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에 대한 9가지 문답

공회내부 발언      

경건에 대한 9가지 문답

설명
서기 0 5

(9가지 질문) 


 


질문 1. 하나님의 사랑과 뱀의 사랑에 대하여


질문2.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사랑에 대하여


질문3. 사활대속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질문4.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과 희생


질문5. 주님을 사랑하는 건지?


질문6. 세상 유혹을 이기는 법과 죄를 피하는 법은


질문7. 주님과의 교제


질문8. 새해 실천


질문9. 하나님이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


 




 


1. (질문) 하나님의 사랑과 뱀의 사랑에 대하여 646


 


이곳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평소 백목사님은 기독교인의 참사랑과 겉사랑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말세에는 사랑을 구별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사랑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뱀의 사랑, 겉사랑과 속사랑, 인간을 살리는 사랑과 죽이는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인간이 사랑을 좋아 하지만 사랑을 구별하지 못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참사랑은 무었 인가요?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입고한 행위가 참사랑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예를 들면 제가 교회에 가면 저를 보고 조금 모자란듯한 분이 제게 돈을 1천원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 몇번은 주었지만 그 다음에 계속 주는것도 바른 행위가 아닌 것 같아서 주지 않고 있습니다. 돈을 주는 것이 불쌍한 사람을 돕은 참사랑인가요? 아니면 주지 않은 것이 바른 사랑인가요?


사랑은 현실현실 신앙생활 에서도 많은 갈등을 생기게 합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참사랑과 껍데기 사랑 그리고 사랑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답변) 구원에 진정 도움될 도움이면 사랑이겠으나, 그런 경우는 희귀합니다.


1.'사랑'은 예수님의 대속, '사랑의 행위'는 그 대속을 전하는 것입니다.


①사랑의 정의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어떻게 정의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질문이며 사랑을 분석해야 될 답변이니 우선 사랑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세상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기준으로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도록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말은 좀 애매해도 어떤 사람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도 다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하게 또는 좀 다르게 표현하고 정의한다 해도 넓은 범위에서는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슨 표현으로 사랑은 이렇다 저렇다고 할찌라도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②죽은 사람에게는 살려놓는 일 외에는 어떤 사랑도 해당이 없습니다.


죄로 죽어 지옥 갈 사람에게는 오직 예수님을 믿게 하여 그를 구원하는 일 외에는 어떤 사랑의 어떤 표현도 '말'뿐이지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놓는 일 외에 무엇으로 어떻게 해도 그를 좋게 그가 잘 되도록 하는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만 구원받고 중생되는 것이니 예수님을 전할 연구 예수님을 믿게 할 열심 예수님 믿는 사람이 실제 되도록 하는 일에 필요한 것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게 되는 '구원'을 전하는 것 외에는 누가 무슨 말로 어떻게 하든지 사랑은 아닙니다. 단, 세상이 잘못 알고 있는 이런 저런 행위들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필요하게 사용했다면 그런 세상 행동이 구원에 사용됨으로 사랑의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③마찬가지로,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건설구원에 도움 될 일만 사랑입니다.


이미 믿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도움되도록 하는 것만이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건설구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망하게 죽게 한 미움이 됩니다.


건설구원으로 그 사람을 길러가는 것도 결국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구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속하신 것이 사랑이고 이 대속으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사랑이고 이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사랑이고 구원받은 사람을 바로 믿고 살도록 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자타의 구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사랑이고 자타의 구원에 반대가 되었으면 살인죄에 해당되는 미움입니다.


 


2.질문하신 내용에 적용을 한다면


①물질적 도움이 있어야 그 사람 구원에 유익될 것 같으면 물질 도움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이 있어야 신앙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하실 때 도운 것은 사랑입니다. '물질적 도움 = 사랑'이 아니라 '구원에 도움될 행동=사랑'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물질적 도움이 그 사람의 신앙에 손해가 되었으면 그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가 됩니다.


