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은 불택자인가, 벧전3:1

공회내부 발언      

함은 불택자인가, 벧전3:1

설명
연구 3 0

함을 불택자로 보는 것은 신앙의 상식이다. 구약을 읽으며 신약의 끝을 맞춰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교단이나 신학교도 구약은 전공자가 아니면 그냥 대충 넘어 간다. 공회는 주교생부터 창세기로 계시록까지를 그대로 읽게 하지 신약만 읽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공회는 벧전3:10이 상식이어서 함을 택자로 본다. 그러나 함의 후손은 기본적으로 모두 구약의 교회가 처단할 대상이다. 불택자요 불신 세상이라는 뜻이다. 함만 그럴까? 연구해 볼 인물이 많으나 가장 대표적인 '함'을 우선 살펴 본다.


 




이제는 구약 전체를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일단 평소 생각한 것은 이렇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택자이며 중생 된 성도입니다. 가인은 탈선했고 이후 하나님께서 버렸습니다. 가인 이후 자녀는 모두 기본적으로 불택자입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압 여인 룻은 예외였듯이 롯은 택자요 중생 된 교인이나 롯의 잘못 된 길 때문에 이후 자자손손 하나님께서 버렸고 이 버림은 신앙 생활 중에 탈선을 말하지 않고 아예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원리로 벧전3:20에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 명'이라 명시를 했습니다. 함은 가인처럼 롯처럼 이스마엘과 에서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함'이라는 인물의 구원 탈락만큼 확실한 인물은 없는데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서 구원 받은 8 명을 명시했기 때문에 함 자체를 택불택으로 시비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나 이스마엘이나 에서처럼 조금 더 애매한 인물은 항상 뒤에 놓고, 구약 성도의 구원 문제가 나오면 벧전3:20에서 '함'은 부부가 함께 구원을 받아 버렸다. 이들의 홍수 후 행위는 성화의 실패가 아니겠는가?


함을 제일 앞에 놓고 다른 애매한 이들을 그 뒤에 두면 설명이 쉬울 듯합니다.


 


 


백 목사님이 건설구원의 핵심 성구를 20여 년 이상 마25장의 '열 처녀'로만 늘 반복했습니다. 열 처녀를 통해 거의 대세가 잡혔을 때 눅16장의 홍포 입은 부자를 꺼냈습니다. 돌아 가시기 직전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열거하면 불바다가 됩니다. 구약에 지옥에 보낼 가장 명확한 죄인을 2 명 잡는다면 1번이 아담이고 2번이 함일 듯합니다. 자자손손 함의 자손은 한 민족이 아니라 그 쪽 인류 전부는 처단 대상이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두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제거 대상으로 올린 민족은 셈 계통이 아니라 함 계통입니다. 셈 계통의 에돔 모압 암몬 이스마엘 쪽은 형제라며 피해 가게 했고 돈을 주고 지나 가게 했습니다. 함 족은 이유여하 없이 생명 있는 것은 전부 학살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함'은 구원 받은 택자이나 함이 신앙에서 탈선하고 확실히 곁 길을 가게 되자 그 후손들에게는 아예 구원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원리로 가인은 신앙의 사람이 죄를 짓고 범죄 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탈선하자 그 후손들에게는 구원 기회 자체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믿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삭을 통해 축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방심하고 교만하고 잘 난 맛에 취해서 자기에게 오는 복을 팔아 먹었지 원래 받을 수 있는 복이 처음부터 주어 지지 않았던 인물은 아닙니다. 히12:16에서 '장자의 명분'은 에서에게 있었고 에서가 팔아서 넘긴 것입니다. 불택자에게는 원래 주어 진 적도 없고 자기 손에 구원을 팔 수도 없습니다. 에서는 택자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이렇게 탈선하고 회개 없이 끝까지 그 길을 걸어 가게 되자 그 후손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이 것이 모든 종류의 구원 계통에 적용 되는 원리로 보입니다.

신앙의 사람이 신앙의 길을 걷지 않게 되면 그의 중생은 불변이나 그의 성화는 절단납니다. 자기는 범죄 이후의 성화만 절단나지만 그로 인해 자기를 따르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범죄의 길에 선 이들은 아예 시작부터 전부 중생의 기회조차 없습니다. 불택자만 쏟아 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순간 생명이 끊어 지면서 그 이후에는 다시는 구원의 기회는 주어 지지 않는다. 물론 바울처럼 하늘에서 직접 불러 구원하는 경우와 룻이나 라합처럼 특별하게 부르는 경우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택불택, 그리고 택자의 중생 후 잘못 된 길을 걷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 범죄로 끝까지 가 버린 후에 발생 되는 일을 이렇게 보여 주시려고 미리 예정했고 그렇게 집행하면서 성경에 이런 면을 기록해서 오늘 우리에게 경계로 또 지혜로 주신 길로 보입니다.


