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의 현주소 - 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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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공2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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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3 00:00
총공회의 현주소
총공회의 현주소
지금의 총공회는 여전히 외부에게 이상한 교파로, 또 분파의식이 강하여 싸우는 교파로까지 인식되어 있다. 얼마 안 되는 교회가 자꾸 나누어지니 속 내용이야 어떻든 그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 상태로 계속될 수도 있고, 변동될 수도 있겠으나 큰 변동이 없을 것으로 본다. 외부에서 보는 시각도 그러하고, 우리 내부에서 여러 개 즉 현재 부산 대구로 나뉘어 진 것이나 부산공회내에서의 나누어져 있는 분파도 그대로일 것이다.
총공회야 어찌되던 우리 교회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총공회에 속한 자로서는 옳지도 않거니와 실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총공회를 위하여 힘써야 하고, 총공회가 바로 되는 것이 우리 개교회가 살고 잘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은 한 몸이요 지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힘써야 할까?
외부 인식에 관하여는
총공회는 그 이름과 같이 독특한 교리 신조 행정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옳다고 믿고 따르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信行(신행)을 보고, 우리와 같은 교리 신조 행정을 갖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믿는 분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외부에서 그렇게 봄으로 인하여 복음운동에 불리한 점도 많이 있고, 우리 스스로도 난처한 적이 많이 있다. 그러나 총공회 교리 신조 행정이 옳기 때문에, 또 그것을 信行(신행)함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영원한 구원의 영광은 그 어려움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외부 인식으로 인하여 오는 어려움은 십자가로 여기고 기꺼이 감수해 나아가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말로, 의롭고 능력있는 신행으로, 성화된 자체로, 교회 부흥으로 이러한 교리 신조 행정의 탁월함을 보여주어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이 복음으로 구원받는데 까지 도달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줄 알고 힘써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초절적이고 원만치 못한 언행이나, 게을로 인하여 불필요하게 이색지고 마찰하여 총공회 복음의 宣播(선파)를 가로막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자니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고, 또 힘을 합하고 또 합해도 어려운 싸움을 우리는 하고 있다. 공회 현실은 좀 답답하다.
아직도 우리는 내부 문제에 진액을 쏟고 있다.
이것도 현실이고 보면 이에 관하여는 먼저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총공회는 부산공회파와 대구공회파 2개의 큰 구별이 있다. 이 두파의 구별은 비교적 명확하여 부산 공회는 보수적이고, 대구 공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 특색이다. 이는 나누어질 때부터 스스로 인정한 것이니 이견이 없을 것이다. 좀 묘한 것이 부산공회내의 분파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백목사님 그대로파)이다.
이 파는 백목사님 교리신조 행정을 일부의 설교록식으로 해석하여 예수님 재림때까지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 총공회라고 믿고 있는 파이다. 백목사님 그대로라는 생각을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이고, 이것이 총공회 보수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견 가장 총공회적으로 보이면서 실은 가장 총공회적이지 못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총공회 사상의 핵심요체는 개인은 개인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그때그때 영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 파는 본의 아니게 백목사님 우상화로 기울어질 위험성이 있다.
둘째로, (건전한 백목사님파)이다.
이 파는 백목사님 교리 신조 행정을 성경적, 객관적으로 이해하여 굳게 보수하되, 성경적 영감적으로 개혁(개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보수 속에 진보로 나아가고자 하는 파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요 가장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노선이다. 말 그대로만 나아가면 총공회의 앞날은 매우 밝고 힘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것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요, 실은 가장 빨리 속화 타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셋째로, (백목사님 주관파)이다
총공회 무리에 속하지 않고 개별적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 백목사님 교리 신조 행정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믿고 따르고 있는 분들이 있으니 백목사님 주관파라 할 수 있겠다. 이 파는 어떤 분은 백 목사님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어떤 분은 다각도로 연구하여 믿고 따르는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이 파는 상기한 대로 自高(자고)하고 편협한 지식으로, 객관의 아무 제재가 없이 주관으로 흘러서 어디까지라도 치우치고, 탈선하고, 부덕스러울 위험성을 갖고 있다.
