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선의 기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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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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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5 00:00
: 主題;舊約의 肉體的 律法에서부터, 新約의 聖靈 引導로.
제목에서 이미 절기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신앙 자세를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분의 弟子되신 牧師님들에게 牧師님의 信仰 信條와 敎理인 建設 救援論을 完成 하시기를 바라고,
'백 영희 조직 신학'을 통해 이 노선의 구원론 삼분론 등에 대한 체계 구성을 발표했습니다. 책 제목에 '요약본'이라고 적은 것은 다른 분들에게 발전적 의견 제시와 토론을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 그 使命도 남기신 것으로 압니다. 그 徵表로는.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있는 것으로는,
: 바로 讚頌歌의 序論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부르고 있지만, 讚頌歌
: 冊을 牧師님의 信條에 마추어 編成하시고, 이를 暫定的으로 使用한다고 하였습니다.
: 앞으로 더 硏究 發展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서문에 '더 연구 발전'이라는 말을 적은 것은, 공회 내외에서 일어날 잡음을 막기 위해 그렇게 표시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표현 방법 중 하나입니다. 즉, 속으로는 자신이 있으나 겉으로는 외부 어린 사람이나 타 노선의 공연한 시비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완충 지대를 두는 방법입니다. 동시에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완전이 없고 항상 발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회의 근본 신앙 입장에서도 그 어떤 것이든 항상 가능성은 열어 둡니다. 만일 공회 찬송가를 편찬할 당시 수십 년간 수백 명의 학자를 동원해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준비를 거쳐서 발간했다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실 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 四大 福音書, 그리고 敎理書 等의 說敎의 主流루 이루고, 어떻게 보면, 大 小 先知書와,
: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말씀이 別로없으십니다. 將來 어떻게 될 것인가?
제 개인적으로는, 목회 21 년간 백 목사님 설교 자료를 보며 직접 설교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집회 재독을 하고 나면 재독에 대한 복습을 할 때는 집회 교재를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그래도 설교 내용은 거의 집회 것을 단순 반복하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설교록을 철저히 살피고 나면 설교록에 없는 성구 해석도 별로 막혀 본 기억이 없습니다. 또 설교록에 있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설교록 내용 그대로를 보거나 옮기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본 교회에서 재독은 거의 없습니다.
재독에 대한 가치를 적게 평가해서가 아니며, 제 머리 속에 설교록 이상을 접해 본 기억도 없으며,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록을 제대로 접해 본다면 설교록에 없는 모든 성구 해석에 막힘이 없고 또 오늘 우리에게 전개 되는 어떤 현실이든 그 설교록 내용에서 뻗어 나가 대해 보면 주저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평소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은 설교록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하고 퍼뜩 머리 속에 뭔가가 떠오르면 그 것이 샛별이며 성령의 감동이라고 단정한 다음에 자기 입에서 쏟아 내는 것은 전부가 교리며 은혜로운 설교라면서 이단설을 줄줄 흘려 내다가 탈선하는 사람을 부추길까 두려워 한 것입니다. 아이들 보는 데서 찬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 지금의 元老 牧師님들은, 오직 스승이신 白牧師님 하신 것 만을,說敎록안에서만)
: 하시지, 그 보다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으려 하십니다.
지금의 원로 목사님들의 '원로'는 경륜을 갖추고 역사를 품어 그 후배를 바른 길로 기르는 지혜의 원로가 아니고 양로원에 가야 할 치매 환자들이 따로 할 말이 없고 배운 도둑질 외에는 하지를 못해서 고장 난 레코드 돌아 가듯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노선의 설교록 자료는 그 가치가 너무 높아서 치매 환자들의 치매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굉장한 도인처럼 보이기 딱 쉽상인데, 과거 예배당 소송이나 서부 교회 시무 투표 건을 두고 보인 행동 등에서 그 분들은 설교록을 평생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음이 드러 났습니다.
공회의 출발은 '예우할 원로는 철저히 예우하지만, 옳고 바른 문제를 두고 인정과 사정에 얽매여 원로라는 이름에 신앙의 노선까지 희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의 원로가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손으로 치지 않고 피하는 것이 원로에 대한 대우였습니다. 사울이 원로였다 해서 다윗이 그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과 엘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것을 배웠으므로 장로님도 목사님들을 윗 자리에 놓고 보지 마시고, 저도 제 후배 교인이나 조사님들을 후배라는 생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라도 옳고 바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누구든지 전할 것이 있으면 전할 뿐입니다. 다만 인간적 예의라는 것은 죄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조심할 뿐입니다.
오늘 공회의 멸망은 교인들이 목회자라는 이름 앞에 무조건 다 맡기고 따라 간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공회의 공중 분해 현상은 젊은 교역자들이 원로 이름 앞에 인감 도장까지 맡기며 무조건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과거 고신을 썩게 만든 이유였기 때문에 우리는 '당회' '목사' '장로' '원로' 등 그 어떤 것에게도 그 사람이나 그 직책 자체에는 어떤 권위나 책임도 지우거나 맡기지 않습니다.
신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