 약간 능청거렸다. 그리고 욕조 저편의 솥에서 김이 나는 그것을 넣자 마치 고무줄같이 흐느적거리며 찰진 매로 바뀌었다. 소의 근육 중에서 제일 모진 부분으로 만든 것이다. 바로 맞으면 죽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사용하면 가장 고통스럽다는 매다. 한 번 내리쳐질 때마다 피부와 함께 안에 속살이 드러난다. 몇 번이면 기절을 하고 온 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몇 대면 보통 졸도를 한다. 그러면 욕조에 양동이로 물을 퍼서 들이 붓는다.


갑자기 양 목사님의 고개가 위를 향하다가 아래로 쳐지며 눈의 초점을 잃는다. 두 사람은 얼른 밧줄을 풀고 침대에 눕혔다. 다시 물을 끼얹어도 반응이 없자 한 사람이 계단을 열고 달려간다. 15분쯤 지나자 안경을 낀 의사가 청진기를 들고 들이닥쳤다. ‘용태는?’  ‘심각합니다.’  아무리 고등계 경찰이라 해도 잡아들이는 사람을 다 죽이라는 것은 아니다. 점 찍어 놓은 몇은 죽이고 묻을 수 있으나 무조건 다 죽이면 여러 면에서 곤란해진다. 그래서 이들도 서서히 조여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오자마자 바로 죽으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양 목사님은 혼수상태에 빠진 채 약한 숨을 쉬고 있었다. 옆에서 취조하던 경찰들이 옷을 입혔다. 기절한 지 3시간이나 지나자 의식을 찾고 있었다.




어린 시절 넷째 아들 심보라가 본 아버지의 고문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고등계는 사상범을 다루기 때문에 잔인함에도 끝장을 보는 경찰이었지만 동시에 심리전에도 능했다. 신사참배로 고초 겪은 순교자나 출옥성도의 가족들은 대부분 고문 받는 남편과 아버지를 기억한다. 매를 맞고 견디는 것과 그 처절한 모습을 처자식이 보고 있다는 것을 견디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한 몸을 죽기로 작정하면 고문으로 항복 받기가 어려워지는 인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상범들일수록 인간적인 면이 있어 죄없는 처자식이 당하는 고통을 견디는 것은 아주 다른 고문이었다. 또한 처자식에게도 이미 기독교 사상에 물들었을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될 때 어떤 일을 당해야 하는지를 미리 교육을 시키는 효과도 있다. 주기철 목사님도, 주남선 목사님의 가족도, 심봉한 집사님의 가족도 그 당하던 곳은 평양에서, 거창에서, 구례에서 각각 지역은 달랐으나 고등계 경찰의 조사 방법은 악랄했고 그런 방법조차 연구되고 전수되고 있었다. 실제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평생 그 고문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은 커녕 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치고 살게 된다.




재판을 받는 것과 경찰 조사의 차이




양 목사님은 체질적으로 연약한 분이었다. 그의 위치는 지도자급이어서 경찰의 조사를 받고 나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사 내용을 시인하게 하면 되는데, 이를 거부하는 경우 경찰은 고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재판에 넘겨지고 이후에는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일제하의 감옥이니 오늘 입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웠겠지만 그래도 경찰 조사로 매일 고문이 계속되는 것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심봉한은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1940년부터 1943년 11월에 순교할 때까지 오직 경찰서에서 조사하고 죽을 만큼 고문당하고 돌려보내졌다. 기력을 차리면 또 불러내어 취조하기를 반복했다. 양 목사님처럼 한 번 경찰조사를 받고 감옥으로 넘어갔다면, 심 집사님은 건장한 분이어서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미안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이 짓을...... 죄송합니다. 조서를 받기 전에 요즘에는 고문부터 해서 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너무 쇠약하셔서 기절을 했어요. 앞으로는 어쩌면 고문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이 하신 것 다 조사되어 있는 것 같으니 다 말씀해 버리세요. 어차피 징역은 살게 되어 있어요. 먼저 잡혀가서 약 2년간 미결수로 있는 사람들과 합류시킬 계획이니 그리 아시고 몸조심하세요. 한 20일간 면회도 안 될 거요. 상처가 아물어야 조서를 꾸밀 것입니다.’


양 목사님의 사모님은 양 목사님이 순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고등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우리 서에서는 연행한 사실이 없다며 구례경찰서로 다시 가서 확인을 하라고 했다. 구례경찰서에서 확인을 하고 왔다고 해도 모른다고 돌려 보냈다. 양 목사님의 고문 후유증이 호전된 15일 정도가 지나게 되자 면회가 허락되었다. 면회는 5분이었다.


순천에서 조사를 받고 광주 송정리행 3등 열차에 탄 것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수갑을 찬 모습을 역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경했다. 두 경관이 함께 탔다.


재판을 받고 감옥을 가는 분들은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치며, 다른 신사참배 옥고를 겪는 분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경찰의 조사를 받고 그것으로 끝나는 사람은 감옥 가는 분들에 비할 수 없이 상황이 쉽다. 문제는 이기풍, 심봉한 두 분처럼 죽을 때까지 경찰에서 작정하고 계속 불러 들여서 죽을 때까지 취조를 핑계로 고문을 계속한 경우는 가장 가혹한 경우로 보인다.




심봉한 집사님의 순교               




어떤 때는 몇 일, 어떤 때는 몇 주, 어떤 때는 몇 달, 몇 번이나 불려 갔으며 불려 가서 있었던 각 기간들이 어느 정도인지 일일이 헤아려가며 기억할 가족조차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심갑순과 아내는 거의 기억을 할 수 있는 분들이나 그들로서는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심봉한을 붙들고 기도하며 연명하도록 정성을 다하며 애간장을 끓이는 데만 전력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이어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던 심봉한도 일본 고등경찰의 모진 고문에 그 호흡이 마침내 끝이 났다. 경찰이 급하게 가족들을 불렀고 이미 죽은 듯 보이는 심봉한을 경찰서 밖으로 내팽개쳤다.


늘 그러했으니 또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갔지만 이 번에는 완전히 축 늘어 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43년 11월 26일 새벽 3시, 경찰서에서 내쳐 진 단 몇 일만에 심봉한은 숨을 멎었다. 오늘은 순교가 어마어마한 영광이지만 실제 순교를 해야 하는 그 순간의 순교는 모두가 외면하고 가족 중에서도 함께 순교를 하고픈 정도의 신앙이 아닌 가족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다.




큰 아들들은 이미 만주로 도피를 하여 생이별을 했고, 셋째마저 비누공장으로 떠났다. 초등학교 5학년인 넷째 심보라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초상에 맏상주가 되었다. 밑으로 열 살, 일곱 살, 네 살의 남동생만 셋이었다. 옥고와 수년간 거듭된 고문에 전신이 망가진 상태였다. 7명의 자녀는 아버지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기억조차도 힘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함께 불렀던 [날빛보다 더 밝은] 찬송만이 기억의 전부다.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것으로 멀리 뵈네


있을 곳 예배하신 구주            우리를 지금 기다리네




[ 후렴 ]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우리주의 빛 명랑하니             거기 햇빛이 쓸데없네


다른빛 일체 안 비치되            어둔 것 조금도 없겠네




이미 세상을 떠난자 중            천국간 친구들 많도다


저와 상관된 우리들이            가서 만나볼 맘 있겠네




우리 구주님 계신 곳에            천사 함께 늘 찬송하고


주께 영화를 돌림으로            모든 슬퍼한 맘 풀겠네










2013년에 건립 된 심봉한 집사님의 순교비와 묘소


위치는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산27번지, 사성암 옛 입구의 선산






심봉한의 순교는 한국교회사에서는 호남지역 3인의 신사참배 순교자 중 1인으로 기록되며, 평신도로는 유일하게 순교자라는 영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름뿐인 아버지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남은 가족의 인생 풍파는 끝장을 향하고 있었다. 심봉한의 아내 박소열은 남편 심봉한의 순교 이후 재봉일로 가족 생계를 꾸렸다. 남편의 옥고 수발은 물론 집안이나 문중의 외면 뿐 아니라 일본 경찰의 불순 가정에 대한 관리의 눈빛이 항상 따라 다니는 가운데 76세의 시아버지와 어린 넷을 먹여 살려야 했다.


당시는 70세를 넘는 남자 노인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때였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고 전쟁을 위해 모든 것이 수탈당한 당시는 나름대로 괜찮게 살던 가정까지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했으며, 전쟁은 아직도 2년이나 더 남은 상태였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끝이 나는데, 전쟁이 진행될수록 총독부는 식민지의 모든 것을 긁어 모았고 전사한 애국자에게 절을 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심봉한과 그 가정을 향한 일본의 가혹한 탄압은 그들의 잔인함을 다 쏟아 놓는데 주저할 것이 없었다. 심봉한의 순교는 이 가정의 모든 것을 다 함께 소멸시켰다. 39세 한창 나이에 이 아내에게 쏟아진 고난의 무게는 남편의 순교 2년만인 43세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뜨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계의 대책이 없자 막내는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세상으로만 본다면 심보라 어머니 박소열의 인생과 마지막 죽음은 너무나도 불쌍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즈음 심보라는 김철주 장로님이라는 아버지의 교우 어른을 따라 여수로 갔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보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해방의 소식은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모든 수고를 그만하고 천국으로 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아직도 어린 자식들과 연로한 아버님을 모셔야 할 한창 때인데, 이미 육의 생명은 다하였고 더 이상 해방의 소식을 들을 힘도 그 기쁨을 누릴 기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달 남짓동안 심하게 앓으시던 심보라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떠나가셨다. 서서히 죽어 가고 있던 이 어머니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 어린 자식들을 위해 불렀을 찬송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이 찬송 가사로 그 날 장례식을 함께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후렴)


다시 만날때 다시 만날때 예수 앞에 만날때


다시 만날때 다시 만날때 예수 앞에 만날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간데마다 보호하며            양식주시기를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위태한 것 면케하고            품어주시기를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


세상에서 떠날 때에             영접하시기를 바라네






이 가정의 어린 자녀들을 두고 떠나는 어머니의 신앙은 자식들에게 신령한 은혜만 기도하고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 글을 적고 읽는 우리가 그 입장이 되었다면 신령한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어린 자식들의 입에 들어 갈 밥을 주시라고 눈물로 기도했을 것 같다. 두 면을 함께 놓고 이 찬송으로 심봉한 가정의 자녀들의 훗날이 영육에 양식을 고루 받기를 소원해 본다. 그런데 이런 소원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대부분은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가정에게 8.15 해방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여름 저녁 8시, 새 희망을 품기도 전에 뜨거운 여름의 저녁놀과 함께 생을 마치고 남편의 뒤를 따르는 어머니 뒤에는 두 살 젖먹이부터 어린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당시 78 세인 심갑순 부친은 한창 나이의 아들 부부가 다 죽고 어린 것들만 남았으니 그 고통은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향해 천지를 달구고 있는 여름 뙤약볕과 몰아치는 시대의 어려움을 통해 그 누구도 세상뿐 아니라 신앙으로도 버틸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을 주고 계셨다.


어린 자녀들은 한꺼번에 다 고아가 되었다. 문중에서는 버린 가정이 되어 누구 하나 돌봐 줄 사람이 없었고, 어린 자녀들은 각자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 나가야 했다. 일본 식민지 시기에는 학교를 가도 교사들이 일반학생들과 분류를 해서 별도 관리를 했고, 학교조차 가지 못한 동생들에게는 경찰이 집에까지 찾아와서 예수 믿는 나쁜 짓을 하다 이렇게 되었다는 몹쓸 저주와 욕을 퍼부었다.


1945년 8월 15일의 조국 해방조차 이 가정에는 남의 일이었다. 신앙 때문에 받는 멸시와 고통은 동네뿐 아니라 집안에서 여전히 계속 되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는 이루 말을 할 수 없이 컸다. 속으로 신앙에 대한 반감은 극도에 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정이 없어졌다. 모일 곳도 없어졌다. 눈물만 흐를 뿐이다. 가정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현재 생존해있는 후손은 넷째 아들(심보라)과 다섯째 아들(심요셉)이다. 심보라는 아버지의 순교와 그로 인한 가정의 해체와 고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아버지가 경찰서에게 끌려가 고난을 받으셨던 것을 저는 어려서 다 볼 수 없었고 그 이유도 다 알 수도 없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히노마사오라는 일본 순사부장이 가죽매로 아버지를 매질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엄청났지만 현실적으로 저는 너무 어렸고 아무 힘을 갖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질을 당하는 중에도 눈물과 함께 찬송가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시면서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고 집에 오셨을 때, 우리 가족은 눈물을 머금으며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를 부르며 아버지를 위로해 드렸습니다.


옥중 고문으로 인한 처참한 마지막 모습으로 세상 뜨신 아버지와 자식들이 임종조차 지켜드릴 수 없었던 어머니, 뿔뿔이 흩어져버린 형제들이라는 우리 가정의 현실은 설명조차 힘듭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원망도 했다. 예수 믿는 가정이 무슨 죄가 있나요? 예수 믿은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고 언제쯤 고통이 끝나나요? 지금은 그 원망이 후회되지만 부모님을 잃은 허전함과 슬픔은 너무 큰 상처와 고통이었고, 어린 저에게 세상은 너무나 외로운 광야였습니다.????


-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자녀들의 훗날    




해방이 되자 첫째 아들은 만주에서 돌아와 전남 순천에 정착하였다가 경기도 장호원으로 이주했다. 나머지 다섯 형제는 구례에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심보라 아래 동생은 일제 때 하지 못한 초등학교 공부를 12세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7형제 중에 6 명의 형제 전부는 초등학교로 학교생활이 끝났다. 넷째 아들 심보라는 아버지의 동지 김철주 장로님의 배려로 여수의 백야도에 있는 그의 병원에 심부름을 하며 생활을 꾸리기 위해 멀리 떠나게 된다. 다섯째 아들 요셉은 비누공장으로 갔다. 막내 광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너무 어린 두 살 나이여서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고아원으로 간 일곱째 막내만은 고아원에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 공부라도 마칠 수 있었다. 교육열도 강했고 남부럽지 않는 가정의 자손들이 순교자 집안이라는 반역자 낙인이 찍힌 후, 고아원 생활보다 열악한 교육여건에 처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 그 자체였다.


막내 광일은 너무 어린 나이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원으로 갔지만 중학교라도 졸업하고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간다. 사업을 하여 돈을 벌고 형제들 가운데는 경제가 제일 좋았고 믿음도 좋았다. 고향의 신월리교회를 기억하여 예배당 의자와 집기를 구입하여 드렸고 예배당 주변의 논 세마지기를 구입하여 교회에 드렸으며 그 외에도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다가 2011년 세상을 떠났고, 그 자녀들은 현재 영국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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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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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보라의 신앙 생애 Ⅰ : 고난








지금까지는 식민지 시기에 겪은 심봉한 집사님의 순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감당 못할 큰 고난사를 살펴 보았다. 고난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이지만 고난이 너무 크면 사랑이라고 깨닫기가 어렵다. 이 가정을 위로하고 또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김철주라는 분을 통해 이 가정의 넷째 아들에게 남 다른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나 넷째에게 주신 이 은혜도 쉽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부모에 이어 넷째 스스로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현실을 주셨다. 아버지 못잖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며 아버지가 의지한 하나님으로만 살도록 만들고 계셨다. 그런 다음에야 순교자 가정에 소망을 이어 갈 수 있는 위로를 주셨다. 그를 소개한 보도는 책으로 한 권 분량이다.




심보라가 해방 후부터 걸어가는 과정은 이제 대부분 역사가 되었다. 순교 가정의 넷째가 살아가는 현장을 따라 가며 하나님 주신 역경과 위로를 함께 목격하면 좋겠다. 많은 고난과 급변 사태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순교자와 그 가정에 대한 소개이다. 고난이 이 책의 주제다. 넷째가 겪은 모든 고난을 통해 현재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면 좋겠다.




오늘 우리는 너무 좋은 세상을 만나 고난을 아주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는 고난 없는 은혜는 없다. 심보라가 겪게 되는 현대사의 고난을 그의 눈과 체험과 신앙과 걸음으로 살펴본다.








해방과 김철주와의 만남과 인연




1945년 3월 심보라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해방은 아직도 5개월이 남았다. 진학이나 어떤 진로도 꿈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오로지 어머니를 도와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온갖 공출이 난무하던 그 시절 이 가정이라 해서 감하거나 피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혹독했다. 어떤 세월을 지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이 하루를 살고 나면 하루를 살았다는 것만 그가 느끼는 전부였다. 매일의 생존이 기적이었다. 그 얼굴은 누렇게 뜬 상태다. 그 시대가 다 그러했다. 이 가정은 더했을 뿐이다.


갈수록 병약하여 앉은 상태에서도 쓰러지곤 하는 어머니와 함께 드디어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모두가 기뻤고 노래를 했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더 무거운 앞날이 닥치고 있었다. 복음은 복을 준다는데, 이 가정은 복음을 받기 전에 남부럽지 않게 여유롭고 행복했다가 복음이 들어 온 뒤에는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불행만 남았으니 복음이 가정을 산산조각을 내버린 셈이다.


어떤 이유로 아버지는 이런 길을 기쁨으로 담대함으로 온유함으로 끝까지 걸어가셨을까? 아버지가 신실하게 믿으면 자녀도 그 영향을 받게 되지만,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가정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다. 설령 믿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잃은 세상에서 겪게 될 시련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광복에 대한 기쁨이나 일본에 대한 원한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러움과 공포 속에서 살고자하는 생존 본능만 있을 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13세가 된 심보라는 마음만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기뻤으나 미래는 너무 막막하였다. 광복이 되었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가 희망찬 조국의 해방이었지만 이 가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상대적 좌절만 큰 상태였다.


그런데 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심보라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온다. 아버지와 3.1만세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투쟁 가운데 동지로 긴밀했던 김철주 장로님께서 전남 여수로 내려오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막상 함께 있다 해서 큰 도움이 될 나이도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넷째에게 김철주 장로님에게 가서 얼른 성공을 해서 온 가족을 돌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흘리며 구례구역에서 여수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철주


김철주 장로님은 애양원이 광주에 있던 1925년 이전부터,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던 애양원 직원으로 일했다. 애양원에서 근무하기 이전, 1919년에는 광주 숭일학교 학생 대표로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광주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1년이 넘지 않는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지만, 그는 광주지역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대구교도소까지 이송되어 고생을 할 정도로 투철한 정신력을 가진 독립애국투사로 활약하였다.


1922년부터 1962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학교설립, 교직생활, 의사활동, 신문사사장, 국민 협회 회장 등의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광주-전남 지역의 종교, 교육, 사회봉사 활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주 양림동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30여년이 지난 1993년 10월 독립애국지사 추호를 수여받았고 대전국립묘지 안장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 그의 교회경력은 광주제일 교회 장로, 광주 양림교회 장로, 여수중앙교회 장로, 신풍 성암교회 장로, 백야교회 개척(1945년) 등이다.  




1936년 애양원 총무로 활동할 때, 그는 김장용 배추를 심봉한 가정에서 구입하면서 심봉한과의 각별한 인연을 갖게 된다. 심봉한의 고향인 구례 신월리는 오래전부터 배추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김철주는 1천 명의 애양원 식구들이 겨울을 날 김장용 배추를 구입하는 책임자였다. 좋은 물건을 찾다가 심봉한이 살고 있는 신월리를 알게 되고 이 동네에서 배추 농사도 많이 짓고 또 교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연결이 되었다. 더구나 3.1 운동을 했던 경력 때문에 심봉한 집사님의 애국심과 인간성에 대해서도 단번에 신뢰가 갔고, 무엇보다 투철한 신앙을 가진 두 사람은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깊은 관계가 되었다.


