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회고담 2 - 88년 탈퇴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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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창역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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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5 00:00
책으로 출간 된 자료여서 실명 그대로 공개합니다.
감정적인 비판보다 차분하게 여러 면으로 살펴 보면 좋겠습니다. 현재 공회의 90 % 이상 교회와 교인들은 1988년 산창교회의 탈퇴와 그 이후 걸어 간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은 좋으나 실명이 거론 되고 있으므로 '표현'에 조심하시고, 우리에 대해 비판한 자료가 원색 그대로 접하기 어려운데 모처럼 소중한 자료를 받게 되었으니 공회 노선을 다시 살피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 운영자 올림
개혁의 길은 험로였다
- 하명철 장로님
1983년 봄이었습니다. 꼭 20년이 지났습니다.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지면서 도청에 근무하던 저는 창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창워느이 몇 교회를 가 보았으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조현권 집사의 인도로 산창교회로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산창교회의 모습은 교회로 건축되어 있었으나 그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가정집 크기였고 그나마 2층은 예배실이었으나 1층은 사택과 전세 사는 정재우 집사님이 살고 잇었고 옥상에 천막을 치고 중고등부 예배실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하여서 예배시간이 걸었고 특히 설교시간이 길었습니다. 잘 알아 듣지 못했으나 목사님의 메시지는 강하고 힘이 있었고 감동적이고 놀라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주일 오후 예배를 밤에 드리는데 산창교회는 오후2시에 하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잘 적응이 되지 않아 오후예배는 많이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 성수에 대한 확신을 차차 배우게 도었고 성도들의 진지한 모습과 경건한 예배 모습에 끌리게 되었고 저도 차차로 산창교회 교인이 되어왔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목사님과 반사들과 구역장들이 열정과 집념으로 어린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모두가 나서서 심방을 다녔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산창교회로 모였고 많은 교회에서 산창교회 주일학교를 배우기 위하여서 견학을 오는 교회들이 매주 찾아오다시피 했습니다.
신축한 합성동 현재교회의 지하실은 70여 평 정도로 넓었으나 가득하게 차고 들어 갈 공간이 없었고 800 - 1000 명 이상까지 모였으며 1986년 4월 평균출석은 756명, 5월 평균 출석은 727명 6월 22일 주일은 전도주일로 1862명, 29일 주일에는 1229명이며 6월 평균 출석수는 119명, 7월 평균 출석수도 831명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학용품이나 먹을 것이나 선물을 계속 주었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말씀만 가르쳤고 이것을 아이들은 불평하면서도 우리교회로 찾아왔고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물어보면 거의 다 산창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산창교회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와 교사들의 열정을 볼 때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어린이 인도가 이렇게나 어려워 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파에 대해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교회는 다 같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나 부산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은 무두가 나를 보고 이상한 교회에 다닌다고 수근 거렸고 이 지역 교계에서도 냉대뿐만 아니라 이단교회라고 정죄도 하고 교회 주소록에도 없고 기독교 연합회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고 언제까지나 증어와 적대감으로 대하였습니다.
가입된 총공회를 탈퇴한 후에도 7년이나 지난 1995년에서야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 가입하게 되는 정도로 교파의 학대는 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서 우리교회 김철수 목사님이 수년간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2001년도에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고신 마산노회에서는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 회장 김철수 목사는 자신들과 신앙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회비도 안 내고 부활절 연합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하면서 마산 교도소 선교협의회에서도 제명하고 아직까지도 불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외부적 고립과 나쁜 위상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부활동에 더욱 노력하여 교도소 선교, 군 선교, YWCA, 경남기독교 연합회와 각종 연합사업과 구제 선교와 선교기관 돕기 등에 적극 동참하였고, CBS 경남방송 설립공동회장으로 물심양면 협력했고, 창원극동방송과 기독교 경남방송에 30분씩 매주 설교 방송도 하였습니다.
매월 두 번씩 마산 삼성병원 신우회 주관 환우예배에서 설교를 10여년간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연합 집회에서 기도나 사회나 설교 또는 축도 등으로 순서를 맡았으며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의 10여 명의 고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 기관과 우리는 교훈과 행사를 교류하고 있으며, 우리 찬양팀이 여러 기관에 가서 찬양도 하고 선교 활동도 적극참여를 하여 왔습니다. 이제 산창교회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목사님도 소속한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개혁) 총회에서 두 번 총회장으로 일하셨고 헌법위원으로 또한 신학교에 출강, 전국 초교파 목회연구회와 기도 동지회를 설립하여 총무와 회장으로 또한 부산 경남 기독교 합심회에서도 회장과 감사 등으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9행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1년에 1억원 정도를 ‘주는 교회’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1년에 지경 확장축적금으로 1억원 정도를 저축하여 주변 주택을 네 번째로 구입하여 주차장이나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신 마산 노회나 지역교회에서 경계하면서 비판하거나 냉대하는 것도 어쩌면 일면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산창교회가 이전에 속하여 있던 총공회(속칭 백파)는 세속을 멀리하고 전적으로 믿는 것은 좋으나 좁고 편협적인 사상과 강한 교파 관념 때문인 듯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과 인식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교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열린 뜻을 품은 김철수 목사님의 교훈과 행정과 공회에 대한 충성도를 공회에서 불신임했는지 경계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산창교회의 주일학교 분교로서 70여명이 모이는 장소였던 진해 허창민 김성은 부부의 가정을 충무동교회로 분립시켰습니다.