상기한 각파가 존재하며 그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위험성은 위험성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고, 각파는 그 실력대로 또 그 속성대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총공회의 현황이다. 그 영향력에 따라 총공회는 변할 수 있다. 누가 그 파냐? 하는 것은 나타낼 정확성도, 필요성도, 유익성도 없다. 이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회를 위하여 힘써야 할까?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 늘 곤혹스런 사실을 대하게 된다. 총공회 보수적 사상이나 보수력이 있는 파는 그 주관성으로 인하여 매우 치우치고 부덕한 행태를 보이고 있고, 좀 건전하고 덕스러운 파는 그 보수성이 약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수많은 층어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 걸음은 한편에서 보면 시원스럽지 못하고 느려 보여도, 또 다른 편에서 볼 때에는 융통성이 없어 보여도 正道(정도)를 가야 한다. 성경에서 경계하신 것처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는 백성이 되어도 안 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파악과 지식에 따라 우리는 일단 자기의 입장을 건전한 백파로 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 길이 논리와 실제상 옳기 때문이요, 그 길의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
여러 인간적 요소와 기득의 이해성을 넘어서 합해야 한다. 적어도 백 목사님 보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합해야 한다. 합할 때 각 파의 좋은 속성은 乘合(승합)적으로 역사할 것이요, 나쁜 속성은 제재, 혹은 제거될 것이다. 정상의 총공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괜한 소리로 치부해 버리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본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 혹은 정확한 현실이라고 하면 합할 수 없고, 합하지 말아야 한다. 합하지 않는 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합할 수 없기 때문에 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위를 떠난 현실은 개인에게나 단체에게나 언제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귀결이 되면 각파대로 나아가면서 좋은 점과 함께 위험성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단속하는 힘든 싸움을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아니라! 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자기 책임과 분수를 넘는 악의적 언행이나, 남의 죄나 일을 간섭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절제도 필요하다. 특별히 남을 훼방하는 유혹을 抑止(억지) 하고 사랑 안에서 물 흐르듯 가야한다. 가다 보면 결국 만날 사람들은 만나고 나누어질 사람들은 나누어 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집회와 양성원의 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장소도 내용도 절차도 정상화 되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쪽도 정상이 아니다. 정상화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첫째, 합하여 한 집회 한 양성원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한 장소를 합의하에 나누어 쓰는 것이다. 셋째, 은혜로이 나누어져서 따로 하는 것이다.
다만 셋째의 경우는 ‘때가 되면’ 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또 첫째가 이루어지는 것이 제일 좋으나 현실적으로 안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있어 집회와 양성원의 정상화는 한시적으로나마(은혜로이 해결될 때까지) 한 장소를 합의하여 나누어 쓰는 것이다. 법적으로 양심적으로 당연한 일 아닌가? 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 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매우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마져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유를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악이요, 전혀 억지임은 본인들도 잘 알 것이다. 억지가 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심판도 생각지 못하는 惡(악)이요, 근시안적 행태이다.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집회와 양성원을 통한 총공회 복음 운동을 해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집회와 양성원의 정상화를 거부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법적, 물리적 방편을 써서 그 일을 이루는 길이 하나 있고, 합의적으로 그 일을 이루는 길이 있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또 한 방편이요, 마지막으로 포기하고 달리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도하고 있는 이 방편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가 무능 혹은 무관심에서 나오는 무책임한 방임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그대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다른 방편의 길을 잡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이 점도 아울러 기도하며 찾고, 대비하기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먼 결과까지를 미리 보여 주시므로 그 결말을 보고 오늘을 가는 걸음을 걸을 수도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헤쳐 가다 보면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도 있는 것이 우리들의 걸음이다. 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가야 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