②교회 안에서 물질적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경우 대개는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절박하여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그 순간에 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런 경우에서는 교회라는 곳을 도움받기에 편리한 곳으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 외부의 처량함과 불편해 보이는 형편을 이용하여 교회를 물질 도움을 채울 곳으로 상대한다면 그 사람의 건설구원은 희망없이 악화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꼭 도울 경우인지, 교회를 도움의 장소로 이용을 하는 것인지는 처음 접하는 경우는 혼동될 수 있으나 몇 번 반복해서 만나는 사람인 경우는 판단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③하나 꼭 주의할 것은


비록 그 사람의 구원에 도움되지 않을 경우라도 그 형편이 너무 어려워 그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일단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에 도움되는가 여부보다 일단 생존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내 눈 앞에 있고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는지를 고려하여 긍휼히 여기는 '동정'의 수준에서 도울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의 경우로 말한다면 그가 부모 자식인 경우, 형제인 경우, 집안인 경우, 이웃인 경우, 같은 교인이라도 어떤 관계인가 등에 따라서 내가 도울 양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 양을 계산할 때는 내가 맡은 나의 경제가 나의 직접 구원에 책임있는 부분에 어떻게 배정되었는지를 보며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여 그 범위 안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3.경험상


물질 도움이 구원에 도움되는 경우로 이어질 경우는 참으로 찾기가 어렵고, 동정으로 도울 경우는 더러 있으나 내가 가진 내 경제와 내가 가진 더 중요한 책임을 면밀히 따져 보면 그리 많이 하고 자주 할 경우가 적으며 (신앙에 깬 사람이면 교회나 여러 복음운동에 앞서 바쳐 사는 양이 많아서 일 것이고, 만일 신앙에 크게 힘쓰지 않는 사람이면 다른 면에 지출할 것을 하지 않은 상태가 많을 것이니 자기에게 더 급한 책임도 하지 않는 이들이 감정에만 지나쳐 옆집 강아지 죽은 것에 더 슬퍼하는 모순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현 우리나라 경제로 말한다면 물질로 도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법과 최저생계 보조금의 액수는 4인 가족의 경우 65만원정도가 책정이 되어 어떤 형태로든지 지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 경제이면 공회 소속 교역자들의 4인 가족 월 사례비와 같은 수준입니다. 만일 그가 관공서 신청방법을 몰라서 어려운 중에 있다면 도와 줄 1천원 대신 관공서에 그런 혜택을 받는 방법을 열어 주는 것이 보다 나을 것입니다.


자기의 어려운 형편으로 여러 곳에서 알아서 챙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물질로 돕는 일은 대개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아시고, 그러나 나 혼자 꼭 따로 챙겨 도울 곳은 자세히 훑어 보시면 주변에 적지 않다는 것을 따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사용하는 나의 경제가 알뜰하게 열매로 맺어지는 경우는 개인마다 너무 차이가 많아서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으나 이런 남 몰래 나 혼자 구원위해 근실히 알뜰히 투자해놓는 곳이 적지는 안도록 했으면 합니다.


 




 


2. (질문)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사랑에 대하여 2780


 


도성인신, 십자가대속 공로, 부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찡하게 와닿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 사랑을 세밀히 설명좀 해주세요.


도성인신의 사랑을 깊이 있게, 대속에 사랑을 깊이 있게, 부활에 사랑을 깊이 있게 설명을 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부활하신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왜 고통인지요?


 


(답변) 두 질문에 연관성이 있어 한 자리에서 답변하겠습니다.


1.첫 질문에 대한 답변


이번 질문처럼 은혜나 감동을 원하는 경우는, 답변자가 해야 할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의 중심 중의 중심은 주님의 대속의 희생입니다. 그 사랑에 미치고 그 사랑에 사무쳐 죽어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설교가 백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이곳 홈 /초기화면/활용자료/설교/녹음본/ 등에 제공된 설교 중에서 '세례 성찬' 관련 설교를 찾아 보시면 거의 이 면에 대하여는 깊은 말씀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전 밤예배를 마치고 수천명 교인들 쏠려나오는 가운데 안경을 낀 30세 가량의 청년 한 분이 자기 집과 정반대 골목으로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만취한 사람처럼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음날 그 동생 되는 분이 어제 자기 형님이 밤예배 말씀 중에 주님 대속 설교에 감격하여 정신을 잃은 채로 예배 후 귀가길에 한참을 딴 길로 가다가 정신을 차렸다면서 감격을 전한 일이 기억납니다.