 


 




* 비슷한 원리가 또 있습니다.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 출발 되는 순간에는 근친을 허락합니다. 특수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름 그대로 특수할 때만 사용하고 일반적으로는 최대한 일반적으로 인도합니다. 일반적 번식은 근친 금지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출발하거나 신앙의 첫 출발에 사람 숫자가 모자라면 아담을 만들면서 근친을 피하기 위한 번식용으로 아담 주변에 많은 사람을 함께 만들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근친 금지는 필요한 숫자가 찼을 때 적용합니다. 이렇게 좀 애매한 과도기를 두신 이유는 이 이유보다 더 큰 이유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손, 즉 한 분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 된 우리를 목적에 두셨고 이 목적에 맞는 우리가 '경건한 자손'이며 이 단일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첫 창조 때 여럿을 만들지 않고 아담 하나로 출발 시켰고, 1 차 심판 이후를 위해서도 노아 하나로 시작 시켰고, 보이는 심판이 아니라 내용적 구원의 출발을 위해 아브라람 하나로 출발을 시켰습니다. 방주에 노아 자녀 3 가정으로 된 8 명을 채우지 않고 하나님은 여러 가정의 여러 부부를 모아 8 명을 맞출 수도 있으나 노아 1 명을 앞에 두고 그 밑으로 8 명을 만들었습니다. 단일성의 성장 확대가 하나님의 근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더 중요한 흐름 때문에 출발에는 근친을 막지 않고 오히려 단일을 위해 근친 결혼을 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근친에서 찾아 오게 했고 이삭이 야곱에게도 그렇게 시켰습니다.


 


이후에는 근친 금지를 통해 구원의 넓은 세계 안에서 하나의 구원을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 결혼하게 함으로 단일성을 중심에 두고 근친 여부는 초기에 오히려 복 되게 사용하면서 훗날에는 넓은 의미로는 근친을 유지하면서 좁은 의미로는 근친을 피하게 하여 구원과 진리의 단일성 안에서 각자에게 주신 장단점과 분담과 사명을 묶어 주심을 살펴 보면 참 오묘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한 길을 우리에게 주시되 타락 없는 인도가 아니라 타락을 주시며 타락 속에서 구원을 빛으로 찾아 오게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인류의 구원 역사를 끊임 없이 첫 구원이 다음 단계에 의인과 악인의 길로 나뉘고, 의인과 악인의 두 길이 항상 있는 중 의로운 오직 한 길을 찾을 때 그 의인의 길에 구원의 전부를 쏟아 주시고 악인의 길을 만들게 되면 그 악인의 길을 처음 걸은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의 중생 자체는 취소가 되지 않으나 그의 성화와 열매는 잘못 된 선택 이후에는 완전히 잘라 진 가지가 되어 사망의 길이 됩니다. 그 길에 나오는 후손, 결과, 훗날, 따라 가는 모든 것은 사망입니다. 잘못 된 결정의 순간 그 이후 그 결정에 이어 지는 것은 구약적으로는 한 인간과 한 족속이 전부 하나님의 구원에 아예 바깥이고 신약 우리에게는 성화 구원의 요소나 기회 면으로 아주 끝이 나 버립니다. 근친의 사용을 인류 출발의 초기와 발전 된 이후에 사용하는 사례를 가지고 탈선한 성도와 그 성도의 훗날을 비교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성도의 잘못은 그 성도의 행위 잘못 때문에 중생이 취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중생 된 성도의 잘못 된 행위는 성화 구원에서 탈락 된다. 그리고 탈선한 성도의 잘못 된 행위가 이후에 만들어 내는 모든 운동은 겉으로는 펄펄 뛰며 한 민족을 이루고 두 민족을 이룰지라도 우리는 돌아 보고 헤아려 볼 것도 없이 그 것은 전부 교회 밖의 지옥 갈 세상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가끔 특이하게 라합이나 룻이나 동방 박사처럼 불러 내시는 경우는 있다.




그렇다면

가인 함 롯 이스마엘 에서는 중생 된 성도의 기회를 받은 표시가 성경에 있으니 성도라고 보여 진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구원의 길에서 벗어 난 이들이다. 그들 자신의 중생은 취소 되지 않는 칭의지만 그들이 벗어 난 이후에 가지게 된 모든 언행심사와 함께 그들이 살아 간 결과로 발생 된 그들의 사업 그들의 민족까지 통째로 다 교회 밖이다.