창원에는 창천교회를 세워서 이도범 집사 방남희 김현주 권찰 등 몇몇 사람이 옮겨가더니 1988년 2월에는 총공회에서 김철수 목사님을 산창교회를 떠나라는 결의를 했고 그 결과 1988년 2월 14일 주일에는 총공회냐 김철수 목사냐 한편을 선택하는 전교인 신임투표를 했고 물론 김철수 목사 지지율은 찬성 218명 반대 26명으로 90%정도였습니다.
총공회에서는 다른 목사를 지명, 파송하여 내적 투쟁을 시도했으나 총공회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을 가지고 떠나간 성도들도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하여 창천교회로 옮겨갔는데 그들은 대개는 오랜 경륜을 가진 신자들이었고 산창교회에 남은 사람은 숫자는 많아도 경륜이 얕거나 설교에 은혜를 잘 받는 순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떠나간 분들도 일생 아픔으로 그때를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뿐인 장로 이형 장로님도 가셨는데 그분은 사회적으로나 신앙과 인격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신임을 얻는 분이었고 장로로 피택된 정재우 집사와 권사로 피택된 전우남 집사와 초대 담임목사 이만기 목사님의 아들 이성복집사와 나를 산창교회로 인도한 조현권 집사 정철포 이충현 정상효 집사와 여집사로서는 음영희 임용자 차경림 백숙이 김태선 선귀엽 김순희 신선애 이도순 김금악 백정순 박경자 최효선 백복남 집사 등이었고 그 가족과 그들이 인도한 구역식구와 상당수의 권찰님들까지 포함하면 약 100명 정도가 떠나갔다고 짐작됩니다.
참으로 교파사상은 얼만 무서운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장년부 출석이 200명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그후 약 1-2년에 걸쳐서 친분과 친천관계 등으로 또다시 떠나간 제직은 배종필 진선희 정동열 진영순 배종기 안순정 진정선 집사 등이었습니다.
15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개인교류는 되고 있으나 교회적으로는 산창교회와 창천교회나 충무동교회는 우리와 멀기가 북한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어 전혀 교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길은 험난하고 연단의 길,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목사님과 산창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소속했던 교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도 소외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길이 참으면서 극복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교회의 중매와 목사님의 주례로 1984년 10월 27일에 산창교회 초창기 교인인 정춘지 집사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반사 일을 하였는데 잘 할 줄도 몰랐으나 어쨌건 열심히 했고 직장이 울산으로 옮겨진 86-88년 약 3년이란 기간에도 신혼이었으나 나 혼자 울산에 머물면서 주말부부로 주일에는 산창교회로 빠짐없이 와서 반사로서의 충성을 다 했던 것입니다.
나의 신앙 노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목사님의 교훈과 아내인 정춘지 집사의요동 없는 신앙 때문에 지금까지 복 된 교회에서 은혜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특히 IMF 직후 직원 퇴출 위기에서도 퇴출 각오를 하면서도 주일을 성수했고 1995년 6우러 25일에는 안수집사로 1996년 11월 26일에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로 임직받아 이제 내년도에는 47세로 수석 장로가 될 형편에 있습니다.
나의 아내 정춘지 집사는 김철수 목사님이 부임한 80년 그 당시 산창교회의 반사로서 설립 26주년에 대한 감회는 몇 권의 책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면서 특히 목사님의 믿음과 집념에 따른 노고와 착하고 고마운 성도들의 믿음의 응답과 교회에 대한 충성의 결과라고 감격하여 합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발판으로 산창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후손들의 믿음과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겠고 우리의 신앙성숙을 더욱 승화시켜갈 사명감과 믿음의 비전과 리더쉽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열매 맺는 건강한 교회’ (막4:28-19)란 표어처럼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 사랑 중에 축북 받는 가정,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 우리 산창교회가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44:22)처럼 영육간에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후 2003년 1월 31일 하명철 장로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