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세상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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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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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5 00:00
최남선의 인색함에 날아간 문화 유산
최남선이 그토록 인색하게 굴며 끌어안고 있던 <장전산고>는 6·25전쟁 때 재가 되고 말았다. 만약 최남선이 그 책을 광문회에서 인쇄했거나, 아니면 식견이 있는 사람을 시켜 정사본을 여럿 만들게 했으면, 원본이 사라져도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이었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은 광교 근처를 지나다 군밤을 산다. 한데 군밤을 싸 주는 종이가 뭔가 이상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고서였다. 그는 군밤 포장지를 뭉치로 샀다.
권보상은 책을 광문회로 가져갔다. 광문회는 1910년 조선의 고전 문헌을 간행하기 위해 최남선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단체다. 고전에 해박한 지식인들이 책을 보고 몰려들었다. 검토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이 났다. 이규경은 저 유명한 이덕무의 손자다. 이덕무는 섬세하고 치밀한 산문이 장기지만, 박학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이규경은, 문장은 그의 조부보다 결코 나을 수 없지만, 박학으로 말하자면 조부를 능가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란 긴 이름의 책이 그 증거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고증한 ‘변증설’ 1416편의 모음이다. 이 책은 조선후기 학계가 상상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까지 도달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우리나라 안경의 기원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애체변증설’을, 춘화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다면 ‘화동춘화변증설’을 보면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 오류와 엉성함을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이 책의 장처(長處)를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1940년 설의식은 김춘동에게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문화를 보존하는 사업으로 옛 전적을 간행하자고 제안한다. 최초로 선택된 책이 <장전산고>였다. 인쇄 저본은 최남선 소장본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베낀 필사본을 다시 필사한 것이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필사를 담당한 사람이 식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 필사 과정에서 엄청난 오자와 오류가 생겼던 것이다. 원본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광문회가 해산되면서 <장전산고>는 최남선의 장서가 되었던 바, 설·김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최남선을 찾아가 원본을 보여 달라 사정을 했지만, 결과는 완강한 거절이었다.
최남선의 거절은 설·김 두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이규경이 인용한 그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찾아 읽고 <장전산고>와 대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원고를 마련하던 중 어떤 사람이 <장전산고>의 정사본(淨寫本)을 가지고 있다 하여, 빌리고자 적지 않은 돈을 건넸지만, 원래 그런 책은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다시 고심참담 원고를 만들던 중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민족문화운동이 질식되자, 두 사람은 위기를 느끼고 일부 완성된 원고만 지형을 떠서 간직하고 출판을 보류한다.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다시 <장전산고>의 출판을 도모하지만, 각각 다른 일로 바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어 발발한 6·25전쟁으로 <장전산고>의 원고도 지형도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이상은 김춘동,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취(就)하여>, <운정산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7에 의함).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현재 영인본이 나와 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의 필사본(지금의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이 무수한 오류를 지닌 책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오랜 교정 과정을 거쳐 현재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높이 평가해야 할 소중한 결과물이지만, 당연히 이규경의 원본은 아니다.
나는 왜 이 난삽한 책에 대해 이토록 중언부언하는 것인가. 최남선이 그토록 인색하게 굴며 끌어안고 있던 <장전산고>는 6·25전쟁 때 재가 되고 말았다. 만약 최남선이 그 책을 광문회에서 인쇄했거나, 아니면 식견이 있는 사람을 시켜 정사본을 여럿 만들게 했으면, 원본이 사라져도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최남선은 희귀한 책을 구입하면 자랑은 하면서, 널리 알리거나 동학들과 함께 보기를 꺼려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최남선의 인색한 성품이 귀중한 문화유산의 원본을 날려 버린 것이다.
책은 또 그렇다 치자. 허접한 원본이라도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림은 어떤가?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그림은 단 하나뿐이다. 옛 그림을 공부하자면 원본의 미세한 부분까지 확인해야 하고, 색채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이 어디 그런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신윤복 풍속화의 경우, 이런 저런 책에 실린 도판은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모를 정도로 상태가 판이하다. 예컨대 옷의 색이 원래 붉은지 연분홍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그림 해석에 오류를 낳을 것이다.
공공박물관, 또는 공공성을 표방하는 사설미술관에서는 말끝마다 자기들의 소장품이 민족의 빼어난 문화유산이니 뭐니 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한데, 연구에 필요한 그림이 있어 이용하자고 하면(또는 촬영하자고 하면) 첫마디에 거절하거나 엄청난 값을 불러 엄두를 못 내게 만든다. 인색하기 짝이 없다. 널리 자랑할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면, 빼어난 복제 수단을 갖고 있는 이 시대에 어찌 원본에 가까운 복사본을 하나 만들어 두고 필요한 사람에게 염가로 제공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요즘 그림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는 늘 그 그림들이 최남선이 홀로 끌어안고 있었던 <오주연문장전산고> 원본의 운명을 맞을까 두렵다.
‘민족의 문화유산’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독점물이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계신 분들께 간절히 바란다. 민족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싶다면, 귀중한 그림을 디지털화하여 이용자에게 헐한 값을 받고 제공해 주시기 바란다. 신윤복이 미술관 금고에 모셔 놓으라고 풍속화를 그린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19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