 


마지막으로 변증적 표시를 하나 적어 본다. 칼빈의 개혁주의의 중심은 장로교다. 장로교의 기본 인식은 믿는 부모의 자녀는 태어 나면 그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유아 세례를 주어 천국 백성으로 점 찍어 둔다. 그 시절의 유아는 절반이 죽어 나갔다. 마구 죽어 나가는 유아들이 세례 없이 지옥을 간다는 두려움이 그 유명하고 철저한 개혁주의자들에게도 인정상 부정과 모정 때문에 교리를 엄하게 적용 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가 중생 된 택자면 자녀는 무조건 택자라는 인간이 만든 교리를 앞 세워 천주교식 면죄부라 할 만한 유아세례 제도를 시행했다. 구약은 육체의 이스라엘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무조건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원칙적으로 그렇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면 무조건 다는 아니나 원칙적으로 전부 불택자다. 이 것은 구약이다. 신약은 육체의 이스라엘과 다르다. 육체의 부모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여 아이가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쳐 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구약을 가지고 따지고 있다. 노아 부부가 택자면 자녀들은 유아 세례에 해당 되는 할례가 없던 시기나 그런 효력은 있어야 한다. 제도로서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다. 이스마엘은 구약의 유아세례에 해당 되는 표시를 받았다. 성경은 모세 때 처음 기록했으나 성경의 진리와 구원 도리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할례 제도도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는 아브라함 때 처음 만들었으나 하나님의 자녀를 어릴 때부터 구별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할례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할례 제도를 초월하여 하나님이 알아서 직접 역사해 왔을 것이고 이 것은 이 번 주제의 논점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 간다. 할례는 신약으로 오면서 유아 세례가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세례는 있어도 유아 세례는 없다. 신약에는 각자 직접 신앙을 가지게 되면 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 순간이 육체로는 성인이지만 신앙으로는 이제 막 태어 난 중생자이고 중생의 표시로 세례를 주니 세례라는 것 자체가 유아 세례다. 그런데 유가 사망이 너무 많고 천주교 시절을 막 벗어 난 개혁주의자들이 부정과 모정 때문에 직접 고백하지 않고 죽는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못해 바로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이 두렵다 보니 미신적 안위를 꺼내 들었다. 그 것이 바로 천주교의 흔적인데, 개혁을 하면서 다 개혁을 하지 못한 부분이다.


신약의 유아세례를 이렇게 추궁하고 뒤집어 놓는 이유는 함이 택자라는 근거를 대기 위함이다. 성경이 구원 받은 8 명이라 했으니 함의 구원은 틀림이 없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녀도 태어 나면서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를 해 버리는데 그런 표식은 없다 해도 아브라함 이전의 노아가 자녀 3 명 부부를 데리고 홍수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들을 할례 표시 없다고 구원의 자녀에서 빼는 것이 쉽겠는가? 노아의 자녀이므로 함은 방주에 올라 탔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함의 속 신앙을 들여다 보니 아버지 덕에 구원 받은 자녀지 이 인물의 속은 그 아버지가 그리 고맙고 감사한 신앙은 아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보면 가만히 넘어 온 자거나 가라지거나 거짓 선지자며 교회에 숨어 든 세상 사람이다. 그런데 벧전3:20을 어떻게 읽어서 해결하겠는가?




결론은

함은 택자다. 중생 된 성도다. 시대를 심판한 홍수에서 구원 받은 그 시대 최고의 성도 8 명 중에 들어 간다. 최소한 당대 인류 전부를 다 모아 놓아도 8 번째는 간다. 예수님의 제자도 이스라엘의 지파도 열 둘이니 12 등이 있는데 함은 8 등이다. 그런데 명확하게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함의 홍수 이후는 구원에서 벗어 났다고 적었다. 중생은 취소가 되지 않으니 함은 우리가 천국에 가서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함의 이후에 발생 된 모든 행위와 생애, 그리고 함의 결과로 형성 되는 함족은 하나님께서 스바 여왕처럼 따로 구원을 주기 위해 특별히 기회를 주시면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구원에 해당이 없다.


 


 


(재질문)


 


일반 교계에서는 함도 불택자로 보는 것인지요? 함이 택자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함뿐이 아니고, 노아 홍수에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는 그들 모두를 지옥 간 불택자로 보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 성구를 일반 교계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지요?