심봉한에 대한 경찰의 소환과 고문이 거듭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으나 위로와 기도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시대였다. 김철주는 애양원의 배추 조달지에서 맺은 인연으로 심봉한과 그 가정의 일제 말기 고초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되었다. 그도 3.1 운동 주모자였다는 이유로 고등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자기 한 사람 가누기도 어려울 일제 말기였지만 굴하지 않고 깊은 만남을 이어가던 중 1942년 김철주는 의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애양원을 떠나 여수 지역의 낙도 중 하나인 백야도로 가서 1943년에 의원을 개설하게 된다. 바로 그 해 11월에 심봉한은 순교를 한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는 옛 교우인 심봉한의 가정을 찾게 된다.




김철주는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옥살이를 한 다음 광주에 있던 애양원 직원으로 근무를 했다. 그런데 당시 광주에서는 나환자 수용 시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광주 애양원의 이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애양원을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이전하는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 때 이전 업무의 실무를 김철주가 맡게 되었다. 전남 여수 지역에 위치한 신풍이 애양원 이주지역으로 선정된 후, 그는 애양원 이전의 선발대로서 바닷가 자연환경을 오늘의 애양원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1925년 신풍에 와서 머물며 이전할 애양원 병원의 병상(환자들의 숙소)과 병원 관련 시설, 그리고 예배당 건립에 함께하는 노무자 관리까지 총괄하였다. 준비 기간 동안 그는 애양원의 입구 마을인 구암에 사는 차진환, 차진회 두 형제의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마을 교회는 1924년에 개척이 되었다. 한 편으로 마을 교회를 돕고 다른 한 편으로 광주에서 이주할 애양원 건립을 총괄하던 그는 1940년 손양원 목사님이 투옥되고 미일 전쟁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애양원에 일본인 엔도 원장이 온 후에는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해방 후 1952년에 이르러서 과거 애양원의 직원으로 실무를 알면서도 의사 면허가 있음으로 애양원의 최고책임자인 병원장으로 일한 적도 있다. 이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들은 애양원의 운영에 결재만 하는 정도였다. 이후 여수 군수와 지역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국회 보사위원까지 이르게 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나환자정책을 대변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애양원의 역사






애양원은 1904년 광주시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의료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선교회 소속의 오웬 선교사(Clement C. Owen, 오기원; 1867~1909) 목사님이 폐렴이 걸리자 목포에 있던 의사이자 선교사인 포사이트 (Wiley H. Forsythe)가 치료를 위해 광주로 오게 된다. 광주로 오던 길에 나주 남평과 광주 사이의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우고 와서 치료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이라는 한센병 치료소가 만들어졌다.


이후 윌슨 목사님과 함께 1909년 광주시 봉선시장 부근에 한센병 환자 치료소가 설치 운영되다가 600명으로 환자가 늘어가자 광주 시내의 주민들은 전염성이 있고 치료가 불가능한 위험 질병이라는 이유로 치료소를 옮기도록 극단적인 행동에 나섰다. 총독부의 탄압정책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구호 시설에 대한 반대운동이 갈수록 심각하게 되자 서울의 총독부가 처리해야 할 문제로 비화 되었다.


많은 분쟁을 거친 후에 마침내 총독부가 이전 방침을 세우고 지원에 나서게 되자 광주에 있던 애양원 실무자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애양원의 이전 최적지를 물색하러 나서게 된다. 따뜻하고 안락하며 지방민의 반대를 물리쳐야 하는 등의 여러 상황을 고려한 끝에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바닷가 마을이 전국 최적지로 확정 된다. 총독부의 정책이었으므로 여수 경찰서장이 직접 주민의 반대를 막기 위해 부지 매입 단계에서 현장에 나오는 등 관서의 지원이 있었다.




1925년부터 선발대가 신풍 현지에 상주하며 모든 준비를 했고 1928년까지 3년에 걸쳐 광주에서 모든 환자들이 모든 시설과 함께 대이동을 하게 되어 현재의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한센병 관련 시설로는 허가 1호 시설이 되었다. 1935년 3월 15일 [애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했고 749명의 한센병 환우를 돌보는 시설로 성장하였다. 해방 후 한 때 1,6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인원을 수용한 적도 있었다. 초기에는 남장로교의 예산으로 운영을 했고 후에는 총독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선교부는 별도로 여러 혜택을 베풀었다.












의인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


                       : 여수 야간상업학교에 들어가다    




심보라는 여수 백야도에 있는 김철주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백야의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또한 장로님이 개척한 백야교회에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게 된다. 장로님은 섬마을의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공부도 가르치며 전도를 해서 교회로 인도했다. 그의 신앙심과 인간적 감화는 현재 80대가 된 분들이 1943년에 백야도로 들어온 김 장로님이 초등학교 공부도 가르치고 교회로 전도하며 온 마을을 위해 혼신을 다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하여 늘 주변에 당시 이야기를 하는 정도다.


마을 전체 사람들을 신앙으로는 장로직을 가진 전도인으로, 교육으로는 교사로, 건강을 돌보는 면에서는 의사로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제 말기에 투옥된 분들, 순교한 분들, 그리고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분들을 생각하며 이 섬에서 훗날을 기약하고 목숨 바쳐 헌신했다.


부모님을 잃고 힘겨운 생활을 하던 심보라에게 일제 시기에 믿는다는 것, 특히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모든 것이 억울해 보였고, 실제로도 감당하기 힘든 어두움과 억압을 받고 살아왔다. 신앙 때문에 가정과 가족을 모두 내 놓아야 했던 시간을 잘 이겨낸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해방 조국을 통해 의인의 자손에게 복의 길을 준비하고 열어 주셨다.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승만, 1975-1965)과 부통령(이시영, 1869-1953)은 목사이거나 목사를 준비할 정도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었고, 여수 지역이 속한 전남지역의 도지사도 이남기 목사님이 맡고 있었다. 구례에서 해방 이전까지 심보라를 둘러싼 분위기는 신앙이라는 것은 탄압의 대상이었는데, 그 분기점을 넘어 이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시기가 된 듯했다.




그러나 행복한 시기도 잠깐이었다. 1948년 10월 19일에는 여수에서 국군 14연대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이 시작된 신월동은 여수시내에서 4km 떨어진 곳으로 바닷가이며 일본의 식민지 시기에 군사 기지가 있던 곳인데, 이 곳은 심보라가 있는 백야도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로 앞에 위치했다. 10월 27일까지 8일 동안 진행된 여순반란사건 기간에 여수는 전쟁의 출발점이자 전쟁터로 변해갔다. 공공시설과 함께 시내 전체가 불바다에 휩싸인 듯이 보일 정도로 곳곳에 방화와 처형이 시행되었다.


김 장로님은 반란사건의 좌익 군인의 공격에 맞서 백야도에 자체 방위대를 조직하고 도피하는 경찰들을 보호했다. 만일 반란사건이 성공하게 되면 이런 행위 때문에 김철주는 처형될 죄가 되겠지만 그런 위험 때문에 주저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애국자였고 그의 언행은 단호했고 판단이 정확했다. 해방 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는 좌우 진영의 충돌과 혼란 속에 김 장로님은 조목조목 짚어 가며 심보라를 가르치고 있었다. 신앙에 근거한 애국심으로 청년이 해야 할 일과 지혜로운 대처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면에서 심보라의 최고의 스승이었다. 심보라는 그를 통해 급변기의 시국과 세상을 읽어내는 안목부터 신앙과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배우게 된다. 제주 사건과 여순 사건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물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던 이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자연스럽게 신앙과 애국심을 함께 길러갈 수 있게 해주었다.








14연대 주둔지에서 본 백야도




여순반란 사건에서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순천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심보라의 마음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그 부모와 가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제 신사참배 고초를 잘 견디고 이겨낸 그 가정이 이런 갑작스런 변란에 두 아들의 목숨을 잃다니! 아버지를 잃은 심보라의 가정과는 반대 되는 경우였지만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날이 없었던 그에게 들린 소식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손 목사님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고 이 소식으로 전국 교회가 들떠 있었으나 심보라의 마음은 그 가족들의 아픈 상처를 헤아리기 바빴다.


여순반란사건 직후 채 두 달이 되지 않아서 김 장로님은 여수 군수로 임명이 된다. 극단적인 혼란기가 막 지났고 이제 차분히 민심을 수습해야 할 시기였다. 해방 후 여수 지방에 임명된 3명의 군수는 모두 정부 수립 전에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반란사건의 여파는 이제 막 출발한 신생 대한민국을 뿌리째 뽑을 정도의 위력으로 다가왔다. 정부의 모든 시선은 여수를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군수 임명이 전남 단위에서 결정될 수조차 없었다. 이 지역을 잘 알면서도 해방 전에 독립운동가였고, 의사였으며, 선교부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본 경력에 더하여 낙도 주민을 살피고 있던 김철주는 반란사건 이후를 수습하고 지역을 안정화 시킬 적임자였다.




김 장로님은 정부 수립 후 사실상 초대 여수 군수로 임명이 되었고, 업무수행을 위해 여수 시내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 당시 심보라도 소년에서 청년으로 옮겨가는 17세였다. 군수 관사에서 살면서 심보라가 듣고 보는 것은 여느 일반 청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군수가 된 김 장로님은 그에게 여수의 상업학교를 다닐 기회를 마련해 주셨으며, 1949년 9월 1일부터 학생 신분이 되었다. 그 당시 여수야간상업학교의 학교 교사는 진남관(국보 제304호)을 사용하고 있었다.










진남관, 국보 304호


해방 직후 학교로 사용하던 모습






그러나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자마자 그에게는 6.25 전쟁이 앞을 막고 있었다. 여수상업학교를 1년 공부한 시기에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평소 배워왔고 본인이 스스로 느끼는 대로 공부를 포기하고 학도병에 지원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적인 공산주의와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김 장로님처럼 애국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심보라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신앙과 애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었다.










여순반란사건 (여수·순천 사건 ; 1948. 10. 19. - 10. 27.)




여순반란사건은 한국전쟁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에 있던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의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으로서 미군정하의 합법단체임) 계열 간부들이 주동하고 2천여명의 사병이 휩쓸려 전라남도 여수에서 반란에 동조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책을 출간하는 주소지는 여순반란사건의 100리 길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가해 관련자나 희생자 가족이 많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대통령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역사적으로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다가 지역 주민들이 반란주체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의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지원제였는데, 허술한 신원조회 때문에 경찰 탄압을 받던 좌익계열이 신분 보호를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군정(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을 통치하던 기관)은 지원자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였는데 남로당은 국방경비대를 통해 군을 장악하기 위해 위장 입대를 시켜 생긴 사건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8. 10. 19. : 14연대 반란군 2천 명이 우익계 인사와 가족 및 경찰관 살해


▪1948. 10. 19. : 순천으로 이동해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등 우익계 살해와 점령


▪1948. 10. 21. - 22. :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곡성까지 점령.












신앙여정으로서 6. 25. : 학도병으로 참전






????제가 학도병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있었던 경험은 저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백야도병원에서 근무하던 제가 여수 군수로 부임하신 김철주 장로님의 제안으로 여수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즈음에 14연대의 여순반란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수로 이사한 후 1949년 9월 1일에 김 장로님의 도움으로 여수야간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듬해인 1950년에는 6.25가 발발했습니다. 여수생활을 시작하는 저는 여순반란사건과 6.25라는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두 차례나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6.25가 발발하자 국가에서는 북한군의 진격에 대항할 학도병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저는 7월 13일 15연대에 입대하였고 1주일간의 훈련 후 학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는 전라북도 신리까지 진격했으나 곧 북한군에게 밀려 내려왔습니다. 그러한 전황 속에서 화개전투를 경험하게 되었고 많은 전우들과 생사를 함께 보냈습니다. 학도병 전투 속에서 인간의 한계, 인간의 정, 그리고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절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생명이 지켜짐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과 안보였습니다.????


-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6.25 전쟁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당일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6월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 고개(강북구 미아동)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북한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했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전쟁 발발 20일이 경과된 7월 14일에는 미군이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 받아 본격적으로 참전했고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15일에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했고 국군은 9월 28일부터 낙동강에서 북진을 시작했으며,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까지 반격했으나, 중공군(현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양측의 전투가 한반도의 중앙에서 계속 되자 휴전 회담이 시작 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한다. 3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6.25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는 물론 사회의 모든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 나라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참혹한 상태만 남겼다.












화개전투 - 학도병 심보라 관련 기사


(1984.7.27. 동아일보)


1950년 6. 25. 한국전쟁이 터지자 전남 여수와 순천 인근지역에서는 2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했다. 같은 해 7월 13일 순천에서 학도병이 결성되었는데, 여순반란사건을 직접 겪은 탓에 공산주의의 위험과 실상에 대한 위기의식을 절감한 학생들이 의분으로 나선 것이다.


2년 전인 1948년에 일어난 여순 반란사건 과정에서 좌익이 교회를 원수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목격했던 이유로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순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순반란사건의 피해가 컸던 여수 역시 기독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많은 학도병이 지원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이미 1949년에 전쟁 분위기를 실감하고 학교마다 설치된 학도호국단은 전쟁 발발과 함께 학도의용대로 변경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소속된 학생들은 학도병이 되었다. 많은 학도병을 배출한 학교에는 여수의 수산학교와 상업학교, 순천의 매산학교(기독교학교)였으며, 이밖에도 농업학교와 사범학교도 포함되었다. 결과적으로 전남 지역의 여수, 순천, 벌교, 강진에 걸쳐 200여명의 학도병이 모집되었다.


학도병들은 순천에 주둔하던 국군 5사단 15연대에 입대하고,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총 쏘는 훈련만 받고 전장에 투입되게 된다. 소총 한 자루와 주먹밥 1개를 들고 3일간 행군하여 경남 하동 전선에 투입되었다.




6. 25 전쟁 발발 불과 한 달만에 국군의 방어선은 최남단 남해 바다까지 밀리게 된다. 그 당시 북한군의 진격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주력 부대는 북에서 남으로 부산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주력부대인 인민군 제6사단은 호남을 점령한 후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측면에서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국군의 최후방어선이었던 부산에 인민군 제6사단의 후면 공격이 현실화된다면 부산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국군은 참모총장 출신 채병덕 장군의 지휘 하에 경남 하동에서 인민군 제6사단을 저지한다는 계획으로 미군은  물론 학도병까지 최대한 동원하게 되었다.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소속하게 된 제15연대는 여순 사건 당시 순천에 주둔했다가 그후 38선 위쪽에 있던 옹진으로 이동했던 시기에 6.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15연대는 분산되고 일부 군인만 순천으로 내려와서 급히 재편하던 중이었다. 처음 지원한 숫자는 약 200여 명이었으나 최종 입영이 확정된 학도병 숫자는 정확하게 183명이며, 6.25 개전과 함께 최초로 편성된 학도병 중대이다. 무기는 없고 학교 교련 시간에 사용하던 목총과 죽창뿐이니 훈련 역시 실탄 없이 진행되었다. 식사는 주먹밥이었고 잠은 옛 공장터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사용했다.


여기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광주광역시의회 사무처장을 역임한 임종철이 2006년에 출간한 ‘학도병은 살아 있다’라는 책으로, 당시 이 지역의 학도병 참전 상황을 자세히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광주에 있는 귀일원이라는 유서 깊은 복지단체에 상임이사로 재직하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심보라와 함께 순천에서 학도병으로 지원하는 순간부터 전쟁의 초기 최악의 전선을 누빈 전우이다. 전쟁 초기 순천에서 남원, 하동, 함안, 진주, 마산을 거쳐 부산까지 후퇴하는 과정은 국가적으로나 전투에 임하는 군인들로서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절망뿐이었다. 임종철의 ‘학도병은 살아있다’는 책에서 함께 겪은 내용을 발췌하거나 직간접으로 인용하며 심보라의 전쟁 초기 경험을 재구성한다.










1950년 6월, 참전하는 학도병


2000년대의 국방부 화개 전사자 발굴 작업






1950년 7월 22일 새벽에 출전 명령이 내려 왔고 화물기차를 타고 남원역에 도착했다. 아침에는 미국에서 제공한 M1 소총을 받고 사격 요령만 설명을 들은 체 남원에서 전주를 향해 전진을 하다 전주 전방 20 km 정도 떨어 진 관촌면 지역에 갔을 때 이미 전주는 북한군이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관촌 초등학교에도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곧이어 대규모로 몰려드는 적군 때문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타고 온 열차로 다시 구례구역까지 내려 왔다. 심보라의 고향이다. 태어나서 행복했던 때가 기억난다. 어느 날 닥친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가정은 없어졌고 이제 다 흩어져 아무도 없는 고향 길을 가로 질러 구례읍으로 갔다. 일제 때 다닌 초등학교 모교에서 전열을 정비했고 구례부인회에서 마련해 준 주먹밥으로 첫 음식을 먹었다.


인민군의 급습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서 연합군은 하동에 1차 방어진을 펴기로 했고 15연대도 급히 이동하도록 명령이 내려 왔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이틀을 시달린 끝에 밥을 먹고 다시 하동까지 야간 행군을 하게 되니 24일 밤 11시였다. 졸음도 오고 피곤하여 앞뒤 동료와 부딪혀 가며 졸면서 걷고 있었다. 7월 25일 새벽 4시에 하동 화개장터 면사무소 부근에 도착했고 그 곳에는 하동 방향으로 철수하는 전남북의 경찰과 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꼭 1 개월이 되던 날, 시간도 그 새벽 4시였다.


중대장은 야간 행군으로 피로에 지친 학도병들을 도로변에 쉬게 하고 아침 식사를 시켰는데 갑자기 연대장이 나타나서 뒷산으로 병력을 이동한 뒤 식사를 하도록 불호령이 떨어졌다. 산 위에는 여순반란 사건에 준비가 된 참호가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적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도로에서 습격을 당했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아직 참호로 들어오지 못한 순천 매산중학 학도병 하나가 가슴 좌측에 총을 맞고 피를 뿜었다. 한 쪽에서는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전우가 바로 쓰러졌다. 연이어 참호 안으로 포탄이 명중하고 흙먼지와 함께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위생병도 의약품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우왕좌왕하면서도 한 쪽에서는 적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때 임종천 학도병의 눈에는 중대장이 보였다. 몸도 숨기지 않고 어린 학도병을 위해 권총을 빼들고 지휘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26 명이 죽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고 실종자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도 3시간을 참호 속에서 교전하며 버텼다. 총 10시간 정도의 이 방어를 통해 경찰과 피란민들은 무사히 화개를 빠져 나갔고 이어 중대장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적군은 북한군 6사단이며, 방호산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최강 정예군이었다. 이 전투는 ‘하동에서의 화개장터 전투(화개전투)’라는 공식 이름으로 국군 전쟁사에 학도병이 실전에 투입 된 첫 전투로 기록된다. 전쟁 개시 정확히 1개월이 되는 7월 25일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대패하였지만 북한군의 경남 진주 침공을 7일이나 지연시키게 되었다. 7일이라는 시간은 전쟁 초기에 다급했던 전황에서 반격을 준비할 수 있는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총 한 번도 제대로 쏘지 못한 이 오합지졸 때문에 적의 최강 사단이 7 일이나 막힌 것은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저항군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착각 때문이었다. 이 지연 과정은 부산에 상륙하던 미군과 UN군의 방어선 구축에 시간을 벌어준 결과를 낳았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화개전투에서 생존한 심보라는 훗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 면소재지 뒷산에 자신과 함께 전투하다 전사한 전우들을 위해 묘비와 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이후 하동군에서는 경상남도 지원을 받아 전우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고 정식 기념장소를 조성하였다. 2007년 국방부가 실시한 화개장터 유해 발굴 과정에서 학도병들의 십자가 등의 일부 유품이 발굴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7월 25일을 기하여 학도병을 위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고, 심보라를 비롯한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하고 있다.