백목사님 서부교회 주력 교인들의 은혜는 박수가 아니고, 율동이 아니고, 써클 활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 시간에 가슴 속을 파고 드는 대속 관련 말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는 기독교 상식의 말씀, 바로 그 말씀 속에서 천하를 발로 밟고 생명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교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 홈 /초기화면/활용자료/설교자료/에서 제공하는 내용은 당시 그 말씀들을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율동과 박수와 환호와 써클활동 등은 그 현장을 다른 곳에 옮겨놓을 수 없지만, 말씀의 이치를 가르쳐 은혜의 불을 일으켰던 역사는 이곳 녹음과 문자를 통해 그대로 재생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 답변자는 이곳에 제공하는 설교를 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직업으로서도 수없이 들었습니다만, 지금도 한번씩 새로 듣거나 읽어보면, 그때보다 더 큰 은혜와 감격을 받습니다.


그 감격의 설교를 이곳 답변자를 통해 듣게 되는 것보다, 이곳 답변자를 완전히 흔들어놓은 그 설교에 직접 감전 당해 보시라고 권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고 또 왜 그렇게 전개가 되는지 안내를 받고 싶은 분께는 이곳 답변자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은혜, 그 감동과 감격이 사모되는 분에게는 100볼트짜리 이곳의 저압선보다 몇 십만 볼트 초강력 고압선에 바로 선을 대 보시라고 권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2.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부활은, 죽을 인간에게는 좋게 들리지만 원래 하나님이셨던 분에게는 한없는 불편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죽을 인간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부활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다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개념은 최고의 소망이요 희망사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온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화장실 구더기가 된 것을 두고 구더기들은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그 집 주인이 그 환호성에 취해서 자기 집 구더기가 되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죽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두고 인간은 죽음 너머 부활만 생각하고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영원히 산다면 이는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기준을 하나님에 둘 때 부활은 불편이고 고통입니다.


 




 


3. (질문) 사활대속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2782


도성인신과 사활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자기를 마음껏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1.도성인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낮아져야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 위 인간이 되기까지 낮아졌습니다. 그 희생 그 낮아짐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낮아짐을 거리로 측량하여 우리도 그 만큼 낮아지려면 이 땅바닥 밑으로 얼마나 내려가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가장 높은 사람이 이 나라 가장 낮은 사람까지 낮아진다면, 하나님의 하늘에서 이 땅 위에까지 낮아짐에 비하겠습니까?


도성인신은 하나님께서 사람되어오기까지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감있게, 또 실제 현실에서 그 은혜 받은 사람으로 사시려면 사정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지는 '척'이 아니고, 낮아지는 '흉내'도 아니고, 낮아지는 '성의표시'에서 그쳐서도 안됩니다.


교회 장로님이 주일학생 하나를 향해 90도 깍듯이 절을 하되, 남들에게 겸손한 장로님이라고 광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으로 낮아진 그 '하강 높이'를 고려할 때 90도로 자기 허리를 꺾는 것은 너무도 죄송한 마음이라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냄새나고 지저분한 교인이 하나 와도 그를 외동아들 품에 안고 싸고 돌듯 해야 합니다.


자기 교회 가장 악질 교인, 막 가는 교인을 상대하면서 자기 마음 속에 추호라도 그가 죄인으로 악인으로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죄인이 아니고 악인이 아니라서가 아니고 나는 그 사람보다 얼마나 더 악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작은 악과 작은 죄는 내 눈에 의와 선으로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으로 끌어내려 십자가에 못박은 죄가 바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사람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남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것은 내 머리 속에 내가 계산할 때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낮은 사람이 없도록 낮아질 수 있는 그 사람, 그 어떤 사람을 봐도 나보다는 좀더 나은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낮아진 것만큼 낮아지지는 못했으나, 그 낮아짐을 생각하고 그래도 자기대로는 많이 낮아짐으로 그 낮아짐의 은혜를 자기 은혜로 삼은 사람입니다.