요셉이 애굽에 들어간 것을 두고 시편 105:23, 27절, 106:22에는 ‘함 땅’에 들어갔다고 했고, 애굽에서의 10가지 이적을 두고는 ‘함 땅에서 이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애굽이 함의 자손의 땅이라는 말이 아닌지요? 그리고 신23:7-8에는 애굽 사람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후손이 다 들어온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족속들에 비하면 특별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지요


 


 


 


 


(답변)


(신학의 상식)

우리는 기초 상식이 없습니다. 그냥 조금 들은 것으로 대충 살핍니다. 함이 택자면 앞뒤를 살피면서 그렇게 쉽게 모두를 지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에 매몰 되고 선입견이 이어 지면서 성경 전체를 보지 않거나 교리의 어린 시절에 너무 위대한 분들이 기본구원만을 가르치다 보니 걸핏하면 모두를 지옥에 갈 불택자로 규정하고 왔습니다. 함 롯 가인에 대해 특별히 교계 자료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인터넷에 찾아 보거나 박윤선 주석에 보면 쉽게 파악이 될 듯합니다.


기본구원만 아는 이들로서는 우리처럼 폭 넓게 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우리는 이단 취급을 당했으나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모든 것이 너무 명확했습니다. 일단 처음으로 요약해 봤고, 이런 요약이 쉽게 진행 되는 것은 기본 교리가 세워 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계의 상식은 윤영삼 정동진 선생님에게 묻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요즘은 쉽습니다. 전통의 교리 외에 최근 떠드는 사람들의 것은 공회 것이 묘하게 섞여 있어 전통의 정통 교리 입장을 쉽게 단정하지 못합니다.,


 


 


 


 


 


 


 


 

교인 2022.08.23 06:01  
택자인 아담의 허리에서 택자와 불택자가 나왔듯이 함의 자손에서 택자와 불택자가 나왔다고 한다면 노아 이후 셈, 함, 야벳을 통해 모든 인류가 퍼졌는데 셈과 야벳의 자손들 중에도 불택자가 존재하는가? 함의 자손들 중에도 택자가 존재하는가? 육체의 계보와 신앙의 게보가 둘로 나뉘는 것처럼 공회라는 유형의 노선과 내, 외부를 아우르는 단일의 노선도 존재하는가? 과거 80년대 중간반 학생들을 일반 교회로 파송시켜 도움을 줬다면 이제는 그 반대로 공회가 도움 받을 차례인가? 씨를 뿌린 자는 공회,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일반도 공회도 서로 나눠 먹는다. 공회에서 출생, 공회에서 자라 공회만 아는 자와 공회와 일반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모두 아는 자, 이 시대의 사울에서 바울로 전향한 자는 누군가? 백목사님의 육신의 자녀와 신앙의 자녀, 누구에게 그 교훈이 전달되고 계승되어 왔는가? 노선의 껍데기는 공회, 그 내면의 실상은 전 세계 교파에 퍼져 있는 사람들, 단일교회의 모형이다. 각 노선이 주님 중심, 진리 중심의 단일교회로 한 곳에 모이면 재림 임박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연구 2022.08.25 04:11  
장로교의 유아 세례는 택자의 자녀는 택자라는 전제로 합니다.
택자에게도 불택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아담의 사례로 보면 분명하고 불택자가 전도를 받아 중생 되는 것을 보면 불택자의 자녀 중에도 택자는 나온다고 보입니다. 진멸할 대상인 모압과 아람에게서 택자로 표시 된 룻이나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는 구약의 할례 제도를 신령한 신약 시대에서 이어 간다는 논리라는 점에서 이해 못할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공회에서 퍼져 나간 교계의 공회 출신 교인이 많고, 또 교계에 있다가 공회로 들어 와서 제일 핵심에 계신 분도 많습니다. 12 지파가 서로 결혼이나 사명으로 이주하며 오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신령한 신약에도 각자 받은 은혜로 출발과 성장과 최종 앉는 자리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보입니다. 타 교단에서 출발하여 그 곳의 장점을 익힌 분이 공회로 들어 와 공회의 장점으로 더 자라 가는 경우도 있고, 공회에서 익힌 분위기 때문에 평생 타 교단에서 끼치는 것도 있고 또 배우는 것도 있다고 보입니다.
교인 2022.08.26 05:59  
장래 일, 신후사를 알 수 없듯 눈에 보이는 유형의 노선 이면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노선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니 그 깊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 수준에서 예상한다지만 헤아리고 단정짓기는 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밧모섬 시기가 사도 요한 죽기 몇년 전인데 그렇게 평생을 알았다고 했던 주님이 낯설었고 밧모섬 유배 때 그 몇년동안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며 알게 된 주님이 일평생 알았다고 했던 그 평생 기간을 앞질러 버립니다. 나중된 것이 먼저 알았던 세월을 일순간에 삼켜 버립니다.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노선은 무엇인가? 12사도를 비롯하여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그 선민사상을 깨기 위해,  신약은 괴수인 예수의 가르침이니까, 이단사상이라 정죄하니 이방인의 신앙을 높여 지금은 비록 세게 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나 신앙면은 갈수록 유대인들이 쪼그라 들고 있고 시기나게 하여 이방인들을 통해 유대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시는 일들이 빈번이 일어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공회인과 외부인. 공회의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는 안주와 안일주의, 외부는 기능구원을 모르니  구원의 건설은 거의 없다고 하는 정평정가를 가장한 우월주의, 공회 2세대는 이런 인식이나 의식이 전혀 없을 수 있으나 3세대, 4세대로 내려 갈수록 가풍 교풍의 분위기로 인해 들은 풍월이 있어 그 움싹이 자라간다면 이 또한 함 속에 있던 저주거리가 될 수도 있다. 공회의 장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공회의 약점은 어떻게 보완해 나갈 것인가? 외부에서 내부로 유입되는 교인들의 언행을 유심히 살펴 일단 먼저는 가르쳐 주기 보다 배우려는 자세로 상대를 대한다면 공회의 약점이 강점으로 승화될 것 같다. 남녀 전혀 다른, 정반대의 성질의 이성이 만나 합방을 통한 생명 탄생의 원리라고 설명한다면 너무 과장된 비약의 표현일까?