2007년 국방부 화개전투 감식단


화개전투 격전지에서 발굴된 학생의 십자가 유품








화개전투 : 학도병 추모행사




경남 하동 화개 6·25 전몰 학도병 전적지서 추모제 거행  


(2012. 07. 25. 경남 = 뉴스1)




“6·25 전쟁 당시 하동 화개면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숨지거나 실종된 학도병들의 영령을 기리는 전몰 학도병 추모제가 25일 오전 11시 30분 화개면 탑리 학도병 전적지에서 열렸다. 6·25 참전 학도병 동지회가 주관한 이날 추모제에는 이호주 하동부군수를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학도병 동지회 회원, 보훈단체 관계자, 재향군인회 회원, 주민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학도병 전적지는 6·25 전쟁 당시 전남 동부 6개 군에서 6년제 중학교에 다니던 16∼20세의 어린 학생 180여명이 혈서로 지원 입대한 뒤, 그해 7월 25일 전략적 요충지인 화개장터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70여명이 사상 또는 실종되었고 그 중 26명이 묻힌 곳이다.


당시 순천에서 재편성된 제5사단 15연대 1대대의 학도병 부대에 배속된 이들은 화개장터로 들어서는 북한군 6사단 선봉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숨져 흩어져 있는 것을, 훗날 지역 주민들이 수습해 묻었다. 이곳 전투에서 생존한 전우와 유가족, 보훈단체 등이 학도병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7월 25일 이곳에서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후퇴를 거듭한 15연대는 8월 29일 함안 방어선에 투입되었고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한 미군 부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미군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그들의 전투 준비와 실전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구경하게 된다. 하늘과 땅 차이였다. 미군의 참여로 적군은 함안 방어전에서 진주 방어를 거쳐 마산으로 후퇴했다. 철없이 뛰어들었으나 고생과 시간이 지나가며 학도병들은 군인이 되어 갔다. 아군은 또 다른 반격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으며, 학도병도 부산에서 다시 재편을 하게 된다.


심보라는 하동의 첫 전투(화개전투)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전장(마산 진동 전투)까지 극단의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치열한 전장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한국군은 북진을 하게 되고, 심보라는 북진의 최선봉에 선 국군1사단에 편재되어 평양에 진입했다. 평양 시가지 전투를 치르고 평양을 완전 함락하게 되자 부대는 일시 평양에 머물게 되었다. 일사천리로 진격했고 패주(敗走)하는 적들은 일제히 물러갔으므로 평양은 평온했다.


심보라는 선교사들로부터 또 주변 신앙 지도자들로부터 귀로만 들었던 신앙의 유명한 곳을 찾았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말로만 들어오던 평양신학교였다. 한국교회의 중심지며 모든 목사님들이 공부하고 왔다는 곳, 그런데 그 곳은 북한고등검찰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모와 같았던 김철주 장로님의 부인 최복진 권사님의 출신 학교인 평양 숭의여학교도 방문을 했는데, 그곳은 군수물자창고가 되어 있었다. 일제시대 도지사 관사는 김일성 사저로 변경되었고, 연못까지 갖추어진 화려한 건물이었다.








북진하는 국군, 남하하는 피난민


평양의 시가전








1사단이 평양에 머물던 약간의 시간 동안 평양을 눈에 담게 된 심보라 소속 부대는 다시 북진 명령을 받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전투 중 심보라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죽었다 싶을 상황이 되었다. 적의 총알이 무릎을 관통했다. 중상이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야전에서 치료할 수 없는 중상이었기 때문에 즉각 C46 군수송기 편으로 대구 K2 동촌비행장으로 후송되었다. 대구 제1육군병원(현 경북대학병원)에 입원하여 15일간의 치료를 받은 후, 후속치료를 위해 부산으로 후송되었다. 전투에 다시 투입 될 상황을 기대할 수 없는 중상자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전장을 누비던 생사의 시간은 일단락된다.








1950. 10. 9. 학도병 당시


1951. 7. 13. 육군 제839부대에서 명예 제대를


앞두고 당시 군목이신 이응화 목사님과 같이










한국 교회에 대한 경험 : 부산 생활    




심보라는 후속치료를 위해 대구를 떠나 영도대교 바로 옆의 부산시청 청사에 자리잡은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8병동에 입원하였는데, 당시 치료를 전담해주시던 분들은 전남 의대 출신의 황인담 군의관과 춘천간호학교 출신 함정우 간호장교였다. 치료를 받고 있던 심보라는 1951년 10월 15일 839 소속부대로부터 명예제대를 명받게 된다.










1951년 상이용사 전역식


심보라의 명예제대증 앞면과 뒷면








‘명예제대’ 그 이름이 지금 같은 평화시에는 남다른 경력이 되어 자랑스럽다. 특히 갑자기 세계 선진국으로 올라선 우리나라의 위상 때문에 과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애국했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 보람스러운 이름이다. 그러나 심보라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 1951년 이 나라 중부 지역의 최전방에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청년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공산군을 맞아 이제 막 태어난 신생 대한민국이 사력을 다해 전쟁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국가의 모든 것은 전방의 전투에 쏟고 있었고, 후방인 부산에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상이군인들이 넘쳐 나던 때였다.


그 누구도 가진 것이 없어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산 것만 남지 그들에게 내일은 아무도 약속할 수 없었다. 고아 출신으로 부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제 치하 아버지의 순교 직후나 전쟁 초기에 맨 손으로 전장을 향해 달려 갈 때와 비교하면 겉보기는 멀쩡했으나 하룻밤을 자고 하루를 먹을 것이 없는 절박한 상황은 다름이 없었다.




명예제대 후, 심보라는 부산항 근처의 미군 부대 노무자로 어렵게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 하루 먹고 살 걱정은 일단 없게 되었다. 심보라는 우연히 그곳에서 근무하던 여직원의 타이핑 솜씨를 보게 되었다. 타자기 위를 뛰듯 날듯 눈으로 봐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타자기 위쪽에서는 영어로 된 문서가 쑥쑥 빠져 나오고 있었다. 뭐든지 배우고 싶었던 그로서는 배울 욕심이 솟구쳤다.


타이프 학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곧바로 학원을 찾아 갔다. 학원은 미군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부산 자갈치시장 부근 침례교회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문 타자를 배웠다. 성실히 노력한 결과 타자실력은 나날이 발전했고, 숙련된 영문 타이핑 실력 덕분에 당시 송도에 있던 CIC 미군 특수부대 타이피스트로 근무하게 된다. 학도병 출신이었으며 전투 부대의 부상병 출신이니 신원 조회도 무사히 통과를 했다. 부대 근무를 시작한 초기에는 부대 밖에서 하숙을 했지만 나중에는 부대 내에서 숙식하는 직원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혼자의 몸으로 직장을 갖게 되었고 부대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자 경제적 여유도 조금 생겼다. 미군 부대여서 근무 시간도 비교적 좋은 조건이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자 순교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이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바쁘게 지내 온 전장터의 모든 기억들 그리고 어릴 때의 가정과 아버지의 순교가 늘 마음에 떠올랐고 이런 추억들은 심보라의 신앙을 자꾸 깊게 만들었다. 전쟁 시기의 부산은 전국에서 피난온 교회의 지도자들이 풍전등화 위기 앞에 놓인 국가와 교회를 위해 모두가 각성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진심으로 뜨겁게 믿고 있었다.










1950년 전시의 부산시와 영도


영도 대교 입구에 육군5병원. 우측은 자갈치시장


전쟁 시기 50년대의 부산항,


오른쪽은 송도 지역






이 시기 심보라는 자연스럽게 부산지역 여러 곳의 피난민 교회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는 고려파 교회의 최고 수장이신 박윤선 목사님(1905-1988, 평양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이 계셨고, 상대측 세력에는 한경직 목사님(1902-2000, 미국 엠포리아 대학교 신학박사, 서울 영락교회 목사)이 중심에 계셨다. 겉보기는 별로 표시 나지 않아도 뭔가 피난을 온 교회들과 신앙의 지도자들도 두 갈래의 흐름을 보였다. 심보라는 1952년 8월에 최청구 전도사님을 모시고 부대 부근에 있던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송도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1년 6개월을 교회에 충성했다. 전시에 이만한 직장이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또한 미군 특별부대 소속이라는 이유로 활동하는 데도 자유로웠으며, 북진 전투병으로 부상당하여 명예 제대한 것도 자랑스러웠다.




1953년 5월, 전쟁이 시작된지 3년째가 되던 해 봄이 되자 전방은 아직까지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으나 큰 작전이나 희생을 당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며 곧 휴전이 된다는 기대감과 함께 고향인 구례나 전쟁 직전에 살던 여수를 위협할 수 있는 지리산 빨치산들도 거의 토벌되어 이제는 치안도 안전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두가 큰 희생을 치르고도 휴전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제부터 전쟁이 끝 난 뒤를 생각할 시점이었다. 부산에서의 모든 생활은 안정되었고 조만간 휴전이 성사가 될 분위기가 되자 궁금했던 고향을 가보고 싶었다.


부산에서의 3년의 생활 후, 심보라는 다시 여수로 돌아온다. 전쟁 전에는 상업학교 학생이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즈음 그는 애양원의 직원으로 여수에 돌아온다.




















4. 심보라의 신앙 생애 Ⅱ :


                       애양원 직원 생활








아버지의 신앙은 위대했으나 심보라의 신앙은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나 한 발 떨어진 뒤에서 평생 마음에 모시고 사는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한국교회사의 가장 중심 지역 중 한 곳에 머물게 하셨다. 그 곳에서 그는 남은 평생을 통해 이 나라에 요긴한 인물로 활동하는 기회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국교회사의 여러 내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생은 하나님의 더 넓은 인도의 세계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애양원과의 인연: 김철주 장로님의 권유    




부산의 미군 CIC 특수부대 근무 중 휴가를 받게 된 심보라는 잠시 여수를 방문하게 된다. 학도병으로 여수를 떠난 후 처음으로 김철주 장로님을 뵐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동안 수없이 생사를 넘기며 살아 온 이야기와 부산에서 송도교회를 개척하고 특수부대에 근무하는 상황까지 듣고 계시던 김 장로님은 그에게 애양원으로 와서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전쟁은 이미 교착상태가 되었고 휴전회담도 진행 중이었으며, 전쟁이 끝나면 미군들도 본국으로 복귀하게 되어 심보라가 송도의 미군 부대에 출근할 기회도 없어질 수 있었다. 미군 부대 중에서도 정보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에 근무를 했던 그는 휴전회담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나 국민들의 염원인 완전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휴전회담이 오래 갈 수 없다는 것과 미국이 협상의 상황에 대해 합리적 판단을 하는 체질임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심보라는 전쟁이 끝난 이후를 생각하여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1953년 5월에 여수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그는 신풍에 정착하게 된다. 애양원병원 의무과 근무로 그의 애양원 시절과 신풍과의 인연이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현실 인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애양원교회의 두 가지 모습    




처음 심보라가 애양원에 왔을 때 신풍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애양원교회 한 곳뿐이었다. 애양원교회는 손양원 목사님이라는 순교자로 인해 호남의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다.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위치하며, 1926년에 광주 주민들로부터 쫓겨나 이곳에 예배당이 이전되어 건립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이다. 애양원교회는 우리나라 의료 선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지역에서 건물이 신축된 것은 1926년이지만 그 연원은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광주나병원]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나병원 교회가 효시이기 때문이다. 신풍으로 이전한 한센병 환우들의 집단 거주지인 애양원에는 초창기 건물인 예배당을 비롯해서 몇몇 주거지와 함께 애양원 운영에 필요하여 건립한 근대 건축물들이 아직도 보존 되어 있다. 1953년에 신축되어 한성신학교로 사용되다가 현재 수양관으로 사용되는 토플하우스와 애양원병원 등이 있고 애양원 교회의 예배당은 석조 건물로서,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지만 당시 일본인에 의해 건축한 다른 건물 구조와는 다르게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졌다. 1935년 교회 예배당이 재건립되어 그 전체 구조가 유지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2002년 5월 31일에는 등록문화재 제32호로 승인되었고, 안타깝게도 교회예배당이 세상의 관리를 받고 있다. 애양원교회의 원래 이름은 신풍교회였고, 현재는 성산교회로 개명된 상태다.


심보라가 애양원으로 왔을 때 애양원교회 안에는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다룬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전기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손 목사님의 순교 후 애양원은 급격하게 옛 신앙을 잃었고, 손양원 목사님의 유가족인 정양순 사모님과 그 가족은 애양원교회를 운영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와 신앙 성향이 극단적으로 반대가 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오늘 손양원과 애양원의 이름은 너무 유명하고 많은 글과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지만 이런 특별한 상황은 전혀 드러나지 못하고 묻혀져 왔다.


애양원 직원들은 애양원교회가 아닌 애양원의 출입구 쪽에 인접한 직원 사무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직원들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를 통해 취직한 경우였으나 손 목사님의 가족은 원래 애양원 교인이었다. 그런데 손 목사님 사후 장로교 내에는 신사참배 처리 문제를 두고 형성된 두 신앙 노선이 극단적으로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애양원을 운영하는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 내 친일파 지도자들에 대해 관대했지만 반대로 정양순 사모님은 죄를 회개하는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사모님은 성경의 진리 문제에는 타협이 없고 단호했으나 선교부는 일단 어려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이 급하다는 입장이고 교회는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님의 장례식 때 남겨진 가족사진


애양원 선교부와 가족들은 각기 다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 교회의 두 신앙 노선            




심보라가 애양원에 오면서 곧바로 목격하게 되는 이 두 신앙의 충돌은 사실 애양원 내부의 특별한 원인에 근거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 때의 신사참배 문제로 치열한 투쟁이 전개 되고 있었으나 애양원은 손 목사님이 해방 후에 애양원으로 돌아오면서 바로 이런 문제가 다 해결 되고 오히려 은혜롭게 뜨겁게 단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였다.


일단 해방이 되자, 과거 일본 식민지 시절에 교회가 일본의 귀신을 섬겼던 문제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외부에 나타난 1차 문제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성경과 신앙 문제를 두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쉽게 넓게 믿는 식이 좋은가’ 아니면 ‘성경 그대로 살기 위해 철저하게 믿고 세상과 하나 되지 않는 것이 옳은가’라는 신앙의 성향 문제가 있었다.


일본 식민지시기에 성경 말씀대로 철저히 살고자 했던 이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들 중에도 고문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했던 분들도 많았으나 당시 죄를 지은 것은 신앙이 약했고 고난을 견딜 수 없어 그러했다며 철저히 회개를 했다. 그러나 원래 자유롭고 넓은 신앙을 가진 이들은 신사참배 문제 자체를 목숨을 걸거나 교회와 가정의 파탄을 각오하면서 싸워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과거 순교자들이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출옥 성도들의 신앙은 너무 지나치게 고집스런 것이며, 기독교의 사랑과 포용 정신에 의하면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비판을 하는 정도였다.


이 문제로 심하게 갈등이 일어난 곳은 특히 부산과 경남지방이었다. 그 외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별 문제가 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애양원은 손 목사님의 가족 때문에 두 세력의 극단적인 대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남 함안 출신의 손 목사님은 경남과 부산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지도했던 호주 선교부 신앙으로 믿었으며, 사모님 역시 호주 선교부가 세운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분이다. 손 목사님도 신앙에 관한 한 타협이 없었으나 그 사모님 역시 목사님에 비교할 때 한 치도 모자라지 않는 신앙의 투사였다.






애양원교회의 분립




미국 선교부의 입장은 아주 분명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다. 어려운 사람에게 밥 먹여 주고 아픈 이들을 치료해 주는 식의 애양원의 사회봉사가 기독교의 본질이며 교회가 실천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정양순 사모님은 먹고 입고 사는 문제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신앙이란 성경대로 살기 위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모든 것에 앞서 성경에 옳고 그른 문제를 먼저 따지고 살아야 신앙이라는 주장이었다.


미 선교부는 정 사모님을 향해 사랑이 없다고 비난을 했고, 정 사모님은 선교부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세상을 닮아가는 도덕주의 속화 신앙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일단 애양원이라는 기관과 그 내부에 있는 애양원교회는 선교부가 주인이었고, 운영 전권을 가진 보이열(Elmer Timothy Boyer) 선교사는 정양순 사모님을 따르는 사람은 애양원 환자이든 직원이든 가차 없이 내쫓아 버렸다.


첫 모범 사례가 신풍 마을과 애양원의 가장 중심 인물인 차종석 장로님을 쫓아낸 것이다. 차 장로님은 손 목사님의 최 측근으로 손 목사님의 신앙과 성향을 잘 알았으나 행동은 단호하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그 아내인 서귀덕 집사님이 강하게 정양순 사모님의 신앙입장을 쫓고 있었다. 보이열 선교사는 선교부 내에서도 건축이나 행정적인 면을 주로 맡았는데 매사를 추진할 때 단호하고 저돌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내인 서 집사가 손 목사님의 사모님을 따르는 처신을 두고 보이열 선교사는 남편에게 책임을 물어 쫓아냄으로 애양원 교인과 모든 직원들에게 엄하게 경고를 시작하였다.


심보라가 애양원에 근무하던 1953년부터 1960년까지 8년 동안 차 장로님은 총무과장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애양원이 광주 주민들에게 쫓겨 신풍으로 올 때부터 차종석의 부친은 마을 교회를 개척하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그 가정은 애양원이 이전할 때 마을의 최고 유지로서 애양원을 도왔다.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애양원 이전에 대한 마을의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려 놓았으며 애양원의 총무과장이 된 차종석은 실무적으로 직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손 목사님께 배운 그대로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자기의 부인으로 인해 총무과장 직을 사직하게 되었다.


애양원 교인들은 정양순 사모님의 신앙이 손 목사님처럼 타협 없이 목숨을 걸고 믿고 걸어 간 걸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은 미선교부의 보살핌을 떠나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우선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웠다. 일제 때 일본의 눈치를 보며 애양원 안에 머물러야 했던 것처럼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미선교부의 넓은 신앙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영향은 컸고 이로 인해 직원 가정 중에서도 사모님의 입장을 따르는 교인들이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보이열 선교사는 초기에 강경하게 누르지 않으면 손 목사님의 영향력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초강경 조처를 단호하게 취하여 애양원의 조직과 교인들을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선교부가 지향하는 바를 관철시키고 있었다. 정양순 사모님은 외로웠다. 속은 어떠하든 일단 겉으로는 모든 직원들과 애양원 식구들이 미국 남선교부를 따르고 있었다.


심보라는 부산에서 미군 CIC 부대에서 근무하며 미국인들의 성향과 장․단점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애양원에서 극단적으로 대치하는 이 문제의 원인이 지역적으로는 부산과 경남에서 먼저 발생했고 여전히 그 지역이 분쟁의 중심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미 선교부와 맞서 싸우던 이들을 당시 고려파라고 했는데, 오늘의 고신 교단이며 그 고려파라는 이름은 바로 심보라가 부산에서 근무하던 미군부대 부근에 있던 고려신학교에서 비롯되었다. 부산 송도에 있던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소수의 강경파 지도자들이 전국 교회를 상대로 대치를 했고, 심보라는 바로 그 송도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도왔다. 그래서 애양원과 신풍 지역은 처음 왔으나 그 당시 신앙의 노선 문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 눈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속일 수 없는 현실이며 사실이었다.




심보라가 애양원 직원으로 왔을 때 이미 정양순 사모님은 1952년부터 애양원교회가 마련해 준 사택에서 별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모두 모르는 척하고 있었으나 덮는다고 덮여 질 일이 아니었다. 애양원교회는 손 목사님 순교에 대한 예우로 애양원 바로 앞에 유가족을 위해 사택을 마련해 주었다. 그 사택을 드나드는 사람과 학생들 몇 명을 따로 모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정양순 사모님이 주도하시던 별도 예배는 이미 개척교회의 형태의 자리를 잡아갔으며, 언제라도 정식 예배당이 준비되면 마을 교회로 모습을 갖출 수준까지 성장해 나갔다.