만만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목회자의 설교를 설교라고 들어주러 오는 교인들에게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 같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1년 내도록 듣고도 참고 있는 교인들의 인내에 감사합시다.' 목회자가 겸손에서 가장 앞서고 장로님이 그 뒤를 따르고 신앙있는 순서대로 그리 되어져야 교회입니다. 겸손하기 위해서 겸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람으로 끌어내린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제 그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것인가? 그 끌어내린 그 자리만큼이 도성인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 받은 사람으로 산 양입니다.


 


2.사활의 대속을 받은 자라면, 늘 죽어 살아야 합니다.


사람되어 오신 그 하나님을 우리는 우리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손에 죽으신 그분은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손에 죽었습니다. 그분의 부탁이 우리가 짓는 죄는 하나님을 사람으로 끌어내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죄이니, 죄는 죽어도 짓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할의 대속을 받은 자라면, 죄를 상대할 때는 자기 모든 것을 다 걸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자기 목숨은 늘 내놓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타협도 어떤 흥정도 어떤 협박도 어떤 시험도 상대할 수 있는 자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단번에 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치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킬 만한 순교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서부터, 또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을 만났을 때, 앞서 간 종들과 같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자기를 만들도록 지금 자기 현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씩 실제로 해나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 의자 밑에 쓰레기 하나 주워나가는 지극히 작은 일 하나를 두고, 귀찮다고 못본척 하는 사람은 앞으로 그 어떤 희생도 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찮은 작은 일 하나에 주님 원하시는 일이라면 자기를 꺾고 자기를 움직여 그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런 작은 불씨를 길러 앞으로 큰 어려움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주님 사활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말씀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죽고 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를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4. (질문)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과 희생 2838


 


1.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과 구원의 희생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력하여야 합니까?


2. 두 번째는 이 구원의 사랑과 구원의 희생을 믿고 이 구원대로 가져 누려야 하겠는데 어떻게 누려야 하나요?




3. 세 번째로는 구원에 사랑과 희생을 현실에서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항상 생각하고 기념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답변) 십자가 통증을 실감해 보셔야 합니다.


1.예수님의 구원의 사랑과 희생을 아시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실감하는 것이 그 사랑과 희생을 아는 입문입니다. 길을 가시다가 혹 넘어져 다치시거든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날 위해 못박힌 십자가 통증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여자분들이면 일을 하다 손가락 끝을 바늘에 찔려 아플 때,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에서 못박힌 손바닥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생활 속에 우리 육체가 아픔과 통증을 느낄 일은 많습니다. 그때마다 그 고통을 느껴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쉽고 간단한 체험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통증을 100이라고 했을 때 나 하나만을 구원했다면 나 하나 위해 100 고통을 당했겠지만, 100명을 구원했다면 나 하나를 구원하는 데 들어간 통증은 1이 아니겠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체 통증은 그 통증 전부가 나 하나를 위한 통증의 양이었습니다.


여자분들이면 아이를 낳을 때 큰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 통증 가운데 주님 날 위해 못박힌 그 희생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만일 최근에 몸이 아프거나 이제 말씀드린 그런 아픔을 체험할 일이 없으시다면,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보셨으면 합니다. 긴급하게 실려와서 못견디고 울부짖는 모습들을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또 병원 내 다른 곳과 달라 응급실은 가장 위험하고 급박한데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실제 자기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 자기 눈으로 체감할 수 있는 아픔에서 주님 희생을 느끼셔야 합니다.


조직신학 공부로는 주님의 아픔을 '우주적 고난'이라는 한 마디로 포장을 해버립니다. 그런 표현은 한번 들어두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랑과 그 희생의 실상을 아시려면 내 육체에 가해지는 직 간접의 통증을 겪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과거 답변자를 지도하시던 분은 노동 중에 제일 힘든 노동을 시킵니다. 따로 다치거나 아픈 일이 없어도 가장 힘든 육체 노동을 통해 죄값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대신하신 주님의 희생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보다 천배 만배 더 큰 그 주님의 고통을 실감하는 것이 연속되어지는 만큼 대속의 사랑과 희생을 안다는 뜻입니다.