함 속에 버려야 할 요소를 그대로 둔다면 자손들 중에 불택자가 생겨난다는 말,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내 속에 신앙 급소인 죄악을 뽑는데 가장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사람과 부대끼고 마찰되면서 깍이고 날카로워져 간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만날 때 비로소 본연의 자기 본모습을 보게 되고 공회인은 외부인과 접촉할 때 자기 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 네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고백할 때 피키스트 글도 우리라는 궤도를 바로 잡게 된다. 물론 주님처럼 독사의 자식들아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처럼 외쳐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불택자가 누군지 모르듯 성전 밖 마당도 끝까지 성전 밖 마당으로 끝날지  언젠가 사도 바울처럼 성전 안으로 들어와 한 시대를 감당하는 중심이 된다면 공회인들, 우리의 시기나 질투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최일선에서 주동한 자칭 바리새인이 되거나 아니면 12제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사후 90년대부터 지금까지 공회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 구원 아니면 멸망, 공회가 말하는 노선에 중간, 회색지대는 없는 법이다. 중보라는 가면을 쓴 일시적 중간도 내면의 중심은 결국 둘 중 하나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유대인 중에서도 헬라파 유대인이냐 히브리파 유대인이냐 공회인 중에서도 아버지가 태생적 공회인이냐 아버지는 외부인인데 자녀가 태생적 공회인이냐 외부에서 공회 내부로 들어와 공회인보다 더욱 공회를 발전시키느냐 공회에 있다가 어떤 연유로 인해 외부로 나가 외부를 공회 이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절대 주권의 주님만이 선택하고 결정하실 일이다. 우리는 단지 그 결정과 선택에 따라 공회 내부든 공회 외부든 현실이라는 땅에 심겨질 뿐이다. 공회 외부에도 건설구원, 기능구원 더 나아가서는 공회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교리가 나올 수도 있을까? 교회사 교리가 어느 정도 대개 다 퍼진 말세인 지금은 가능할까? 칼빈 정통에서 백영희 정통으로, 그 다음 촛대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금번 8월 집회 주제 '절대주권과 자유의지'를 공부하면서 문득 생각난 질문이다.  때론 불목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외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서는 측량 못하도록 주님이 은밀하게 일하시는 무형의 단일 노선 역사에 그 깊으신 지혜와 지식의 뜻을 누가 알랴... 만은?


그래서 택자, 불택자 교리처럼 노선 연구도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것 같다. 사도 요한 말년에 주의 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와 그 이후 요한의 개인적 노선의 향방과 사명은 극명하게 달랐다. 죄파에서 우파로 전향하던 그 때와는 비교 못할 만큼의 판이하고도 급변한 방향전환, 턴처럼 말이다. 이 시대의 종, 단 한편의 설교를 듣고 원점으로 돌아가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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