1953년 손양원가족이 건축한 첫 예배당


애양원교회는 정양순 사모님의 개척교회가 애양원 바로 앞의 마을에 세워지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한 강경일변도로 살아 온 사모님은 1953년 실제로 애양원의 정문 바로 앞의 마을에 석조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 애양원에서 철저히 외면을 하였기 때문에 고려파 교회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 이 과정에서 사모님은 일제 치하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목숨을 다해 세웠다고 할 만한 석조 예배당이 초기에는 성광교회 이름으로 애양원의 입구 마을 한 가운데 들어서게 된다. 지금 여수공항의 입구 정면에 위치한 신풍교회의 예전 이름이다.


마을에 교회를 표시나게 세우게 되자 선교부도 서둘러 마을에 애양원이 직영하는 또 하나의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다. 애양원은 특수 시설이므로 일반인들을 위한 교회를 외부에 별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애양원의 전체 직원들과 그 가족을 위한 교회로 출발을 시켰다. 사모님의 신풍교회는 너무 입장이 선명하고 투쟁적이어서 모두가 다가가기를 어려워했다. 반면에 애양원에서 설립한 성암교회는 미국 선교부를 통해 오는 지원물자와 애양원이라는 거대 조직의 지원을 받아 쉬운 출발을 하는 듯했으나 손양원 목사님 유가족의 신앙 입장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늘 고통이었다.


정 사모님의 교회 개척에 맞서 애양원이 세운 교회의 이름은 성암교회였다. 그리고 1953년 4월 13일에 여수와 순천 지방에서 가장 실력 있는 분으로 첫 목회자를 모셨는데, 그 분은 손활인 전도사님으로서 부근 지역에서는 유망한 실력가였다. 그런데 그가 부임하자 사모님과 서귀덕 집사님은 적극적으로 손 전도사님을 설득하여 고려파로 돌아서게 만든다. 선교부는 놀랐다.


다음 목회자는 손활인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선교부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박창호 전도사였다. 역시 전임자와 비교할 수 있는 대단한 실력가였고 인품은 물론 신앙도 진실한 이었다. 이 분을 초빙한 실제 이유는 그가 애양원 핵심 직원인 차량부 김윤선의 동서였기 때문이다. 1954년 2월 3일, 박 전도사님이 성암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후임자인 박 전도사님도 곧이어 정양순 사모님과 서귀덕 집사님의 신앙을 동조하게 되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모님 교회를 위해 예배까지 인도했다.










애양원의 직원교회 시절의 성암교회


성암교회 목회자의 졸업식  






사모님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었고, 고려파에서 전도사님들을 초빙하였지만 제대로 계시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이 교회는 내용적으로 실제 출발을 했으나 외적으로는 출발을 정식으로 발표하기 힘든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 박창호 전도사님은 사모님이 고려파로 출발한다고 표방한 교회를 위해 ‘개척 예배를 인도한다’며 나섰다. 보이열 선교사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진노했다. 박 전도사님의 친척이 되는 직원을 불러 당장에 사직하든지 아니면 사태를 해결하라고 다그쳤다. 김윤선의 성격은 불같았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가족은 다시 성암교회로 불러 들였지만 박 전도사님은 성암교회를 떠나셨고 곧바로 고려파로 소속했다.


비록 해방은 되었으나 6.25를 막 겪은 당시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빈곤은 역사 이래 최악이었고 모든 생존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시절, 바른 신앙에 서기 위해 선교부와 맞선다는 것은 오늘 기준으로 말하면 순교 자세를 갖지 않고는 흉내도 낼 수가 없었다.






애양원 의무과 근무    




심보라는 순교자 아버지를 둔 특별한 인물이었다. 손 목사님 가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당연히 일반 모든 사람들과는 그 가정에 대한 애정과 이해와 동감이 달랐다. 그러나 김철주 장로님은 교계와 사회에 유력한 지도자였고 김 장로님은 이 문제를 두고 유보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심보라도 양측의 신앙 갈등 문제에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애양원 의무과 직원으로 업무에만 충실했다.


의무과에는 의무과장으로 강석원 군의관이 있었고, 심보라는 의무계장을 맡았으며, 윤후근은 병리기사였다. 애양원은 특수시설이어서 국방부가 군 차원에서 강석원 군의관을 파견해 주고 있었는데 그는 애양원에서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장로님의 위치가 되었다. 윤후근은 집사 직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래 순천 매산학교 출신의 학도병 전우였다. 당시 애양원의 직원 채용 원칙은 군제대가 필수 요건이었는데, 부상으로 명예 제대한 심보라는 김철주 장로님의 추천으로 일할 수 있었다.


애양원 의무과는 총 3명의 정식 직원이 있었지만 최대 1,80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해야했던 당시 상황에서 간호사들이 대거 필요했다. 간호 보조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환자 중에 50여명을 임시직원으로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나병은 합병증과 후유증이 극심하여 치료와 관리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많은 의료 인력이 필요했지만 일반 사회에도 의료 인력이 없던 시절이어서 정식 의료 직원들은 수술을 비롯하여 전문적이고 중요한 일을 맡고 웬만한 의료 조치는 간호보조를 맡은 임시직원이 자체적으로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심보라에게 의료 지식과 현장 실력을 심었다. 가정 상황으로 공부는 하지 못했으나 애양원에서 심보라는 너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애양원 의무과 직원 전체 사진 (1955년 5월) - 애양원의 요청으로 심보라가 제공한 자료


맨 앞줄 左에서 병리기사 윤후근 집사, 의무과장 장석원 의사,


원장 스미스 박사, 의무계장 심보라 집사 순
















애양원과 나병 (한센병)






현재 애양원은 정형외과, 피부과, 마취통증과, 내과 진료를 하고 있으나 원래 피부과가 전문이다. 애양원의 환우들이 겪고 있는 한센병은 나병이라고 하는 전염병이며 피부과로 분류한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A.C.H. 한센이 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그 한센병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나병은 원인균인 나균에 의하여 피부와 말초신경을 주로 침해하는 만성전염성 면역 질환이다. 나균은 항생제 투여를 통해 박멸이 가능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이라고 불리웠다.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는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그러나 현재 전세계 인구의 95%는 한센병에 자연저항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쉽게 걸리지 않으며, 치료법 개발로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고 격리가 필요 없는 질환이다.  
















인생의 새로운 항로 : 현미경과의 만남    




애양원 조직은 총 5개의 부서로 구성되었는데, 부서명은 총무계, 의무계, 서무계, 교도계, 재무계이다. 별도로 보육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원장은 선교사가 맡고 있고 최종 결정권은 확고하게 가졌지만 직원들의 일상 업무는 총무과장이 최고 책임자였다. 심보라의 애양원 근무 기간인 1953년부터 1960년 퇴직 때까지 총 8년의 시간 동안에는 양일만 장로님이 총무과장으로 재직했다. 보통 애양원을 아는 분들은 차종석 장로님을 평생의 총무과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애양원에 대해서는 손 목사님 생전의 내부 구성원이 아닌 외부 인물이었다.  


심보라는 애양원 의무과에 근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각종 의학 상식과 실력을 습득하게 되었다. 병원 근무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영어가 필요했다. 애양원은 선교사 의료진이 설립하고 상주하는 곳이니 더욱 그러했다. 부산에서 CIC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경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모르는 영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새로웠고 학습의욕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근무시간에 의료진과의 의사소통뿐 아니라 모든 관련 서류의 용어도 영어였다. 평소 인내심, 열정, 집중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일에 숙련도는 높아져갔다. 폐쇄된 시설에 보통 1천 5백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은 단기간에 의료 관련 지식과 실력을 더할 수 없이 향상시켜 주었다.  


원칙에 충실했던 서양 의료진은 업무 처리에서 대충 넘어가는 것은 없었다. 심보라의 성격 역시 그러했다. 각종 검사를 실시하고, 그 검사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현미경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았다. 나병은 원래 치료약이 없고 한 번 발병하면 온 몸이 흉하게 변하여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무서워했다. 그런데 심보라가 애양원에 부임하기 직전인 1951년 영국에서 개발된 DDS라는 나병치료제가 애양원에 제공된 적이 있었는데, 30명 정도가 임상실험을 한 결과 놀라운 효력이 나타났다. 과연 기적의 약이 발명되어 곧 이 세상에 나병 환자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초기에는 약의 독성이 강하고 부작용도 있어 요즘의 항암제와 같았고 환자 중에는 투약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마다 이 신약을 신청해서 치료에 나선 결과 나병의 완치는 기정사실화 되어갔고, 독성이 없는 약이 개발되고 있었다. 1956년 11월 28일에는 애양원에 있는 치료 대상 1,172명 전체를 위한 DDS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치료 과정에서 투약 이후 치료과정과 결과를 끊임없이 현미경으로 관찰을 해야했다. 환우들 중 완치로 판정된 이들은 애양원 밖으로 나가 자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나병을 검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결핵균을 검사하는 것과 방법이 같다. 현미경은 나병 치료의 필수 장비였다. 결핵환자는 가래를 받아 균을 배양하고 현미경으로 검사를 하며, 나병환자는 피부를 긁어 검사를 하게 된다. 이 때, 현미경은 1천 배 배율을 사용하게 된다. 미제나 독일제 현미경은 몇 시간을 계속 사용해도 눈이 아프지 않았지만 일제도 성능은 좋았으나 어지러워서 1시간 이상을 계속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현미경 검사 결과는 환자에게 생사를 결정하는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환자에게 오는 고통과 부작용은 생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쳐서 죽은 것보다 못한 비참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연히 현미경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심보라는 자기 적성에 맞는 정밀기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심보라 근무 당시 현미경


당시 병리 기구     - 애양원 박물관 소장






애양원병원은 미국 선교부가 운영하는 미국 병원이었다. 오늘과 달리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료진도 미국에서 온 정규 의사들이니 당시로는 선진 의료 기술과 최첨단의 기기를 접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장비와 실력 그리고 의약품은 서울 소재 국내 정상급 대학병원보다 더 나았다.




불타는 향학열 - 미국 유학    




심보라는 생활이 안정되고 병원 일에 재미를 붙였다. 그가 맡은 일은 단순하게 반복되는 병원 실무였지만 병원의 특성상 영어는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엄청난 분량의 참고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하는 일은 간단한 듯 보였지만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면 두꺼운 전공서적을 뒤져가며 원하는 내용을 찾고 적용해가는 전문가다운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미국 의료진들끼리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를 할 때는 공부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진 그의 마음이 한층 더 자극받았다. 직업 현장이 그의 향학열에 불을 지핀 셈이다.


미국인 의사로부터 업무 외에 듣는 미국의 여러 이야기는 한 마디로 꿈의 세계였다. 심보라는 의무과 근무를 하면서 미래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한 미국 유학이 필요하다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미선교부가 운영하는 병원이기 때문에 의료진뿐 아니라 다양한 미국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들을 통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와 관련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과 야간 상업학교 1년의 학력이 전부인 그였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미국 유학의 꿈을 갖게 되자 공부를 할 병원이나 학교 혹은 주변여건에 대한 정보를 얻는 등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여러 방면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미국의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1956년 드디어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테일러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에 대한 타진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은 돈에 대해서는 계산이 확실한 나라였다. 형편이 어려운 심보라에게 장학금이나 여러 다른 방법의 지원도 있을 법한데, 학교 측에서는 학비와 유학 경비를 자체 해결하는 조건으로 입학 안내를 하였다.


입학이 타진 될 때는 뛸 듯이 기뻤으나 경비 문제가 나오자 너무 실망이 되었다. 미국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꿈이 펼쳐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으나 학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크게 실망을 하였다. 하나님 앞에 길을 열어 달라고 매달렸다.










1956년 테일러 대학의 입학 안내






가정교회 출발 : 결혼    




미국 유학 좌절로 실의에 빠져 있던 이 시기에 심보라는 결혼을 하게 된다. 일본에게 부모님을 잃고 모두가 고아 신세였던 형제들은 학교 공부도 초등학교가 전부였고 뿔뿔이 흩어져 가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여서 결혼을 꿈꾸기도 쉽지 않았다. 결혼을 통해 돌아가신 부모님을 이어 신앙의 가정을 잇는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 기쁨이 클수록 돌아가신 부모님과 흩어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제들 때문에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애양원에 근무하던 1956년(25세) 11월 3일, 심보라는 광양읍교회에 계시던 손문준 목사님의 주례로 오정희와 결혼식을 올린다. 손문준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가장 먼저 결혼소식을 전한 곳은 아버지 역할을 해 주셨던 김철주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1954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셔서 이미 중앙 정치계에서 거물이 되어 계셨다. 국회의원 재직 시기에 국회의 보건사회위원장도 역임을 했다. 여러 중대 업무로 일을 쉬거나 중단하는 수가 없는 분이었지만 바쁜 중에도 심보라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한 걸음에 달려와 부모 역할을 맡아 주셨다.












심보라의 결혼식 사진


(광양읍교회, 주례 손문준 목사님, 주례 좌 김철주의원)


결혼식 사진 (심보라, 오정희)








제대로 배우고 싶은 열정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결혼 생활을 통해 안정된 가정 속에서 별일 없이 일상 업무에 몰두하던 심보라에게 재 도전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애양원 병원에는 일본 올림푸스 제품과 미국 제품의 현미경을 각각 한 대씩 보유하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 사용하여 고장이 나면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져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심보라는 의무과장 의사에게 현미경 2대를 새로 구입하자는 건의를 하게 되었고, 일본의 올림푸스 현미경을 구입하게 되었다. 비록 작업하는 과정에서 눈에 피로를 느끼게 해주었지만 나름 해상도도 좋고 미제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저렴한 올림푸스 현미경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1대는 서울에서 구입하고 다른 1대는 직접 일본에 주문을 넣어 구입했다. 일본에서 직접 배송된 제품이 도착했는데, 물품 박스에는 현미경 설명서뿐 아니라 ‘가스트로 카메라(gastro camera)'로 불리는 위내시경 관련 제품 설명서가 함께 왔다. 설명서를 접한 병원 내 의사와 의료진들은 이 첨단 신규 장비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기술력, 특히 의료 기기 중에서도 광학 장비가 세계 최첨단의 위치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 부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시작하면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평소의 학습자세와 미국 유학을 눈앞에서 포기했던 아쉬움이 그의 첨단기기에 대한 학습욕구로 끓어올랐다. 일본 올림푸스 회사의 사장에게 위내시경 기기에 대해 직접 배울 수 있는 회사의 기술연수 기회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정신없는 행동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보통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시도였다. 무모하게 시작했는데 훗날 정황을 알고 보니 더더욱 무모한 행동이었다.






신앙의 고난 : 보이열 선교사와의 갈등    




미선교부의 수고와 한국 교회를 향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선교부의 공로가 아무리 크다 해도 생활 속에 여러 아쉬운 면은 있는 법이다. 심보라는 어려서부터 선교사들을 접하였고 부모를 통해 그들의 고마운 면도 아는 이유로 누구보다도 선교사들의 세계를 폭넓게 아는 인물이다. 그러나 애양원의 미장로교 선교부의 운영을 두고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앙 갈등 때문에 차종석 장로님을 퇴직시킨 것 외에도 여러 면에서 갈등 요인은 많았다.


보이열 선교사는 애양원 원장 부임 당시 전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였다. 의사 소통이 되면 그래도 다독일 수 있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애양원의 최고 책임자가 의사 소통이 되지 않고 그 성격 또한 평소 뚝심있게 밀고 나가기 때문에 ‘곰’이라는 별칭을 갖는 정도였다. 당연히 의사소통은 없고 강한 성격으로 행정의 효율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그의 운영방식은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손양원 목사님 후임으로 오신 서현식 목사님이 보이열 선교사를 비롯해 애양원 선교부와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그 역시 보이열 선교사의 운영방식에 대한 많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보이열 원장과 남장로회 선교부에 대한 애양원 직원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갔다. 그 결과 외형적 성과 부분에 대해서 애양원 운영의 효과가 어느 정도 나타났지만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노골적으로 한국 사람을 무시하는 보이열 원장의 태도는 원장과 직원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보이열 원장의 부당한 행동과 지시를 보다 못한 심보라는 원장을 상대로 ‘미국과 한국의 하나님이 다르냐’고 언성을 높여 크게 맞섰다. 그는 미국 특수부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미국인들의 기본 체질도 알고 선교사들의 세계도 잘 알기 때문에 애양원 선교부의 정책이나 선교사의 성향을 파악하는데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보이열 원장 체제하의 애양원 선교부의 운영은 투자를 최소화하고 효과를 최대화하려는 면이 너무 지나쳤다. 애양원 직원들의 월급제도는 가족 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지 않아서 심보라처럼 가족구성원 수가 작은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식구를 많이 둔 직원들에게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장과의 갈등이 표출된 이유로 결국 심보라가 속한 의무과 정식직원의 자리는 훗날 하루 아침에 잃고 퇴직자가 된다. 보이열 원장과의 갈등으로 퇴직이라는 아픔을 겪었지만 심보라에게 애양원 근무 시절은 기도와 찬송의 시간으로 신앙의 깊이를 더해나가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심보라에게 애양원 근무시절은 보이열 원장과의 갈등처럼 힘든 시간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애양원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루 해가 끝나거나 주일 오후가 되면 종종 애양원 앞 바닷가 거북바위에 올라 혼자서 영어나 일어로 크게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미쳤다는 말도 들렸으나 순교하신 아버님만큼 신앙을 갖지는 못해도 식민지 시절과 전쟁에서 그리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만 생각해도 감사했습니다.”


-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일본 유학길이 열리다




1956년에 시도했던 미국 유학이 좌절된 후 그에게는 일본 올림푸스사의 최첨단 위내시경만이 그 마음을 다 사로잡고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꿈이 이번에는 일반 대학교가 아니라 현장 기술을 접할 수 있는 학습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고 식민지 시절에 배운 일본어 때문에 언어 문제는 크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일본에 대한 그의 증오는 컸지만 그들의 발전된 과학 기술은 배우고 싶었다. 미국 의료진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의 올림푸스 광학공업사가 광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왕 배우려면 최첨단의 기술을 습득하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국내 의료환경에 필요한 것은 현미경 분야지만 위내시경의 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어서 그 분야의 전문교육을 받기 원했다. 현미경의 수리조차 하지 못하던 국내 기초과학 분야를 고려하면 심보라의 선택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확신할 수 없는 도전이었지만 애양원의 시절 자신이 느낀 것을 믿고 도전을 했다.


그러나 올림푸스사에서는 한국에는 기계 뿐 아니라 애프터 서비스 체계조차 전혀 없으며, 위내시경은 첨단 개발 제품이어서 단 한 번도 외국인에게 기술 전수를 허락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올림푸스사는 일반인들에게는 사진기로만 알려져 있으나 의료계에서는 현미경과 위내시경 분야 등 첨단장비 쪽으로 유명한 곳이다.


1958년부터 심보라는 위내시경 기술을 배울 기회를 갖고 싶다는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지만 일본에서는 약간의 반응도 없었다.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의 기술격차는 너무 컸고 일본은 한국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해방 후에 전후 처리가 아직 합의되지 못한 상황이어서 일반 교류는 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오늘과 달리 교류가 전혀 없던 시절에 일본 기업의 초청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1958년부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본의 올림푸스사에 편지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였다. 간절한 기도가 끊어지지 않은 끝에 3년이 지난 1960년 12월에 올림푸스사로부터 교육을 허가한다는 초청장이 도착했다. 심보라의 집념에 감동을 받은 올림푸스사 나카노 사장과 임원진들이 정식으로 회의를 했고 그 결과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이전에는 미국 유학을 준비했고 이제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면서 주변에는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도저히 말도 되지 않을 소리만 하고 다닌다 해서 떠벌이라는 조롱도 있었다. 그러나 순교자 가정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손길은 인간으로서 절대 안 된다는 길을 열고 계셨다.