 


2.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실제 누리는 사람이 되려면?


지금 질문자와 답변자 손바닥에는 못이 박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면 그는 그 희생을 실제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행한 짓으로 볼 때 현재 우리 손바닥에 못을 박아 벽에 걸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느끼며 평생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고통을 대신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고통이 면제되었습니다.


감옥살이를 면제 받은 사람이 면제 받은 기쁨과 실상을 누리려고 한다면, 감옥 밖의 자유를 느끼고 그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면제받은 것을 누리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자동차를 사주셨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 자동차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바로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 못박히시고 그대신 우리 손에 들어올 못을 면제시켜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이 순간 자기 손바닥을 보며 마땅히 못박혀 있어야 할 손바닥에 못이 없다는 이 기쁨, 이 감격에 전율을 느껴야 합니다. 주변에 암진단을 받고 이미 관 속에 들어간 것처럼 낙담을 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며칠 뒤에 암이 아니라는 통고를 새로 받게 되었습니다. 당장에 들판에 나가서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고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암에서 해방된 기쁨을 실제 누리는 사람입니다.


지금 토요일 오후니까 질문자와 답변자는 어느 뒷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며 비틀거리고 살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어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보고 오히려 불쌍하다고 동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 통증 고통을 다 대신 당한 덕분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사랑과 희생을 누리는 사람이 되려면, 그 십자가 고통으로 인하여 현재 내가 어떤 상황을 가지고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면을 많이 느껴보셔야 합니다.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도 감격스러워야 합니다. 지금 내 입에서 주님을 부르게 되었다는 이 사실에 정신을 잃을 만큼 기뻐야 합니다. 생각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는 데에서 그 즉시 그 희생과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3.현실에서 항상 구원의 사랑과 희생을 잊지 않고 기념하시려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자기 손에 박힌 못을 빼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못이 박혔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행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모르고 마치 마약에 취해 제 기분에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면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믿게 하려면, 나는 내가 받은 구원을 노래하고 두 발 뻗고 평안하게 천국을 기다리면 되는데, 내가 나서야 합니다. 그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 또 이미 믿는 이들이면 더 잘 믿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기 싫은 심방을 나가야 합니다. 그 수고가 바로 주님이 당할 필요없는 십자가를 지셔서 날 구원한 것과 같은 수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구원에 감격하여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수고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바로 그 고통이 이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가 됩니다. 첫 십자가는 주님이 지셨지만 그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해 놓으신 주님께서 그 구원을 자기 것으로 누리게 하는 고생과 수고는 우리가 지고 갈 십자가로 따로 떼놓고 가셨습니다. 자타의 구원을 위한 수고, 그것이 바로 주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생활을 주님 기념이라고 합니다.


 


(재질문) 수술의 통증에서


고래잡고 어기적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빙긋이 웃음이 나옵니다.


사족이지만,

본인도 수술을 받았지만, 받은 후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는데 점점 아려오는 아픔이란..


문득 무릎을 꿇고 있으며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고통이 이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던 어기적거리고 다닐만한 고통은 그시로 바로 사라져 버리더군요. 지금생각건대 그정도의 아픔은 비교도 안될 것이라서 아마 통증을 없애 버리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뭏든 그 후로는 어기적거리는 애들보면 왜 저렇게 다니는가 싶더군요.


 


(답변) 치과 치료를 해보셨는지요? 치아를 가는 고통에서도 느껴보셨으면


치아가 약해서 한번씩 치과에 가야 합니다. 신경이 예민해서 통증을 체질적으로 견디지를 못합니다. 드릴로 이를 가는 동안, 이렇게 고문을 당한다면 과연 견딜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에 불이 막 붙기 시작할 때 또 치과를 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번 치아 치료에서는 모든 통증을 십자가 고통을 느끼는 경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때는 의사가 뭐 그렇게 엄살이 많으냐고 늘 그랬었는데, 그때부터는 의사들에게 '참 잘 참으시네요'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5. (질문) 주님을 사랑하는 건지? (쉬/1306)


안녕하세요? 궁금한게 있어서요!