드디어 희망찬 미래가 손 끝에 잡혔다. 심보라는 일본 유학에 필요한 여권을 만들기 위해 1960년 12월 말부터는 서울을 오가며 외무부에서 여권수속과 출국을 준비하였다. 당시 여권 업무는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은 4.19혁명으로 들어선 민주당이었고 정권 수뇌부에는 많은 해외파 인물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시대 분위기가 느슨해진 탓에 비교적 일은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국내 최초의 혁명이다. 정부를 수립한 제1공화국의 자유당은 이승만을 4대 대통령에 당선 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 시켜 장기 집권을 도모했다.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이었는데 1960년 1월말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 판정을 받아 하와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던 중 2월 25일 갑자기 사망하자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어 문제가 없었으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은 건재했고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활동을 하였다. 부정선거를 직접 이유로 일어난 혁명이 성공하자 이기붕 일가족은 동반 자살을 했고, 12년을 대통령직에 있었던 이승만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5개월을 기다린 끝에 1961년 5월 11일에 드디어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이어 곧 일본 비자를 받아 출국을 위한 절차를 마치고, 잠시 고향을 들르기 위해 서울을 떠나 내려오고 있었다. 이 날은 1961년 5월 16일이었다. 기차는 전주를 지나 남원을 향하고 있었다. 이 곳을 지날 때, 그는 6.25 참전의 첫 작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50년 7월 22일 새벽 순천에서 기차편으로 남원으로 가서 그 날 아침 처음 무기를 지급받았고, 다음 날인 23일에는 전주를 향해 올라가면서 관촌에서 인민군을 만났다. 그 곳에서 하동까지 후퇴하여 7월 25일에 화개장터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지금 기차는 그 때와는 반대로 서울에서 출발하고 전주를 거쳐 관촌을 지났고, 막 남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처참한 일제 시기와 전쟁의 사지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그 은혜로 연명해 왔으며, 그 당시는 어느 순간에 어느 골짝에서 죽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어서 이름 석 자 남는 것만 해도 다행이던 시기였다. 이제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출국을 위해 여권을 받아든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 금의환향하는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학도병으로 첫 총을 지급 받아 심보라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남원역 기차 안에서 하늘이 무너질 소식을 듣는다. “오늘 새벽 5.16혁명이 일어났고, 국가 전체가 장악되었으며 모든 해외여행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발급 받은 여권도 무효라는 것이다. 4.19에 이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재건을 내세우며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남원역에서 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뉴스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여수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신문이나 여러 매스컴을 통해 또 시내의 민심에서조차 천지가 바뀐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 심보라에게는 5.16 군사혁명으로 세상이 바뀐 것보다 자기의 여권이 무효화 되고 해외여행이 전면 금지된 조처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재발급에 대해 백방으로 물어 봐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군인들이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군인들의 생명은 비밀엄수다. 그들은 6.25 전쟁을 겪은 이들이고 남북의 대치 국면을 전쟁 당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누구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3년동안 끝없이 문을 두드려 얻은 일본의 연수 기회였음에도 국가의 모든 상황은 어떻게 변동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상황에서 애간장이 탔다. 모든 돌아가는 정황은 일본 연수 일정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나타났다. 매일 발표되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안내와 소식은 천지가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매일 새로운 조처가 발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심보라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발표는 없었다.










5·16 군사혁명 (1961년 5월 16일)




자유당의 장기 독재가 끝나고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이 번에는 사회 각계각층의 데모와 무분별한 주장을 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 박정희 김종필 등 군인들은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중단 시키고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발전 시킨다는 명분으로 혁명을 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고 사회 전반을 바꾸었고 1963년 12월 17일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고 박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실질적으로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을 지속한다.












1945년에 8.15 해방처럼, 1948년에 여순반란사건의 불바다처럼, 1950년의 6.25전쟁의 발발처럼, 그리고 가깝게는 바로 어제 같았던 1960년에 4.19혁명이 터지면서 그 때마다 천지는 완전히 뒤집어졌었다. 일본 유학이라는 꿈을 통해 부모님의 회한은 물론 가정의 파탄으로 인한 자신의 힘겨운 인생의 한을 한꺼번에 다 풀 수 있는 여권과 출국 수속을 모두 끝낸 바로 이 날에! 가난하고 힘없는 약소국에는 변란이 끝이 없는 법이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과 천지를 다 얻은 듯한 이 상황이 이렇게 바뀌다니!


유학이 희귀하던 시절, 최첨단 의료기기인 위내시경만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러 가는 유학길은 심보라에게 미래 전부를 약속하는 듯했으나 바로 이 순간에 한국 정치사의 대격변기가 지나가며 이 청년의 앞길을 한치도 내다볼 수 없게 하였다. 절망 속에서도 또 다시 예전에 기도하고 해결해 나온 것처럼 그는 기도했다. 원래 신앙이 있는 청년이며 독실한 지도자인 김철주 장로님에게 지도를 받았고, 이미 수없는 생사와 고난을 겪은 그였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다.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시도록 그리고 열어 주시면 바르고 복되게 잘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간절히 하면서 기도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일본 식민 상태에서 힘들게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신앙 때문에 부모를 다 잃고 가족도 없어졌으며,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의 6.25에는 전선을 누볐다. 나환자를 치료하는 애양원에서 근무하다 일본 유학이라는 대망의 꿈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4.19혁명과 5.16혁명이 잇따라 터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평생에 한 번을 겪기 어려운 천지진동을 정신없이 거쳐온 심보라에게 닥친 이 순간의 위기는 그로서는 너무 절망적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2공화국이 사회전반을 너무 풀어놓아 위험스럽게 만들었다 하여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재검토했다. 특히 반공을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관련된 혐의도 없어야 했다. 그는 먼저 일본에 편지를 보냈다. 다행히 한국의 상황을 안다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국내에서 여권과 출국 수속을 새로 밟아야 했다.


지금은 법과 행정을 비롯한 사회 모든 제도가 선진화되고 안정화가 되어 이런 일이 벌어져도 곧 수습 대책이 나오고 불이익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회 상식이 있어 그야말로 일시적 불편을 겪는 것으로 그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무법천지였다. 당장 손에 쥔 것만 믿을 수 있고, 다음 순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때였다. 권리나 법적 절차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일제로부터 지난날 살아온 짧지 않은 인생을 통해 그가 겪은 모든 국가의 조처로서 법과 제도는 하나의 선전에 불구했고 실제로 적용되는 법과 제도와 달랐다. 일제시대 전부가 그러했고 자신의 초등학교에서의 차별대우나 동생들의 입학 거부가 그러했다.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불러서 고문하고 가둬두고 다시 풀었다 불러들인 것도 그러했고, 해방 후의 혼란이나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의 모든 과정이 다 그러했다.




그는 갖은 고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29세 청년의 거침없는 질주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교만하지 않도록, 평생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만드려고, 부모님의 순교와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임을 잊을 수 없도록 만들고 계셨다. 수없이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드디어 재수속 과정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다시 여권을 발급받고 10월 6일에는 일본 비자를 받는 등 해외출국 절차를 모두 마쳤다. 하나님께서는 앞 날에 큰 인도를 주시려고 쉽게 인도할 수 있는 길도 일부로 어렵게 만들고 계셨다.










당시 여권                                  일본국 비자








5. 심보라의 신앙 생애 Ⅲ :


                       현미경 전문가의 여생








한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구축한다는 것은 많은 요소들이 모여져야 가능하다. 아무리 우수해도 다른 우수 인력들이 집합되면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혼자 개척한 분야라도 자기의 능력과 체질이 맞지 않으면 허무해진다. 심보라에게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모든 조건을 다 맞추셨다. 1962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초과학 분야의 현미경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오직 심보라 이름 하나만 나온다.


요즘과 달리 신문사도 몇 되지 않고 지면도 몇 페이지 되지 않던 시절부터 심보라는 주요 언론사의 취재 대상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울의대 등전국의 의대와 기초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이 나라 석학들과 주요 연구원에게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동안 이 나라 최고이며 유일의 현미경 의사였다.


일본 기술 유학




4년의 노력 끝에 1961년 12월 5일, 그는 부산에서 일본으로 출발한다. 일본 올림푸스 광학공업사 연수 기회는 많은 것을 변화시켜 주었다.










올림푸스 광학연구소 (일본 소재)




올림푸스는 일본의 광학 기업으로 세계 디지털 카메라 1위 업체이자 최초로 현미경을 제작한 곳이다. 1919년 설립되었으며,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R&D를 통해 다양한 광학 제품을 생산하였다. 1921년 처음 올림푸스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935년 세계 최고의 카메라 렌즈를 생산하고자 올림푸스 광학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1950년 세계 최초로 위 내시경 카메라를 개발함으로써 광학뿐 아니라 의료기기와 의료보건 장비에도 진출하게 된다. 위 내시경 장비는 전 세계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미경의 점유율도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엔 유전자 분석장치를 개발하는 등 게놈 관련 사업을 미래 주력 사업으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compact SLR카메라, 마이크로 카세트 레코더 등을 개발하게 된다.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 혈액 분석기, 고성능 현미경 시스템, 디지털 카메라, 초음속 내시경, AIDS 검사시스템 등의 혁신적인 반도체제품을 개발하였다.


현재 올림푸스는 동아시아 외 전세계를 미주, 유럽, 남태평양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있으며 다시 각각 영상시스템, 의료, 라이프사이언스, 산업시스템의 4개 사업부문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연수의 승인 자체와 그 과정은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일단 교육을 허가한 이상 그들은 제대로 가르쳤다. 그의 기술연수 기회는 나카노 사장과 최고위층 임원진 그리고 히로사와 과장을 포함한 관련 기술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의 심사숙고 끝에 허락하게 되었고, 사장의 최종 결정에 의하여 초청되었다. 광학 분야에서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하고 수많은 특허권을 가진 연구소에서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한국인을 초청해서 연구소 내부에 근무하게 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믿고 출발한 이상 그들은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했다.


심보라는 이런 고마운 분위기와 큰 기대, 그리고 그들의 어려운 결정에도 보답을 해야 했고 또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저력도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심보라의 마음 속에는 어떤 경우라도 잊을 수 없는 부모님과 가족과 신앙의 아픈 과거가 있었다. 심보라는 눈을 번뜩이며 마음을 다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고 담아내기 시작했다. 저돌적으로 질문하며 관련 모든 분야를 살폈다. 주변에서 놀랄 정도로 발전이 빨랐다. 먼저 편지에서 약속한 대로 위내시경 기술을 배웠다. 조립에서부터 유지, 관리, 수리에 이르기까지 손에 완전히 익혔다. 올림푸스사 연구소는 위내시경을 개발했고 그들만의 기술로 많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 제작소에서 위내시경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다. 1962년 3월 1일에 올림푸스가 인정하는 수료증을 받게 되었다.










위내시경 인정증


광학현미경 인정증






예로부터 일본의 기술 전수는 사무라이 정신을 생각할 만큼 엄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첨단 정밀기기 분야였으므로 실무 뿐 아니라 정신적인 흐름도 대단했다. 올림푸스 사는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켰다. 배우고 익히고 또 협력을 해야 할 곳들을 접하도록 해주었다. 동경의대의 국립암연구소를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의 관련 세미나나 협력연구가 가능한 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위내시경 개발연구는 독일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독일에서 개발된 위 내시경은 목을 통해 직선의 관을 넣고 내부를 관찰하는 잠망경과 같았다. 이것은 굵고 직선의 형태이어서 사람의 목이 젖혀져야 투입이 가능했으며 그 고통과 상처가 컸다. 반면에 일본의 올림푸스사는 목을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휘어지는 관을 개발하였고 칼라 촬영을 실용화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어 일반 위내시경은 물론 대규모 회사나 단체를 상대로 집단 검진이 가능한 내시경도 개발했다.


집단 내시경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3천 명의 직원이 소속된 한 회사에 내시경을 10대 차량에 싣고 가서 현장에서 검진을 실시했다. 일본에서 이미 대중화가 된 대규모 외부 출장에도 계속 참가하여 실무를 손에 완전히 익혔다. 심보라는 실제적 능력을 갖춘 숙련된 기술자가 된 것이다.






약속되는 밝은 미래    




심보라의 유학 소식은 올림푸스사가 발행하는 소식지 3월호에 크게 보도되었으며, 일본의 의료계에 의존해온 한국의 의료계는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일 간의 의학계 교류는 국가간 식민지와 해방 상황에 관련 없이 밀접했다. 일본은 아득히 앞서 있었고 우리는 무조건 배우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의료계는 일본 매스컴의 보도자료를 통해 전해들은 심보라의 위내시경 전문가 훈련과정을 국내에 전하고 있었다.


1962년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신문’을 기관지로 발행하고 있었는데, 심보라의 연수과정이 보도되었다. 이 때 기록을 보면 일본은 위내시경 장비가 전국적으로 대략 1만대 정도가 보급되어 전국민이 그 혜택을 누리는 상황인데 한국에는 1대의 위내시경도 없다는 탄식을 하고 있었다.








차량으로 이동하며 단체 현장 검진(1961년)


가스트로카메라(위내벽촬영) 제작부


스스기 기사와 함께 1961년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올림푸스 유학을 추진하던 당시 심보라는 그냥 세계 첨단의 의료 기기라는 말에 이끌려 도전을 했으나 막상 일본에 와서 듣고 본 세계는 너무 달랐다. 양국의 수준 차이에도 놀랐고, 일본의 기술력과 그들의 저력에도 압도가 되었으며, 기술 하나에 쏟는 최선의 노력에도 말문이 막혔다. 이 모든 여건 때문에 그는 생사를 걸고 배움에 주력했다.




위내시경은 그 당시 최첨단 의료기기였고, 기기 개발과 임상에 적용하는 문제를 두고는 세계적 수준의 동경대 의대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동경의대에는 일본국립암연구소가 있었는데, 심보라는 소장 다사가 박사와도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올림푸스사가 위내시경을 개발했지만 그 실용 과정에서 암진단에 획기적인 지평을 연 것은 동경의대의 국립암연구소의 역할이 컸다.








동경대 의대의 암 연구소 수련시절(1961년)


동경대 의과대학 대학병원 일본국립암연구소


소장 다사가 박사와 함께 (1961년)




심보라는 세계 최고의 회사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동경의대와 올림푸스사의 협력 연구에 실무진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활동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발전 속도에 놀란 연구진은 연구와 발표에 별도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불과 몇 달이라는 기간안에 세계적 석학들과 최고의 기술진들 앞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배우기만 하고 단순 기술만 익히는 기사가 아니라 연구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단기간에 연구소가 주목할만한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발전의 속도도 매우 빨랐고 그에 따라 실력이 쌓였다. 철저한 그들보다 더 철저했고, 집요한 그들보다 더 집요했다. 미국의 의료진과 함께 했던 오랜 세월이 주는 연륜과 CIC 특수부대 근무 시절에 익힌 영어 실력, 그리고 일제 때 학교를 다닌 이유로 어느 정도 갖추어진 일본어 구사능력으로 그에게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주변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빠른 학습속도는 한국의 위내시경 활용과 연구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일본 연구 동료들은 한국의 한 청년의 성장과정을 대견하게 본 정도였으나 그 청년을 통해 다음 반 세기에는 기술면에서 일본을 앞지를 상황이 오리라고는 심보라 본인을 포함해서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신문 (1962. 3. 12.)






향학열이 맺은 한일 우의


   - 3월말 귀국하는 국내 최초의 기술자 (일본지사발-2.28.)








일본의 광학기계, 현미경, 사진기의 탁월한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이외에 새로운 분야로 등장되는 것에는 ‘깨스트로 카메라’가 있다. 이 카메라는 인체 내의 위벽, 십이지장, 소장, 대장 등의 소화기계통의 촬영과 진단에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국제적으로는 위암 검진에 독특한 효과와 권위를 보이는 것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현재 한국에는 이 카메라가 한 대도 없는데 한 한국인 청년이 이 카메라의 촬영과 애프터 서비스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수년간 끊임없는 교섭 끝에 그 소망을 성취하여, 현재 올림푸스 광학공업에서 동사의 이례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 화제의 주인공은 심보라군(30세, 전남 여수 출신)으로서 심군은 여수나병원에 근무하던 중 ‘깨스트로 카메라’의 이론과 실제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올림푸스 광학공업(사장 中野撤夫)과 교섭, 성공을 보아 명년 12월 도일케 된 것이다.


3월 상순에 귀국할 예정인 심군은 현재 깨스트로 부문을 끝마치고 현미경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동 올림푸스사 깨스트로 과장 廣澤씨와 수출 과장 下山씨가 밝히는 심군과의 경위는 ‘심군의 열정과 의욕에 회사측이 굴복한 셈이다. 사장 이하 중역들의 특별한 조치’라 한다.


한일양국의 친선과 우의증진에도 이바지하고 있는 심군이 귀국하게 되면 그는 한국최초의 ‘깨스트로 카메라’의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올림푸스 광학공업은 일본 유수의 광학기계 메카로서 깨스트로 카메라의 세계 유일의 제작사이며, 일본 및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등 각국의 특허를 가지고 있다. 깨스트로 카메라는 1950년 동경대학 분원 林田외과와 동사 기술진의 공동연구로 제작된 후 동경대 田扳내과 학자들이 개량 현재의 실용화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임상의학과 예비의학의 진보향상에 많은 공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의사신문 (1962. 4. 29.)






위내 어디든지 촬영


- 위암집단검진에도 성공 일본서 발명한 ‘깨스트로 카메라’








위내에 카메라를 넣어서 직접 위내부를 촬영하는 장비가 일본에서 발명되어 미․영․불․독 등 제국에 특허를 얻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처음 이 기계의 제작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온 심보라 씨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도 소개하게 되었다. (본보 3월 12일자)




... 약 65센치 가량 되는 긴 비닐관 끝에 카메라 장치가 달려 있어 밖에서 조정하면 마음대로 위내에 어떤 부분이든지 촬영할 수 있으며 칼라필름으로 연속 32매까지 찍을 수 있다... 카메라 끝에는 조명 장치가 있어 1mm의 문제도 들추어 낼 수 있으며 촬영에 있어서는 표준렌즈로 20-100mm의 거리, 단초점 렌즈로 거의 밀착이나 다름없는 2-3mm까지 순간발광의 노출만으로 촬영되며 촬영범위는 표준렌즈의 화각 80도로 적정거리 40mm의 경우 약 70mm의 광범위한 영사가 된다.


이 카메라의 연구가 진행된 것은 이미 오랜 옛날인 1898년 '핀폴 카메라'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었다. 임상에 쓰이게 된 것은 1950년 동경의대의 宇治씨와 올림푸스 광학공업사의 杉浦 深海 씨 등 3인의 공동연구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며 최근에는 더욱 발전하게 되어 외형적으로 작은 카메라 장치가 완성되었다.




...  이 카메라의 임상적 응용은 일본서는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1만여 대 가까운 기계가 보급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단 1대도 비치한 병원이 없으며 심씨가 연구하고 온 것이 기술습득의 첫 케이스에 속한다.




... 동경 의대에서 위암의 조기진단에 사용되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미국에 있는 NIH(National Institute of Health)로부터 암연구보조비로 수만불의 원조까지 받았다. 여기에 심보라씨와 한국에서 위경을 제일 먼저 시작한 김인국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외국에서는 위카메라가 발명되어 실용되고 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수입이 안 되었다. 이 기계는 위경의 결점을 보충했는데 직접 관찰을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천연색으로 선명하게 촬영이 된다니 기대가 크다. 특히 일본을 여행중이신 고광도 박사께서 이 카메라의 기술을 습득하시고 오신다니 반가운 일이다. - 김인국(1945년 서울의대 졸업, 1962년 서울의대 교수, 1971년 소화기병학회장)
















순교자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    




세계적인 첨단 기술을 손에 익힌 심보라는 그냥 귀국을 해야 할 상황인데도 그의 눈은 처음 올림푸스에 들어갈 때부터 저절로 현미경으로 가고 있었다. 한국에는 현미경 수리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 당시로서는 고가의 최첨단 기계인 현미경이 고장 나면 창고에 그냥 쌓여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현미경의 절반은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어버린다. 그 당시 한국에 한 대도 없는 위내시경이 만약 도입된다면 자신의 앞날이 열리게 되지만 일본의 경험에 의해 한국 현실을 비추어 보면 몇 명의 부유한 사람의 임상검사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현미경은 모든 병원에서 모든 환자를 상대로 사용되는 필수 장비이며 더 나아가 국가 기초과학의 토대였다. 만일 올림푸스에 온 자기가 일본에서 현미경 수리 기술까지 습득하게 되면 분명 국가적으로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현미경은 마치 망원경과 비슷한 수준으로 쉽고 간단해 보일 수 있지만 일본 올림푸스사조차도 본사에 5명의 기술자만 있고 전국의 지사 5곳에는 기초 기술만 가진 기사만 있을 정도로 현미경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정밀기기였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도 현미경 개발 영역에는 일반 직원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현미경을 다루어온 심보라의 호기심과 배우고 싶은 욕구는 잠재울 수 없었다. 호랑이 굴 안에까지 들어와서 위내시경이라는 최첨단 기기 기술을 배웠는데, 현미경에 대한 도전의식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심보라는 자신의 교육을 맡은 담당 과장에게 현미경 기술까지 배우겠다고 정식으로 요청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담당과장은 단번에 불가능하다는 표정을 짓고 만류를 했다. 그래도 또 부탁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요청이 들어오면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상례였다. 위내시경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던 상태에서 그는 한국의 현실을 볼 때 위내시경 대신에 현미경 분야를 당연히 익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일본에는 이미 1만여 대가 전국 병원에 깔려 있지만 한국에는 단 1대의 위내시경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한국에 돌아간다고 올림푸스 현미경의 애프터 서비스가 가능해지거나 한국 내에서 올림푸스 현미경 구입이 더 쉬워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세계 유일의 위내시경 제조 판매회사로서 한국의 장비 보유 실정을 모를 리가 없다. 위내시경은 최첨단 장비지만 임상 치료용이어서 추후 한국에 이 기계가 도입되더라도 극소수의 치료에만 사용될 것이지만 현미경은 한국 기초과학의 초석이 될 수 있었다. 일본과 한국의 의료기술 격차는 너무 컸기 때문에 감히 한국이 일본을 따라온다는 발상은 아무도 할 수 없던 터라 올림푸스사에서 제대로 양성한 기술자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올림푸스사로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국가적인 관점에서 위내시경보다 현미경에 대한 전문성이 더 의미있고 필요하다는 것은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심보라가 일본 기술연수 오기 전까지 1953년부터 전념한 업무가 바로 현미경 검사 분야였다. ‘위내시경의 전문기술자가 되어 화려하고 편하게 살아 가겠는가’ 아니면 ‘현미경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소리없이 한국의 미래를 위해 숨은 일꾼이 되겠는가’의 양 갈래길에 그는 서 있었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그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되겠지만. 야망에 불타는 이 청년은 후자를 택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의 후손에게 땅 위에 잘 먹고 편히 살 수 있는 배려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음을 일단 보여 주셨다. 이어 곧바로 하나님은 심보라에게 이왕 한평생 살아야하는 세상살이에서 자기 혼자의 편한 인생보다 사회 전체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되 숨은 곳에서 소리 없이 큰 일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를 하고 계셨다. 순교자이신 아버지의 신앙과 그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면으로 베푸신 은혜의 분량과 방향이었다.


위내시경 전문가에서 현미경으로




한국의 의대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국을 지배해왔던 그들은 한국의 의료계를 유리창문으로 보듯 꿰뚫고 있었다. 위내시경 장비가 한국에 들어 갈 일정도 없었고 만약 도입이 성사된다 해도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어, 심보라의 기술과 경력은 멀지 않아 한국에서 최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나 심보라의 기술과 연구의 발전 그리고 한국사회에 대한 공헌을 생각한다면 현미경 전문가의 길이 옳았다.


심보라는 일본 기술연수를 가기 전에 이미 현미경을 사용하여 수많은 환자들을 살펴온 임상전문가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조금이라도 현미경에 문제가 생기면 서울까지 후송을 해야했으며 아주 간단한 것만 손을 볼 수 있었다. 초정밀 기계의 특성상 대충 손을 본다는 개념은 관리 기술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대부분 미제, 독일제, 일제 현미경이 사용되고 있었다. 올림푸스사 입장에서도 곧 한일회담이 재개되어 일본의 돈과 장비가 지원되면 한국의 현미경 분야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모든 면을 생각한 올림푸스사는 이미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심보라에게 기초과학의 발달을 위해 또 의료계의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현미경의 유지, 관리, 수리 분야를 전공하도록 허락했다.


심보라 개인에게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앞날이 열릴 것이나 회사 차원에서는 심보라가 올림푸스 현미경의 기술자가 되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 국가차원에서 한국에 배치해야할 다수의 현미경 애프터서비스 전문가를 확보하는 이익을 보게 된다. 서로에게 절묘한 선택이었다. 현미경 기술도 올림푸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심보라가 목말라하던 학습에 대한 욕구를 단 한 번에 해소하기에 충분한 기술력이 있었다. 이미 초정밀 기계인 위내시경을 수료한 그가 현미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위내시경과 현미경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귀국 후 국내 상황에 따라 어느 쪽에서도 활동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 사람의 사회 활동만을 두고 본다면 당시 위내시경을 평생의 전문 분야로 삼았다면 최고의 의료기관에서 편하게 좋은 대우 받고 살았을 것이나 사회 공헌도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현미경 분야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는 전국의 의료기관과 기초과학실로부터 오랜 세월 그의 이름은 전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명인이 되었고, 각 실험실의 촌각을 다투는 연구 일정에 기여한 바는 참으로 컸다. 비록 두고 갈 세상 것이지만 순교자의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과 그 순교자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위로의 표시를 하고 계셨다.






일본 교회의 간증 기회




심보라는 일본 유학 중에는 한국인교회를 출석하였다. 그의 특별한 과거로 그는 일본인 교회에까지 간증할 기회가 있었다. 일제 당시의 겪은 모습과 자신의 인생을 생생히 증언할 기회들이 있었다. 심보라의 증언과 고백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모두에게 위로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심보라는 조국에 대한 애뜻함과 그리움이 더해질 때마다 더욱 배움에 정진했다. 그는 1961년에 일본에 들어가서 1962년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 기간에 오로지 광학기기 중에서도 위내시경과 현미경의 관련 수리 및 정비 기술 습득에 전념하였다. 사실 이런 최첨단의 분야일수록 가르쳐 주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상호자세에 따라 몇 달이면 될 내용이 몇 년 걸려도 겉돌게 될 수도 있고, 몇 년에 배울 것을 단 몇 달에 배울 수도 있는데 심보라는 후자의 경우였다.  












일본 거주 당시 출석하며 간증한 교회 주보




현미경 전문가 : 인생, 평생의 활동 여정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심보라의 인생은 거침이 없었다. 그가 갈 곳은 많았고, 그를 원하는 곳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특정 기관에 속하여 활동에 제한을 받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좋다고 판단했다.


우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충무로에 있는 대혜의원이라는 개인 병원이었다. 대학병원은 의사구조가 복잡해서 위내시경 도입은 늦어지고 있었으나 개인병원은 원장이 결정하면 바로 도입이 가능했다. 의사신문을 통해 위내시경장비와 함께 올림푸스의 본사교육을 받은 심보라를 알게 된 지삼봉 박사는 훗날 서울시 의사회장까지 역임하는 인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위내시경을 도입했던 터라 심보라는 큰 기대를 품고 위내시경 기술자로 초청을 받아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임상진료의 현실은 너무 큰 허탈감을 주었다. 환자들을 상대로 매일 검사하는 업무 속에서 환자들의 고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독일제에 비해 올림푸스사 위내시경은 훨씬 우수했지만 여전히 위내시경의 1세대 기계였다. 위내시경을 사용한 환자들은 통증을 호소했고 출혈로 고생하는 일도 허다했다. 오늘의 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또한 위내시경은 칼라사진 판독이 필요한데, 1962년에 귀국 당시 서울에는 칼라사진을 현상할 수 있는 곳이 단 하나뿐이었다. 참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 칼라사진 현상소는 독일에서 유학을 마친 사장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 곳에 목사님의 자제인 정재학이라는 친구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필름을 맡기면 현상에만 1주일씩 걸릴 때도 있다. 극소수의 잘 사는 몇 사람만을 위해 이 젊은 청년이 개인 의원 한 곳에 머문다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시간이 가면 모든 여건은 나아질 것이나 분명한 것은 당장에나 훗날에나 우리나라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가진 현미경 기술이야말로 국가 전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 국내 위내시경 1호 도입 병원에서 근무한 지 반 년이 되었을 즈음 심보라는 현미경 분야 본격 진출을 결심한다. 국내 전체 현미경을 수리하는 첫 사업이 시작되었다. 경력과 기술 그리고 국내에 관련 전문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심보라가 시작한 현미경 사업과 활동은 바로 전국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특히 대구 계명대학의 동산병원이나 전주의 예수병원처럼 외국계 기독병원들은 외국 의료진에 의해 심보라가 소장한 기술의 중요성과 활용도를 잘 알았다.


그는 위내시경보다 현미경 분야가 국가적으로나 현장에서 훨씬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을 실감했다. 이렇게까지 필요하고 중요하게 사용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현미경 공부가 최고의 선택이었다. 일본은 역시 계산에 빨랐다. 군사혁명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에 국운을 걸었고 한일회담은 1965년에 타결이 되었지만, 실제로 실무 관련 세부사항은 1961년 혁명 직후부터 빠르게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은 배상금은 물론 일본으로부터 각종 과학기술과 기자재 도입도 대거 지원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은 지원에 대한 세부 내용을 청구했고 일본측은 자체적으로 관련 기관과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올림푸스는 광학 분야에서 한국에 제공할 내역을 선정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초과학의 토대를 위해 현미경은 1순위로 목록에 선정되었으며, 이미 회사에 와있던 심보라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차원의 국가간 비밀협상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한일회담의 타결은 1965년이었으나 그 실무 준비와 윤곽은 조기에 방향을 잡고 있었다. 언제든지 양국의 정치적 결단이 내려지면 실무 차원에서는 차질 없이 후속 처리를 해야 했다. 식민지 시기의 착취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규모 보상과 지원에 나서게 되는 이 역사적 초유의 순간 심보라는 한국의 향후 현대화의 밑받침이 되는 기초과학과 의료 분야의 기반 확충을 위한 대규모 현미경 지원 사업에 숨은 인재가 된 것이다. 결국 올림푸스는 사전에 현미경 기술인력을 양성하여 서로에게 좋은 점을 안내했던 것이다.


1965년 한일회담이 성사되자 교육차관 명목으로 향후 한국의 실험실습 연구의 주력이 될 올림푸스 현미경이 대량 공급되었다. 실제로 1969년부터는 전국의 중요 병원과 대학을 비롯한 국책연구기관의 주력 기종으로 자리잡고 그 모든 기자재의 관리 운영 뒤에는 심보라, 그 이름이 있었다.


심보라가 현미경이라는 전문 분야 전환했던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이미 제대로 습득한 위내시경의 초정밀 기술력으로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본 동경대병원에서도 현미경 조작, 관리, 수리 등에 관한 다양하고 전문적인 실력 발휘할 기회를 가졌으며, 동시에 현미경에 관한 연구 발표도 했었다. 귀국 후에는 현미경이라는 특수 분야의 국내 유일의 전문가가 되어 지난 30여 년동안 전국 주요 대학병원과 의료기관 및 생물학 실험실을 상대로 활동하였다. 주로 서울산업대학교의 교육기자재 현미경 담당자로 일을 했으며, 학교의 성격과 업무의 전문 식견 때문에 전국의 국립대학교의 병원과 각종 실험실 장비는 거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유진벨 재단 인요한 심보라 청원


서울대 양용태 박사




1970년대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기초과학 분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서울의대 등 국내 대학들의 기초과학 분야의 경쟁은 치열했고 그 과정에서 연구실의 현미경에 문제가 생기면 심보라의 업무처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기관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서울의대 학장으로부터 전국의 각급 기관의 최고 전문가들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직접 전화하며 편지하고 매달렸다. 일반인이나 이웃은 전혀 알지 못할 그였지만 의대와 병원 그리고 각 기초과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이 되었다 .








언론의 심층 보도 사례


(월간 예향 1992 .9.)


현미경 전문가 심보라 기사


(동아일보 1979.5.11.)




한편 국가적 일반 기자재 관리차원에서 시행된 집단교육이 시작되었다. 1970년부터는 전국의 보건소 관계자를 대상으로 현미경 관련기술 전수를 위한 교육을 도맡았다. 관련 분야 대학 교수들이나 일반학교 과학교사를 위한 교육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부친의 순교로 겪었던 성장기의 모든 어려움을 한꺼번에 보상받게 된다. 지금과 달리 언론도 적고 보도 분량도 현저하게 적었던 1974년 즈음과 그 이후에도 현미경에 관한한 국내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아 중앙일간지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미경 관련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서울대 의대를 비롯한 전국의 국립대학과 각 기초분야 최고의 연구 실험실에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의료장비 세미나의 강사로 활동, 1970년


(앞줄 왼쪽 두 번째. 의사협회 주관, 의사회관)  


교육기자재 세미나: 강사로 활동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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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를 예수를


더 욱 사랑 더 욱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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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심보라의 신앙 생애 Ⅳ : 노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 휩쓸려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아 왔는데, 그에게는 이 나라 교회사와 이 사회의 극한 상황의 내면을 몸으로 일일이 겪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날을 눈 앞에 두고 그는 평생을 조용히 신앙에 전념하며 마무리하고 있는 시기다. 현재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한국교회는 아버지의 순교 당시와 초기 한국교회 시절에 비교하면 보이는 복은 하늘에 닿도록 쌓였으나 신앙의 내면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어 탄식이다. 한 편으로 오늘 우리 사회의 풍요도 그가 살아온 고비고비와 비교하면 꿈에라도 생각할 수 없는 발전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바른 내면을 결코 잊지 말기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 싶다. 그러나 그가 교회 내에 가진 위치나 과거 활동이 부족하여 기도만 할 뿐이다. 또 오늘 우리 사회의 자손들에게 소나무 껍질을 벗겨 연명하던 고난의 시절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지난 날을 잊으면 오늘의 번영과 발전이란 단 한 순간에 없어진다는 과거 경험을 담는다. 이 책을 위해 마지 못해 면담에 나선 이유이다.


부친의 순교비    




노년이 된 심보라의 마음 속에는 기나긴 시간이 흘러가도 잊을 수 없는 아니 잊혀지지 않는 잔흔이 있다. 순교하신 부친 심봉한 집사님, 일제의 탄압으로 흩어진 모친과 형제들에 대한 깊은 아픔이 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부친 심봉한 집사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침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은퇴 후 오랫동안 출석하던 순천중앙교회 바로 옆에 자리잡은 미국 남장로교에 의해 마련된 [순천선교부] 뜰에 있는 부친의 순교비는 그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한다.








한국기독교선교역사 박물관


(순천소재, 右 심보라)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에 세워진 기념비와 순교비들












한국기독교 선교역사박물관 (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 위치 :순천시 매곡길 11(매곡동)(중앙교회와 매산중학교 사이)


● 건물 : 3층 건물 (전체 138평 중 박물관 2~3층 83평)


● 시설 : 사진전시실·생활유물전시실·등대선교회전시실


● 개관일 : 2004년 1월 29일


● 개관시간 : 10:00~17:00 (월~토) 일요일·공휴일 휴무


● 입장료 : 무료 (사전예약 후 방문 가능)


● 운영주체 : 등대선교회


● 연락처 : 061) 753-2976, 016-213-0550




전남 순천시 매곡동 매산학교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순천기독진료소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생을 마친 휴 린턴(한국명: 인돈) 선교사 부부가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운 곳이다. 선교를 위해 애쓴 성도 조지왓스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 세워진 이 건물은 성경학교, 선교사 숙소, 순천노회 교육관, 결핵진료소 등으로 용도를 달리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건물 1층에는 한국에서 생을 마친 휴 린튼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들을 위해 세운 작고 아담한 병원이 지금까지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2, 3층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기독교 선교역사 박물관에는 구한말부터의 기독교 선교현장을 담은 사진과 외국 선교사들이 서방세계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달력 등 선교자료들과 외국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에는 전남지역의 선교사역을 보여주는 전시실과 환자를 돌보고 돌아오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사망한 린턴 선교사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마당에는 유진벨 선교사의 부인인 로티벨의 묘비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의 기념비와 순교·순직한 성도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대전 한남대학을 설립한 린턴박사의 3남인 인휴목사가 1970년에 세운 등대선교회가 그 뜻을 이어받아 2004년에 새롭게 개관했다.
















현재 활동    




현재 심보라는 아내와 함께 순천 용당동 현대아파트 111동에 거주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현미경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현역 은퇴 후에도 과거의 어려움과 고난에 묶여있지 않고 현미경 관련 업무에 고문이나 기술 지원을 할 때가 있으면 어디든 적극 도움을 드리고 있다. 50여년의 세월 동안 삶의 전부가 되어온 현미경과의 그의 인연은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며, 그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가치가 될 것이다.  






“내가 본, 내가 이야기 나눈 미세스 린튼과 미스 린튼은 너무 멋지고 훌륭한 분들이다. 물론 그분들을 처음 만날 당시 미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그 자체가 특별해 보이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겪을수록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에서도 기품이 한가득 담긴 멋진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국적이 없다며, 늘 한결같이 차별을 가장 경계하셨다. 유진벨재단은 세상의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고 순수한 봉사 목적으로 결핵퇴치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는 모범적인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


-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유진벨 선교사 가족


유진벨 선교사 가족과 심보라








순천 시민의 신문 (2002. 1. 30.)




사십년 현미경 사랑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도구로”


북한과 같이 교통수단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방사선 진단처럼 대량의 검진 장비가 이동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때 간단하게 활동성 결핵균을 식별할 수 있는 필수장비가 현미경이다. 현미경 검사는 하루 25명 정도의 감염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유진벨 프로젝트의 내용 중 하나가 현미경을 구입하여 북한에 전달하는 것이다.


재단은 한 대당 150만원을 호가하는 현미경 구입비가 부담스럽던 터에 평생을 현미경 고치기에 헌신해온 심보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심보라 선생님은 1961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현미경 수리기술을 익혀온 분으로 지금까지 15000여대의 현미경을 수리, 막대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도록 한 분이다.


심 선생님의 현미경 사랑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교육기자재 관리소’를 창설하게 하였고, 그 이후 전국적으로 곳곳에 관리소가 생겼다.


3~40년 동안의 활동을 통하여 1500만불 정도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도록 한 선생은 정부에서 낡고 고장난 현미경을 모아 보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라도 더 고쳐서 북한에 보낼 수 있다면 그곳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심보라가 현미경 전문가가 되지 않았다면 유진벨재단과의 인연이 가능했을까?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쉽지 않은 상황임에 틀림없다. 여러 세대 한국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념해온 유진벨 재단의 주력인 린튼 집안 사람들과의 인연은 심보라의 노년을 보람되고 의미있게 보내게 해주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단순히 현미경 전문가로서의 인연을 넘어 유진벨재단과의 만남에 대한 또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부친 심봉한 집사님을 전도하고 지도했던 선교사들 중에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 인요한 박사의 선친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심보라는 현재 인요한 박사 가족이 운영하는 북한의 결핵 환자를 돕는 의료지원사업을 주도하는 유진벨재단의 기술고문을 맡고 있다. 유진벨재단의 주요 사업인 결핵퇴치 사업에는 현미경이 중요한 필수항목이다. 오래되거나 고장난 현미경을 기증받아 고친 후 북한에 보내는 사업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09년 겨울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해 예정된 [북한에서의 현미경 교육]이 불발에 그치는 아쉬운 일도 있었다.