요즘들어 힘든 것이 많아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일상생활에서 아주 약간이지만 영안이라는 것이 조금 느껴집니다!(착각일수도 있음!!) 그래서 나름데로 미숙하지만 주님께 자주 기도 드리고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주님을 진정 사랑해서 주님을 위해서 이러는건지? 아님 제자신도 모르게 입술로만 "주님 주님"하며 주님을 제가 복받을 라고 간사하게 이러는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주님을 제가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답변) 주님께 받아서 혜택을 본 것이 많아야, 그다음 단계로 신앙이 자랍니다.


1.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큰 복이고 큰 자랑입니다.


믿으려 한다고 믿어질 일입니까? 믿어지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눈을 감고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감격스러울 일입니다.


 


2.우선 신앙이 어리면, 주님을 상대로 여러가지 필요한 것을 챙겨야 합니다.


젖먹이가 젖달라고 울어대는 것은 엄마를 통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엄마는 즐겁습니다. 만일 배가 고파도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부모 얼굴은 하얗게 질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생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20세가 되어서도 30세가 되어서도 언제나 부모 덕에 놀고 먹으려 한다면 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신앙을 상대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고 하나님으로 덕을 보고 살아보라고 자꾸 재촉을 하십니다. 절에 가지 말고 돌에 비비지 말고 주님으로만 해결하라고 오히려 주님이 타이릅니다. 조금 자라고 나면,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부르는지, 주님을 불러서 네 속에 얻어먹을 것이 있어 그러는지, 그 중심을 한번 돌아보라고 숙제를 주십니다.


 


3.주님으로 실컷 덕을 보시는 것이 첫 순서입니다. 그다음 순서는 양심껏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의 신앙 수준, 나의 신앙 경력, 나의 신앙 지식, 나의 지난 과거를 생각할 때 나는 아직까지 주님께 구하여 얻어서 좋아할 때인지,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내 안에 그리스도만 존귀해지도록 나는 종노릇만 해야 할 때인지? 각자가 양심껏 조금 생각해보면 알 것입니다.


 




 


6. (질문) 세상 유혹을 이기는 법과 죄를 피하는 법은 685


[세상의 유혹를 대적하고 이기는 방법, 죄에 머무르지 않는 방법, 죄를 피하는 방법]


---무척 포괄적인 질문이지만, 방법 혹은 비법을 간단하게 알려 주셨으면...


"죄 아니면 의이며 중간은 없다"라는 말씀에 따라 살자면 많은 연습과 단련이 필요할 것 같고, 항상 두려워하며 긴장 속에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비법도 짧게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죄를 이기려는 노력은 늘 죄의 접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주 다른 차원을 권합니다.


1.항상 생활 속에 힘써야 할 가장 주력은 바로 '주님과 동행'입니다.


부모를 따라 나선 아이가 부모와 동행하는 노력은 자기 양손에 두분의 손을 하나씩 꼭 붙드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무례한 표현이지만- 자기 마음 안에 그분을 모셔놓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즉 우리 생각 속에 늘 하나님을 모셔놓고 사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 동행입니다. 세상 모든 종류의 유혹과 세상의 모든 죄를 이기는 방법이며 피하는 방법입니다.


 


2.자기 몸 자체가 강하면 모든 종류의 병을 다 이깁니다.


감기에는 습도와 온도, 콜레라는 모기, 출혈에는 압박붕대.... 이렇게 설명해 나가는 것도 전부 건강법입니다만 기술적 차원에서 필요한 하나의 지엽들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의 건강 상태입니다. 면역체계가 강하여 저항력이 있으면 그 종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병균들로 우글거리는 생활 속에서 마구 몸을 뒹굴어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3.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주님 동행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데서 살아야 합니다.


돈을 보고 탐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 솟구치는 명예욕을 이겨 보려고 속으로 혼자 갈등하며 투쟁하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해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듯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기도... 모든 것이 다 신앙의 노력이며 우리가 평생 쉬지 말아야 할 수고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을 늘 마음 속에 모시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식사하고, 주님과 함께 공부하고, 주님과 함께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속으로 속삭이면서 의논하면서 지도 받아 가면서.