심보라에게는 현재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딸 한명이 있는데, 그녀에게 할아버지 심봉한은 뵌 적 없는 분이며 아버지의 기억과 추억으로만 접하는 수준이었다. 막상 딸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멍하니 생각에 빠지는 정도이다. 할아버지 세대의 아픔이나 실제 모습을 볼 수 없는 세대로서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가면서 당연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적어도 그들만큼은 대를 이어 아름다움이 담긴 이야기를 서로 기억해내다보면 상처도 아물고 깊은 과거가 갖고 있는 역사의 의미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심보라 집사님의 외손주가 ‘학교 현미경이 고장났어요?’라고 호출이 와서 직접 고쳐주시고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기회도 가졌다. 그 덕분에 외손주는 심보라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게 되고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심보라의 외손주 김요한




심보라의 생애 마지막 소원은 ‘기술 기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80세가 넘은 노년의 나이지만 손놀림이 제한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시간까지는 현미경을 위한 시간을 계획해보고 싶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 현미경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자신 혼자서 소지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나 먼 곳일지라도 현미경에 관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찾아갈 거라는 현미경에 대한 그의 절실한 마음은 변함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감사함을 갖고 있다.


회상을 염두에 둔 메모 한 장, 일기장 하나 둘 수 없었던 급박한 세상의 흐름에서 살아오신 심보라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긴박감을 절감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는 것도 모자라 엄청난 국가적 난국에서 견디고 살아오신 모습을 보며 세상에서 고난을 감내해야함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우리가 심봉한의 순교 이후 그 자손들이 겪은 어려움을 감히 이해된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분의 가족사와 생애사를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는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일본 식민지 시절과 해방 그리고 여순사건과 4.19와 5.16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심보라에게는 우연이 아니었다. 또 개인적으로는 부모님의 죽음, 가족과의 생이별, 애양원에서의 생활, 올림푸스에서의 교육, 유진벨재단과의 인연 등은 우연이 아닌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김철주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준비하여 순교자 가정을 배려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세밀하다. 순교자 가정의 후대에게 하나님이 신앙 발전과 성공을 위해 준비하고 펼쳐주신 세상이었다.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 국제선교회 지원으로 부지 20만 평을 간척하여 교인들의 생활 터전으로 예정된 지역(가운데 인요한, 오른쪽 심보라 - 실제로는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음)






인요한과 심보라가 공동으로 서울대에 요청한 기독교유적지 보존 청원서








6.25 참전의 학도병 역사 조명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았던 일본 식민지 시기의 서러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6.25 전쟁에 어린 학생들의 몸으로 참전했던 역사가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심보라는 노년에 몇 가지 의미있는 활동을 하게 된다. 학도병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동기들을 모아 노력했다.












학도병 참전 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부 록








1. 참고 도서


2. 심보라의 가족 기록                                    


3. 사성암 : 심봉한 가족과 불교역사


           * 사성암 불교 역사 참고 자료


4. 선교사 관계


  유진벨재단 : 4대째 이어지는 린튼 선교사 가문


5. 화개장 전투


6. 양일만의 회고


7. 주간 기독교


8. 순교사 소회                      








1. 참고 도서






이 책은 다른 도서나 자료를 최대한 인용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 안용근 목사님, 그리고 김철주 장로님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순교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전기 형태의 이야기여서, 자료 인용표시가 많을 경우 일반 교인의 신앙 독서에 불편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본문에서는 인용 표시를 최소화하는 대신 여기에 전체 인용의 방향을 적습니다. 출간물 중에는 일부 착오도 있으나 그 사실 여부를 살피는 책이 아니어서 설명 없이 바로 잡은 곳도 있고, 책 내용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자연스런 독서를 위해 인용에서 배제했습니다.




● 이사례 (2008). 이기풍 목사님 전기, KIATS.


● 진병도 (2010). 섬진강 : 안용근 목사님 순교, 쿰란출판사.


● 임종철 (2006). 학도병은 살아 있다, 대동문화사.


● 신풍교회 (2009). 신풍의 교회 90년사, 신풍교회 출판부.


● 성암교회 (1999). 성암교회 75년사, 성암교회 출판부.


● 통합교단 순천노회사


● 유진벨재단 자료


● 지리산기독교유적보존회 소장 자료


● 심보라 앨범


2. 심보라의 가족 기록






심보라의 가족 관계


           조부 심갑순, 조모 정엽분


           부친 심봉환, 모친 박소열


           부인 오정희, 자녀 심은영, 외손주 김요한




심봉한의  7아들


           장남 심요한(병식)


           차남 심안식(형식)  


           3남 심갈렙


           4남 심보라


           5남 심요셉


           6남 심수복


           7남 심광일








조부: 심갑순             조모: 정엽분


순교자 심봉한, 부인 박소열






우1 병식, 우2 형식, 우4 갈렙


우1 보라, 우2 요셉, 우3 수복


3. 사성암 : 심봉한 가족과 불교역사






사성암은 신라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를 이어오면서 불교계와 한국사에 많은 자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심봉한의 순교 고초는 상상할 수 없이 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란을 감당할 수 있도록 더 큰 은혜를 주셨고, 그런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 이 가정은 불신 시절에 미신과 불교에 남달리 깊게 파묻어 두었습니다. 큰 암흑에서 큰 빛을 봤기 때문에 그 고난도 컸고 승리도 컸습니다. 한국 초기 선교사에 고난을 겪은 선배들을 오늘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목숨을 걸어야 할 극단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미신이나 불교 혹은 유교와에 매인 것입니다.










강 좌측이 구례구, 우측이 신월리


지리산의 끝자락인 사성암(우측 산)






※ 위치 :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위치


※ 설립 : 544년(성왕 22년)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


※ 이름의 유래 : 원래 오산암으로 불리웠으며, 4명의 고승(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군사가 수도한 곳으로 ‘사성암’으로 불리움 -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  


※ 참고 : 사성암 = 오산 = 구령


※ 역사에 나타난 관련 기록


- 오산의 옛 이름인 구령(甌嶺)은 856년 혜철국사가 이 산 봉우리 암벽에 조성한 부처상




- 구령 암자(사진)는 혜철국사가 도선국사에게 도참을 전한 곳이며 왕건으로 하여금 고려를 창업케 한 역사의 현장으로 지목되는 곳이다. 도선국사 비문에 “어느 때는 구름 낀 산봉우리 위에 있는 바위굴 속에서 고요히 앉아 참선을 하고 여름에는 커다란 바위 앞에 초막을 지어 참선을 하기도 하였다” 하였다. 바로 이 산신각과 좌측에 있는 바위굴을 지칭한 것이다.


- 구령 즉, 오산이 위치한 구례군 문척면(文尺面)의 문척이라는 뜻을 풀어보면 문유승척(文有繩尺) 즉, 글로서 천하의 법도를 세웠다는 뜻이다. 이는 혜철국사가 구령에 있는 암자(현 산신각)에서 도선국사에게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여줄 묘책으로 도참의 비결을 전하여 천하의 법도를 세웠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는 혜철국사가 도선국사에게 비밀리에 전한 도참에 적힌 대로 삼한을 통일하고 왕위에 올랐다” 하였다. 혜철국사와 도선국사 그리고 왕건으로 이어지는 오산의 역사 즉, 고려 창업의 역사가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 태안사사적인 “동리산기실(桐裏山紀實)”에도 있다. <고려사절요에서 발췌>




혜철국사 당시 태안사가 1,620,000평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남해바다에서 미역밭은 물론 전남 고흥에서 소금까지 생산하고 있었으며, 훗날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광자대사 당시 경남 의령에서 합천과 고성에 이르는 경남 서부와 전남 해안은 물론 영산강 유역까지 태안사가 소유한 토지 내력을 보면, 태안사가 고려 창업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보다 더 확실해진다.


당시 왕건이 지배했던 전남 서부인 나주와 영광은 물론 지금의 경남 내륙인 의령군과 거창군에서 남해안 고성군에 이르는 경남 서부지역과 전남 남해안까지 태안사가 11개 지역에 대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태안사의 존재와 그 위엄을 지금도 실감할 수 있는 일이며, 태안사가 고려 창업의 중심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도선사의 기록에서 중요한 사실은 도선(道詵)이라는 도선국사의 법명이 본래는 국사의 법호가 아니며, 도선이라는 법호가 여기 도선사 즉, 여기 사성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도선사가 도선국사의 법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도선국사의 법호가 여기 오산 도선사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 언제부터 오산이라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고려말 원감국사(圓鑑國師 1226∼1292(고종 13∼충렬왕 18) 문집에 이름이 나오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전하는 문헌이 없어 역사와 유래를 알 길이 없다.




- 오산은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비문과 경암대사의 기록에 의하면, 진각국사가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처음 집필한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대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어 1250년에 건립한 월남사 진각국사 비문에 의하면, “일찍이 오산에 살고 있었는데, 한 반석 위에 앉아 밤낮으로 항상 선정(禪定)을 익히어, 매양 오경에 이르도록 매우 큰 소리로 게송을 읊으시니, 그 소리가 10여리에 들리어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아니하니 듣는 이가 이것으로써 아침임을 짐작하였다.” 하였고, 사성암사적에 의하면 “진각국사께서 구례군 문척면 오산 사성암에서 이 염송을 지었다” 하였다.


     2010년 3월 27일 동악산에서 박혜범 씀


4. 유진벨재단: 4대째 이어지는 린튼 선교사 가문






심보라 가정이 접하는 선교사들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이 가정의 초기부터 심보라의 노년까지 이어진 선교사 가정이며, 한국사와 한국교회사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 전체가 인정할 정도의 대표적인 가정 하나를 소개합니다.






크리스천투데이


4대에 걸친 한국사랑, 린튼 선교사 가문


이미경 기자 (mklee@chtoday.co.kr, 2010.02.26)




“연세대에 ‘언더우드’가 있다면 한남대엔 ‘린튼’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 사랑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는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ㆍ1891~1960) 선교사는 한남대 설립자로서 근대 한국사회에 큰 기여를 했으나, 널리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다. 특히 린튼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 선교사이다. 그의 특별한 한국사랑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4대(代)에 걸쳐 한국에서 봉사하고 선교하며 한국 땅에 뼈를 묻은 후손들도 있다.








지리산에서 린튼(인돈) 부부와 네 아들


왼쪽부터 윌리엄, 드와이트, 휴, 유진.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풍토병에 시달렸다. 이들은 당시 요양을 위해 지리산 노고단의 선교사 캠프를 마련했다. ⓒ한남대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바로 애족장이 추서된 윌리엄 린튼 목사가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군산영명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린튼 선교사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고,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린튼 선교사는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피했으나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했고, 19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병 치료도 미룬 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던 그는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같은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 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한국에서 선배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ㆍ1868-1925) 목사의 딸 샬롯(한국명: 인사례)과 결혼, 아들 4명을 모두 한국에서 낳고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셋째 휴 린튼(한국명: 인휴ㆍ1926~1984)과 넷째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ㆍ1927~ 2010)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교육ㆍ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휴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ㆍ83)도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과 호암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베티 여사의 집은 미국을 방문하는 북한 대표단이 머물다 가기도 하는 등 남북한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휴 목사는 교통사고로 숨져 한국 땅(순천)에 묻혔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낸 드와이트 목사는 올해 1월 미국에서 역시 교통사고로 숨졌다. 린튼 선교사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유진 벨 선교사로부터 따지면 4대에 이른다. 인휴 목사의 아들 스티브(한국명: 인세반ㆍ59세)는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까지 모두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1997년부터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도 수차례 만난 북한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의 동생 존(한국명: 인요한ㆍ50)은 한국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토종’이다. 두 형제는 모두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미국의 세계적 생명공학기업인 ‘프로메가(PROMEGA)’ 대표인 빌 린튼 3세(62)는 윌리엄 린튼 목사의 장손(長孫)으로 인세반, 인요한과는 사촌 간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설립한 한남대를 2004년 방문해 500만 달러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이후 한남대에 프로메가 BT 교육연구원이 설립됐다.




이밖에도 린튼 가문은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를 설립해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한남대는 설립자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1994년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인돈학술원을 설립하여 매년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사에게 인돈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국제학부인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설립하여 우수한 국제화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시상식은 3월 1일(월) 오전 10시 제91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리는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기념관에서 거행될 예정으로 수상은 유족을 대표해 손자인 인요한(John Linton) 신촌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받게 된다.


5. 화개장 전투(하동 화개장 전투)






화개장 전투 관련 자료는 심보라의 전시상황에서의 고난을 가장 현장감 있게 역사적으로 설명해주는 하는 자료입니다. 오늘 평안한 시기에 과거의 급박한 상황을 제공하는 이유로는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환란의 한 모습으로 인정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전장사례연구(3)』,1987


● 작전기간 : 1950년 7월 25일


● 작전지역 : 경남 하동


● 적 군 : 북한군 제6사단


● 아 군 : 제5사단 제15연대(이영규부대)




[1] 상 황 (※6사단 기동상황  ※ 낙동강방어선 형성전 상황)  


1.1  1950년 7월 18일 금강을 도하한 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는 군산과 이리를 경유하여 계속 남진 중에 있었고, 나머지 2개 연대(제14, 15연대)는 인민군 제4사단과 더불어 대전을 공략한 후 호남으로 남하하여 7월 23일에 광주에서 성공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인민군 제6사단 일부병력은 목포로 향하고 다른 일부는 순천방면으로, 그리고 남원-구례-하동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 참고 : 남원을 점령한 적 인민군 제6사단의 일부 선견대는 7월 25일 07:00에 구례를 점령한 다음 후속해 온 연대주력과 합류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1개 대대의 선발대와 전차 1대 및 야포 5문을 동반하고 화개장 방면으로 진출중에 있었다.)


1.2  한국군 제5사단 제15연대는 3개 대대로 새롭게 편성되었으나 총병력은 1,156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8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제3대대는 7월 26일 여수 주둔지에서 선편으로 거제도를 경유하여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7월 24일 구례로 철수하였으나 제1대대장은 호남지구 전투사령관으로부터 "구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를 섬진강 남쪽 용두리(구례 남쪽 8km)에 배치하고, 구례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 야간에 제2대대와 현지 주둔경찰은 하동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2] 작전경과 (※작전상황도)


2.1  인민군은 7월 25일 07:00 구례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제1대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1대대장은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축차적으로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그 일부 병력을 후퇴시켰다. 후퇴도중 제2대대의 상황을 알기 위하여 화개장으로 간 제5연대 부연대장(중령 이영규)으로부터 09:00경 트럭 5대가 도착했다. 화개장 동쪽에는 359고지가 있으며 이 고지에는 과거 공비 토벌당시에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진지가 있었다. 이영규 중령은 제2대대를 지휘하여 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한편 제2대대 북방 161고지에는 경찰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2.2  5대의 차량에 분승한 제1대대는 적이 뒤쫓는 상황아래 화개장을 향해 철수를 계속하여 10:00경 화개교 동쪽에 부대를 배치한 다음, 대대장은 즉각 뒤쫓는 적정을 감안하여 구두 명령을 각 중대장에게 하달하였다. "적의 선봉은 곧 부대를 뒤쫓아 하동을 점령하려 할 것이다. 부대의 철수로 전방에는 우군이 없으며, 단지 분산된 일부 경찰병력의 철수만이 예상될 따름이다. 부대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매복으로 적을 기습하고 이를 섬멸하려 한다. 각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기도비닉과 적이 근거리에 접근할 때까지 일체의 사격을 엄금하라. 공격신호는 총성 3발이다."


2.3  구례를 탈취하고 7월 25일 순천에 돌입한 인민군 6사단 1개 연대는 순천-광양 가도를 따라 하동을 공략코자 동진을 위한 공격의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인민군은 용두리에 배치되었던 아군 제1대대가 저항도 없이 조기에 철수한 사실과 개전이래 후퇴만을 거듭하는 국군의 취약상으로 미루어 구례-하동간 도로 연변에는 이미 저항세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음인지 공격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일부 보병을 5대의 차량에 분승시켜 아무런 경계도 없이 차량거리도 유지하지 않고 화개장으로 급진하고 있었다.


2.4  차량 기동소리가 국군을 뒤따라오는 인민군 공격부대일 것이라고 판단한 제1대대장은 화개교를 폭파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한 경찰관이 다리를 파괴하려는 순간 인민군 차량 1대가 법화촌 방면에서 돌연히 출현하여 시속 25㎞의 속력으로 화개교에 접근하고 있었고 이어 10m의 간격을 두고 또다른 1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잠깐 사이에 적의 차량은 모두 5대로 관측되었고, 선두차는 교량의 안전을 살핀 연후에 통과하려 한듯 잠시 속력을 낮추고 머뭇거렸다. 이로 말미암아 후속 차량들은 계속 달려붙어 차량간의 거리는 불과 2-3m로 좁혀졌으며, 적 차량은 우군 진지에서 불과 200m 거리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2.5  10:30경 제1대대장은 일제사격을 알리는 3발의 카빈사격을 실시했고, 섬진강 동쪽해안에서 각종 지형지물을 방벽삼아 몸을 감추고 사격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제1대대 병력들은 일제히 5대의 차량에 탑승한 인민군 보병들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차량에 탑승한 채 무심코 화개교를 건너 하동으로 공격하려던 인민군은 갑작스런 집중화력으로 피하지도 못한채 아비규환의 참경을 연출하며 쓰러졌고 운전병이 모두 사살되어 차량운전도 불가능했다.  


2.6 10분간 계속된 집중사격으로 인민군은 2-3명만이 간신히 도주하였을 뿐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인민군의 처참한 광경을 지켜본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로 인해 승리감에 도취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적의 후속부대가 곧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한 대대장은 승전에 들뜬 병사들의 기분을 진정시키고 적의 주력부대의 접근에 대비토록 지시하였다.


2.7  365고지에 있던 제2대대도 제1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잠시후 출현한 인민군 후속부대의 공격을 받고 전열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전투경험이 없는 병사들(기간장병을 제외하고는 대전과 광주 및 순천에서 모집한 학도병으로 1주간의 훈련을 받은 수준)은 호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사격을 가하였고 공포심에 떠는 병사들은 명령없이 위치를 이탈하려는 기미마저 보였다. 대대장과 중대장들은 호와 호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독전을 거듭했으나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만한 방법은 없었다.


2.8  북방 161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 1개 중대는 적의 공격을 받고 일시 분산되어 후퇴하였으나 그후 하동에서 출동한 200여명의 경찰 지원부대와 합세하여 원진지를 회복하였다.


2.9  정오경 인민군의 새로운 공격이 전 정면에 가해져 피아간에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일대 접전이 전개되었다. 병사들은 앞서 적을 기습한 것과는 달리 적의 선제공격에 당황하여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전열을 이탈하는 자가 발생할 뿐 아니라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2.10 제1대대장과 제2대대장은 전세로 미루어 더 이상의 교전이 불가능하며, 차후 작전을 위해서는 지금이 철수의 적기라고 판단하여 각 부대의 철수를 명하였다.


2.11  화개장 전투에서 제15연대와 경찰대는 2시간여의 교전을 하고 산간 소로와 산악을 따라 하동으로 철수하였으나 이 전투로 구례에서 하동으로 진격하는 적 제6사단의 공격 속도를 몇일간 지연시킬 수 있었다. 1950년 9월 UN군의 대 반격으로 이 지역이 회복되었는데, 화개장 주민들에 의하면 72명의 북한군이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에서 하동으로 전진하는 한·미 양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3] 교훈


3.1  상대적으로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적의 선봉 부대를 섬멸시키고 적의 진격을 잠시나마 저지시킬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은 오로지 유리한 지형에 진지를 급편하고 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기습을 가한 데 있었다. 성공적인 지연작전은 기도비닉 및 기만방책에 의존한다. 이는 지연작전을 실시하려는 아군의 기도를 은폐시켜 적의 추격을 방지하고 적의 방해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며 적을 유인하여 격멸할 수 있는 기습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제1대대장의 적극적인 공세 행동이었다. 지연작전이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하는 작전이라고 하여 먼저 철수한 다른 부대들처럼 적이 출현하기만 하면 싸우지도 않고 철수만을 거듭하였더라면 적은 계속적인 주도권을 확보하여 아군에게 심대한 손실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휘관은 지연작전시에도 항시 적의 약점을 발견하여 이를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공세행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6. 양일만의 회고 : 양일만 애양원 총무과장 가정 이야기  


                       - 손양원 목사님의 가족이 본 애양원의 신앙






손양원 목사님 순교 후 그 사모님과 유족이 겪는 고초는 한국교회사에서 거의 덮혀 있습니다. 이 자료는 손 목사님 사후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와 정양순 사모님의 신앙 내면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양일만 애양원 총무과장’ 회고


                       (※출처 : http://blog.daum.net/jcysheep/tb/12328407)  




우리 아버지 어려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었는데,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참 좋은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목사가 되고 난 후에는 더 더욱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는 신풍(여수 애양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시골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다녔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서 친구들하고 너무 놀아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미션스쿨이어서 성경과목이 있었다. 성경과목은 수(A+)였다. 그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께서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그래 목사가 될 사람이니 성경을 잘 했으니 됐다’ 라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성적이 말이 아니어서 할 말이 없었는데 그렇게 말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 아버지께서 내가 신학교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내가 선교사가 되어서 일하는 것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여수 애양원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셨다. 몇년까지 일하셨는지 지금 기억이 없다. 그런데 2년전 고향에 갔다가 애양원을 들려볼 기회가 있어서, 어려서 아버지와 같이 가보았던(당시 애양원에는 한센병 때문에 아이들의 출입이 금지됨) 손양원 목사님 묘가 있던 자리 옆에 기념관이 지어져 있고 그 안에 당시 애양원 직원들 사진이 있었다. 그 때 애양원 원장님은 보이열 목사(선교사)님이셨다. 그 분들의 사진이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 왔었다.              








보이열 목사님 (사진 위쪽)


양일만 장로(앞줄 오른쪽)






[블로그 댓글]


김○석 (2009.06.05 02:25) : 심야에 문득 내 고향 신풍초등학교가 생각나 인터넷을 뒤지다가 귀하의 블로그를 발견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애양원을 자주 찾아갔던 저로서는 귀하의 글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애양원에는 제 할아버지(돌아가신 아버님의 외삼촌)님은 한센병 환자로 복지관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찾아뵙지를 못하고 있어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 고향 집은 이미 비행장으로 변한지 오래 됐구요. 가끔 유년 시절 교회(성광교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를 놀이터 삼아 놀던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지금은 그 교회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나눠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 이웃 성암교회를 우리는 사이비로 알고 있었지요. 돌이켜 보면 그 성암교회는 장로교 통합측 교회이다 보니 고신보다 진보적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서울 명일동에 거주하면서 명성교회(통합)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저 모친은 감리교회 권사로 재직 중이고, 제 동생 중 한 명은 목사로 전주에서 교회(합동)를 개척해 담임을 맡고 있는데 전북대 철학과 -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목회하면서 전남대 일반대학원 철학과(문화철학 전공)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지속적으로 동생에게 얘기합니다. 최소한 동생은 올바른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고 채찍을 가하는 격이지요. 그러면 어머님은 주님의 종에게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생은 웃고 말지요. 고향 '신풍'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선뜻 가지질 않습니다. 신풍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순천중학교와 순천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서울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초라한 삶이 제 자존심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신실했고 남들로부터 좋은 소리 들으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주님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어제(6월 4일, 목) 오후에는 모든 시간을 국민일보 한국교회에 관한 기사를 검색 하고 '고요한 바다'를 찬송하면서 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순천 중앙교회(통합: 담임목사 - 임화식) 홈페이지도 방문했고요. 임 목사님은 애양원 앞 동네 구암 마을 임 장로님 아드님으로 제 초등학교 및 고등학교 직속 선배이기도 한데 중학교는 미션 스쿨인 매산중학교를 졸업했지요.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 시절에 교회에 찾아가 뵙고 난 후 지금까지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문득 생각나 홈페이지를 방문해 그분을 뵐 수 있었습니다. 제 동네인 학서에서 자란 분들 중 상당수가 목사로 황동하고 있습니다.




양○철 (2009.06.05 14:42) : 김○석 선생님, 불로그를 방문해 주시고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특히 신풍이 고향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제가 율촌 동국민학교(신풍에 있는 초등학교) 제 5회 졸업생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신풍으로 가서 그곳에서 졸업하고 순천 매산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순천 중앙교회 임화식 목사님의 아버님은 저희 아버님 다음으로 애양원에서 일하신 분이십니다. 하여간 자세하게 본인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저도 신풍에 대하여서는 잘 모릅니다. 국민학교 졸업한 후에는 몇 번 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닌 교회는 성암교회(통합측) 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7. 週間기독교






週間 인터뷰  (1973. 11. 4. )










☐ 한국 유일의 현미경 의사


  沈保羅씨


한국 唯一의 현미경 전문수리사


沈  保  羅  씨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광학기의 전문기술자가 우리나라엔 흔하지 않다. 심보라씨(42 전남 순천시 영동109)는 한국에 오직 1명 뿐인 광학 현미경 기술자로 이제까지 5천여대의 현미경을 재생시켜 많은 외화를 절약시켰으며, 오늘도 서울의대 미생물학교실에서 수십대의 못쓰게 된 현미경을 수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고향 전남 구례에 교회까지 세우며 선교에 앞장섰던 고 심봉한씨의 3남인 심보라씨는 부친의 뜻을 받아 전국을 편력하는 생활 중에도 성경을 꼭 품고 다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기도 하다.




10년전까지 한국에 현미경을 수리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놀랄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단 1명 뿐이라면 믿어지지 않으나 그것이 현실. 그만큼 현미경은 정밀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간단한 손질만 가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그 수리사가 없어서 폐기처분하고 값비싼 외화를 들여 신품을 다시 수입해오는 실정이다. 그래서 년간 50만달라 상당이 외국으로 흘러나간다.


- 이와같은 특수기술에 접하게 된 동기는?


『6. 25때 학병으로 전쟁 제대하여 여수의 나병원인 애양원에서 조수일을 하게 된 것이 현미경과 친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정규교육도 못 받은 처지이지만 그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심씨는 그곳에서 나환자의 양성환자와 음성환자를 구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정밀해야 하는 현미경이 고장은 나는데 고치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리 조작해 봐도 뿌연 렌즈가 맑아지지를 않습니다. 서울의 유명상점을 다 뒤졌지만 팔기는 해도 고치는 사람은 없겠지요. 기막힌 노릇이지만 할 수 없이 병원에서도 급히 새것을 수입해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가 58년 그 뒤부터 沈씨는 日本의 유명한 현미경 제조회사인 「올림포스」 회사에 공부를 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시작했다. 이렇게 끈덕진 편지 공세 4년만인 61년 말 沈씨의 열의가 「올림포스」 회사 중역들의 마음을 울리고 허락을 받았다.


- 그곳의 전문기사 현황은 어느 정도인지?


『광학 현미경 전문 수리 기사는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지요. 세계 최대 메이커인 「올림포스」 광학 주식회사에도 전문가는 본사 5명, 대리점은 5명 쯤 되지만 대리점은 초보 단계입니다. 그래서 본사 건물 내의 수리室은 절대 외인 접근 금지의 극비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씨는 이토록 어려운 곳에서 외국인교육의 전무후무한 선례를 만든 것이다.


- 초청을 받게 된 경위를?


『현미경 수리를 배우겠다면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때는 카스트로 카메라의 조작 실습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무려 4년간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청장이 오고 일본의 그 회사 도착 후에 그들이 극비로 숨기는 현미경 조작 기술을 배우겠다고 中野撤夫 사장에게 떼를 썼습니다. 』


『한마디로 거절을 하더군요. 그러나 계속 찾아가고 또 찾아갔지요. 겨우 두달만에 일본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62년 말, 소정의 과정을 마친 심씨는 부지런히 귀국해 버린 것이다.


- 현재 한국의 광학 현미경 현황은 어느 정도입니까?


『현재 약 3만여대의 광학 현미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약 반 정도가 못쓰는 것으로 먼지에 쌓여 있지요. 그리고 매년 약 2천대 정도인 50만불 상당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수리 가능한 것을 제한다면 폐기처분 할 것은 몇 안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아까운 외화를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沈씨는 서울 문리대 이민재 교수를 비롯한 많은 저명인사의 추천장을 내보인다. 또한 일본 「올림포스」 회사의 인허장까지.




지금까지 수천대 재생시켜 수십만불 외화 절약시키고




『현미경 수리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안 보이거나 뿌옇던 것이 명확히 계수의 배수대로 보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처음에 의아해 하던 분들도 한 번 경험이 있은 후에는 그 가치를 인정한답니다. 이제 10년이나 세월이 가니 어디서도 불신은 안하지요.』


- 그 동안 실적을?


『서울대의 미생물학과, 문리대 생물학과, 메디컬 센터, 이화여대 의과대학, 대구 동산병원, 고려대학 생물학과, 연세대 생물과, 부산 침례병원, 서울대 농대, 부산 수산대학, 전주 예수병원 등에 비치된 약 3천대가 내손을 거쳐 갔습니다.』


- 현미경 고장의 주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개 렌즈에 먼지가 묻어 곰팡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렌즈가 깨진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극히 드물지요. 그렇기 때문에 곰팡이만 닦아내면 다시 새것처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父親은 선교에 앞장 선 기독人




- 아버님이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는데?


『그분(심분환옹)은 고향인 전남 구례군 구례면 신월리에 신월리교회(현재도 있음)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회 초대 선교사 크레인 목사와도 아주 절친한 사이였지요. 우리가 모두 7남매였는데 모두 교명을 이름으로 지어 줬습니다. 내 이름 보라는 영어 「Paul」의 한문 표기이지요. 』


그러면서 선교사 「크레인」목사가 심보라씨에게 보냈던 서신을 보여준다.


(부친의 死別을 아쉬워하며 심씨가 특수 과학기술을 배운다는데 격려를 준 내용의 글이었다. )


- 현재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신앙가족에서 자랐건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성경은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 있는 대로 봅니다마는 다니는 교회가 일정치 못합니다. 순천 중앙교회에 적을 두고 있고 귀향하게 되면 착실히 교회라도 다니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문의 기자를 대하면서 신앙은 착실히 못 지키는 것이 무척 미안한 모양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재생될 수 있는 현미경은 모두 고쳐서 사용토록 하겠다는 심씨는 성품이 그렇듯이 마음만 먹으면 꼭 실현시키겠다는 신념으로 말을 맺었다.








☐ 못쓰게 된 현미경의 재생에 열중하고 있는 심씨 (서울의대 미생물학 교실에서)




8. 한국의 순교사 소회




이 영 인


신풍교회 담임




평화시와 순교


한국 교회 우리에게 주신 오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두고 우선 주님 앞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아직까지는 고난으로 연단시킬 때가 아니라 보시고 때를 늦추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시기는 장차 주실 고난을 미리 준비하는데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평화와 안정과 번영이 넘쳐나는 이런 시기에 신앙의 고난기를 실감있게 전하는 자료를 연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신앙의 연단을 준비한다면 주님의 긍휼을 조금이라도 얻게 될 듯합니다.


참 순교자는 희귀한데 최근에는 무더기로 순교자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미화인지 발굴인지 모르겠습니다. 순교를 미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평화시에 제일 먼저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아야 할 신앙의 적인 명예 때문일 것입니다. 순교를 만들어내는 이들 중에는 교인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순교가 만들어지면 참 순교는 그만큼 묻힌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와 신앙의 보배인 순교 그리고 순교자는 주님만 보고 갔으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찾아내야 할 보배입니다. 순교를 묻어도 죄가 되고, 순교를 만들어도 죄가 될 듯합니다.


순교의 희소성


한국 교회사에서 순교의 일반적 기회는 일본의 식민 통치 시대의 신사참배 사건과 6.25 전쟁 상황이었습니다.


신사참배의 경우, 수난 성도는 많아도 최후까지 승리한 분들은 희귀합니다. 6년의 환란이 계속 되면서 대부분 중도에 포기했거나 고난의 막바지에 그 상황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때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순교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은 모두 피난을 했습니다. 피난 기회를 놓쳤거나 방심하다 체포되어 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런 경우는 전쟁의 피해자일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경우는 희귀했습니다. 두 사건 다 당시 상황이 명확했기 때문에 사건 직후에 순교자로 소개된 경우는 극히 적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경우는 많으나 참 순교는 희귀합니다. 평생이 순생이었던 사람 중에서 최후의 모습까지 순교로 허락하시는 경우는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순교는 사람이 노력하고 소원한다고 이루는 목표가 아닙니다.  






순교가 넘치는 시기


이토록 순교가 희귀한데, 왠지 지금은 순교자의 명단이 넘쳐나서 보는 것 자체가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참 순교자가 이리 많을까! 많다면 우리의 복입니다. 만일 순직이나 억울한 피해자를 순교라고 한다면, 참 순교는 그만큼 묻게 됩니다. 일제 신사참배를 끝까지 승리하고 출옥한 분들의 탄식은 자신이 부족하여 감히 순교 제물이 될 수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해방 후와 6.25 전쟁 시기 이후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순교라는 표현에 참으로 조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한국교회는 기독교사에 유례 없는 성장과 안정을 누리고 이제는 너무 익어 열매가 썩을 상황입니다. 장기간의 평화 시기가 계속되자 교회는 세상의 이해관계 때문에 공연히 분열하고 그 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각 교단에서 순교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각 지방에는 신사참배와 전쟁 시기의 수난 성도들이 넘쳐났고, 그 기간에 돌아가신 분들은 저절로 순교자가 될 상황입니다. 묻혔던 순교자도 있고 만들어진 순교자도 있을 것이나 성경과 교회사와 우리 신앙 생활의 내면을 살펴본다면 참 순교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순교 이야기가 살아있는 시기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순교자의 가족과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 그리고 순교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생존해 있는 시기입니다. 말하자면 순교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시기입니다.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오늘 우리의 실력은 순교의 근방에도 갈 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과 자세만은 순교를 사랑하고 사모하고 소망했으면 합니다. 선지자나 의인이 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선지자와 의인의 상에는 동참할 수 있는 길이 마태복음 10장 41절(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 선 순교자 그들의 이름과 생애를 우리의 입, 우리의 마음, 우리 생활에 영접했으면 합니다.




■ 후기






자료가 없는 아쉬움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는 그 순교 내용도 참되고 또 후세대를 위해 하나님은 자세하게 기록을 남겨 두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참 순교는 그 사실조차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봉한 집사님 기록은 2년을 찾아 겨우 몇 가지 자료를 얻었습니다. 고난의 여파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순천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뜰의 순교비에서만 그 이름 석 자를 발견할 수 있었고, 관할 노회나 교회 그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순교자 명단에만 남을 분으로 생각하다가 다음 몇 가지 자료 때문에 출간에 임했습니다.






간접 자료 세 가지


우선, 양용근 목사님의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손양원목사님의 애양원교회를 직전 담임하셨으며 일제 때 순교한 분입니다. 심봉한 집사님과는 신사참배 때문에 고초를 겪던 시기와 장소가 같고 담당 경찰도 같습니다. 두 분은 1943년 11월 26일과 12월 5일에 각각 고문으로 순교합니다. 꼭 10 일 차입니다. 두 분을 평소 괴롭힌 담당자들이 구례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고 양 목사님을 고문한 순천경찰서와 심 집사님을 고문한 구례경찰서가 순천 검찰의 지휘에 있었고 처리하는 방법과 모든 과정이 같습니다. 양 목사님의 고난 과정이 상세하게 알려져 있어 심 집사님이 순교에 이르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관련 내용을 대폭 인용하여 당시 상황을 제공합니다.




두 번째는, 이기풍 목사님 자료입니다. 한국 최초의 목사님으로 제주도와 많은 도서에 교회를 개척했고 고생했는데 1940년에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후 고문 끝에 77세였던 1942년 6월 20일에 순교합니다. 그 날도 주일입니다. 손양원, 양용근 두 분은 경찰 조사 후 재판을 받았으나, 심봉한과 이기풍 두 분은 재판 없이 경찰이 일선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심봉한은 평신도였고 이기풍은 연로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없이 고등계가 경찰서에서 죽이는 경우 그들은 사망 장소가 경찰서가 되지 않도록 위장을 합니다. 재판 절차조차 밟지 않았고 고문으로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가족에게 얼른 넘겨 버립니다. 경찰의 고문 끝에 임종 직전의 최종 호흡만 남은 상태에서 끌어내는 방법입니다. 이기풍은 끌려 나온 지 7일 만에 순교했고 심봉한은 며칠 만에 바로 순교합니다. 이기풍의 마지막 순간이 잘 전해지고 있어 순천 검찰의 단일 지휘를 받는 전남 동부 지역의 일본 경찰이 재판 없이 고문하고 경찰 차원에서 죽여버리는 최종 처리 과정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심봉한의 최후 순간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사참배 박해사에서 순교 사례가 거의 없던 지역에 소중한 기록을 더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세 번째 자료는, 심봉한처럼 독립운동을 하고 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김철주라는 인물을 통해 살필 수 있었습니다. 심봉한의 순교 후 가족들은 죽고 흩어지고 가족도 재산도 기록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가이며 신사참배 거부의 동지였던 김철주가 이 가정을 찾아 넷째 아들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여수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손양원 사후 애양원의 원장까지 맡았던 신앙가였습니다. 심봉한과 그 가정, 그리고 그의 순교 과정까지 그 시기 그 곳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그는 심봉한의 넷째를 대신 길러 신앙과 세상 면으로까지 훌륭하게 만듭니다. 이 책에서는 심봉한의 순교와 함께 넷째 아들의 성장 과정과 성공을 통해 순교자 가정을 돌보신 작은 역사를 적어 봅니다.






출간에 담은 뜻


이 글은 순교자 한 사람뿐 아니라 그 가정 전체를 제단 위에 모두 바쳐야 했던 경우를 소개합니다. 신앙과 세상 면으로 풍족함이 넘치는 오늘, 우리가 각오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순교사까지를 포함합니다. 넘어서기 어렵고 소망하기 두려우나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경우를 상정하고 실감 있게 읽었으면 합니다.


이 글에는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에 관계된 의미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출간한 신풍교회는 손양원 순교사의 무대가 되는 애양원 입구의 마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아는 이야기 외에 많은 내용을 간직한 곳입니다. 손 목사님의 사모님은 남편 순교 후 그 생전의 신앙 길을 따르셨고 일제 때보다 더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 고난이 원인이 되어 돌아가십니다. 한국교회의 화평을 위해 가족들이 차마 공개하지 않았으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순직이 아니라 순교라 할 만한 사연을 안고 가셨습니다. ‘심봉한’의 순교사를 살피다 ‘손양원 사후의 가족 신앙사’에 핵심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양원 순교기념관에 왜 10명의 순교자가 단체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까? 순교가 그리 많고 흔했던가? 그런데 심봉한의 순교 소식은 왜 철저하게 외면되었을까? 왜 최근에 순교자의 수가 급증할까? 순교자의 가족들은 이런 질문에 그냥 쓴웃음만 짓고 말이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는데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인 손양원의 사후 흐름조차 교단의 정치 상황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습니다. 많은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소




















































심봉한 ․ 심보라 호남의 순교 가족사


           


2013년 4월 13일 초판발행


           


저 자 • 차경희


발 행 • 백영희목회연구소




등 록 • 제03-86호 (2000. 11. 18)


주 소 • 556-893 전남 여수시 율촌면 여순로 419-5


      pkist.net, yileepkist@naver.com


전 화 • 061-682-9800, 010-4631-1631






값 6,000원


심봉한 순교사

심봉한은 일제 신사참배 시기의 호남 지역 3인 순교자 중 한 분입니다.
심보라는 그의 아들로 순교 과정을 목격했고, 50년대 애양원 의무 직원으로
60년대 일본의 의료 광학기기 유학을 거쳐 평생 한국의 '위내시경'과
'현미경' 분야에서 언론에서 '유일'이나 '최초'라고 소개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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