 


4.선악과를 두고 우리에게 가장 환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뱀과 대화하면서 뱀을 이기려고 설쳐 봐야 안됩니다. 논리를 개발하고 자습을 더해 보고 자료를 찾아 보고 토론법을 배우고... 어떻게 힘을 써도 안됩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따먹고 싶은데도 참으려고 발부둥 치는 것은 이미 죄 속에 들어가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삼켜진 것입니다. 따먹지 않은 죄는 짓지 않았으나 따먹고 싶은 유혹의 죄에 삼켜져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따먹은 죄나 따먹고 싶은 유혹에 빠진 죄나 그 뒷줄은 각각 악령의 손 하나에 걸려 있습니다. 한 사람의 낚시꾼이 여러 낚시대와 낚시줄들을 쭉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동행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남편과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뱀이 들어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까지만 가지고 보아도 뱀과 동행이요 뱀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후 뱀과 주고 받은 대화, 그 대화 끝에 선악과를 따먹는 등의 과정들은 낚시 바늘을 입에 물고 난 뒤의 물고기가 주인의 입속에서 소화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5.주님 동행 이외의 모든 말씀들은, 주님 동행을 중심에 두고 나열된 말씀들입니다.


1계명은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과 나와의 위치 설정입니다.

2계명은 주님 동행이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 일일이 다 영향을 미치고 있음입니다.

3계명은 주님과 동행이 우주 만물 전 존재와 그들의 활동 전부의 중심에 있음을 말합니다.

4계명은 주님 동행에 있어 날 중에는 주일을 통해 바로 된다는 것입니다.

5계명은 모든 인간 관계가 주님을 통해 간접 간간접으로 연결되니 그 계통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10계명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말씀을 다 하나님과 동행을 중심에 놓고 풀어 맞출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면도 있지만 특히 죄와 세상과 악령을 이길 수 있는 면을 두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주님과 동행을 끊임없이 노력해 보시면 질문 마지막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비법이 될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설교 세계 전부를 주님과 동행이라는 빨래줄에 걸어놓으면 다 걸릴 것입니다. 빨래의 색깔과 크기와 위치는 다를지라도.


 




 


7. (질문) 주님과의 교제 2891


머리로만 주님을 아는게 아니라 주님과 교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어떤 것이에요?

어떡해야 되요?


지식적으로는 주님을 아주 쪼금쪼금 아는 것 같지만 실생활에서는 어떡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전부 허공 치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요.

기도도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고요.


 


(답변) 설교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천천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1.신앙생활의 최고 중심에 있는 것이 '주님 동행'입니다.


백목사님의 평생 설교와 가르침을 이제 질문하신 내용으로 요약한다면, '항상 주님과 동행하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으나 실제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주님과 동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무형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손을 잡거나 휴대폰을 항상 연결시키거나 또는 천주교인들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므로 마음을 통해 인격적인 동행에 나서야 합니다.


 


2.주님과 교제는 차분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 시작하셨으면


이곳에는 이미 '기도하는 자세'에 대하여 말씀드린 자료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예배당에서 하는 기도가 가장 대표적인 기도입니다만 실은 그 기도는 기도의 가장 외형입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 실제 마음 속으로 어떤 자세와 어떤 내면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것이 주님과 동행의 실제 모습입니다. 다음 '바로가기' 자료는 다른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지만, '기도의 내면' '기도의 실제 진행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기도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어떤 마음 자세로 기도하는가를 설명한 내용을 참고하셔서, 평소에 공부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 기도하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진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계속해서 동행하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3.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밤길을 가면서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것이 부모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의지하라고 주셨으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지하라고 해서 의지하는 것이지 하나님 없어도 부모님만 의지하면 든든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의지 하라고 해서 의지하지만, 여전히 그 부모님을 의지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 아니면 내 부모님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겉으로는 이런 저런 사람을 의지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진정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의지할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진정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 증거는 밤길을 혼자 걸어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신다고 마음으로는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겁이 나서 두렵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만 의지하는 것이지 실제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어려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어린 믿음을 자꾸 길러야 합니다. 처음에는 걸을 줄 몰랐으나 이제는 잘 걷는 것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막상 밤길을 걸을 때 두려워지면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부모님과 함께 가는 것보다 더 든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첫 신앙이라는 뜻이고 어린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어리면, 자꾸 마음 속으로 주님은 어떤 분인지, 얼마나 힘이 있는 분인지,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자꾸 주님을 정말로 믿으므로 주님을 실제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주님께 기댄다는 말입니다. 밤길에 나 혼자는 두려워도 주님을 의지하므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꼬마가 아버지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큰 아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아버지를 실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4.기도에 대하여는 앞에 자료를 참고하셨으면


이번 답변의 '2번' 내용에서 소개한 '바로가기' 자료에서 기도하는 자세를 한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설교록을 보시면 그 내용은 은혜가 될지라도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라는지가 애매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허공을 잡는 말만 계속된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에 일일이 개인의 사례를 가지고 쉽게 설명하면 좋겠지만 설교할 내용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마주치는 현실의 종류 전부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 시간 말씀은 좀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설교록을 읽으실 때는 항상 그 내용을 실제 생활에서 어떤 행동을 하라고 하는지를 연상해 보시면 성령께서 질문자 마음에 필요한 내용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8. (질문) 새해 실천 6027


이제 대망의 2006년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매년 새해에는 사람들마다 여러가지 계획들이 있겠지만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주는 구체적인 실천목표들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고,,,없으시다면... 이 홈을 찾는 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할 부분을 당부하신다면 무엇인지 소개해주시면 그렇게 실천하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주님동행!


'주님동행'


한 해가 되셨으면.


아직 불러 가지 않으시고

한번 더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새해 1년'을 주신다면

이번에는 꼭 주님을 마음 속에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이 한 가지 실천에 노력하고 성공하는 이 홈 교인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를 위해 산다고 했지만

되돌아 보니 나 혼자 덜렁덜렁 가고 있었고

주님은 도중에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고 우리는 그냥 앞만 보고 가고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살지 못한 때가 더 많았는데

그 원인을 되돌아 보니

주님과 동행하는 그 순간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재질문)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주님과 동행 너무나도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동행하기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계획과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신앙계획표 같은 것 말입니다.


 


(답변) 생각과 말씀실행이 주님 동행의 내용


1.'생각'으로 주님과 동행하셨으면


무형의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천주교인들처럼 예수님을 목걸이에 매달아 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손에 성경을 쥐고 다닌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생각이 항상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첫 순서입니다.

마치 결혼한 신랑이 직장을 가도 신부를 마음에 품고 있듯이

마치 신부가 혼자 집에 있어도 직장에 나간 신랑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듯이

생각으로 주님을 잊지 않는 것이 주님 동행의 내면입니다.


2.'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셨으면


속으로는 주님 생각하고 외부로는 말씀대로 나를 살게 해야

주님 동행이 됩니다.


신앙이 어린 분이면

주일 지키시고, 교회 예배 출석 잘하시고, 십계명만 지켜도 충분합니다.


이런 정도를 평소 잘 지키셨다면

주일을 지키되 어떻게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주님 더 기쁘하실지

예배를 참석하되 좀더 은혜를 잘 받기 위해 노력하시고

십계명 10가지만 만족하지 말고 그 깊은 속에 무엇을 말씀하는지 좀더 깊이 살펴


현재 자기 신앙수준에서 한발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정도의 실행을 하셨으면


3.신앙계획표


자기 통제가 잘 되지 않는 어린 신앙들에게는

성경읽기 기도 전도 등을 항목별로 나누어 한 해의 목표를 세우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장성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나태를 막기 위해 신앙목표 설정과 일과표는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계획표는 주님 동행을 돕는 외부 방편입니다.

나 스스로 주님과 동행하는 실상은, 주님을 생각으로 모시고 말씀을 지켜 살려는 노력에서 주님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9. (질문) 하나님이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 (쉬/2110)


목사님 하나님이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여?


 


(답변) 어떤 경우냐에 따라 다르지만


1.사람의 노력치고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는 심정

그 노력을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2.자신에 대하여서는


회개를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3.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드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차원에서 여러 면으로 말씀하고 계시므로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따져보면 다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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